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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요구하는 게 아니다(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3-28 09:35
조회
321

오항녕 / 인권연대운영위원


 

“윤석열 정부의 망국 외교를 비판하는 범국민대회를 열고 윤 대통령의 사과와 박진 외교부장관 등의 파면을 요구했다.” (오마이뉴스, 2023년 3월 18일)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놓은 일본 방문 결과를 놓고 민심을 전하는 기사이다. 얼마 전에도 우리는 이태원 10.29 참사와 관련하여 장관 이상민이나 경찰청장 윤희근에게, 학교폭력과 관련된 정순신에게 사과를 요구하였다. 꽤 오래 전부터 나는 이런 사과 요구가 뭔가 초점이 어긋나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과는 잘못했다는 인정이다. 반성을 기초로 한다. 반성이란 돌이켜 되짚어본다는 말이다. 이를 참회, 회개라는 말로도 쓸 수 있을 것인데, 모두 후회[悔], 뉘우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① 참회는 번뇌를 태우고 천상에 태어나게 한다.(대승본생심지관경)


②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복음 15:10)


부처님은 참회가 번뇌를 태워 없애버린다고 했다. 사실 보통사람들에게 참회는 번뇌와 함께 찾아온다. 참회하려니 창피하고 부끄럽고 민망하다. 벼라별 핑계를 다 댄다. 그래서 공자님은 ‘소인배는 잘못을 저지르면 항상 변명을 한다’고 못박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변명을 찾아내려는 발버둥 자체가 곧 번뇌라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회개가 천상의 기쁨이라고 격려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그만큼 참회와 회개가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잘 반성하지도, 뉘우치지도 않는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어(Leon Festinger)의 조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을 바꾸기보다 행동에 따라 믿음을 조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수요집회 : 3.1절에 1588회째 열리고 있었다. 가해자의 사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워진다. 시간은 천사의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과를 요구하는 건 우리가 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는 인간임을 보여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리라. 물론 그 뜻을 알지는 모르지만.]


일단 행동을 합리화하면 이어서 다음 행동도 합리화한다. 지난 주 이찬수 운영위원의 칼럼 〈대통령(실)의 문장력〉에서 인용한 바,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중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합니다.”라는 말은 일본의 불법적 국권침탈을 불행의 근본 원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다.


이러한 가해자 논리의 내면화, 또는 노예 근성에 대한 성찰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므라이스를 먹든, 게이오 대학에서 조선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던 오카쿠라 텐신을 찬미하든, 술이 누가 제일 세냐고 묻든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술이 센가’ : 나는 여기서 ‘가해자에 대한 투항’을 읽는다. 이런 노예 근성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성찰할 수 있는 인격이 없을 때, 합리화는 계속되고 또 길어진다. 실제로 3.1절 기념사 5분, 그리고 저 투항을 합리화했던 국무회의 발언은 26분이나 걸렸다.]


이찬수 운영위원은 “여러 걸음 양보해, 외교적 편향성이나 자의적 자유 관념 같은 것은 정권의 속성에 가까우니 교정에 시간이 걸린다 쳐도, 문장만이라도 격조있고 간결하며 논리도 어느 정도 완결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안타까워했지만, 성찰이 결여된 문장이나 논리가 격조 있고 간결하며 완결적인 적은 없다. 내가 보기에 3.1절 기념사가 엉터리였던 것은 그것이 인지 부조화의 합리화, 즉 핑계와 억지의 기념사였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기운이 없을수록 반성하기 어렵다. 나이 먹어가며 ‘꼰대’가 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돌아볼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잘 늙기가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릇된 행동이나 말을 성찰하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그릇된 행동을 고친다. 페스팅어 조사에서 놓친 지점이 이것이다. 합리화도 정당화도 하지 않고 그 순간을 가만히 쳐다보는 인간들이 있다. 변명과 핑계의 번뇌를 떨치고 천상의 격려를 받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사과할 줄 안다. 그렇게 사과는 누가 요구해서 하는 게 아니라, 알아서 하는 것이다. 성찰에 동반된 성숙함이 보여주는 고상한 인격의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많은 분들에게 간곡히 제안한다. 사과를 요구하지 말자고. 사과할 사람 같았으면 진즉에 했을 거라고. 나아가 사과하라는 요구는 부질없으며,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사과를 요구할 시간에 준엄하게 야단을 치고, 날카롭게 비판하자고. 그리고 정작 사과 받을 사람들이 자괴감에 빠지거나 냉소하지 않도록 함께 손잡고 기운 내고 당당하게, 아름답게 살자고.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