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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의 문장력: ‘제104주년 3.1절 기념사’ 전문을 읽고(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3-22 10:17
조회
540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낭독했던 2023년 제104주년 3.1절 기념사를 읽으면서 걱정부터 앞섰다. 대통령의 국경일 기념사치고는 내용적 빈약, 논리적 비약, 개념적 모호, 외교적 편향 등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아래에 기념사 전문을 인용하면서 각 문단에 대한 필자의 소감과 평가를 고딕체로 표기해보았다.



출처 - 경향신문


(대통령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50만 재외동포와 독립유공자 여러분, 오늘 백네 번째 3.1절을 맞이했습니다. 먼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04년 전 3.1 만세운동은 기미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 헌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갈망했던 우리가 어떠한 세상을 염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 첫 번째 문단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인사말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에서부터 머리를 갸우뚱하게 된다. 작은 문제부터 이야기하면 이렇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합해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을 이어서 읽거나 듣는 국민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외에 ‘독립유공자’가 별도의 존재인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순국선열’은 단수로 쓰고 ‘애국지사들’은 복수로 쓴 것도 의아하다. 무슨 의도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진지하게 검증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는 독립을 ‘요청’하는 문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금 독립했다는, 결기에 찬 ‘선언’이다.(독립 ‘선언’은 1918년 1차대전 승전국인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그에 희망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시정부 헌장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제1조)며, 당시의 현재 시점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념사에서는 이 둘을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자유로운 민주국가’가 독립운동의 목적 혹은 미래적 염원인 것처럼만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시의 정황상 온전한 자유와 독립은 분명히 미래적 희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가 조국의 독립을 ‘요청’하기 보다는 이미 독립했다며 당찬 ‘선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결기를 부각시키는 문장이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기념사에서 본격적으로 염려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유’의 개념이다. 3.1운동 당시 ‘독립’과 ‘자유’는 사실상 같은 의미이기에 선언서에서도 ‘자유’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때의 자유는 외세, 즉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런데 기념사에서는 ‘3.1만세운동’이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3.1독립운동’이라는 특수성을 “자유로운 민주국가”라는 오늘의 언어와 쉽게 동일시하고 역사적 특수성을 추상화시킨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의도하는 자신만의 자유 개념으로 이어간다.


주지하다시피 대통령이 취임 이후 강조한 자유는 반사회주의적,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자유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관점은 이번 기념사에서도 대동소이해 보인다. 이것은 다음 문단에서 ‘세계적 복합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안보 위기’, ‘사회적 분절’, ‘양극화’,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 ‘경제’, ‘번영’ 등의 표현으로 이어가는 데서 추측할 수 있다. 104년 전 자유와 독립의 의미와 그 헌신적 정신을 좀 더 살리면서 진지하게 담아냈어야 했다.


“그로부터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세계적인 복합 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엄혹한 안보 상황,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합니다.”


→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문단이다.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다”는 말은 대한민국 밖에서 제3자의 눈으로 보면 일단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 국민이 자신의 주권을 자발적으로 반납하고 스스로 노예의 길로 간 것이 아닌 한, 국권을 빼앗아간 세력에 대한 비판 정신은 담아냈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기념사에는 ‘누구에게 국권을 빼앗겼나/누가 국권을 빼앗았나’, ‘누구에게 고통을 받았나/누가 고통을 주었나’의 문제를 아예 빼버렸다. 전 국민이 다 아는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의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의도가 다분히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하다”고는 말하지만, ‘과거의 어떤 불행이 어떻게 반복된다는 것인지’가 막연하다. 3.1절 기념사인 만큼, 과거의 불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국인 누구나 일본에 의한 피식민 경험을 떠올린다. 일본의 불법적 국권침탈이 불행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념사에서는 불행의 원인과 위기의 근원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한국 탓’인 것처럼 해설한다. ‘북핵 위협’ 탓에 불행이 올지 모른다며 안보의 문제를 북한 탓으로만 돌리는 경향도 보인다. ‘북핵 위협’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것으로 봐서는 북한의 대남 공격이 우려된다는 말로도 들린다.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가능성과는 별개로, 현 정권의 정치적 관심을 더 많이 반영하다보니 ‘3.1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다소 거리가 멀어진 것도 분명하다. (이상의 두 문제점은 일본, 미국과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다음 문단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또 다른 문제는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면서, 어떻게 타개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 단순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으면, 가령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적 통합을 위한 공정한 복지정책이 중요하다든지 하는 말로 이어갔어야 한다. 기념사에 그런 낱말이나 표현이 전혀 없다 보니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인지’, 읽고 들으면서 구체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공허하다.


“아울러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 당대에 독립을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그 칠흑같이 어두운 시절에,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조국이 어려울 때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특히,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말은 지당하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도 옳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삶을 기억하자면서,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느닷없이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라는 긍정적인 발언만 한다. 아무런 해설이나 연결점 없이 일본에 대한 최상의 평가로만 이어간다.


정말 오늘의 일본은 과연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가. 정말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편안하고 사이가 좋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수천만 한국인이 왜 지금까지도 일본을 의심하고 여전히 갈등하는가. 일본 정치인은 왜 한국을 무시하는 발언을 시시때때로 하는가. 일본 국민, 특히 유력 정치인들도 한국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런 이들도 있지만, 아닌 이들이 더 많다.


더욱이 “보편적 가치”란 무엇을 말하는지 와닿지 않는다. “칠흙같이 어두운 시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말과 “지금 일본은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라는 말 사이에 무언가 연결고리가 될만한 단어나 문장을 좀 넣었어야 했다. 느닷없이 일본에 대한 칭송이라니... 3.1절 기념식에서 행한 대통령의 문장치고 너무 허술하며, 정치외교적 관점과 속내를 더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세계적인 복합 위기”라면서 왜 일본, 미국과의 협력만을 중시하는지도 별 설득력이 없다. 6.25전쟁 기념일도 아닌, 3.1절 기념사에 왜 ‘북핵 위협’을 두 번이나 언급하는지도 잘 와닿지 않는다. 북핵 위협은 분명히 한반도 안보 위기의 주요 계기이다. 그런데 한반도 안보 위기는 단순히 한반도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인 “복합 위기”와 연결되어 있는 현상이다. 게다가 이 복합 위기의 배후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가슴 아픈 피식민 경험, ‘동아시아대분단체체’(이삼성 교수의 표현) 하에서 발생한 6.25전쟁, ‘분단체체’ 하에서의 남북 간 이념적 대립, 중국의 굴기와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충돌, 러시아의 부활 시도 등에서 비롯된, 세계적 신냉전의 기류와 같은 전 세계의 오랜 복합적 역사가 놓여있다. 세계 각국의 생존 전략, 강대국들의 영향력 확대 전략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이런 세계적 차원의 위기 상황에서 왜 일본 및 미국과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하는지 잘 납득되지 않는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사인 만큼 그 힌트를 얻을만한 낱말이라도 제시하는 성의라도 보였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북핵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상황에 따라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굳이 3.1절 기념사에서 꺼낼 말 같지는 않다. 더욱이 정말 “북핵” 문제를 풀려면 북한과 밀착되어 있는 중국, 러시아와도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다. ‘동아시아대분단체제’의 특정한 진영 가령 미·일 편에 서는 것만이 과연 “세계적인 복합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이라는 말인가. 미국이 한국의 국권 상실에 책임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더라도(미국은 1905년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했다), 국권을 되찾으려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린 선열들의 사진을 행사장에 걸어놓고는, 일본 및 미국과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사진 속 선열들은 어떻게 볼까. 착잡하다.


그리고 어디는 ‘선열’로 단수형으로 표기하고, 어디는 ‘선열들’로 복수형으로 표기하는 식의 일관성 없는 문장도 적지 않은 문제다. 물론 단수형으로 써도 독자들은 복수의 인물을 연상한다. 그런 점에서 의미전달에 별 문제는 없다. 그래도 단수로 쓰든 복수로 쓰든 통일했어야 한다. 적어도 대통령의 기념사라면 흠잡을 데 없는 문장이어야 한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동일 용어를 단수로 썼다가 복수로 썼다가 하면, 고민없고 성의없는 문장으로밖에 더 보이겠는가.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서 우리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 있는 기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우리 선열들의 그 정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 큰 틀에서 맞는 말이다. 그런데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은 어디를 말하는가. 우리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있는 기여를 해야 한다”는데, 이때의 “세계시민의 자유와 공동번영”은 말 그대로 “세계시민의 자유와 공동번영”인가, 아니면 특정 진영에 유리한 자유와 그들만의 번영인가. “세계시민”에 북한, 중국, 러시아 등의 나라도 포함되는가. ‘세계시민’이니 ‘공동번영’이니 하는 말을 썼다면 이어지는 내용도 정말 인류 보편의 가치와 관련된 문장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미 “한미일 3자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이미 콕 집어 말해버린 바람에, ‘세계시민’, ‘공동번영’과 같은 말은 한낱 입에 발린 수사나 공허한 구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속내는 다른 곳에 두고 그럴듯해 보이는 공수표 몇 개로 논리적 일관성 없이 포장만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나만의 오해이고 오독일까.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그 노력을 한시도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선열에게 제대로 보답하는 길입니다. 영광의 역사든, 부끄럽고 슬픈 역사든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지키고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기미독립선언의 정신을 계승해서 자유, 평화, 번영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 일단 첫 문장부터 손을 좀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결과였습니다.”는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습니다.”로 바꾸는 것이 더 좋다. 그래야 개념적으로 더 온전하고 말하려는 의도도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번영’은 믿음이라는 내적 태도의 직접 결과라기보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제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실)에서 나온 문장치고는 많이 어설프다.


이번 기념사에는 “보편적 가치”라는 말을 세 번이나 담고 있다. 앞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보편적 가치’란 전 인류가 옳다고 동의하고 공감하기에 가능한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공통의 가치를 의미한다. 정말 이런 의미에서 썼다면,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멈춰서는 안된다”는 당부는 진지하게 와닿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도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불분명하다. 어떤 자유를 의미하는지도 모호하다. 나의 자유가 타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는 제한적이고 상생적인 자유여야 한다. 독립운동도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 외세, 특히 일본에 대한 저항이었고, 남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지당하다. 당연히 타자의 자유를 침해한 데 대한 책임을 충분히 묻는 것도 당연한 요구이고 권리이다.


그런데 이번 3.1절 기념사에서 말하는 자유는 우리의 아픈 역사적 경험에 기반하면서도 국민과 인류에게 두루 통할 자유를 말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가 이룩한 번영이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노력과 믿음의 결과였다”며 “번영”을 주어로 내세운 것으로 봐서는 경제적 차원의 자유,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유, 더 좁히면 반사회주의적 자유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번영을 이끈 자유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부끄럽고 슬픈 역사”를 기억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나 정서와 거리감이 있는, 너무나 현실적인 언어이다. 게다가 “부끄럽고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행위와 우리의 역사를 그렇게 슬프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번영을 위한 자유’라는 말은 너무나 많은 역사와 정서를 생략해버리고 만다.


오늘까지도 꼬여있는 한일 관계는 쌍방이 균형감 있게 풀어야 한다. 3.1절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고 성찰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잊지 않도록 요청해야 하는 날이고, 쌍방 간 해결방안을 더 고민해서 제시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 쌍방적 균형감 없이, 세계적 복합 위기 및 북핵 위기에 일본과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일방적 제안은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과의 갈등을 다시 촉발시키고, 해묵은 남남갈등을 풀지 못할뿐더러, 일본과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만드는 발언들이다. 무엇보다 한·미·일 협력에 비례해 북·중·러와 척을 지는 방식은 한·미·일 협력의 효과를 전혀 내지 못한다.


이번 기념사는 3.1절이라는 슬프고도 자랑스러운 역사적 정신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일국의 대통령(실)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개념적으로 불명료하고 의미상 비약이 크며 전체적으로 안일한 문장들이 많다. 여러 걸음 양보해, 외교적 편향성이나 자의적 자유 관념 같은 것은 정권의 속성에 가까우니 교정에 시간이 걸린다 쳐도, 문장만이라도 격조있고 간결하며 논리도 어느 정도 완결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 국민이 보고 들으며 국내외적 영향력도 큰 기념사 아닌가.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