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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정치 정치혐오(임아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3-14 11:22
조회
312

임아연 / 인권연대 운영위원



여·야의 정치 공방이 ‘현수막 난타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내 주요 도로뿐만 아니라 작은 읍·면·동 길목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상대 정당을 비난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경쟁적으로 게시하면서 시민들은 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넘어 혐오감으로 느끼고 있다.



출처 - 세계일보


이른바 ‘50억 클럽’ 사건으로 기소된 곽상도 전 국회의원이 지난달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 더불어민주당 당진지역위원회에서는 “최저임금 노동자 200년치 월급 50억, 아버지 저도 퇴직금 50억 받고 싶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지역 곳곳에 게첨했다. 이에 반격하듯 국민의힘에서는 “아들아, 부당이득 탐나거든 대장동을 기억해라!”, “민주당이 정쟁에 몰두할 때, 국민의힘은 민생에 집중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지역 곳곳에 내걸었다.



출처 - 세계일보


지정게시대가 아닌 곳에 정치 현수막이 내걸리고 있는 것은 지난해 말 개정된 옥외광고물법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자체장의 허가를 받아 지정게시대에만 현수막을 게첨할 수 있었으나, 지난해 12월 정당 현수막에 대해서는 규제를 없앤 옥외광고물법이 시행되면서 교차로 등 어느 곳에나 현수막을 달 수 있게 됐다. 기존 옥외광고물법에는 ‘광고물 등을 표시하거나 설치하려는 자는 허가를 받거나 신고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었으나, 통상적인 정당활동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정당 현수막은 예외로 한 것이다. 여기에 정치 공방이 더해지면서 전국적으로 거리 곳곳에 정당 현수막이 난립하고, 상대 당에 대한 비난과 막말이 난무하고 있다.



정당 현수막 난립으로 인해 시민들의 민원도 빗발쳤다. 당진시에서는 법에서 허용 가능한 정치 현수막일지라도 상대 정당에 대한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경우 현수막을 제거하겠다는 입장이다. 당진시는 “내부 검토를 통해 정책·현안 홍보가 아닌 비방하는 내용이 담긴 현수막에 대해서는 지난 20일부터 철거하고 있다”며 “각 정당과 현수막을 제작하는 옥외광고물협회 측에도 비방이 담긴 현수막은 게시하지 않도록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기사가 나간 뒤 현수막 대부분이 철거됐으나, 또다시 ‘현수막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 이전보다 비방의 수위가 조금 낮아진 듯하나,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다.



비단 당진만의 일은 아니다. 전국 어디를 가도 곳곳에 정당 이름으로 내건 현수막이 게시돼 있고,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이쯤 되면 여·야 할 것 없이 중앙당 차원에서 문구를 정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상대 정당에 대한 비난 일색으로 각 정당은 ‘혐오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정당의 정책과 입장을 홍보하기 위해 법을 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현수막 난타전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혐오 표현으로 가득한 현수막을 보면서 시민들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특정 정당의 주장에 대해 호응하기보다, 외려 ‘정치혐오’에 빠질 지경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정치에 넌더리를 내는 시민들은 거리를 다닐 때마다 보이는 현수막에 더욱 지쳐갈 뿐이다. 무분별한 현수막으로 인한 환경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법 개정의 취지처럼 제대로 된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모든 ‘혐오’가 그러하지만, 정치혐오 또한 사회 발전을 막는 아주 고약한 레토릭이다. 시민들이 정치에 정나미 떨어지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기본인 건전한 토론을 막고,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오래된 수법이다. 정치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선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고, 아무런 참여도 하지 않는 방관자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지배층이 가장 통치하기 쉬운 민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었다.



출처 - 경향신문


지난 1월 설 명절 당시 아주 특이한 장면을 보았다. 과천시의회 박주리(더불어민주당)·황선희(국민의힘) 의원 게시한 현수막이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처음 정치에 입문한 두 시의원은 하나의 현수막에 두 사람의 사진과 이름, 소속 정당을 함께 넣고 “과천시민을 위해 한마음으로 뛰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전해 SNS를 통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하나의 현수막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혐오정치 일색인 현실에서 약간의 위로 같은 것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비방 일색의 현수막보다 사회 현안을 두고 벌였던 치열한 정치토론이 그립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국 부국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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