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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서진 독일의 교회 첨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임아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9-13 09:26
조회
270

임아연 / 인권연대 운영위원


 

#1. 베를린


몇 해 전 독일에 갔을 때 일이다. 공항이 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고속열차를 타고 가다 베를린 중앙역에 거의 다 왔을 때 창밖 어느 교회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꽤 큰 교회였는데, 높이 솟아 있어야 할 교회 첨탑이 다 부서진 채로 방치돼 있던 것이다.



출처 - 호텔스컴바인


나중에 알고 보니 1890년대에 지어진 이 교회의 이름은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파괴됐다고 한다. 교회는 폭격 맞은 그 상태 그대로 80년 동안 보존돼왔으며, 교회 내부는 기념관으로 사용 중이다. (예배는 나중에 새로 지은 신관에서 이뤄짐)


교회는 독일 최대의 번화가이자 쇼핑거리인 쿠담거리 시작점에 위치해 있다. 베를린 시민 뿐만 아니라 베를린에 여행 온 사람들이 꼭 한 번쯤 들르는 곳이다. 명품을 비롯해 각종 브랜드숍과 식당, 호텔 등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이 이런 곳에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놓은 게 무척 놀라웠다. 특히 이 교회를 복원할지, 철거할지, 아니면 이대로 보존할지 지역주민들이 오랜 시간 동안 토론하고 결정했다는 점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결정과 같이, 그토록 참혹한 전쟁이 다시는 있어선 안된다는 것을 도심 한복판에 놓인 이 교회를 보면서 매일 생각할 것이다.


#.2 반제


베를린 근교에 반제라는 큰 호수가 있다. 바다가 거의 없는 독일에서 베를린 사람들이 해수욕을 하거나 요트 등 수상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출처 - 이투데이


이 호수 근처에 대리석으로 만든 저택이 있는데, 1942년 이곳에서 독일 나치 차관급 인사 15명이 모여 회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장급 인사의 지시를 받는 제국보안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재한 이 회의의 주요 안건은 ‘유대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다. 이들이 합의한 최종 해결책은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등 폴란드로 실어 와서 모조리 말살하는 것이었다. 홀로코스트를 정권 차원에서 공식화한 회의다.


회의록 작성자는 그 유명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그가 작성한 의사록에 따르면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이송’할 것이며 건설 공사에 투입하여 죽을 때까지 강제노동을 시키거나 ‘적절히 처리’하여 새로운 유대인의 번식을 막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곳에서 이뤄진 회동은 훗날 미국 조사단이 독일 외무부에서 회의록 사본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나치가 전쟁 중 저지른 집단학살범죄의 가장 분명한 증거로 남았다.


반제 호숫가 근처의 아름다운 이 별장은 현재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15명의 나치 수뇌부와, 이들의 잔악무도한 논의 내용을 전시하는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 프라이부르크


이번에 다시 방문한 독일에서 ‘슈톨퍼스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검은숲(흑림)과 친환경·에너지자립으로 유명한 프라이부르크 구도심 바닥에는 박석이 깔려 있다. 그 길에 이따금씩 1cm 정도 더 튀어나온 동판으로 만든 ‘걸림돌’이 있는데, 이게 바로 슈톨퍼스타인이다. 여기에는 나치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지역, 생년월일, 그리고 어느 수용소로 끌려가 언제 사망했는지 등의 정보가 새겨져 있다.


출처 - 브런치


길을 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거나 불편을 느끼면서 땅을 살피게 되고, 그럴 때 이 슈톨퍼스타인을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일상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조상들이 벌였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그렇게 매일 상기시키고,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되새긴다. 보행에 있어서 불편은 물론 역사적 불편까지도, 일상에 불편이 스며 있고, 독일인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4 그리고 대한민국


이번에 독일에 있는 동안 접한 한국 뉴스 대부분이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문제였다. 독일인들이 어떻게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지 독일 곳곳에서 느끼면서, 대한민국의 모습이 자꾸만 겹쳤다.


출처 - 이투데이


나는 독일이 가진 독일의 저력이 바로 이러한 역사 인식에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상적으로 계속 상기하면서 기억하지 않으면 똑같은 짓을 반복할 뿐이다. 일제강점기도, 6.25전쟁도, 쿠데타와 독재도, 그리고 세월호와 이태원참사까지…. 부끄러운 역사의 굴레를 반복하며 진일보하지 못한다면 지금 세계가 주목하는 ‘K콘텐츠’도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다.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게 설 수 있는 기반은 결국 ‘뿌리’에 있다. 보존할 것인가, 잊고 묻고 덮어버릴 것인가. 지금의 선택에 미래가 있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국 부국장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