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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의 소리 2023*(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9-05 11:34
조회
277

<주석의 소리 2023>


-삼천리 금수강산 만세 여기는 환상(幻想)의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가 보내는 주석(主席)의 소리입니다주석 각하의 담화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출처 - 서울신문


후진국에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정부입니다. 정부에 대해서는 우리는 헌법에 씌어져 있는 것에 좇아 권한을 행사하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헌법에, 라고, 말할 때, 한국 사람이며 모두 어떤 감회를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헌법에 대해서 그 힘을 번번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괴롭고 환상적인 경험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밖으로 국제 사회에서 민족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의무입니다. 그 독립을 유지하고 보다 나은 국제적 지위를 얻기 위하여 국민을 조직하고 지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세기 전에 가장 악질의 정부에 의하여 민족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했던 시절을 적 치하에서 신음해야 하는 처지에 굴러떨어졌었습니다. 자기 국민을 적에게 파는 정부, 그것이 최악의 정부입니다. 그것은 최악의 전제 정치보다도 나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개화기에 있어서 정부가 취한 이 치매적(痴呆的)인 반민족 행위에 대하여 좀더 주의와 분석이 여러 사람에 의해서 가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한 가지 문제점은 저 반역자들의 의심할 수 없는 도덕적 저열성과 악의는 논외로 치고, 그들이 언중유골 식으로 풍기고 있는 어떤 변명에 대해서입니다. 즉, 그들은 마치 주권의 희생하에서 개화를 하는 것이 불가피했던 것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허무맹랑한 것이었습니다. 객관적이란, 일본제국주의는 우리를 개화시키기 위하여 그토록 안달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수탈하기 위하여 침략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주관적으로는 반역자들의 변명은 근거가 없습니다. 정권의 담당자로서 주관적 의도를 정당화하는 길은 국민의 뜻을 얼마나 반영했는가 하는 척도 말고는 아무 정당성도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그들의 반역을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습니다.


자명한 사실에 대해서 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사회변혁이 급격하게 진행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그 사회변혁의 진보성이라는 것과 민족 국가의 주권이라는 것이 마치 서로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이거나 한 듯이 착각하고, 그 착각을 이기심의 위장으로 삼는 부류가 흔히 나타난다는 경험을 상기시키기 위해섭니다. (중략)


정부는 그 권력을 헌법에 규정한 대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근대 유럽 국민이 막강한 인습과 권력의 힘에 항거하여 정치 권력을 손에 쥔 역사적 경험은 아마 우리들의 정서적 상상력을 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인간인 이상, 그와 완전히 동일한 역사적 세부까지를 추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그와 동일한 형태의 생명의 경험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것으로만 보더라도 3·1운동과 4·19에서 나타난 국민의 주권 의사입니다.


정부는 자신이 행사하고 있는 권력이 국민의 주권 행사의 표현인 헌법에서 나온 것임을 매일같이 명심하여야 합니다.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국민의 주도권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것은 오늘의 세계에서 민족 국가가 대외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공인된 원리에 구속시키고 있는 정부가 가장 강한 정부이며, 그 구속을 벗어나 있는 정부가 가장 약한 정부입니다. 공산주의에 대해 가장 강한 정부는 민주적 정부이며, 가장 저항력이 약한 정부는 반민주적 정부입니다.


우리들의 상황은 어떤 정권의 민주성의 정도가 단지 내정에서의 민주주의의 기복을 나타낸다는 태평한 세월이 아닙니다. 그것은 밖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방위력의 궁극적인 기초입니다. 민주주의는 민족 국가의 국방력의 안받침입니다. 이 안받침을 흔드는 자는 국방력을 흔드는 자이며 국방력을 흔드는 자는 반역자입니다. 정부 권력의 민주적 행사 여부의 표준은 정부가 자기 권력을 그 수임자인 국민에게 항상 개방하는 것, 권력의 원천에 의한 계속적인 추인의 기회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쓰라린 경험과 앞으로도 계속될 난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정부는 국민에 의한 비판의 온갖 기회를 스스로 개방하여야 하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 정권 자체의 득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권력 행사에 대한 국민 참여의 최대 기회가 선거입니다. 민주주의란 선거이다, 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자유로운 선거의 보장, 논리적으로는 정부의 모든 기능은 이 한마디에 그칩니다. 현재 정부가 수행하는 모든 행정 기능은 정부 외의 사회 집단에 이양할 수도 있지만, 선거의 관리만은 사영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주 국가의 가장 중대한 공적 행위입니다. 사회의 모든 성원이 자유로운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공정한 관리 기관이 정부이며, 우리는 아직도 이 점에서 찬양할 만한 도덕적 자제력을 가진 정부를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여부가 민족 국가의 독립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버릴 수 없는 꿈이며 양보할 수 없는 요구라고 밝히고 싶습니다.


출처 - KBS뉴스


*덧붙이는 말: <주석의 소리 2023>은 최인훈 선생의 소설 <주석의 소리>의 일부분을 옮긴 것입니다. 최인훈 선생은 <주석의 소리>(1968년 발표)에서 한국의 역사에 실존했다가 사라져버린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라는 역사적 타자를 불러들여 한국의 민주주의와 건강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방책을 설파합니다. 그리고 그 방책의 주체를 정부, 기업인, 지식인, 국민으로 구분하고, 저마다 수행해야 할 바람직한 행위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 글은 그 중에서 정부에 대해 논한 부분을 옮긴 것으로(단 강조는 인용자가 한 것인데, 그게 <주석의 소리>의 논지를 훼손했다면 책임을 질 것이고),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친일 · 사대 · 매판으로 치닫는 윤석열 정부의 작태가 얼마나 역사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비판적이면서도 상식적인 준거가 되리라는 기대에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