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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반공, 겨우 친일(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9-19 10:17
조회
431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언어는 의사전달 수단이다. 한편에서는 의사를 전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의사 밖의 세계를 은폐시킨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들은 가려진다.


하나에 더 집중하려 과장을 하기도 한다. 긍정적으로 전달하려 ‘과대평가’를 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전달하려 ‘과소평가’를 하기도 한다. 적절히 균형적으로 전달해야 옳겠지만, 그런 ‘적절함’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고 파급력도 떨어진다고 여긴다. 그래서 과대 혹은 과소 포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실상은 과장된 표현만큼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서도, 상대방도 과대 포장된 언어를 이어받으며 과장법을 구사하곤 한다. 과장적 전달이 계속되고 중첩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과 관점이 형성된다. 그 개념과 관점이 기존의 대상을 재형성 혹은 재구성한다. 종교적 개조들이 신화화되는 것도 비슷한 구조를 한다. 그렇게 관점이 대상을 만드는 경향이 생긴다.


문제는 그 과정에 실상이 왜곡된다는 데 있다. 실상은 과장되기 이전과 ‘불연속적 연속’ 혹은 ‘연속적 불연속’의 관계에 놓인다. 어느 정도 전달된다는 점에서는 연속적이지만, 과장이 중첩되었다는 점에서는 불연속적이다. 연속성보다 불연속성이 커지면서 갈등도 커진다.



출처 – 서울경제


과장된 표현들 속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자 할 때 문제가 생긴다. 가령 남과 북의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만나 정치적 이념 없이 개인적으로 그냥 사람 사는 얘기를 하면 잘 통한다. 옆 동네에 사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과도한 관점이 실상처럼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개인 간 편안하고 솔직한 발언들이 뜻밖의 파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북쪽 사람들 괜찮더라~’, ‘모두 공평하게 사는 공산주의라면 좋지~’라는 식의 편안한 발언은 국가보안법과 같은 이현령비현령의 법을 자극하거나, 그것이 언론을 타고 확대되는 정도에 따라 대단한 위법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상대에 대한 지원이 이적행위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뇌물로 둔갑하기도 한다. 개인 간에는 ‘점선’(소통)이었던 경계가 집단과 국가로 가면 ‘실선’(대립)으로 바뀌면서 극단적 대립과 폭력적 언어가 현실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중앙신문


국회의 경우도 비슷하다. ‘국민의힘’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개인적으로 만나면 서로 인사도 하고 대화나 교제도 한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당원의 신분으로 말할 때는 그런 원수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막말을 해댄다. 특히 카메라가 앞에 있으면 유권자에게 더 돋보일만한 과장된 발언을 하곤 한다. 같은 당내 개별 의원들의 의견은 다양할 수 있지만, 당 전체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당의 경계 안에 있는 목소리들이 통일되어 있다는 듯이 말한다. 자신의 말이 기존의 진영의 상황을 대변하지 못하면, 당 대표나 유권자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기존 진영과는 차별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존 진영을 비하하기도 한다. 유권자의 표를 얻으려 가능하면 ‘쎈’ 소리를 한다.


이때 어느 한 진영에서 더 과장하며 더 쎈 ‘깃발’을 들면 다른 이들은 그 깃발의 표현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낸다. 그 ‘뾰족한’ 목소리를 중심으로 서로 뭉친다. 느닷없이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입당 이력을 비판하면서 육사 교정에는 안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이벤트성 주장을 펼친다. 속내는 ‘공산’이라는 언어 지우기, 반공적 정체성을 이어온 집단의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이고, 나아가 홍범도의 유해 봉환을 추진하는 등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과도 일부 소통하려 했던 전 정부 지우기 등등에 있다. 여기에 여타 반공주의 인사들이 목소리를 보태면서 느닷없이 반공을 국시처럼 내세우며 편가르기를 일상화한다. 전 세계에 실질적 공산주의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스러운데도 그 ‘뾰족한’ 목소리로 실상을 왜곡한다. 그럴수록 사회는 왜곡에 휘둘리며 더 양극화한다. 정치적 의도와 속내는 가려지고, 다양한 목소리는커녕, 폭력적 언어들이 부상하며 대립한다. 충성도 높은 개인은 집단의 목소리를 자기화하며, 더 공격적으로 갈고 닦는데 기여한다. 물론 상대방도 그에 대응해 더 뾰족하게 비판한다. 그렇게 양 진영은 더 대립하고, 더 적대시하며 진영논리도 더 강화된다. 무조건 보수정당 지지층과 무조건 진보정당 지지층으로 나뉘는 것도 개인의 정치적 표현을 그 뾰족한 담론 중심으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경쟁적 발언들이 고조되면서 다양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구조 자체는 이른바 보수 진영에서나 진보 진영에서나 비슷하다. 문제는 그 뾰족함의 출처, 지향,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즉 자신의 이익에 있는지, 아니면 가능한 생명 전체를 살리는 데 있는지에 있다.



출처 - 노컷뉴스


한반도의 고질적인 대립 논리, 특히 반공주의를 둘러싼 뾰족한 목소리, 특히 파괴적인 언사의 출처를 찾아 올라가면 6.25전쟁을 만난다. 다시 외세에 의한 분단을 만나고, 분단의 책임자인 미국, 소련을 만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배자 일본과 만난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일본의 반공주의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와 전쟁한 일본이 러시아에서 발원한 공산주의를 적대시하자,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연시하던 일부 한국인들도 덩달아 공산주의 혹은 소련을 싫어했다. 일본의 지배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타협하거나 당연시하던 이들은 중국도 배척했다. 공산당이 장악했다는 이유에서다. 일제하에서도 특별한 불편을 경험하지 않았거나 도리어 일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익까지 챙겼던 이들과 그 후예는 소련의 공산주의에 영향받은 김일성을 일본보다 더 싫어한다. 일본의 폭력적 역사는 도외시하거나 슬쩍 감추려 한다. 대신 일본의 이른 근대화를 칭송하며 한국에 끼친 긍정성을 주로 부각시키려 한다. 일본이 더 큰 현실이었고 내심 그에 타협해온 역사를 정당화해야겠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산주의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보수 한국인의 관념 속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실상이다. 미군 덕에 공산당의 남침을 막을 수 있었다며 미국을 치켜세우면서도, 다른 참전국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전쟁에서 한국 편에 섰던 16개 참전국을 알지도 못하고 두루 좋아하지도 않는다. 의료 지원을 한 국가를 포함하면 25개국이나 되는 나라의 이름은 더욱이나 모른다. 그저 미국뿐이었던 듯 여긴다. 영국과 프랑스 정도는 알까? 필리핀,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남아공 등도 한국을 도와 전투병을 보냈다. 그런데 한국인이 필리핀이나 에티오피아에 고마워했던 적이 있던가. 한국보다 열악하다는 이유로 도리어 무시해오지 않았던가. 이른바 보수는 현실이라는 이유로 일본이나 미국이라는 권력을 긍정하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


마찬가지로 북한을 거부하면서도 전쟁 중에 북한을 도와 참전한 나라를 전부 싫어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중국이 대규모로 참전했고, 소련도 북한에 물자를 지원했다.(비공식적으로는 전투병도 파병했다.) 독일(동독),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이 북한에 의료 지원을 했고, 몽골, 인도 등이 물자 지원을 했다. 그런데 한국의 반공주의자는 오로지 북한과 중국 그리고 소련의 후예인 러시아만 적대시해왔다. 다른 국가들은 자유주의로 전향했다는 것은 온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현실을 관리하며 당면한 힘에만 관심을 두어왔기 때문이다. 몽골, 인도 등에 대한 정치적 관심을 두어본 적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한 놈만 팬다’고 하듯이, 특정국을 적대시하며 정체성을 견지해온 수십 년의 습관이 계속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수’는 현실을 유지하며 관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주로 현재를 보며 표층을 관리한다.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기보다는 당면한 현실을 관리해 자신의 이익으로 전환시키는 데 관심을 둔다. 그런데 보호하고 지킨다는, 이른바 ‘보(保)·수(守)’의 결과는 어땠나. 큰 힘에 편승하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라던 근시안적 판단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결국 국권까지 내어주지 않았던가.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1910년에 단박에 빼앗은 것이 아니다. 짧게만 거슬러 올라가도 ‘강화도 조약’(1876년) 이후부터 일본은 조선에 의도적으로 진출해왔고, 많은 조선인들이 이제는 일본의 힘이 우리의 현실이라며 끄덕이게 된 누적의 결과다.



출처 – 박종현 네이버블로그


미래를 보며 심층을 구현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진보’의 길이라면, 보수와 진보는 분명히 같이 가야 할 가치들이다. 역사의 심층과 미래, 그리고 인류와 생명 전체를 두루 상상하지 않는 현재주의, 당면한 힘에의 의존은 지구상의 더 큰 힘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친일’과 ‘친미’라는 편향을 넘어,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을 넘어, 남북, 한중, 한러 등으로 다변화해가야 한다. 누구나 그렇지만, 무릇 정치의 길에 나선 이라면 모두의 생명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최초의 건국 이념은 ‘홍익인간’이다. 생명 전체를 ‘널리(弘)·이롭게(益)’ 하는 자세가 긴요하다. 그것이 진보라면, 우리는 홍익적 진보의 길에 나서야 한다. 언제까지 고작 반공만 내세우고 겨우 친일에 머물 것인가.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