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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말에서 위로를 구함(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11-14 10:33
조회
410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생, 뭐 별거 있냐!”라고 말하는 이들을 가끔 본다. 남의 인생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조차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그들이 보기에, “도대체 인생이란 게 뭔가?”라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고 따지려는 사람은 ‘별난 인간’이다. 그러나 역으로 ‘별난 인간’의 입장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인생이야말로 허망한 인생이고,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삶은 (현상적으로는 살아도) 참다운 삶이 아니라고 생각할 법하다. 삶에 의미가 없다면, 나날의 삶은 그저 세월 보내기에 불과한 게 될 테니까.


출처: Raiyan Foundation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만 ‘세월이 역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를 찾아보려는 의식이 먼저 있어야 실제로 참되고 바람직한 인생이 가능하다고 보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삶의 의미를 묻고, 그것을 알고(知) 싶다는 의식이 없다면, <참다운 삶>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 대표적 철학자가 헤겔(G. W. F. Hegel, 1770~1831)이다. 그는 한 개인의 이력(履歷)만이 아니라 세계의 내력(來歷)에 대해서도, 그것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의식이 선행되어야 역사의 진면목(眞面目)을 볼 수 있다고-“세계사 자체를 고찰(의식)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세계사가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출처: INDEPENDENT


   삶 그 자체가 개인에게 자신의 의미를 말해주거나 보여주지 않듯이, 역사적 사건들도 인간에게 역사의 의미나 목적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생각이 먼저 있어야만 역사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다. 만일, 역사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역사를 그저 피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아무런 인과관계나 필연성도 없는, 그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잡다한 사건들의 진열장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표피적이고 현상적인 것 속에 감춰져 있는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피상적 관찰이 아니라 근본적 고찰을 한다면, 역사의 참된 모습과 의미를 볼 수 있다. 헤겔은 현상들에서 본질을 찾아내는 데 필요한 안목(눈)을 “사유적 고찰”이라고 불렀다.


   사유적 고찰을 통해 현상들 속에서 본질을 찾아낸다고? 비유를 써서 설명하자면, 헤겔에게 세계의 역사란 심오한 사상이 담긴 일종의 거대한 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책에는 숱한 문장들이 있고, 거기에 저자가 피력하고자 하는 핵심 논지와 집필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데, 저자의 논지가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책도 있다. (물론 명시되어 있지만 독자가 읽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뛰어난’ 독자라면 독서를 하면서 쉬 드러나 있지 않은 저자의 의도와 논지를 찾아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도 수많은 구체적, 경험적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는 곧바로 눈에 띄지 않는 어떤 의도와 목적이 숨겨져 있다. 그 숨어있는 것들을 파악할 때, 비로소 역사의 본래 모습을 알 수 있다.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현실 세계를, 정신적이고 비가시적인 이념이 자기를 표현하면서 자신의 의도(목적)와 본질을 실현해 나간 산물로 파악하는 태도가 소위 ‘관념론’이다. 정신이 일차적이고, 물질은 정신으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것으로, 물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 근거가 되는 정신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에 접근하는 헤겔의 기본적 태도다. 헤겔은 정신이 역사를 규정한다는 주장이 자의적이고 주관적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고찰한 사유의 산물로써, 역사적 사실들에 의해서, 또 그것으로부터 능히 논증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대학에서 ‘역사철학’을 강의했다.


  우리가 최인훈의 <광장>은 그의 문학정신의 발로(發露)이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예술정신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처럼, 헤겔도 예술정신과 예술작품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듯이, 이념과 세계도 별개의 무관한 게 아니며, 정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비로소 물질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프랑스혁명 이념의 구체적 표출이기 때문에, 혁명이념인 자유 정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혁명 자체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출처: 미래일보


  헤겔이 ‘역사는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이성의 오디세이’로 규정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여기에는 객관적 역사 자체가 이성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역사란 절대로 무(無)의미하지 않고, 충분히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만일 역사가 이성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면, 인간의 역사적 삶은 거짓과 기만, 혼란과 무질서, 폭력 따위로 얼룩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기에, 인간은 이성적 사유를 활용하여 과거 역사를 반성하고,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전달함으로써 역사가 진(眞), 선(善), 미(美)의 도살장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은, 역사 속에서 숱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을 겪으면서도 사회제도와 공동체의 관습을 합리화하면서 모든 인간의 가치와 권리가 평등하고 저마다의 자유가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런 인간의 노력이 시대를 거치면서 세대로 전승되고 누적되면, 인간 세계와 역사는 점차로 이전 시대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될 수 있다.


  뒤죽박죽 엉망진창의 윤 정권하에 살다 보니, <외면적 현상만 보는 사람에게 역사는 그저 가장 추악한 것들이 날뛰고 있는 무의미한 회의와 실망의 난장판이지만, 내재적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에게 역사는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고, 더 합리적이고 나은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무대>라는 철학자의 말에서 따뜻한 위로를 구하게 된다. 이 간난(艱難)한 주술의 세월도 필연코 엄정(嚴正)한 이성의 역사가 되리라!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