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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씨알에서 위로를 구함(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11-27 17:04
조회
327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함석헌 선생(1901~1989)> 출처: 한겨레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의 위대한 실천적 사상가이다. 민중 지향의 개혁적 실천가이면서 동서양 사상의 깊이를 두루 꿰뚫은 영성적 깊이마저 갖췄다. 그의 말은 깊은 데다 힘도 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그의 말은 인구에 회자되기도 한다. 그는 말한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합니다. 뚫어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렇지만 ‘계속 생각’한다고 해서 충분히 옳은 답으로 이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요새처럼 복잡한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 한계도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생각의 내용은 다르지만, 저마다의 생각이라는 ‘형식’은 같다. 지배자도 저마다 생각하며 산다고, 저마다 사태를 뚫어본다고, 상황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하지만 생각 자체가 아니라 생각의 내용이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함석헌의 사상적 맥락에서 보면 권위적 독재자는 사실상 ‘생각 없는’ 사람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독일의 탁월한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현실을 많이 생각하며 나치즘을 옹호했다. 일본의 천재적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는 그 엄밀한 논리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국주의 세계관의 정점인 황실을 옹호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나름 고민하면서 친미를 근간으로 삼았고, 대화를 통한 통일주의자를 반공주의자로 정죄했다. 많은 ‘민중’이 이승만을 지지하며 통일 정부가 아닌, 단독정부 수립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여전히 많은 박정희 찬양론자들도 나름 생각이 있다.


출처: 조선일보


생각만 그렇던가. 함석헌은 자유를 대단히 중시했다. 억압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그와 같은 선구적 실천가들 덕에 민중은 정치적 자유를 상당 부분 획득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에는 지배자들도 자유를 내세운다. 진보적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수적 자유도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다. ‘더불어민주당’이나 ‘정의당’ 계열의 자유 못지않게 ‘국민의 힘’ 계열의 자유, 심지어 ‘우리공화당’이나 ‘전광훈’ 부류가 내세우는 극우적 자유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한 지 1년 동안 공식 석상에서 494번이나 자유를 내세웠다.(한겨레, 2023.05.05.) 주로 시장, 기업 중심의 자유였고, 반공·친미·친일적 자유였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민중이 이런 자유론을 지지한다.


자유는 자유이되 함석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지배층 중심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유를 마음대로 물리칠 수는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날은 의사전달과 표출방식이 대단히 다양해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소식만 골라 듣고 공유하고 일방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도리어 더 쉬워졌다. 자유도 양극화되어가고 있다. 윤 대통령 부류의 자유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응해 대통령을 긍정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대통령을 비판하면 나는 대통령을 더 편들겠다’는 식이다.


함석헌도 이런 모순적 원리를 파악하고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진다면 유일의 길이 사상을 자유롭게 하는 것. 좋은 사상이 나오려면 나쁜 사상을 해도 간섭 안 해야지.”


이어지는 문제는 ‘나쁜 사상’에 간섭하지 않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서 간섭하기 시작하면, 그럴수록 ‘나쁜 사상’끼리 더 단결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더 크게 외친다. ‘좋은 사상’을 만들기 위해 ‘나쁜 사상’에 간섭하지 않는 사이에 지배자 중심의 자유가 피지배자 중심의 자유와 등가물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양극화는 지속되고, 자유의 이름으로 서로 대립하는 데로 나아간다. 무엇을 위한 어디로부터의 자유이며,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함석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윤리”라고 말한다. 이때의 ‘사람’은 민족, 국가, 신분, 계급을 넘어선 보편적 개념이다. 피지배계급을 수단화하지 말고 사회적 약자도 동일한 사람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형식과 논리에 따라 어느 진영에서 “함석헌이 사람”이듯이, “이승만은 사람이다”, “박정희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내세우면서 결국 ‘사람’끼리 충돌한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흑인 인권운동이 “백인의 생명도 중요하다(White lives matter)”는 백인 중심의 대응 논리에 의해 묻혀버린다. 사회적 약자의 소리마저 힘의 논리 앞에 묻힐 뿐만 아니라, 질서를 무너뜨리는 폭력적 언사라도 되는 것처럼 왜곡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 사회가 극도의 혼란과 분열로 가고 있는 것도 이런 대응적 목소리들이 저마다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평화와 관련지어 보면, 누가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는 얼마나 ‘비폭력적’으로 움직이느냐로 나타난다. 함석헌에 의하면, 불의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 ‘생각함’의 증거이다. 저항하되 가능한 한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든든한 주체성과 고도의 정신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정신이 방향을 안내하고 인도한다. 함석헌에 의하면 이것이 새로운 종교이자 도덕의 기초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긍정하면서 전체를 살리는 혁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의 비폭력은 좁은 의미에서 물리적 폭력을 쓰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단박의 체제 전복으로 가지는 않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살금살금’, ‘옴질옴질’ 먹어나가는 혁명의 길이다. 함석헌에 의하면, “민중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천천히 잠식(蠶食)하면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른바 ‘씨알의 생활철학’이다.” 잠식해가며 잠깐의 고통을 견뎌내는 세력을 그는 씨알이라 부른다.



씨알은 지배에 잠식당하지 않고 지배를 잠식한다. “지배에 ‘잠식’당하지 않고 지배를 ‘잠식’하는 이가 씨알”이다. 비폭력적 손해를 통한 ‘잠식적’ 승리의 길로 나아가는 힘이 씨알이다. 씨알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행동을 하는 이가 씨알이다. 모든 불평등과 부자유와 억압을 차근차근 잠식해가는 움직임이 씨알이 존재하는 증거이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양극화를 극복해가는 것이 씨알의 증거이다. 씨알이라는 구체적 실체가 애초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비폭력적으로 부자유를 고발하고 모든 불평등과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가 씨알의 증거이다.


함석헌이 4.19와 5.16을 대조하며 4.19편을 들었던 데서 씨알의 실질을 읽을 수 있다. 그에게 5.16은 ‘자기주장’, ‘내가, 내가, 내가 한다는 것’, ‘쥐고 영원히 놓지 않겠다는 것’, ‘섬김받자는 것’이라면, 4.19는 ‘(내가 아니고) 우리가 살자는 것’, ‘섬기자는 것’, ‘바치자는 것’이다. 그래서 씨알의 정신과 자세는 ‘여물고’ ‘떨어지고’ ‘썩는’ 것이다. 물론 여물려면 생각을 해야 한다. 그는 말한다: “생각을 하는 것은 여무는 일입니다. 나무의 열매가 햇빛을 보아야 여물듯이, 씨알은 생각을 해야 속알이 여뭅니다.”


이쯤 되면 씨알은 그냥 주어져 있는 어떤 개인이나 세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씨알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내가 아니라 ‘우리’, ‘섬기기’, ‘바치기’, ‘여물고’ ‘떨어지기’, ‘썩기’... 정말 어려운 과제들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 없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씨알은 좁은 의미의 계급 언어가 아니다. 내면적 훈련, 사회적 참여, 정치적 혁명 등을 두루 엮어 드러내는 힘든 길이다. 당연히 혁명은 어렵다. 그래도 함석헌의 씨알론을 다시 읽으며, 생각이 상대화되고 자유가 오남용되는 현실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데서 희망을 보고 힘과 위로를 얻는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