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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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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의 이야기 (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0:54
조회
412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불경기입니다. 출판 쪽 역시 워낙 불황인지라 요즘 별 볼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제가 일하고 있는 작은 출판사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시쳇말로 파리만 날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그날 오후 2시:


지인의 지인을 통해 사회적 기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50대 중반의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개인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고 나니 돈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기보다는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업 계획이 얼마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의 표정은 지나칠 정도로 진지했습니다. 저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협동조합이니 사회적 기업이니 하는 말이 무슨 유행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때 귓등으로 대충 흘려들었던 것이 전부였으니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업계획 설명에 열을 올리던 그가 잠시 숨을 고를 때가 되어서야 저는 겨우 한마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생님께 무얼 해드리면 되는 건가요?”


그는 잠시 저와 눈을 맞추더니,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습니다.


“저... 명함을 하나만 만들어주셨으면 하는데 그게 어려울까요?”


그는 출판사와 인쇄소가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은 사업을 준비하는 단계라 돈이 부족하지만 나중에 사업이 잘되면 홍보용 전단지나 팸플릿 등등 일이 많을 것이니 서비스로 명함을 좀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에 하얘졌습니다. 하지만 왠지 그에게 화를 낼 수도,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어서 윗사람과 상의해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그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l_2015072601004018600336181.jpg사진 출처 - 경향신문


그날 오후 8시 30분:


제가 일하는 사무실 가까운 곳에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되는 술집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외상도 되는 집이어서, 퇴근길에 그 술집에 들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젊은 여성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두어 달 전까지 이 선술집에서 일했었던 ‘알바생’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취업이 되었다며 축하해달라고 했던, 특히 상냥하고 친절했던 친구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지 1년 반 만에 비로소 첫 직장을 갖게 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했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역시... 직장인 되더니 더 어른스러워지고 세련되어졌구먼.”


반가운 마음에 제가 객쩍은 농담을 던졌을 때 왠지 그 친구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말이 없다가 그 친구는 곧 직장을 그만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120만 원의 급여에도 수당이 없는 잦은 야근도 견딜 수 있었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걸핏하면 ‘왜, 회사 다니기 싫어?’ ‘그러려면 그만두든지’라는 말을 해대는 직장상사의 말은 정말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번 주 안에 회사를 나올 것이라는 그 친구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새삼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분야에서 아직도 일하고 계시니까요.”


저는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그렇지 않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등등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오후 10시 30분


아내는 저에게 오늘도 일 없었냐고 물었습니다. 별일이 있는 날이 1년 중 며칠이나 될까 생각했습니다. 대부분 별일 없는 날입니다. 오늘도 역시 별일 없는 날이었습니다. 괜히 비겁하고 부끄럽고 콧등이 조금 시릴 뿐이었습니다. 저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8월 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