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사죄하는 방법 (이재승)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0:55
조회
1001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클린턴 대통령은 1893년 하와이 왕국의 전복에 대해, 호주 수상 케빈 러드는 애버리진 원주민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격리정책에 대해,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는 식민지 카메룬에서 프랑스 정부가 자행한 원주민 집단살해에 대해 사과하였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볼리비아에서 신의 이름으로 원주민에게 자행된 학살과 폭력에 대하여 사죄하였다. 이렇듯 식민지배와 침략, 학살의 역사를 대면하는 과정에서 각국의 원수들이 국경을 넘어 사죄하는 현상을 학자들은 사죄의 물결이라고 말한다.


정치적 사죄의 기원을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흉년과 전염병에 자신의 부덕을 탓했던 왕들의 예를 통해서 사죄는 매우 오래된 정치적 제도였던 것 같다. 되돌아보면 일련의 국정 실패와 대형참사 앞에서 국정책임자의 적절한 사죄가 있었더라면 국민의 신뢰를 강화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제대로 된 사죄는 실패의 원인분석과 시정방향을 함축하기 때문에 인간과 제도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간적인 처방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참으로 사죄하기 싫어하는 정치적 최고책임자들이 즐비하다. 정치의 수단으로써 사죄는 오로지 양심의 통회로서만 의미를 갖는 종교적 참회와는 다르다. 정치적 사죄는 자연인으로서 사사로운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공직자의 객관적인 직분과 관련된 사항이다. 베버의 용어로 표현하면 심정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의 문제이다. 따라서 내키지 않더라도 사죄를 할 수 있는 자는 정치인으로서 덕을 갖춘 자이다. 그는 사죄를 통해서 관계를 회복시키고 불화의 골짜기를 평탄하게 만들 자이다.


143954557621_20150815.JPG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14일 전후 70년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난 8월 14일 아베 수상은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된 배경을 상당히 길게 언급하면서 적당하게 과거형으로 종래의 사죄를 언급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일본침략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시아 2천만 민중의 참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의 피해사실만큼은 깨알같이 나열하였다. 사죄의 담화가 아니라 일본의 피해사실을 국제사회가 알아야한다는 보고서와 같다. 그런데 아베 수상의 정신세계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사죄의 어원과 의미의 변천사를 짚어보자. 법률용어로서(써) 사죄의 영어표현은 아폴로지(apology)이다. 아폴로지는 그리스어 아폴로기아(ἀπολογία)에서 유래하는데, 원래 이 단어는 이야기(story)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플라톤의 시대에 아폴로기아는 소송이나 공적인 맥락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수사학의 기술을 의미했다. 그래서 플라톤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재판과정 기록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아니라 ‘변론’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변론은 자신이 옳다는 주장이라면, 변명은 틀렸다는 전제를 수용하면서 비난의 강도를 낮추기 위한 책략적 발언이다. 그런데 현재 아폴로지는 변명, 사과, 사죄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아폴로지의 의미의 감정적 폭이 이렇게 착잡하게 넓으니 제대로 깔끔하게 사죄하기 참 어렵겠다고 생각된다.


사죄를 잘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개인 간의 사소한 잘못이라도 무성의한 사죄는 분노를 유발한다. 전문가들은 유효한 사죄 방법을 제시한다. 어떤 사람은 사태에 대한 공통의 이해, 피해자에 대한 책임의 인정, 피해자의 고통과 피해의 시인, 자신의 잘못에 대한 판단, 후회의 표시, 장래 행동에 대한 의지표명 등을 교과서적으로 제시한다. 어떤 이는 책임수용, 즉각적 사과, 상대방의 분노의 정확한 인정, 용서 구하기와 자신에 대한 용서를 사죄의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어떤 사람은 사죄의 의견을 표시할 때 적절한 타이밍에 명료하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조건부 언어를 사용하지 말고, 변명이나 해명을 하지 말고, 사죄 후에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라고 조언한다. 어떤 사태에 책임 있는 사람이 이와 같이 사죄한다면 상대방은 심각한 피해가 아닌 이상 용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죄를 수용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러한 사죄의 요령은 개인들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그런데 중대한 인권침해 앞에서 국가원수가 앞의 요령에 따라 절절한 감정이 묻어나는 사죄발언을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중대한 인권침해 앞에서 실질적인 회복조치를 담지 않는 사죄는 부정의한 사죄이다. 침해가 상징적인 수준이거나 경미한 수준이라면 사죄의 표현은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행동이 된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심각한 피해와 고통을 야기한 사안에서라면 보상 요소를 수반하지 않는 사죄는 의미 있는 행동이 아니다. 공식적 사죄가 인권침해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피해회복을 위한 실질적 구제수단을 포함하는 때, 피해자 집단에게 일정한 참여기회를 열어두고 대화의 형태를 갖게 될 때, 그러한 사죄는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가해자의 죄책감을 이완시키고 인간을 각성시키고 연대감을 고양시킨다. 식민지 잔혹행위에 대해서는 그러한 사죄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일과거사에서 책임인정의 수위를 놓고 우리는 고노 담화(1993년)나 무라야마 담화(1995년)를 예찬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8월 15일 발언에서 아베의 발언이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했다고 정리하고 애써 의미를 부여하였다. 20여년 전에 나온 이들의 담화는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고노 담화는 일본군 위안부 연행의 강제성을 처음으로 인정한 발언이었고, 무라야마 담화는 종전 50주년을 맞이하여 식민지배와 관련해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 당시 수준으로 보면 일본 정치인들의 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지만, 법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규범침해에 대한 명백한 인정과 법적 책임의 공식적 이행을 예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한 담화는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서 식민지배 책임을 완결지었다는 기본전제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담화의 뒤끝에 이른바 도의적 책임으로 치장된 국민기금(1997년)이라는 어정쩡한 수단이 나왔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당수가 이러한 국민기금을 법적 책임의 이행수단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수상의 사죄편지와 기금이 제공하는 위로금을 거부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현 정부도 일본의 법적이고 공식적인 책임이행을 요구해왔는데 박 대통령이 아베의 발언이 역대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했다는 의미에서 나름대로 평가한다고 하니 놀랍다. 외교가 꼭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국정부가 다투고 있는 전제를 다시 인정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아베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질적인 회복조치를 취하라!’고.


지난 20년은 한국에서 국가폭력에 대한 법적 책임을 추궁하고 관철시켰던 시대였다. 우리의 규범의식은 고노 담화를 뛰어넘었다. 이 20년의 국가폭력 청산의 역사를 한국의 정치지도자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치지도자도 학습해야 한다.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후 수립되고 심화된 거대한 인권 체제의 자장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가 동시대인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8월 1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