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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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책장마다 불꽃이 튀었다. 80년대의 마지막 해, <봄우뢰>를 읽었다. 나는 아직 어렸다. 정의를 믿었다. 정의의 원형질을 탐했다. 그것은 현실에는 없었다. 군인이 대통령이었다. 군인은 총칼로 시민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때로 칭송했다. 나중에 커서, 출세해서, 세상을 바꿔보라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어음이 아니다. 어린 내가 믿었던 정의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지불되어야 하는 청구서였다. 그러나 정의를 흔쾌히 결제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그 시절은 “온건한 사회운동까지 전면 봉쇄하여 가장 극단적 운동이념을 가장 호소력 있게 만든” 때였다. 군사정권은 소련·중국·북한에 관련된 모든 것을 금지했다. 그것이 표지석이었다. 군사정권이 한사코 덮으려는 이론에 군사정권을 기어코 뒤엎을 무기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시절,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전두환·노태우의 반대말이었다. 그러다 <봄우뢰>를 읽었다. 그것은 김일성의 전기였다. 용기를 얻고자 했으나, 책을 읽는 것부터 용기가 필요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이제 그 불꽃만 남았다. 내용은 아련하고 희미하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김일성이 조선인 마을에 직접 잠입했다. 항일운동에 비협조적이었던 주민들은 김일성을 만나 감화 받고 스스로 무장투쟁의 응원군이 된다. 무력이 아닌 감동으로 역사를 바꾼다는, 민중이 스스로 각성할 때까지 지도자는 무한히 인내하며 지도한다는 그 책의 대강은 내가 찾던 정의였다. 무릇 정의로운 정치는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 숨죽여 읽던 그 책을 언제부터 외면했는지 기억에 없다. 나이가 들면서 정의가 아닌 과학에 끌렸다. 정의는 곧잘 패배하였으므로, 정의를 구현하려면 지혜가 필요했다. 분석하고 판단하는 힘이 필요했다. 나는 다시 레닌과 마르크스와 헤겔과 칸트로 이어지는 지루한 책에 빠졌다. 주체사상을 폐기했다기보다 잊어버렸다. 그것은 정의를 설명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김일성과 마르크스 사이를 오가는 거대한 진자운동을 하며, 20대를 보냈다. 20대가 끝날 무렵, 나는 두 혁명가 모두와 멀어졌다. 그 이별을 누구처럼 대외적으로 선포한 일은 없다. 사상·이념은 금연하듯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급진 이론의 니코틴은 줄어들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호수의 물결과 같다. 최초의 충격은 사라져도, 잔잔한 파동은 언제까지고 계속 된다. 그래서 나는 전향을 믿지 않는다. 전향했다는 자들의 선언을 믿지 않는다. 차라리 자기 연민의 힘을 믿는다. ‘전향 주사파’는 군중의 주목 없인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자기 연민에 가득한 과대망상가일 뿐이다. 1998년 봄, <한겨레> 대담 자리에 나온 황장엽을 만났다. 서울 남산 근처 안기부 안가에서 그를 보았다. <봄우뢰>의 잔잔한 파동을 오랜만에 느꼈다. 늙은 망명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는 전향 주사파가 아니었다. 그는 깐깐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난 김일성의 이론서기로 7년 이상 일했어. 현 단계에서 자본주의 이념을 지지하지는 않아요. 우리는 유물론자요.” 그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한국에 온 것은 아닌 듯 했다. 그의 망명은 확실히 ‘이념적’이었다. 그는 여전히 정의를 믿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정의를 구현하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다만 늙은 몸뚱아리가 그의 행동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정의에 대한 그의 관념은 안기부 안가의 담장을 넘지 못했다. 그에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0여년에 걸친 기자 생활 동안,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전·현직 운동가들도 만났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를 ‘주사파’라 한다면, 나는 지금껏 딱 한 명의 주사파를 만났다. 황장엽이다. 주사파의 혐의를 받는 한국의 운동가 중에 진짜 주사파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저 정의라는 관념에 남들보다 강하게 끌리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계급 모순보다 민족 모순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현실의 부정의를 해소하려는 노력 끝에 이런저런 사상과 이념을 얄팍하게 접해보았을 뿐이다. 황장엽은 달랐다. 그가 한국에 온 목적은 주체사상을 ‘구현’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념을 중심에 두고 현실을 바꿔내려는 사상가였다. 한국에서 주체사상가·주체운동가를 본 적이 없으므로, 나는 황장엽을 통해 주체사상의 실체를 짐작한다. 그가 믿었던 것은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 선한 인간의 무한한 에너지를 황장엽은 ‘천리마 운동’에서 보았다. ‘천리마 운동’은 생산력 증대를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건설을 시작하고, 중-소 분쟁 과정에서 자주노선을 지키면서, 1960년대의 북한은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가장 큰 걸림돌이 관료주의였는데, 이를 해결하려고 김일성이 현지에 내려가 한 달씩 머물며 노동자들과 직접 대화했다. 어느 탈북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천리마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는 사람들이 대문을 모두 열어 놓고 살았다. 서로 도와주고 협조하며 한 가족처럼 살았다. 옆집 사람이 아프면 동네 사람들이 다투어 병문안을 갔고, 먹을 것이 있으면 아끼지 않고 주었다. 1960년대 북한은 사람이 살 만한 나라였다.”(<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에서 재인용) 황장엽은 그 경험을 이념으로 표현했다. 주체사상이다. 지도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생산력 증대에 성공한 60년대의 경험은 ‘무오류의 수령-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성-인민의 창발성’으로 연결되는 주체사상으로 탄생했다. 한국 망명 이후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초가 된 ‘사람 중심 사상’을 ‘인간 중심 철학’으로 바꿔 이름 붙이고, 이를 한국 사회에 적극 소개했다. 한국의 보수파들도 반기는 그 내용의 핵심은 “인간이 실천적 활동의 주체가 되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되, 전체 사회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나의 이익이라는 통찰”에 있다. 논리 구성은 주체사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황장엽의 인간 중심 철학을 수용하는 한국 우파야말로 어느 면에서는 ‘주사파’인 셈이다. 황장엽의 인간 중심 철학에는 사회주의와 국가주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정치 분야의 원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인민 대중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한국의 기업 운영 방식을 비판하면서 일종의 ‘집산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인민에게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 헌신 분투하는 사람은 일부 절차를 어기는 경우가 있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자”라고 말할 때, 그는 독재자를 옹호하는 논리로 빠져든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하면 ‘무오류의 수령론’에 가닿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주체사상은 종교와도 만난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설파한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설교한다. 그런 개인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공동체의 번성과 평화를 약속한다. 다만 절대로 민주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민주적인 종교는 없다. 특출한 개인을 숭배하는 것이 종교다. 숭배의 과정까지 소수의 지도자가 지배한다. 종교 지도자는 무오류이며 그 자체로 신성불가침이다. 지도자에 대한 반대는 곧 공동체에 대한 반역이다. 황장엽은 계급 독재가 아니라 (사회주의라는) 종교에 감동 감화된 신도들이 스스로 충성하며 평화로운 집산 공동체를 이뤄가길 꿈꾸었다. 1960년대의 북한은 그런 곳이었다. 북한의 현실과 관련해 황장엽이 불화한 것은 오직 김정일이었다. 황장엽은 김일성을 수령으로 인정했으나, 김정일에 대해선 그렇지 않았다. 김정일은 교황의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김정일이 한사코 덮으려는 것에서 김정일을 쳐낼 무기를 발견했다. 미국과 한국이었다. 한국 우파가 귀하게 여긴 것도 국가주의·사회주의·인본주의가 묘한 긴장을 이룬 황장엽의 추상적 이론이 아니었다. 황장엽은 인간중심철학의 방향으로 북한을 개조하려면 “한국이 미국에 의거하여 북한의 독재체제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라고 주장했다. 황장엽이 ‘인간 중심 세상’을 북한에 만드는 꿈을 꾸는 동안, 한국 우파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을 비판하는 도구로 그를 앞세웠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는 사유가 북한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남한 반공주의의 선전 도구가 되는 기묘한 일에는 역사적 뿌리가 있다. 박정희 시대의 철학자 박종홍은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일하며 ‘반공 민주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는 국민교육헌장의 논리구조는 주체사상과 거의 똑같다. 주체사상탑은 북한 평양 도심에 자리잡고 있다. 높이 170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국가적 부의 증대를 최고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천리마운동’과 ‘새마을운동’은 닮았다. 동원할 자원이 마땅치 않으므로, 인민(국민)이 스스로 생산력 증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적 세뇌의 과정 또한 닮았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복종이 필수적이라는 믿음도 닮았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유보해도 좋다는 정치론도 닮았다. 황장엽은 북에서 남으로 망명한 것이 아니다. 그의 등장은 한국에서 암약해온 ‘70년대식 국가주의자’의 재림이었다. 황장엽은 자신이 기초한 주체사상에서 국가주의의 요소를 거세하고 인본중심철학만 추출하려 했으나, 한국의 우파는 이를 오히려 국가(체제)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차용했다. ‘뉴라이트’로 불리는 전향 주사파들이 박정희는 물론 이승만까지 찬양하고, 결국 이명박의 충실한 우군이 된 것도 주체사상의 국가주의적 성향에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한동안 김일성·김정일의 독재를 수긍했다. 북한 체제의 유지·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논리였다. 김일성·김정일의 자리에 박정희 또는 이명박을 대체했을 뿐, 그들은 절대로 전향한 것이 아니다. 사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군중의 ‘창발적 충성’을 토대로 탁월한 엘리트의 지도에 따라 공동체 전체가 부강해지는 것을 꿈꾼다. 그리하여 주체사상의 프로젝트는 거듭 실패했다. 황장엽의 죽음이 뜻하는 바는 여기에 있다. 그의 사유는 북에서 변질되었고, 남에서 악용됐다. 주체사상의 논리구조는 국가주의·체제이데올로기와 반드시 만난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에서 (자신이 입론한) 철학과 (김정일이 변질시켰다 믿는) 정치이론을 분리하려고 애썼지만, 그의 철학 안에 이미 ‘반 민주주의’의 독소가 포함돼 있다는 것은 몰랐다. 국부의 증대가 곧 시민 개인의 행복이라는 믿음이 횡행했던 1960~70년대에 그의 사상은 이미 진화를 멈췄다. 그걸 21세기에 끄집어내면 어떤 사탕을 발라도 국가주의·독재이념일 뿐이다. 민주주의와 결정적으로 충돌하는 주체사상의 논리구조에 대하여, 한국의 좌파와 우파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한국의 국가주의 우파는 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엘리트의 독재를 마음 깊이 갈구한다. 미국과 같은 강성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들의 이념이 주체사상과 다른 게 무엇인가. 한국의 민족주의 좌파는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을 추구한다. 그들은 엘리트의 독재를 마음 깊이 거부한다. 강대국의 억압에서 벗어나 민주시민들이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국가 공동체를 희망한다. 그들의 이념은 주체사상을 용인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침묵하는가.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는 자,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자, 민주주의의 폭넓은 적용을 꺼리는 자, 이들 모두 솔직해져야 한다. 당신이 내건 민주주의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1998년 5월의 봄날, <한겨레> 대담 자리에 나온 황장엽은 남산 안기부 안가의 소파에 앉아 말했다. “그저 집안에 앉아서 죽지는 않을 것이오.” 2010년 10월의 가을날, 황장엽은 서울 논현동 국정원 안가의 욕실에 앉아 세상을 떴다. 황장엽이 살아있을 때, 남과 북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의 말과 글을 빌려 제 이익을 취했다. 국가를 내세워 특권집단의 이익을 지켰다. 사람중심사상으로 득을 본 인민은 남과 북에도 없다. 이명박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 이 글은 필자가 쓴 <한겨레21> 832호 ‘영원한 금기, 주체사상을 말하다’ 기사를 발췌·재구성한 것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67 | 추천: 0
이광조/ CBS PD 지난 10월 10일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분단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된 극적인 인생을 살다 간 노 망명객의 죽음에 먼저 조의를 표한다. 같은 날 평양에서는 노동당 창건 기념일을 맞이해 성대한 경축행사가 벌어졌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서 화려하게 그 존재를 드러냈다. 참 얄궂은 인연이다. 10월 10일에 일어난 이 두 사건을 두고 우리사회에서는 민감하지만 피할 수 없는 논쟁들이 벌어졌다. 북한의 3대 세습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과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국립현충원에 안치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이 두 논란에 말을 보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논리와 근거를 갖고 있겠지만 논쟁을 지켜보면서 공히 느낀 점은 북한과 관련해 우리사회가 여전히 이념적 사고와 대립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새삼스런 자각이었다. 우선 황장엽 전 비서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해 보자. 분단 이후 남한에 망명한 북한인사 중 최고위급이었던 황장엽 전 비서. 우리사회에서 그에게 부여될 존재의미와 활동은 그가 이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동안 그는 북한체제, 특히 김일성 사후의 북한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대북정책과 관련된 남한사회 내부의 분열을 강도 높게 질타했다. 분열에 대한 질타는 주로 북한과의 대화와 화해, 협력을 주장하는 세력을 향한 것이었고 그의 질타에는 ‘북한의 실상을 모르는 배부른 철부지’라는 비판이 깔려 있었다. 우리사회의 보수 세력이 즐겨 쓰는 ‘친북좌파’라는 프레임이 그의 사고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일단이다. 이런 그의 언행을 보면 황장엽 전 비서는 남한사회의 일부 극우세력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쟁도 불사하는 대북압박 정책을 통해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는 것만이 분단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지형이 그에게 부과한 이미지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황장엽 전 비서는 지난 4월 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초청 세미나에 참석해 “중국이 계속 지지하는 한 북한의 급변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식 개방을 하도록 하는 게 중국과 미국의 이익에 맞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남북통일은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갈 때 해야”하며 “(개혁개방이) 확실하게 되면 남북 연방제를 실시하는 게 낫다”는 주장을 덧붙였다. 이런 현실진단과 처방은 우리나라의 보수 세력이 그렇게 혐오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생각과 달리 보수 세력의 아이콘이 되어 하지만 황장엽 전 비서는 자신의 이런 생각과는 무관하게 북한과의 대결정책을 주장하는 보수 세력의 아이콘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당분간 조갑제, 서정갑과 같은 울림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사회 내부의 정치적 갈등구조와 그것에 덧 씌워진 이념적 외투가 이런 분열적 양상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물론 남한으로의 망명을 택한 그가 지닐 수밖에 없는 북한 권력층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당연히 이런 분열적 양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위에서 언급한 초청세미나에서 황장엽 전 비서는 남한으로 오게 된 계기와 관련해 90년대 중후반의 극심했던 식량난을 언급했다. 인민을 굶기는 체제에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는 남한에 온 뒤에도 자신이 이론적으로 가다듬은 주체사상에 대해 여전히 애착을 보였다. 지난 9월 30일자로 작성된 그의 마지막 강연문에는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합니다” 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강연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국가에 누가 충실한가를 잣대로 평가하고 애국적으로 단결해야 한다.” 이 땅의 40대 이상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정서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 우리가 경험했듯이 개인을 초월한 국가는 현실정치 속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표상되고 의인화 된다. 이처럼 황장엽 전 비서의 언명 속에서 드러나는 사유의 핵심은 국가주의다. 그래서 감히 추측해 본다. 그가 북한을 등지고 비판했던 것은 북한이 경제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지 정치적, 시민적 자유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지 않을까 라고. 그가 남한사회의 국론분열을 그렇게 걱정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촉구한 것도 기실 이런 사유의 연장이 아닐까 라고. 생전의 고인을 보며 90년대 초 월북을 감행했던 안호상 전 문교부장관이나 북일 수교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주민들의 일사불란한 모습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가네마루 신 전 자민당 간사장이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황혼을 연상시킨다. 일제하에서는 식민지지배에 맞서기 위해, 또 해방 이후에는 나라의 부강한 발전을 위해 개인보다는 전체, 곧 국가를 앞세울 수밖에 없었던 한 시대의 황혼 말이다. 황장엽 전 비서의 죽음과 김정은의 3대 세습 문제로 논란이 뜨겁던 10월 11일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가 공개되었다. 이 여론조사는 정부의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 이후 통일부가 실시한 것으로 북한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안보의식을 묻는 내용이었다.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 보면 조사대상의 63.5퍼센트가 안보상황이 ‘위험하다’고 응답했고 52퍼센트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이 크다’고 응답했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다. 하지만 이어진 설문에서 조사대상의 58.8퍼센트와 13.4퍼센트가 각각 북한을 ‘협력대상’과 ‘지원대상’이라고 응답했고 북한을 ‘적대대상’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21.7퍼센트에 불과했다. 또한 조사대상자의 71.1퍼센트가 ‘통일을 희망한다’라고 응답했다. 우리 국민이 보여주는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신분열증인가? 아니면 북한체제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대화와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탈 이념적이고 실용적인 사고의 표현인가? 북한의 3대 세습 문제를 둘러싸고도 이런저런 논란이 한창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정치현실과 보편적인 가치에 비춰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걸 모르는 국민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문제는 그 비상식적인 현실과 체제를 변화시킬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아닐까. 지혜로운 국민의 수준에 부합하는 생산적인 논쟁을 기대해 본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50 | 추천: 0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10여 년간 과거청산 문제에 천착해온 활동가들과 과거사 관련기구에 참여한 사람들이 지난 주말에 ‘역사와 책임’이라는 주제로 대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아쉽게도 공식적인 토론회를 마치고 발길을 돌렸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난 10년 동안 과거청산을 위해 많은 글을 썼으며, 2007년도에는 국방부의 과거사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군의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는데 참여하였다.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극복되지 않았다는 질책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을 분담해야 할 처지이다. 토론회는 과거청산작업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정치적 조건이나 과거청산의 목표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에 과거청산작업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달랐다. 나는 간신히 이루어진 정권교체 상황에서 과거청산작업이 물꼬를 텄으며, 이 작업이 파상적으로 확대되었다고 본다. 처음부터 명료한 각본에 따라 대의를 강력하게 밀고나갈 사정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물론 반대편의 아저씨들이 과거청산의 대의를 선선히 용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타협으로 시작된 과거청산작업은 결국 장기적인 과제의 일부에서 성과를 내었다고 할 수 있다. 불완전한 역량 속에서 시작하여 진상조사라는 작은 문턱을 넘었을 뿐이다. 이제 정부차원의 과거청산작업이 막을 내린 상황에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가 토론회의 또 다른 고민스러운 주제였다. 더욱 큰 문제는 우리가 과거 청산을 위해 투쟁할 의지를 갖고 있는 지이다. 인식은 얻었지만 의지를 상실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과거청산의 비전 문제였다. 비전은 항상 좋은 세상을 가리킨다. 결국 들춰진 진실을 일반시민들과 공유하고, 그에 기초하여 역사와 인권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키고, 인권유린에 기초가 되었던 제도를 혁신하는 것이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청산의 현재를 미래로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소위 과거청산 세력들이 민주주의 운동세력들, 또는 일반시민들과 튼튼한 네트웍을 형성해서 성과들을 공유하고 확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토론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과거청산이라는 말이 칙칙하고 위협적인 퇴영적인 느낌을 준다. 복수와 부정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복수도, 처벌도 불가능한 상태다. 복수나 처벌을 실현시켜줄 정부가 향후에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결국 약속이다. 정부가 미래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약속을 얻어내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과거가 과거로만 머물지 않고, 미래도 근본 없이 솟아오르지 않는다. 미래는 과거의 관성이다. 예컨대, 약속은 집단살해를 낳았던 과거를 단절하겠다는 선포행위이다. 거듭나겠다는 약속이다. 그러한 약속이 어디 노무현에게는 의무이고, 이명박에게는 옵션이겠는가? 실제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전후에 예비검속에 따라 민간인에 대한 집단살해가 전국적으로 저질러졌다. 그러한 학살의 근거는 군이나 경찰의 지침이었다. 더 올라가면 권력자의 생생한 의지와 지시를 만날 것이다. 입헌적 구조에서 설명할 수 없는 방식들이 오늘날에는 제도적으로 완전히 극복되었는가? 즉 전쟁이나 유사시에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까? 물어볼 것도 없이 군대나 경찰은 과거와 다름없이 유사시에 비밀스럽게 민간인을 사찰하고 구금할 것이라고 예측된다. 한번 살상에 길들여진 권력은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따라서 궁금하다. 누가, 어떠한 조건에서 어떠한 부류의 사람을 구금하고, 어디에 구금하고, 전쟁수행에 방해가 된다면 그들을 종국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요즈음 유행어로 호모 사케르(homo sacer) 또는 관타나모 프로그램이 궁금하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의 전언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프로그램이 정부의 국무회의 수준에서 국가기밀로 동결되어 유사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때가 오면 그러한 의결은 사람을 잡아먹는 히드라가 될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로 학살의 과거가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다.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아이가 커서 폭력가장이 된다는 것이 사물의 본성이다. 대오각성이 없고서는 변할 수 없다. 권력도 마찬가지이다. 대오각성에 기초하여 약속하도록 해야 한다. 과거가 과거로 그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극악한 야만조차도 상명하복과 위계질서를 거치게 되면, 경산의 코발트 광산처럼, 유대인 가스실처럼 죄의식마저 결여한 채 거리낌 없이 집단살해가 저질러진다. 이미 책임의식이 증발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책임의 마비상태를 파괴해야 한다. 비밀에 부쳐진 정부의 ‘검속구금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누가 기안했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세상에 알리고 싶다. 그리고 국제인도법이나 입헌적 원칙에 맞게 그것을 바꾸고 싶다. 모범학살법으로!!!
2017-07-20 | hrights | 조회: 261 | 추천: 0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 소장 (Dr. Mahdi Abdul Hadi, PASSIA) http://www.passia.org 이번주 수요산책은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이 보내온 기고문을 홍미정 교수가 전해왔습니다. 이 기고문의 번역을 위해 홍미정 교수와 자원활동가이신 김현수씨께서 도와주셨습니다. 1967년 전쟁 이전 경계 내에서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을 끝내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 협상이 지난 18년간 진행되어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미국은 협상을 진전시키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유럽에게는 협상을 진전시킬만한 힘이 없다고 보고 있다. 다른 분석가들은 분열된 아랍 세계, 특히 최근에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분열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또는 서안을 지배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독점적인 수도로 유지해야한다는 이스라엘의 강박관념을 강조하기도 한다. 미국은 평화 정착에 대한 높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이 이슬람 세계와 미국 관계에 대하여 카이로에서 연설한 이후 기대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나 오바마가 파견한 중동 특사 조지 미첼의 계속된 노력들은 이러한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없었고, 간접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정착촌 건설 사업 종결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미국이 가하는 엄청난 압력에 직면해서 오바마의 직접 협상 요구를 수용하였다. 미국의 새로운 전략은 2000년 7월에 실패한 캠프데이비드 협상의 교훈을 되새기면서, 이-팔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역사적인 거래’를 성취하려고 열망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이스라엘-아랍 세계 간의 관계 정상화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란, 헤즈볼라, 하마스를 소외시키면서 이스라엘과 아랍을 포용하는 ‘지역 안보 체제’를 증진시킨다. 그 결과 ‘정치, 안보, 경제’로 구성되는 계획으로 인해서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매우 강력하고 독점적인 존재가 된다. 다른 행위자들 대부분 이 계획을 따르고 있다. 만약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유럽 연합, 유엔, 러시아 정도이다. 현재 진행되는 협상에 관한 미국의 계획은 다음 4 가지 구성 요소에 기반하고 있다. 1) 지도부: 2000년 캠프데이비드 협상에서 팔레스타인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라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현 팔레스타인 수반 압바스와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워싱턴과 샤름 엘 셰이크 회의에서 새로운 정치적 통합을 보여주었고, 압바스 수반이 예루살렘 소재 네타냐후의 자택을 방문하면서 이들의 통합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더구나 2000년 캠프데이비드 협상 동안에, 클린턴 대통령은 예루살렘 주권을 양보할 수 있도록 아라파트를 후원해 달라고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정상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두 정상 모두 자신들이 이 협상 의사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거절하였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오바마 대통령은 이집트 대통령 무바라크와 요르단 왕 압둘라를 워싱턴으로 초청해서 첫 번째 협상에 직접 참가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중동 특사인 조지 미첼은 아랍 국가의 수도들을 바쁘게 순방하면서 ‘협력 관계 약속’을 확고히 다졌다.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http://www.passia.org/) 2) 시간: 시간 일정에 관해 얻은 교훈은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빠듯한 일정으로 너무 서두르거나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실질적인 성과를 성취하기 위해서 진행과정에 만 1년의 시간이 주어졌다. 3) 진행 과정: 2000년 캠프데이비드 협상 과정에서 실수 중 하나는 모든 자료들이 계획 없이 즉시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직접 협상은 이스라엘 점령촌 건설 사업 문제로 출발해서(예를 들면, 협상 진행 과정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점령촌 건설 사업 동결을 연장하고 동결 원칙을 준수한다), 점차 경계 문제와 안보 문제들로 진전된다는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4) 후원: 4번째로 필요한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이나 이스라엘인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협상을 주최하고, 전체 협상 과정 동안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 측을 포용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한다. 또 2001년 아랍인들이 발의한 ‘아랍 평화안’에 토대를 두고 아랍 지도자들을 보조적인 협상자이자 후원자들로서 참가시킨다. 그런데 4) 후원의 문제는 유럽 연합의 역할을 약화시킨다. 이 시점에서 유럽 연합은 유럽 연합의 깃발을 들어 올리면서 다음 6가지 항목에 대한 합법적인 책임과 역사적인 협력관계를 주장해야한다. (a)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국제적인 보호; (b)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분리시키기 위한 국제군의 배치; (c) 예루살렘 행정관을 세움으로써 예루살렘을 개방하고, 공유하는 도시, 두 국가의 수도로서 확실히 보증하도록 해야 하며, 성지들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d) 서안과 가자 사이에 안전 통로 개방; (e) 팔레스타인 정치범들 전원 석방; (f)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고, 국가 의사일정 수립하기 위한 팔레스타인 통합 정부를 창설하도록 터키와 아랍 연맹이 협력.
2017-07-20 | hrights | 조회: 154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장관의 딸이 아버지의 회사(?)에 특채로 합격한 일 때문에 아버지까지 장관직을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 부처를 자기 회사로 알고 딸을 취직시키겠다는 발상을 한 아버지도 문제지만,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올바른 조언 한마디 하지 못한 외교부 관료들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청년실업자가 수십만이 넘는 상황에서 이러한 행태가 수많은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국민들을 무시했거나 아니면 그 같은 특혜가 워낙 일상화되어 문제라고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둔감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부동산과 교육문제라고 한다. 특히 출신대학에 따라 평생의 몸값이 정해지는 학벌주의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대학입시는 무엇보다도 ‘공정’해야 하기에, 대학입시가 있는 날은 전 국민이 출근시간을 한 시간 늦추고 비행기의 이륙시간을 조정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진풍경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평등’과 ‘공정’을 확인하는 절차로서 대학입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요즘은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직장을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상황이다 보니, 같은 대학을 졸업해도 어떤 부모를 만났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관 아버지를 둔 덕분에 외교부에 특채로 합격한 딸 이야기는 전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딸의 외교통상부 특별채용 특혜 의혹과 관련해 사의를 표명한 유명환 장관이 지난 6일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에서 열린 실·국장회의를 마친 뒤 청사를 나서 승용차에 오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면, 장관의 딸이 외교부에 특채로 합격한 것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심하게 불공정하고 염치없는 일들이 이 땅에서는 엄청나게 자주 일어난다. 청문회에 나오는 장관 후보자들마다 어찌나 교육열이 높은지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장전입을 하고, 하나같이 재테크에 재주 있는 부인들을 만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동산 투기로 재산이 늘어나고, 십중팔구 군대를 면제받는 체력조건을 타고 나는 걸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재벌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릴 때부터 기업오너로서의 수업을 받으면서, 일정 시기가 되면 재벌기업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다보면 과연 ‘공정함’과 ‘정의로움’의 기준이 무엇인가 무척 혼란스럽다. 자조적인 말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기업을 경영하는 세상에서 외교부 장관이 딸을 그 회사에 특채한 일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비난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보다 더 큰 부정의와 불공정에 대해서는 둔감하면서 왜 우리는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이야기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포도원의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모았는데, 아침에 와서 온종일 일한 사람이나 점심에 와서 반나절을 일한 사람이나 저녁 무렵에 와서 잠깐 일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품삯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주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공정함’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이야기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느님의 정의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정함과는 다른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공정함’과 ‘정의로움’의 기준을 판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외교부 장관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날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 또래 몇 명은 전 국민 과외금지를 시켜 공정하게 사교육도 없었고, 전국 고등학생이 똑같은 시험 한번 치르고 점수 순서대로 공정하게 대학가고, 공정하게 고시 합격해서 출세하던 그런 시절이 지금보다 차라리 공정했다고 자조하면서 술을 마셨다. 전두환의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현실에 분노하면서...
2017-07-20 | hrights | 조회: 793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교육조직국장 여주 이포보 공사현장을 다녀왔다. 7월에 한 번, 8월에 한 번. 아니 정확히 말하면 4대강 반대를 위해 보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에 대한 지지와 격려, 4대강에 대한 공사를 중단하라는 요구와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집회에 다녀왔다. 7월 집회에도 많이 더웠고, 거름냄새가 역겨웠었다. 나는 그 거름이 장승공원의 나무들을 위해 뿌린 것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아직 열흘을 넘기지 않은 농성 덕에 보 위에서 농성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음성을 듣고 망원경으로나마 그들의 모습을 접하자 찡! 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그들이 저 보를 오를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지금은 저렇게 웃고는 있으나 또 어떤 심경들일지. 아니 자꾸만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고 몰려갈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먹먹하게 다가 왔다. 언제쯤이나 이런 극한의 상황들이 사라질 것인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극한의 투쟁들이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 농성 일주일 후부터 생활용품 반입을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그날도 활동가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생활용품과 먹거리는 반입을 못하고 말았다. 찜통더위에 식량은커녕 먹을 물조차 반입을 기피하는 것은 뭐하자는 것이냐며 집회에 참석한 이들의 비난과 원망이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렇게 그 날은 돌아왔다. 더위에 지친 몸을 시원한 에어컨으로 달래가며... 잠시 동안의 더위에도 지치고 힘들어 차량에어컨을 들들볶아대었는데, 종일을 높은 보 위에서 텐트조각으로 햇빛을 가리는 그들의 더위와 갈증에 미안해야 했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장난질을 하는 현 정부와 공사업체의 잔혹함이라니. 그리고, 8월에 한 번 더 방문했다. 그 때는 거름냄새가 지난번보다 더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상황실의 애기를 들어보니 마을 이장단에서 상황실 철수와 지지방문 방해를 목적으로 일부러 뿌린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와서. 현장에는 4대강공사 찬성현수막이 줄줄이 널려있다. 비슷비슷한 문구들, 개발에 대한 염원을 담은 문구들... 언뜻 봐도 같은 사람이 만든 것 같은 현수막들이 여주 주민의 이름으로 걸려있고 그 사이에 하나, 4대강 반대의 현수막이 또한 여주 주민의 이름으로 걸려있다. 적든 많든 부동산과 토지를 소유하는 있는 이들이 찬성 측이라고 한다. 그 날은 찬성하는 주민들의 집회도 있었다. 그리고 현장방문에는 대학생들도 50여명 와서 현장을 둘러보고 자기들끼리 집담회를 하고 있었다. 찬성집회는 어느 순간 대학생들에 대한 공격과 욕설로 얼룩져 버렸고, 상황실을 공격할 기세로 인해 경찰들이 상황실을 보호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살아생전 전투경찰의 보호를 받기는 처음’이라며 웃음을 주고받기는 했으나 마음한편은 찜찜했다. 자식뻘인 대학생들을 향한 욕설과 흥분은 결코 당당하거나 정당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사업이 중단될까 두려워하는 모습, 안절부절하는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내몰고 있는 걸까? 환경 운동가들이 고공 농성 중인 경기도 여주군 4대강 이포보 공사현장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언제부턴가 이 사회에서는 ‘개발은 돈’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다. 그것은 부동산이 재산증식의 주요한 수단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개발이 곧 돈이 되는 것은 그 개발과 관련한 부동산이 있을 때 확실한 보증수표가 된다. 개발예정지에 외지인들이 부동산을 사들이는 것이 그런 이유이자 증거가 아닐까? 여주 이포보의 갈등도, 찬성 측의 대부분도 부동산을 소유한 이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다수 주민들은 구체적인 이익에 대한 정보보다는 정보와 권력을 점유한 찬성 측의 입장을 전달받을 뿐이라고 한다. 군수와 이장들이 전부 개입되어 있으니 일반주민들이 섣불리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긴 힘들 것이라고 한다. 진실은 결국 권력과 부를 가진 몇몇에 이득이 돌아갈 것이라는 게 아닐까? 지역출장을 위해 오랜 시간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보면 보이는 곳곳이 헤집어져 있음을 본다. 산이 통째로 뭉개지고, 강이 파이고, 시뻘겋게 드러난 맨 땅위에 철과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세워지는 모습... 그것이 개발이란 미명하에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벼로 출렁이던 들과 나무로 싱싱하던 산과 말갛게 흐르던 강물이나 냇물이 그런 모습으로 대체되고 있다. 나의 고향집 앞산도 통째로 뭉개져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는 회색건물들이 고향집에서 보는 시야의 전부가 된다. 여주 남한강의 공사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시뻘건 피를 토하듯 드러난 흙이 푸른 강나루를 대신하고 있다. 강이 주는 평화란 찾아볼 수 없다. 전쟁하듯이 강을 뒤집고 점령하듯이 강나루를 짓이기고 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정복, 폭력, 전쟁 같은, 잔혹한 단어들이 떠올랐고 분노가 올라왔다. 파괴된 자연에 대한 숙연함과 더불어 마치 내 몸을 유린당한 것 같은 분노. 강의 야생성이 주는 편안함과 평화는 이제 더 이상 못 본다는 것에 대한 분노. 현장 방문한 이들이 적어놓은 지지와 격려의 글 중에 ‘그냥 흐르게 두라’는 글귀가 있었다. 그렇다 왜 ‘그냥’ ‘흐르도록’ 두지 못하는 것인가? 왜 사물이 본래의 모습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도록 그냥 두지 못하는 것인가? 여성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으로 재단해서 깎고 자르고 통제하듯이 자본과 결탁한 가부장제는 자연마저 자본의 도구로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여성의 미를 규격화 하듯이 자연의 아름다움마저 규격화를 시도하고 있다. 시멘트로 덧입혀진 인공 강나루가 수풀로 우거진 강나루에 비해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주장하는 배경, 잘 흐르는 강물을 막더니 그 자리에 인공호수를 만들려는 발상의 배경은 아름다움조차도 가공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름 아니다. 제발 그냥 두라!! 천박한 심미안과 욕심을 지금이라도 거두라!! 그냥 이대로, 지금 그대로 두어라!! 자연이 파괴된다면 그 다음은 인간의 파괴라는 것을 모르는가? 몸이 없이 생각이 없듯이 자연이 없이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도 다 아는 상식을 그들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개발과 성장의 의미를 다시 쓰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금 이 시각, 비가 온다. 이 비로 인해 더위는 한풀 꺾이겠지만, 비로인한 또 다른 불편들을 생각하니 편하지만은 않다. 벌써 한 달을 넘긴 농성에 활동가들의 몸은 지치고 이러저러한 병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쉽게 농성을 접을 수 없는 활동가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길은 4대강 사업의 문제에 대한 침묵을 걷어낸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일 것이다. 아니 활동가들의 고충을 떠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안식을 찾고 찜통더위와 이상한파로 나타나는 이상기후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참여해야 한다. 결국 인간 스스로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나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주의 찬성하는 주민들을 직접 만나 묻고 싶었다. “진정 찬성하세요?”, “건설로 인한 이득과 자식들의 미래를 바꾸고 싶으신가요?” 그러나 실제 이 작업은 국가가 해야 한다.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행위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48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지난 7월 하순에 한국에서 방문한 동료교수들과 합류하여 프랑스혁명기행을 열흘 동안 다녀왔다. 천리 길(4천 킬로미터)을 넘게 달리는 강행군이었지만 세계를 흔들었던 대사건의 주요현장과 기억의 터를 돌아보며 그 역사적 유산과 그 현재적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혁명'이라는 용어가 동반하는 너무 심각하고 거창한 무게와 찬란함을 싫어하지만, 기행을 통해 얻은 몇 가지 개인적인 단상들을 '프랑스혁명과 인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프랑스혁명은 과연〈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천명했던 압제에 대한 저항권,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 부당하게 공권력에 의해 구금·체포되지 않은 권리 등을 현재까지 얼 만큼 실현했을까? 프랑스혁명의 의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혁명은 출생에 의한 특권을 재산에 의한 특권으로 대체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야유한다. 성직자-귀족-평민이라는 신분제도가 법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사유재산의 신성불가침을 보장함으로써 (많이) 가진 자와 (적게) 못 가진 자 사이의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는 주장이다. 혁명기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 직전까지 갇혀 있던 센 강 옆의 콩시에르쥬리에 재현된 당시 감옥이 수감자의 빈부차이에 따라 크기와 내부시설이 달랐다는 것을 관찰해 보면 일리 있는 불평이었다. 우리가 프랑스혁명이 잉태한 폭력과 공포의 상징처럼 흔히 알고 있는 기요틴은 사실은 '죽음의 평등'을 위해 특별고안된 것이다. 루이 16세를 포함한 지배계층, 혁명의 과격파와 온건파, 일반시민과 노동자가 동등하게 기요틴 앞에 목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혁명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누구였을까? 지난 200년 동안 축적된 연구결과를 다소 거칠게 요약하면, '재산을 가진 백인남자'가 정답에 가장 가깝다. 권리선언이 보장한 각종 시민권들은 남자에게만 한정되었다는 깨달음이 올랭프 드 구즈라는 여성이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을 별도로 발표하게 된 배경이다. "기요틴에 올라갈 동등한 권리가 있듯이 여성에게도 연설할 권리(=시민으로서의 공민권)를 보장하라"고 외쳤던 구즈 역시 기요틴에 목숨을 빼앗겼다. 무려 150여년 뒤인 1940년대가 되어서야 프랑스여성에게 처음으로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여성들에게는 프랑스혁명이 없었다"라는 한탄이 근거 없는 억지는 아닌 셈이다. 프랑스혁명이 백인 중심적이었다는 해석은 논쟁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에서 크게 비켜나지 않는다. 비록 혁명정부가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도의 철폐를 선언했지만 유색인종을 조건 없이 자유, 평등, 우애의 품으로 포옹하지는 않았다. 프랑스혁명에서 용기를 얻은 아이티 흑인들이 식민지배에 반발하여 최초의 흑인공화국을 수립하려고 투쟁할 때, 나폴레옹은 그들의 영웅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를 체포하여 머나 먼 프랑스 산골짜기 감옥(Fort-de-Joux)에서 사망하도록 방치했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유색인도 혁명의 괄호 바깥에서 부당하게 신음했던 것이다. 아이티의 영웅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가 사망한 프랑스 산골짜기 감옥(Fort-de-Joux) 사진 출처 - 필자 주지하듯이, 이데올로기적 좌표의 기준으로 통용되는 사용되는 '좌파(Left)'와 '우파(Right)'라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의회의 우연한 좌석배치에서 연유했다. 공화정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왼쪽 편을 차지했고 입헌군주정을 선호하던 보수온건파들은 오른쪽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퀼로트(노동자계층)의 전폭적인 정치적 후원을 받으며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좌파의 우두머리격인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후대 프랑스인들의 기억과 선호는 어떤 빛깔일까? 답사단의 한 사람이 "프랑스에서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혁명좌파가 너무 심한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푸념할 정도로 이들은 냉담한 대접을 받았다. 혁명의 진원지이며 핵심무대였던 파리에는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거리는 물론이고 그 흔한 기념동상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우리가 찾은 그의 고향(아라스, Arras)에서조차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일행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프랑스판 혁명기행안내책자에도 기록되지 않은) 그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를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 사진 출처 - 필자 한가롭게 '남의 나라' 혁명의 흔적과 발자취를 찾아 헤맸던 필자가 느낀 전반적인 인상은 혁명의 주변인 혹은 이단자에 대한 역사기억 만들기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억압되었다는 점이다. 선구적 페미니스트 구즈가 거주했던 파리소재 집은 조그만 명패로만 남아있었고, 혁명발발 전 신분의회의원에 선출되어 베르사유에 머물었던 로베스피에르의 숙소는 찾을 길이 없었으며, 진보정당의 전신이었던 자코뱅 클럽이 있던 장소는 현대식 쇼핑센터가 삼켜 버렸다. '베허 버려야 할 왕의 모가지'가 사라진 오늘 날, 혁명의 날카로운 추억은 체 게바라의 캐리커처를 그린 티셔츠로만 전 세계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나에게 물었다. 내가 젊은 그대에게 다시 묻노니, 지금 당신은 무슨 냄새를 더듬으며 쓸쓸히 거리를 헤매는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226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제주에 최상돈이란 가수가 있다. 노래를 참 잘한다. 곡도 잘 만들어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4.3 현장을 찾아다니며 연출되지 않는 공연도 한다. 군사기지 싸움 현장에도 달려와 늘 주민들과 함께 선다. 주민들과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일라 치면, 곧 그의 ‘목포의 눈물’ 요청이 쇄도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조용필이나 한영애의 그것보다 최상돈의 ‘목포의 눈물’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그는 정작 자기 노래를 담은 음반 한 장 아직 못냈다. 수십 년 동안 노래에 온 삶을 바치며 장가도 못간 그가 제대로 된 음반 하나 갖고 있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올봄 즈음에는 ‘상도니 노래 날개 달아주기’ 모임이 시작되었다. 뜻맞는 사람들끼리 십시일반 모아서 최상돈을 ‘데뷔’시키자는 것이다. 말이 ‘데뷔’지, 그의 노래, 아니 그의 삶을 오롯이 한 장의 음반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평생 현장에 헌신해 온 그에게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하자는 취지도 덧붙여진다. 그의 음반에는 그의 노래가 좋아서 후원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도 빼곡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음반이 만들어지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국 투어에도 나서기로 했다. 제주와 같은 아픔을 겪었던 지역들, 예를 들어 평택이나, 부안 등지를 다니면서 현장의 가수끼리 만남을 엮고 비슷한 처지의 지역끼리 서로 보듬고 교류하자는 것이다. 서울 대학로의 공연장에서도 제주 가수의 노래를 통해 ‘제주’를 들려주면 좋겠다. 제주의 소외된 현장에서 늘 함께 하는 가수 최상돈, 최근 그의 음반을 내기 위한 노력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비단 제주의 가수 최상돈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정작 최상돈은 머쓱해하며, 그럴 필요 없다 말리기도 하고, 자신 때문에 모여서 걱정하고 때로 옥신각신 하는거 보면서 상처도 받았다고 하지만, 이번 일은 최상돈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난 6월, 박원순 변호사 블로그를 보니까 광주의 행복발전소라는 곳에서 ‘광주전남 가수 키우기 프로젝트’라는 것을 벌이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었다. 참 좋아 보인다. 지역에서 거리문화, 현장예술을 끌고 가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란 녹녹치 않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에서조차 그 사람들을 무슨 무슨 행사를 벌일 때 ‘써 먹을줄’만 알았지 키우려는 생각은 잘 안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프로젝트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삶과 현장문화를 지키기 위해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제주 속담에 ‘동네 심방 안 알아준다(동네 무당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실력이나 재능은 있지만, 오로지 언제든지 찾으면 볼 수 있는 동네(지역)사람이라고 도무지 키워줄 생각 안한다. 그래서 무슨 무슨 집회나 현장 행사에는 노래 불러달라고, 공연해달라고 하면서 그들의 삶이야 어떻든 술 한 잔 같이하면 그만이라는 현상을 빗대어 볼 수 있는 말이다. 이를 좀 더 확장하게 되면, 언제까지 서울과 제도가 주도하는 문화 권력에 의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물론, 서울에도 여전히 거리의 문화는 마이너이다. 한편, 아직 지역의 문화는 서울로 상징되는 문화 권력에 예속된다. 민중문화니, 독립문화니 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때문에 지역에 좋은 가수, 좋은 예술가가 있어도 큰 행사나 기획을 준비하게 되면 무대에 누구를 초청할까 하면서 서울의 리스트부터 뒤지게 된다. 모든 텍스트는 서울에서 온다. 우리 사회에 대한 시각, 이런 저런 이야기, 시대 담론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의 문화와 자연에 대한 이야기조차 서울에서 나온다. 제주만 하더라도, 최근 한창 각광을 받고 있는 ‘올레’와 관련된 책은 서울에서 나온다. 물론 올레를 걸었던 경험과 이야기는 누구든지 풀어낼 수 있겠지만, 누구보다 제주의 생태와 문화를 잘 이해하고, 어릴 때부터 살아온 터전이기도 한 고향의 이야기가 서울에서 전해지다니, 반성할 일이다. 우리 안에서부터 ‘책 내는 버릇’이 바이러스 처럼 퍼졌으면 좋겠다. 그것은 제주를 남기는 기록이고, 제주를 알리는 홍보이자, 제주를 키우는 문화재생산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제주의 삶과 문화를, 자연을 누구보다도 잘 엮은 책으로, 음반으로, 영화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안 곳곳에 있음을 본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란 작정하고 제도에 얹혀 가거나, 혹은 서울권력과 매칭되는 방식이 아니면 힘겹기 마련이다. 그리고 필히 그것은 주류질서 내에서 스스로 변질될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최상돈처럼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으로 인한 삶의 힘겨움이야 견뎌내겠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은 서울이나 주류의 그것과 견줄 수 없는 값진 산물일진데, 너무 아깝지 않은가! 제도가 아닌,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주류질서 밖 이 곳에서 우리 스스로 창조하는 문화의 질서란 다름 아닌, 지역 공동체에 혼을 일으키는 일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문화다양성을 열어가는 길이다. 수년 전, 서울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출장일을 마치고 혼자 어스름한 저녁의 인적도 드문 서울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자세히 보니 건너 편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모퉁이에서 한 여성이 기타를 치며 마이크까지 세우고 매우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때,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내내 놓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람이라곤 드문 어두운 겨울 거리의 저녁, 삭막한 공간에 퍼지는 그 노래 덕에 나의 무겁던 발걸음도 행복해졌지만, 그녀의 노래는 앞으로 어떻게 이어져 갈까 하는 의문도 더해졌다. 지역의 가수를 키우자. 상업적 공간으로 방치되고 있는 지역의 대학로를 메시지가 생산되는 예술장소로 만들어가자. 주류적 생산체제에 쫓겨 촌(村)으로 들어가 자신 만의 예술을 갈구하는 사람들, 16mm 카메라 둘러매고 이곳저곳 사람과 시대를 담으려 애쓰는 예술가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문화게릴라들을 ‘데뷔’시켜내야 한다. 공감과 연대를 통한 비주류의 방식으로 말이다. * 제주의 가수 최상돈에 관한 이야기는 http://cafe.daum.net/sdXove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10 | 추천: 1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6월 25일 일본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파견노동조합 사무실에서 2008년 경제위기로 해고된 세 명의 일본인 노동자를 만났다. 47세의 다나카씨(가명)는 27년간 계속 일을 하였지만 지난 2009년 생활보호(한국의 기초생활보장제도) 대상자가 되어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0세까지는 정사원으로 일했습니다. 처음에 배송회사의 트럭운전사였고 그 다음에는 닛산자동차, 자동판매기 회사, 와인창고관리를 하다가 43세부터 이쓰즈 자동차회사에서 파견노동자로 일했습니다. 리먼 쇼크로 2009년 1월말에 해고를 당했지요.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도중에 그만두라 하더군요. 부당하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어떤 보상을 받은 적도 없구요. 그저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찾을까, 그것만 고민했습니다. 살고 있던 회사의 료(일종의 기숙사)도 비워줘야 했기 때문에 당장 잠자리도 막막했습니다. 다행히 파견노조의 도움을 받아 생활보호 대상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 36세의 야마타씨(가명)도 비슷한 처지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간 전문학교를 다닌 야마타씨는 전기공사자격증을 취득하고 공장을 전전하다 2002년부터 닛산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파견노동자로 일했다. 일본에서는 2003년부터 제조업 파견이 허용되었고 3년 이상 파견을 지속할 경우 직접고용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2002년부터 5년간이나 파견근로로 야마타씨를 고용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해고당하기 약 1년 6개월 전에 불법파견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직접채용을 요구했으나 지금 회사가 상당히 어려워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지요. 그리고는 계약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2008년 11월말에 해고당했습니다. 당연히 료에서도 쫓겨났구요” 30살인 스즈키씨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2008년 경제위기 때문에 해고당한 뒤 일자리를 못 찾아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고 있다. “이쓰즈 자동차에 파견노동자로 일하면서 10킬로 20킬로 되는 부품을 대(다이) 위에 나르는 작업을 하다 허리를 다쳤어요. 같은 일을 해도 직접 고용된 사람은 저보다 10만 엔(한화 약 130만원) 정도를 더 받더라구요. 게다가 파견회사의 료에 살면 월 4만5천 엔의 임대료뿐만 아니라 가구나 전자레인지 등의 전자기기도 빌리는 것이라서 돈을 내야 해요. 그러다보면 실제 손에 쥐는 것은 얼마 안 되지요” 가격을 대폭 내린 식당 앞에 줄서 있는 일본 시민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2008년 11월 비정규직과 근로빈곤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이래 올해로 다섯 번째이다. 처음 방문하였을 때는 충격이 너무 컸다. 일본은 종신고용과 숙련노동자, 품질중시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전 세계 명품 브랜드로 도배를 한 긴자의 휘황찬란한 거리에는 7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맥주집이 있다. 100년 전통의 음식점에는 자리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그런 일본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쉽게 무너진 것을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나치게 비관적인 일본 학자나 노동조합만을 만난 것은 아닌지를 의심했지만 후생노동성과 지역 노동국을 방문하고 히비야 공원의 파견촌을 찾아 간 후 신자유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인정해야 했다. 54년만의 정권교체를 지켜보면서 평생 일을 해도 근로빈곤의 덫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일본의 현실임을 납득해야 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이분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도쿄 도청의 유명한 전망대에 한 번도 올라가본 적이 없다 하여 그곳에도 함께 갔다. 도쿄의 아름다운 야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는 일본이 바로 한국의 미래가 아닐까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본을 방문하기 전 필자는 한국에서 임금 근로자의 43%가 일하고 있는 5인미만 영세사업체의 고용주와 노동자를 인터뷰 했다. 98년 IMF 경제위기 당시 대기업에서 희망퇴직을 하고 두 번에 걸쳐 창업을 했던 정남길씨(가명, 48세)는 지금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다. 그가 정규직에서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10여 년 동안 그와 그의 가족을 보호해주는 사회안전망은 아무것도 없었다. 월 79만원을 받으며 모 청소업체에서 일하는 그에게는 아직 학생인 두 아이들이 있다. “제 탓이지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어뜨리던 정남길씨는 그래도 아쉬운 듯 이렇게 말했다. “너무 급여가 작아요. 1주 5일, 하루 8시간 꼬박 일하는데 퇴직금도 없고, 9개월 계약직이거든요. 그래도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인데 최저생계비도 안되는 게 아쉬워요. 사회보험은 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지난 직장은 5개월짜리였기 때문에 두 달 실직동안 실업급여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난 3년간 일본과 한국은 자살률이 전 세계 1, 2위를 다툰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마저 없는 사회, 혹시 일본과 한국이 그렇게 닮아가는 것은 아닐지, 일본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48 | 추천: 0
이광조/ CBS PD 가끔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에 편의점에 들를 때가 있다. 동네건 회사 근처건 새벽 시간엔 보통 10대 또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이 편의점을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건을 집어 들고 계산대에서 그네들을 마주할 때면 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어쩌다 술에 취해 함부로 반말 하고 행패를 부리는 손님을 보면 그런 불편한 마음이 더하다. 하지만 편의점에 들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가장 큰 이유는 10대, 2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 계산대 앞에 서서 일하며 얼마나 받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내년에 적용될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5.1 퍼센트 인상된 시급 4,320원으로 결정됐다. 해마다 그렇듯이 노사, 공익위원 3자로 구성된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지루한 논쟁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시급 4,320원이면 하루 8시간씩 한 달에 하루도 안 쉬고 꼬박 일할 경우 1,036,800원에 해당되는 액수다. 사람이 쉬지 않고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면 현실적으로는 한 달 꼬박 일해도 100만원이 안 되는 돈이라는 얘기다. 지난해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인상률을 봤을 땐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와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 인상률에도 못 미친다. 노동착취를 방지하기 위해 임금의 하한선을 법적으로 정하는 최저임금. 최저임금은 애초부터 노동인구 중에서도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층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제도다. 그리고 우리사회에서는 이 최저임금의 가장 중요한 적용대상이 10대, 20대 초반의 아르바이트생들이다. 편의점, 주유소, 각종 패스트푸드 체인점 등 우리 주변에는 법정 최저임금을 받는 우리의 아들, 딸, 동생들이 도처에 널렸다. 80년대 중반 대학 주변의 아르바이트 시급이 1천원에서 많이 주는 곳은 1,500원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25년 사이에 기껏 세배 정도 오른 건가. 그에 비해 당시 사립대학 등록금이 60만원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대학등록금은 적게는 5배에서 많게는 8배까지 오른 셈이다. 국민소득도 늘어나고 민주화도 되고 선진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데, 최저임금은 왜 이리 안 오르는 걸까.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적은 최저임금 기준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최근 노동부의 통계를 보면 지난 해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은 1만 4,869개로 이는 2007년에 비해 3배나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점검 업체 2만5,505개 중 거의 60퍼센트에 이르는 업체들이 최저임금을 위반한 것이다. 이 통계 속에 얼마나 많은 우리 청소년들의 눈물과 한숨, 분노가 섞여있을까. 더구나 영세한 자영업자가 아니라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들이 운영하는 편의점조차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면 할 말을 잊게 된다. 청년권익단체인 청년 유니온이 지난 5월 전국 6개 지역 427개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44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5.8퍼센트가 2010년 기준 최저임금인 4,110원 미만의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으며, 편의점별로는 훼미리마트의 73.3퍼센트, GS25의 62.9퍼센트가 최저임금을 위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편의점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가 아니었다.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임금이 그 밑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는 하한선을 법으로 정해놓은 것이지 딱 그만큼을 주라는 게 아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10대, 2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고 밤낮 없이 아무 때고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실제 임금은 그보다 훨씬 높아야 하는 게 상식에 맞을 것이다. 선진국 치고 우리처럼 하루 24시간 어딜 가든 편의점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라는 없지만 그나마 우리와 비슷한 일본의 경우 최저임금 수준이 우리의 2배가 넘고 심야시간에는 더 많은 임금을 가산해 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청소년들의 최저임금 문제는 보수를 자처하는 분들이 앞장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가족의 소중함, 공동체의 가치, 어른의 책무를 강조하는 보수라면 부모세대와 우리사회가 보호해야할 청소년들을 이렇게 착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돈만 벌면 된다는 장사치가 아니라면 훼미리마트나 GS25 같은 재벌그룹 편의점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 편의점은 최저임금을 지킨다는 윤리강령부터 마련하고 편의점마다 이를 지킨다는 서약을 받고 인증마크라도 붙여라. 그런 다음 10대, 20대 청소년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될 수 있도록 시급을 현실화하라. 최저임금은 아무리 어려워도 그 정도는 줘야 된다는 사회적 합의이고 이런 합의는 영세업체에나 해당되지 재벌그룹들이 운영하는 편의점체인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편의점 출입구 옆에는 커다란 모니터에서 하루 종일 광고영상이 나온다. 카라, 소녀시대, FT 아일랜드, 빅뱅... 화려하게 차려 입은 10대 아이돌 그룹들과 창백한 얼굴의 10대 아르바이트생. 무심코 지나치지만 그 극명한 대비에 가끔 쓴웃음이 난다. 자식세대, 청소년들을 이렇게 착취하고 소비하는 사회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자식들을 잡아먹었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크로노스가 머릿속을 맴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