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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학살법(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7:04
조회
262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10여 년간 과거청산 문제에 천착해온 활동가들과 과거사 관련기구에 참여한 사람들이 지난 주말에 ‘역사와 책임’이라는 주제로 대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아쉽게도 공식적인 토론회를 마치고 발길을 돌렸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난 10년 동안 과거청산을 위해 많은 글을 썼으며, 2007년도에는 국방부의 과거사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군의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는데 참여하였다.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극복되지 않았다는 질책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을 분담해야 할 처지이다.

토론회는 과거청산작업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정치적 조건이나 과거청산의 목표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에 과거청산작업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달랐다. 나는 간신히 이루어진 정권교체 상황에서 과거청산작업이 물꼬를 텄으며, 이 작업이 파상적으로 확대되었다고 본다. 처음부터 명료한 각본에 따라 대의를 강력하게 밀고나갈 사정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물론 반대편의 아저씨들이 과거청산의 대의를 선선히 용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타협으로 시작된 과거청산작업은 결국 장기적인 과제의 일부에서 성과를 내었다고 할 수 있다. 불완전한 역량 속에서 시작하여 진상조사라는 작은 문턱을 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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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부차원의 과거청산작업이 막을 내린 상황에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가 토론회의 또 다른 고민스러운 주제였다. 더욱 큰 문제는 우리가 과거 청산을 위해 투쟁할 의지를 갖고 있는 지이다. 인식은 얻었지만 의지를 상실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과거청산의 비전 문제였다. 비전은 항상 좋은 세상을 가리킨다. 결국 들춰진 진실을 일반시민들과 공유하고, 그에 기초하여 역사와 인권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키고, 인권유린에 기초가 되었던 제도를 혁신하는 것이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청산의 현재를 미래로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소위 과거청산 세력들이 민주주의 운동세력들, 또는 일반시민들과 튼튼한 네트웍을 형성해서 성과들을 공유하고 확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토론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과거청산이라는 말이 칙칙하고 위협적인 퇴영적인 느낌을 준다. 복수와 부정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복수도, 처벌도 불가능한 상태다. 복수나 처벌을 실현시켜줄 정부가 향후에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결국 약속이다. 정부가 미래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약속을 얻어내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과거가 과거로만 머물지 않고, 미래도 근본 없이 솟아오르지 않는다. 미래는 과거의 관성이다. 예컨대, 약속은 집단살해를 낳았던 과거를 단절하겠다는 선포행위이다. 거듭나겠다는 약속이다. 그러한 약속이 어디 노무현에게는 의무이고, 이명박에게는 옵션이겠는가?

실제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전후에 예비검속에 따라 민간인에 대한 집단살해가 전국적으로 저질러졌다. 그러한 학살의 근거는 군이나 경찰의 지침이었다. 더 올라가면 권력자의 생생한 의지와 지시를 만날 것이다. 입헌적 구조에서 설명할 수 없는 방식들이 오늘날에는 제도적으로 완전히 극복되었는가? 즉 전쟁이나 유사시에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까? 물어볼 것도 없이 군대나 경찰은 과거와 다름없이 유사시에 비밀스럽게 민간인을 사찰하고 구금할 것이라고 예측된다. 한번 살상에 길들여진 권력은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따라서 궁금하다. 누가, 어떠한 조건에서 어떠한 부류의 사람을 구금하고, 어디에 구금하고, 전쟁수행에 방해가 된다면 그들을 종국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요즈음 유행어로 호모 사케르(homo sacer) 또는 관타나모 프로그램이 궁금하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의 전언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프로그램이 정부의 국무회의 수준에서 국가기밀로 동결되어 유사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때가 오면 그러한 의결은 사람을 잡아먹는 히드라가 될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로 학살의 과거가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다.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아이가 커서 폭력가장이 된다는 것이 사물의 본성이다. 대오각성이 없고서는 변할 수 없다. 권력도 마찬가지이다. 대오각성에 기초하여 약속하도록 해야 한다. 과거가 과거로 그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극악한 야만조차도 상명하복과 위계질서를 거치게 되면, 경산의 코발트 광산처럼, 유대인 가스실처럼 죄의식마저 결여한 채 거리낌 없이 집단살해가 저질러진다. 이미 책임의식이 증발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책임의 마비상태를 파괴해야 한다. 비밀에 부쳐진 정부의 ‘검속구금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누가 기안했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세상에 알리고 싶다. 그리고 국제인도법이나 입헌적 원칙에 맞게 그것을 바꾸고 싶다. 모범학살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