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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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1. 공포와 야만 2024년 12월 3일 밤에 반헌법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시민들의 위대한 투쟁을 통해 이튿날 새벽에 해제되었다. 2025년 4월 4일 대한민국 국민 약 70%가 “주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듣기 위해 눈과 귀를 모았고, 그 바람이 성취되었다. 윤상현 의원이 티브이(TV)조선 ‘뉴스퍼레이드’와 전화 인터뷰에 따르면, 파면 소식을 들은 당사자 윤석열은 “둔기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라고 하면서, “이 국가와 국민은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겨레 신문의 이유진 기자가 전하는 바다. 세간에서는 미신, 망상, 가상현실 속 심리 등에 사로잡힌 인격적인 파탄 상태라고 하는 수식어가 윤석열의 존재를 규정한다. 이러한 윤석열의 미신적 망상 상태를 개인으로서의 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한국 사회의 정체(正體)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사회는 야만적인가, 문화적인가? 일도양단으로 나눌 수 없음은 물론이다. 놀라운 일은 예술 문화적으로는 상당 정도의 단계에 올라선 것 같은데, 정치 사회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야만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무속에 틀림이 없는, 손바닥에 ‘王’ 자를 새기고 나온 것을 번연히 보고서도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데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모르긴 해도 그에게 표를 던진 국민 대다수는 이른바 여러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K-컬쳐’의 위용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야만적인 자가 문화적인 정신 상태를 갖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가? 멀쩡하게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에서 높은 지위를 누린 뒤 적절히 부유한 상태로 은퇴한 자들이 이른바 ‘태극기 부대’에 동참하면서 윤석열을 지지한다. 충분히 지성적일 것 같은데, 아니다. 멀쩡하게 아주 야만적이다. 야만성의 원인은 공포다. 가진 걸 빼앗길까 봐 크게 두려워하는 그 공포심은 정신적으로 야만성을 일으킨다. 남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학문과 예술문학을 애호하고 이로써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채운 정신세계를 이룬 만큼 공포심에서 벗어난다. 원리상 빼앗길 수 있는 돈과 권력에 얽매인 자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고 그만큼 야만적이다. 이러한 야만적인 자들에게 ‘K-컬처’의 위용은 자신의 존재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좋긴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돈이 많고 명예에 따른 사회적인 권력을 누리는 자가 다 그렇다는 건 물론 아니다. 학문을 숭상하고 예술문학을 애호하는 자들에 비해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것이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빼앗아 갈 상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적인 상대를 향한 적개심과 분노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거기에서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건 한 걸음이다. 파면 소식을 접한 윤석열이 걱정했다는 그 국가는 무슨 국가이며 그 국민은 어떤 자들을 지시하는가? 그 국가는 자신이 그 꼭대기에 올라서서 마음껏 운용하던 국가다. 그리고 그 국민은 그를 지지하느라 미친 듯 밤을 새우기까지 하면서 크게 대세를 이룬 모습으로 탄핵 반대를 외친 자들, 특히 ‘태극기 부대’니 ‘세이브코리아’니 해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양손에 거머쥐고서 심지어 법원을 여지없이 파괴하는 폭력적인 야만의 발광을 일삼는 무리다. 자신의 파면으로 인해 그 국가가 무너졌고, 그 국민이 자신을 외면하고 흩어질까 봐 걱정된 것이다. 2. 야만의 정치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빼앗길까 봐 공포에 휩싸인 폭력적인 야만성은 특히 정치권에서 발작적으로 나타난다. 그 배후의 주요 원인은 방금 말한 윤석열의 그 국민, 그 전부터 집단적인 위세를 떨치면 특히 윤석열 탄핵 반대를 외친 기독교 광신 세력의 대대적인 준동이다. ‘국힘당’의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이른바 지도부 내지는 유명 국회의원 인사들이 반헌법 내란 우두머리인 윤석열의 관사에 떼 지어 몰려가 마치 죽음의 위기에 처한 군주를 구하려고 하기라도 하듯 엉터리없이 열변을 토하면서 꼭 윤석열을 지키겠다고 맹세한다. 파면 이후에도 그 태도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그래야만 기독교 광신 세력을 자신들의 지지 세력으로 확실하게 굳히고, 그 대세에 동조하는 주변 세력을 규합할 수 있다는 정략적인 심보의 표출로 보인다. 그런데 지귀연이라는 판사는 도대체 왜 전대미문의 구속시간 초과의 원칙을 내세워 윤석열을 석방했을까? 그리고 이에 대해 검찰총장 심우정은 왜 즉시항고를 하지 않았을까? 현재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지위와 권력을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가 작동했음에 틀림없다. 공포에 따른 추하기 짝이 없는 야만적인 행위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만적이라고 할지라도 지금까지 쌓아 올린 나의 지위에 따른 권력과 가식적인 명예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킬 수만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대통령 권한 대행이란 자들은 또 왜 그런가? 법도 원칙도 대의도 정의도 공정도 일절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그동안 자신을 그 자리에 임명하고 자신 위에서 군림한 대통령을 지극히 부러워해 오다가 자신에게 급작스럽게 주어진 대통령이란 자리를 얼씨구나 즐기는 자처럼 군다. 자신의 행위가 직권남용이고 직무 유기임을 알면서도 반헌법의 내란 행위를 직간접으로 두둔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을 그 자리에 임명한 ‘분’을 감히 어떻게 배반할 수 있는가 하는 개인 간의 의리임을 고백한다면 그나마 덜 야만적일 것이다. 그동안 너무나도 야만적인, 예컨대 10만 원도 채 안 된다는 김혜경 법인카드 유용 사건의 수사에 130번의 압수수색을 반복하는 등, 하는 검찰의 행태를 보아온 탓에 ‘윤석열 내란 우두머리’ 사건을 제대로 기소해서 무기 또는 사형의 처벌을 받게 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다. 이미 담당 특별수사검사팀은 심우정의 즉시항고 포기에 동조해 윤석열을 풀어주지 않았는가. 우리 한국 사회에서 번연히 목격하고 있는 이 모든 야만의 정치 행위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서 설명해야 하는가? ‘빼앗김에 대한 공포에 따른 야만성’이라는 개념으로만 과연 제대로 해석 ·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3. 종교적 파시즘 세력 ‘윤석열 정치 집단’은 곧 있을 대선을 통한 전적인 정치 구도의 변화에 따라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발본색원은 전혀 쉽지 않다. 그 배후의 뿌리에서 기독교 광신 세력이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의 보장을 악용하여 계속 집단적인 사회 정치 행위를 일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다. 이번에도 민주시민들의 엄청난 혁명적인 투쟁으로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기획을 담은 내란의 실효적인 현실화를 막아내고, 길고 긴 싸움 끝에 마침내 대통령 윤석열 파면을 끌어냈다. 하지만, 민주시민의 힘을 총동원해도 이 야만의 기독교 광신 세력을 잠재우는 걸 넘어서서 아예 무력화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게 여겨진다. 필자는 그야말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급기야 나름 기독교 신념을 지니고서 신학교에 입학해 졸업까지 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포기한 지 40여 년이 되었고, 당연히 지금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런 필자로서는 대대적인 기독교 광신 세력들에 의해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가 야만성을 전격적으로 드러내는 작금의 현상에 대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간 모두를 근원적으로 죄인으로 여기고 인간 예수를 구원의 하느님으로 믿는 기독교의 기본 원리를 싸잡아 비판할 생각은 없다. 종교의 원리와 그에 따른 힘이 세속적인 국가에 스며들어 지배하고자 할 때 크게 문제가 된다.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고 했다. 이 말이 갖는 함의에 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항에서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갖는다.”라고 명기하고, ②항에서는 “국교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되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한 국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원리상 종교는 초국가적이다. 종교가 갖는 초국가적인 성격은 여러모로 위험성을 안고 있다. 기독교 특히 신교의 경우, 신자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이다. 신과 개인의 구원 사이에 매개자를 두지 않는다. 목사도 한 사람의 신자일 뿐 신도의 구원과는 직접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구원받은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지만, 그 하느님의 나라는 영적인 차원에서일 뿐 세속에서 현존하지 않는다. 이는 가톨릭과 크게 다르다. 가톨릭은 교황의 무오성과 그 강력한 사도적 권위를 정점으로 한 세계 전체 교회를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공동체로 여긴다. 간단하게 말해, 신교에서는 신도들이 모이는 교회당에 가지 않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성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신도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정치 사회를 혼돈으로 크게 흔들리게 하는 주범인 전광훈과 손현보는 이른바 신교의 목사다. 목사라고 해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목사도 국민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치적인 불의와 불공정에 대해 과감하고 강력하게 비판해야 한다. 심지어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독재정권과 싸운 목사들이 적지 않음은 다들 아는 바다. 전광훈과 손현보도 자신들을, 선봉에 서서 정치적인 불의와 그에 따른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의로운 투사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정의(正義)가 무엇인가? 이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요 발언과 행동을 일일이 새겨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이번 윤석열 내란과 탄핵을 둘러싼 사건만으로도 그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국가의 정의가 무엇인지 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반헌법적으로라도 비상계엄을 통해 군대를 동원한 무소불위의 통치를 획책한 윤석열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신앙의 이름으로 국가의 최고 이성의 표현인 헌법과 이를 통해 표현되는 국가의 주권을 배척하는 것이다. 신앙이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를 바탕으로 국가의 국민공동체가 갖는 주권적인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다. 따지자면, 여기에는 국가와 교회 내지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조화와 대립의 문제가 깔려 있다. 교회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국가의 바탕을 허물고자 한다면, 과연 근본적으로 폭력을 근거로 작동하는 국가는 그러한 활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그들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말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헌법을 악용해 반헌법적 · 반국가적 활동을 정당화하지 않을까? 가장 큰 문제는 전광훈 · 손현보의 세력은 특정한 개인인 그 두 사람을 마치 신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인 양 떠받든다는 점이다.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다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을 ‘신천지 교회’의 이만희 같은 자야말로 그 집단에서 교주로서 신적인 권위를 지녔다. 그 자체로 워낙 우리 사회를 부패시키지만, 노골적으로 나서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교회가 세속에 물들면 안 된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하지만, 세속과 맺는 기나긴 역사적인 관계를 통해 그 현실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은 경우, 신앙은 맹신이 된다. 맹신의 징표는 초월적 지위를 지닌 권위자를 말 그대로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맹신에 따른 신앙으로부터의 최고의 일탈은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신격화다.”라고 했다. 여기에는 당연히 사디즘적인 인격적인 가학과 마조히즘적인 동물적 피학의, 이른바 ‘가스라이팅’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전광훈 · 손현보는 자신들의 위엄과 권위를 위해 이러한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자들로 보인다. 이러한 인간의 신격화 내지는 초월화가 정치에 이관될 때, 바로 파시즘적 폭력 정치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공화주의는 물론이고 주권 형성에서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마저 근본적으로 위협하게 된다. 종교적인 신앙을 중심으로 파시즘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이른바 목사가 현실 정치에서도 권력을 확보하고자 할 때 그 정치적인 이념은 당연히 반민주-반공화적인 파시즘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종교적 파시즘적인 정치 세력의 형성과 확산을 지극히 경계할 일이다. 아울러 지극히 위험한 그러한 이념적 지향을 지닌 세력을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자 함으로써 저 파시즘적인 정치 세력을 정당화하면서 힘을 보태는 ‘국힘당’을 중심으로 한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옹호 정치인들의 저 야만성을 다시 한번 경계한다. 그러면서 새 민주정권이 들어서서 민주시민들과 함께 어떻게든 최대한 지혜롭게 계몽시켜 저들의 극우 파시즘적인 준동을 막아내야 할 것이다.
2025-04-15 | hrights | 조회: 373 | 추천: 5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정치 환경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당장 장기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화폐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비촉진을 위한 재정 정책으로 단기 효과가 가장 큰 것이 지역화폐임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국내외 경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가운데 즉시 전력으로 투입해 효과를 볼 수 있는 게 지역화폐이다. 그러나 최근 나오는 지역화폐 활성화 방안은 무리수이거나 지역화폐의 존재 이유를 벗어나 돌아오지 못하는 오류의 다리를 건너게 될지도 모르는 내용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모 매체에서 보도한 내용을 들어보자. 지역화폐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지역화폐 사용 가능 지역을 거주 지역뿐 아니라 타 시군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경기도의회 한 의원이 제안했다는 것이다. 도 내 타 지역으로 출퇴근하거나 각 시군의 경계에서 거주하는 도민들은 지역화폐 사용이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한 8년 전 시흥시 지역화폐 시루를 도입하면서 각 동네마다 설명회를 개최했었다. 인근 안산시와 인접한 동에서 한 질문을 받았다. “안산에서도 쓸 수 있어요?”. “지역화폐는 말 그대로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만 쓸 수 있습니다”. “에이, 안산에서도 못쓰는 걸 왜 만들어요. 난 안 쓸래요”. 허탈했다. 지역화폐의 가장 큰 도입 목적은 지역 내 소비의 역외유출 방지이다. 그래서 지역에서만 쓸 수 있게 설계된다. 만일 A와 B 지역의 지역화폐를 통합한다면 필연적으로 한 지역으로 지역화폐 소비는 쏠릴 수밖에 없다. 도입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 반대의 주장으로 이런 게 있다. 지역화폐 할인 인센티브 예산이 부족하니 해당 지역 시민에게만 지역화폐 구매를 허용하자는 내용이다. 이는 해당 지역 거주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사실상 불가능하며 타 지역 사람들의 사용을 아예 차단하여 오히려 지역경제 활성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면 앞서 제기한 한 도의원의 불편 해소 방법은? 지역화폐는 타 지역민뿐 아니라 가능만 하다면 외계인도 구매 환영이다.(가끔 이렇게 외계인 드립을 시전하는데, 아쉽게도 웃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 각 지역의 지역화폐를 구매해 사용하면 된다. 모바일의 경우 앱에서 사용지역 재설정을 통해 순식간에 가능하다 경기도 의회에서는 또 행안부에서 정한 지역화폐 가맹점 매출액 기준 30억 원과 다르게 경기도는 12억 원이 기준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라며 도민들이 지역화폐를 폭넓게 쓸 수 있도록 상향 조정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충분히 논의해 볼 만 하다. 하지만 지역화폐 도입은 앞서 말한 소비의 역외유출 방지와 더불어 역내유입 소비의 균등한 배분이라는 큰 목적이 있다. 지역화폐는 소비자 혜택보다 소상공인을 살리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 대기업이나 매출이 높은 업체 대신 골목상권 소상공인에게만 사용하도록 한 불편한 돈이다. 그래서 세금을 들여 불편한 돈 쓰시라고 할인 혜택을 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추가 한쪽으로 기울면 안 되지만 소비자 중심의 지역화폐 정책이 너무 강조되면 자칫 퍼주기 논란으로 흐를 수 있다. 지역화폐의 충전과 이용이 주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카드가 기반이 되기 때문에 노인·장애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의 접근성이 떨어지므로 이를 개선하고, 연령별로 지역화폐 발행 비율을 정하는 등의 개선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럼 다시 종이형태의 지류권 지역화폐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카드와 모바일 외에 다른 결제 방식이 현재 가능할까? 연령별로 구매할 수 있는 비율을 정한다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 고령층의 모바일, 카드형 지역화폐 사용 비율이 크게 떨어지지만 90세를 넘겨도 모바일형을 잘 쓰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청년층이지만 카드형만 고집하는 경우도 많다. 지역화폐의 형태가 연령대별 사용의 차이를 만든다고 단순히 생각할 순 없다. 결제수단의 변화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사용법을 더 쉽게 개선하거나 사용 교육을 확대하는 등의 방법이 더 현실적이다. 지역화폐를 바로 사용하지 않고 쟁여두어 골목상권 활성화 효과에 물음표가 찍힌다는 주장도 있다. 근거가 무엇이었을까? 시흥화폐 시루 사용자의 충전 후 평균 사용 기간(순환율)은 2024년 약 24일이었다. 1인당 월 30만원까지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기본 룰에 비춰보면, 대체로 한달 내 알뜰하게 지역화폐를 소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역화폐는 저축도 못하고 이자도 없다. 보유한도도 시흥시 지역화폐 기준 150만원이다. 5년으로 길기는 하지만 유통기한도 있으니 쟁여놓을 이유가 없다시피 하다. 지역화폐 결제액 4분의 1이상이 학원비에 쓰이니 골목상권 활성화 효과에 물음표가 찍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역화폐의 학원비 결제 비율은 지난 2~3년 사이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가계소비에서 역대급으로 사교육비 비중이 올라간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학원비 쏠림현상은 가중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골목상권 활성화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단정짓기 쉽지 않다. 시흥시 시루 가맹점의 업종별 매출을 살펴보면 학원서비스업은 대다수가 카드사 결제수수료율 구간 기준 연매출 3억 이하 영세사업장이다. 대도시의 기업형 입시학원을 제외하고 그들은 대표적인 골목상원의 영세 소상공인이다. 학원비 결제를 막는다면 지역화폐 소비가 음식점이나 소매업으로 돌아갈까? 밥을 굶더라도 자녀 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새 천정을 뚫고 있는 사교육비 지출과 경쟁 해결책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 최근 국회에서는 정부의 국비지원 의무화를 새로 넣는 지역사랑상품권법 개정안이 상정되었다. 또 대선을 앞두고 그만큼 지역화폐에 더 큰 기대가 곳곳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방향으로 가선 안 된다. 보다 깊이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신중하게 정책을 만들고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금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잘 쓰는 것이 능사라는 점을 견지하며 지역화폐의 효과성과 가능성을 타진해야 할 것이다.
2025-04-08 | hrights | 조회: 86 | 추천: 5
이동우 / 변호사 2024. 12. 3.의 위헌적인 계엄사태 이후 탄핵소추된 대통령에 대한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 검찰의 항고포기, 그리고 헌재의 탄핵심판선고지연사태까지 경험한 지금,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은 총체적인 불신의 늪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국민적 우려와 불신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변화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오늘은 그 중 하나인 배심제 도입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배심제의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미국에서는 배심제의 도입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배심제를 지지하던 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배심제의 지지자들은 직업법관이 특정한 사고방식이나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사회를 경험하고 가치관을 형성하고 유지한다. 그러나 직업법관들은 일반 시민들에 비해 훨씬 더 좁은 범주의 구성원과 인간관계만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의 보편적인 상식과 정의관념과는 다른 편협한 시각이나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초기 정치가들의 우려였다. 가끔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과 동떨어진 판결이 뉴스에 소개될 때마다 이러한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둘째, 직업법관에 대한 정부 혹은 권력집단의 영향력을 우려했다. 직업법관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의해 임명된다. 즉, 구조적으로 정부에 치우칠 수밖에 없고 나아가 자신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정치세력에 편향될 우려도 있다.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 참여하는 배심제와 달리 개개인의 법관은 금품이나 향응 등에 의해 매수될 위험도 더 높다고 주장한 미국의 정치가도 있었다. 이런 모든 우려는 결국 개별 법관의 정부 혹은 특정세력에 대한 편향에 대한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윤석열에 대한 구속취소 결정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선고 지연을 통해 이러한 우려가 1700년대 후반의 미국만이 아니라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도 현실적인 고민임을 많은 국민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마지막으로 판단의 합법성과 적정성이다. 이는 한 명의 직업법관보다 다수의 일반 시민들의 결론이 보다 정의와 형평에 부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글도 모르던 중세 유럽이나 조선 초기와 같은 과거가 아닌 국민의 교육수준이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높아진 현대사회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주장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교육수준이 높은 국민이 많은 사회에서는 직업법관 개인의 판단이 다수보다 나을 것이라는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흔히들 법률지식의 정도 때문에 직업법관이 다툼의 결과를 판단해야한다고 얘기하지만 대부분의 재판은 어떤 사실이 있었느냐 아니냐, 즉 사실판단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판단에는 법률지식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극히 일부의 사안들, 즉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닌 이른바 법률적 해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사안도 관련된 법률에 대한 법률전문가의 조언을 받으면 우리나라의 평범한 일반 시민은 해당 사건에서 옳고 그름의 법률적 판단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물론 배심제도 완벽한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단점이 존재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점이다. 배심재판은 기본적으로 배심원의 선정절차를 거치고, 배심원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들고 비용이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 직업법관이 아닌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양측이 자신들의 주장을 해야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기도 한다. 그렇게 때문에 배심제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비용과 효율성을 이유로 배심제가 현대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은 제도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다. 모든 사건에 배심제를 도입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면 중요한 형사재판이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적용되는 사건들에 우선적으로 배심제를 도입할 수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배심제의 범위를 점차 넓혀가고 또 배심제가 필요치 않은 단순한 사건들도 유형화할 수 있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효율성은 의사결정의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대부분 경험을 통해 알고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효율이 중요해도 꼭 필요한 부분까지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일이 많아 바쁘기 때문에 밥을 계속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내 몸을 챙기지 않으면 결국 나를 둘러싼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내가 쓰러져버리게 된다. 효율성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빌미로 주권자가 직접해야 할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을 누군가에게 맡긴다면 어떻게 될까? 주권자의 일을 대신하는 그 사람, 그 집단이 주권자의 위치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게되지는 않을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검찰과 일부 법관들의 위헌적인 폭주가 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용이 들더라도 주권자라면 주권자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리고 사법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배심제다. 많은 법률교육을 받은 법률가만이 올바른 재판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주권자인 국민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생각한다면 배심제를 배척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2025-04-02 | hrights | 조회: 175 | 추천: 10
장은주 /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이 이루어진 지 100일 지났음에도 헌법재판소의 인용 판결이 나오고 있지 않다. 온 국민의 시선이 헌법재판소에 쏠려 있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지 계속 선고가 지체되고 있다. 이러는 와중에 인내심의 한계를 호소하는 시민들이 늘었다. 그러면서 묻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정당한 민주적 선거 과정을 통해 구성된 국회의 3분의 2가 넘는 의원들이 의결한 대통령 탄핵을 선출되지도 않은 소수 헌법재판관들이 다시 심사하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헌법재판소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이 찬성하는 탄핵에 대한 최종 결정을 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일까? 8(9)명의 헌법재판관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새삼 현대 민주주의에서 헌법재판소의 본질적 역할과 의미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독일을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독일 헌법재판소의 역할과 의미 규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미국으로 망명했던 유대인 출신 독일 법학자 칼 뢰벤슈타인(K. Löwenstein)이 제안한 ‘전투적 민주주의’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극우 파시스트 같은 적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의 원리 적용을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 ‘방어적 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적 민주주의 개념은 이후 나치 패망 이후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나치 정당 같은 반민주적 세력에 대한 강력한 감시와 견제, 심지어 결사의 자유 같은 민주적 권리의 제한을 핵심으로 한다. 독일은 극단적인 반민주 정치 세력을 감시하는 ‘헌법수호청’과 함께 헌법재판소가 그 일을 맡게 했다. 헌법재판소는 ‘위헌정당’을 해산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고, 실제로 나치당의 후신 정당 등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는 바로 이런 독일의 사례를 본떠 새 민주 헌법을 만들면서 헌법재판소를 도입했다. 헌법재판소에 부여한 사명은 명확하다. 한 마디로 우리 헌법에 새겨진 국민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다양한 도전에 맞서 헌법을 수호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헌법재판소는 그동안 이런 사명에 걸맞게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서 꽤 긍정적 역할을 해 왔다. 가령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지했던 민법 조항이나 음란물 등에 대한 지나친 국가의 검열 행위를 위헌으로 판결했고, 정치 관계법 등의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조항들도 바꾸도록 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여성들의 낙태를 제한한 법률을 위헌이라고 판시함으로써, 여성들의 권리 신장에 역사적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헌법재판소가 국민들의 기본권 보호라는 존재 이유에 언제나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헌재는 그동안 ‘자유권’은 몰라도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차원의 삶의 안정성을 위한 ‘사회적 권리(사회권)’를 보장하는 데서는 일관되게 소극적이었다. 자유권과 관련해서도, 우리 시민들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해 온 국가보안법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내란을 기획한 위헌 정당이라며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린 판결의 경우에도 명확한 증거도 없이 정당의 ‘위헌성’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적용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를 이전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계획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던 일은 헌법재판소의 기득권 편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헌재는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조선 시대 이래의 ‘관습헌법’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는데, 아마도 세계 헌법재판사에 기록될 엽기적인 판결이 아닐까 싶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왕조 시대의 유사 헌법을 근거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수도 이전 계획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으니 말이다. 많은 시민들은 그 배경에 서울에 기반을 둔 당시 헌법재판관들의 직접적 이해관계, 특히 부동산 기득권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했는데,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민주적 의회의 결정을 소수의 사법 엘리트들이 다시 한번 최종적으로 인준하게 하는 이런 ‘사법 심사(judicial review)’ 제도는 근대 이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민주주의가 지닌 중우정치의 위험을 막고 ‘다수의 전횡’에 맞서 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의 기본권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자는 게 그 기본 취지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과 비판이 있지만, 이런 방식의 민주주의 헌정화가 시민들의 기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데서 가지는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법심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치의 우위를 내세우며 민주적 헌정 질서의 본원적 가치와 민주적 정치 과정의 의미를 무시할 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그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가 진행하는 사법심사 제도가 지닌  심각한 자가당착 중의 하나는, 민주적 다수결주의의 위험성을 근거로 도입된 이 사법심사도 결국 다수결로 최종적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이번 윤석열 탄핵 심판의 경우에는 헌법재판소의 구성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3명만 인용에 반대해도 기각될 수밖에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 헌법재판소는 헌정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그 본질적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결정적인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관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2025-03-26 | hrights | 조회: 101 | 추천: 7
윤동호 /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타인이 그것을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타인을 설득하고 납득시켜서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이 하도록 하는 야만적인 방법은 물리력이다. 이른바 조폭이 흔히 이 방법을 사용한다. 요즘은 흔히 가스라이팅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심리적 강제를 하기도 한다.   권한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타인을 강제하기도 한다. 지난 해 벌어졌던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가 그 예다. 군사력과 경찰력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과 정치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하려고 했다. 조폭과 다르지 않다. 돈(money)으로 타인을 강제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허용한 방법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돈으로 산다. 돈을 주면 심지어 범죄도 불사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사고가 팽배한 것 같아 무섭다. 민주사회에서 허용된, 타인을 강제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바로 법(法)이다. 법은 강제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이 하려고 하지 않을 때 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법치사회, 법치주의라는 말이 있다. 법은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법이 강제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법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약속이다. 더불어 함께 살면서 타인과 갈등이나 분쟁이 생기면 어떻게 처리할지 미리 약속한 것이다. 혼자 살면 법이 필요 없다. 분쟁이 생겨도 우리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하면 법은 필요 없다. 그래서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삶이 전쟁이라면 민주사회에서 법은 총이다. 법이라는 무기를 가진 사람과 그런 무기가 없는 사람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법을 잘 알면서도 타인을 설득하여 분쟁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더디게 진행되는 법적 절차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이다. 법적 절차에 연루된 우리를 변호사가 결코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절차를 벗어날 수 없다. 법이 최고이고, 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 곧 법률만능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길 여지가 크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아껴야 한다. 상처뿐인 영광을 맛보기 위해서 법을 이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법의 전제가 되는 사실이 무엇인지에 따라 적용되는 법이 달라질 수 있다. 폭행의 고의로 타인의 신체를 접촉한 것이면 폭행죄이지만, 추행의 고의로 타인의 신체를 접촉한 것이면 강제추행죄이다. 법의 전제가 되는 사실이 확정되었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해 적용되는 법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지에 따라 법적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유죄의 전제 사실이지만 무죄가 될 수도 있다. 법은 우리의 약속이지만 그 약속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피의자)은 수사기관이 법관의 영장을 받아서 체포나 구속을 할 수 있다. 수사기관이 체포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48시간이고, 수사기관이 구속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원칙적으로 10일이다. 그런데 체포나 구속된 피의자가 영장이 발부된 체포나 구속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법원에 체포적부심이나 구속적부심을 청구할 수 있고, 이 경우 법원이 체포·구속적부심사를 진행한 ‘기간’은 체포·구속의 최대 시간에 산입하지 않는다. 이 기간 중에는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예컨대 구속적부심이 3일에 걸쳐 진행되어 33시간이 걸렸다면 구속기간 10일 중 3일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아니면 33시간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체포적부심이 이틀에 걸쳐 진행되어 10시간 32분이 걸렸다면 이틀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아니면 10시간 32분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영장에 의해 체포된 피의자가 청구한 체포적부심이 기각된 후 구속영장이 청구되어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은 경우 법원이 구속영장실질심사를 진행한 기간도 구속기간 10일에 산입하지 않는다. 이 경우 그럼 법원이 체포적부심을 진행한 기간은 구속기간 10일에 산입해야 할까, 아니면 산입하지 않아야 할까. 그런데 구속기간은 체포한 때부터 기산을 한다. 따라서 체포적부심을 진행한 기간은 구속기간에 산입하지 않아야 한다. 이 기간 중에는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은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다.
2025-03-11 | hrights | 조회: 265 | 추천: 9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돌봄이 화두가 된 지 오래다. 한국 사회가 저출생 고령화 사회로 들어섰다는 지표가 분명해질수록 돌봄의 수요도 돌봄을 둘러싼 논쟁도 많아지고 있다. 노년의 부모를 돌보는 일은 많은 중년 세대가 당면한 과제이기도 하고, 아픈 부모를 어린 나이부터 돌봐야 하는 영케어러의 곤란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어쩐지 돌봄은 소홀히 여겨진다는 의혹을 거두기 어렵다. 의료 현장에서 의사가 하는 치료와 간호사의 처치는 전문적 의료 ‘케어’이고, 간병인의 돌봄노동은 ‘허드렛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은가? 장기요양보험제도 아래 요양보호사의 노동도, 가사도우미의 노동도, 청소노동자의 노동도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노동인데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단순노동으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은가? 돌봄은 누구나 필요로 하지만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건 아닌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문명이 시작됐다는 최초의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어느 학생의 질문에 “부러졌다 붙은 대퇴골”이라고 답했다. 미드는 문명화의 첫 증표로 1만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퇴부 뼈를 꼽았다. ‘털없는 원숭이’ 인간은 원시 상태에서 취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집단적 협력을 해야 동물성 먹거리를 사냥할 수 있는 인간에게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동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뼈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된 동료 인간을 내버리지 않았고, 부러진 뼈가 아물 때까지 보살핌을 제공했다. 그 증거가 남은 것이다. 마거릿 미드의 말처럼 돌봄은 인간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이며, 문명화의 척도라 할 수 있다. 돌봄이 ‘오래된 미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봄의 가치가 존중받고 나아가 오래된 미래로서 돌봄의 가치가 고양되기 위해서는 돌봄의 가족화와 시장화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가족이 돌보는 것이 최선이다’ 같은 판단을 당연시하지 않는 게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가족이 못하면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답은 해결책이 아니라 사회 불평등 구조를 은폐하고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족과 시장을 넘어서는 돌봄의 공공화가 필요하다. 나아가 돌봄의 공공화를 위해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실행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돌봄을 인간에 내재한 역량으로, 사회가 높여가야 할 역량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이라는 개념은 가족과 시장을 넘어 역량으로 돌봄의 지평을 확장하는 사유에 실마리를 준다. 이 개념은 1980년대 미국 에이즈 위기 때 미술비평가이자 에이즈 운동가 더글러스 크림프에서 유래했다. 더글러스 크림프는 에이즈로부터 안전한 섹스와 상호돌봄을 하자고 했다. 그는 우리의 난잡함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난잡한’은 ‘가벼운’ 또는 ‘진정성 없는’의 의미가 아니라 게이들이 서로 친밀함과 돌봄을 나누는 방법을 다양하게 실험하고 안전한 섹스를 나누면서 서로를 극진히 돌봄으로써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였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게이들을 의료진도 보건당국도 국가도 심지어 가족도 돌보지 않고 버렸을 때 게이 남성들은 스스로 건강 센터를 만들고 네트워크를 구축해 서로를 돌봤다. 에이즈 위기 때 이들 돌봄 제공자들이 보여준 용기는 미국 같은 동성애 혐오 국가에서조차 감탄과 존경을 불러일으켰고, 게이 남성에 대한 낙인을 누그러뜨리는 데 일조했다. 사진 1.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 『애도와 투쟁(Melancholia and Moralism)』 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99273496 ‘난잡함’을 더 넓게 해석해 보자면, 배타적 친밀함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사랑의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친밀하기 때문에 돌보는 것이 아니라, 돌보기 때문에 친밀성이 얻어진다. 이를 가족에 적용하자면 가족이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돌보기 때문에 가족이 되는 것이다. 가족이 누구에게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하는 따뜻한 안식처인 건 아니다. 어떤 가족은 남보다 못하기도 하고, 성적 지향이나 장애를 이유로 자식에 등을 돌리는 부모도 있다. 가족과 친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난잡한’ 돌봄을 실천해온 소수자 공동체에게는 그들 공동체의 과거가 켜켜이 쌓여 있고 그 역사는 돌봄의 오래된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된다. 정착식민주의에 저항해온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고통 속에 치유와 돌봄,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인들이 고된 농장일로 병들고 불구가 되었을 때 서로를 거두고 돌보던 전통, 장애인 활동가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던 상호돌봄이야말로 되살리고 기억해야 할 역사다. 북미 유색인 퀴어 장애정의 활동가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는 『가장 느린 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의 아카이브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킵니다. 언제든 아프고 장애가 있는 사람이 서로를 기억하고 운동사의 순간들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기념하고, 우리 스스로 존재함을 증언합니다. … 마지막으로 제가 알았던 죽은 이들이 유령처럼 곁을 맴돕니다.” 사진 2.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Leah Lakshmi Piepzna-Samarasinha, 1975- ) 출처: wikipedia 중국계 미국인 장애활동가 앨리스 웡은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에서 장애 조상들을 불러온다. 그녀에게는 홍콩에서 이주한 중국인 부모님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이리어에서 장애운동을 함께 해온 먼저 죽은 동료들이 조상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 앨리스 웡의 ‘불구’ 조상의 계보에는 스테이시 파크 밀번도 들어있다. 2020년에 사망한 스테이시 파크 밀번은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퀴어 장애인 활동가였다. 그의 생전 모습은 곧 25센트 동전에 새겨진다. ‘불구’ 계보와 같은 ‘난잡한’ 돌봄의 계보는 친족의 의미를 해체하는 동시에 재구축하고 돌봄의 의미를 넓힌다. 사진 3. 앨리스 웡 (Alice Wong, 1974- ) 출처: https://www.womenshistory.org/education-resources/biographies/alice-wong 1974년생인 앨리스 웡은 아직 살아 있다. 신경근육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웡은 호흡기를 사용하는 중증장애인이고 미국 장애인 복지제도 메디케이드 수급자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서전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은 장애 극복의 감동 서사 따위는 한 줄도 없고 유머와 재치,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장애인은 사이보그이자 신탁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부고 기사를 이렇게 상상해 쓴다. “서기 2070년 호랑이의 해에 앨리스 웡이 숨졌다. 향년 96세. 신탁 예언자이자 이야기꾼이고 사이보그이며 트러블메이커이고 활동가이고 올빼미형 인간이었다. … 장애가 진전되면서 앨리스는 2045년 달에 있는 무중력 캡슐로 이주했다. 이로써 앨리스는 과학자, 창조자, 탐험가로 구성된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두 번째 크립 우주인단의 일원이 되었다.” 적절한 돌봄이 주어지지 않으면 어린이, 노인, 환자, 장애인의 삶은 영위될 수 없다.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만이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인정받아온 역사가 길지만, 돌봄을 시야에 넣는다면 달라질 수 있다. 앨리스 웡은 장애인은 돌봄을 받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돌봄을 받는 자는 돌봄의 과정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앨리스 웡은 자신을 가리켜 ‘메디케이드 거지’라고 농담하면서 메이케이드를 받기 위한 서류작업과 절차도 엄연한 노동이고, 그러니 장애인이 ‘공짜’로 세금을 축낸다는 건 억지 주장이라고 역설한다. 일본의 장애학자 구마가야 신이치로는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돌봄 주체와 돌봄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사고다. 돌봄을 ‘난잡함’에 열어놓음으로써 돌봄은 가족의 주술에서 풀려나고, 돌봄노동의 시장화가 지양되고, 어린이, 노인, 환자, 장애인 같이 돌봄을 받는 자가 '결함'있는 인간으로 낙인찍히지 않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길 위에서 노력해 갈 때 돌봄의 미래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2025-03-04 | hrights | 조회: 426 | 추천: 12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1. 우연한 기회에 오십이 넘어 수영을 시작했다. 새로운 걸 배우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였지만 하다 보면 어영부영 따라가려니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생각과는 다르게 물속에서 버둥거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마치 물수제비뜨는 것처럼 탐방탐방 가볍게 날 듯이 물놀이를 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가니 조금씩 나아지면서, 몸이 물 위로 뜨기도 하고 발차기도 되고 25미터쯤 가던 걸 50미터도 가고 한 바퀴도 돌게 되었다. 여전히 유연하지 못한 몸이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때쯤이었다. 앞 사람이 수영강사의 지도로 발을 차며 나가는데 강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어휴,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물론 사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답답해서 얼떨결에 나온 소리였을 것이다. 내가 웃으면서 넌지시 한마디 건넸다. “그래서 강사님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서툴고 잘하지 못하니까….” 강사는 화들짝 놀라며 그런 뜻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무엇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지, 민원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과 아닌 사과를 하는 그이를 보면서 “그냥 그렇다고요. 우리가 잘하지 못하니까 강사님한테 배우고 있잖아요.” 했다. 그러면서 그이가 그 말의 진의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잘하는 사람은 누구한테 배우더라도 잘해요. 선생님이 필요한 사람은 그 하나를 배우려고 애쓰는 사람인걸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해내(아)는 비범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누가 가르쳐도 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비범하지가 않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하나를 제대로 하(알)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으니,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하나를 알게 되고 둘을 알아가면서, 이치를 깨닫고 문리가 트여 마침내 셋을 스스로 알아가(해내)는 평범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하는 친구를 보면서, “너 처음부터 지금처럼 했어? 그때를 생각해 봐, 네가 지금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하고 격려하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는 그저 그렇게 천천히, 느리더라도 어제와 다른 오늘을 그리면서, 오늘보다 정제된 내일을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 2.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던 비범한 사람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요즘. 자신들의 알맹이는 비루함과 천박함뿐이라는 것을 다투어 보여주는 이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보면서, 처단, 수거, 폭사라는 현실감 없는 말을 들으면서 지식이 아닌 어른의 지혜를 구해 본다. 감나무 묵은 가지 새 잎 나듯 우리나라 봄 햇볕 새로이 눈을 트면 여리고 여린 햇볕살 그 사잇길을 타고 봇짐장수 아주머니 등짐장수 아저씨들 바지런 바지런히 장삿길 떠나는 게 보인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아직도 인심 좋은 사람들 살기 좋은 마을이 남았는가 개울 건너 고개 넘어 경상도의 미역장수 전라도의 대그릇장수 강원도의 오징어장수 우리나라의 산과 들을 두루두루 누비며 떠도는 게 보인다 (나태주, ‘봄 햇볕 새로이 눈을 트면’ 전문) 마당 한쪽에 쓸어 놓은 눈이 햇살을 받아 조금씩 녹고 있다. 다사로운 햇볕을 품은 봄이 조심조심 우리한테로 오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찬바람을 밀어내고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강원도에서 봇짐을 꾸려 개울 건너 고개 넘어 새로운 희망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실어나를 것이다. 그 희망의 봄을 두 팔 벌려 맞이하련다. 우리나라 봄 햇볕 새로이 눈을 트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인 우리의 희망가가 이 땅을 두드려 깨울 거라는 믿음으로.
2025-02-25 | hrights | 조회: 140 | 추천: 11
이윤 / 경찰관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다. 12월 3일 밤 계엄선포와 포고령을 보는 순간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선택한 결과가 곧 나오리라고 확신했다. 헌법과 법률이 정한 요건과 절차 어느 것에도 충족되지 않았고, 그 과정이 TV로 생중계되어 증거도 확실하다. 비슷한 과거 사례와 판례도 있다. 무려 헌법 위반에 더하여 내란죄 혐의까지 받고 있다. 이 정도면 결론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륵불이라고도 불렸던 어느 신통한 분이 ‘내가 구속되면 한 달 안에 하야하고 탄핵된다’라는 예언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지지부진하다. 경찰인 국가수사본부의 출석요구에는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 지휘권을 가진 검사로서 경찰을 오라가라 부렸던 분이 피의자가 되어 그 앞에 앉아 이름, 주민번호, 직업 등 진술하는 건 영 모양 빠지는 일이니까. 그런데 검찰이나 공수처에서 출석요구를 해도 가지 않고,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하러 갔는데도 응하지 않고, 압수수색영장 집행도 거부하였다. 충분히 주어진 방어권 행사 기회를 스스로 팽개치고, 체포·구속 사유만 늘렸다. 우여곡절 끝에 체포·구속된 후에도 자신이 원인 제공자임을 잊은 듯 영장과 체포, 구속이 위법 무효임을 주장하면서 방어권을 언급하는 궤변을 늘어놓고, 법원과 헌법재판소도 믿지 못하겠다며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예전에 범죄자들 간에는 죄를 지으면 ‘일도이부삼빽’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먼저 도주하여 잡힐 때까지 시간을 번다. 시간이 지나면 피해자의 분노도 좀 사그라지고, 기억도 희미해지고, 증거도 흩어지기 마련이다. 또 도주하는 동안 피해자들과 연락하여 어떻게든 좋은 조건에 합의를 볼 수도 있다. 그러다 검거되면 두 번째는 무조건 부인한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통하지 않으면 마지막은 빽을 쓴다. 수사나 재판이나 사람이 하는 일이니 구속을 불구속으로, 징역형 받을 것을 집행유예나 벌금으로, 유죄를 무죄로 해 줄 권력자를 동원하거나 힘 좋은 전관 변호사를 찾는다. 지금까지는 ‘일도이부삼빽’ 전략이 잘 들어맞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헌법과 형사소송법에는 피의자와 피고인의 인권을 보호하는 여러 장치가 있다. 이런 장치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다만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 없이 권리만 주장하니 치졸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 법조계 수준을 깎아내리는 허위와 궤변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귀를 씻고 싶어진다. 그런데 점점 지연작전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 탄핵 직후 국회나 검찰에서 증언과 진술을 했던 사람들 일부는 탄핵심판 재판부에서 진술을 거부했다. 진술증거 외의 서증이나 영상 및 녹화자료, 통화내역 등을 확보하기 위해 한남동 관저를 수색하려 한 경찰을 경호처가 계속 방해했다. 체포영장과 압수수색영장 집행을 방해한 경호처 간부들 대상으로 한 구속영장은 검사가 불청구하여 증거수집을 어렵게 했다. 관저나 대통령실에는 증거가 산더미처럼 있을 텐데... 그런 가운데 검찰은 국가수사본부 고위층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하여 수사에 집중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핵심 원인이자 제2의 국정농단이라고 부를만한 여당 의원 공천 개입 사건 수사 역시 계엄 이후 진행이 안 되고 있다. 역시 가재는 게 편인가?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다 보면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이 있다. 수집된 증거들에 조금이라도 절차적 흠결이 있거나 진술 간에 사소한 차이라도 있으면 증거로 인정받지 못하거나(증거능력) 증거 가치가 감소되어(증명력)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거나 약해지면 법원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뉴스를 보면서 간혹 그런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의심하지 말게 하소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몇 가지가 있었다. 만약 공수처가 없었더라면, 경찰과 검사 간 수사권조정이 없었더라면, 체포든 구속이든 압수든 이도 저도 못하고 지금보다 더 깊은 늪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지난 정부에서 공수처도 만들어지고, 경검 간 수사권조정도 있었다. 또 그날 국회로 모여든 시민들의 빠르고 필사적인 대처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소년이 온다’에 그려진 것처럼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지옥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20세기 역사적으로 중요한 국면마다 대한민국을 외면했던 운세가 21세기에는 좋은 방향으로 흐름을 바꾼 것 같다. 그러나 끝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일에는 예측과 통제가 불가한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한순간 눈 돌리고 방심하면 어떻게든 일이 꼬여서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갈 수 있다. 지금쯤 어딘가에서는 우두머리 피고인 주변에 있는 각종 법사와 스승과 보살과 목사 등 어벤져스 급 수퍼내추럴 괴력난신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 운빨의 방향을 바꾸려 힘쓰고 있을 것이다. 사필귀정을 믿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일이라,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다. 계속 지켜보고 분석하고 확인하고 예측하고 떠들고 움직여야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2025-02-19 | hrights | 조회: 172 | 추천: 12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과 더불어 모르는 이가 없을 유명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국무령, 국무총리 대리, 내무부장, 법무부장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적인 책임과 역할의 지위를 역임한 것은 물론, 교육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이뤄내고 민족의 미래를 개쳑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렬했지요. 그가 남긴 흥사단은 지금도 그 정신 아래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안창호 선생이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한데 이름이 크고, 그 이름이 덮는 세상이 지나치게 넓어 나타난 부작용일까요. 누군가 안창호 선생을 교묘하게 비틀어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한 공무원시험 강사 전모씨입니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이입니다. 그는 언론에 보도된 국민의힘 한 국회의원의 표현을 빌자면 “국민의힘 의원 108명을 다 모아도 그 한 사람보다 울림을 만들지 못하는 현실”이라는 엄청난 평가까지 받는 극우의 새로운 아이콘이기도 하지요. 줄기차게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극우 집회 세몰이에 동력을 불어넣어주고 있고, 서울 서부지법 폭동 사태에 대해서도 “청년들이 난입한 것은 공수처와 서부지법 판사들의 꼼수 때문이며 청년들을 풀어줘야 한다”고 폭동을 옹호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결정이 나오기도 전인데 “불의한 재판관들의 심판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이 헌재를 휩쓸 것이고 그 모든 책임은 불의한 재판관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공공연히 헌재 결정 불복을 부추깁니다. 그의 선동에 감명 받은 듯한 한 청년은 “사재(사제) 폭탄을 준비중”이라며 “전×× 선생님의 쓸어버리자는 말씀에 주저앉아 울었다. 20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 바치겠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곧바로 자수했습니다. 어쨌든 전씨의 극우 발언 이후 그의 유튜버 구독자는 두 배로 폭등해 120만을 훌쩍 넘겼다고 합니다. 물론 전씨는 자신은 극우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위헌 위법한 내란을 옹호하고 폭동을 선동하는 극우 세력의 논리와 한 치도 다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주의를 우파라 부른다면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성의 존재와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우파적 가치를 드러내는 이들을 극우라 부를 수 있습니다. 전씨야말로 전형적인 극우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자신이 ‘노사모 출신’이라는 말로 극우가 아니라고 주장하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게다가 전씨는 고 노무현 대통령을 욕보이는 것도 부족한지 안창호 선생을 자신의 극우 논리에 동원합니다. 지난달 무슨 강경 우익 호소문에서 ‘꿈에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본받아서 다시 독립운동 한다고 생각하고...’라고 적더니 얼마 전 부산집회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들어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고 연설했습니다. 극우의 도구로 전락한 안창호 선생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대갈할 일입니다. 다른 얘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1925년 3월 1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첫 대통령 이승만은 탄핵됩니다. 좀 길지만 인용해봅니다. ‘이승만은 외교를 구실로 하여 직무지를 마음대로 떠나 있은 지 5년에, 바다 멀리 한쪽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서, 난국수습과 대업의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황된 사실을 마음대로 지어내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이거니와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해하였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였으며 심지어 정부까지 부인한바 사실이라. 생각건대, 정무를 총람하는 국가 총책임자로서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하야 의정원의 선거를 받아 취임한 임시대통령이 자기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 하야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심지어 한성조직의 계통 운운함과 같음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라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의 진행을 기하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키 어려울뿐더러 순국 제현을 바라보지 못할 바이오 살아있는 충용의 소망이 아니라. 고로 주문과 같이 심판함.’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42호 심판서> 한글체 번역) (임시)헌법을 부정하고 국회(의정원) 존재를 무시하며, 국정을 문란하게 만든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꼬박 100년이 지난 최근 ‘윤석열 내란 사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법질서를 모두 부정하려 하는 지금 극우 행태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안창호 선생은 임시정부 당시 이승만 임시대통령과 정치적 입장이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여러 비위와 무능, 탐욕 등을 충분히 알면서도 독립의 과업을 위해 민족 내부의 분열은 막아야 한다며 지지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독립은 절체절명의 과제였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안창호 선생이 100년 뒤 이렇게 오독되고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일제에 나라 빼앗긴 청년들에게 독립의 가치와 절박함을 교육시키고, 이들에게 민족과 백성을 위한 충심을 불어넣고자 했던 마음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기에 늘 강조했던 무실, 역행, 충의, 용감 등 가치를 삶에 새겨 하루하루 생활의 치열함과 성실함 등으로 각자 자기자신을 계발하길 바랐던 것이었고요. 그것을 극우가 국가에 폭동을 휘두르고 민주공화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청년을 선동하는 도구로 쓰고 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물론 전씨는 이미 지난해 초 이승만 미화 영화 ‘건국전쟁’에 대한 감상평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수구적 역사 인식의 본질을 드러내긴 했지요. 공과에 대한 상식적 평가의 균형감 운운하며 노무현 관련 영화, 김대중 관련 영화 등을 봤다고 들먹이는 것은 이번에 보여준 방식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 탄핵,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 하야 대통령’이 저지른 임시정부 시기 부정과 탐욕은 물론, 해방 이후 한강대교 폭파, 보도연맹 학살 등 나열하기 버거울 정도로 많은 여러 악행에 눈을 감아버린 이가 자신의 편향되고 왜곡된 정치적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늘 또 다른 역사의 거인을 들먹이는 수밖에 없었겠지만요. 아무리 돈벌이를 위한 사교육이라 하더라도 무려 한국사를 가르치는 강사의 역사 인식이 정도라면 교단의 마이크를 놓는 것이 청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극우 집회 연단의 마이크야 극우들에게 늘 열려 있는 것이고 그의 지금까지 행보만으로도 충분히 인식되고 있으니 굳이 ‘극우 커밍아웃’ 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마이크이기도 하고요. 단, 더 이상 안창호 선생은 물론, 노무현 김대중 등을 비뚤어진 주장의 수단으로 삼으며 욕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2025-02-11 | hrights | 조회: 317 | 추천: 22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1.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다. 아니다. 나는 대통령이다. 나는 대통령이다. 아니다. 나는 왕이다. 나는 헌법을 지켜야 한다. 아니다. 나는 헌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왕이기 때문이다. 내가 왕 노릇을 하니 비서실 직원, 각료들, 당 간부들이 나를 왕으로 떠받든다. 겉으로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나는 왕임에 틀림이 없다. 어디 전 세계에 왕이 한두 명이야? 내가 왕이 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감히 왕비인 나의 아내를 붙잡아가려고 해! 그까짓 주식 조작 몇 푼 했다고 말이야. 뭐? 땅값 올리려고 고속도로 방향을 틀었다고? 그러면 안 돼? 학위 논문 표절?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야.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국회에서 제아무리 특검법을 만들고 떠들고 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어. 대통령의 거부권은 왕 노릇을 하는 데 얼마나 편리한가. 안하무인? 후안무치? 그게 왕인 거야. 대통령? 알고 보면 왕인 거야. 대통령을 뽑을 때 은근슬쩍 손바닥에 ‘王’ 자를 써서 내보였잖아. 그런데도 국민이 나를 대통령으로 뽑았잖아. 알고 보면, 국민이 나를 대통령으로 뽑은 게 아니야, 그건 형식인 거고. 실제로는 나를 왕으로 뽑은 거야. 국민이 왕인 나에게 복종하는 백성이 되겠다고 충성 맹세를 한 거잖아. 그래 놓고서 이제 와서 ‘민주공화국’, ‘국민 주권’ 운운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제아무리 국회에서 청문회 해서 장관 지명 철회하라고 부르짖어 본들 무슨 소용이야. 내가 지명했는데, 내 마음대로지. 안 그래? ‘자식들! 어리석긴.’ 당 대표도 내 마음대로 쫓아내기도 하고 올려세우기도 했잖아? 국회의원 후보 추천도 내 한마디면 척척 알아서 말을 듣잖았어? 공천? 그건 헛소리에 불과해. 그래. 내가 왕인 게 분명해. 법은 대통령을 만들지만, 왕은 법을 역용해서 법을 만드는 거야. 법이 왕을 만드는 게 아니야! 이제 세계 사람들 모두가 나를 위대한 한국의 대통령, 아니 왕이라고 치켜세우고, 나를 만나겠다고 서로 오라고 난리잖아? 미국도 일본도 내가 아니면 그들의 국가를 유지하지 못하겠다고 도와 달라고 아우성치잖아? 이제 나에게 남은 목표는 세계의 대통령이 되는 거야. 그래서 취임 때부터 “세계 시민 여러분! 내가 자유의 지키는 최고의 전사가 되겠습니다.” 하고 외쳤잖아. 밤낮없이, 내가 온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숱하게 자유를 외치고 다녔어. 다들 환호성을 질렀잖아. 곳곳에서 오라니 어찌 안 갈 수 있냐, 이 말이야. 어차피 한국에서 왕은 된 거고, 이제 세계를 호령하는 왕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면 우리 국민, 아니 내 백성이 나를 얼마나 칭송하겠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이거 내가 진짜 왕인 게 맞아? 뻑 하면 나보고 왕위를 내놓으라고 길거리에 떼거리로 모여 소리소리 지르고 지랄을 하잖아? 어이! 검찰총장! 저 새끼들 잡아들이지 않고 뭐해! 저 못된 인간들의 두목이 이재명이잖아, 이재명!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빨리 감옥에 처넣으라고. 그놈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아. 그러니 내가 술에 찌들 수밖에. 대통령 각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군주제가 아니잖아요! 뭐가 어째? 내가 왕이 아니라고? 거대 야당의 대표인 데다가 법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주말마다 모여 우리 검찰을 몰아붙이면서 법대로 하지 않고 대통령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욕을 해대니, 아무래도 때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언론을 때려잡아! 극우 유튜버들을 총동원해! 왜 그 전광훈인가, 목산가 하는 인물 있잖아? 도와달라고 해. 아! 그러고 천공 스승도 있고, 명태균 책사도 있고, 건진 법사도 있잖아. 잘 물어봐서 좋은 계시를 내려달라고 해 봐! 만약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엉뚱한 소리 하면 알지? 바로 집에 가서 손가락 빨고 놀아야만 할 거야, 알겠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거 내가 왕이 아닌 거 같아. 지지율이 20%대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거 아냐. 지지율에 신경 쓰는 건 왕으로서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신경이 쓰이는걸. 이러다가 정말 저 백성들이 제 신분을 모르고 대대적으로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거 아냐? 총선에서도 큰일날 뻔했잖아. 8석만 저놈들이 더 가져갔으면 어찌 될 뻔했어. 아니, 나를 왕으로 추대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배신할 수 있어? 아니, 그런데 꼭꼭 숨어 있어야 할 명태균 이 새끼, 나의 책사라는 녀석이 왜 나발을 불고 지랄이야, 지랄이! 재수가 없으려니 나 원 참. 이럴 때가 아닌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왕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무슨 조치건 취해야지, 안 되겠어. 우선 내가 왕인지 아닌지부터 시험을 해 봐야겠어. 비상대권, 비상계엄, 전격적인 통치 행위, 요놈을 활용해서 친위부대를 동원해 국회고 국민이고 민주고 공화국이고 나발이고 간에 싹 쓸어버려야겠어. 만약에 이게 안 통하면 내가 왕이 아니고 바보 멍청이 대통령에 불과한 거지. 전시 또는 사변 또는 그에 준하는 사태가 있어야 한다고? 주말마다 떼거리로 나와서 퇴진하라! 하야하라! 하면서 왕인 나에게 반기를 드는 일이야말로 사변이 아니고 뭐겠어. 게다가 이재명을 비롯한 야당 놈의 새끼들이 아예 나를 왕 아니 대통령으로조차 인정치 않고 내 수족들을 탄핵해서 일하지 못하게 하고 이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마저 팍팍 깎는 일을 서슴지 않으니, 그게 사변이 아니고 뭐겠어. 어디 맛 좀 봐라! 이 새끼들! 다들 빈틈없이 무장하고 모여! 국회고 선관위고 쳐들어가 끌어낼 놈 끌어내고, 잡을 놈 잡고, 죽일 놈 죽여! 2.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 흔히들 진실은 끝내 이긴다고 생각한다. 그건 진실의 힘이 거짓의 힘보다 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짓의 힘도 결단코 만만치 않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하듯이, 한편으로 힘이 곧 진리고 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힘을 기준으로 해서는 좀처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아주 간단하게 정의했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없는 것을 없다고 하면 진리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거짓이다.” 딱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는 문제가 있다. 어떤 것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를 정확하게 판별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이 방법을 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매사 예사로 있다가 없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닌가. 철학자 칸트는 욕망을 다소 어렵긴 하지만 참으로 멋지게 정의했다. “욕망은 자신의 표상에 의해 현실적으로 그 표상의 대상에 대해 원인이 되는 능력이다.” 쉽게 풀면, 욕망은 자신을 충족시킬 대상을 생산해 내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그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를 것 같으면, 그것을 있다고 할 수 있고 참이 된다. 내 욕망에 따라 내 생각 속에서 내 욕망이 원하는 것을 만들면,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욕망에 따른 실재의 생산물과 병적인 생산물을 구분한다. 현실 속에서 현실을 통해 욕망을 발휘할 때, 그 욕망은 의지를 발동해서 실재의 생산물을 만든다. 예를 들어, 윤석열이 나름 노력해서 대한민국의 정치적인 현실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의지를 발동해 노력해서 대통령이 된 건, 즉 대통령인 윤석열은 실재의 생산물이다. 그런데 욕망이 현실을 벗어나 욕망 자체에서 뭔가를 생산하면, 그 생산물은 병적인 생산물이다. 예를 들어, 윤석열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전혀 불가능한 왕이 되겠다는 욕망을 갖고서 그 욕망 자체에 의해 욕망 자체에서 의지를 발동해 욕망의 대상 즉 왕인 윤석열을 만들면 그건 병적인 생산물이다. 병적인 생산물은 실재의 생산물보다 욕망을 휘두르는 힘이 더 세다. 욕망은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또 욕망을 낳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의지마저 욕망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욕망이 실천이성에 따라 보편적 입법의 순수 형식인 도덕 법칙을 통해 규정될 때, 그때 욕망의 상위 형식인 의지가 된다. 이때는 의지가 욕망을 다스려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만약 그 반대로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욕망 자체에서 산출한 병적인 생산물을 통해 욕망을 충족하게 되면 의지가 욕망의 노예가 된다. 욕망의 진정한 생산물 즉 실재의 생산물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이 가치로 인정할 수 있는 현실에서 교환을 통해 성립하는 것이다. 병적인 생산물은 달리 말하면 가상이다. 아예 가상의 세계에서 놀면 거짓이 없다. 거짓은 실재의 생산물인 현실과 병적인 생산물인 가상을 혼동할 때 성립한다. 윤석열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의 대통령과 가상의 왕을 철저하게 혼동한다는 데 있다. 가상의 왕을 실현하고 확인하기 위해 현실의 대통령을 이용한다. 그래서 현실의 대통령은 가상의 왕이 되고, 가상의 왕은 현실의 대통령이 되고, 급기야 현실의 왕이 된다. 여기에서 정신 분열이 일어난다. 정신 분열을 견디다 못해 자신이 과연 현실의 왕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가상의 왕이 현실의 대통령에서 비상계엄이라는 적절한 수단을 찾았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자 마음먹은 건 현실의 대통령도 아니고 가상의 왕도 아니고,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라는 헌법 77조 1항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자신이 막다른 벽에 몰린 상황, 즉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반국가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확신하고, 그 주범이 거대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헌법 77조 3항에 따라 비상계엄을 선포하더라도 국회의 정치 활동을 금지할 수 없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포고령 1호에서 국회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다고 포고한 것이다. 윤석열은 ‘내란 우두머리’ 피고인으로서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권리의 기반이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재판할 수 없는 왕에서 비롯한다고 적어도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으로서 자신만의 그 권리를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외치면서 현실과 가상을 뒤섞어 난동을 부리는 자들을 선동한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는 극렬 분자들이 자신의 구속을 결정한 지방법원을 폭력적으로 침탈하여 엄청난 폭동을 일으킨다. 이에 구속된 대통령인 윤석열은 자신은 구속될 수 없는, 그래서 구속되지 않은 왕임을 확신한다. 현실과 가상을 혼동하여 병적인 거짓을 줄기차게 생산해 내는 저 무모한 확신, 그 확신이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그칠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 전체의 안위와 복리를 책임지는 대통령이 이른바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인 병적인 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건 최대 최고의 비극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현실과 가상을 혼동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가상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현실에 기반을 둔 가상은 오히려 창조의 힘이 된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가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자는 현실을 전혀 도외시하지 않는다. 문제는 가상으로써 현실을 규정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병적인 욕망이다. 현실을 아예 도외시하는 종교는 가상 세계 자체를 향한 병적인 욕망이다. 종교적인 가상으로써 현실을 규정하고 지배하고자 할 때, 종교는 병적인 상태가 된다. 기독교를 배경 수단으로 한 전광훈 세력의 준동이 그러하다. 전광훈은 하느님도 자기에게 꼼짝하지 못한다고 외친다. 그냥 대중 선동에 불과한 과장된 거짓부렁이 아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가상에 사로잡혀서 하는 말이다. 전광훈은 ‘가상적인 현실의 하느님인 목사’다. 따라서 현실 전체를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가상적인 현실의 하느님인 목사’로서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인 윤석열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실제로 그리함으로써 가상-현실의 하느님-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가 실재임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가상의 적이 현실의 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창을 꼬나쥐고서 풍차를 무찔러야 하는 거인이라 여겨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들에게 풍차는 불행하게도 멀쩡한 민주 평화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 세력이고, 거인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종북주사파 공산주의 빨갱이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가상적인 현실의 욕망에 어긋나는 경우, 자신들의 이 욕망을 상징하는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을 파괴하고자 하기에 경찰도 검찰도 공수처도 법원도 심지어 헌재조차 쳐서 무찔러야 하는 종북주사파 공산주의 빨갱이다. 이들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근본을 위기에 빠뜨린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 대행은 특검을 거부함으로써 이 위기의 온존과 심화를 거들고 있다. 3.반공 이데올로기의 극복이 문제다. 문제는 이 ‘종북주사파 공산주의 빨갱이’라는 가상이 이른바 미군정에서부터 여러 독재 정권들을 거쳐 현재까지 지탱되는 기나긴 역사에 기반해 계속 공급되는, 녹슨 상태로 퍼렇게 살아 움직이는 국가보안법을 기반으로 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현실적인 자양분에 의해 지속해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2025년부터 전개될 한국 정치는 또 한 번의 현직 대통령 탄핵과 파면에 따라 급격하게 변화의 흐름을 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과 가상이 완전히 뒤엉킨 거짓, 그 거짓으로 완전무장 한 무도한 극우적인 무리의 정치적인 세력화가 결단코 만만치 않다. 말 그대로 걱정이 태산이다. 앞으로 전개된 한국 정치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자양분으로 하는, 이 현실과 가상의 얽힘과 혼동을 어떤 방책으로 어떤 사회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여 정확하게 잘라내어 국민이 거짓의 힘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에 따라 실질의 민주공화국으로서의 그 성공과 실패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현명한 정치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된다.
2025-02-04 | hrights | 조회: 137 | 추천: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