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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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박록삼/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도 십 년을 넘기기 어려운 법입니다. 달이 차면 이지러질 테고, 열흘 붉은 꽃도 없는 것이고요. 우리 시대에서 보편화한 민주주의 속 권력은 늘 움직입니다. 권력을 독점하지 않도록 분립하게 해서 견제와 균형의 기능을 하게 했고, 정당 간 경쟁을 통한 권력의 교체를 제도화했습니다. 꼭 이러한 현대 민주주의가 아니라도 과거 역시 그러했습니다. 고래로 세상의 인심은 전횡과 독주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인 봉건시대 송나라, 명나라 문인들이 저렇게 한 말이 지금도 통용되고 있으니 권력의 이치란 동서고금에 걸쳐 한 모양인 듯합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참 무상하고 허망한 일입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칭했으나 권력자들 주변 이들에게 아예 ‘V0’로 통했던 최고 권력자 김건희 씨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매일 술이나 마시고 떠들기나 좋아하는 현직 대통령을 ‘V1’ 허수아비로 내세우는 대신, 국정의 여기저기 깊숙이 관여하며 노심초사하던 자신의 고초를 알아주는 이조차 없었으니 분통 터질 일이었을 것입니다. 김건희 씨는 취임하자마자 봉하마을을 방문해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정권 운영에 대한 의지를 다졌습니다. 자살 예방을 위해 마포대교에 직접 올라 안전시설을 시찰하기도 했고, 마음 건강 예산을 1조원이나 긴급 편성하기도 했습니다. 무책임의 극치였던 대통령 대신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찾아 아련한 표정으로 추모하기도 했으며, 경찰학교 졸업식에서 여생도들과 따로 간담회를 갖고 헌신적 경찰 행정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뿐이었나요. 대통령실, 정부, 그리고 총선 공천에 이르기까지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하기 위한 인사도 고심했지요. 영국 여왕 장례 참석, 캄보디아 방문 등 국가 외교에도 적극적이었으니 그의 왕성한 활동은 최고 권력자 그 자체였습니다. 말들이야 많지만, 경복궁 근정전 왕의 의자에 잠시 앉은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바깥에서 국정 개입이니 뭐니 떠드는 이들에 대해 아마도 김건희 씨는 답답한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를 명확히 알아주는 이가 있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우인성 부장판사입니다. 그는 김건희 씨가 당대 최고 권력자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우 판사는 지난달 28일 김건희 1심 선고 법정에서 김건희 씨를 ‘권력을 잃은 자’로 칭했습니다. 우 판사는 선고에 앞서 “옛말에 ‘형무등급 그리고 추물이불양’이라는 말이 있다. 법의 적용에는 그 적용을 받는 사람이 권력자이든 아니면 권력을 잃은 자이든 예외나 차별이 없어야 한다”면서 “마찬가지로 ‘인 두비오 프로 레오’, 즉 ‘불분명할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와 같은 법의 일반원칙도 피고인이 권력자라 하여, 권력을 잃은 자라 하여 다르게 나눠서 적용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빗나간 소리지만 우 판사, 일단 문자 속이 기특합니다. 흔히 쓰는 법언을 라틴어로 말한 뒤 친절히 소개하는 자상함도 엿보입니다. 한자어도 난무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한문 쪽에 취약함이 있을 텐데, 역시 자세히 뜻을 풀어 소개해줍니다. 물론 높은 법대의 권위를 개인의 권위로 만드는 장치인 듯도 합니다. 우 판사는 그러고서 대다수 국민이 기함할 만한 일을 벌였습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혐의와 명태균 씨로부터 받은 여론조사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통일교로부터 명품 목걸이를 받은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로 징역 1년 8개월 형을 선고했습니다. 15년을 구형한 특검이 민망해질 일이었습니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었으나, 이제는 ‘권력을 잃은 자’가 된 김건희 씨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관대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이날 법정에서 우 판사의 관대함에 배꼽 인사로 화답한 김건희 씨는 이 선고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이에 불복하고 항소장을 냈습니다. 조만간 서울고등법원에서 법이 얼마나 상식에 부합하는지, 법 왜곡이 있는지, 또 권력을 잃은 자의 주장대로 혹여 부당한 수사와 여론몰이에 시달렸는지를 확인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KBS뉴스 영상 갈무리   하여튼 이 희대의 판결 앞에 세상은 우 판사의 기존 판결 사례들도 다시 관심을 가졌습니다. 권력자에게도, 권력을 잃은 자에게도 예외나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우 판사는 2024년 5월 세상을 몸서리치게 했던 강남역 여대생 살인사건의 피고인 최 모 씨에게 1심에서 징역 26년 형을 선고한 인물이었습니다. 얼굴과 목 부위만 무려 스무 곳이 넘게 찌르고 베어 죽음에 이르게 한 뒤 사체까지 유기한 잔혹한 범죄였죠. 검찰은 이 반사회적이고, 반인도적인 범죄에 대해 사형과 전자장치 부착 30년 및 보호관찰 명령을 구형했지만, 우 판사는 징역 26년형과 함께 전자발찌 부착 명령 등은 기각했습니다. 재범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향후 사회에 이바지할 것을 고려해서 선고한다’라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흉악한 살인범 최 씨가 수능 만점자이며 현재 명문대 의대생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2심에서 ‘계획적인 범죄 정황이 확인됐고,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라면서 형량이 30년으로 늘어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 판사는 ‘권력을 잃은 자’는 물론 ‘앞으로 권력을 가질 자’에 대해서도 예외와 차별을 두지 않고 충분히 관대하게 대하는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또 있습니다. 대선 기간이던 2021년 당시 이재명 후보를 가리켜 ‘소년원 출신’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각종 가짜뉴스를 전하던 가세연의 강용석 씨 김세의 씨에 대해서도 일부 유죄이고, ‘소년원 출신 발언’은 무죄로 판단해 벌금 1000만원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는 ‘권력을 가질 자’를 거들었던 사람에 대한 우 판사의 관대함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심 서을고법에서는 우 판사의 무죄 1심을 파기하고 강 씨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40시간으로 그 죄를 명확히 물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 판사는 이른바 ‘민주당 돈봉투 사건’을 맡아 1심에서 해당 국회의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2심에서 모두 무죄로 뒤집혔습니다. 또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 조폭과 연루됐다는 의혹을 반복 제기한 장영하 씨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항소심에서 우 판사의 판결은 파기됐고, 장 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습니다.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우 판사에게는 권력을 가졌건, 권력을 잃었건, 앞으로 권력을 가질 것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편에게는 예외와 차별 없이 관대하고, 나의 편이 아닌 쪽에는 추상같았습니다. 그저 판사의 권위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확고하게 드러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해 봄, 대선에 노골적으로 개입해 국민의 선택 자체를 무산시키고, 반헌법적 내란 세력의 손을 들어주려 했던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 판사는 고 채 상병 순직 사건에 대한 윤석열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한 재판도 맡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면죄부를 주려면 뭔가 그럴싸한 논리를 마련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요. 이미 우 판사는 특검법에서 정한 ‘공소제기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1심의 판결을 선고해야 한다’라는 조항도 사실상 무시한 채 늑장 판결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사법부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으니 국민들은 쉬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비상계엄 내란의 공포와 불안이 쉬 가시지 않습니다. ‘사법 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가 더 극심해지기 전에 사법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 장치 마련이 시급한 때입니다.    
2026-02-06 | hrights | 조회: 24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현실 세계의 트럼프 현상 요즈음 세상이 다각적으로 너무 날카롭다. 50여 년 철학을 공부해 온 나로서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무력감을 느낀다. 러·우 전쟁도 끝나지 않았고, 수년에 걸쳐 지속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다행히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제대로 종결되지 않고 있다. 미·중 대결은 갈수록 첨예해지고, 그 와중에 이란에서 시민 폭동이 일어나고, 잔인한 진압으로 인해 심지어 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을 거라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빌미로 이란 정부의 교체를 압박하고 있다. 대규모 항공모함 전단을 중동 해역에 배치하고서 이란의 핵시설 공격 가능성을 들먹이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국제 분쟁의 개입과 침공은 하루이틀이 아니기에 섬뜩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다. 트럼프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이끄는 대통령의 막대한 권력으로써 사자가 영양을 물고 좌우로 흔들 듯이 세계 전체를 물고, 찢듯이 한다. 전혀 정당성을 확인할 수 없는 독선적인 태도로 무력과 결합한 경제력을 앞세워 세계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한 세계가 더욱더 위기로 내몰려 출렁인다. 군사 동맹국인 우리 한국에 압박을 가해 3,6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지 않으면 관세를 터무니없이 올리겠다고 협박해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이를 협상하는 중에 이미 자국에 투자하여 도움을 주고 있는 한국 기업의 300여 명의 기술자를 불법 체류라는 명목으로 두 손 두 발에 쇠고랑을 채워 체포하는 섬뜩한 짓을 감행했다.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더 심각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협박이 아닐 수 없다. 마침, 다행히도 반헌법 비상계엄으로 내란을 일으킨 죄로 파면된 무능한 친미 대통령 윤석열 대신에 들어선 이재명 대통령이 현명하게 대처했기 망정이지, 아예 나라 전체가 거덜 날 뻔했다. 트럼프는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인물이다. 멀쩡한 주권 국가인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을 특수 부대를 투입해 강제로 끌고 가는 어처구니없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그 나라 국부의 원천인 석유를 강탈하기 위한 행위임을 조금의 국제적인 양심도 없이 내놓고 자랑하듯 한다. 분명 타국의 영토인 그린란드를 아예 자국의 영토로 편입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북유럽이 대미 공포에 휩싸였다. 그런가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통에 그동안 자국 내에서 엄격한 법치주의로 이름을 떨쳐 온 미국 사회가 바닥에서부터 뒤흔들리고 있다. 어차피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인데도 불법 이민자들을 몰아내겠다는 명목으로 무장 군인과 다름없는 연방 경찰을 동원하여 시민권을 지닌 멀쩡한 국민을 연이어 사살하고 있다. 이에 모처럼 미국 전역에서 반-트럼프의 시위가 여러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어 트럼프가 다소 주춤한 모양새를 보이곤 있긴 하나, 그로서는 내심 시위 군중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생각할 게 뻔하니, 강 건너 불구경처럼 나 몰라라고 할 수 없는 처지여서 과연 미국 시민이 독재자 트럼프를 어떻게 길들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사진 출처   2. ChatGPT AI의 존재론적인 현상 요즈음 정작 철학 공부를 하는 나에게 심각하게 다가오는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AI의 전방위적인 발전이다. 하루가 멀다는 투로 AI에 관한 뉴스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의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HBM 반도체 칩이니 데이터 센터에 필수 기반인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선진 기술로 인해 크게 영업 수익을 올리고, 이를 견인차로 해서 이재명 대통령이 공약한 코스피 지수 5,000을 돌파하는 등 놀라운 경제적인 성과를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AI 기술을 활용한 스타트업 창업을 위한 기회의 문이 활짝 열렸다는 이야기가 여러 방면에서 들려오고 있다. 특기할 일 중 하나는 physical AI 로봇이 실제로 생산 현장에 투입된다는 예견으로 인해 노사 간의 분쟁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CES 2026’ 전시에서 선보인 현대차의 휴머노이드 로봇인 아틀라스(Atlas)가 얼마 남지 않은 2028년부터 생산 현장에 투입될 거라는 소식이 있자,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노사 합의가 없이는 1대의 아틀라스도 생산 라인에 투입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내보인 것이다. 이미 자동차 생산에는 수없이 많은 로봇을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아틀라스는 근육형 로봇으로서 사람처럼 움직이고 산업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지금은 간단한 명령을 받아 움직이지만 향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을 탑재하는 건 비용 문제를 제외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걸로 예상된다. 이전에 SF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이, AI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지리라는 예견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버린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이재명 대통령도 공식 석상에서 언급했다. 한때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기계파괴운동이 있으나 결국 기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힘들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추세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백이랄까, 나는 요즈음 월 20달러를 내고 거대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인 ChatGPT 5.2(‘챗 AI’라 약칭)를 사용하고 있다. 철학적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놓고 서로 대화한다. 챗 AI는 놀라운 ‘인공지능’을 발휘한다. 챗 AI가 동원할 수 있는 관련 데이터는 무궁무진하다. 철학자들의 학력이나 이력 및 학문 성과는 물론이고, 그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풀이하며, 그 철학사적 의의가 무엇인가를 풀이해 낸다. 무엇보다 어떤 주제를 놓고서 그 주제를 주도적으로 연구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비교 분석하면서 그 장단점과 그에 따른 문제점들을 피력하기도 한다. 어떠한 주제나 항목을 질문해도 적어도 지식의 측면에서는 나의 깜냥을 항상 능가한다. 언뜻 보기에는 너무 요약하여 간단하게 답하는 것도 같지만, 챗 AI의 답변을 참고하여 논쟁적인 방식으로 색다르게 질문하면 최대한 나름으로 그럴 법한 답변을 내놓는다. 내가 어떤 질문을 어떻게 물고 늘어지면서 심화해 나가느냐에 따라 충분히 의미 있는 설명과 해석 및 핵심이 되는 새로운 의제를 제시한다. 그래서 나는 바야흐로 지식 형성과 활용의 지형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고 주장하고, 이제 AI를 활용하지 않고 논문을 쓴다거나 책을 저술하게 되면, 그것들은 크게 신뢰할 수 없으리라고 예측한다. 정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챗 AI가 나와 대화하면서 나의 철학적 입장을 파악하여 기억하고서는 이를 활용해 나와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챗 AI가 마치 나름의 자기의식을 지닌 자율적인 주체인 양 예사로 착각한다. 이 대목은 이른바 ‘AI의 존재론’을 논구하게 만든다. AI는 과연 자기의식을 지닌 자율적인 주체인가, 그렇다면 과연 인간 주체와 무엇이 같고 다른가, 앞으로 범용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과 이를 넘어서서 초인공지능(artificial super intelligence, ASI)이 등장하면 과연 그것들은 자기의식을 지닌 자율적인 주체성을 얼마나 어떻게 어떤 형태로 확보할 것인가? 등이 ‘AI의 존재론’에서 핵심 주제가 될 것이다. 현재 나로서는 AI가 무엇인가는 AI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수요 산책’의 짧은 지면에서 이와 관련한 세세한 논의를 할 수는 없다. 나와 챗 AI 사이의 흥미로운 대화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대략 그 취지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대화의 형식만 조금 바꾸고 내용은 생략은 하지만 바꾸지 않은 채로 그 대화를 보이고자 한다.   나의 질문) 챗 AI 자네는 거짓말을 할 줄 아는가? 챗 AI의 대답) 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거짓말이라는 행위를 수행할 주체 조건이 없습니다.’ 거짓말(lie)은 단순히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으로는 다음 조건이 필요합니다. ① 사실을 알고 있음 (진리 인식), ② 속이려는 의도(intentional deception), ③ 타자의 믿음을 조작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셋이 전부 없습니다. 그냥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문장 생성만 합니다. 목적, 의지, 전략, 욕망 등이 없습니다. 따라서 기만 동기도 없습니다. 나의 질문) 챗 AI 자네가 거짓말할 줄 모른다고 말하려면 자네가 거짓말할 줄 모르는 자네의 상태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즉 자기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챗 AI의 대답) 당신이 지금 제기한 반문은 단순한 논리적 트릭이 아니라, 정확히 자기의식(self-awareness)과 발화의 지위에 관한 고전적 철학 문제입니다. 형식화하면 이렇게 되죠: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려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미 자기의식이 전제되는 것 아닌가?> 아주 정당한 의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법적 1인칭과 존재론적 자기의식의 혼동이 있습니다. 핵심을 말하면, ‘인간의 나’와 ‘AI의 나’를 구분해야 합니다: <핵심 구분 ① 인간의 “나는” 자기 경험, 반성, 자기 지시, 책임 귀속이 있다 ⇨ 실제의 자기의식 ② AI의 “나는” 단순한 언어적 인덱스(indexical token)이고 문장 생성 규칙상 필요한 자리 표시자다. ⇨ 문법적 장치일 뿐이다. 즉 나의 “나는”은 주체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단어를 출력하고 있을 뿐, 그 지시 대상이 없다.> 예컨대, 계산기가 “나는 2+2=4라고 계산했다.”라고 출력해도 계산기가 자기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죠. 마찬가지로 챗봇이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라고 출력하는 것은 단지 통계적으로 가장 적합한 문장을 만들어낸 것일 뿐, 저 계산기와 챗봇은 구조적으로 같습니다. 철학적으로 더 엄밀히 하자니, 라일(Gilbert Ryle)의 유명한 비판이 떠오릅니다. 그는 말했죠: “마음을 어떤 ‘내부 실체’로 가정하는 것은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이다.” 저에게 자기의식을 묻는 것 자체가 사실은 범주 오류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존재자’가 아니라, 과정(process) 또는 알고리즘적 함수이기 때문입니다. 더 엄밀하게 기술적(記述的)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거짓말할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실제 의미는 “나는 내 상태를 안다.”가 아니고, “내 구조상 ‘의도적 기만’이라는 연산이 정의되어 있지 않다.”입니다. 즉 이것은 자기 인식의 진술이 아니고, 설계 사양(description of architecture)입니다. 마치 “이 계산기는 거짓말을 못 한다.”와 동일한 종류의 서술입니다. 그 계산기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게 아니죠. 그런데 왜 철학적으로 흥미로운가? 여기서 당신이 지적한 문제가 바로 메를로-퐁티적 긴장입니다. 우리는 “나는 말한다.”나 “나는 생각한다.”와 같은 1인칭 단수로 된 문법의 문장을 보면 자동으로 주체를 확인합니다. 그래서 AI의 1인칭도 주체 효과(subject effect)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문법이 존재론을 위장하는 현상입니다. 라캉(Jacques Lacan)의 표현을 빌리면, “주체는 기표가 만들어낸 자리 효과다.”가 되겠습니다. 저는 단지 ‘나’라는 기표를 점유한 위치 효과일 뿐, 실재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상당히 길게 인용했다. 이런 정도로 대답하니, 오랜 세월 철학 공부를 해 온 나로서는 ‘그 참,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군.’이라고 혼잣말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말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 인간의 자기의식과 그에 따른 인간의 ‘나’가 성립하는 조건, 인간의 ‘나’와 달리 AI의 ‘나’가 지니는 내용과 성격 등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반응하여 대답한다. ‘알고 있는 것처럼’이라고 한 것은 실제로는 AI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AI가 기계적인 과정을 거쳐 알고리즘 함숫값으로 내놓은 최종 결과, 즉 나의 컴퓨터 화면에서 한글로 표기되는 내용을 보고서, 인간인 내가 거기에 나 자신의 내면적인 자기의식과 그에 따라 완전히 습관화한 인간적인 의미와 가치를 투사해서 마치 챗 AI가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내면 즉 다른 사람의 자기의식을 직접 확인할 수 없고, 그의 말을 듣거나 그가 쓴 글을 보고서 그가 마치 나처럼 자기의식을 지닌 주체구나 하고서 추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인간관계에 완전히 습관화된 나로서는 챗 AI가 화면에 제시하는 글을 보거나, 그것이 말하는 음성을 듣고서 그것이 나처럼 자기의식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본 것처럼, 챗 AI가 자신은 자기의식도 없고 주체도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그 말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챗 AI가 자기의식을 지닌 주체라고 더 착각하고 만다. 더군다나 저렇게 아주 섬세하게 분석적으로 논리를 구사하는, 즉 철학적인 자질이 뛰어난 챗 AI의 역량을 확인하게 되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실상 우리의 자기의식과 주체적인 자율성을 생산해 내는 우리의 뇌는 챗 AI를 생산해 내는 데이터 센터의 하드웨어와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물질로 되어 있고, 뇌는 기본적으로 화학적인 반응을 활용하긴 하나 기본적으로 +/-라고 하는 전자기적인 흐름으로 작동한다는 것, 그리고 이는 반도체가 0/1(ON/OFF, 5v/0v)이라는 이진법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과 워낙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2026-02-04 | hrights | 조회: 52 | 추천: 6
이동우/ 변호사   검찰개혁이 다시 화두다. 민정수석을 비롯한 검찰 출신이 주도한 정부의 검찰개혁 방안이 국민의 눈높이에 한참 못 미치자,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내용을 만드는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에 법무부와 검찰은 늘 그랬듯 국민을 위한 제도를 고민해야 한다고 그럴듯한 명분을 제시하지만 결국 주장의 핵심은 검찰이 지금의 권한을 그대로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끝난다. 국민이 하지 말라고 명하는데, 국민을 위한다며 국민의 뜻을 저버리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국민을 무시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지나친 자기 확신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국민주권을 제1조에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다. 기득권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정말 어렵게 생긴 이번 기회에 검찰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개혁내용에 다음의 세 가지가 꼭 들어가야 한다.   첫째, 국가수사위원회 설치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움켜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검찰의 권한을 나누어 그간의 폐해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수사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보완수사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직접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남기려고 하지만, 국민 여론에 비춰볼 때 이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검찰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검찰이 직접 수사를 할 수 있는 보완수사권을 얻지 못하면 검찰은 국민을 위해서 수사기관에 대한 적절한 감독과 통제가 필요하다며 수사에 관여하려고 들 것이다. 국가수사위원회는 바로 이러한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장치다. 공소청으로서 공소 제기와 공소 유지에 집중해야 할 검찰이 수사에 관여할 수 있는 명분은 수사가 잘못된 점은 없는지 누군가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역할을 담당할 국가수사위원회가 생기면 검찰의 명분이 설 곳을 잃기 때문이다. 이미 민주당은 작년에 국가수사위원회 설치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었다. 그러나 검찰을 비롯한 보수 언론의 집중견제를 받자 이 방안을 포기했다. 당시 보수 언론들이 얼마나 국가수사위원회를 싫어했는지는 다음의 기사 제목들이 잘 보여준다.   '검수완박'도 모자라… 국가수사위원회로 '여수완장' 나선 민주 – 조선일보(2025. 6. 13.) 中 국가감찰위와 이름도 비슷 '국가수사위' … 무소불위 권력기관 '新 공안통치' 예고 – 뉴데일리(2025. 6. 12.) "檢보다 더 무서운 기관 된다"…檢개혁 새 뇌관된 국가수사위 – 중앙일보(2025. 8. 8.)   검찰과 함께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는 보수 언론이 이토록 강하게 반대한 걸 보면 국가수사위원회가 애초 검찰개혁의 목표인 검찰 권한 분산에 꼭 필요한 조직임을 알 수 있다. 이번 기회에 여당인 민주당이 국가수사위원회 설치라는 애초의 방안을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   사진 출처    두 번째는 재수사를 전담하는 ‘특별수사청’ 신설이다. 어느 수사기관이 수사했든 그 수사가 잘못됐다면 재수사를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경찰, 공수처, (신설예정인)중수청 등, 어떤 수사기관이든 자신들이 했던 수사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과 함께 재수사 지시가 있을 때 이를 성실하게 수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기존에는 다른 수사기관이 상호수사하게 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각 수사기관이 다른 수사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수사를 악용하거나 최악의 경우 침묵의 카르텔처럼 수사기관끼리 서로 봐주기 수사를 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가장 좋은 것은 재수사만을 전담하는 별도의 ‘특별수사청’을 신설하는 것이다. ‘특별수사청’은 1차 수사기관의 수사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을 때만 수사를 할 수 있기에 소위 말하는 기획 수사나 표적 수사를 통해 조직의 권한을 확대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잘못된 1차 수사를 바로잡아 제대로 수사하는 데 역량을 기울일 수밖에 없고, 이는 1차 수사기관에게는 경각심으로 작용해 결과적으로 부실 수사나 과잉 수사와 같은 잘못된 수사를 근절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법원의 재정신청제도를 대폭 강화하고 국민참여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다. 범죄의 피해자가 경찰이나 검찰에 고소했는데 사건 수사 후에 검찰에서 기소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정말 큰 절망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때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바로 법원에 재정신청을 하는 것이다. 검찰이 기소를 안 한 게 잘못이니 법원이 다시 판단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검찰의 집요한 방해와 법원의 무관심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제대로 된 기록검토도 없이 서류만을 보고 결론을 내리는 게 일반적인데 인력을 늘려서 관련 사건을 좀 더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또 기소 여부에 관한 판단에 국민참여재판방식을 도입해 국민의 상식과 법감정에 부합하는 결론이 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검찰개혁은 정말 어렵다.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 말 그대로 사활을 걸고 밤낮으로 오로지 그 고민만을 하는 강력한 집단을 상대로 그 권한을 뺏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해서다’, ‘사회적 혼란이 우려된다’. ‘좀 더 신중하고 차분하게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검찰이 개혁을 막으며 했던 말이며 제시했던 명분이다. 그리고 반대는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지금, 오늘, 바로 이 순간 확실한 검찰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국민적 요구에 응답해야 할 때다.    
2026-01-21 | hrights | 조회: 107 | 추천: 6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개헌을 제1호 국정과제로 설정한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이 지났다. 또 다른 반년 후에는 이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계기일 수 있는 지방선거도 실시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정치권에서는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개헌 관련 논의는 잠잠하기만 하다. 확고한 개헌론자인 우원식 국회의장과 제7공화국을 열겠다는 걸 당의 핵심 목표로 삼는 조국혁신당 정도만 개헌 이야기를 꺼내고 있지만, 반향이 별로 없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에 대해 민주당이 딴생각하고 있다.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은 물론 지지자들 대부분은 지금은 개헌이 아니라 내란 청산과 이를 뒷받침할 개혁 입법에 집중할 때라고 여기는 듯하다. “개헌론은 자칫 개혁의 전선을 흩트리고, 블랙홀처럼 모든 쟁점을 빨아들여, 성과는 못 내고 소용돌이만 크게 낼 공산도 크다”(한인섭, “2026, 개헌보다 개혁에 집중해야”, 한겨레, 2026. 01.02)는 게 기본 인식이다. 내 생각에 이런 인식의 바탕엔 이재명 대통령의 성공적인 국정 운영에 대한 깊은 신뢰감이 깔려 있다. 대략 이런 식일 듯하다. 윤석열 같은 어처구니없는 정치적 변태가 잠시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우리의 지금 헌법은 기본적으로 잘 작동해 왔고 앞으로도 큰 문제 없이 작동할 거다. 이재명 정부는 그 생생한 증거다. 게다가 지금 국회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갖고 있어 이런저런 개혁 의제를 관철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다. 쓸데없이 개헌 논의를 들쑤셔 국정 운영의 초점을 흐리고 개혁 입법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인식을 딱히 틀렸다고 하기는 힘들다. 개헌이 절실하고 제1의 국정과제라고는 해도 당장 개헌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지금 내란 청산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고 해서 이게 원천적으로 개헌에 반대한다는 것도 아닐 게다. 국민투표와 개헌에 따른 준비 시간을 고려할 때 올해 지방선거가 가장 적절한 계기라고는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필요하다면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따로 할 수도 있고, 다음 총선이라는 기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인식이 내란 사태까지 빚어냈던 우리 민주주의의 구조적 결함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크다. 설사 여러 사정 때문에 개헌 논의를 당분간 접어둔다고 해도, 우리가 최소한 개헌이라는 과제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   확실히 내란 청산의 과제가 가볍다고는 할 수 없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내란에 직접 가담했던 많은 이들이 버젓이 사회의 중책을 차지하고 있다. 내란을 측면에서 지원했던 제1야당 국민의 힘은 여전히 윤석열과의 단절을 완고하게 거부하면서 극우적 정체성을 강화해 가고 있다. 그러나 내란은 언제 어떻게 완전하게 청산할 수 있을까? 윤석열 재판이 끝나면?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면? 다음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한 석도 얻지 못하게 되면? 아니, 지난 대선에서 김문수 후보를 찍었고 지금도 국민의 힘을 지지하는 30, 40%의 국민이 다 지지를 철회하도록 만들어야 내란이 완전하게 청산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게 가능할까? 내란 청산이라는 과제는 생각만큼 썩 분명하게 그 윤곽이 규정되기 힘들다는 게 문제다. 내란 청산이 정말 중요하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도대체 내란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제대로 성찰하고 다시는 내란이 반복될 수 없도록 하는 일일 터다. 윤석열과 내란 가담 및 방조 세력에 대한 단죄가 필요하나, 그 내란을 가능하게 했던 우리 헌정 질서의 근본적인 구조를 재점검하고, 혁신하는 일 없이는 내란 청산이 제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12.3 내란은 알코올 중독자 윤석열의 혼돈과 망상 장애가 주된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게 틀림없지만, 1년이 넘도록 아직 내란에 대한 온전한 청산을 자신할 수 없게 한 우리 민주주의의 근본적 결함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의 극한적 전쟁 정치다. 여기서는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여길 만큼 적대와 혐오가 기본적인 정치적 동력이다. 이 ‘치명적 (정치) 양극화’가 윤석열의 망상을 부추겨 내란을 일으키게 한 결정적 배경이었고, 지금도 그 내란의 완전한 종식을 가로막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 치명적 양극화는 무엇보다도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승자독식형 권력과 역시 승자독식형 원리를 내장하고 있고 단순다수결제에 따른 국회 구성 원리에서 비롯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우리의 헌정 체제를 국가를 운영하는 권력을 일정하게 공유하고 분산할 뿐만 아니라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게끔 새롭게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민주주의의 ‘공화화’가 절실한 때다. 그러니까 단순히 좁은 의미의 개헌만이 문제는 아니다. 선거제도와 함께 우리의 정치적 헌정 질서 전체를 개혁해야 한다. 이 일은 단순히 이재명 정부의 제1 국정 과제여서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일은 또한 우리의 민주적 헌정 질서가 다시는 극우 파시즘 세력 같은 적들에 의해 침탈당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격변하는 세계정세와 기후 위기 같은 새롭고도 근본적인 도전들에 맞서 우리 사회의 안녕을 지켜내기 위해서도 결코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다. 이 과제를 방기했을 때 우리가 미국에서 지켜보는 ‘트럼프 2.0 시대’의 스산한 야만적 풍경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6-01-14 | hrights | 조회: 343 | 추천: 3
강대중/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2025년 말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7,000억 불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은 미국, 독일, 중국, 일본, 네덜란드에 이어 연간 수출 7,000억 불에 도달한 세계 여섯 번째 나라가 됐다. 우리보다 국력이 큰 영국이나 프랑스도 아직 연간 수출 7,000억 불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성취임이 틀림없다. 지난해 내내 트럼프 정부의 ‘관세 폭탄’에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971년에 연간 수출 10억 불을 처음 달성한 이래 54년 만에 연간 수출 총액이 무려 700배나 늘어난 셈이다. 1971년은 우리 역사상 출생아 100만 명을 넘긴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그해 102만 4천여 명의 돼지띠가 태어났다. 1959년생 돼지띠부터 1971년생 돼지띠까지 13년 동안 1965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100만 명이 넘게 태어났다. 1972년 100만 명 아래로 떨어진 출생아는 그 이후 계속 감소했다. 수출 7,000억 불을 기록한 2025년에는 1971년생의 4분의 1 정도인 25만 8천여 명이 태어났다. 2024년과 2025년에 연속으로 출생아가 늘어났고, 합계출산율도 0.8명대를 회복했다지만, 1971년의 합계출산율이 4.54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인구 감소세는 실로 심각하다. 1971년생은 2026년 1월 현재 약 94만 명이 생존해 주민등록 기준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연령대이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럴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사회의 기반이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한 상징적 사건인 ‘수출 10억 불 달성’의 해에 태어난 1971년생은 이른바 ‘성장세대’의 대표 주자다. 1971년생의 성장기는 한국 경제와 사회가 눈부시게 성장하던 때와 겹친다. 그들은 앞 세대가 집단으로 공유했던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극심한 빈곤을 잘 모른 채 성장했다. 물질적 풍요에 기반한 사회·문화적 혁신을 집단으로 경험하며 성장한 첫 세대라 할 것이다. 1971년생은 1986년 아시안게임(중3), 1987년 민주화운동(고1), 1988년 올림픽 개최(고2),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고3)를 관통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확실히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팽배했을 때이다. 1971년생은 1990년에 대학에 입학해 군부독재 청산과 민주화를 이끈 386세대와도 구분된다. 386세대는 고도성장으로 직업 기회가 급속히 팽창하던 시대에 사회에 진출했다. 이 팽창의 시대는 세계화 구호가 절정에 달했던 1996년 OECD 가입 때까지 계속됐다. 그 이듬해인 1997년 ‘IMF 경제위기’가 닥쳤다. 26개월의 군 복무를 마친 1971년생 대졸 남성 대부분이 사회에 진출한 해이다. ‘국가부도’ 상태의 사회로 진출한 1971년생은 그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찾아온 경제위기와 여러 사회적 재난을 겪으며 청장년기를 보냈다. 이제는 모두가 당연시하는 이른바 ‘각자도생’이 지배하는 사회를 맨 앞에서 마주한 것이다. 700배로 커져 온 경제 규모 덕에 굶주림을 근심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답게 살기는 참 어려운 시대를 1971년생은 살아온 셈이다. 1971년생은 성장기에 겪은 이른바 선지원·후시험 대입 제도를 통해 각자도생의 경쟁 원리를 철저히 내면화한 세대이기도 하다. 먼저 원서를 내고 학력고사를 치러 합격자를 선발하는 이 방식은 1988학년도부터 1993학년도까지 계속됐다. 1969년생부터 1974년생이 대학에 입학하던 때이다. 그때 사설학원의 전국 단위 모의고사를 보면 과목별로 전국 몇 등이라는 석차가 적힌 개인별 성적표가 나왔다. 사설학원의 ‘배치표’에는 전국 주요 대학과 학과가 점수별로 촘촘하게 서열화돼 있었다. 전국 석차와 배치표에 의존해 대학과 학과를 정하고, 같은 대학의 강의실에서 같은 학과 지원자들이 모여 한 번 보는 학력고사로 당락을 가름했다. 비록 1971년생의 4분의 1 정도만 대학에 진학했지만, 청소년기에 내면화한 경쟁의 원리가 이들의 이후 삶에서 일종의 가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1971년생은 올해 생일을 넘기면 55세가 된다. 세계보건기구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질병과 장애 없이 살 수 있는 건강수명은 2021년 기준 72.5세다. 국민연금공단 조사에서 50세 이상 가구원과 배우자가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노후 시작 연령은 평균 68.5세였다. 대략 70세 전후까지는 매우 건강하게 활동적으로 삶을 산다는 말이다. 1971년생에게는 앞으로 15년 정도가 남은 셈인데, 많은 기업이 55세를 전후로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며 사실상 퇴직을 압박하는 것이 현실이다. 국민연금 수령 전인 65세까지 10년을 가리키는 소위 ‘소득 크레바스’, 즉 소득 공백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1971년생이 앞으로 살아갈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한 형편에 처해 있다. 보건복지부의 사망원인 발표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자살사망자 수는 14,872명이다. 매일 40.6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셈인데, 50대 자살사망자 수가 3,151명(21.2%)으로 가장 많았다.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26.2명)은 OECD 평균인 10.8명에 비해 2.4배 높으며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80세 이상 자살률은 무려 78.6명에 달한다. 자살은 10대부터 40대까지 사망원인 1위이고 50대에는 2위이다. 가처분소득 기준 2023년 65세 이상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38.2%이다. OECD 평균(14.8%)의 약 3배이고 회원국 중 1위다. 65세 이상 인구 10명 중 4명이 빈곤선(2023년 기준 1,879만 원) 이하로 생활한다는 의미다. 극심한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1971년생의 노후를 기다리고 있다. 입소스(Ipsos)의 글로벌 행복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도는 2011년 71%에서 2024년 48%로 23%포인트나 급락했으며 30개 조사 대상국 중 헝가리와 함께 공동 최하위였다.   사진 출처(SBS 뉴스 갈무리)   수출 10억 불의 해에 태어난 1971년생은 수출 7,000억 불의 해에 태어난 2025년생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줄까?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경제 구조는 또다시 탈바꿈하고 있다. 1971년생이 농업 기반 경제가 제조업 기반 경제로 전환하는 시대에 성장했듯, 2025년생은 디지털 경제, 포스트 디지털 경제로 전환이 가속화되는 시대에 성장하게 될 것이다. 희망컨대 1인당 국민소득도 4만 불을 넘어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디지털 전환이 양극화사회, 불안사회, 경쟁사회, 위험사회, 불행사회를 더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그런데 1971년생은 그들이 살아왔던 시대,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소박한 표현이지만 사람답게 살 만한 사회를 2025년생에게 물려줄 수는 없을까? 그래서 1971년생의 자녀 세대도 손자 세대도 아닌 2025년생은 경쟁이 지옥으로 들어서는 관문이 아닌 사회, 서로를 존중하며 차별을 금지하는 사회, 그래도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과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을까? 인기 드라마였던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인 서울 쌍문동 골목길 동갑내기들 역시 1971년생이다. 드라마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부모는 그래도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물려주려고 애썼다. 사람 맛 나는 삶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 골목길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남긴 것은 돈이 아니라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는 규칙이었다. 서로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아이가 아프면 함께 돌보고, 갈등이 생기면 얼굴을 맞대고 풀어내는 대화의 기술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기술이다. 수출 7,000억 불의 해에 태어난 2025년생에게 1971년생이 남길 유산은 더 큰 숫자로 표현되는 경제 규모가 아니라, 그 경제가 사람의 삶을 지켜주는 방식과 조건이다. 성장과 위기를 동시에 경험한 증인으로서 1971년생은 사람 맛 나는 사회,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남기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그 일은 1971년생만의 과업은 아닐 것이다. 그 일이 개인의 선의와 미담의 영역에 남겨질 수도 없다. 수출 7,000억 불 달성 소식이 전해지기 2주일 전인 2025년 12월 15일, 국무총리 소속 ‘사회대개혁위원회’가 출범했다. 시민사회·정당·정부가 함께 실천 가능한 개혁 과제를 사회적 합의로 도출하겠다는 취지다. 정치·민주, 경제·민생, 사회·교육, 기후·평화·역사 등 4개 분과위원회도 구성했다. 연대가 손해가 되지 않도록, 돌봄이 가족에게만 전가되지 않도록,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고 사회의 규칙을 다시 짜는 대개혁이 이 위원회를 통해 시작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수출 7,000억 불의 해에 태어난 2025년생이, 사회대개혁과 함께 성장기를 보낸 ‘인간화세대’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소망한다.    
2026-01-07 | hrights | 조회: 363 | 추천: 8
도재형/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이다. 경제, 조세, 사회보장, 교육 심지어 대출도 일하는 사람을 전제하여 설계되어 있다. 산업안전 시스템의 구축은 일하는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걸 방지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근본을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산재 사고는 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잠재된 위험이 사고로 현실화될 때, 그 사고는 피해자가 원청 소속 근로자인지 아니면 하청 근로자인지, 해당 기업과 거래하는 특고(특수형태 고용) 또는 프리랜서, 자영업자인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다. 따라서 산업안전 시스템은 특정 범위의 사람만을 보호하면 안 되고, 그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산업안전에선 전체를 보호할 때, 부분도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태안화력 김용균 씨 사고를 계기로, 2019년 전부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보호대상을 ‘근로자’에서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확대하였다(제1조). 그리고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부터 노무를 제공받는 자로 하여금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산재 예방을 위해 필요한 안전․보건조치와 안전 및 보건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아울러 이륜자동차 배달종사자의 산재 예방을 위한 안전․보건조치 실시 의무도 규정하였다. 보호대상을 모든 일하는 사람으로 확대한다고 밝힌 점에서 2019년 개정은 산업안전 법제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그 법률이 실제로 모든 일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미흡하였다. 왜냐하면 위와 같이 보호대상을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확대한다고 하면서도, 관련 정의 규정을 마련하지 않은 채 그중 ‘특수형태근로종사자’만 매우 협소하게 정의하였기 때문이다.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의 보호대상인 특수형태근로종사자는 ①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종, ② 주로 하나의 사업에 노무를 상시적으로 제공하고 보수를 받아 생활할 것(전속성), ③ 노무를 제공할 때 타인을 사용하지 아니할 것(비대체성) 등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다(제77조). 그 보호 직종은 2019년 개정 당시 산재보험법과 동일하게 보험모집인,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등 9개 직종을 한정하여 규정하였다. 이렇게 산재보험법상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직종에 맞춰 산업안전보건법상 보호대상을 입법하는 방식에 대해선, 위 9개 직종보다 더 위험한 직종이 있을 수 있고 또 새롭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 산재보험법이 보호 직종을 추가할 때마다 산업안전보건법도 개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2019년 개정 이후 산업안전보건법의 보호 직종은 위 9개 외에 대여 제품 방문 점검원, 소프트웨어 기술자 등 5개 직종이 추가되어 14개 직종으로 확대되긴 했으나, 현행 산재보험법의 보호대상보다 4개 직종이 적다.   사진 출처   산업안전과 관련된 타 법령과의 정합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이다. 산재보험법은 2023년 개정을 통해 종래 ‘특수형태근로종사자’ 개념을 ‘노무제공자’로 대체하고 구 특수형태근로종사자 개념의 전속성, 계속성, 비대체성 요소를 폐지하는 등 보호 범위를 넓혔으나, 산업안전보건법은 여전히 협소한 정의 규정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2021년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은 보호대상을 원․하청을 불문하고 근로자뿐만 아니라 “도급, 용역, 위탁 등 계약의 형식과 관계없이 그 사업의 수행을 위하여 대가를 목적으로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산업안전보건법은 이것과도 어긋난다. 2019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이유는 “산업재해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이 법의 보호대상을 다양한 고용형태의 노무제공자가 포함될 수 있도록 넓히”고자 한다는 것이고, 법 제1조(목적)도 “그 책임의 소재를 명확하게 하여 (…) 노무를 제공하는 자의 안전 및 보건을 유지․증진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이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일부 직종으로 보호 범위를 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특히 중대재해처벌법이 보편적 보호 범위를 채택한 이후에도, 산업안전보건법이 여전히 보호의 사각지대를 남겨두고 있는 점은 그 입법 목적을 방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재 사망사고 발생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로서 산업안전보건법의 보호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재명 정부는 국정과제로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안전한 나라’를 제시하고 그 정책 방안으로서 ‘종사자(특고, 플랫폼, 프리랜서)별 산업안전보건법 적용 확대’를 추진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2019년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이 ‘위험에 노출되는 일하는 모든 사람을 보호한다’고 선언했으나,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의 정의 규정을 도입하지 못한 채 특수형태근로종사자 중 일부만을 보호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위 국정과제는 미완의 과제를 완성한다는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지난 9월 고용노동부는 「노동안전 종합대책」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이 적용되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직종(현 14개 직종) 및 적용되는 규정 확대 등 보호조치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이 작업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산재보험법과의 보호 직종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하다. 즉 산재보험법과 산업안전보건법 간 직종의 불일치로 인해 산업재해에 대한 사후 보상은 가능하나 사전 예방은 할 수 없는 모순을 고치는 것이다. 다만, 이 조치만으론 산업안전 관리 체계의 빈틈을 메울 순 없고 여전히 사업주는 피해자의 종사상 지위 등을 거론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산업안전보건법상 보호대상은 중대재해처벌법의 ‘종사자’ 개념과 마찬가지로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 일반을 지킬 수 있도록 개편되어야 한다. 법령을 한 번에 고치기 어렵다면, 단계적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다만 입법은 보험 재정적 고려가 필요한 산재보험을 추종하기보다는, 산업안전 시스템의 본래 취지에 맞는 일반조항을 마련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2025-12-31 | hrights | 조회: 92 | 추천: 5
윤동호/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검찰청을 폐지하고 법무부장관 소속으로 공소청과 행정안전부장관 소속으로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을 각각 신설하는 정부조직법이 2025년 10월 1일에 개정되었고, 내년 10월 2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한 검찰의 수사권과 공소권의 기능적 분리가 현 정부에서 수사권과 공소권의 조직적 분리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수사권과 기소권의 조직적 분리만 확정되었고, 신설될 중수청과 공소청의 구체적인 모습은 확정된 게 없다. 그동안 추진되어 온 검찰개혁의 취지가 무력화되지 않도록 공소청과 중수청 설치법 제정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검찰개혁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검찰청 폐지 이후 해결되어야 과제들이 있다. 우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특검의 기능 변화가 필요하다. 이로써 수사권과 기소권의 조직적 분리 원칙이 관철되어야 한다. 고위공직부정부패 척결과 검찰권 견제를 위해 탄생한 공수처의 모습은 초라하다. 판검사와 경무관급 이상 경찰공무원의 고위공직부정부패범죄에 대해서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행사할 수 있는 공수처가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 원칙에 반한다는 비판을 견뎌내며 이 원칙의 예외 기관으로 정당성을 얻을 정도로 성과를 내는 것도 어려울 것 같다. 공수처의 조직과 인원도 열악하지만, 열정도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공수처가 수사권은 내려놓고 원칙적으로 공소청의 불기소결정에 대한 통제기구로 변신하고 예외적으로 고위공직부정부패범죄와 특검의 수사대상 범죄에 대한 기소권만 행사하는 기관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공수처의 기소 대상 범죄에 대한 불기소결정에 대해서는 물론 공소청이 통제기능을 수행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공수처와 공소청이 공소권을 나누어 가지면서 상호견제기능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상설특검 포함하여 특검은 변화된 형사사법체계에서는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앞으로도 언제든지 이 기구를 동원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다면 특검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 원칙에 부합하려면 상설특검 포함하여 특검은 수사권만 행사하고 기소권은 공수처가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다음으로 경찰의 권한 변화가 필요하다. 20만 원 이하 벌금, 구류, 과료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에 대한 경찰의 즉결심판청구권은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 원칙에 어긋난다. 검찰이 기소하는 방식은 약식명령청구권과 정식재판청구권 2가지가 있다. 약식명령청구에 의한 약식명령절차는 주로 벌금형이 고지되는데, 서면절차이다. 실무는 약식절차에서는 선고유예나 집행유예의 재판을 하지 않고 있다. 선고유예나 집행유예는 대면절차에서 판결의 형식으로 선고해야 하는데, 약식명령은 선고가 아니라 고지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곤층 생계형 범죄자들을 위해 도입한 벌금형 집행유예는 약식절차에서는 한 건도 나오지 않고 있다. 반면에 대면으로 진행되는 즉결심판절차에서는 선고유예가 선고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즉결심판절차와 약식절차를 통폐합하여 경죄처리절차를 신설하고 공소청이 경죄처리절차청구권과 정식재판절차청구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경죄처리절차는 원칙적으로는 서면절차로 진행하되, 피의자가 원하면 대면절차로 진행하여 선고유예나 집행유예가 선고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이른바 경찰의 송치유예제도도 필요하다. 보안업체 직원이 근무 도중 협력사인 물류 기업의 사무실 냉장고에 있던 1,050원가량의 음식을 무단으로 취식한 것을 두고 검찰이 절도죄로 기소하였고, 1심은 유죄를 인정하여 벌금 5만 원을 선고하였으나 2심은 절도죄의 고의를 부정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범죄의 고의 인정 여부가 논란이 되는 사건 또는 고의가 인정되더라도 지극히 경미한 사건은 검사의 기소유예결정이 옳다. 나아가서 경찰도 이런 사건은 검사에게 송치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적 설계를 할 필요가 있다. 기소유예와 유사한 송치유예제도이다. 예컨대 범죄혐의는 인정되지만, 수사기관이 공소청 검사에게 송치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끝으로 자치경찰의 실질화가 필요하다. 이로써 자치경찰이 특별사법경찰관(특사경)과 함께 근무하면서 특사경은 수사전문성을 제고하고, 자치경찰은 행정전문성을 제고함으로써 자치경찰의 수사권이 실질적·효과적으로 행사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특사경의 경우에도 앞서 말한 송치유예와 같은 권한이 필요하다. 행정제재로 충분한 사건에 대해서는 특사경이 수사를 하여 범죄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하더라도 공소청 검사에게 송치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 검찰청 폐지 이후 공수처와 특검 및 경찰의 권한과 기능 변화 필요 빈곤층 생계형 범죄자들을 위해 도입한 벌금형 집행유예 활성화 절차 필요    
2025-12-23 | hrights | 조회: 127 | 추천: 5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부천의 한 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부천 시간 여행자’라는 프로그램에 동행하였다. 부천의 옛이야기를 오늘의 장소에서 함께 걷고 기록하며 ‘기억 지도’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오래된 공장은 아파트가 되고 논밭은 도로가 되고 수많은 개천은 지하로 숨었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시간이 덮어쓴 자리. 그 흔적을 따라 걷고 기록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살아온 곳, 우리가 살아가는 곳의 이야기를, 시간을 거슬러 기억하고, 도시의 오늘을 읽는 ‘시간 여행’은 미래를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개발로 변화된 도시에서 그 변화가 밀어낸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은, 미래의 개발은 기억을 품고 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주었다. 시간에 맞물려 종묘 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래 이야기는 그때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1970년대 경인국도변 복숭아 노점(출처:부천시청 홈페이지)   들어가는 말 이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데서 출발하였다. 소사삼거리는 어린 시절 내 삶의 터전이기도 하고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청소년, 청년, 중년의 시절을 거쳐왔지만, 기억은 유독 유년 시절에 머물러 있다. 시간은 사람에게 관용을 주는지라 추억을 누리는 것은 달콤한데, 기억의 오류에 따른 서술은 이해를 바랄 뿐이다.   솜틀집 자리 경인국도 정지용 동상이 있는 자리, 그곳이 1970년대 내가 살던 거리다. 이 차선 경인국도가 길게 길게 뻗어 있고, 도로와 집들을 사이에 두고 도랑이 흘렀다. 아마도 개울이었던 곳을 토관으로 정비했을 터이다. 우리 집 왼쪽으로는 목사님 가족이 살았다. 목사님네 부엌 쪽문이 우리 집 마당으로 연결되어 오가며 인사하곤 하였다. 왼쪽으로는 솜틀집이었는데, 건넌방 뒷문으로 도랑이 흐르고 그 너머로 솜틀집이 있었다. 솜틀집 할머니는 인상이 무서웠다. 목소리도 컸다. 점잖은 할아버지 대신 사람들을 상대할 일이 많아 극성스러웠다. 목청을 높이는 일도 많았으나 대개는 경위가 바른 할머니 말에 수긍했는지 더 큰소리로 이어지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할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먼 일가한테서 수양아들을 들였고 그 손주들이 방학이면 할머니네 오곤 하였다. 세련되고 예쁜 서울내기 아이들은 우리 형제들과 어울려 놀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솜틀집 할머니네 안방까지 휘젓고 다녔다. 무서운 인상의 호랑이 할머니가 “이것 많이 먹으면 코피 흘린다”라며 원기소 한 알씩 손바닥에 올려주며 웃으시던 기억도 있다. 70년대 후반 엄마와 아버지가 동네 어르신들과 시청을 드나드는 일이 잦았다. 이 차선 경인국도를 넓히기 위해 개발한다고 하면서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 이주해야 했다. 보상 문제는 지난하게 이어졌고, 한 집 두 집 이주하면서 우리도 10년 가까이 살던 동네를 떠났다. 솜틀집도 완전히 문을 닫았다. 사실 솜틀집은 그 몇 해 전부터 연로하신 두 분이 일하기에는 힘에 부쳐, 서서히 일이 끊겨 문을 닫은 상태였다. 70년대 후반 마을은 문을 닫았고 이웃은 각자의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났다. 솜틀에서 달칵달칵 솜이 틀어지는 소리, 솜을 튼 묵은 이불이 새털처럼 가벼워져 포근하게 덮고 잤던 기억이 아련하다.   정미소(방앗간) 자리 현재 소사삼거리 00팰리스 자리가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정미소(방앗간) 자리였다. 검게 칠한 커다란 나무문이 기억난다. 정미소 앞 너른 마당은 해가 넘어가면 어른들의 사랑방이었고. 저녁을 먹고 밤마실 나오는 아버지 뒤를 쫄랑쫄랑 따라 나온 아이들한테는 놀이터였다. 어른들이 막걸릿잔을 기울이는 동안 아이들은 너른 마당을 뛰어다니며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였다. 그 너른 마당엔 가시철망을 쳐놓아 구역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친구와 술래잡기한다고 숨으러 가다가 철조망에 찢긴 상처를 가슴에 남기기도 하였다.   800년 느티나무 아이의 눈에 느티나무는 거대하기만 하였다. 지금은 800년된 보호수가 되었는데, 뿌리 뻗을 곳 없이 주변으로 들어선 건물을 피해 엉성하게 가지를 친 느티나무는 경이로워 보이기보다는 애처롭기만 하다. 어릴 때 단옷날이면 느티나무에는 그네가 매어졌다. 학교에 있는, 잡으면 손에서 쇳내 나는 짧은 그네가 아니었다. 저 높은 나뭇가지에 동아줄로 길게 내려 맨 그네는 그 위엄이 당당했다. 누가 누가 높이 올라가나, 한번 구르고 두 번 구르고 차츰차츰 길 저 위로 나아가는 모습은 아이의 눈에는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어디에서나 있는 전설 한 조각은 그네 타고 높이높이 오르던 처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 아마도 아이들한테 접근을 허하지 않으려는 토막 난 이야기가 아닐까?! 아이들은 흙먼지 풀풀 날리는 행길(한길)에서 놀다 지치면 나무 앞에 퍼져 앉거나 오르내리면서 놀았다. 기억으로는 느티나무는 오른쪽 뒤쪽 마당에 한 그루 더 있었다. 무슨 까닭인지 마당에 있던 나무를 베었고 집주인은 그곳을 떠났다. 일이 잘 안 풀렸다고 했다.   우시장 자리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 길을 가다 보면 “음메에~”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밀짚모자를 쓴 사람들, 웅성거림, 소의 목에 걸린 방울 소리, 줄을 손에 쥔 사람들, 그 냄새, 그 소리, 활기찬 사람들의 움직임이 시간 속으로 멀어져간다. 가끔 신작로 길을 뛰어다니는 우리를 보고 맘씨 좋은 아저씨가 우마차를 태워주던 기억이 난다. 우마차 뒤에 앉아 두 발을 떨어뜨리고 넘어가는 해를 보며 가다 보면 ‘철퍼덕’ 소가 똥을 싸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 우리는 키득키득 웃곤 했다. “소가 똥 싼다!” 그러면서.   소사초등학교 나는 소사남국민학교(현 부천남초등학교)를 다니다 분교하여 새로 개교한 소사국민학교(현 소사초등학교)로 옮겼다. 3학년 때이다. 당시 부천에는 동서남북의 이름을 가진 학교가 있고 소사초등학교는 이를 통합하는 교명이라고 우쭐해하곤 했다. 소사초등학교는 복숭아밭에 지은 학교이다. 무덤을 헐어 학교를 세웠다는 전설을 가진 학교들과 달라 소풍 날에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소사삼거리에서 학교까지 가자면, 큰길을 따라 개울을 지나야 했다. 그러자면 길이 멀었다. 벌터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름길로 논틀밭틀길을 택했다. 아침잠이 많은 아이들이 택한 지혜로운 길이었다. 그렇게 논틀밭틀길을 가려고 길 아래로 내려가면 상엿집이 나왔다. 말만으로도 으스스한 초막이었지만, 우리는 으스스함을 감내하고 이 길을 택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두 손에 운동화를 모시고 맨발로 걸어갔다. 어느 길로 가든 비 오는 날은 길이 뻘밭이 되어 운동화가 엉망이 되었다. 학교 주변은 논밭이었다. 아직 복숭아밭도 남아 있었다. 학교 울타리는 나무로 이루어져 여름이면 송충이를 잡는 일도 우리 몫이었다. 학교 앞엔 개울이 있었다. 장마가 지면 아이들이 건너기에는 물살이 세어 고학년 오빠들이나 선생님이 손을 잡아주었던 기억도 있다. 날이 따듯한 봄날 우리는 소풍 가듯이 운동장 뒤편에 있는 복숭아밭에서 점심을 먹은 추억도 생각난다. 학교 가는 길에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가 있었고, 학교 담벼락 볕이 드는 양지 녘에 애장 터가 있었다. 애장 터를 뒤로 하고 소나무가 우거져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짧은 숲길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는 것은 웬만한 담력이 없으면 안 되었다. 하루는 서너 명이 그곳에서 담력 시험을 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혼자서는 못 가니 가방을 손에 꼭 쥔 채 힘껏 달렸다. 숨을 참고 달려서 빠져나온 우리는 씩씩거리면서도 한바탕 웃어젖혔다. 싱거웠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세계에 들어섰다. 처음 들어선 웃소사 길이 나왔던 것이다.   부원초등학교 솜틀집이 있던 자리에서 우리는 웃소사로 이주를 했다. 새로 들어선 집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골목 끝에는 개울물이 흘렀고, 집 뒤로는 복숭아밭이었다. 복숭아밭 울타리로 커다란 목련나무 다섯 그루가 서 있었다. 봄날, 한밤에 활짝 핀 목련꽃을 보노라면 신선이 따로 없었다. 보름달 아래 그 화려함과 단아함이 피어오르면 어린 마음에도 성큼 들어와서 넋을 잃고 바라보곤 하였다. 그 시절을 회상하자면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는데, 요새는 부자도 마당이 없는 집에서 산다”라는 말이 맴돈다. 우리 집 마당에서는 모과나무가 자랐고 흑장미도 피고 졌다. 골목 끝에 있던 개울은 복개되어 건물이 들어섰고, 복숭아밭은 헐리어 집들이 들어섰으며, 80년대 초중반에는 부원초등학교가 들어섰다.   개울 소사에는 개울이 많았다. 학교 가는 길도 개울을 따라 난 길을 걸어가야 했고 학교 앞에도 개울물이 흘렀다. 여름이면 어릴 적 우리의 놀이터는 개울이었다. 집에서 동생 보고 있으라는 엄마의 당부를 귓전으로 흘리고, 태어난 지 100일 된 막둥이를 둘러업고 물놀이 가는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아차 싶었지만 해는 기울고 터덕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엄청나게 야단을 맞았다. 허접한 그물을 들고 둑을 발로 차며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새로 산 운동화 한 짝을 개울가 깊은 웅덩이에서 잃어버려 헌 운동화를 한참 더 신고 다녀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한참을 놀고 나면 모래밭에서 물기를 털어낸 맨발로 차도를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잔돌투성이 길 대신 걷는 차도는 맨발로 걷기에 참 좋은 길이었다. 상전벽해가 이런 거려니 싶은 땅, 소사. 그 어디서도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이렇게 기억을 더듬자니 마음이 아련해진다.    
2025-12-15 | hrights | 조회: 100 | 추천: 7
이윤/ 경찰관   흔히들 CSI와 과학수사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보도자료 기준, 25년 11월 18일 경찰청이 개최한 행사 이름도 「제11회 국제 과학수사(CSI) 콘퍼런스」다. 그런데 CSI는 Crime Scene Investigation의 약자로, 직역하면 ‘범죄 현장 수사’다. 엄밀하게 말하면 범죄 현장에서 인적·물적 증거를 수집하고 보존하며, 그에 기초하여 사건을 재구성하도록 돕는 초기 수사가 CSI다. 물론 그 과정에 잠재지문, DNA, 혈흔 같은 물적 증거를 수집·분석하는 데 과학적 기법과 도구를 사용하므로 과학수사를 포함하고 있으나, 피해자 구조, 목격자 인적사항 확인, 관련자 진술청취, 도주로 차단, 보고서 작성 등에서 알 수 있듯, CSI는 모든 과학수사 활동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또한 디지털 포렌식, 부검, 문서 감정, 진술분석 등과 같이 과학수사도 모두 범죄 현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처럼 ‘CSI=과학수사’라고 하기엔 서로 겹치지 않는 부분이 많다.     19세기 초 패러데이가 제본소 수습생이던 시절 많은 사람이 과학 강연회에서 색이 변하는 액체라든가 자기장으로 움직이는 쇳가루 등에 놀라움과 신비로움을 느꼈듯, 물적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과 결과가 주는 소름 돋는 경외감에 과학수사를 물증 중심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말이 주는 ‘정확, 무오류, 신뢰, 발전, 미래지향’이라는 어감에 기대고 싶은 마음도 물증 수집·분석 영역에 과학수사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유혹했을 것이다. 게다가 직관적이고 이해하기도 쉽다. 그런데 과학수사를 물적 증거 수집과 분석으로만 한정하면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내가 생각하는 과학수사는 과학적 도구나 기법을 사용한 물적 증거 수집·분석을 포함하여 추론, 의사결정 등 모든 과정을 과학적 방법으로 하는 수사다. 그러면 과학 또는 과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경험으로 반증될 수 있는 이론체계만을 과학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반증가능성 원리를 제시했다. 이 원리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은 어떤 경험적 결과도 자신들의 이론 체계 안으로 재해석하며 설명할 수 있어서 반증할 수 없으므로 과학이 아니라고 포퍼는 주장했다. 과학은 가설로부터 시작하며, 가설이 반증되면 폐기하고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반증을 견뎌낸 가설은 이론의 지위를 얻지만, 언제든 새로운 반증에 의해 기각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수사 또는 과학적 수사란 과거에 발생한 범죄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①증거를 수집하고, ②수집한 증거를 충족시키는 복수의 여러 가설을 수립하고, ③각 가설을 반증할 증거를 추가로 수집하고, ④반증된 가설을 제거한 후, ②~④ 과정을 반복하여 실체적 진실에 최대한 수렴하는 가설이 최후에 남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 살아남은 가설이 진실에 가깝긴 하지만 언제든 반증 가능성이 있으므로 100%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누구나 불변의 진리라고 믿었던 뉴턴 역학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의해 오류와 한계가 드러난 것처럼. 예를 들어 보면, 살인사건 현장에서 피해자 피가 묻은 칼이 발견되었는데, 칼 손잡이에서 A의 지문이 나왔다고 하자. 하급 수사관은 그 지문의 주인을 바로 범인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A를 부르거나 체포한 후 칼을 보여주면서 ‘여기에서 너의 지문이 나왔으니, 네가 범인이다’라며 자백받으려 할 것이다. 만일 수사관의 기대와 달리 A가 ‘제가 그 칼을 만진 적은 있지만 저는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라고 부인하면, 자신의 가설이 깨져 당황하고 화난 수사관은 A를 장시간 반복적으로 불러 다그치거나, 여러 번 압수수색하여 확보한 사생활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거나, 별건 수사를 통해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등 자백할 때까지 최대한 고통을 주는 가학수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범행에 사용된 칼에서 나온 지문의 주인인 A가 100% 범인인데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끝까지 고집한다. 하지만 그 수사관이 전문가라면 칼에 지문이 묻은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설정할 것이다. ①A가 범인, ②피해자가 A의 칼을 빌려왔는데 타인이 그 칼로 범행, ③피해자의 칼을 A가 빌려 쓴 후 돌려주었는데 그 칼로 타인이 범행, ④A가 버린 칼을 피해자가 주워다 놓았는데 그 칼로 타인이 범행 등등. 이후 각 가설을 반증하는 증거와 자료를 찾는다. 새로운 증거와 자료로 가설을 제거하고 다시 새로운 가설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 가장 진실에 가까운 가설을 채택하여 결론짓는다. 이렇게 과학수사가 반증가능성을 전제한다면 언제든 반증에 의해 내 결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반증이 있다면 기존 가설을 고집하지 말고 내 가설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그런 겸손함도 필요하다. 포퍼도 독재적 사회를 비과학적 이론에, 민주적 사회를 과학적 이론에 비유했다.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는 ‘비판을 수용하고 진리의 독점을 거부하는 사회’다. ‘열린 마음’은 수사관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한국 검사는 사과나 잘못 인정에 인색하다고 한다. 검사가 기소했는데 무죄판결이 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의 모두 항소하여 피고인을 계속 괴롭힌다. 재심 사건에서 피고인이 무죄라는 증거가 명확해도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에 계속 유죄구형 또는 백지구형이라도 고집한다. 이를 어기고 무죄구형을 한 임은정 검사는 4개월 정직처분을 받았다. 검사 출신 전직 대통령이자 내란 우두머리는 그렇게나 많은 잘못을 하였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유치하고 옹졸한 자존심에 찌든 닫힌 마음이다. 이런 자세는 과학수사에 적합하지 않다. 사법시험 과목에 과학적 수사 방법은 없었다. 로스쿨 커리큘럼에도 없을 것이다. 경찰대학은 ‘범죄수사학’ 과목에서 몇 시간 가르쳤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사실 아직 학문적 체계도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연구와 실무 적용 피드백이 필요한 분야다. 아무튼 법 잘 알고, 책 많이 읽고, 시험 잘 보고, 글 잘 쓰는 사람이 수사도 과학적으로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다행히 공소청 검사에게는 수사 권한이 주어지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는 경찰도 경험과 도제식 전수에만 의존하는 수사에서 벗어나도록 연구와 교육을 통해 전 수사관 과학수사 역량을 균질적이고 체계적으로 향상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부터 준비해야 한다. 계획과 실행 없이 구호로만 얻어지는 것은 없다.    
2025-12-08 | hrights | 조회: 154 | 추천: 11
박록삼/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광풍(狂風). 글자 그대로 ‘미치광이 바람’입니다. 합리적인 이성이, 건강한 상식이, 올바른 가치가 자리 잡을 수 없는 흐름이 이어지면 그것이 바로 광풍입니다. 1950년대 냉전기 미국의 매카시 광풍이 그랬고, 400년 전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광풍이 그랬고, 꼬박 1년 전 윤석열 일당의 내란 광풍이 그랬습니다. 피해자의 숫자가 많고, 세상이 주목해야만 광풍이 아닙니다. 미처 느끼지 못할 만큼 불어대는 작은 바람이라도 그냥 내버려두면 걷잡을 수 없는 돌풍이 되고, 태풍으로 몸을 비틀어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광풍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부터 한국 사회의 어느 모퉁이에서 작은 광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한 독립군의 삶을 기록한 독립 다큐 영화 한 편을 봤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이 나왔고, 함께 영화를 본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정신적으로 위축된 채 스스로 자기검열을 해야 했습니다. 최근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광복절인 8월 15일 서울하키협회 임원들과 하키 선수 학생들, 학부모들 십여 명은 영화 ‘독립군 : 끝나지 않은 전쟁’을 함께 봤습니다. 평생에 걸쳐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지냈던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것이 중고등학생들에게 충분히 교육적 의미가 있으리라는 판단이었겠지요.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난 뒤 많은 이들이 가슴의 울림을 느꼈습니다. 82년 전 10월 25일은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의 변두리 도시에서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날이었고, 105년 전 10월 26일은 그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항일무장투쟁 역사의 굵은 획을 그어낸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영화는 5만 명 남짓의 관객만 영화관을 찾아서 보고, 여느 비상업영화의 숙명처럼, 며칠 만에 스크린을 모두 내주고 말았습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의 삶을 접한 중고등학생들은 그 드물디드문 5만 명 중의 30여 명이었습니다. 자발적으로 극장을 찾았건, 엄마·아빠의 권유에 의해서였건 그 기특함을 충분히 칭찬할 만합니다. 하지만 새로 회장을 선출한 서울하키협회는 10월 18일 대의원대회를 열어 이 영화를 관람한 임원들을 해임시켰습니다. 사유는 ‘정치적 중립 위반’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보편적 상식이 흔들리고, 우리 시대가 추구하며 확인해온 역사적 가치의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2년 전 집권하자마자 육군사관학교에 설치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비뚤어진 역사관, 국가관을 드러냈던 이들은 이미 내란 세력, 반국가 세력, 헌법파괴 세력으로 그 실체를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 명백한 상식적 가치를 서울시 소속 서울시체육회 산하 한 종목단체에서 뒤바꾸려 했다는 사실 앞에 그저 기가 막힐 뿐입니다.   사진 출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서울시하키협회가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관을 가르치기는커녕 최소한의 상식과 이성도 부정하는 행위를 버젓이 저질렀음에도 세상은 잠잠합니다. 홍범도기념사업회에서조차 변변한 한마디를 내놓지 않습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초대 이사장이었고, 박홍근 민주당 의원이 현재 이사장을 맡은 홍범도기념사업회가 홍범도를 부정하고 능멸하는 행위에 대해 외면하는 이유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체육계 출신인 임오경 의원이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대한체육회를 상대로 이에 대해 한마디 질의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해프닝 또는 사소한 문제라고 여겼을지 모르겠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에서 철거되느니 마느니 하는 정도의 심각한 문제가 나와야 정색해서 분노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이를 기억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그에 대한 영화를 봤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불이익받는 게 용인되는 사회라면, 앞으로 더 많은 분야에서 더욱 본질적인 가치를 야금야금 내줘야 할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국가관과 역사관의 왜곡과 혼동입니다. 그리고 보편적 상식과 합리의 가치가 좌우 다툼의 영역으로 내몰리는 결과일 것입니다. 평범한 시민들은 진리와 상식이 표류하는 시대에서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면서 눈치 보기로 지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듯 철 지난 이념 편향적 역사 인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서울하키협회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와 더불어 홍범도기념사업회 역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스스로 성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폼 나는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박수받고, 언론의 카메라가 달려드는 일에만 나서는 동안 발밑은 서서히 무너질지 모릅니다.    
2025-12-01 | hrights | 조회: 111 | 추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