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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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윤 / 경찰관 압수수색: 내란의 시작 며칠 전 뉴스타파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압수수색: 내란의 시작’ 시사회를 다녀왔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몰랐다. 부산저축은행 사태 봐주기 의혹 보도를 이유로 ‘윤석열 대선 후보 명예훼손 보도’ 사건을 수사한 검찰에 의해 뉴스타파 언론사와 기자들이 압수수색을 당하고 지금까지도 재판 중이라는 것을. 압수수색 현장 영상을 보고 있자니 검사의 견제받지 않는 힘이 정말 막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압수수색을 빌미로 영장에 기재되지도 않은 다른 서류들까지 뒤지는데, 위법수집증거는 증거능력이 배제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함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대상자 인권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마 경찰 수사관이 그렇게 했다면 벌써 그 수사관은 수사와 재판의 대상이 되고, 징계도 받고, 경찰 수사관의 자질이 어떻다는 둥, 경찰의 위법 수사 관행이 어떻다는 둥, 이래서 인권옹호 기관인 검사가 경찰을 지휘해야 한다는 둥 하면서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한국에서 검사의 막강한 힘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게다가 거의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다. 대통령도 벌써 두 명이나 탄핵으로 파면되었는데, 검사가 탄핵으로 파면되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이 정도면 절대권력이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권력을 한 사람이나 한 기관에 몰아주지 않고 분산시킨다. 국가권력 분산에 의한 견제와 균형에서 국민 개개인의 인권 보호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한국 검사는 2020년 1월 수사권이 조정된 후에도 여전히 수사권(일부 범죄라고는 한다), 기소권과 기소재량권, 공소취소권, 영장청구권과 경찰에 대한 영장집행지휘권, 긴급체포승인권을 가지고 있고, 경찰 수사에 대한 보완수사요구권과 시정조치요구권, 재수사요청권과 송치요구권, 압수물 환부·가환부에 대한 경찰 지휘권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피해자 안전을 위한 각종 임시조치와 잠정조치의 청구권까지 가지고 있다(수사 절차가 아님에도 경찰은 반드시 검사를 경유하여 법원에 신청해야 하고, 신청받은 검사가 중간에 마음대로 청구하지 않기도 한다). 거기에 더하여 재판 중 공소유지권 및 재판 후 형벌 집행 지휘·감독권도 있다. 30년 이상 계속된 수사권 논쟁의 한 부분인데, 이렇게 숨차게 써놓고 보니 이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서 허탈하다. 이건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이 미완성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계엄→탄핵으로 이어지는 몇 개월을 되짚어보면 진작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지 않은 것이 이렇게 아쉽고 또 우려스러울 수가 없다. 독재 정권 재탄생에 의한 인권침해 우려가 아직 진행 중인 이 시점에, 한 기관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가 인권 보호를 위해 분리한 사례인 영국 왕립기소청(Crown Prosecution Service, CPS)을 한국에서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영국 왕립기소청 영국은 근대적 경찰 조직을 1829년에 만들었는데, 검찰에 해당하는 왕립기소청을 만든 건 겨우 40년 전인 1985년이었다. 그전까지는 경찰에 의해 기소까지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해 ①수사를 하는 경찰이 기소까지 하면 공정성을 신뢰할 수 없고, ②경찰이 너무 부적당한 기소를 하여 무죄율이 높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비판은 현재의 한국 검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985년까지 영국 경찰은 변호사를 고용하여 기소와 재판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증거가 부족한데도 사건 담당 수사관이 밀어붙여 기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수사관이 증거를 조작하거나, 법정에서 위증도 했다. 이런 잘못된 수사와 기소로 무고한 사람들이 재판에 넘겨져 유죄판결까지 받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화는 영국 경찰에 의해 IRA 테러범으로 몰려 수감생활을 하다 풀려난 청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국가권력의 조직적 폭력 앞에서 개인의 삶은 한순간에 잔인하게 짓밟힐 수 있다. 조직적 폭력은 그 조직의 권한이 막강할수록 강도와 빈도가 세어진다. 한국은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위험한 무기를 한곳에 너무 오랫동안 맡겨두었다. 이제는 수사와 기소 기능을 분리하여 독립기관에 맡겨야 한다. 특별사법경찰관리들도 검사 지휘에서 벗어나게 하여 전문 분야별 복수의 수사기관들이 서로를 수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기관들은 상명하복도 지휘복종도 감시감독도 아닌 견제와 균형의 기반 위에 서로 협력하는 관계여야 한다. 영국 왕립기소청은 경찰관서에 형사사법팀 사무실을 두고 검사를 파견하여 경찰수사업무에 (지휘가 아니라) 조언하고 협력한다. 심지어 경찰의 조언요청에 24시간 응하기 위해 전화조언서비스(CPS direct)를 운영하고 있다. 작년 12월부터 5개월 가까운 기간 많은 것을 보았고, 고비마다 여러 번 마음 졸였다. 이제는 멈칫거려서도 안 되고 눈치 봐서도 안 된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거의 변함이 없는 낡은 형사사법 시스템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걱정 없이 더불어 잘 살 수 있게 될지 궁리하고 결정하고 추진해야 한다.
2025-04-29 | hrights | 조회: 248 | 추천: 10
김양진/ <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 저자 “산불을 진화하기 위해 임도변을 중심으로 호스를 설치해 밤낮을 꼬박 새워 소광리의 핵심 산림자산을 지켰다.” 산림 1만6301㏊를 태운 ‘2022년 3월 울진 산불’의 진화를 자찬하며 산림청이 울진국유림관리소에 만들어 놓은 ‘소광리 대첩’ 기념물에 나온 글귀다.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패배를 ‘청산리대첩’ 같은 대첩 즉 승리로 둔갑시킨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대형산불을 산림정책 실패와는 동떨어진, 기후변화나 강풍과 관련된 불가피한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보고있는 것이다. 최근 10년 동안에만 산불 500여 건이 발생했지만, 그동안 책임 추궁은 전혀 없었다. 국회는 복구에 쓰라며 예산을 늘려줘 왔다. 언론과 시민사회는 어떤가. ‘방심은 금물’이라며 불조심만 강조했다. 그 불을 퍼지게 한 산림구조에 대해 성의 있게 따져 묻지 않았다. 불조심만 강조했고, 원인을 따져보지 않았다 2025년 3월 영남권 대형산불이라는 역대 최악의 대참사가 벌어졌다. 82명의 인명 피해와 4만8238㏊의 산림 피해가 발생했다. 지난 수십 년간, 야생 생태계의 원천인 산림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산림관리에 관한 전권을 전문가(자처) 집단에 위임해왔다. ‘잘 되겠지’하며 눈감아 온 결과는 참혹했다. 3월 24일 산청 산불 발생지점을 살펴봤다. 지리산 동남쪽 입구에 해당하는 산자락이 5부 능선까지 전부 벌목돼 있었다. 그 자리에 작대기처럼 꽂힌, 수천~수만 그루의 두릅나무밭이 들어섰다. 그 밑은 이번 산불로 까맣게 불탄, 지난해 고사한 풀들로 덮여 있었다. 이 풀밭이 닿은 곳은 조림된 소나무 단순림. 숲의 어느 영역보다 그늘지고 축축한 공간이어야 할 산자락이 풀밭으로 바뀌었고, 그 탓에 연결된 숲은 늘 건조하게 유지됐다. 불길은 풀밭에 이어 수지(樹脂, 나무 기름), 즉 송진이 많은 소나무, 일본잎갈나무 등 침엽수림을 타고 숲우듬지를 따라 이동해 하동까지 옮겨붙었다. 불길은 정상부의 활엽수림대로는 퍼지지 못했고 산 밑부분을 따라 이어졌다. 막개발과 인위적인 조림, 즉 비뚤어진 욕망에 그늘진 산림구조가 산불 확산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25년 3월 24일 오전 경북 의성군 점곡면 일대에서 산불이 번지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출처 막개발과 인위적인 조림이 드리운 그림자 의성, 안동, 영덕, 영양, 청송 등에서 발생한 산불도 마찬가지다. 소나무 위주의 인위적인 조림과 숲 가꾸기가 주된 원인이다. ‘숲 가꾸기’는 쉽게 전체 숲의 30%가량을 제거하는, 솎아베기로 산림청 주력 사업이다. 소나무나 일본잎갈나무를 제외한 참나무류 등 활엽수들은 모두 제거 대상이다. 이렇게 하면 햇빛이 잘 들어오는 메마른 숲이 된다. 더욱이 빽빽한 중층, 하층 식생을 제거해버리니 지표화(地表火)로 끝날 불이 수관화(樹冠火), 비화(飛火)하며, 3~4월에 부는 계절풍인 남서풍을 만나 강을 건너고 큰길을 넘어 동해까지 다다른 것이다. 2023년 3월 발생한 지리산 대성골 산불은 피해 면적은 121㏊로 역대 국립공원 산불 중 최대 규모였지만 아래쪽 초본만 태우고 지나갔을 뿐 나무 대부분이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살아 있는 나무들은, 산림청 주장처럼, 불에 탈 ‘재료’가 아니라 물이 꽉 찬 방화벽에 가깝다. 산불 피해를 막아준 지리산의 복잡하게 얽힌 숲속 식생이 그 증거다. 지리산과 달랐던 경북지역 해마다 이뤄지는 전국 숲 가꾸기 면적을 보면 경북 지역이 단연 1등이다. 경북 지역 침엽수림 면적도 42%(2020년 기준 45만7902ha, 전국 1위)로 우리나라 평균(37%)보다 넓다. 이 지역 송이버섯 생산량이 전국의 80%가량 된다는 점도 주목된다. 침엽수림 중에서도, 송이는 밟으면 흙이 풀풀 올라올 정도로, 극도로 메마른 소나무숲에서 자란다. 이런 숲을 유지하려면 주기적인 솎아베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와 같은 온대지방을 뒤덮어야 할 활엽수림을, 산등성이나 암반 지형 등이 적지인 소나무가 대신하고 있는 이유다. 이런 기형적인 산림 구조는 산림정책의 결과물이다. “산림청은 ‘산불피해지 긴급진단팀’을 긴급 파견해 산사태 발생 우려 지역을 중심으로 조속한 복구에 나설 계획이다.”(3월 31일 산림청 보도자료) 지금까지 산불 발생 후 산림청 대응 패턴을 보면 ①산사태 우려 ②긴급 벌채 ③인공 조림 ④임도 확장 및 사방댐 건설의 순서다. 3월 31일 2000년대 들어 네 차례 대형산불(100㏊ 이상 피해)이 발생(2004, 2017, 2019, 2022년)한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을 찾았다. 복구가 끝난 곳이라고 하는데, 민둥산 넘어 민둥산, 민둥산, 민둥산이 펼쳐졌다. 이번 영남권 산불 피해지의 미래 모습이기도 하다. 당시에도 원인으로 지목됐던 소나무, 일본잎갈나무 등 침엽수들이 다시 심겨 있었고 그마저도 상당수는 고사해 있었다. 살아있는 묘목들도 아직 키가 50cm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참나무들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었지만, 목표로 한 나무(소나무)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된다며 잘려져 있었다. 조림, 즉 나무 심기라는 선량한 이름으로 포장돼 있지만, 소나무와 참나무를 모두 괴롭히고, 자연스러운 환경에 맞는 숲으로 돌아가려는 자연의 회복력도 막아 나서는 산림파괴 현장이었다. 산림청이 앞장서서 산림 파괴를 산주(山主) 반대로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곳들이 있었다.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참나무와 물오리나무 등 활엽수들의 키는 이미 3~4m에 달했다. 산불이 나도 흙 3cm 아래는 멀쩡하다. 그래서 활엽수나 초본류들 뿌리는 그대로 살아 있다. 단열효과라고 한다. 기존 뿌리에서 줄기를 내기 때문에 소나무 묘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자란다. 기존 뿌리를 가진 식생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흙을 잡아주기 때문에 산사태 위험도 낮아진다. 반면, 중장비들이 들어가 작업로를 내고, 벌목한다며 숲의 ‘피부’를 헤집고 다니면 숲의 회복은 꼼짝없이 늦어지고, 산사태 위험은 커진다. 대부분의 숲은 회복력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 176명이 참여해 조사했던 2000년 ‘동해안 산불피해지 공동조사단’의 결론이다. 산불 진화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봄철 산불은 남서풍의 영향으로 발화지점에서 북동쪽으로, 부채꼴로 형성된다. 이번 경북 의성 산불도 그랬다. 현장에서 만난 한 베테랑 소방관은 “이번 산불 진화 방향은 충분히 예측가능했다. 부채꼴에 중심선을 그려서 위쪽 지역 주민들은 북쪽으로, 아래쪽은 남쪽으로 체계적으로 대피하도록 해야 했지만 이런 안내가 없었다. 불길이 30번 고속도로를 넘은 것이 3월 25일 오후 2시 30분이었지만 안동시 전 시민에게 대피하라고 한 건 오후 5시가 된 뒤였다. 또 무조건 대피하라는 거지, 방향을 안내하지 않으니 산불의 한가운데로 대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산불만은 소방청이 아닌 산림청이 앞장선다 거의 모든 재난재해를 소방청이 지휘하는데, 산불은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산림청이 지휘하고 있다. 국가직 공무원인 소방관들이 중심이 아니라 평균 연령 60대의 6개월 기간제 노동자 중심의 산불진화대가 산불 진화의 주축이 되는 문제도 반복적으로 지적됐지만 좀체 바뀌지 않고 있다. 산불 신고전화도 소방서로 온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결과도 안 좋다. 지금까지 산불에 취약한 숲을 만들어 온 조림 정책과 그로 인해 생긴 산불에 취약한 기형적인 산림구조의 문제는 공론화된 적이 없다. 숲을 생태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 아니냐고 지적할 수 있다. 산림청 임업통계(2023년 기준)를 보면 용재(건축자재 등으로 쓰는 나무) 생산액은 한 해 4056억원이다. 그마저도 조림(90~100% 세금 지원) 등에 대한 지원금이 없으면 나무를 팔아 얻는 이익보다 경영비가 더 많이 들어가는 적자 구조다. 나무 생산액이 산나물 생산액보다 적다 너무 어린나무들(평균 수령 35년)밖에 없으니 국산 나무는 펠릿 등으로 저급하게 이용되고, 헐값에 팔린다. 그러니 그 경제적 가치는 산나물 생산액(4703억원)보다도 낮다. 반면, 온실가스 흡수·저장, 수원함양 등 숲의 공익적 가치는 259조원(2020년 기준, 국립산림과학원 자료)에 달한다. 이런 전반적인 산림 및 임업생산 구조 문제를 이번만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2025-04-23 | hrights | 조회: 154 | 추천: 5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위헌 위법의 12.3 내란 사태 때 우리는 참으로 많은 ‘헌정사상 초유의 ○○○’ 상황 등을 겪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도 처음이었으며, 국회의 비상계엄해제권이 발동된 것도 헌정사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라는 이는 적법한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하며 군대와 경호처를 동원해 무력으로 법 집행을 막는 기함할 만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뿐인가요. 서울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전례 없이 구속기간을 날이 아닌 시간으로 계산하며 윤석열 당시 대통령을 석방해줬죠. 그러자 검찰총장은 기다렸다는 듯 항고 포기로 여기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우당탕탕 정신없는 우여곡절 끝에 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대통령직에서 파면을 시켰더니 윤 씨-김건희 씨 부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꼬박 일주일 동안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무단 점용하며 연일 만찬 파티를 열고 여전한 대통령 놀이를 즐겼습니다. 그 와중에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차례로 맡은 한덕수 총리,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헌재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는 위헌 행위를 버젓이 저질렀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을 지명하는 적극적 권한을 행사하다가 헌재에서 제동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파면된 윤씨의 최측근인 내란 공범 피의자 이완규 법제처장을 말이죠. 경제부총리를 포함해 내란 공범 피의자인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박성재 법무장관, 이완규 법제처장 등 내란 정부의 주요 장관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개인 핸드폰을 바꾸는 일도 있었습니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는 초유의 일들이 위헌 위법한 12.3 내란 사태 이후 벌어졌습니다. 정당은 어땠나요. 대통령 파면으로 정부여당 자리를 내려놓은 국민의힘은 내란 동조와 방임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12.3 내란 사태 당시 추경호 당시 원내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의 석연치 않은 행동 및 지시를 비롯해 대통령 파면에 이르는 과정 동안 철저히 내란 대통령을 옹호하며 사실상 동조해 온 행태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국민의힘과 대통령실 핵심 멤버들 역시 윤석열 파면 이후 자신들이 했던 행위가 불러올 파장을 인식했을 겁니다. 즉, 헌재 결정을 통해 위헌 정당으로 해산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 말이지요. 그들이 ‘윤석열 아바타’, ‘내란 아바타’라는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한덕수 권한대행을 앞세워 헌법재판관 2명 지명을 강행하려고 했던 것도 그 두려움에 기인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거둘 수 없습니다. 재채기와 사랑은 감출 수 없다고 하죠. 또 주머니 속의 송곳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뾰족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법이죠. 말해놓고 보니 적절한 비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위헌 정당의 속성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16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질의하던 뉴스타파 기자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챈 뒤 끌고 가며 “찌라시 언론”, “도망 못 가게 잡아라.”라는 등 모욕과 폭행을 버젓이 저질렀습니다. 뉴스타파는 탐사 전문 매체로서 진영을 떠나 권력 견제와 감시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둬왔습니다. 설령 그러한 성과가 없는 매체였다 할지라도 권 원내대표의 행동은 형법상 명백한 폭력이며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인 언론 자유를 근본적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입니다. 지난 18일 오마이뉴스 기자와 질의 응답 중 설전을 벌였던 국민의힘 유력 경선 후보인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야 예로부터 유명했습니다. 2년 전 대구MBC가 비판적인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대구시를 비롯한 공공기관 전체에서 MBC의 모든 취재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법적 근거가 없고, 취재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법원의 가처분 신청 인용 결정을 받았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필요할 경우 언론 자유를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제 입맛대로 할 수는 없는 법이죠. 헌법 37조 2항에서 규정했듯 자유와 권리의 근본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내란 우두머리 혐의 피의자인 윤석열 씨가 여전히 ‘1호 당원’인 국민의힘은 제대로 된 사과도 반성도 없이 대선 경선 레이스에 돌입했습니다. 무려 8명의 후보가 나왔는데 잘못과 책임을 통감하는 이는 단 한 명이 없습니다. 대신 크고 작은 위헌적 행위들만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국민의 선택을 구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배출한 대통령이 저지른 내란에 대한 사죄와 함께 자신들이 나서서 헌법과 법률을 부정한 행위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앞서는 것이 상식을 가진 정당의 모습일 텐데 안타깝기만 합니다. 과거에는 언론을 불러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는 정치적 쇼라도 하던데 말입니다. 헌법 준수에 대한 의지는커녕 상식과 이성조차 없는 집단이라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우리 헌정사상 위헌정당 해산 심판은 딱 한 차례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대한민국 법무부가 청구 주체로 통합진보당이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그해 12월 헌재에서 정당 해산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는 등 활동을 한 것은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국민의힘이 11년 만에 헌정사 두 번째로 위헌정당으로 지목되고 해산 심판 청구를 당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입니다.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 속에서 통합의 가치는 절실합니다. 하지만 내란을 옹호하고 동조하는 정당, 위헌적 행위를 일삼는 정당, 극우적 인물을 옹호하며 이념적 갈등을 부추기는 정당이라면 통합의 대상이 아닌, 극복과 혁파, 나아가 해산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국민의힘이 한 줌도 되지 않을 내란 세력과 단절하겠다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입장과 계획을 내놓고 실천하기 바랍니다.
2025-04-22 | hrights | 조회: 93 | 추천: 5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1. 공포와 야만 2024년 12월 3일 밤에 반헌법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시민들의 위대한 투쟁을 통해 이튿날 새벽에 해제되었다. 2025년 4월 4일 대한민국 국민 약 70%가 “주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듣기 위해 눈과 귀를 모았고, 그 바람이 성취되었다. 윤상현 의원이 티브이(TV)조선 ‘뉴스퍼레이드’와 전화 인터뷰에 따르면, 파면 소식을 들은 당사자 윤석열은 “둔기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라고 하면서, “이 국가와 국민은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겨레 신문의 이유진 기자가 전하는 바다. 세간에서는 미신, 망상, 가상현실 속 심리 등에 사로잡힌 인격적인 파탄 상태라고 하는 수식어가 윤석열의 존재를 규정한다. 이러한 윤석열의 미신적 망상 상태를 개인으로서의 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한국 사회의 정체(正體)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사회는 야만적인가, 문화적인가? 일도양단으로 나눌 수 없음은 물론이다. 놀라운 일은 예술 문화적으로는 상당 정도의 단계에 올라선 것 같은데, 정치 사회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야만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무속에 틀림이 없는, 손바닥에 ‘王’ 자를 새기고 나온 것을 번연히 보고서도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데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모르긴 해도 그에게 표를 던진 국민 대다수는 이른바 여러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K-컬쳐’의 위용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야만적인 자가 문화적인 정신 상태를 갖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가? 멀쩡하게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에서 높은 지위를 누린 뒤 적절히 부유한 상태로 은퇴한 자들이 이른바 ‘태극기 부대’에 동참하면서 윤석열을 지지한다. 충분히 지성적일 것 같은데, 아니다. 멀쩡하게 아주 야만적이다. 야만성의 원인은 공포다. 가진 걸 빼앗길까 봐 크게 두려워하는 그 공포심은 정신적으로 야만성을 일으킨다. 남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학문과 예술문학을 애호하고 이로써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채운 정신세계를 이룬 만큼 공포심에서 벗어난다. 원리상 빼앗길 수 있는 돈과 권력에 얽매인 자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고 그만큼 야만적이다. 이러한 야만적인 자들에게 ‘K-컬처’의 위용은 자신의 존재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좋긴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돈이 많고 명예에 따른 사회적인 권력을 누리는 자가 다 그렇다는 건 물론 아니다. 학문을 숭상하고 예술문학을 애호하는 자들에 비해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것이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빼앗아 갈 상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적인 상대를 향한 적개심과 분노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거기에서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건 한 걸음이다. 파면 소식을 접한 윤석열이 걱정했다는 그 국가는 무슨 국가이며 그 국민은 어떤 자들을 지시하는가? 그 국가는 자신이 그 꼭대기에 올라서서 마음껏 운용하던 국가다. 그리고 그 국민은 그를 지지하느라 미친 듯 밤을 새우기까지 하면서 크게 대세를 이룬 모습으로 탄핵 반대를 외친 자들, 특히 ‘태극기 부대’니 ‘세이브코리아’니 해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양손에 거머쥐고서 심지어 법원을 여지없이 파괴하는 폭력적인 야만의 발광을 일삼는 무리다. 자신의 파면으로 인해 그 국가가 무너졌고, 그 국민이 자신을 외면하고 흩어질까 봐 걱정된 것이다. 2. 야만의 정치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빼앗길까 봐 공포에 휩싸인 폭력적인 야만성은 특히 정치권에서 발작적으로 나타난다. 그 배후의 주요 원인은 방금 말한 윤석열의 그 국민, 그 전부터 집단적인 위세를 떨치면 특히 윤석열 탄핵 반대를 외친 기독교 광신 세력의 대대적인 준동이다. ‘국힘당’의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이른바 지도부 내지는 유명 국회의원 인사들이 반헌법 내란 우두머리인 윤석열의 관사에 떼 지어 몰려가 마치 죽음의 위기에 처한 군주를 구하려고 하기라도 하듯 엉터리없이 열변을 토하면서 꼭 윤석열을 지키겠다고 맹세한다. 파면 이후에도 그 태도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그래야만 기독교 광신 세력을 자신들의 지지 세력으로 확실하게 굳히고, 그 대세에 동조하는 주변 세력을 규합할 수 있다는 정략적인 심보의 표출로 보인다. 그런데 지귀연이라는 판사는 도대체 왜 전대미문의 구속시간 초과의 원칙을 내세워 윤석열을 석방했을까? 그리고 이에 대해 검찰총장 심우정은 왜 즉시항고를 하지 않았을까? 현재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지위와 권력을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가 작동했음에 틀림없다. 공포에 따른 추하기 짝이 없는 야만적인 행위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만적이라고 할지라도 지금까지 쌓아 올린 나의 지위에 따른 권력과 가식적인 명예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킬 수만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대통령 권한 대행이란 자들은 또 왜 그런가? 법도 원칙도 대의도 정의도 공정도 일절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그동안 자신을 그 자리에 임명하고 자신 위에서 군림한 대통령을 지극히 부러워해 오다가 자신에게 급작스럽게 주어진 대통령이란 자리를 얼씨구나 즐기는 자처럼 군다. 자신의 행위가 직권남용이고 직무 유기임을 알면서도 반헌법의 내란 행위를 직간접으로 두둔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을 그 자리에 임명한 ‘분’을 감히 어떻게 배반할 수 있는가 하는 개인 간의 의리임을 고백한다면 그나마 덜 야만적일 것이다. 그동안 너무나도 야만적인, 예컨대 10만 원도 채 안 된다는 김혜경 법인카드 유용 사건의 수사에 130번의 압수수색을 반복하는 등, 하는 검찰의 행태를 보아온 탓에 ‘윤석열 내란 우두머리’ 사건을 제대로 기소해서 무기 또는 사형의 처벌을 받게 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다. 이미 담당 특별수사검사팀은 심우정의 즉시항고 포기에 동조해 윤석열을 풀어주지 않았는가. 우리 한국 사회에서 번연히 목격하고 있는 이 모든 야만의 정치 행위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서 설명해야 하는가? ‘빼앗김에 대한 공포에 따른 야만성’이라는 개념으로만 과연 제대로 해석 ·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3. 종교적 파시즘 세력 ‘윤석열 정치 집단’은 곧 있을 대선을 통한 전적인 정치 구도의 변화에 따라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발본색원은 전혀 쉽지 않다. 그 배후의 뿌리에서 기독교 광신 세력이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의 보장을 악용하여 계속 집단적인 사회 정치 행위를 일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다. 이번에도 민주시민들의 엄청난 혁명적인 투쟁으로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기획을 담은 내란의 실효적인 현실화를 막아내고, 길고 긴 싸움 끝에 마침내 대통령 윤석열 파면을 끌어냈다. 하지만, 민주시민의 힘을 총동원해도 이 야만의 기독교 광신 세력을 잠재우는 걸 넘어서서 아예 무력화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게 여겨진다. 필자는 그야말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급기야 나름 기독교 신념을 지니고서 신학교에 입학해 졸업까지 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포기한 지 40여 년이 되었고, 당연히 지금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런 필자로서는 대대적인 기독교 광신 세력들에 의해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가 야만성을 전격적으로 드러내는 작금의 현상에 대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간 모두를 근원적으로 죄인으로 여기고 인간 예수를 구원의 하느님으로 믿는 기독교의 기본 원리를 싸잡아 비판할 생각은 없다. 종교의 원리와 그에 따른 힘이 세속적인 국가에 스며들어 지배하고자 할 때 크게 문제가 된다.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고 했다. 이 말이 갖는 함의에 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항에서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갖는다.”라고 명기하고, ②항에서는 “국교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되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한 국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원리상 종교는 초국가적이다. 종교가 갖는 초국가적인 성격은 여러모로 위험성을 안고 있다. 기독교 특히 신교의 경우, 신자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이다. 신과 개인의 구원 사이에 매개자를 두지 않는다. 목사도 한 사람의 신자일 뿐 신도의 구원과는 직접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구원받은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지만, 그 하느님의 나라는 영적인 차원에서일 뿐 세속에서 현존하지 않는다. 이는 가톨릭과 크게 다르다. 가톨릭은 교황의 무오성과 그 강력한 사도적 권위를 정점으로 한 세계 전체 교회를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공동체로 여긴다. 간단하게 말해, 신교에서는 신도들이 모이는 교회당에 가지 않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성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신도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정치 사회를 혼돈으로 크게 흔들리게 하는 주범인 전광훈과 손현보는 이른바 신교의 목사다. 목사라고 해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목사도 국민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치적인 불의와 불공정에 대해 과감하고 강력하게 비판해야 한다. 심지어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독재정권과 싸운 목사들이 적지 않음은 다들 아는 바다. 전광훈과 손현보도 자신들을, 선봉에 서서 정치적인 불의와 그에 따른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의로운 투사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정의(正義)가 무엇인가? 이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요 발언과 행동을 일일이 새겨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이번 윤석열 내란과 탄핵을 둘러싼 사건만으로도 그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국가의 정의가 무엇인지 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반헌법적으로라도 비상계엄을 통해 군대를 동원한 무소불위의 통치를 획책한 윤석열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신앙의 이름으로 국가의 최고 이성의 표현인 헌법과 이를 통해 표현되는 국가의 주권을 배척하는 것이다. 신앙이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를 바탕으로 국가의 국민공동체가 갖는 주권적인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다. 따지자면, 여기에는 국가와 교회 내지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조화와 대립의 문제가 깔려 있다. 교회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국가의 바탕을 허물고자 한다면, 과연 근본적으로 폭력을 근거로 작동하는 국가는 그러한 활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그들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말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헌법을 악용해 반헌법적 · 반국가적 활동을 정당화하지 않을까? 가장 큰 문제는 전광훈 · 손현보의 세력은 특정한 개인인 그 두 사람을 마치 신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인 양 떠받든다는 점이다.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다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을 ‘신천지 교회’의 이만희 같은 자야말로 그 집단에서 교주로서 신적인 권위를 지녔다. 그 자체로 워낙 우리 사회를 부패시키지만, 노골적으로 나서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교회가 세속에 물들면 안 된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하지만, 세속과 맺는 기나긴 역사적인 관계를 통해 그 현실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은 경우, 신앙은 맹신이 된다. 맹신의 징표는 초월적 지위를 지닌 권위자를 말 그대로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맹신에 따른 신앙으로부터의 최고의 일탈은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신격화다.”라고 했다. 여기에는 당연히 사디즘적인 인격적인 가학과 마조히즘적인 동물적 피학의, 이른바 ‘가스라이팅’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전광훈 · 손현보는 자신들의 위엄과 권위를 위해 이러한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자들로 보인다. 이러한 인간의 신격화 내지는 초월화가 정치에 이관될 때, 바로 파시즘적 폭력 정치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공화주의는 물론이고 주권 형성에서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마저 근본적으로 위협하게 된다. 종교적인 신앙을 중심으로 파시즘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이른바 목사가 현실 정치에서도 권력을 확보하고자 할 때 그 정치적인 이념은 당연히 반민주-반공화적인 파시즘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종교적 파시즘적인 정치 세력의 형성과 확산을 지극히 경계할 일이다. 아울러 지극히 위험한 그러한 이념적 지향을 지닌 세력을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자 함으로써 저 파시즘적인 정치 세력을 정당화하면서 힘을 보태는 ‘국힘당’을 중심으로 한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옹호 정치인들의 저 야만성을 다시 한번 경계한다. 그러면서 새 민주정권이 들어서서 민주시민들과 함께 어떻게든 최대한 지혜롭게 계몽시켜 저들의 극우 파시즘적인 준동을 막아내야 할 것이다.
2025-04-15 | hrights | 조회: 475 | 추천: 5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정치 환경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당장 장기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화폐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비촉진을 위한 재정 정책으로 단기 효과가 가장 큰 것이 지역화폐임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국내외 경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가운데 즉시 전력으로 투입해 효과를 볼 수 있는 게 지역화폐이다. 그러나 최근 나오는 지역화폐 활성화 방안은 무리수이거나 지역화폐의 존재 이유를 벗어나 돌아오지 못하는 오류의 다리를 건너게 될지도 모르는 내용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모 매체에서 보도한 내용을 들어보자. 지역화폐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지역화폐 사용 가능 지역을 거주 지역뿐 아니라 타 시군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경기도의회 한 의원이 제안했다는 것이다. 도 내 타 지역으로 출퇴근하거나 각 시군의 경계에서 거주하는 도민들은 지역화폐 사용이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한 8년 전 시흥시 지역화폐 시루를 도입하면서 각 동네마다 설명회를 개최했었다. 인근 안산시와 인접한 동에서 한 질문을 받았다. “안산에서도 쓸 수 있어요?”. “지역화폐는 말 그대로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만 쓸 수 있습니다”. “에이, 안산에서도 못쓰는 걸 왜 만들어요. 난 안 쓸래요”. 허탈했다. 지역화폐의 가장 큰 도입 목적은 지역 내 소비의 역외유출 방지이다. 그래서 지역에서만 쓸 수 있게 설계된다. 만일 A와 B 지역의 지역화폐를 통합한다면 필연적으로 한 지역으로 지역화폐 소비는 쏠릴 수밖에 없다. 도입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 반대의 주장으로 이런 게 있다. 지역화폐 할인 인센티브 예산이 부족하니 해당 지역 시민에게만 지역화폐 구매를 허용하자는 내용이다. 이는 해당 지역 거주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사실상 불가능하며 타 지역 사람들의 사용을 아예 차단하여 오히려 지역경제 활성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면 앞서 제기한 한 도의원의 불편 해소 방법은? 지역화폐는 타 지역민뿐 아니라 가능만 하다면 외계인도 구매 환영이다.(가끔 이렇게 외계인 드립을 시전하는데, 아쉽게도 웃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 각 지역의 지역화폐를 구매해 사용하면 된다. 모바일의 경우 앱에서 사용지역 재설정을 통해 순식간에 가능하다 경기도 의회에서는 또 행안부에서 정한 지역화폐 가맹점 매출액 기준 30억 원과 다르게 경기도는 12억 원이 기준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라며 도민들이 지역화폐를 폭넓게 쓸 수 있도록 상향 조정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충분히 논의해 볼 만 하다. 하지만 지역화폐 도입은 앞서 말한 소비의 역외유출 방지와 더불어 역내유입 소비의 균등한 배분이라는 큰 목적이 있다. 지역화폐는 소비자 혜택보다 소상공인을 살리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 대기업이나 매출이 높은 업체 대신 골목상권 소상공인에게만 사용하도록 한 불편한 돈이다. 그래서 세금을 들여 불편한 돈 쓰시라고 할인 혜택을 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추가 한쪽으로 기울면 안 되지만 소비자 중심의 지역화폐 정책이 너무 강조되면 자칫 퍼주기 논란으로 흐를 수 있다. 지역화폐의 충전과 이용이 주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카드가 기반이 되기 때문에 노인·장애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의 접근성이 떨어지므로 이를 개선하고, 연령별로 지역화폐 발행 비율을 정하는 등의 개선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럼 다시 종이형태의 지류권 지역화폐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카드와 모바일 외에 다른 결제 방식이 현재 가능할까? 연령별로 구매할 수 있는 비율을 정한다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 고령층의 모바일, 카드형 지역화폐 사용 비율이 크게 떨어지지만 90세를 넘겨도 모바일형을 잘 쓰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청년층이지만 카드형만 고집하는 경우도 많다. 지역화폐의 형태가 연령대별 사용의 차이를 만든다고 단순히 생각할 순 없다. 결제수단의 변화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사용법을 더 쉽게 개선하거나 사용 교육을 확대하는 등의 방법이 더 현실적이다. 지역화폐를 바로 사용하지 않고 쟁여두어 골목상권 활성화 효과에 물음표가 찍힌다는 주장도 있다. 근거가 무엇이었을까? 시흥화폐 시루 사용자의 충전 후 평균 사용 기간(순환율)은 2024년 약 24일이었다. 1인당 월 30만원까지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기본 룰에 비춰보면, 대체로 한달 내 알뜰하게 지역화폐를 소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역화폐는 저축도 못하고 이자도 없다. 보유한도도 시흥시 지역화폐 기준 150만원이다. 5년으로 길기는 하지만 유통기한도 있으니 쟁여놓을 이유가 없다시피 하다. 지역화폐 결제액 4분의 1이상이 학원비에 쓰이니 골목상권 활성화 효과에 물음표가 찍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역화폐의 학원비 결제 비율은 지난 2~3년 사이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가계소비에서 역대급으로 사교육비 비중이 올라간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학원비 쏠림현상은 가중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골목상권 활성화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단정짓기 쉽지 않다. 시흥시 시루 가맹점의 업종별 매출을 살펴보면 학원서비스업은 대다수가 카드사 결제수수료율 구간 기준 연매출 3억 이하 영세사업장이다. 대도시의 기업형 입시학원을 제외하고 그들은 대표적인 골목상원의 영세 소상공인이다. 학원비 결제를 막는다면 지역화폐 소비가 음식점이나 소매업으로 돌아갈까? 밥을 굶더라도 자녀 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새 천정을 뚫고 있는 사교육비 지출과 경쟁 해결책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 최근 국회에서는 정부의 국비지원 의무화를 새로 넣는 지역사랑상품권법 개정안이 상정되었다. 또 대선을 앞두고 그만큼 지역화폐에 더 큰 기대가 곳곳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방향으로 가선 안 된다. 보다 깊이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신중하게 정책을 만들고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금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잘 쓰는 것이 능사라는 점을 견지하며 지역화폐의 효과성과 가능성을 타진해야 할 것이다.
2025-04-08 | hrights | 조회: 106 | 추천: 5
이동우 / 변호사 2024. 12. 3.의 위헌적인 계엄사태 이후 탄핵소추된 대통령에 대한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 검찰의 항고포기, 그리고 헌재의 탄핵심판선고지연사태까지 경험한 지금,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은 총체적인 불신의 늪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국민적 우려와 불신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변화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오늘은 그 중 하나인 배심제 도입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배심제의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미국에서는 배심제의 도입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배심제를 지지하던 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배심제의 지지자들은 직업법관이 특정한 사고방식이나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사회를 경험하고 가치관을 형성하고 유지한다. 그러나 직업법관들은 일반 시민들에 비해 훨씬 더 좁은 범주의 구성원과 인간관계만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의 보편적인 상식과 정의관념과는 다른 편협한 시각이나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초기 정치가들의 우려였다. 가끔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과 동떨어진 판결이 뉴스에 소개될 때마다 이러한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둘째, 직업법관에 대한 정부 혹은 권력집단의 영향력을 우려했다. 직업법관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의해 임명된다. 즉, 구조적으로 정부에 치우칠 수밖에 없고 나아가 자신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정치세력에 편향될 우려도 있다.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 참여하는 배심제와 달리 개개인의 법관은 금품이나 향응 등에 의해 매수될 위험도 더 높다고 주장한 미국의 정치가도 있었다. 이런 모든 우려는 결국 개별 법관의 정부 혹은 특정세력에 대한 편향에 대한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윤석열에 대한 구속취소 결정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선고 지연을 통해 이러한 우려가 1700년대 후반의 미국만이 아니라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도 현실적인 고민임을 많은 국민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마지막으로 판단의 합법성과 적정성이다. 이는 한 명의 직업법관보다 다수의 일반 시민들의 결론이 보다 정의와 형평에 부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글도 모르던 중세 유럽이나 조선 초기와 같은 과거가 아닌 국민의 교육수준이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높아진 현대사회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주장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교육수준이 높은 국민이 많은 사회에서는 직업법관 개인의 판단이 다수보다 나을 것이라는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흔히들 법률지식의 정도 때문에 직업법관이 다툼의 결과를 판단해야한다고 얘기하지만 대부분의 재판은 어떤 사실이 있었느냐 아니냐, 즉 사실판단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판단에는 법률지식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극히 일부의 사안들, 즉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닌 이른바 법률적 해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사안도 관련된 법률에 대한 법률전문가의 조언을 받으면 우리나라의 평범한 일반 시민은 해당 사건에서 옳고 그름의 법률적 판단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물론 배심제도 완벽한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단점이 존재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점이다. 배심재판은 기본적으로 배심원의 선정절차를 거치고, 배심원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들고 비용이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 직업법관이 아닌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양측이 자신들의 주장을 해야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기도 한다. 그렇게 때문에 배심제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비용과 효율성을 이유로 배심제가 현대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은 제도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다. 모든 사건에 배심제를 도입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면 중요한 형사재판이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적용되는 사건들에 우선적으로 배심제를 도입할 수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배심제의 범위를 점차 넓혀가고 또 배심제가 필요치 않은 단순한 사건들도 유형화할 수 있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효율성은 의사결정의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대부분 경험을 통해 알고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효율이 중요해도 꼭 필요한 부분까지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일이 많아 바쁘기 때문에 밥을 계속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내 몸을 챙기지 않으면 결국 나를 둘러싼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내가 쓰러져버리게 된다. 효율성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빌미로 주권자가 직접해야 할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을 누군가에게 맡긴다면 어떻게 될까? 주권자의 일을 대신하는 그 사람, 그 집단이 주권자의 위치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게되지는 않을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검찰과 일부 법관들의 위헌적인 폭주가 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용이 들더라도 주권자라면 주권자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리고 사법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배심제다. 많은 법률교육을 받은 법률가만이 올바른 재판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주권자인 국민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생각한다면 배심제를 배척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2025-04-02 | hrights | 조회: 207 | 추천: 10
장은주 /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이 이루어진 지 100일 지났음에도 헌법재판소의 인용 판결이 나오고 있지 않다. 온 국민의 시선이 헌법재판소에 쏠려 있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지 계속 선고가 지체되고 있다. 이러는 와중에 인내심의 한계를 호소하는 시민들이 늘었다. 그러면서 묻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정당한 민주적 선거 과정을 통해 구성된 국회의 3분의 2가 넘는 의원들이 의결한 대통령 탄핵을 선출되지도 않은 소수 헌법재판관들이 다시 심사하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헌법재판소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이 찬성하는 탄핵에 대한 최종 결정을 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일까? 8(9)명의 헌법재판관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새삼 현대 민주주의에서 헌법재판소의 본질적 역할과 의미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독일을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독일 헌법재판소의 역할과 의미 규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미국으로 망명했던 유대인 출신 독일 법학자 칼 뢰벤슈타인(K. Löwenstein)이 제안한 ‘전투적 민주주의’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극우 파시스트 같은 적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의 원리 적용을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 ‘방어적 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적 민주주의 개념은 이후 나치 패망 이후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나치 정당 같은 반민주적 세력에 대한 강력한 감시와 견제, 심지어 결사의 자유 같은 민주적 권리의 제한을 핵심으로 한다. 독일은 극단적인 반민주 정치 세력을 감시하는 ‘헌법수호청’과 함께 헌법재판소가 그 일을 맡게 했다. 헌법재판소는 ‘위헌정당’을 해산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고, 실제로 나치당의 후신 정당 등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는 바로 이런 독일의 사례를 본떠 새 민주 헌법을 만들면서 헌법재판소를 도입했다. 헌법재판소에 부여한 사명은 명확하다. 한 마디로 우리 헌법에 새겨진 국민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다양한 도전에 맞서 헌법을 수호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헌법재판소는 그동안 이런 사명에 걸맞게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서 꽤 긍정적 역할을 해 왔다. 가령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지했던 민법 조항이나 음란물 등에 대한 지나친 국가의 검열 행위를 위헌으로 판결했고, 정치 관계법 등의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조항들도 바꾸도록 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여성들의 낙태를 제한한 법률을 위헌이라고 판시함으로써, 여성들의 권리 신장에 역사적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헌법재판소가 국민들의 기본권 보호라는 존재 이유에 언제나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헌재는 그동안 ‘자유권’은 몰라도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차원의 삶의 안정성을 위한 ‘사회적 권리(사회권)’를 보장하는 데서는 일관되게 소극적이었다. 자유권과 관련해서도, 우리 시민들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해 온 국가보안법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내란을 기획한 위헌 정당이라며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린 판결의 경우에도 명확한 증거도 없이 정당의 ‘위헌성’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적용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를 이전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계획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던 일은 헌법재판소의 기득권 편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헌재는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조선 시대 이래의 ‘관습헌법’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는데, 아마도 세계 헌법재판사에 기록될 엽기적인 판결이 아닐까 싶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왕조 시대의 유사 헌법을 근거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수도 이전 계획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으니 말이다. 많은 시민들은 그 배경에 서울에 기반을 둔 당시 헌법재판관들의 직접적 이해관계, 특히 부동산 기득권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했는데,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민주적 의회의 결정을 소수의 사법 엘리트들이 다시 한번 최종적으로 인준하게 하는 이런 ‘사법 심사(judicial review)’ 제도는 근대 이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민주주의가 지닌 중우정치의 위험을 막고 ‘다수의 전횡’에 맞서 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의 기본권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자는 게 그 기본 취지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과 비판이 있지만, 이런 방식의 민주주의 헌정화가 시민들의 기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데서 가지는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법심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치의 우위를 내세우며 민주적 헌정 질서의 본원적 가치와 민주적 정치 과정의 의미를 무시할 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그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가 진행하는 사법심사 제도가 지닌  심각한 자가당착 중의 하나는, 민주적 다수결주의의 위험성을 근거로 도입된 이 사법심사도 결국 다수결로 최종적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이번 윤석열 탄핵 심판의 경우에는 헌법재판소의 구성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3명만 인용에 반대해도 기각될 수밖에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 헌법재판소는 헌정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그 본질적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결정적인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관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2025-03-26 | hrights | 조회: 128 | 추천: 7
윤동호 /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타인이 그것을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타인을 설득하고 납득시켜서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이 하도록 하는 야만적인 방법은 물리력이다. 이른바 조폭이 흔히 이 방법을 사용한다. 요즘은 흔히 가스라이팅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심리적 강제를 하기도 한다.   권한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타인을 강제하기도 한다. 지난 해 벌어졌던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가 그 예다. 군사력과 경찰력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과 정치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하려고 했다. 조폭과 다르지 않다. 돈(money)으로 타인을 강제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허용한 방법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돈으로 산다. 돈을 주면 심지어 범죄도 불사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사고가 팽배한 것 같아 무섭다. 민주사회에서 허용된, 타인을 강제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바로 법(法)이다. 법은 강제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이 하려고 하지 않을 때 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법치사회, 법치주의라는 말이 있다. 법은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법이 강제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법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약속이다. 더불어 함께 살면서 타인과 갈등이나 분쟁이 생기면 어떻게 처리할지 미리 약속한 것이다. 혼자 살면 법이 필요 없다. 분쟁이 생겨도 우리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하면 법은 필요 없다. 그래서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삶이 전쟁이라면 민주사회에서 법은 총이다. 법이라는 무기를 가진 사람과 그런 무기가 없는 사람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법을 잘 알면서도 타인을 설득하여 분쟁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더디게 진행되는 법적 절차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이다. 법적 절차에 연루된 우리를 변호사가 결코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절차를 벗어날 수 없다. 법이 최고이고, 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 곧 법률만능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길 여지가 크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아껴야 한다. 상처뿐인 영광을 맛보기 위해서 법을 이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법의 전제가 되는 사실이 무엇인지에 따라 적용되는 법이 달라질 수 있다. 폭행의 고의로 타인의 신체를 접촉한 것이면 폭행죄이지만, 추행의 고의로 타인의 신체를 접촉한 것이면 강제추행죄이다. 법의 전제가 되는 사실이 확정되었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해 적용되는 법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지에 따라 법적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유죄의 전제 사실이지만 무죄가 될 수도 있다. 법은 우리의 약속이지만 그 약속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피의자)은 수사기관이 법관의 영장을 받아서 체포나 구속을 할 수 있다. 수사기관이 체포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48시간이고, 수사기관이 구속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원칙적으로 10일이다. 그런데 체포나 구속된 피의자가 영장이 발부된 체포나 구속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법원에 체포적부심이나 구속적부심을 청구할 수 있고, 이 경우 법원이 체포·구속적부심사를 진행한 ‘기간’은 체포·구속의 최대 시간에 산입하지 않는다. 이 기간 중에는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예컨대 구속적부심이 3일에 걸쳐 진행되어 33시간이 걸렸다면 구속기간 10일 중 3일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아니면 33시간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체포적부심이 이틀에 걸쳐 진행되어 10시간 32분이 걸렸다면 이틀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아니면 10시간 32분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영장에 의해 체포된 피의자가 청구한 체포적부심이 기각된 후 구속영장이 청구되어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은 경우 법원이 구속영장실질심사를 진행한 기간도 구속기간 10일에 산입하지 않는다. 이 경우 그럼 법원이 체포적부심을 진행한 기간은 구속기간 10일에 산입해야 할까, 아니면 산입하지 않아야 할까. 그런데 구속기간은 체포한 때부터 기산을 한다. 따라서 체포적부심을 진행한 기간은 구속기간에 산입하지 않아야 한다. 이 기간 중에는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은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다.
2025-03-11 | hrights | 조회: 287 | 추천: 9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돌봄이 화두가 된 지 오래다. 한국 사회가 저출생 고령화 사회로 들어섰다는 지표가 분명해질수록 돌봄의 수요도 돌봄을 둘러싼 논쟁도 많아지고 있다. 노년의 부모를 돌보는 일은 많은 중년 세대가 당면한 과제이기도 하고, 아픈 부모를 어린 나이부터 돌봐야 하는 영케어러의 곤란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어쩐지 돌봄은 소홀히 여겨진다는 의혹을 거두기 어렵다. 의료 현장에서 의사가 하는 치료와 간호사의 처치는 전문적 의료 ‘케어’이고, 간병인의 돌봄노동은 ‘허드렛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은가? 장기요양보험제도 아래 요양보호사의 노동도, 가사도우미의 노동도, 청소노동자의 노동도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노동인데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단순노동으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은가? 돌봄은 누구나 필요로 하지만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건 아닌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문명이 시작됐다는 최초의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어느 학생의 질문에 “부러졌다 붙은 대퇴골”이라고 답했다. 미드는 문명화의 첫 증표로 1만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퇴부 뼈를 꼽았다. ‘털없는 원숭이’ 인간은 원시 상태에서 취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집단적 협력을 해야 동물성 먹거리를 사냥할 수 있는 인간에게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동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뼈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된 동료 인간을 내버리지 않았고, 부러진 뼈가 아물 때까지 보살핌을 제공했다. 그 증거가 남은 것이다. 마거릿 미드의 말처럼 돌봄은 인간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이며, 문명화의 척도라 할 수 있다. 돌봄이 ‘오래된 미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봄의 가치가 존중받고 나아가 오래된 미래로서 돌봄의 가치가 고양되기 위해서는 돌봄의 가족화와 시장화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가족이 돌보는 것이 최선이다’ 같은 판단을 당연시하지 않는 게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가족이 못하면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답은 해결책이 아니라 사회 불평등 구조를 은폐하고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족과 시장을 넘어서는 돌봄의 공공화가 필요하다. 나아가 돌봄의 공공화를 위해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실행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돌봄을 인간에 내재한 역량으로, 사회가 높여가야 할 역량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이라는 개념은 가족과 시장을 넘어 역량으로 돌봄의 지평을 확장하는 사유에 실마리를 준다. 이 개념은 1980년대 미국 에이즈 위기 때 미술비평가이자 에이즈 운동가 더글러스 크림프에서 유래했다. 더글러스 크림프는 에이즈로부터 안전한 섹스와 상호돌봄을 하자고 했다. 그는 우리의 난잡함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난잡한’은 ‘가벼운’ 또는 ‘진정성 없는’의 의미가 아니라 게이들이 서로 친밀함과 돌봄을 나누는 방법을 다양하게 실험하고 안전한 섹스를 나누면서 서로를 극진히 돌봄으로써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였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게이들을 의료진도 보건당국도 국가도 심지어 가족도 돌보지 않고 버렸을 때 게이 남성들은 스스로 건강 센터를 만들고 네트워크를 구축해 서로를 돌봤다. 에이즈 위기 때 이들 돌봄 제공자들이 보여준 용기는 미국 같은 동성애 혐오 국가에서조차 감탄과 존경을 불러일으켰고, 게이 남성에 대한 낙인을 누그러뜨리는 데 일조했다. 사진 1.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 『애도와 투쟁(Melancholia and Moralism)』 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99273496 ‘난잡함’을 더 넓게 해석해 보자면, 배타적 친밀함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사랑의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친밀하기 때문에 돌보는 것이 아니라, 돌보기 때문에 친밀성이 얻어진다. 이를 가족에 적용하자면 가족이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돌보기 때문에 가족이 되는 것이다. 가족이 누구에게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하는 따뜻한 안식처인 건 아니다. 어떤 가족은 남보다 못하기도 하고, 성적 지향이나 장애를 이유로 자식에 등을 돌리는 부모도 있다. 가족과 친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난잡한’ 돌봄을 실천해온 소수자 공동체에게는 그들 공동체의 과거가 켜켜이 쌓여 있고 그 역사는 돌봄의 오래된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된다. 정착식민주의에 저항해온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고통 속에 치유와 돌봄,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인들이 고된 농장일로 병들고 불구가 되었을 때 서로를 거두고 돌보던 전통, 장애인 활동가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던 상호돌봄이야말로 되살리고 기억해야 할 역사다. 북미 유색인 퀴어 장애정의 활동가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는 『가장 느린 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의 아카이브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킵니다. 언제든 아프고 장애가 있는 사람이 서로를 기억하고 운동사의 순간들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기념하고, 우리 스스로 존재함을 증언합니다. … 마지막으로 제가 알았던 죽은 이들이 유령처럼 곁을 맴돕니다.” 사진 2.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Leah Lakshmi Piepzna-Samarasinha, 1975- ) 출처: wikipedia 중국계 미국인 장애활동가 앨리스 웡은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에서 장애 조상들을 불러온다. 그녀에게는 홍콩에서 이주한 중국인 부모님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이리어에서 장애운동을 함께 해온 먼저 죽은 동료들이 조상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 앨리스 웡의 ‘불구’ 조상의 계보에는 스테이시 파크 밀번도 들어있다. 2020년에 사망한 스테이시 파크 밀번은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퀴어 장애인 활동가였다. 그의 생전 모습은 곧 25센트 동전에 새겨진다. ‘불구’ 계보와 같은 ‘난잡한’ 돌봄의 계보는 친족의 의미를 해체하는 동시에 재구축하고 돌봄의 의미를 넓힌다. 사진 3. 앨리스 웡 (Alice Wong, 1974- ) 출처: https://www.womenshistory.org/education-resources/biographies/alice-wong 1974년생인 앨리스 웡은 아직 살아 있다. 신경근육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웡은 호흡기를 사용하는 중증장애인이고 미국 장애인 복지제도 메디케이드 수급자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서전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은 장애 극복의 감동 서사 따위는 한 줄도 없고 유머와 재치,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장애인은 사이보그이자 신탁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부고 기사를 이렇게 상상해 쓴다. “서기 2070년 호랑이의 해에 앨리스 웡이 숨졌다. 향년 96세. 신탁 예언자이자 이야기꾼이고 사이보그이며 트러블메이커이고 활동가이고 올빼미형 인간이었다. … 장애가 진전되면서 앨리스는 2045년 달에 있는 무중력 캡슐로 이주했다. 이로써 앨리스는 과학자, 창조자, 탐험가로 구성된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두 번째 크립 우주인단의 일원이 되었다.” 적절한 돌봄이 주어지지 않으면 어린이, 노인, 환자, 장애인의 삶은 영위될 수 없다.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만이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인정받아온 역사가 길지만, 돌봄을 시야에 넣는다면 달라질 수 있다. 앨리스 웡은 장애인은 돌봄을 받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돌봄을 받는 자는 돌봄의 과정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앨리스 웡은 자신을 가리켜 ‘메디케이드 거지’라고 농담하면서 메이케이드를 받기 위한 서류작업과 절차도 엄연한 노동이고, 그러니 장애인이 ‘공짜’로 세금을 축낸다는 건 억지 주장이라고 역설한다. 일본의 장애학자 구마가야 신이치로는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돌봄 주체와 돌봄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사고다. 돌봄을 ‘난잡함’에 열어놓음으로써 돌봄은 가족의 주술에서 풀려나고, 돌봄노동의 시장화가 지양되고, 어린이, 노인, 환자, 장애인 같이 돌봄을 받는 자가 '결함'있는 인간으로 낙인찍히지 않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길 위에서 노력해 갈 때 돌봄의 미래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2025-03-04 | hrights | 조회: 460 | 추천: 12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1. 우연한 기회에 오십이 넘어 수영을 시작했다. 새로운 걸 배우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였지만 하다 보면 어영부영 따라가려니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생각과는 다르게 물속에서 버둥거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마치 물수제비뜨는 것처럼 탐방탐방 가볍게 날 듯이 물놀이를 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가니 조금씩 나아지면서, 몸이 물 위로 뜨기도 하고 발차기도 되고 25미터쯤 가던 걸 50미터도 가고 한 바퀴도 돌게 되었다. 여전히 유연하지 못한 몸이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때쯤이었다. 앞 사람이 수영강사의 지도로 발을 차며 나가는데 강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어휴,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물론 사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답답해서 얼떨결에 나온 소리였을 것이다. 내가 웃으면서 넌지시 한마디 건넸다. “그래서 강사님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서툴고 잘하지 못하니까….” 강사는 화들짝 놀라며 그런 뜻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무엇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지, 민원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과 아닌 사과를 하는 그이를 보면서 “그냥 그렇다고요. 우리가 잘하지 못하니까 강사님한테 배우고 있잖아요.” 했다. 그러면서 그이가 그 말의 진의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잘하는 사람은 누구한테 배우더라도 잘해요. 선생님이 필요한 사람은 그 하나를 배우려고 애쓰는 사람인걸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해내(아)는 비범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누가 가르쳐도 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비범하지가 않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하나를 제대로 하(알)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으니,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하나를 알게 되고 둘을 알아가면서, 이치를 깨닫고 문리가 트여 마침내 셋을 스스로 알아가(해내)는 평범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하는 친구를 보면서, “너 처음부터 지금처럼 했어? 그때를 생각해 봐, 네가 지금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하고 격려하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는 그저 그렇게 천천히, 느리더라도 어제와 다른 오늘을 그리면서, 오늘보다 정제된 내일을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 2.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던 비범한 사람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요즘. 자신들의 알맹이는 비루함과 천박함뿐이라는 것을 다투어 보여주는 이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보면서, 처단, 수거, 폭사라는 현실감 없는 말을 들으면서 지식이 아닌 어른의 지혜를 구해 본다. 감나무 묵은 가지 새 잎 나듯 우리나라 봄 햇볕 새로이 눈을 트면 여리고 여린 햇볕살 그 사잇길을 타고 봇짐장수 아주머니 등짐장수 아저씨들 바지런 바지런히 장삿길 떠나는 게 보인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아직도 인심 좋은 사람들 살기 좋은 마을이 남았는가 개울 건너 고개 넘어 경상도의 미역장수 전라도의 대그릇장수 강원도의 오징어장수 우리나라의 산과 들을 두루두루 누비며 떠도는 게 보인다 (나태주, ‘봄 햇볕 새로이 눈을 트면’ 전문) 마당 한쪽에 쓸어 놓은 눈이 햇살을 받아 조금씩 녹고 있다. 다사로운 햇볕을 품은 봄이 조심조심 우리한테로 오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찬바람을 밀어내고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강원도에서 봇짐을 꾸려 개울 건너 고개 넘어 새로운 희망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실어나를 것이다. 그 희망의 봄을 두 팔 벌려 맞이하련다. 우리나라 봄 햇볕 새로이 눈을 트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인 우리의 희망가가 이 땅을 두드려 깨울 거라는 믿음으로.
2025-02-25 | hrights | 조회: 155 | 추천: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