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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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장은주 /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이 이루어진 지 100일 지났음에도 헌법재판소의 인용 판결이 나오고 있지 않다. 온 국민의 시선이 헌법재판소에 쏠려 있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지 계속 선고가 지체되고 있다. 이러는 와중에 인내심의 한계를 호소하는 시민들이 늘었다. 그러면서 묻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정당한 민주적 선거 과정을 통해 구성된 국회의 3분의 2가 넘는 의원들이 의결한 대통령 탄핵을 선출되지도 않은 소수 헌법재판관들이 다시 심사하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헌법재판소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이 찬성하는 탄핵에 대한 최종 결정을 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일까? 8(9)명의 헌법재판관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새삼 현대 민주주의에서 헌법재판소의 본질적 역할과 의미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독일을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독일 헌법재판소의 역할과 의미 규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미국으로 망명했던 유대인 출신 독일 법학자 칼 뢰벤슈타인(K. Löwenstein)이 제안한 ‘전투적 민주주의’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극우 파시스트 같은 적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의 원리 적용을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 ‘방어적 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적 민주주의 개념은 이후 나치 패망 이후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나치 정당 같은 반민주적 세력에 대한 강력한 감시와 견제, 심지어 결사의 자유 같은 민주적 권리의 제한을 핵심으로 한다. 독일은 극단적인 반민주 정치 세력을 감시하는 ‘헌법수호청’과 함께 헌법재판소가 그 일을 맡게 했다. 헌법재판소는 ‘위헌정당’을 해산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고, 실제로 나치당의 후신 정당 등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는 바로 이런 독일의 사례를 본떠 새 민주 헌법을 만들면서 헌법재판소를 도입했다. 헌법재판소에 부여한 사명은 명확하다. 한 마디로 우리 헌법에 새겨진 국민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다양한 도전에 맞서 헌법을 수호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헌법재판소는 그동안 이런 사명에 걸맞게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서 꽤 긍정적 역할을 해 왔다. 가령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지했던 민법 조항이나 음란물 등에 대한 지나친 국가의 검열 행위를 위헌으로 판결했고, 정치 관계법 등의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조항들도 바꾸도록 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여성들의 낙태를 제한한 법률을 위헌이라고 판시함으로써, 여성들의 권리 신장에 역사적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헌법재판소가 국민들의 기본권 보호라는 존재 이유에 언제나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헌재는 그동안 ‘자유권’은 몰라도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차원의 삶의 안정성을 위한 ‘사회적 권리(사회권)’를 보장하는 데서는 일관되게 소극적이었다. 자유권과 관련해서도, 우리 시민들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해 온 국가보안법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내란을 기획한 위헌 정당이라며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린 판결의 경우에도 명확한 증거도 없이 정당의 ‘위헌성’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적용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를 이전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계획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던 일은 헌법재판소의 기득권 편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헌재는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조선 시대 이래의 ‘관습헌법’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는데, 아마도 세계 헌법재판사에 기록될 엽기적인 판결이 아닐까 싶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왕조 시대의 유사 헌법을 근거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수도 이전 계획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으니 말이다. 많은 시민들은 그 배경에 서울에 기반을 둔 당시 헌법재판관들의 직접적 이해관계, 특히 부동산 기득권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했는데,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민주적 의회의 결정을 소수의 사법 엘리트들이 다시 한번 최종적으로 인준하게 하는 이런 ‘사법 심사(judicial review)’ 제도는 근대 이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민주주의가 지닌 중우정치의 위험을 막고 ‘다수의 전횡’에 맞서 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의 기본권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자는 게 그 기본 취지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과 비판이 있지만, 이런 방식의 민주주의 헌정화가 시민들의 기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데서 가지는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법심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치의 우위를 내세우며 민주적 헌정 질서의 본원적 가치와 민주적 정치 과정의 의미를 무시할 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그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가 진행하는 사법심사 제도가 지닌  심각한 자가당착 중의 하나는, 민주적 다수결주의의 위험성을 근거로 도입된 이 사법심사도 결국 다수결로 최종적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이번 윤석열 탄핵 심판의 경우에는 헌법재판소의 구성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3명만 인용에 반대해도 기각될 수밖에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 헌법재판소는 헌정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그 본질적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결정적인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관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2025-03-26 | hrights | 조회: 52 | 추천: 7
윤동호 /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타인이 그것을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타인을 설득하고 납득시켜서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이 하도록 하는 야만적인 방법은 물리력이다. 이른바 조폭이 흔히 이 방법을 사용한다. 요즘은 흔히 가스라이팅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심리적 강제를 하기도 한다.   권한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타인을 강제하기도 한다. 지난 해 벌어졌던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가 그 예다. 군사력과 경찰력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과 정치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하려고 했다. 조폭과 다르지 않다. 돈(money)으로 타인을 강제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허용한 방법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돈으로 산다. 돈을 주면 심지어 범죄도 불사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사고가 팽배한 것 같아 무섭다. 민주사회에서 허용된, 타인을 강제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바로 법(法)이다. 법은 강제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이 하려고 하지 않을 때 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법치사회, 법치주의라는 말이 있다. 법은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법이 강제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법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약속이다. 더불어 함께 살면서 타인과 갈등이나 분쟁이 생기면 어떻게 처리할지 미리 약속한 것이다. 혼자 살면 법이 필요 없다. 분쟁이 생겨도 우리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하면 법은 필요 없다. 그래서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삶이 전쟁이라면 민주사회에서 법은 총이다. 법이라는 무기를 가진 사람과 그런 무기가 없는 사람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법을 잘 알면서도 타인을 설득하여 분쟁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더디게 진행되는 법적 절차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이다. 법적 절차에 연루된 우리를 변호사가 결코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절차를 벗어날 수 없다. 법이 최고이고, 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 곧 법률만능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길 여지가 크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아껴야 한다. 상처뿐인 영광을 맛보기 위해서 법을 이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법의 전제가 되는 사실이 무엇인지에 따라 적용되는 법이 달라질 수 있다. 폭행의 고의로 타인의 신체를 접촉한 것이면 폭행죄이지만, 추행의 고의로 타인의 신체를 접촉한 것이면 강제추행죄이다. 법의 전제가 되는 사실이 확정되었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해 적용되는 법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지에 따라 법적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유죄의 전제 사실이지만 무죄가 될 수도 있다. 법은 우리의 약속이지만 그 약속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피의자)은 수사기관이 법관의 영장을 받아서 체포나 구속을 할 수 있다. 수사기관이 체포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48시간이고, 수사기관이 구속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원칙적으로 10일이다. 그런데 체포나 구속된 피의자가 영장이 발부된 체포나 구속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법원에 체포적부심이나 구속적부심을 청구할 수 있고, 이 경우 법원이 체포·구속적부심사를 진행한 ‘기간’은 체포·구속의 최대 시간에 산입하지 않는다. 이 기간 중에는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예컨대 구속적부심이 3일에 걸쳐 진행되어 33시간이 걸렸다면 구속기간 10일 중 3일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아니면 33시간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체포적부심이 이틀에 걸쳐 진행되어 10시간 32분이 걸렸다면 이틀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아니면 10시간 32분이 산입되지 않아야 할까. 영장에 의해 체포된 피의자가 청구한 체포적부심이 기각된 후 구속영장이 청구되어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은 경우 법원이 구속영장실질심사를 진행한 기간도 구속기간 10일에 산입하지 않는다. 이 경우 그럼 법원이 체포적부심을 진행한 기간은 구속기간 10일에 산입해야 할까, 아니면 산입하지 않아야 할까. 그런데 구속기간은 체포한 때부터 기산을 한다. 따라서 체포적부심을 진행한 기간은 구속기간에 산입하지 않아야 한다. 이 기간 중에는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은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다.
2025-03-11 | hrights | 조회: 222 | 추천: 9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돌봄이 화두가 된 지 오래다. 한국 사회가 저출생 고령화 사회로 들어섰다는 지표가 분명해질수록 돌봄의 수요도 돌봄을 둘러싼 논쟁도 많아지고 있다. 노년의 부모를 돌보는 일은 많은 중년 세대가 당면한 과제이기도 하고, 아픈 부모를 어린 나이부터 돌봐야 하는 영케어러의 곤란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어쩐지 돌봄은 소홀히 여겨진다는 의혹을 거두기 어렵다. 의료 현장에서 의사가 하는 치료와 간호사의 처치는 전문적 의료 ‘케어’이고, 간병인의 돌봄노동은 ‘허드렛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은가? 장기요양보험제도 아래 요양보호사의 노동도, 가사도우미의 노동도, 청소노동자의 노동도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노동인데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단순노동으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은가? 돌봄은 누구나 필요로 하지만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건 아닌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문명이 시작됐다는 최초의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어느 학생의 질문에 “부러졌다 붙은 대퇴골”이라고 답했다. 미드는 문명화의 첫 증표로 1만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퇴부 뼈를 꼽았다. ‘털없는 원숭이’ 인간은 원시 상태에서 취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집단적 협력을 해야 동물성 먹거리를 사냥할 수 있는 인간에게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동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뼈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된 동료 인간을 내버리지 않았고, 부러진 뼈가 아물 때까지 보살핌을 제공했다. 그 증거가 남은 것이다. 마거릿 미드의 말처럼 돌봄은 인간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이며, 문명화의 척도라 할 수 있다. 돌봄이 ‘오래된 미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봄의 가치가 존중받고 나아가 오래된 미래로서 돌봄의 가치가 고양되기 위해서는 돌봄의 가족화와 시장화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가족이 돌보는 것이 최선이다’ 같은 판단을 당연시하지 않는 게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가족이 못하면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답은 해결책이 아니라 사회 불평등 구조를 은폐하고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족과 시장을 넘어서는 돌봄의 공공화가 필요하다. 나아가 돌봄의 공공화를 위해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실행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돌봄을 인간에 내재한 역량으로, 사회가 높여가야 할 역량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이라는 개념은 가족과 시장을 넘어 역량으로 돌봄의 지평을 확장하는 사유에 실마리를 준다. 이 개념은 1980년대 미국 에이즈 위기 때 미술비평가이자 에이즈 운동가 더글러스 크림프에서 유래했다. 더글러스 크림프는 에이즈로부터 안전한 섹스와 상호돌봄을 하자고 했다. 그는 우리의 난잡함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난잡한’은 ‘가벼운’ 또는 ‘진정성 없는’의 의미가 아니라 게이들이 서로 친밀함과 돌봄을 나누는 방법을 다양하게 실험하고 안전한 섹스를 나누면서 서로를 극진히 돌봄으로써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였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게이들을 의료진도 보건당국도 국가도 심지어 가족도 돌보지 않고 버렸을 때 게이 남성들은 스스로 건강 센터를 만들고 네트워크를 구축해 서로를 돌봤다. 에이즈 위기 때 이들 돌봄 제공자들이 보여준 용기는 미국 같은 동성애 혐오 국가에서조차 감탄과 존경을 불러일으켰고, 게이 남성에 대한 낙인을 누그러뜨리는 데 일조했다. 사진 1.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 『애도와 투쟁(Melancholia and Moralism)』 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99273496 ‘난잡함’을 더 넓게 해석해 보자면, 배타적 친밀함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사랑의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친밀하기 때문에 돌보는 것이 아니라, 돌보기 때문에 친밀성이 얻어진다. 이를 가족에 적용하자면 가족이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돌보기 때문에 가족이 되는 것이다. 가족이 누구에게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하는 따뜻한 안식처인 건 아니다. 어떤 가족은 남보다 못하기도 하고, 성적 지향이나 장애를 이유로 자식에 등을 돌리는 부모도 있다. 가족과 친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난잡한’ 돌봄을 실천해온 소수자 공동체에게는 그들 공동체의 과거가 켜켜이 쌓여 있고 그 역사는 돌봄의 오래된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된다. 정착식민주의에 저항해온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고통 속에 치유와 돌봄,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인들이 고된 농장일로 병들고 불구가 되었을 때 서로를 거두고 돌보던 전통, 장애인 활동가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던 상호돌봄이야말로 되살리고 기억해야 할 역사다. 북미 유색인 퀴어 장애정의 활동가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는 『가장 느린 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의 아카이브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킵니다. 언제든 아프고 장애가 있는 사람이 서로를 기억하고 운동사의 순간들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기념하고, 우리 스스로 존재함을 증언합니다. … 마지막으로 제가 알았던 죽은 이들이 유령처럼 곁을 맴돕니다.” 사진 2.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Leah Lakshmi Piepzna-Samarasinha, 1975- ) 출처: wikipedia 중국계 미국인 장애활동가 앨리스 웡은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에서 장애 조상들을 불러온다. 그녀에게는 홍콩에서 이주한 중국인 부모님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이리어에서 장애운동을 함께 해온 먼저 죽은 동료들이 조상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 앨리스 웡의 ‘불구’ 조상의 계보에는 스테이시 파크 밀번도 들어있다. 2020년에 사망한 스테이시 파크 밀번은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퀴어 장애인 활동가였다. 그의 생전 모습은 곧 25센트 동전에 새겨진다. ‘불구’ 계보와 같은 ‘난잡한’ 돌봄의 계보는 친족의 의미를 해체하는 동시에 재구축하고 돌봄의 의미를 넓힌다. 사진 3. 앨리스 웡 (Alice Wong, 1974- ) 출처: https://www.womenshistory.org/education-resources/biographies/alice-wong 1974년생인 앨리스 웡은 아직 살아 있다. 신경근육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웡은 호흡기를 사용하는 중증장애인이고 미국 장애인 복지제도 메디케이드 수급자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서전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은 장애 극복의 감동 서사 따위는 한 줄도 없고 유머와 재치,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장애인은 사이보그이자 신탁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부고 기사를 이렇게 상상해 쓴다. “서기 2070년 호랑이의 해에 앨리스 웡이 숨졌다. 향년 96세. 신탁 예언자이자 이야기꾼이고 사이보그이며 트러블메이커이고 활동가이고 올빼미형 인간이었다. … 장애가 진전되면서 앨리스는 2045년 달에 있는 무중력 캡슐로 이주했다. 이로써 앨리스는 과학자, 창조자, 탐험가로 구성된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두 번째 크립 우주인단의 일원이 되었다.” 적절한 돌봄이 주어지지 않으면 어린이, 노인, 환자, 장애인의 삶은 영위될 수 없다.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만이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인정받아온 역사가 길지만, 돌봄을 시야에 넣는다면 달라질 수 있다. 앨리스 웡은 장애인은 돌봄을 받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돌봄을 받는 자는 돌봄의 과정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앨리스 웡은 자신을 가리켜 ‘메디케이드 거지’라고 농담하면서 메이케이드를 받기 위한 서류작업과 절차도 엄연한 노동이고, 그러니 장애인이 ‘공짜’로 세금을 축낸다는 건 억지 주장이라고 역설한다. 일본의 장애학자 구마가야 신이치로는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돌봄 주체와 돌봄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사고다. 돌봄을 ‘난잡함’에 열어놓음으로써 돌봄은 가족의 주술에서 풀려나고, 돌봄노동의 시장화가 지양되고, 어린이, 노인, 환자, 장애인 같이 돌봄을 받는 자가 '결함'있는 인간으로 낙인찍히지 않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길 위에서 노력해 갈 때 돌봄의 미래는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2025-03-04 | hrights | 조회: 363 | 추천: 12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1. 우연한 기회에 오십이 넘어 수영을 시작했다. 새로운 걸 배우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였지만 하다 보면 어영부영 따라가려니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생각과는 다르게 물속에서 버둥거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마치 물수제비뜨는 것처럼 탐방탐방 가볍게 날 듯이 물놀이를 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가니 조금씩 나아지면서, 몸이 물 위로 뜨기도 하고 발차기도 되고 25미터쯤 가던 걸 50미터도 가고 한 바퀴도 돌게 되었다. 여전히 유연하지 못한 몸이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때쯤이었다. 앞 사람이 수영강사의 지도로 발을 차며 나가는데 강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어휴,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물론 사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답답해서 얼떨결에 나온 소리였을 것이다. 내가 웃으면서 넌지시 한마디 건넸다. “그래서 강사님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서툴고 잘하지 못하니까….” 강사는 화들짝 놀라며 그런 뜻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무엇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지, 민원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과 아닌 사과를 하는 그이를 보면서 “그냥 그렇다고요. 우리가 잘하지 못하니까 강사님한테 배우고 있잖아요.” 했다. 그러면서 그이가 그 말의 진의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잘하는 사람은 누구한테 배우더라도 잘해요. 선생님이 필요한 사람은 그 하나를 배우려고 애쓰는 사람인걸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해내(아)는 비범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누가 가르쳐도 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비범하지가 않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하나를 제대로 하(알)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으니,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하나를 알게 되고 둘을 알아가면서, 이치를 깨닫고 문리가 트여 마침내 셋을 스스로 알아가(해내)는 평범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하는 친구를 보면서, “너 처음부터 지금처럼 했어? 그때를 생각해 봐, 네가 지금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하고 격려하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는 그저 그렇게 천천히, 느리더라도 어제와 다른 오늘을 그리면서, 오늘보다 정제된 내일을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 2.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던 비범한 사람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요즘. 자신들의 알맹이는 비루함과 천박함뿐이라는 것을 다투어 보여주는 이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보면서, 처단, 수거, 폭사라는 현실감 없는 말을 들으면서 지식이 아닌 어른의 지혜를 구해 본다. 감나무 묵은 가지 새 잎 나듯 우리나라 봄 햇볕 새로이 눈을 트면 여리고 여린 햇볕살 그 사잇길을 타고 봇짐장수 아주머니 등짐장수 아저씨들 바지런 바지런히 장삿길 떠나는 게 보인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아직도 인심 좋은 사람들 살기 좋은 마을이 남았는가 개울 건너 고개 넘어 경상도의 미역장수 전라도의 대그릇장수 강원도의 오징어장수 우리나라의 산과 들을 두루두루 누비며 떠도는 게 보인다 (나태주, ‘봄 햇볕 새로이 눈을 트면’ 전문) 마당 한쪽에 쓸어 놓은 눈이 햇살을 받아 조금씩 녹고 있다. 다사로운 햇볕을 품은 봄이 조심조심 우리한테로 오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찬바람을 밀어내고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강원도에서 봇짐을 꾸려 개울 건너 고개 넘어 새로운 희망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실어나를 것이다. 그 희망의 봄을 두 팔 벌려 맞이하련다. 우리나라 봄 햇볕 새로이 눈을 트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인 우리의 희망가가 이 땅을 두드려 깨울 거라는 믿음으로.
2025-02-25 | hrights | 조회: 105 | 추천: 11
이윤 / 경찰관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다. 12월 3일 밤 계엄선포와 포고령을 보는 순간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선택한 결과가 곧 나오리라고 확신했다. 헌법과 법률이 정한 요건과 절차 어느 것에도 충족되지 않았고, 그 과정이 TV로 생중계되어 증거도 확실하다. 비슷한 과거 사례와 판례도 있다. 무려 헌법 위반에 더하여 내란죄 혐의까지 받고 있다. 이 정도면 결론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륵불이라고도 불렸던 어느 신통한 분이 ‘내가 구속되면 한 달 안에 하야하고 탄핵된다’라는 예언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지지부진하다. 경찰인 국가수사본부의 출석요구에는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 지휘권을 가진 검사로서 경찰을 오라가라 부렸던 분이 피의자가 되어 그 앞에 앉아 이름, 주민번호, 직업 등 진술하는 건 영 모양 빠지는 일이니까. 그런데 검찰이나 공수처에서 출석요구를 해도 가지 않고,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하러 갔는데도 응하지 않고, 압수수색영장 집행도 거부하였다. 충분히 주어진 방어권 행사 기회를 스스로 팽개치고, 체포·구속 사유만 늘렸다. 우여곡절 끝에 체포·구속된 후에도 자신이 원인 제공자임을 잊은 듯 영장과 체포, 구속이 위법 무효임을 주장하면서 방어권을 언급하는 궤변을 늘어놓고, 법원과 헌법재판소도 믿지 못하겠다며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예전에 범죄자들 간에는 죄를 지으면 ‘일도이부삼빽’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먼저 도주하여 잡힐 때까지 시간을 번다. 시간이 지나면 피해자의 분노도 좀 사그라지고, 기억도 희미해지고, 증거도 흩어지기 마련이다. 또 도주하는 동안 피해자들과 연락하여 어떻게든 좋은 조건에 합의를 볼 수도 있다. 그러다 검거되면 두 번째는 무조건 부인한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통하지 않으면 마지막은 빽을 쓴다. 수사나 재판이나 사람이 하는 일이니 구속을 불구속으로, 징역형 받을 것을 집행유예나 벌금으로, 유죄를 무죄로 해 줄 권력자를 동원하거나 힘 좋은 전관 변호사를 찾는다. 지금까지는 ‘일도이부삼빽’ 전략이 잘 들어맞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헌법과 형사소송법에는 피의자와 피고인의 인권을 보호하는 여러 장치가 있다. 이런 장치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다만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 없이 권리만 주장하니 치졸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 법조계 수준을 깎아내리는 허위와 궤변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귀를 씻고 싶어진다. 그런데 점점 지연작전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 탄핵 직후 국회나 검찰에서 증언과 진술을 했던 사람들 일부는 탄핵심판 재판부에서 진술을 거부했다. 진술증거 외의 서증이나 영상 및 녹화자료, 통화내역 등을 확보하기 위해 한남동 관저를 수색하려 한 경찰을 경호처가 계속 방해했다. 체포영장과 압수수색영장 집행을 방해한 경호처 간부들 대상으로 한 구속영장은 검사가 불청구하여 증거수집을 어렵게 했다. 관저나 대통령실에는 증거가 산더미처럼 있을 텐데... 그런 가운데 검찰은 국가수사본부 고위층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하여 수사에 집중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핵심 원인이자 제2의 국정농단이라고 부를만한 여당 의원 공천 개입 사건 수사 역시 계엄 이후 진행이 안 되고 있다. 역시 가재는 게 편인가?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다 보면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이 있다. 수집된 증거들에 조금이라도 절차적 흠결이 있거나 진술 간에 사소한 차이라도 있으면 증거로 인정받지 못하거나(증거능력) 증거 가치가 감소되어(증명력)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거나 약해지면 법원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뉴스를 보면서 간혹 그런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의심하지 말게 하소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몇 가지가 있었다. 만약 공수처가 없었더라면, 경찰과 검사 간 수사권조정이 없었더라면, 체포든 구속이든 압수든 이도 저도 못하고 지금보다 더 깊은 늪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지난 정부에서 공수처도 만들어지고, 경검 간 수사권조정도 있었다. 또 그날 국회로 모여든 시민들의 빠르고 필사적인 대처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소년이 온다’에 그려진 것처럼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지옥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20세기 역사적으로 중요한 국면마다 대한민국을 외면했던 운세가 21세기에는 좋은 방향으로 흐름을 바꾼 것 같다. 그러나 끝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일에는 예측과 통제가 불가한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한순간 눈 돌리고 방심하면 어떻게든 일이 꼬여서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갈 수 있다. 지금쯤 어딘가에서는 우두머리 피고인 주변에 있는 각종 법사와 스승과 보살과 목사 등 어벤져스 급 수퍼내추럴 괴력난신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 운빨의 방향을 바꾸려 힘쓰고 있을 것이다. 사필귀정을 믿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일이라,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다. 계속 지켜보고 분석하고 확인하고 예측하고 떠들고 움직여야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2025-02-19 | hrights | 조회: 142 | 추천: 12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과 더불어 모르는 이가 없을 유명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국무령, 국무총리 대리, 내무부장, 법무부장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적인 책임과 역할의 지위를 역임한 것은 물론, 교육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이뤄내고 민족의 미래를 개쳑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렬했지요. 그가 남긴 흥사단은 지금도 그 정신 아래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안창호 선생이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한데 이름이 크고, 그 이름이 덮는 세상이 지나치게 넓어 나타난 부작용일까요. 누군가 안창호 선생을 교묘하게 비틀어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한 공무원시험 강사 전모씨입니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이입니다. 그는 언론에 보도된 국민의힘 한 국회의원의 표현을 빌자면 “국민의힘 의원 108명을 다 모아도 그 한 사람보다 울림을 만들지 못하는 현실”이라는 엄청난 평가까지 받는 극우의 새로운 아이콘이기도 하지요. 줄기차게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극우 집회 세몰이에 동력을 불어넣어주고 있고, 서울 서부지법 폭동 사태에 대해서도 “청년들이 난입한 것은 공수처와 서부지법 판사들의 꼼수 때문이며 청년들을 풀어줘야 한다”고 폭동을 옹호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결정이 나오기도 전인데 “불의한 재판관들의 심판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이 헌재를 휩쓸 것이고 그 모든 책임은 불의한 재판관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공공연히 헌재 결정 불복을 부추깁니다. 그의 선동에 감명 받은 듯한 한 청년은 “사재(사제) 폭탄을 준비중”이라며 “전×× 선생님의 쓸어버리자는 말씀에 주저앉아 울었다. 20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 바치겠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곧바로 자수했습니다. 어쨌든 전씨의 극우 발언 이후 그의 유튜버 구독자는 두 배로 폭등해 120만을 훌쩍 넘겼다고 합니다. 물론 전씨는 자신은 극우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위헌 위법한 내란을 옹호하고 폭동을 선동하는 극우 세력의 논리와 한 치도 다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주의를 우파라 부른다면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성의 존재와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우파적 가치를 드러내는 이들을 극우라 부를 수 있습니다. 전씨야말로 전형적인 극우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자신이 ‘노사모 출신’이라는 말로 극우가 아니라고 주장하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게다가 전씨는 고 노무현 대통령을 욕보이는 것도 부족한지 안창호 선생을 자신의 극우 논리에 동원합니다. 지난달 무슨 강경 우익 호소문에서 ‘꿈에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본받아서 다시 독립운동 한다고 생각하고...’라고 적더니 얼마 전 부산집회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들어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고 연설했습니다. 극우의 도구로 전락한 안창호 선생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대갈할 일입니다. 다른 얘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1925년 3월 1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첫 대통령 이승만은 탄핵됩니다. 좀 길지만 인용해봅니다. ‘이승만은 외교를 구실로 하여 직무지를 마음대로 떠나 있은 지 5년에, 바다 멀리 한쪽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서, 난국수습과 대업의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황된 사실을 마음대로 지어내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이거니와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해하였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였으며 심지어 정부까지 부인한바 사실이라. 생각건대, 정무를 총람하는 국가 총책임자로서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하야 의정원의 선거를 받아 취임한 임시대통령이 자기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 하야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심지어 한성조직의 계통 운운함과 같음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라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의 진행을 기하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키 어려울뿐더러 순국 제현을 바라보지 못할 바이오 살아있는 충용의 소망이 아니라. 고로 주문과 같이 심판함.’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42호 심판서> 한글체 번역) (임시)헌법을 부정하고 국회(의정원) 존재를 무시하며, 국정을 문란하게 만든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꼬박 100년이 지난 최근 ‘윤석열 내란 사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법질서를 모두 부정하려 하는 지금 극우 행태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안창호 선생은 임시정부 당시 이승만 임시대통령과 정치적 입장이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여러 비위와 무능, 탐욕 등을 충분히 알면서도 독립의 과업을 위해 민족 내부의 분열은 막아야 한다며 지지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독립은 절체절명의 과제였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안창호 선생이 100년 뒤 이렇게 오독되고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일제에 나라 빼앗긴 청년들에게 독립의 가치와 절박함을 교육시키고, 이들에게 민족과 백성을 위한 충심을 불어넣고자 했던 마음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기에 늘 강조했던 무실, 역행, 충의, 용감 등 가치를 삶에 새겨 하루하루 생활의 치열함과 성실함 등으로 각자 자기자신을 계발하길 바랐던 것이었고요. 그것을 극우가 국가에 폭동을 휘두르고 민주공화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청년을 선동하는 도구로 쓰고 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물론 전씨는 이미 지난해 초 이승만 미화 영화 ‘건국전쟁’에 대한 감상평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수구적 역사 인식의 본질을 드러내긴 했지요. 공과에 대한 상식적 평가의 균형감 운운하며 노무현 관련 영화, 김대중 관련 영화 등을 봤다고 들먹이는 것은 이번에 보여준 방식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 탄핵,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 하야 대통령’이 저지른 임시정부 시기 부정과 탐욕은 물론, 해방 이후 한강대교 폭파, 보도연맹 학살 등 나열하기 버거울 정도로 많은 여러 악행에 눈을 감아버린 이가 자신의 편향되고 왜곡된 정치적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늘 또 다른 역사의 거인을 들먹이는 수밖에 없었겠지만요. 아무리 돈벌이를 위한 사교육이라 하더라도 무려 한국사를 가르치는 강사의 역사 인식이 정도라면 교단의 마이크를 놓는 것이 청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극우 집회 연단의 마이크야 극우들에게 늘 열려 있는 것이고 그의 지금까지 행보만으로도 충분히 인식되고 있으니 굳이 ‘극우 커밍아웃’ 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마이크이기도 하고요. 단, 더 이상 안창호 선생은 물론, 노무현 김대중 등을 비뚤어진 주장의 수단으로 삼으며 욕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2025-02-11 | hrights | 조회: 289 | 추천: 22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1.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다. 아니다. 나는 대통령이다. 나는 대통령이다. 아니다. 나는 왕이다. 나는 헌법을 지켜야 한다. 아니다. 나는 헌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왕이기 때문이다. 내가 왕 노릇을 하니 비서실 직원, 각료들, 당 간부들이 나를 왕으로 떠받든다. 겉으로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나는 왕임에 틀림이 없다. 어디 전 세계에 왕이 한두 명이야? 내가 왕이 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감히 왕비인 나의 아내를 붙잡아가려고 해! 그까짓 주식 조작 몇 푼 했다고 말이야. 뭐? 땅값 올리려고 고속도로 방향을 틀었다고? 그러면 안 돼? 학위 논문 표절?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야.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국회에서 제아무리 특검법을 만들고 떠들고 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어. 대통령의 거부권은 왕 노릇을 하는 데 얼마나 편리한가. 안하무인? 후안무치? 그게 왕인 거야. 대통령? 알고 보면 왕인 거야. 대통령을 뽑을 때 은근슬쩍 손바닥에 ‘王’ 자를 써서 내보였잖아. 그런데도 국민이 나를 대통령으로 뽑았잖아. 알고 보면, 국민이 나를 대통령으로 뽑은 게 아니야, 그건 형식인 거고. 실제로는 나를 왕으로 뽑은 거야. 국민이 왕인 나에게 복종하는 백성이 되겠다고 충성 맹세를 한 거잖아. 그래 놓고서 이제 와서 ‘민주공화국’, ‘국민 주권’ 운운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제아무리 국회에서 청문회 해서 장관 지명 철회하라고 부르짖어 본들 무슨 소용이야. 내가 지명했는데, 내 마음대로지. 안 그래? ‘자식들! 어리석긴.’ 당 대표도 내 마음대로 쫓아내기도 하고 올려세우기도 했잖아? 국회의원 후보 추천도 내 한마디면 척척 알아서 말을 듣잖았어? 공천? 그건 헛소리에 불과해. 그래. 내가 왕인 게 분명해. 법은 대통령을 만들지만, 왕은 법을 역용해서 법을 만드는 거야. 법이 왕을 만드는 게 아니야! 이제 세계 사람들 모두가 나를 위대한 한국의 대통령, 아니 왕이라고 치켜세우고, 나를 만나겠다고 서로 오라고 난리잖아? 미국도 일본도 내가 아니면 그들의 국가를 유지하지 못하겠다고 도와 달라고 아우성치잖아? 이제 나에게 남은 목표는 세계의 대통령이 되는 거야. 그래서 취임 때부터 “세계 시민 여러분! 내가 자유의 지키는 최고의 전사가 되겠습니다.” 하고 외쳤잖아. 밤낮없이, 내가 온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숱하게 자유를 외치고 다녔어. 다들 환호성을 질렀잖아. 곳곳에서 오라니 어찌 안 갈 수 있냐, 이 말이야. 어차피 한국에서 왕은 된 거고, 이제 세계를 호령하는 왕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면 우리 국민, 아니 내 백성이 나를 얼마나 칭송하겠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이거 내가 진짜 왕인 게 맞아? 뻑 하면 나보고 왕위를 내놓으라고 길거리에 떼거리로 모여 소리소리 지르고 지랄을 하잖아? 어이! 검찰총장! 저 새끼들 잡아들이지 않고 뭐해! 저 못된 인간들의 두목이 이재명이잖아, 이재명!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빨리 감옥에 처넣으라고. 그놈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아. 그러니 내가 술에 찌들 수밖에. 대통령 각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군주제가 아니잖아요! 뭐가 어째? 내가 왕이 아니라고? 거대 야당의 대표인 데다가 법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주말마다 모여 우리 검찰을 몰아붙이면서 법대로 하지 않고 대통령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욕을 해대니, 아무래도 때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언론을 때려잡아! 극우 유튜버들을 총동원해! 왜 그 전광훈인가, 목산가 하는 인물 있잖아? 도와달라고 해. 아! 그러고 천공 스승도 있고, 명태균 책사도 있고, 건진 법사도 있잖아. 잘 물어봐서 좋은 계시를 내려달라고 해 봐! 만약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엉뚱한 소리 하면 알지? 바로 집에 가서 손가락 빨고 놀아야만 할 거야, 알겠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거 내가 왕이 아닌 거 같아. 지지율이 20%대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거 아냐. 지지율에 신경 쓰는 건 왕으로서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신경이 쓰이는걸. 이러다가 정말 저 백성들이 제 신분을 모르고 대대적으로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거 아냐? 총선에서도 큰일날 뻔했잖아. 8석만 저놈들이 더 가져갔으면 어찌 될 뻔했어. 아니, 나를 왕으로 추대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배신할 수 있어? 아니, 그런데 꼭꼭 숨어 있어야 할 명태균 이 새끼, 나의 책사라는 녀석이 왜 나발을 불고 지랄이야, 지랄이! 재수가 없으려니 나 원 참. 이럴 때가 아닌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왕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무슨 조치건 취해야지, 안 되겠어. 우선 내가 왕인지 아닌지부터 시험을 해 봐야겠어. 비상대권, 비상계엄, 전격적인 통치 행위, 요놈을 활용해서 친위부대를 동원해 국회고 국민이고 민주고 공화국이고 나발이고 간에 싹 쓸어버려야겠어. 만약에 이게 안 통하면 내가 왕이 아니고 바보 멍청이 대통령에 불과한 거지. 전시 또는 사변 또는 그에 준하는 사태가 있어야 한다고? 주말마다 떼거리로 나와서 퇴진하라! 하야하라! 하면서 왕인 나에게 반기를 드는 일이야말로 사변이 아니고 뭐겠어. 게다가 이재명을 비롯한 야당 놈의 새끼들이 아예 나를 왕 아니 대통령으로조차 인정치 않고 내 수족들을 탄핵해서 일하지 못하게 하고 이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마저 팍팍 깎는 일을 서슴지 않으니, 그게 사변이 아니고 뭐겠어. 어디 맛 좀 봐라! 이 새끼들! 다들 빈틈없이 무장하고 모여! 국회고 선관위고 쳐들어가 끌어낼 놈 끌어내고, 잡을 놈 잡고, 죽일 놈 죽여! 2.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 흔히들 진실은 끝내 이긴다고 생각한다. 그건 진실의 힘이 거짓의 힘보다 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짓의 힘도 결단코 만만치 않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하듯이, 한편으로 힘이 곧 진리고 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힘을 기준으로 해서는 좀처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아주 간단하게 정의했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없는 것을 없다고 하면 진리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거짓이다.” 딱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는 문제가 있다. 어떤 것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를 정확하게 판별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이 방법을 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매사 예사로 있다가 없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닌가. 철학자 칸트는 욕망을 다소 어렵긴 하지만 참으로 멋지게 정의했다. “욕망은 자신의 표상에 의해 현실적으로 그 표상의 대상에 대해 원인이 되는 능력이다.” 쉽게 풀면, 욕망은 자신을 충족시킬 대상을 생산해 내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그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를 것 같으면, 그것을 있다고 할 수 있고 참이 된다. 내 욕망에 따라 내 생각 속에서 내 욕망이 원하는 것을 만들면,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욕망에 따른 실재의 생산물과 병적인 생산물을 구분한다. 현실 속에서 현실을 통해 욕망을 발휘할 때, 그 욕망은 의지를 발동해서 실재의 생산물을 만든다. 예를 들어, 윤석열이 나름 노력해서 대한민국의 정치적인 현실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의지를 발동해 노력해서 대통령이 된 건, 즉 대통령인 윤석열은 실재의 생산물이다. 그런데 욕망이 현실을 벗어나 욕망 자체에서 뭔가를 생산하면, 그 생산물은 병적인 생산물이다. 예를 들어, 윤석열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전혀 불가능한 왕이 되겠다는 욕망을 갖고서 그 욕망 자체에 의해 욕망 자체에서 의지를 발동해 욕망의 대상 즉 왕인 윤석열을 만들면 그건 병적인 생산물이다. 병적인 생산물은 실재의 생산물보다 욕망을 휘두르는 힘이 더 세다. 욕망은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또 욕망을 낳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의지마저 욕망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욕망이 실천이성에 따라 보편적 입법의 순수 형식인 도덕 법칙을 통해 규정될 때, 그때 욕망의 상위 형식인 의지가 된다. 이때는 의지가 욕망을 다스려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만약 그 반대로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욕망 자체에서 산출한 병적인 생산물을 통해 욕망을 충족하게 되면 의지가 욕망의 노예가 된다. 욕망의 진정한 생산물 즉 실재의 생산물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이 가치로 인정할 수 있는 현실에서 교환을 통해 성립하는 것이다. 병적인 생산물은 달리 말하면 가상이다. 아예 가상의 세계에서 놀면 거짓이 없다. 거짓은 실재의 생산물인 현실과 병적인 생산물인 가상을 혼동할 때 성립한다. 윤석열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의 대통령과 가상의 왕을 철저하게 혼동한다는 데 있다. 가상의 왕을 실현하고 확인하기 위해 현실의 대통령을 이용한다. 그래서 현실의 대통령은 가상의 왕이 되고, 가상의 왕은 현실의 대통령이 되고, 급기야 현실의 왕이 된다. 여기에서 정신 분열이 일어난다. 정신 분열을 견디다 못해 자신이 과연 현실의 왕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가상의 왕이 현실의 대통령에서 비상계엄이라는 적절한 수단을 찾았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자 마음먹은 건 현실의 대통령도 아니고 가상의 왕도 아니고,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라는 헌법 77조 1항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자신이 막다른 벽에 몰린 상황, 즉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반국가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확신하고, 그 주범이 거대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헌법 77조 3항에 따라 비상계엄을 선포하더라도 국회의 정치 활동을 금지할 수 없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포고령 1호에서 국회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다고 포고한 것이다. 윤석열은 ‘내란 우두머리’ 피고인으로서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권리의 기반이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재판할 수 없는 왕에서 비롯한다고 적어도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으로서 자신만의 그 권리를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외치면서 현실과 가상을 뒤섞어 난동을 부리는 자들을 선동한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는 극렬 분자들이 자신의 구속을 결정한 지방법원을 폭력적으로 침탈하여 엄청난 폭동을 일으킨다. 이에 구속된 대통령인 윤석열은 자신은 구속될 수 없는, 그래서 구속되지 않은 왕임을 확신한다. 현실과 가상을 혼동하여 병적인 거짓을 줄기차게 생산해 내는 저 무모한 확신, 그 확신이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그칠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 전체의 안위와 복리를 책임지는 대통령이 이른바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인 병적인 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건 최대 최고의 비극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현실과 가상을 혼동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가상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현실에 기반을 둔 가상은 오히려 창조의 힘이 된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가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자는 현실을 전혀 도외시하지 않는다. 문제는 가상으로써 현실을 규정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병적인 욕망이다. 현실을 아예 도외시하는 종교는 가상 세계 자체를 향한 병적인 욕망이다. 종교적인 가상으로써 현실을 규정하고 지배하고자 할 때, 종교는 병적인 상태가 된다. 기독교를 배경 수단으로 한 전광훈 세력의 준동이 그러하다. 전광훈은 하느님도 자기에게 꼼짝하지 못한다고 외친다. 그냥 대중 선동에 불과한 과장된 거짓부렁이 아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가상에 사로잡혀서 하는 말이다. 전광훈은 ‘가상적인 현실의 하느님인 목사’다. 따라서 현실 전체를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가상적인 현실의 하느님인 목사’로서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인 윤석열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실제로 그리함으로써 가상-현실의 하느님-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가 실재임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가상의 적이 현실의 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창을 꼬나쥐고서 풍차를 무찔러야 하는 거인이라 여겨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들에게 풍차는 불행하게도 멀쩡한 민주 평화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 세력이고, 거인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종북주사파 공산주의 빨갱이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가상적인 현실의 욕망에 어긋나는 경우, 자신들의 이 욕망을 상징하는 ‘가상적인 현실의 왕인 대통령’을 파괴하고자 하기에 경찰도 검찰도 공수처도 법원도 심지어 헌재조차 쳐서 무찔러야 하는 종북주사파 공산주의 빨갱이다. 이들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근본을 위기에 빠뜨린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 대행은 특검을 거부함으로써 이 위기의 온존과 심화를 거들고 있다. 3.반공 이데올로기의 극복이 문제다. 문제는 이 ‘종북주사파 공산주의 빨갱이’라는 가상이 이른바 미군정에서부터 여러 독재 정권들을 거쳐 현재까지 지탱되는 기나긴 역사에 기반해 계속 공급되는, 녹슨 상태로 퍼렇게 살아 움직이는 국가보안법을 기반으로 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현실적인 자양분에 의해 지속해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2025년부터 전개될 한국 정치는 또 한 번의 현직 대통령 탄핵과 파면에 따라 급격하게 변화의 흐름을 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과 가상이 완전히 뒤엉킨 거짓, 그 거짓으로 완전무장 한 무도한 극우적인 무리의 정치적인 세력화가 결단코 만만치 않다. 말 그대로 걱정이 태산이다. 앞으로 전개된 한국 정치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자양분으로 하는, 이 현실과 가상의 얽힘과 혼동을 어떤 방책으로 어떤 사회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여 정확하게 잘라내어 국민이 거짓의 힘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에 따라 실질의 민주공화국으로서의 그 성공과 실패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현명한 정치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된다.
2025-02-04 | hrights | 조회: 111 | 추천: 8
이동우/변호사 2024년 12월 3일 전 국민의 일상을 위협하는 윤석열의 불법적인 계엄선포와 내란 범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국민의 일상은 회복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계엄과 내란 범죄의 물리적 위협은 다소 낮아졌지만, 내란의 수괴는 여전히 대통령이란 지위를 유지한 채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당당히 탄핵 심판 절차에 임하겠다는 거짓된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어떻게 해서든 절차를 지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수사기관의 출석요구는 물론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의 집행도 불법적으로 막아서면서 매일같이 주권자인 국민을 분노케 하다 1월 15일에야 겨우 체포가 되었다. 여당이라 불리는 정당의 행태는 또 어떠한가? 실패한 내란 범죄를 옹호하며 주권자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데 여념이 없다. 분명히 실패한 내란 범죄인데 왜 우리는 아직도 불안하고 분노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주권자의 의사가 제대로 구현될 법과 제도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대, 어느 나라의 법과 제도도 완벽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한 부분에 대한 비판이 아닌 보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랜 독재 시대를 경험한 우리는 계엄이라는 비상적 국가보호제도가 독재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에 계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 제도가 헌신적인 시민과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던 국회의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이번 내란 범죄를 실패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헌법 수호라는 의무를 저버린 채 주권자인 국민을 향해 총칼을 들고자 했을 때 이를 막고, 헌법과 민주주의의 적인 된 그를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도록 탄핵 심판 절차를 만들고 이를 헌법재판소가 담당하게 했다. 헌법재판소를 중심으로 하는 탄핵 심판제도는 그 자체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제도나 그 시대와 상황에 맞게 규정되고 적용되어야 하므로 결국 제도의 효용성이나 장단점은 그 제도가 의도한 결과를 이루었느냐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탄핵 심판제도는 잘못된 제도는 아니지만 아쉬운 제도라고 할 수 있다. 12월 3일의 갑작스러운 충격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내란 범죄의 수괴를 대통령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죄에 따른 합당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1월도 절반이 넘었지만, 윤석열은 여전히 대통령의 지위에 있다. 그를 옹호하는 정당은 적반하장격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과연 이런 현실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일까? 주권자의 의사에 부합하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가 필요할까? 이미 많은 분이 아시는 것처럼 답은 나와 있다. 주권자의 의사를 직접 실현할 수 있는 수단. 국민이 나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해서 그 총합으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수단. 바로 국민투표다. ‘국민소환제’란, 국민이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표자들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반하는 활동을 하는 경우 국민투표를 통해 그들을 파면하는 제도다. 국민소환제는 전혀 새로운 대안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됐으나 매번 정치권의 이해관계라는 벽에 막혀 제도화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내란 범죄를 통해 그 수괴를, 그리고 그를 옹호하는 국회의원들을 그 직에서 파면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수단인 국민소환제가 다시금 국민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제도에 대한 찬반 논의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는데 오늘은 이 제도가 왜 필요한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첫째,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22년 보건사회연구원은 8,086명의 국민을 대상으로 ‘나의 이익과 의견이 정당과 이익단체 등을 통해 잘 대변되고 있는지’ 질문했다. 응답자들이 매긴 점수는 4점 만점에 평균 2.38점으로 매우 낮은 수준에 그쳤다. 우리나라 국민은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처럼 대표자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국민이 대표자에게 부여했던 직책과 권한을 투표를 통해 직접 회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국민주권의 실현이자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해 더 나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방법이다. 둘째, 국민과 대표자 간의 형평성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선출 권력은 임기를 보장받고, 자유 위임 원칙에 따른 의정 활동을 위해 면책특권까지도 부여받는다. 반면 국민에게는 자신들이 직접 뽑은 대표자의 책임을 묻고 위임을 철회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대표자에게 직무상 책임을 직접 물을 권리가 없다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 선출 권력이 보장된 임기 동안 주권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은 국민주권주의를 선언한 헌법 제1조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끝으로, 사법적 통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선출 권력의 위법성 여부를 가리는 사법부의 판단이 항상 국민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법 절차가 선출 권력을 향한 실효적인 통제 도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불법을 저지른 정치인에 대한 무죄판결이나 솜방망이 처벌에 국민적 분노와 지탄이 쏟아진 경우를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대통령의 탄핵 심판도 마찬가지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해도 그 심판을 단 9명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담당한다는 점에서 이는 민심의 즉각적인 반영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이 실제로 주권자의 지위를 가지고 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표자가 국민의 뜻을 배신할 때 국민이 직접 파면시킬 수 있는 국민소환제의 도입이 절실하다. 정치권도 각자의 이해관계를 떠나 제도 도입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지난해 12월 3일부터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지켜냈고, 또 회복하기 위해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디찬 도로에서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있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2025-01-21 | hrights | 조회: 114 | 추천: 6
장은주 /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윤석열의 12.3 내란 사태는 지금 와서 생각하고 따져 봐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많다. 제일 황당한 일 중의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그야말로 정반대인 ‘군사 통치 체제’를 만들려 하면서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었다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유신 논리다. 79학번 윤석열은 법대에서 헌법을 공부하면서 그 유신 논리를 깊숙이 내면화하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비상계엄은 고도의 통치행위’라는 투의 주장도 딱 유신 헌법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박정희 유신 파시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윤석열은 물론 우리나라 보수 우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신줏단지처럼 모신다면서 근거로 들고 있는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표현은 유신 헌법에 처음 도입된 것이다. 김기춘 같은 유신 헌법 정초자들은 당시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위해 일으킨 친위 쿠데타가 바로 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독일이 나치 체제의 재출현을 막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적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이른바 ‘전투적 민주주의’ 또는 ‘방어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사용했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표현을 독재 체제를 수립하면서 도용한 데서 비롯한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윤석열이 전형적인 이 전투적(방어적) 민주주의 논리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치며 계엄령을 선포했으니, 이보다 더 지독한 정치 블랙코미디가 또 있을까 싶다. 바로 자신과 지지 세력이야말로 전투적으로 억제되어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적인데 거꾸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으니 말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번 내란 사태 때문에 아예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쓰레기통에 처박히지 않을까 하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엉뚱한 방식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보수 우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 단어를 백안시해 왔더랬다. 그래서 늘 교과서에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마다 ‘자유’를 넣느니 마느니 하는 게 사회적 쟁점이 되곤 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본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보장하며 법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인민주권, 다당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모든 국민의 기본권, 삼권 분립 등이 그 정치체제의 근간이다. 윤석열 이 유신체제 같은 걸 자유민주주의라고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서, 이런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마구잡이로 버릴 일은 아니다. 진보가 추구하는 건 자유민주주의의 하위 범주인 사회적(복지국가적),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이지 자유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더 큰 걱정거리는 이번 내란 사태는 사실, 윤석열이 인식하고 있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위기가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본 고장이라고 할 만한 미국과 유럽에서도 자유민주주의가 커다란 위기에 빠져 있는데, 우리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이런 위기는 무엇보다도 오랜 신자유주의의 영향 속에서 하층 계급의 경제적 안정이 위협받는 가운데 세계화에 따른 이주민의 증가가 그 원인이라고 선동하는 우익 포퓰리즘의 득세 속에 심화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심지어 부정선거 음모론을 펼치고 무장 폭도들이 의회를 공격하도록 해서 사실상 내란을 일으켰던 트럼프가 민주적 투표를 통해 권좌에 복귀하기까지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윤석열이 등장해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게 된 배경에는 문재인 정부 시절 경제적 곤궁과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민주당한테서 등을 돌린 숱한 자영업자와 청년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라는 다른 심각한 문제도 있다. 물론 이번 내란 사태를 일으킨 결정적 원인은 윤석열의 파시스트적 성향과 편향적 유튜브 방송을 비판적으로 걸러낼 수 없었던 지적-인격적 결함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의 그런 성향과 인격적 결함은 결국 정치적 상대를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여기며 극한적인 증오를 증폭시켜 온 유튜버들 때문에 더 강하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유튜버들은 다시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한국 정치라는 배경 위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났다고 해야 한다.  이런 적대주의적 정치 문화는 ‘승자독식’의 원리에 기초한 제왕적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 국회의원 선거제도라는 바탕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 두 가지는 제6공화국 민주주의 체제의 핵심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제도는 모든 정치 과정을 대통령 권력의 획득이라는 목표에 종속시켰고, 그 목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두 개의 큰 정당이 생사를 건 쟁투를 하게끔 유도했다. 그 극한 대결은 결국 상대를 ‘일거에 척결해야’ 마땅한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는 데까지 나아갔고, 윤석열은 자신의 대통령 권력을 이용해서 그런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려 했던 것이다.  윤석열 탄핵이 인용되고 내란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우리는 이제, 단순히 다른 대통령을 뽑는 걸 넘어, 그런 적대주의 정치를 어떻게 완화하고 종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윤석열과 내란 세력을 지지하고 있는 30% 가까운 국민들과 완전히 따로 사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해법은 모든 정치 세력이 서로 갈등하면서도 공동선에 대한 지향 속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게 하는 공존의 토대, 곧 ‘공화국’을 제대로 공화국답게 만들어야 한다. 승자독식에 기초한 제왕적 대통령제와 단순다수결 소선거구제를 그대로 두고는 이런 공화국다운 공화국을 만들 수 없다. 당장이야 윤석열 탄핵을 마무리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겠지만, 공화의 원리를 제대로 구현할 새로운 제7공화국 건설이라는 과제를 마냥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25-01-14 | hrights | 조회: 120 | 추천: 6
강대중 /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국회가 첫 번째 윤석열 탄핵 투표를 하던 2024년 12월 7일 토요일 늦은 오후 나는 대학생 큰 딸과 함께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있었다. 국회 인근 지하철역은 무정차 운행한다는 뉴스를 듣고 버스를 탔다가 마포대교 중간에서 내려 순복음교회 쪽으로 걸어 국민은행 인근에서 집회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탄핵 투표에 동참하지 않고 퇴장한 국회의원 이름을 한명한명 부르는 동안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 사람들 손에, 특히 딸 또래의 젊은 여성들 손에 들린 아담한 막대기가 일제히 찬란한 빛을 발하는 장엄한 광경을 난생처음 보았다. 막대기들은 크기는 비슷했지만, 모양과 색깔은 저마다 달랐다. 도대체 저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저걸 다 구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걸 파는 좌판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 막대기가 뭔지 몰랐다. 진짜 몰랐다. 그걸 ‘응원봉’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어쩌다 뉴스에서 스치듯 본 아이돌 콘서트장 객석을 밤하늘 별처럼 꽉 채우던 그게 핸드폰 카메라 플래시가 아니라 응원봉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언젠가 신승훈 콘서트에 다녀온 아내가 투명 아크릴에 신승훈 이름이 영어로 새겨진 아담한 막대기를 들고 온 게 생각났다. 아내 책상 위에 진열된 그 물건을 한 번 만져보고 전원 버튼을 눌러본 적이 있었다. 이름 위로 맑은 빛이 올라왔다. 그때는 ‘콘서트 기념품으로 이런 걸 다 주네’라고만 생각했었다. 사실 그날 여의도에 가기 전 박근혜 퇴진과 탄핵 집회 때 쓰던 ‘전구 촛불’을 찾겠다고 집 안 구석구석을 좀 뒤지다가 포기했었다. 2016년 겨울 우리 가족은 건전지를 넣는 촛불을 하나씩 들고 주말마다 광화문을 다녔었다. 이듬해 대선을 치르고 그때를 기념할 물건으로 촛불이 제일 좋겠다 싶어 잘 보관했던 기억은 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의도에서 K-POP 노래에 맞춰 흐르는 응원봉 물결을 본 뒤에 그 촛불을 찾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외 언론에선 한국의 탄핵 집회가 K-POP 콘서트장이 됐다는 기사가 넘쳐났다. 찬란한 응원봉 사이에서 엄숙한 촛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질적이었다. 여의도 집회를 다녀온 다음 날 온라인 쇼핑몰에서 응원봉을 열심히 검색했다.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원하는 문구도 넣을 수 있는 응원봉을 발견하고 두 개를 우선 주문했다. 그런데 막상 물건을 받고 보니 여의도에서 보았던 응원봉과 품질 차이가 너무 컸다. 무엇보다도 번쩍번쩍 발산하는 광채가 모자랐다. 뭔가 내가 모르는 응원봉의 세계가 있겠다 싶어 중3 둘째 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찾아봐 달라 부탁도 했다. 그건 50대 남자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응원봉은 아이돌 기획사에서 정품을, 즉 공식 응원 도구를 판매한다. 아이돌마다 응원봉 명칭이 다르다. 블랙핑크 응원봉은 뿅봉이다. 뿅망치를 똑 닮았다. BTS 응원봉은 폭탄을 형상화했기 때문에 아미밤이다. 아미가 폭탄을 휘두른다. 트와이스 응원봉은 캔디봉이다. 어릴 때 먹던 달콤한 캔디의 모양과 색감이 있다. NCT 응원봉은 야광색의 머리 부분이 정육면체라서 응원봉이 아니라 믐뭔봄이다. 어감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얼음을 깨는 것만 같다. 세븐틴의 캐럿봉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장식이 들어있다. 최신 세대 캐럿봉은 다이아몬드를 다른 모양으로 교체할 수도 있다. 뉴진스의 빙키봉은 두 갈래 모양이 신선하고 귀엽다. TXT의 모아봉은 흔들 때마다 색상이 변경되는 컬러 쉐이킹 모드가 있다. 그밖에 아이브의 아이해봉, 르세라핌의 핌봉, 스트레이키즈의 나침봉 등등 응원봉마다 모양과 색깔에 개성이 넘쳤다. 대개 응원봉은 블루투스로 스마트폰 앱과 연결해 LED 색상을 자유자제로 변경할 수 있다. 콘서트장에선 모든 응원봉을 중앙제어할 수도 있다. 응원봉은 한마디로 신박한 물건이었다. 아쉽게도 대부분 응원봉은 공식 판매 사이트에서는 품절 상태였다. 몇몇 응원봉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정가보다 훨씬 비싸게 팔고 있었다. 이번 집회 참가자의 인구학적 특징이 사오십대 남성과 이삼십대 여성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사오십대 남성의 감성이 촛불에 멈춰 있었다면, 이삼십대 여성은 응원봉을 들고 나와 집회 풍경을 확 바꿨다. 응원봉의 기세가 집회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미국 Pew Research Center의 구분에 따르면, 이삼십대 여성은 밀레니얼 세대(1981년부터 1996년까지 출생자)와 Z세대(1997년부터 2012년까지 출생자)에 속한다. 이들은 베이비붐 세대(1946년부터 1964년까지 출생자) 일부와 X세대(1965년부터 1980년까지 출생자)의 자녀 세대이다. 한국에서는 MZ세대라고 묶어 부르며 부모 세대인 86세대나 X세대와 경험과 생각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걸 강조하기도 한다. MZ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이자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에 성장한 첫 세대이다. 이들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부모 세대가 1990년대 말 IMF 사태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며 자라기도 했다. 이 세대의 표현하는 다른 말인 욜로족, 카푸어 등에서 볼 수 있듯 미래보다는 현재의 행복에 더 집중하는 특징도 있다. 물론 이런 몇 가지 피상적인 말로 응원봉을 든 이삽십대 여성을 다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들이 변화의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주도하면 더 많은 변화가, 더 큰 변화가, 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이들이 앞세대를 압도하는 시대가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열리길 기대한다. 그래서 “미래세대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나 지어내는 엉뚱한 무리와 세대 따위는 뿅봉, 모아봉, 빙키봉, 믐뭔봄, 아미밤으로 “일거에 척결하고”, 아이해봉, 나침봉, 핌봉, 캐럿봉, 캔디봉으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를 만들면 좋겠다.
2025-01-08 | hrights | 조회: 300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