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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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도재형/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산재 사망사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정부는 산재 근절의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헌법상 책무라는 점에서 일하는 시민의 목숨을 앗아가는 산재 사망사고에 관한 정부의 이런 태도는 마땅하다. 근로자는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산업 안전은 노동 인권과 괜찮은 일자리 확보의 관점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일부 기업은 산업 안전을 이윤과 효율성에 부수되는 요소로 취급하고, 쉽게 포기하거나 축소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지난 SPC 사업장 방문에서 대통령의 일련의 질문들이 가리키는 지향점도 이것인 듯하다. 이러한 어두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부족하나마 우리나라 산업 안전의 질이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2024년 임금근로자 1만 명당 사고 사망자 수를 뜻하는 ‘사고 사망 만인율’은 0.39‱로, 1999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0.3명대로 진입하였다. 이 성과는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2017년 이후 근로감독관의 증원 및 감독 행정 개선, 2021년 산업안전보건본부 신설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등 정부의 지속적인 정책 수행의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경험한 건 산재 사망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신기한 묘책이란 없다는 것이다. 단기간의 성과에 일희일비하기보단 오로지 정부의 꾸준한 정책 추진과 근로감독 강화, 산재 예방 캠페인의 집중과 지속 등을 통해 산업 안전에 대한 기업과 사회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경험에 기반해서 산재 사망사고 감축 정책 추진 과정에서 살필 몇 가지 사항을 논의하고자 한다.   사진 출처   먼저, 산업 안전은 사업주의 책임이란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1970년대 경제발전 시기 이후 오랫동안 우리나라는 산업 안전에 대해선 저규제 정책을 유지하였다. 산업 안전 규제는 최소한에 머물고 사업주의 재량을 넓게 인정했으며 산업 안전 시스템의 외주화를 늘리고, 제재는 관대했다. 산재 예방에 관한 기술적 접근에 집중하며 집행이 쉬운 백화점식 지원이 예방 정책의 중심이 되곤 했다. 이에 따라 산업 안전은 기업의 경영 상황에 맞춰 조절할 수 있고, 안전 시스템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만들거나 외주화하면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산업 현장에 퍼져 있었다. 사업주가 안전을 책임져야 할 범위 역시 근로계약 관계로 한정되다 보니, 이를 벗어난 노동자들의 안전은 방치되었다. 예컨대 최근의 질식 사고와 같이 통계상으론 중소기업 근로자의 사망사고로 집계되는 것 중 일부는 원청의 사업에서 일어남에도, 원청은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을 타개하고 경영주 책임을 부과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중대재해처벌법이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사업주에게 포괄적인 위험 예방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소홀히 한 기업에 대한 제재를 강화함과 아울러 산업안전보건 법제의 보호 범위를 노무제공자 일반으로 확대하는 입법․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산업 안전은 국가의 헌법상 책무란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산재 사망사고의 예방을 위해선 정부의 각종 사업, 제도 개선 노력에 앞서 노사의 안전의식이 정착되어야 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사업장에선 ‘안전 규정을 지키면 불편하고 손해다’라는 인식이 남아있다. 노사 교섭 과정에서도 임금․고용 문제가 주된 이슈이고 산업 안전 사항이 다뤄지는 빈도는 드물다. 산업 안전과 관련해선 정부가 노사의 요구에만 의존해선 안 되고, 노동 인권과 괜찮은 일자리의 보장이라는 시각에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청년들의 일자리 미스매치 문제 역시 임금뿐만 아니라 중소업체의 작업환경과 연결되어 있다. 지방 공단에 가보면 위험한 작업환경에선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그보다 안전한 곳에선 내국인 청년들이 일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청년들이 서비스업에만 종사하려 한다고 지적하기 전에, 그들이 왜 그곳에서 일하려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청년 일자리 문제에서 산업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산업 안전의 정책 주체를 안정화하고 정책의 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2021년 고용노동부에 산업안전보건본부가 신설된 것 역시 이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이전까지 산업 안전 정책은 국(局) 단위에서 맡았으며 고용노동 정책 내 비중이 작고 고위직급 관료도 부족했다. 이렇게 고용노동부 조직 내에서 산업 안전 정책 주체의 입지가 열악하다 보니 정책 의제의 지속적 추진이 어려웠다. 단기적 정책이 남발되고 분산된 정책들이 추진되며, 핵심적 목표 달성에 집중하기보다 백화점식의 사업을 얼마나 많이 진행했는지가 정책 추진의 중심이 되곤 했다. 산업안전보건본부의 설치는 이러한 과거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 본부의 설치 후에도 정책 수행에서 비슷한 문제점이 보인다면, 산업 안전 정책의 추진 주체를 강화할 추가적인 조직 개편을 검토해야 한다. 넷째, 근로감독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 안전 정책에서 흔히 간과되는 것이 근로감독관의 역량과 전문성이다. 근로감독관은 단순한 국가공무원이 아니라 노동법과 산업 안전 법제의 전문적 지식과 더불어 조사․수사 역량을 갖춰야 하는 전문직이다. 이 점에서 ILO 역시 근로감독관의 채용과 직무 수행에서 전문성을 확보하고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용노동 정책에서 근로감독관의 채용과 직무 교육, 경력 관리는 낮은 순위에 머물러 있다. 단지 국가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감독관으로 배치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그들이 근로감독 행정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실천지(實踐知)가 제대로 평가받으며 유능한 감독관이 보상받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산업 안전 캠페인도 중요하다. 우리가 음주 운전을 줄여간 과정을 되돌아보면 이것이 단속과 제재만큼 중요하단 걸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정책 주체는 오랫동안 과도할 정도의 단속을 진행하면서 제재를 강화함과 아울러 ‘음주 음전은 살인과 같다’란 인식을 사회 일반에 심기 위한 캠페인을 계속 추진했다. 지속적인 캠페인은 시민들의 음주 운전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고, 그것은 다시 단속 및 처벌에 대한 수용을 유도할 수 있었다. 산업 안전도 마찬가지다. 산업 안전과 관련해선 정말 많은 이슈가 있지만, 특히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핵심 목표를 정해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단속과 처벌을 병행해야 한다. 일하는 시민 1명의 목숨을 구하는 건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 노동자의 안전은 경제적 이익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 이 마음으로 끈기를 갖고 경험과 증거에 기반해 산재 사망사고 감축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2025-08-06 | hrights | 조회: 39 | 추천: 5
윤동호/ 국민대 법과대학 교수   형사절차는 어떤 행위가 유죄인가, 무죄인가, 곧 범죄혐의의 유·무를 판단하는 절차이다. 이는 흔히 수사, 기소, 재판 3단계로 진행된다. 그런데 각 단계의 권한을 누가, 어떻게, 어느 정도로 행사할 것인지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특히 검사(檢事)의 탄생 배경과 권한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다만 수사와 재판을 연결하는 기능은 기본이다. 검사는 수사로 밝혀진 범죄혐의자의 처벌을 법원에 요구하는 역할을 한다. 공소제기는 각국 검사의 공통 업무이다. 우선 영국의 검사는 경찰에서 분리된 것이다. 경찰이 수사는 물론 기소 업무도 담당했는데, 강경한 범죄통제정책의 기조 아래 수사의 과도한 영향을 받아서 무리한 기소 등 기소권의 남용이 문제되자, 국가기소청을 신설하여 경찰이 수행하던 기소기능을 분리한다. 반면 독일의 검사는 법원에서 분리된 것이다. 프랑스와 달리 혁명의 산물이 아니고 자유주의적 법치국가 사고를 수용한 것도 아니다. 기소와 재판이 분리되지 않은 규문주의에서 법원의 지나친 업무부담으로 인한 사건 처리의 비효율성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또 검사를 재판에 관여하게 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쳐서 정부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반영할 의도가 있었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공익의 대표자로서 공소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검사가 탄생할 때부터 과제였다. 독일이 기소법정주의를 채택한 이유이다.   사진 출처    한국의 검사는 많은 권한을 독점하면서 형사절차를 주도해 왔으나, 권한의 오남용이 심각하여, 특히 수사권의 통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청법을 개정하여 검찰청 검사의 수사권을 4가지 유형의 범죄, 곧 ①부패범죄, ②경제범죄, ③경찰공무원(특별사법경찰관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공무원 포함)범죄, 이들 범죄 및 경찰이 송치한 범죄(본래범죄)와 ④관련 범죄로 제한하고, 이와 함께 자신이 수사를 개시한 범죄에 대하여는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의 기능적 분리에도 불구하고 검찰청 검사의 권한 남용의 폐해가 사라지지 않고, 검찰청 검사의 수사 대상 범죄 개념의 불명확성으로 인한 혼란이 발생하자,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회에서 검찰청법 폐지법률안과 함께 검찰청을 대신하는 기구를 신설하는 이른바 검찰개혁법안이 나왔다. 중대범죄수사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 공소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 국가수사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 그것이다. 검찰청 검사가 위 4가지 유형의 범죄에 대해 행사하고 있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조직적으로 분리하여, 수사권은 신설하는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에, 기소권은 신설하는 공소청에 각각 부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검찰청은 중수청과 공소청으로 분리된다. 검찰개혁법안의 지향점은 옳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조직적으로 분리함으로써 권한 오남용을 강력하게 통제하여 인권보장 내지 적법절차라는 형사절차의 이념에 충실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와 함께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형사절차의 효율성이다. 수사권 분산으로 인한 경합의 원인 개념인 관련 범죄의 의미는 어떻게 규정하든지 해석적 논란이 될 수 있으나 넓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규정할 필요가 있다. 우선 중수청 법안은 중대범죄 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것으로서 중대범죄와 직접 관련성이 인정되며 중대범죄자가 범한 것을 관련 범죄로 정의하고 있고, 공수처법도 이런 방식으로 관련 범죄를 정의하고 있다. 검찰청법은 이보다 넓게 본래 범죄의 수사과정에서 인지한 것으로서 이와 직접 관련성이 인정되는 것을 관련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넓게, 예컨대 중대범죄와 직접 관련성이 인정되는 범죄를 관련 범죄로 중수청 법안에 규정하는 것이 수사권 분산의 취지에 부합한다. 국수본은 수사 대상 범죄에 제한이 없고, 그중 일부의 범죄에 대해 중수청과 공수처가 수사권을 갖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수사권 경합은 공수처와 검찰청 사이에 주로 문제가 되었으나 관련 사건은 많지 않았다. 중수청과 공수처 사이의 수사권 경합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조정하기 위한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가수사위원회(국수위)를 두는 것은 형사사법의 비효율이다. 수사권 경합은 수사기관간 자율적 협력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타율적 조정은 수사의지를 꺾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의 불송치결정은 물론 공수처의 불기소결정도 이의신청의 대상으로 하고, 이런 사건에 대한 조사와 처리를 국수위에 설치되는 국가수사심의위원회의 권한으로 한 것도 매우 비효율적이다. 국가수사심의위원회의 기각 결정에 대해 바로 법원에 재정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비효율적이고 신설되는 공소청을 의미 없게 한다. 국가수사심의위원회가 재수사를 요구하거나 검사에게 송치할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수사기관이 이에 불응하는 경우 강제할 방법이 없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경찰의 불송치결정에 대해 고소인이 이의신청을 하면 그 사건은 검찰청 검사에게 송치되도록 하고 있다. 중수청이나 공수처의 불송치결정에 대해 고소인의 이의신청이 있으면 공소청 검사에게 송치되도록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국수본이나 중수청 또는 공수처가 공소청으로 송치한 사건에 대해 공소청이 해당 수사기관에 보완수사를 요구하지 않고 직접 보완수사를 하도록 할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으나 이를 인정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보완수사의 대상은 송치한 사건 및 이와 관련 사건에 한정되므로 오남용의 여지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수사권과 기소권의 조직적 분리 원칙을 공수처에도 적용할지, 아니면 예외로서 현재처럼 유지할지, 유지한다면 현재처럼 기소권을 예외적으로 인정할지, 그 범위를 더욱 좁힐지, 아니면 그 범위를 확대하여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킬지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마치 공소청의 기소유예권한처럼, 범죄혐의가 인정되지만 공소청에 송치하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을 중수청이나 국수본에도 부여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나, 이를 인정하는 것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산 취지와 피의자의 인권보장 내지 적법절차 이념에 부합한다. 검사의 불기소결정에 대한 통제장치, 특히 기소유예결정에 대한 피의자의 불복절차의 제도화 여부 및 어떤 형태로 할 것인지도 논의가 필요하다. 즉결절차, 약식절차, 정식절차, 배심절차 4가지로 형태로 운영되는 현행 기소와 재판절차가 형사절차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는지, 또 효율적인지 검토 및 논의가 필요하다. 형사절차의 개혁 논의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배심제의 확대 내지 강화가 쉽게 거론된다. 그러나 미국의 형사사법과 배심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95% 이상 사건의 효율적 처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이다. 그런데 이는 지나치게 효율성만을 추구하면서 형사정의 이념은 포기한 제도이다.   ※ 검찰개혁법안은 형사절차 개혁의 시작에 불과 현행 형사절차 전반의 개선과 함께 세부 사항 면밀한 검토 필요 형사절차 개혁 논의에서 형사절차의 이념은 물론 효율성도 고려해야    
2025-07-29 | hrights | 조회: 196 | 추천: 5
이윤/ 경찰관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같은 잘못을 계속 반복하곤 한다. 검찰개혁도 1991년 시작되어 30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항상 비슷한 모양새로 실패했다. 이번엔 좀 제대로 하면 좋겠다. 일부 정치인은 추석 전까지 검찰개혁을 완성하겠다고 한다. 그 속도감과 추진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래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용두사미였던 과거 기억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검찰개혁이 추진될 때마다 반복해서 나오는 검찰의 전략은 경찰 붙잡고 늘어지기다. ①언론에 비리 경찰관 기사를 쏟아내고, ②일부 교수나 변호사가 경찰이 무능하고 부패하기 때문에 검사가 통제해야 한다고 기고문을 쓰고, ③이런 기사와 글을 근거로 결정 주체를 압박한 후, ④검사가 경찰을 통제하는 방안이 포함된 검찰개혁 방안을 의견으로 제시하여 자신들의 수사지휘권과 직접수사권을 유지한다. ‘검찰개혁을 하면 경찰 통제가 어려워지고, 그 결과 수사가 엉망이 되면 사회가 혼란해진다’라는 불안감을 조성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일종의 전 국민 가스라이팅 전략이다. 그런데 우리는 경찰 사법통제의 주체가 꼭 검사일 필요는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에는 검찰의 물귀신 전략에 넘어가지 않으면 좋겠다. 검찰개혁을 준비하는 분들은 검찰개혁이 필요했던 원래의 이유를 잊지 말고 개혁안을 마련하길 바란다.  ‘검찰의 힘을 빼면 경찰이 너무 강해진다’는 우려는 너무 이분법적인 사고다. 그렇게 경찰의 힘이 세질 것이 걱정된다면 제발 경찰이 하고 있는 수사들 좀 다른 곳에 나눠주면 좋겠다. 경찰은 지금 하고 있는 사건들만으로도 벅차다.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성폭력, 성매매 사건은 여성가족부로, 소년범과 학교폭력은 교육부로, 교통사고는 국토교통부로, 해킹범죄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가져가 수사하면 좋겠다. 수사를 꼭 경찰이나 검찰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와 좀 다르긴 하지만 미국에는 수백 개의 법집행기관(Law Enforcement Agency)이 존재한다. 각설하고 추석 이후 구현될 개혁된 범죄수사 체계에 다음 사항도 포함되길 기대한다.   수사와 기소의 완전한 분리 이 주제는 워낙 강한 의지로 추진되고 법안도 발의되었으니, 또다시 적당히 검찰을 그대로 두면서 수사검사와 공소검사를 분리한다는 식의 하나마나한 개선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완전한 분리에는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의 소속 부처를 분리하는 것도 포함된다. 만일 법무부에 두 청을 함께 두면 법무부가 검사들에게 잠식되었을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다만 같은 의미에서 중대범죄수사청을 행정안전부 소속으로 두어 거대 수사기관 두 개가 한 부처에 있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사진 출처   경·검 협력은 긴밀하게 2020년 형사소송법 개정 후 제정된 대통령령이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상호협력과 일반적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이다. 여기에 ‘상호협력’이 명시되어 있으나 현실에서는 거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전처럼 검사가 서면으로 보완수사요구나 재수사요청을 할 뿐인데, 이 두 가지는 오히려 경찰 수사가 장기화된 원인이 되었다.  공소청이 만들어지면 소속 검사의 역할은 기소여부 검토·결정과 공소유지가 될 터인데, 이에 필요한 각종 인적·물적 증거 제공은 결국 경찰이 하게 된다. 그러니 수사 초기부터 증거와 적법 절차 등에 대해 서로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므로, 영국처럼 경찰관서에 검사를 파견하여 수사관과 대면으로 상의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 하루종일 상주하기 어려우면 하루 중 3~4시간 만이라도 경찰서에 있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법률전문가인 검사와 수사전문가인 경찰이 서로 도시락 까먹으면서 머리를 맞대고 사건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경찰서에 와서 체포·구속된 피의자를 유치장에서 바로 면담하여 불법 체포·구속에 의한 것이 아닌지 확인함으로써 유치인 인권도 직접 보호하게 한다면 일거양득이다.   사건 이첩은 양방향으로 경찰서, 시도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는 직접 수사하는 부서가 각각 따로 있다. 여기에 중대범죄수사청이 또 생길 예정이다. 이 수사부서 간 사건 관할이 정해질 것인데,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정해야 서로 ‘네 사건, 내 사건’ 하고 미루거나 다투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보통 상급기관 수사부서에서 하급기관 수사부서로 사건을 이첩하기는 했지만, 역으로 하급기관에서 상급기관으로 이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다만 여성청소년 기능은 시도청과 경찰서 간 사건 관할이 명확하여 서로 이첩하고 있다). 관할이 불명확하여 지금까지처럼 일방향으로만 사건을 이첩하게 하면 결국 가장 하부구조에 있는 경찰서 수사관만 죽어난다. 새로 설치될 국가수사위원회에 기관 간 사건 관할 관련 분쟁 조정 기능도 있으면 좋겠다.   피해자 보호는 경찰에게 범죄 피해자는 언제 있을지 모를 가해자의 보복이나 재범 위험 때문에 불안하다. 경찰은 112신고 등으로 가장 처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피해자를 만나고 상황을 파악하므로 피해자 보호조치, 즉 접근금지나 유치장 유치, 전자발찌 착용의 필요성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피해자 보호조치는 수사가 아니므로 경찰과 법원 사이에 검사가 개입할 이유는 없다. 물론 행동의 자유를 억압하기에 강제적 조치이므로 인권보호 차원에서 검토자가 하나 더 있는 것이 좋겠지만, 시간이 촉박한 경우도 있고, 서면으로만 보호조치 필요성을 판단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어 큰 의미가 없다. 앞으로 공소청과 중수청으로 조직이 분리되면 그나마 그 판단을 해 줄 검사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경찰이 법원에 직접 청구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법률이 개정되길 바란다. 범죄피해자구조금 등 피해자 지원 업무도 경찰이 주체가 되어 담당하면 좋겠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한다고 해서 경찰이 기소까지 하지는 않는다. 혹자들은 정치경찰 등장이 우려된다느니, 거대 경찰이 탄생한다느니 하면서 불안을 부추기지만, 경찰에게는 기소권도 없고, 강제수사는 법원의 사법통제를 받으며, 감사원의 행정통제도 받는다. 또한 공수처 등 견제할 다른 수사기관도 많으므로 지금 검찰과 비교하면 발목만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경찰 핑계를 대면서 검찰개혁을 유야무야 만들려는 것은 물귀신 작전일 뿐이다. 개혁 대상인 검찰과는 합의나 협의도 필요하지 않다. 검찰개혁은 대한민국이 한 걸음 도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꿋꿋하게 밀고 나아가야 한다.  
2025-07-14 | hrights | 조회: 283 | 추천: 13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2024년 12월은 철저히 국회의 시간이었습니다.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당시 국회에서 신속하게 대응했기에 대한민국은 암흑 속 벼랑 끝 추락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의 대거 투표 불참으로 한 차례의 좌절을 겪긴 했지만, 12월 14일 결국 204명의 찬성으로 대통령 윤석열씨의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습니다. K-민주주의의 시민들은 여의도에서 겨울 찬바람을 견디며 국회 앞을 지켰고 좌절과 환희의 순간을 함께했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내전에 준할 정도로 대통령경호처와 공수처, 경찰의 물리적 충돌 직전 상황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법원이 발부한 적법한 체포영장 집행에 저항하는 대통령실과 경호처를 두둔하며 법치주의를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또 희한한 셈법으로 대통령 윤석열씨를 석방해 준 판사와 기다렸다는 듯 즉시 항고를 포기한 검찰 탓에 말도 못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기도 했습니다. 4월 4일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석 달은 그야말로 조바심과 불안의 나날이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법원과 헌법재판소 사법부의 시간이었습니다. 뭐 그 이후 한강에 개를 끌고 유유자적하거나 분당 어딘가에서 맛집 투어를 하는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 윤석열씨의 모습이 언론 등에 공개되면서 국민의 복장이 터지기도 했죠.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K-민주주의가 가진 역동적이면서도 웅숭깊은 에너지를 바탕으로 결국 사필귀정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차분하게 내란 특검 및 3대 특검의 수사를 지켜봐야겠지요. 이제는 다시 돌고 돌아 국회의 시간이 됐습니다. 7월 임시국회가 7일 시작했습니다. 지난 21대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됐으니 여야가 바뀐 첫 번째 국회가 되겠습니다. 여러 장관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비롯해 시급한 입법 과제가 많습니다. 여야 공히 분주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이미 얼개가 잡힌 검찰개혁 관련 법안을 국민적 동의와 지지 속에서 잘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검찰개혁 4법은 ▲검찰청 폐지법 ▲공소청 설치법 ▲중수청 설치법 ▲국가수사위원회법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검사의 직무를 기소·공소 유지로 한정하고, 대검찰청과 지방검찰청을 폐지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수사 권한은 중수청·경찰 등으로 이관하고, 이들 수사기관을 총괄·감독할 국가수사위원회는 별도로 설치하게 될 것입니다. 시한을 정해놓고 서두르기보다는 빈틈없이 꼼꼼히 준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문재인 정부 당시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을 통해 겪은 가슴 아픈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어설픈 검찰 개혁에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며 저항했던 검찰은 쉽게 제어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수사권을 갖게 된 경찰은 수사권을 버거워하며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내비쳤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지게 됐죠. 물론 그렇다고 마냥 하세월 해서는 안 될 테고요. 제일 좋은 것은 ‘신속하게 제대로’ 하는 것이겠죠. 또한 그동안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이른바 법안 거부권 때문에 많은 민생 관련 법안들이 국회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대통령 윤석열씨와 한덕수, 최상목 2명의 대통령 권한대행은 무려 42차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야당 대표와 대화 요구를 “피의자와 만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말로 거부하고, 국회 개원식에도 찾지 않은 윤석열 정부의 철저한 반(反)정치가 낳은 ‘괴물 정치’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최근 상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를 거쳐 국회 소위를 통과했으니 이는 나쁘지 않은 신호입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 등을 담은 이른바 ‘노란봉투법’도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법안입니다. 농업 개선과 농민 민생 과제를 담은 법안을 ‘농망법’이라고 부르며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던 송미령 농림부 장관이 유임돼 농민단체들의 반발이 거세긴 했습니다. 하지만 양곡관리법, 농수산물 유통·가격 안정법, 농어업재해대책법, 농어업재해보험법 등 농업4법에 대한 농림부의 접근법이 윤석열 정부와 같지 않을 것임이 분명할 테니 국회에서 더욱 적극적인 모습으로 노력해 주기만을 바랍니다.   사진 출처   특히 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 등은 국회, 특히 정부여당 민주당의 개혁 의지를 보여줄 좋은 기회입니다. 그간 야당일 때 강력히 요구하다 정권만 잡으면 언론을 제 편으로 삼으려 언론 개혁을 외면하거나 느슨해지는 모습이 무수히 반복됐습니다. 늘 권력을 내주고서야 비로소 언론 개혁을 외치니 진정성에 대한 의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민주당으로서는 그동안 21대와 22대 국회를 거치며 숱한 거부권 앞에서 좌절하며 무기력과 분노가 교차했겠지요. 이제 부디 그 과거에서 깔끔하게 벗어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같은 시간 동안 국민의힘은 내란을 옹호하고 동조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벗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처절히 반성하고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씨를 여전히 두둔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확실한 평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향후 불가피하게 내란 특검, 김건희 특검, 채해병 특검 등 3대 특검의 수사를 받아야 하는 국민의힘 의원 또는 정치인들도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그럴 때 관성적으로 비판하거나 그들을 감싸는 발언이나 행동들이 나온다면 당 전체가 ‘내란 옹호 정당’이라는 틀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단호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임시국회 활동 과정에서 정치적 셈법, 당리당략을 내려놓고 민생 개혁에 전념하는 모습으로 국민의 평가를 새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관성적인 정부 정책 비판이나 장관후보자에 대한 검증이 아닌 흠집내기, 인신공격 등에만 머무른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겠지요. 부디 한동안 계속될 야당의 역할과 책무에 대해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국민의힘이 건강한 보수정당으로 자리잡을 때 의회민주주의, 나아가 민주주의 자체가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돌아온 국회의 시간, 여당과 야당 모두 소중하고 알뜰하게 진짜 주권자 국민들과 함께 잘 보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2025-07-08 | hrights | 조회: 245 | 추천: 7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민주 대한의 신이 춤춘다. 목숨을 걸다시피 한 민주시민의 끈질긴 주권 행사의 결기로 3년 남짓의 절망적인 통치가 빚은 죽음의 어둠을 뚫고서 마침내 모두가 희망을 걸 수 있는 새 대통령을 만들어 냈다. 어찌 덩실덩실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던 철학자 니체는 발가벗고서 춤추는 신만은 찬양한다고 했다. 아마도 정치를 담당하는 신이 있다면, 그는 지금쯤 한반도 상공에서 발가벗고서 춤을 추면서 날아다니고 있음에 틀림이 없으리라. 신이란 모름지기 전(全) 우주적일 수밖에, 그러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승리를 기리는 저 발가벗은 신의 춤사위는 반민주 ‧ 반인권의 원한과 복수의 전쟁으로 얼룩진 지구촌 전체에 그 운율의 파장을 드리울 것이다.   2. 파시즘적인 집단의 광기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빛이 강렬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 대대적인 살해의 폭력을 획책한 자들과 그 실패를 통탄하면서 못내 아쉬워하는 저 섬뜩한 반민주 ‧ 반헌법의 파시즘적 어둠의 세력은 여전하다. 저들은 민주시민의 승리를, 갑작스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돌풍과 소나기, 스콜과 같을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잠시 호흡을 고르는 듯 움츠리고서 잠행하면서 호시탐탐 재기의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저들은 파시즘적인 지배의 가학적 폭력과 피지배의 피학적 쾌감의 요철 결합으로 묶인 세력이며, 그래서 비판적 반성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들은 의식적으로는 불안해할지라도 무의식에서는 전혀 절망하지 않는다. 무지와 그에 따른 광기가 그들의 무의식을 장악하고서 끝내 승리하리라는 완전한 착각에 빠져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갖은 부정한 수단을 써서 그저 권력과 부를 추구한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바탕에 광기로 무장한 신앙이 작동하고 있다. ‘태극기 부대’니 ‘세이브코리아’니 하면서 윤석열 탄핵 반대에 수시로 수십만이 모여 집단적 광기를 뿜어내고, 급기야 ‘국민 저항권’이니 ‘순교’ 운운하면서 법원으로 쳐들어가 광포한 파괴적인 폭력을 일삼았지 않았던가. 불과 두 달 남짓 전쯤 윤석열이 관저에서 서초동 사저로 가면서 “다 이기고 돌아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도착적 망상의 발언을 하고, 며칠 뒤 ‘세이브코리아’의 사이비 선동가 전한길이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했듯, 윤 전 대통령도 파면 후 다시 부활했으며” 운운하지 않았던가. 망상이라거나 자기도취 또는 편집증적 도착과 같은 학술적인 용어를 쓸 것 없이, 그냥 한 마디로 정확하게 집단으로 미친 것이다.   사진 출처   흔히 말하듯 곱게 미치면 예술적인 천재성이라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이건 창조적인 광기가 아니라 철저히 파괴적인 그것도 집단적인 광기다. 코로나 사태 때 보았던 이만희의 신천지 집단이 대거 모여서 어떤 미친 짓을 하는지 다들 보았다. 주변에 자기처럼 미친 자들이 많으면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비판적으로 반성하면서 성찰하는 자가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결코 자기 비판적인 합리적 사유를 할 수 없다.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정당하고 옳다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이를 주변에서 확인하면서 더욱 강고하게 만들어 나갈 뿐이다. 그렇게 해서 얄팍은 앎은 신앙으로 굳어진다. 누가 더 신앙이 굳건한가를 가늠하게 되고, 결국에는 가장 강력한 신앙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자가 가장 양심적이고 가장 진실하며, 따라서 가장 위대한 자로서 숭배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지시 없이는 제대로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는 '미성숙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 뒤 숭배 대상인 자가 자신을 비인격적인 폭력으로 대하더라도 오히려 거기에서 피학적인 쾌감을 느끼며 즐기는 자가 된다. 한편으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신앙을 조금이라도 비난하기라도 하면 그 누군가를 악마와 같은 적으로 여겨 폭력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며 즐기게 된다. 문제는 저들의 집단적 광기를 형성하는 구도가 복잡하다는 점이다.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에서 보았듯이, 우선 집단의 규모가 크고 그 뿌리가 깊고 넓게 퍼져있다. 배타적인 기독교 신앙의 틀이 중심에서 작동하는 가운데 주변에서 대중적인 무속이 결합해 있는가 하면, 그 안팎으로 자본주의적인 맹목적인 물신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그 위에 사이비 정치적인 진영 논리를 역용한 권력욕이 얹혀 뒤엉켜 있다. 게다가 진보-평등-빨갱이-반미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프레임과 자유-반공-반북-반중이라는 정확하지도 않은 뜻의 소위 가치 이념이 작동하고 심지어 뉴라이트-친일의 그림자마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집단적 광기의 실타래를 어디에서부터 접근해 어디로 치고 들어가 풀어내야 하는가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 정도다. 알렉산더 대왕이 복잡하게 얽힌 고르디우스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을 때 썼던 그 칼을 찾을 수도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이렇게 복잡미묘한 집단적 광기의 세력이 지난한 민주 투쟁 끝에 탄생한 ‘이재명 국민주권정부’의 발목을 붙들고 비틀어 부러뜨리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재명 국민주권정부’는 난마처럼 복잡하게 얽힌 저 광기에 사로잡힌 집단적 세력과 대대적인 일전을 벌일 수밖에 없고, 최고도로 현명한 통치술을 발휘하여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3. 이제 이재명 대통령이다. 자칭 제1 시민일 뿐이라는 새 대통령 이재명은 그동안 숱한 형태의 죽음들을 기적처럼 극복함으로써 위기 때마다 민주시민이 결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 위력을 이제 민주주의의 이념을 떠받쳐 실질적인 현실로 만드는 데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민생 경제의 대대적인 회복에 집중한다. 권력을 위임받은 자의 1시간이 5,000만 시간이라는 그의 놀라운 말대로 그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국가 권력을 전심전력으로 동시에 용의주도하게 자신의 위력을 바탕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건만 그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정확한 착각이 일 정도다. 희망을 걸 수밖에 없음을 넘어서서 충분히 희망을 걸게끔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고마울 따름이다. 다들 느꼈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표정은 좋은 의미에서 야누스적이다. 온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와 웃음을 가득 담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엄격하고 신중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짓는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낙관적인 성품을 지녔는가 하면, 그와 동시에 공적인 일을 대함에 있어 최고도의 집중력으로 공정함과 정확성을 기하고 그 결과 최고의 실효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닌 것이다. 누구는 그가 어릴 때부터 워낙 극심한 난관들을 뚫고 나왔기 때문에 특히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동감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마치 맹자의 성선설을 입증해 보이기라도 하듯이 본래 그는 그런 사람이라고 진단한다. 천성적으로 낙관적이고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래서 사람 자체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로 생각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반장처럼 마음대로 남을 때리고 벌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검정고시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악성을 고백하듯 말하기도 하는 건 역설적으로 그가 워낙 그럴 수 없게끔 선성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낙관적이고 선함을 타고났다고 해서 고집이 없는 건 전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집이 세다. 얼마든지 함께 잘 살 수 있는데 무엇이 왜 이처럼 다들 나 혼자 살겠다고 발버둥 치게끔 하는가. 이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그 고집은 오히려 그의 선성에 따른 성실함에서 온다고 여겨진다. 그는 자신의 바람이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만인을 위한 것임을 확신하기에 그 자신의 바람에 더없이 자부심을 지닌 인물로 보인다. 그러한 자부심을 실질적인 자신감으로 바꾸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위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했을 것이며, 이를 위해 그 누구 못지않게 최대한의 노력을 반복해서 기울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가 학습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다고들 말한다. 그럴 것이다. 내면에서부터 길러온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워낙 강한 사람은 흔히 말하듯이 머리가 뛰어날 수밖에 없다. 집중하되 집착하지 않고, 두루 살피되 그 각각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머리가 좋은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실천적 지혜가 뛰어난 사람의 특징이다. 이런 인격의 소유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우리 민주대한의 국민은 이재명 대통령 자신이 “저는 국민 여러분의 집단지성을 믿습니다.”라고 숱하게 말한 것처럼, 얼마나 현명한가. 한 개인이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만인을 계몽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인에 대한 삶의 모델이 될 수는 있다. 대통령은 그가 어떻게 위임받은 권력을 지혜롭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심지어 국민 각자가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그걸 현실화할 수 있는 위력을 갖추는 데 필요한 자극을 줄 수도 있고 환경을 조성할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국민 각자가 의지를 곧추세워 노력함으로써 이성을 기반으로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   사진 출처   이재명 대통령 그는 일찍이 국가가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책임지는 사회, 즉 ‘기본사회’라고 하는 국가 공동체 형성의 이념을 제시했고,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금융’ 등의 실천 목표를 제시했다. 그는 실제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기본사회를 위한 회복과 성장 위원회’라고 하는 대통령 직속 국가기구의 설치를 서두르고 있다. 그가 ‘먹사니즘’에 이어 ‘잘사니즘’으로 나아가자고 한다거나 다소 부족하더라도 다함께 잘 사는 ‘대동사회’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은 그 바탕에서 보면 국민 각자가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실현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갖추는 데 필요한 국가 사회의 기본 골격을 세우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기대하건대 만약 이러한 ‘잘사니즘’을 바탕으로 한 기본사회가 확실하게 틀을 갖춘다면, 저 앞에서 말한 파시즘적 집단적 광기의 세력은 현저히 약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잡하게 엉킨 저 광기의 실타래를 직접 일일이 푸는 게 아니라, 알렉산더가 고르디우스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린 것처럼, 근본적인 문제를 치고 들어가 해결하는 셈이다. 부디 이재명 국민주권정부의 큰 바람이 성취될 수도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이재명 대통령의 현명함을 북돋워야 할 것이다.    
2025-07-01 | hrights | 조회: 467 | 추천: 11
이동우 / 변호사 대법관 증원을 매개로 법원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견이든 그 바탕에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역할에 대한 나름의 기본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관계와 역할이 어떤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역할에 대한 가장 큰 쟁점은 재판에 대해 헌법소원을 허용할 것인가에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국가 공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해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단 하나,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만들어질 당시 최고법원의 위상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대법원이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설사 그 재판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해도 헌법소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대법관 증원 논란으로 시작된 사법개혁의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첨예하게 대립한다. 사진 출처 원문 보러가기 찬성하는 측은 헌법재판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법원의 재판도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재판이란 가장 대표적인 국가의 공권력 행사이며 이러한 공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지를 판단하는 제도가 헌법소원이기 때문에 재판도 당연히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합법이라는 미명하에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재판을 바로잡지 않으면 헌법은 그저 허울 좋은 문구에 지나지 않아 현실적인 힘을 갖기 어렵다는 점도 이유로 든다. 이에 반해 반대하는 측은 재판이 사실상 4심제로 되기 때문에 재판의 최종 결론이 더욱 늦어지고 그에 따른 피해는 결국 국민이 보게 된다며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반대한다. 지금도 굳이 3심인 대법원까지 가지 않아도 될 사건들이 대법원까지 오기 때문에 재판이 오래 걸리는데,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이 허용되면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하리라는 것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다. 찬성과 반대 모두 국민을 위한 논거를 들고 있고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재판 역시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헌법재판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1920년 오스트리아에서 세계 최초로 생겼다. 정확히는 체코에서 몇 달 앞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별다른 활약이 없었기에 거의 모든 문헌은 오스트리아의 헌법재판소를 세계 최초라고 지칭한다. 오스트리아의 헌법재판소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흔히 법실증주의자로 알려진 한스켈젠이다. 우리나라에서 법학을 배운 사람들은 대부분 법실증주의와 한스켈젠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인상이 있지만, 사실 한스켈젠은 혼란스러운 오스트리아에서 헌법의 가치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한 학자였다. 그의 사상적 기반과 현실적인 노력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세계에서 최초로 헌법이 현실적인 규범력, 즉 어떠한 행위가 헌법에 위반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직접 심사하는 기관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바로 헌법재판소다.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제일 과제는 바로 국민의 기본권 보호다. 헌법재판소를 기본권 최후의 보루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표현도 바로 헌법재판소의 설립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는 국가의 어떤 행위든 그것이 헌법에 위반될 때는 그 행위를 무효로 만들 권한을 갖게 된다.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설립 원리에 따르면 국가의 행위 중 대표적인 재판에 대해서도 당연히 국민의 기본권 침해가 있는지를 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진 출처 원문 보러가기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은 민주주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도 허용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은 국회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나라에서는 대통령도 국회와 동등한 수준의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지만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기관의 가장 큰 권위는 국회에 부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헌법도 국민의 기본권이 가장 앞에 있고 그다음이 바로 국회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국회가 가장 권위 있는 이유는 주권자인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곳이고 그곳에서 국가를 운영할 기본적인 규칙인 법률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률조차 헌법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그 효력을 정지하거나 무효로 만드는 기관이 바로 헌법재판소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최고의 권위를 갖는 국회의 활동에 대해서도 심사를 할 수 있는 기관이 민주적 정당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심사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다. 헌법을 말 그대로 최고의 규칙으로 삼겠다는 선언이자 현실적인 노력이 헌법재판소인데 그 과정에서 법원만을 예외로 삼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찬성하면 반대 측이 우려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모든 재판이 사실상 4심제로 이루어진다면 분명 비효율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는 재판제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결책이 존재한다. 현재와 같은 재판시스템에서 4심제는 분명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1심부터 3심까지 평균 2년이 넘게 걸리는 지금의 재판속도를 높인다면 4심제가 그렇게 큰 부작용이 아닐 수 있다. 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배심제를 통해 사실관계에 관한 판단은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서 바꿀 수 없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도 형식적으로는 3심인 대법원은 법률심이므로 사실인정을 이유로 하는 3심의 제기, 즉 대법원에 대한 재판청구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법원의 의지에 따라 사실인정 자체를 다르게 판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문에 대부분의 재판이 3심제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배심제를 통해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다면 최종심이 3심이든 4심이든 실질적인 대부분의 재판은 2심에서 끝날 수 있기에 4심제로 인한 재판지연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의견이 있고 모두 나름의 합당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존재 이유와 설립목적을 고려한다면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는지를 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와 함께 대법원은 물론 헌법재판소의 구성과 운영에 대해서도 변화가 필요하나 이에 대한 논의는 그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번 글은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2025-06-18 | hrights | 조회: 170 | 추천: 4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마침내 이재명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그가 선도해서 만들어 낼 ‘진짜 대한민국’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 그런데 그 진짜 대한민국은 어떤 대한민국일까? 그는 선거 기간 중 민주당을 ‘중도 보수’로 위치 지우기도 하고 최근 들어서는 아주 자주 ‘실용주의’를 표방하기도 했는데, 이런 데서는 그가 꿈꾸는 대한민국에 대한 비전 같은 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그리고 자신의 이념적 지향에 대한 예각화를 피하고자 했던 이번 선거 운동 과정에서도 가끔, ‘억강부약(抑强扶弱)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곤 했다. 아마도 이 표현이 그가 만들어 보려 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지향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해 주는 건 아닐까 싶다. 이를 좀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대동세상’은 그의 궁극적인 정치적 이상을 담고 있는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동세상 또는 ‘대동사회’는 사실 오랫동안 유교 전통이 추구해 왔던 정치적 이상을 담고 있다. 이런 전통적인 정치적 이상이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적 구호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이 대동 사회의 이상은 ‘천하위공(天下爲公)’, 곧 ‘세상은 모두의 것이다’라는 걸 기본 원리로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유교적 평등주의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원리는 현대적 맥락에서 볼 때 아주 강한 복지국가에 대한 지향을 담고 있다.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은 대동 세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이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 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간사한 모의가 끊어져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는다.” 이 대동세상의 이상은 우리 인간의 본원적 취약성과 의존성을 직시하면서 이를 보듬어 돌보는 게 국가라는 정치적 질서가 해결해야 하는 최우선적인 과제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인간은 누구든 상처 입기 쉽고 아프고 외로울 때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국가의 궁극적 목적은 누구든 그런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대동세상에서는,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유아동기의 유약함과 생리적 노화 및 병듦, 그리고 홀아비나 과부가 되며 고아가 되거나 늙어 혼자가 되는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는 사회적 외로움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인간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불가피한 상처 또는 고통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취약성이나 타인에 대한 의존성은 결코 어떤 사회적 악이나 병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사실이 지시하는 돌봄의 필요나 상호적 유대 및 호혜의 당위는 정치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도덕적 과제다. 우리는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해 온 ‘기본 사회’의 이상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진 출처: 원문 보러 가기     한편 ‘억강부약’, 곧 강자는 억누르고 약자는 힘을 북돋는 건 그와 같은 대동세상을 이루기 위한 실천적 방법론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이재명 대통령을 ‘극단적 좌파’로 몰아가기 위해 일부에서 이해하듯이 강자의 자유와 지위를 공격하고 빼앗아 약자에게 나누어주자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날의 맥락에서 억강부약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강자를 억누르자는 건, 무엇보다도 기득권 세력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 등에서 부적절하고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국가 권력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약자들을 북돋우자는 건, 곧 사회적 약자들이 기득권 세력의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지배’의 시도에 맞서 존엄성과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다양한 보호 장치와 역능화(empowerment)를 위한 수단을 갖도록 하자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원칙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들을 도출할 수 있는가는 반드시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대략적으로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실업에 시달리는 청년 계층, 비정규직 노동자들, 청소부나 택배 노동자들 같은 저임금 육체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소상공인 등 구조적으로 사회적 강자들의 지배 욕구에 고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재명 정부가 억강부약의 원리에 충실하려면 어떻게든 이 약자들의 상황을 개선하고 이들이 놓인 원천적인 구조적 취약성 관계를 혁파할 수 있는 개혁 로드맵 같은 걸 만들어 차근차근 실천해 가야 할 것이다. 반면 기득권 세력은 언론이나 인맥 등의 지원을 받으며 정치권과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많은 법과 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가령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간접 고용 관계를 만들어 열악한 저임금 노동을 일반화하고 공권력의 비호 속에 공장 폐쇄나 부당 해고를 자행한다. 민주당 정부는 이런 상황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감시하며 기득권 세력의 권력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배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필요한 ‘노란 봉투법’ 같은 법적 보호 장치들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을 실현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5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이 임기 동안 억강부약을 통한 대동세상의 실현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국민들은 이재명 정부가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을 다했는지는 엄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민주당 이재명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큰 기대가 저버려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2025-06-10 | hrights | 조회: 273 | 추천: 6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임금체불액의 상승 추세가 심상치 않다. 2000년대 8천억 원 수준이던 임금체불액은 2012년 1조 원을 돌파하여 2019년 1조 7,217억 원까지 이르렀다가 2021년 1조 3천억 원 수준으로 떨어졌으나, 2023년 다시 1조 7천억 원대로 복귀하고 2024년에는 2조 448억 원까지 상승했다. 이러한 임금체불 액수는 다른 국가에 비해 너무 많다. 이웃 나라 일본의 2021년도 임금체불액은 516억 원에 불과하다.   일본의 경제 상황이 우리보다 좋다고 할 수 없는 이상, 경제적 이유로는 위와 같은 임금체불액의 큰 격차를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격차가 일어난 원인은 일본의 경영자가 우리나라 경영자보다 더 윤리적이기 때문일까? 오학수 일본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 특임연구위원은 일본 경영자의 높은 윤리의식을 양국 임금체불액 격차의 원인으로 설명한 바 있다. 예컨대 일본 전국에 5만 개의 회원 기업으로 조직된 중소기업가동우회의 경우, 경영자의 책임으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으로 “실제 일하는 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함”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2024. 3. 7.자 매일노동뉴스). 이러한 윤리의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 경영자는 애초부터 근로자들의 임금을 빼돌려서라도 이윤을 극대화하겠단 나쁜 의도를 지니고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고용노동부 임금체불 간이대지급금 지급 현황(원문 보러가기)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란 중국의 옛 얘기가 있다. 회수 남쪽의 귤을 회수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듯이 사람 또한 자란 환경에 따라서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의 재상 안영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초나라 왕이 일부러 안영의 기를 죽이려고 제나라 출신으로 초나라에서 도둑질을 하다 잡힌 죄수를 끌고 오게 했다. 그런 다음 초나라 왕이 그 죄수에게 “너는 어떤 죄목으로 잡혔느냐?”고 하자 죄수가 “도둑질을 하다 잡혔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그 죄수에게 “너는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묻자 죄수는 “제나라 출신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초나라 왕은 안영에게 “제나라 사람들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라며 비웃었다. 이에 안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귤은 회수 이남에 심으면 귤이 되지만 회수 이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고 합니다. 둘은 서로 잎은 비슷하지만 과실의 맛과 향은 다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겠습니까? 물과 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저 사람도 본래 제나라에 있을 때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초나라로 옮겨 와 살면서 물들었기에 저렇게 도둑이 된 것입니다.” 즉 제나라 출신 죄수가 본래 제나라에 있을 때에는 풍속이 선한 곳이었기에 선한 사람이었지만, 초나라로 가서는 악한 초나라의 풍속에 물들었기에 도둑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옛 얘기에 비춰 보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임금체불액의 격차는 노동법 준수에 대한 서로 다른 사회적 인식에 기초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인식의 격차는 단지 경영자의 개인적 윤리 문제로 바라봐서는 안 되며, 제도적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임금체불과 같은 노동법 위반 행위를 줄이기 위해선 다양한 정책 수단을 통해 노동 범죄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를 바꿔 노동법을 준수하는 풍토가 기업에 정착되어야 하고, 근로감독 능력을 제고하여 위반 행위가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제재를 가해야 한다. 이 방안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음주운전을 줄이고자 노력할 때 대대적인 캠페인과 함께 그 위반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여 성과를 거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임금체불은 교화와 엄격한 제재가 병행되어야만 줄일 수 있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 갈무리     이 관점에서 볼 때 임금체불을 줄이기 위해선 “노동 경찰”인 근로감독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2017년 1,450명에 불과하던 우리나라의 근로감독관은 2024년 2,260명으로 7년간 810명이 늘었다. 한국 근로감독관과 비슷한 일본 노동기준감독관이 약 3,000명 정도라는 점에 비춰볼 때, 근로자 수 대비 근로감독관의 수는 오히려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로감독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임금체불액이 줄지 않은 우리의 현실은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의 근로감독관 제도와 관련해선 근로감독관의 숫자 외에 다른 문제점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선 지면 관계상 아래 두 가지 정도를 말하고자 한다.   근로감독관 제도의 첫 번째 문제점은 ‘노동법 이행의 향상과 산업안전의 확보’라는 근로감독관 본연의 임무에 대한 정부 내 인식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 부족으로 인해 임금체불 관련 업무에 대해서까지도 근로감독관에게 보조적 역할만 부여하자는 제안마저 나타나곤 한다. 그런데 근로감독관이 임금체불 등 근로자의 권리 침해 행위를 민사소송이 아닌 형사 제재에 기반하여 구제하기 위한 제도란 점에 비추어 볼 때, 현재와 같은 임금체불액의 증가와 관련해선 근로감독관들의 역할 강화를 통해 대응하는 것이 정석(定石)이다. 임금체불 등 사업주의 노동법 위반 행위가 훨씬 적은 일본이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3배나 많은 사업장 감독을 통해 기업의 노동법 준수 여부를 감시하고 적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근로감독관 제도의 두 번째 문제점은 정부 내에서 근로감독관을 노동인권 보호 기구가 아닌 고용노동정책 전달 체계의 일부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고, 이로써 그 조직이나 채용․승진 등 인사 체계에서 노동 경찰로서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제고하는 데 소홀하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시 조직으로서 ‘근로감독정책단’을 운영하다가 윤석열 정부 시기인 2023년 폐지되었는데, 당시 고용노동부는 그 폐지 이유로서 근로감독정책단의 역할이 주52시간제 현장 안착을 위한 것에 국한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즉 정부는 노동 경찰인 근로감독관의 수사 기능 등 전문성을 키우고 임금체불 등 근로자의 권익 침해 행위를 구제하는 것보다는 정책 전달체계로서 근로감독 기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국세청, 관세청 등과 같이 근로감독청을 신설하여 근로감독 기능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결국 우리나라와 외국 경영자 간 윤리의식의 격차로는 우리나라의 임금체불액 증가 추세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나라 경영자들이 본래 악한 사람이 아닌 이상, 앞에서 본 임금체불액의 증가는 우리나라의 법제와 노동법 이행 기구의 허약함에 기인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자신의 어려움에도 제때 임금을 지급하는 올바른 경영자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웃음을 받고, 반대로 근로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경영자가 시장에서 번성하는 국가가 된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양심적 경영자뿐만 아니라 청년, 여성, 비정규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된다. 민주주의가 이런 부당한 결과를 시정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 사회의 안녕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      
2025-05-27 | hrights | 조회: 345 | 추천: 9
윤동호 /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사법(司法)이란 구체적인 분쟁이 발생한 경우 독립적 지위를 가진 중립적 기관이 무엇이 법인가를 인식하고 선언함으로써 법질서의 유지와 법적 평화에 기여하는 국가작용이다. 사법의 본질은 기관의 독립성과 업무의 중립성에 있다. 헌법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이 사법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있고(제101조 제1항), 법관의 신분과 그 직무활동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제103조, 제106조). 법원에서 온 우편물 봉투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법원은 일반적인 절차 안내 이외에 재판의 중립을 해할 수 있는 법률상담은 할 수 없습니다.” 유명 가수 J는 자신은 타인에게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그 타인이 그린 그림을 자신의 작품이라고 판매하였다. 판매자는 그림의 이런 제작방식을 구매자에게 말해줄 의무가 있다는 전제 아래 검사는 사기죄로 기소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사기죄의 성립을 부정했다. 그러면서 검사가 명시적으로 기소하지 않은 저작권법위반죄 여부는 심리하지 않는 것이 불고불리원칙과 사법자제원칙에 부합한다고 봤다. 위 그림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예술계의 자율적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옳고 사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위 그림의 제작방식은 곧 그림이 J의 친작인지, 타인의 대작인지를 의미한다. 이는 곧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의 문제이다. 사기죄와 저작권법위반죄는 이른바 상상적 경합관계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공소불가분원칙에 따라 사기죄에 대한 기소의 효력은 잠재적 심판대상인 저작권법위반죄에 대해서도 미친다. 위 사건에서 대법원은 저작권법위반죄도 심판할 수 있었으나 사법자제원칙을 내세워 이에 대한 판단을 회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법원이 사법자제원칙이라고 말했으나 사법회피원칙으로 읽혔다. 국민참여재판은 흔히 사법의 민주화로 불리지만, 국민 뒤에 숨어 판단을 회피하는 사법의 외주화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정치권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종종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흔히 정치의 사법화라고 부른다. 정치권이 정치의 본질을 회피하고 사법 영역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정치가 사법에 의존하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외부에 맡기는 것이다. 정치의 외주화다. 정치의 사법화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검사가 개입할 때 나타난다. 검사가 정치권의 기대에 맞춰 공소권을 남용해 무리한 기소를 할 때다.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에 대한 검찰 수사가 없었던 때를 찾기 어렵다. 이로 인해 유력 후보자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정치 생명이 끊어지기도 했다. 정치의 사법화보다 더 큰 문제는 사법의 정치화다. 사법이 거리를 두어야 할 정치권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특히 검사의 공소권 남용과 편향적 기소를 통제해야 할 사법이, 정치권의 요구를 실어 나르며 정치세력과 공생하는 검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내란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윤석열에 대한 구속취소사건에서 종전 실무에 어긋나는 법해석을 하여 피고인에게 유리한 결과를 내놓았다. 그동안 형사실무 체포적부심은 시간으로 계산해왔고, 구속영장 재판이나 구속적부심은 일수로 계산해왔다. 그러나 피고인 윤석열에 대한 구속취소 재판에서 법원은 구속영장 재판을 시간으로 계산하여 피고인 윤석열을 석방했다. 내란이란 중대한 혐의임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불구속재판을 받고 있다. 반면에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이재명에 대한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종전 실무에 어긋나는 신속한 절차 진행을 한 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함으로써 피고인에 불리한 결과를 내놓았다. 2022년 9월 8일 공소제기된 후 1심 선고까지 2년 2개월, 2심은 4개월이 걸려서 판결이 선고되었는데, 2025년 3월 28일 대법원에 상고 사건으로 접수된 후 34일만에 판결이 선고되었다. 대법원 선거사건 재판은 1심 6개월, 2심 3개월, 3심 3개월 안에 끝내야 한다는 공직선거법 규정을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유독 강조했다. 재판의 정당성은 재판 결과의 정당성과 절차의 정당성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결과의 정당성보다 절차의 정당성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재판 절차의 부당성 내지 불공정성은 재판 결과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법관의 독립성과 중립성도 의심받게 한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검찰개혁을 다시 이어가야 한다. 아울러 이제는 법원을 개혁해야 할 때다.
2025-05-20 | hrights | 조회: 331 | 추천: 7
안영춘/ 한겨레21 기자     12·3 내란 사태는 여전히 기막힌 충격과 경이로운 반전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얼마간 기시감이 드는 건, 그만큼 한국 현대사가 다이내믹한 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되었다는 방증일 터다. 다만 극우 파시스트 대중의 등장은 예외다. 이 낯선 현상을 두고 다급한 진단들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우리 사회에 존재해왔다는 사실은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는 듯하다. 그들의 등장은 ‘침략’이 아니라 ‘커밍아웃’이다. 서울서부지법 난입 사건은 굵은 줄기에 잎도 무성하지만 뿌리 한쪽이 심하게 썩어들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 같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맞다. 우리 민주주의는 그렇게 우뚝해졌다. 하지만 그 피가 뿌리까지 깊이 적셨는지 의문이다. 민주주의의 착근은  일상을 사는 대중의 일이다. 대중은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내전에 지친 지 이미 오래고, 그중 일부는 민주주의에 기꺼이 자살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이정록의 시 ‘의자’)  모든 힘든 존재가 걸터앉고 기대는 것이 의자다. 시인의 어머니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저 의자 같은 쓸모에 있음을 통찰한 현자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쓸모로 뿌리를 내린다. 극우 파시스트 대중의 도착적 행위는 민주주의가 자신의 삶에 의자를 내어주지 않은 데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오월 걸상’은 그런 면에서 각별하다. 여느 5·18 조형물들은 하나같이 높고 웅장하다. 그 성인 남성적 미학에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자리는 없다. 생명을 지극히 살피고 거두는 할머니의 자리도 없다. 반면, 오월 걸상은 누구라도 걸터앉거나 기댈 수 있는 쓸모를 놓치지 않았다.     제9호 오월걸상 제막식 모습(출처: 오월걸상 공식 블로그)     지난해 제9호(서울 남산)까지 전국 곳곳에 놓였는데, 어느 것은 여러 사람이 늘어앉을 수 있는 거상(踞床)이고, 어느 것은 혼자 앉을 수 있는 의자다. 작가도, 모양도 다 다르다. 돌의 표면에는 ‘오월 걸상’이라는 이름과 항쟁 기간(5월18일~27일)만 겨우 새겨져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담박한 무덤이 그러하듯. 얼마 전 한덕수가 대선 출마를 과시하기 위해 광주 5·18 묘역 참배를 시도했다. 12·3 내란 부역자가 참배를 막는 광주 시민들에 대고 “오월 영령이 통곡한다”는  언어도단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지난 45년 동안 5·18 민주화운동이 높고 웅장한 조형물로 상징된 탓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색 없는 생각에 곧 스스로 도리질하면서도, 교실을 비롯해 온 나라 어디에나 오월 걸상의 이름이 뿌리내린 미래를 상상했다.    
2025-05-20 | hrights | 조회: 173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