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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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동우/변호사 2024년 12월 3일 전 국민의 일상을 위협하는 윤석열의 불법적인 계엄선포와 내란 범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국민의 일상은 회복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계엄과 내란 범죄의 물리적 위협은 다소 낮아졌지만, 내란의 수괴는 여전히 대통령이란 지위를 유지한 채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당당히 탄핵 심판 절차에 임하겠다는 거짓된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어떻게 해서든 절차를 지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수사기관의 출석요구는 물론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의 집행도 불법적으로 막아서면서 매일같이 주권자인 국민을 분노케 하다 1월 15일에야 겨우 체포가 되었다. 여당이라 불리는 정당의 행태는 또 어떠한가? 실패한 내란 범죄를 옹호하며 주권자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데 여념이 없다. 분명히 실패한 내란 범죄인데 왜 우리는 아직도 불안하고 분노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주권자의 의사가 제대로 구현될 법과 제도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대, 어느 나라의 법과 제도도 완벽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한 부분에 대한 비판이 아닌 보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랜 독재 시대를 경험한 우리는 계엄이라는 비상적 국가보호제도가 독재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에 계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 제도가 헌신적인 시민과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던 국회의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이번 내란 범죄를 실패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헌법 수호라는 의무를 저버린 채 주권자인 국민을 향해 총칼을 들고자 했을 때 이를 막고, 헌법과 민주주의의 적인 된 그를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도록 탄핵 심판 절차를 만들고 이를 헌법재판소가 담당하게 했다. 헌법재판소를 중심으로 하는 탄핵 심판제도는 그 자체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제도나 그 시대와 상황에 맞게 규정되고 적용되어야 하므로 결국 제도의 효용성이나 장단점은 그 제도가 의도한 결과를 이루었느냐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탄핵 심판제도는 잘못된 제도는 아니지만 아쉬운 제도라고 할 수 있다. 12월 3일의 갑작스러운 충격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내란 범죄의 수괴를 대통령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죄에 따른 합당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1월도 절반이 넘었지만, 윤석열은 여전히 대통령의 지위에 있다. 그를 옹호하는 정당은 적반하장격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과연 이런 현실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일까? 주권자의 의사에 부합하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가 필요할까? 이미 많은 분이 아시는 것처럼 답은 나와 있다. 주권자의 의사를 직접 실현할 수 있는 수단. 국민이 나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해서 그 총합으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수단. 바로 국민투표다. ‘국민소환제’란, 국민이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표자들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반하는 활동을 하는 경우 국민투표를 통해 그들을 파면하는 제도다. 국민소환제는 전혀 새로운 대안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됐으나 매번 정치권의 이해관계라는 벽에 막혀 제도화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내란 범죄를 통해 그 수괴를, 그리고 그를 옹호하는 국회의원들을 그 직에서 파면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수단인 국민소환제가 다시금 국민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제도에 대한 찬반 논의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는데 오늘은 이 제도가 왜 필요한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첫째,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22년 보건사회연구원은 8,086명의 국민을 대상으로 ‘나의 이익과 의견이 정당과 이익단체 등을 통해 잘 대변되고 있는지’ 질문했다. 응답자들이 매긴 점수는 4점 만점에 평균 2.38점으로 매우 낮은 수준에 그쳤다. 우리나라 국민은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처럼 대표자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국민이 대표자에게 부여했던 직책과 권한을 투표를 통해 직접 회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국민주권의 실현이자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해 더 나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방법이다. 둘째, 국민과 대표자 간의 형평성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선출 권력은 임기를 보장받고, 자유 위임 원칙에 따른 의정 활동을 위해 면책특권까지도 부여받는다. 반면 국민에게는 자신들이 직접 뽑은 대표자의 책임을 묻고 위임을 철회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대표자에게 직무상 책임을 직접 물을 권리가 없다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 선출 권력이 보장된 임기 동안 주권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은 국민주권주의를 선언한 헌법 제1조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끝으로, 사법적 통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선출 권력의 위법성 여부를 가리는 사법부의 판단이 항상 국민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법 절차가 선출 권력을 향한 실효적인 통제 도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불법을 저지른 정치인에 대한 무죄판결이나 솜방망이 처벌에 국민적 분노와 지탄이 쏟아진 경우를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대통령의 탄핵 심판도 마찬가지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해도 그 심판을 단 9명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담당한다는 점에서 이는 민심의 즉각적인 반영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이 실제로 주권자의 지위를 가지고 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표자가 국민의 뜻을 배신할 때 국민이 직접 파면시킬 수 있는 국민소환제의 도입이 절실하다. 정치권도 각자의 이해관계를 떠나 제도 도입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지난해 12월 3일부터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지켜냈고, 또 회복하기 위해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디찬 도로에서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있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2025-01-21 | hrights | 조회: 15 | 추천: 0
장은주 /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윤석열의 12.3 내란 사태는 지금 와서 생각하고 따져 봐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많다. 제일 황당한 일 중의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그야말로 정반대인 ‘군사 통치 체제’를 만들려 하면서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었다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유신 논리다. 79학번 윤석열은 법대에서 헌법을 공부하면서 그 유신 논리를 깊숙이 내면화하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비상계엄은 고도의 통치행위’라는 투의 주장도 딱 유신 헌법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박정희 유신 파시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윤석열은 물론 우리나라 보수 우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신줏단지처럼 모신다면서 근거로 들고 있는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표현은 유신 헌법에 처음 도입된 것이다. 김기춘 같은 유신 헌법 정초자들은 당시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위해 일으킨 친위 쿠데타가 바로 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독일이 나치 체제의 재출현을 막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적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이른바 ‘전투적 민주주의’ 또는 ‘방어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사용했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표현을 독재 체제를 수립하면서 도용한 데서 비롯한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윤석열이 전형적인 이 전투적(방어적) 민주주의 논리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치며 계엄령을 선포했으니, 이보다 더 지독한 정치 블랙코미디가 또 있을까 싶다. 바로 자신과 지지 세력이야말로 전투적으로 억제되어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적인데 거꾸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으니 말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번 내란 사태 때문에 아예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쓰레기통에 처박히지 않을까 하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엉뚱한 방식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보수 우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 단어를 백안시해 왔더랬다. 그래서 늘 교과서에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마다 ‘자유’를 넣느니 마느니 하는 게 사회적 쟁점이 되곤 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본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보장하며 법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인민주권, 다당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모든 국민의 기본권, 삼권 분립 등이 그 정치체제의 근간이다. 윤석열 이 유신체제 같은 걸 자유민주주의라고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서, 이런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마구잡이로 버릴 일은 아니다. 진보가 추구하는 건 자유민주주의의 하위 범주인 사회적(복지국가적),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이지 자유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더 큰 걱정거리는 이번 내란 사태는 사실, 윤석열이 인식하고 있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위기가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본 고장이라고 할 만한 미국과 유럽에서도 자유민주주의가 커다란 위기에 빠져 있는데, 우리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이런 위기는 무엇보다도 오랜 신자유주의의 영향 속에서 하층 계급의 경제적 안정이 위협받는 가운데 세계화에 따른 이주민의 증가가 그 원인이라고 선동하는 우익 포퓰리즘의 득세 속에 심화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심지어 부정선거 음모론을 펼치고 무장 폭도들이 의회를 공격하도록 해서 사실상 내란을 일으켰던 트럼프가 민주적 투표를 통해 권좌에 복귀하기까지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윤석열이 등장해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게 된 배경에는 문재인 정부 시절 경제적 곤궁과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민주당한테서 등을 돌린 숱한 자영업자와 청년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라는 다른 심각한 문제도 있다. 물론 이번 내란 사태를 일으킨 결정적 원인은 윤석열의 파시스트적 성향과 편향적 유튜브 방송을 비판적으로 걸러낼 수 없었던 지적-인격적 결함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의 그런 성향과 인격적 결함은 결국 정치적 상대를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여기며 극한적인 증오를 증폭시켜 온 유튜버들 때문에 더 강하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유튜버들은 다시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한국 정치라는 배경 위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났다고 해야 한다.  이런 적대주의적 정치 문화는 ‘승자독식’의 원리에 기초한 제왕적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 국회의원 선거제도라는 바탕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 두 가지는 제6공화국 민주주의 체제의 핵심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제도는 모든 정치 과정을 대통령 권력의 획득이라는 목표에 종속시켰고, 그 목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두 개의 큰 정당이 생사를 건 쟁투를 하게끔 유도했다. 그 극한 대결은 결국 상대를 ‘일거에 척결해야’ 마땅한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는 데까지 나아갔고, 윤석열은 자신의 대통령 권력을 이용해서 그런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려 했던 것이다.  윤석열 탄핵이 인용되고 내란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우리는 이제, 단순히 다른 대통령을 뽑는 걸 넘어, 그런 적대주의 정치를 어떻게 완화하고 종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윤석열과 내란 세력을 지지하고 있는 30% 가까운 국민들과 완전히 따로 사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해법은 모든 정치 세력이 서로 갈등하면서도 공동선에 대한 지향 속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게 하는 공존의 토대, 곧 ‘공화국’을 제대로 공화국답게 만들어야 한다. 승자독식에 기초한 제왕적 대통령제와 단순다수결 소선거구제를 그대로 두고는 이런 공화국다운 공화국을 만들 수 없다. 당장이야 윤석열 탄핵을 마무리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겠지만, 공화의 원리를 제대로 구현할 새로운 제7공화국 건설이라는 과제를 마냥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25-01-14 | hrights | 조회: 26 | 추천: 2
강대중 /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국회가 첫 번째 윤석열 탄핵 투표를 하던 2024년 12월 7일 토요일 늦은 오후 나는 대학생 큰 딸과 함께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있었다. 국회 인근 지하철역은 무정차 운행한다는 뉴스를 듣고 버스를 탔다가 마포대교 중간에서 내려 순복음교회 쪽으로 걸어 국민은행 인근에서 집회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탄핵 투표에 동참하지 않고 퇴장한 국회의원 이름을 한명한명 부르는 동안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 사람들 손에, 특히 딸 또래의 젊은 여성들 손에 들린 아담한 막대기가 일제히 찬란한 빛을 발하는 장엄한 광경을 난생처음 보았다. 막대기들은 크기는 비슷했지만, 모양과 색깔은 저마다 달랐다. 도대체 저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저걸 다 구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걸 파는 좌판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 막대기가 뭔지 몰랐다. 진짜 몰랐다. 그걸 ‘응원봉’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어쩌다 뉴스에서 스치듯 본 아이돌 콘서트장 객석을 밤하늘 별처럼 꽉 채우던 그게 핸드폰 카메라 플래시가 아니라 응원봉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언젠가 신승훈 콘서트에 다녀온 아내가 투명 아크릴에 신승훈 이름이 영어로 새겨진 아담한 막대기를 들고 온 게 생각났다. 아내 책상 위에 진열된 그 물건을 한 번 만져보고 전원 버튼을 눌러본 적이 있었다. 이름 위로 맑은 빛이 올라왔다. 그때는 ‘콘서트 기념품으로 이런 걸 다 주네’라고만 생각했었다. 사실 그날 여의도에 가기 전 박근혜 퇴진과 탄핵 집회 때 쓰던 ‘전구 촛불’을 찾겠다고 집 안 구석구석을 좀 뒤지다가 포기했었다. 2016년 겨울 우리 가족은 건전지를 넣는 촛불을 하나씩 들고 주말마다 광화문을 다녔었다. 이듬해 대선을 치르고 그때를 기념할 물건으로 촛불이 제일 좋겠다 싶어 잘 보관했던 기억은 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의도에서 K-POP 노래에 맞춰 흐르는 응원봉 물결을 본 뒤에 그 촛불을 찾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외 언론에선 한국의 탄핵 집회가 K-POP 콘서트장이 됐다는 기사가 넘쳐났다. 찬란한 응원봉 사이에서 엄숙한 촛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질적이었다. 여의도 집회를 다녀온 다음 날 온라인 쇼핑몰에서 응원봉을 열심히 검색했다.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원하는 문구도 넣을 수 있는 응원봉을 발견하고 두 개를 우선 주문했다. 그런데 막상 물건을 받고 보니 여의도에서 보았던 응원봉과 품질 차이가 너무 컸다. 무엇보다도 번쩍번쩍 발산하는 광채가 모자랐다. 뭔가 내가 모르는 응원봉의 세계가 있겠다 싶어 중3 둘째 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찾아봐 달라 부탁도 했다. 그건 50대 남자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응원봉은 아이돌 기획사에서 정품을, 즉 공식 응원 도구를 판매한다. 아이돌마다 응원봉 명칭이 다르다. 블랙핑크 응원봉은 뿅봉이다. 뿅망치를 똑 닮았다. BTS 응원봉은 폭탄을 형상화했기 때문에 아미밤이다. 아미가 폭탄을 휘두른다. 트와이스 응원봉은 캔디봉이다. 어릴 때 먹던 달콤한 캔디의 모양과 색감이 있다. NCT 응원봉은 야광색의 머리 부분이 정육면체라서 응원봉이 아니라 믐뭔봄이다. 어감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얼음을 깨는 것만 같다. 세븐틴의 캐럿봉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장식이 들어있다. 최신 세대 캐럿봉은 다이아몬드를 다른 모양으로 교체할 수도 있다. 뉴진스의 빙키봉은 두 갈래 모양이 신선하고 귀엽다. TXT의 모아봉은 흔들 때마다 색상이 변경되는 컬러 쉐이킹 모드가 있다. 그밖에 아이브의 아이해봉, 르세라핌의 핌봉, 스트레이키즈의 나침봉 등등 응원봉마다 모양과 색깔에 개성이 넘쳤다. 대개 응원봉은 블루투스로 스마트폰 앱과 연결해 LED 색상을 자유자제로 변경할 수 있다. 콘서트장에선 모든 응원봉을 중앙제어할 수도 있다. 응원봉은 한마디로 신박한 물건이었다. 아쉽게도 대부분 응원봉은 공식 판매 사이트에서는 품절 상태였다. 몇몇 응원봉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정가보다 훨씬 비싸게 팔고 있었다. 이번 집회 참가자의 인구학적 특징이 사오십대 남성과 이삼십대 여성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사오십대 남성의 감성이 촛불에 멈춰 있었다면, 이삼십대 여성은 응원봉을 들고 나와 집회 풍경을 확 바꿨다. 응원봉의 기세가 집회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미국 Pew Research Center의 구분에 따르면, 이삼십대 여성은 밀레니얼 세대(1981년부터 1996년까지 출생자)와 Z세대(1997년부터 2012년까지 출생자)에 속한다. 이들은 베이비붐 세대(1946년부터 1964년까지 출생자) 일부와 X세대(1965년부터 1980년까지 출생자)의 자녀 세대이다. 한국에서는 MZ세대라고 묶어 부르며 부모 세대인 86세대나 X세대와 경험과 생각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걸 강조하기도 한다. MZ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이자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에 성장한 첫 세대이다. 이들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부모 세대가 1990년대 말 IMF 사태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며 자라기도 했다. 이 세대의 표현하는 다른 말인 욜로족, 카푸어 등에서 볼 수 있듯 미래보다는 현재의 행복에 더 집중하는 특징도 있다. 물론 이런 몇 가지 피상적인 말로 응원봉을 든 이삽십대 여성을 다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들이 변화의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주도하면 더 많은 변화가, 더 큰 변화가, 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이들이 앞세대를 압도하는 시대가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열리길 기대한다. 그래서 “미래세대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나 지어내는 엉뚱한 무리와 세대 따위는 뿅봉, 모아봉, 빙키봉, 믐뭔봄, 아미밤으로 “일거에 척결하고”, 아이해봉, 나침봉, 핌봉, 캐럿봉, 캔디봉으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를 만들면 좋겠다.
2025-01-08 | hrights | 조회: 158 | 추천: 3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다시 광장의 시간이 왔다. 지난 1월 4일 서울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체포·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대행진’에 참가했다. 겨울바람이 차가웠지만 그 바람은 저마다 들고나온 재치 넘치는 깃발을 하늘 높이 올려주고 있었다. 노동운동단체나 여성운동단체 같은 전통적 진보단체 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 자치회, 대학 취미 써클, 동물권 운동단체, 장애운동 단체, 이주민 단체의 깃발도 보였다. 발언과 노래가 이어지는 가운데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무대에 올랐다. 암 투병 중이라 수척했고 흰머리도 늘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 힘이 있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해고 철회를 위해 고공농성 중이었던 2011년 초여름 희망버스를 타고 연대하러 부산으로 간 적이 있었다. 85호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버텨낸 김진숙은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셨냐고 하는데 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고. 강철의지를 지녔을 것 같은 투사의 입에서 나온 의외로 보드라운 말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광화문 집회에서 김진숙은 이렇게 발언했다. “페미니스트가 대통령이 되고, 성소수자가 총리가 되고, 성폭력 피해 여성이 경찰청장이 되고, 알바 노동자가 노동부 장관이 되고, 사고 피해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이 되고, 전장연이 복지부 장관이 되고, 전농이 농림부 장관이 되고, 전쟁없는 세상을 위해 싸워왔던 이들이 평화부 장관이 되는 게 민주주의고 진짜 대의정치 아닌가.” 이 발언은 지금 광장에서 외치고 있는 시급한 과제를 달성한 다음의 세계, 탄핵과 처벌 이후 도래하게 만들어야 할 세상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김진숙의 발언에 화답하듯, 한 여성 청년은 자유발언 무대에 오르며 자신을 “미래의 대통령”이라고 소개했다. 여동생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 집회에 왔다고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 이것이 응원봉 세대를 움직이는 추진력이었다. 광장에 유난히 20대와 30대 여성이 많이 보인다는 보도는 사실이었다. 집회 참가자가 모두 여성은 아니었지만, 자유발언을 하는 사람의 80% 이상은 여성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20, 30대 여성들의 정치적 각성, 여성의 정치적 주체화라고 말하지만 틀렸다. 강남역 사건, N번방 사건을 거치면서 여성들은 늘 광장에서 외쳐 왔다. 더 길게 보면 노동의 현장, 노동운동의 현장에도 늘 여성이 있었다. 그들의 외침을 사회가 귀 담아 듣지 않았고 눈여겨 보지 않았을 뿐이다. 2011년 김진숙의 농성에 연대하러 부산으로 갔을 때 내가 탔던 희망버스는 퀴어 단체에서 마련한 버스였다. 퀴어 커플이 여럿 타고 있었다. 여느 연인들처럼 손깍지를 끼고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넘쳤다. 퀴어 커플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미소지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겨울의 광장에는 남태령에서도 광화문에서도 한남동에서도 성소수자의 무지개 깃발이 많이 보였다. 자유발언에 앞서 퀴어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정체성을 밝히는 경우도 많았다.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고 어떤 억압을 당했는지 말하고 억압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이야기했다. SNS를 통해 왜 탄핵과 퇴진, 정권교체라는 단일대오를 흐리는 발언을 하냐는 불만을 말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적어도 광장에서 “닥쳐라, 내려와라” 같은 혐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는 다양성이 단지 형식적 다양함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길에서 중요한 변화로 읽힌다. 사진 1. 광화문 집회의 무지개 깃발. 저자 촬영 1984년 영국 웨일즈의 광부들은 대처 정권의 탄광 폐쇄에 맞서 장기 파업을 이어갔다. ‘전국광산노동자연합(National Union of Mineworkers, 이하 NUM)’은 노동운동의 전통이 오랜 영국에서도 긴 역사를 자랑하는 강성 노조였다. 하지만 파업에 강경한 대처 정부는 은행 계좌를 동결했고 길어진 파업에 노조원들은 파업기금을 모을 여력도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부들이 35주(245일) 동안이나 파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회적 연대의 힘이 있었다. 영국 전역에서 광부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대규모 지원 네트워크가 꾸려졌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은 런던의 레즈비언과 게이들이 사우스 웨일즈 덜레이스 지역 광부들과 연대한 것이었다. 마크 애쉬튼(Mark Ashton)과 마이크 잭슨(Mike Jackson)이라는 두 명의 게이 남성은 1984년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이하 LGSM)’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연극 공연, 콘서트, 도서 판매, 기부를 통해 총 22,000파운드(현재 화폐가치로 약 120,000파운드. 한화로 약 2억)의 기금을 모아 전달했다. LGSM은 매주 연대 시위를 벌였고, 버스를 타고 덜레이스 지역의 광산촌을 방문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사우스 웨일스 블래넌트 롯지의 광부 80명은 이듬해 런던 프라이드 행진에서 LGSM과 함께 행진했다. 사진 2. 1985년 런던 프라이드의 LGSM 배너 출처: Diarmaid Kelliher, “Solidarity and Sexuality 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1984-5,” History Workshop Journal, Volume 77, Issue 1, Spring 2014, Pages 240–262, https://doi-org-ssl.oca.korea.ac.kr/10.1093/hwj/dbt012 사진 3. 1985년 런던 프라이드의 블래넌트 롯지 배너 출처: https://queerwelsh.tumblr.com/post/185933853210/on-the-29th-of-june-1985-lgsm-and-welsh-miners 광부와 게이의 연대가 쉽게 이뤄진 건 결코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편견이 두터웠고 완전히 극복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이들은 오해와 우려 사이를 비집어 공감과 이해를 위한 틈새를 내었고, 서로에게 기꺼이 배웠다. 주말 동안 광부들의 집에 초대받은 게이 활동가들은 그들과 함께 노동자의 권리와 동성애자의 권리에 대해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토론했다. 게이들은 광부들이 성차별주의자 반동성애주의자 마초일 것이라는 편견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고, 광부들은 게이들이 그저 편하게 놀고먹는 변태들이 아니라 일자리가 필요한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기화된 파업을 진압하는 경찰은 합의된 피켓 라인을 넘어 탄광촌을 습격해 폭력을 자행하고 출입을 통제하며 탄광촌 공동체의 와해를 노렸다. 게이들에게 위기에 처한 광부 공동체는 남의 일로 보이지 않았다. 펍과 클럽을 급습한 경찰에 의해 동성애자 공동체가 무너지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공동체 같은 건 없다고 오직 개인만이 있을 뿐이라고, 어쩔 수 없으니 참고 견디라고 국민들을 짓누르던 대처 시대에 각자의 공동체가 무너지는 모습 앞에 광부들과 게이들은 연대했다. 이 이야기는 2014년 영화 〈프라이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가슴 벅찬 LGSM와 NUM 연대의 기록은 맨체스터의 민중사박물관(People’s History Museum)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고 노동사의 유산이 되었다. 12.3. 불법 계엄과 내란 획책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으며, 법치주의와 보수 엘리트 집단의 민낯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전 세계적인 극우와 파시즘의 등장과 이에 편승한 극우 혐오 세력도 문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익 추구에만 혈안이 된 권력 집단, 무능하고 부도덕한 엘리트 집단, 거기에 혐오 세력의 극우 정치 집단화까지. 한국 사회가 당면한 뿌리 깊은 혐오의 문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욱 골이 깊어질 것이다. 광장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탄핵하라고 외치던 한 목소리는 사상적 입장에 따라,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하는 정당과 지도자에 따라 나뉘고 갈리고 싸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자. 민주주의에 따르게 마련인 싸움은 소모적인 정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싸움의 상대방에 대한 혐오는 민주시민의 무기가 될 수 없다. 정의를 향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판단 기준이다. 저마다의 권리는 모두 소중하다. 시민들의 권리와 권리가 충돌할 때, 소수자들의 권리가 부딪칠 때 무엇이 옳은가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이 정의로운가가 되어야 한다는 진실을. 이 겨울, 일촉즉발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 용기를 낸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불법 계엄을 막으려고 한밤중에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 계엄 군용차를 몸으로 막은 시민들, 계엄 해제 의결을 위해 담을 넘은 국회의원들, 계엄군의 단전 단수에 대비해 발전기를 사수한 국회 사무처 직원들. 시각장애인인 국민의 힘 김예지 의원은 계엄의 순간 아무것도 듣지 못할 청각장애인을 떠올렸고 당론을 거스르고 탄핵 찬성 투표하는 용기를 내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렬 대통령의 체포 영장을 법대로 하루빨리 집행하라며 모인 시민들은 한남동 대로에서 밤새 눈을 맞으며 탄핵과 체포를 외쳤다. 탄핵과 정권교체를 넘어 사회 대개혁으로 가는 길은 험난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억할 역사가 생겼다. 한낱 돌덩어리 금속 덩어리에 불과한 동상이나 기념비 따위의 역사가 아니다. 그날 그 광장에 있지 않았더라도 공감하는 모두에게 빛나는 연대의 기억과 약속이 새겨졌다. 그것은 1984년 영국 광부와 성소수자가 함께 행진한 기억이고, 2024년 겨울밤 남태령에서 트랙터와 응원봉이 만난 기억이다. 모두의 평등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누구도 남겨두고 가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과 기억을 잊지 않는 한 우리는 이미 이겼다.   사진 4. 전장연 만평,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힘 출처: https://www.facebook.com/share/p/15U5R5caaa/
2025-01-08 | hrights | 조회: 911 | 추천: 13
윤동호 /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검찰이 아주 오랜 기간 보여준 사건 처리 행태는 매우 편파적이고 자의적이며 정치적이다.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법과 원칙의 의미는 고정적이지 않다. 이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관점에서 법과 원칙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유·무죄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법원의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국회의 탄핵 소추 의결로 직무가 정지된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 재직 시절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우며 정치적 존재감을 키울 때 검찰은 든든한 후원자였다. 아예 대놓고 정치권과 교류하기도 했다. 검찰에 우호적인 정당 관계자에게 검찰에 비후호적인 정치인의 고발을 사주한 후 이를 받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고발사주사건이 그렇다.   최근 고발사주사건의 피고인 손준성 검사장에게 항소심이 1심과 달리 무죄를 선고하면서 더 ‘윗선’인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 등 상급자의 관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윤 대통령 탄핵을 무산시켰던 국민의힘의 한동훈 전 대표는 당시 부산고검 차장검사였다. 윤 정부가 들어선 이후 검찰은 완전히 무너졌다. 국민의 검찰이 아니라 윤 대통령 부부의 검찰이었다.    검찰은 4년을 끌며 수사해오던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불기소결정을 했다. 검찰은 증거와 법리에 따라 숙고한 결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범의 진술과 사건 정황을 보면 설득력이 없다. 전두환·노태우의 12·12 쿠데타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기소할 수 없다”고 결정한 전례를 보면 믿기 어렵다.   윤 정부의 검찰이 보여 준 납득할 수 없는 사건 처리가 더욱 노골적이고 심각해져서 국회가 서울중앙지검장을 비롯한 지휘부 검사들에 대한 탄핵소추를 의결하자 오히려 검사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하고 증거와 법리에 따라 기소하였으므로 탄핵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선 검사의 집단적 반발은 집단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국가공무원법 제66조 위반이다. 검찰은 세월호 참사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교사들을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기소하여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같은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처벌받고 검사들은 수사조차 받지 않는 상황이 검사들의 눈에는 법과 원칙에 부합한가.   지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성남시의 대장동과 백현동 개발사업과 관련하여 허위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검찰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공직선거법의 허위사실공표죄로 기소하여 결국 1심에서 유죄를 받아냈다. 백현동 개발사업 수사 과정에서 압수한 김진동씨의 휴대전화에서 이 대표와 통화한 녹음 파일이 발견되자 이 대표를 위증교사혐의로 기소까지 했으나 법원에서 무죄가 나왔는데, 이는 별건수사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1년 12월 관훈클럽 토론회에 나와 당시 대선 후보로서 “대장동 개발사업에 부산저축은행이 부당대출을 해주는 과정에서 조우형씨가 10억이라는 대출커미션 받은 것을 알았고 거기에 대한 일정한 진술이나 증거가, 단서라도 있었다고 한다면 그거는 봐줄 수가 없는 것”이라며 봐주기 수사 의혹을 일축했다.   이 발언과 관련 대선 후보 검증 차원에서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을 받는 김만배씨가 “윤석열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2과장이 대장동 대출브로커 조씨의 범죄를 덮고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무마했다”고 주장하는 인터뷰가 2022년 3월 6일 뉴스타파에 보도되자, 검찰은 오히려 김만배씨와 기자 및 뉴스타파 대표를 윤 대통령에 대한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로 강제수사 후 기소하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이 죄는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제70조 제2항의 범죄로서,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요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후 조씨는 알선수재죄로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 사실의 공익성이 인정되면 비방 목적이 부정되어 처벌할 수 없다. 공익성과 비방 목적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죄는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반의사불벌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없더라도 공소제기를 할 수 있다. 고소가 없더라도 검사의 기소는 적법하다. 이와 달리 친고죄는 피해자의 명예보호에 주된 목적이 있는 범죄로서, 피해자의 고소가 없으면 기소가 적법하지 않다. 그러나 실무에서는 반의사불벌죄일지라도 기소하기 전에 피해자의 처벌의사를 묻는다.   검찰이 김만배씨와 그 관련자를 정보통신망법의 명예훼손죄로 기소하면서 윤 대통령에게 처벌의사를 묻지 않은 것은 실무의 원칙에 어긋난다. 또한 정보통신망법의 명예훼손죄에 대한 검찰의 수사 자체도 적법성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검찰청법이 규정한 검찰의 수사권의 대상에 명예훼손죄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선 후보자의 발언을 검증하기 위한 보도로서 공익성이 인정되어 비방 목적도 인정되기 어렵다.   검찰력의 한계를 인식한 윤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서 군사력과 경찰력을 동원한다. 그런데 이는 형법의 내란죄에 해당한다. 이 죄의 요건은 간단하다.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면’ 성립한다. 우두머리는 사형이나 무기형으로 처벌된다.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해야 기수가 아니라 폭동을 일으키면 기수다. 목적을 달성하면 성공한 쿠데타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쿠데타일뿐, 모두 기수다.   윤 정부에서 검찰이 보여준 모습으로는 12·3 비상계엄 사태를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수사하겠다는 검찰의 말도 믿기 어렵다. 윤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공수처에 형식적으로만 넘긴 채 윤 대통령에게 증거인멸의 시간을 부여하고 있는 검찰에 어떻게 믿음이 가겠는가. 더욱이 공수처는 윤 대통령에 대한 기소권이 없다.   오히려 검찰에 내란죄의 수사권이 없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가 불순하다. 검찰청법은 수사권 있는 직권남용죄(본래범죄) 수사 중 인지한, 그와 직접 관련된 범죄(관련범죄)를 수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본래범죄 수사 중 관련범죄를 수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 관련범죄(내란죄)를 수사하기 위해 본래범죄(직권남용죄)를 수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다. 내란죄(본래범죄) 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직권남용죄가 관련범죄인 것이다.   수사절차의 위법이 12·3 비상계엄 사태의 우두머리와 관련자에 대한 처벌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우려한다.
2025-01-02 | hrights | 조회: 83 | 추천: 5
이윤 / 경찰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경찰은 대체로 수동·적극적이었다. 정권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지만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까지도 원죄가 되어 수치와 참회로 이어지고 있다. 해방 후 친일파와 일제 부역자를 처벌할 목적으로 제헌국회가 설치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이승만의 지시로 경찰이 습격하였는데, 반민특위 특경대원들을 폭행·체포·감금하는 등 경찰은 반민특위 해체의 주된 역할을 했다. 그때 민족 반역자들을 처벌하고 사회·정치 무대에서 몰아냈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평등한 사회가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1949년 공산당과 아무런 관련없는 사람까지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기합, 체벌, 반공교육을 받게 하였을 뿐 아니라 전쟁 중 학살되게 한 것에도 경찰이 가담하였다. 4.19 혁명 당시에 김주열 열사에게 최루탄을 발사하여 사망하게 한 것도,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한 것도 경찰이었다. 4.19 혁명의 시발이 된 3.15 부정선거에도 수동·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72년 10월 유신 체제에서 전체주의 독재에 반대하는 교수, 학생, 언론인, 종교인 등 민주인사 탄압에 가담한 것도, 1980년 전두환 체제하에서 사회악 일소를 표방한 삼청교육대 수용자 검거 시 실적 경쟁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에게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을 가한 것도, 1987년 박종철 열사를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경찰이었다. 반면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향해 발포하라는 전두환 신군부의 명령을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해야 한다”라며 거부하고, 경찰 총기를 회수하고, 시위대에 부상자 치료 및 음식 등을 제공한 안병하 치안감 같은 분도 있으나, 이런 결기는 흔하지 않다. 사진: 연합뉴스 1991년 경찰청을 내무부 외청으로 독립시킨 이유는 경찰에게 정권의 위법·부당한 지시에 따르지 말고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정치적 중립’을 지키게 하라는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2024년 12.3 비상계엄에서도 경찰은 다시 정권의 명령을 받아 수동·적극적 역할을 했다. 국회를 방패와 몸, 차벽으로 막아 국회의장을 포함한 국회의원의 출입을 통제하였고, 계엄군은 들여보냈다. 오히려 TV 속 특전사 군인들은 수동·소극적으로 보였다. 시민들과 보좌진에 의해 이리저리 밀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에 ‘계엄을 이리 어설프게 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 본래의 경찰 임무는 생명과 신체에 위해가 가지 않도록 군인과 시민을 분리하고,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 정당하게 직무를 수행하도록 보호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실망스럽고 부끄럽고 안타깝고 죄송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아래와 같은 중요한 순간순간에 경찰청장과 서울경찰청장이 경찰다운 결정을 했다면, 많은 국민이 불안과 공포 속에 여러 날을 뜬 눈으로 지새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1. 삼청동 안가 계엄선포 3시간 전 삼청동 안가에서 계엄 관련 지시와 국회 포함 10여곳 장악할 기관이 적힌 종이를 받았을 때, 즉각 주동자를 내란예비죄로 현행범체포하여 수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내란죄가 된다는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고, 자신을 임명해 준 사람을 차마 매정하게 체포까지는 못 할 수도 있으나, 최소한 이러면 안 된다고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했어야 한다. #2. 경찰청장 공관 또는 사무실 경찰청장은 안가 회동에서 돌아와 계엄지시 종이를 공관에서 찢었다고 했는데, 얼마 후 계엄이 선포될 중요한 시기에 공관으로 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아마 사무실에서 계엄의 정당성과 계엄 후 경찰이 해야 할 일에 대해 관련 기능 참모들과 논의 및 지시를 했을 것이다. 이때 헌법 제77조와 계엄법을 검토했을 텐데, 요건에 맞지 않아 위헌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인지하였을 테니, 이때라도 국회통지든 기자회견이든 위 사실을 온 국민에게 공지하여 국헌문란의 위급한 상황과 계엄에 의해 예상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했다. #3. 계엄선포 직후 계엄 실행이 확인되었으면 혼란 속 인명피해 예방 조치를 취해야 했다. 군의 국회 장악 및 국회의원 체포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국회와 의원들을 보호하고, 시민과 군인이 충돌하지 않도록 분리시키는 조치를 지시하고, 내란을 예비하고 실행한 관련자들 정보를 국가수사본부에 제공하여 체포하고 수사하게끔 해야 했다. 그랬으면 경찰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국민이다.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받아 국가를 운영하는 피고용인이다. 피고용인이 주권자가 정한 약속이자 규칙인 헌법을 위반하여 홀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려 한 것은 주권자 의사에 반하여 독재정권 수립을 시도한 내란이고,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적이다. 경찰은 민주주의의 적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지킬 임무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찰에게 원죄에 대한 수치와 참회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2024-12-18 | hrights | 조회: 137 | 추천: 10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우리의 역사에 이런 날이 다시 올 것이라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를 뒤늦게나마 단죄하며 민주주의 발전의 큰 교훈을 얻었고, 더 이상 군인의 총칼을 앞세워 권력 찬탈 혹은 지속불가능한 권력을 유지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짓임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 민주주의는 성숙하게 가치화, 제도화를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절대 다수 시민들도 알고 있고, 조선일보도 알고, 보수정치인들도 알고, 군인과 경찰들 또한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이가 있었습니다. 입버릇처럼 “확 계엄해버릴까”, “내가 육사에 갔으면 쿠데타를 했다” 등 발언을 내뱉곤 했다던 이였습니다. 게다가 그가 사사로운 이해관계 및 비뚤어진 가치를 앞세워 무소불위로 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우리 사회에 크나큰 비극이었습니다. 비상계엄령 선포, 곧 이은 해제 똑똑히 목도했 듯 윤석열 대통령은 12월 3일 밤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국회를 통제하고 대한민국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 4월에 그랬듯, 1980년 5월 광주, 1987년 6월 그랬듯 그저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민주주의 가치를 결코 잊지 않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계엄군이 총칼로 막아선 국회로 모여든 시민들은 맨몸으로 장갑차에 맞섰고, 계엄군의 총부리를 부여잡으며 민주주의를 지켰습니다.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 정부여당 소속 의원 18명을 포함한 190명 국회의원이 위헌 위법인 계엄령 해제 요구안을 통과시킨 덕에 6시간 만에 역사의 반동을 1차적으로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돌발적인, 혹은 의도적인 물리적 충돌과 끔찍한 유혈 사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을 터입니다. 상상만으로도 섬뜩한 일입니다. 단 6시간의 일탈은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그 후과는 너무도 큽니다. 국헌 문란으로 한국 사회의 법질서 체계를 무너뜨렸고, 외교안보적 측면에서 국가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외국 자본의 이탈을 조장하며 주가 폭락과 '패닉 셀코리아' 확산 및 환율과 물가의 폭등을 초래했습니다. 정치적 불확실성과 경제적 불안정성으로 인한 피해는 수치로 환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클 수밖에 없고, 이는 고스란히 국가와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이를 만회하고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때입니다. 헌정질서를 부인하는 정부·여당 그 첫 걸음이 즉각적인 대통령 직무정지겠죠. 하지만 7일 저녁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정부여당 의원들의 외면으로 국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대신 한덕수 총리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질서 있는 퇴진’을 준비하며 ‘국정을 공동 운영’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헌법과 계엄법, 형법 각종 법을 모두 위반한 내란의 최고 책임자, 즉 수괴의 혐의를 비호하더니 또다른 내란에 준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무런 법적 권한도 없이 여당 대표가 국정 운영을 하겠다고 나서니 ‘제2의 내란’이라는 반발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윤 대통령은 그 다음날 국정원 1차장, 행안부 장관 등 여러 권력의 요직에 대한 인사권을 버젓이 행사하고 있습니다. 국헌을 문란하게 하고 내란을 획책한 윤석열씨가 대통령직에 그대로 있는 것은 헌정 질서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또한 대통령의 법적 지위와 역할을 여당 대표 혹 총리 등 누군가 몇몇이 임의로 배제하거나 대리하는 것 또한 헌정 질서 부정입니다. 군통수권자 윤석열, 계속되는 위협 가장 무서운 일은 총리와 여당이 질서 있는 퇴진 운운하는 동안에도 내란의 수괴가 우리의 군 통수권자라는 사실입니다. 제2의 계엄령은 그 자체도 우려스럽지만, 진짜 ‘독재 만능 치트키’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분단 상황입니다. 판단력과 이성을 상실한 대통령이 정전상태인 남북 사이 국지적으로라도 무력 충돌을 일으키거나 군사적 충돌을 조작해 어떻게든 준전시 상태로 몰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계엄령을 낼 수 있는 근거인 ‘전시, 사변 또는 그에 준하는 사태’를 맞게 되는 것이겠지요. 계엄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 되겠죠. 이것이야말로 상상조차 끔찍한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날 밤 이례적으로 전방 지역인 양구군청에 계엄군이 투입된 것은 이러한 계획이 일찌감치 서있기 때문이라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습니다. 군통수권자 윤석열씨는 최소한의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임을 잇따라 자인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대통령은커녕 일개 시민으로서도 턱없이 모자란 민주주의 가치, 역사의식을 갖고 있음을 만천하에 확인시켜줬습니다. 종북 세력 척결을 계엄령 선포의 명분으로 삼을 정도로 극우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니 국가와 민족의 명운에 대한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하는 것이 절박합니다.
2024-12-11 | hrights | 조회: 161 | 추천: 11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정치는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 생명체의 기본 특성이 ‘자기 생산’(autopoiesis)이라고 한다. 이는 식물에도 해당한다. 그리고 영혼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영혼을 가진 자는 자기의 존재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활동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영혼이 없는 셈이다. 우리는 영혼이 없는 자를 인간이라고 하지 않는다. 더욱이 영혼을 갖더라도 제대로 갖추어야만 인간이다. 유전인자에 따라 인간의 몸을 지녔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인 것 같지만, 인간이라 일컫기에 무척 난감한 자들도 있다는 이야기다. 생명체는 반드시 외부의 환경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반응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온갖 형태의 생명이 나뉜다. 수준이 낮은 생명체일수록 주어지는 자극에 반응하는 속도가 빠르다. 오로지 본능으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또 그럴수록 자신이 지각하는 공간의 범위가 좁고, 시간의 길이도 짧다. 최고로 복잡하고 그래서 수준이 높다고 여겨지는 생명체인 우리 인간의 경우, 본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자극의 반응 간의 속도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느리다. 그만큼 삶의 공간의 범위와 시간의 길이가 길다. 말하자면 다양한 형태로 폭과 깊이를 갖춘 기억 능력을 갖추고서 그에 따라 본능 외에 요컨대 지성과 상상력을 발휘한다. 편의상 동물과 인간을 본능과 지성의 배분 정도로 구분해서 생각해 본다. 본능적일수록 동물에 가깝고 지성적일수록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해 본다. 지성적일수록 행동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 범위가 넓고 다양한 형태를 띤다. 그만큼 행동의 종류도 많고 행동에 관계하는 변수들이 많고,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변수가 많은 행동도 있고 변수가 적은 행동도 있다. 인간 역시 동물이다. 그래서 동물과 마찬가지로 먹고 싸고 자고 입는 등, 이른바 생물학적인 단순한 말하자면 변수가 적은 행동을 한다. 변수가 많은 행동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수로 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고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이 하는 행동 중 가장 변수가 많고 그만큼 고려해야 할 조건들이 많은 행동이 바로 정치다. 정치는 나의, 나에 대한,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다. 정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하는 행동을 통해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인간 고유의 삶의 영역들이 마련된다. 이 영역들이 서로 얽혀 영향을 미치는 건 물론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호 작용 중에서도 중심에 놓여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치이다. 말하자면, 다른 영역의 행동에 비해 정치적인 행동이야말로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들의 삶과 존재를 결정한다. 그런 만큼 정치적 행동은 가장 변수가 많고 그만큼 골똘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동이다. 인간 삶의 여러 변수를 최대한 놓치지 않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데서 이른바 덕이라고 일컫는 탁월함이 성립한다. 전통적으로는 분별, 절제, 정의, 용기 등을 덕으로서 꼽고 이를 총망라한 덕을 지혜라고 일컬어 왔다. 이는 그 누구보다도, 예를 들어 철학자나 종교가들보다 정치하는 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다. 동물의 정치를 당장 끝내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 누가 과연 이러한 정치의 덕을 더 많이 갖추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가장 큰 문제다. 정치의 핵심은 흔히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는 바, 올바른 법의 제정이고, 올바른 법의 집행이고, 위법 여부에 대한 올바른 법의 판단이다. 이들 행위는 정적으로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동적으로는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행위다. 국가는 각자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려야 할 인간 활동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만든 공동체다. 주권이 왕이나 소수의 귀족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있는 민주 공화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정치적인 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참여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그 권리와 의무는 당연히 법, 특히 기본법인 헌법과 현행법인 각종 법률을 통해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투표를 통해 우리를 대표해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의원들을 뽑고 법 집행을 책임지는 대통령을 뽑는다. 그런데 과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처럼 정치 대리인들을 선출할 자격과 자질을 지녔는가? 이에 대한 의심은 우리가 뽑은 정치 대리인들이 얼마나 어떻게 정치를 올바르게 해서 얼마나 바람직한 성과를 많이 내는가, 하는 그 결과에 따라 증폭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한다. 국민 개개인은 자신의 평가와 판단에 따라 정치 대리인들을 선택하여 지지하고 투표한다. 그 성향들을 결집해 정치 집단인 정당을 만들고 정당에 가입하고 지지한다. 각자 자신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 대리인들을 선출할 자격이 있고,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정치 대리인들을 선출할 자격이 없다고 내심 평가한다. 투표를 통해 이러한 선택적인 평가와 판단의 결과가 다수결에 따라 결정되면 어떤 이유에서건 모두 따라야 한다. 정치적인 판단에 있어서 개개인의 평가와 선택이 무조건 전체적으로 옳을 수는 없다.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최대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한다는 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설사 그렇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한다고 할지라도 그 판단이 옳다는 건 결국 자신의 판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표 결과는 법에 정해진 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특히 국가의 법 집행의 행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을 선출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통령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으려면 국민 대다수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가 선출의 과정에 국민 대다수를 크게 속여 선택을 위한 평가와 판단을 근본적으로 왜곡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속이고 왜곡했다는 사실을 국민은 어떻게 알고 중시하게 되는가? 그의 통치 행위를 통해서이다. 자신에게 위임된 대통령의 국가권력을 선용하면 설사 선출 과정에 속이고 왜곡한 행위가 있더라도 국민은 굳이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경제를 잘 일으켜 국민 민생과 복지의 수준을 높이고, 외교를 잘 해서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강화하고, 교육과 문화의 다양성과 폭과 깊이를 더해 국민의 정신적 삶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크게 힘쓰는 데 진력해 곳곳에서 성과를 낸다면 그 누가 굳이 그의 과거를 문제 삼겠는가. 그러나 너무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선출한 윤석열 대통령은 정확하게 거꾸로 가고 있다. 국민을 철저히 속인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국민을 속였다는 사실을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그래서 어쩔래? 어디 할 테면 해보라.’ 하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내보인다는 점이다. 21번씩이나 국회에서 의결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을 크게 해 ‘우리가 당신에게 속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정신 바싹 차리고 잘하시오.’라는 경고를 보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국민이 자신을 배반한 양 오히려 분노에 차서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 결국에는 국정 지지율이 20%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는데도, ‘나는 잘못한 게 없다’라는 핑계로 일관하고 제대로 된 반성의 기미는 전혀 내보이지 않는다. ‘나를 대통령으로 뽑을 때는 언제고 왜 이렇게 내팽개치려고 하느냐. 나는 내 길을 알아서 간다.’ 하는 식이다. 국민은 이러한 그의 심보를 짐작하면서 그게 영 틀린 말은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자책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욱 미칠 지경이다. 검찰권력을 통한 통치행위 대통령 윤석열 씨는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죄책이 많다. 그중 가장 큰 죄책은 국민 대다수의 의식을 암암리에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한번 기소당하면 패가망신 하기 마련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이기에 조금이라도 악용했을 경우 검찰의 행위가 얼마나 큰 부작용을 가져오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검찰의 중립적인 독립성을 위해 검찰을 더욱 삼가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정확하게 그 반대다. 그 아래에 불안과 공포를 숨기고 있는 자존심과 위세를 부리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정적 죽이기를 위한 통치 행위의 핵심 수단으로 삼아 마음껏 검찰 권력을 휘두른다. 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잘 알기에 더욱 삼가 존중해야 할 검찰을 통치 행위의 핵심 수단으로 삼아 휘두르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놈 어디 있겠어. 끝까지 물고 늘어져.’ 하는 강압을 행사한다. 아울러 행정 관료들은 물론이고 독립성을 보장해 주어야 할 각종 감시 기구의 수장들, 그리고 여당의 지휘부를 자신의 호위 무사로 만들어 채운다. ‘지록위마’의 손가락질로 그들에게 위선과 허위와 아부를 몸에 배도록 한다. 가장 염려스러운 건 그럼으로써 인간 삶에서 지성에 따른 정의를 향한 분별과 용기, 그에 따른 절제와 겸양의 덕을 추구하는 게 오히려 위선이고 악덕인 양 호도하고 그 대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 본능에 따른 행위야말로 가장 진실한 인간 됨의 길인 양 몸소 보여주면서 강압한다는 사실이다. 즉 살기 위해서는 인간이어서는 안 되고 동물이어야 한다고 암암리에 강요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어이가 없다. 워낙 중요한 대통령의 책임을 지고 있기에 국민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는 무능도 결단코 용서할 수 없거니와, 거기에 더해 거짓으로 일관하는 불성실에다 그 불성실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방책인 양 무의식을 퍼뜨리고 있으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법적인 조치를 통해 끌어내려야 한다. 그나마 자진해서 하야한다면, 비록 국민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반성에 이어 참회한 것으로 평가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향후 보복의 정치를 마감하고 조화와 평화의 정치를 향한 길을 여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사는 길일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사는 길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분노와 복수심을 잠재웠으면 애원하는 심정으로 바라 마지않는다. 이제 우리가 노벨 평화상에 이어 노벨 문학상을 받지 않았는가.  
2024-12-04 | hrights | 조회: 112 | 추천: 6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연말이면 지역화폐 정부 지원과 효과에 대한 정치적 논란이 몇 년째 반복되고 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전자는 새로울 것 없이 되풀이되는 논란 때문이고, 후자는 잘못된 정보가 사실처럼 확산되기 때문이다. 먼저 살펴보자. 지역화폐는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한다? ‘지역화폐 정부 지원은 재정 여력이 충분한 지자체에 더 많은 국가 재원이 투입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마침 JTBC가 팩트체크를 하였다. 결론은 ‘대체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였다. 그대로 인용해 본다. 현행 지역사랑상품권법 제15조 1항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지역사랑상품권의 활성화를 위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지역사랑상품권의 발행·판매·환전 등 운영에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행안부의 내부지침에 따르면 현재 지역사랑상품권에 대해선 정부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규모에 따라 지원 규모를 3개 유형으로 분류하여 정한다. (아래 <표1> 참조) <표1> 지자체별 차등 지원 분류 예를 들어 서울과 경기, 성남 화성 등 재정 자립도가 높은 곳엔 지원하지 않고, 일반자치단체는 2%, 그리고 인구감소 지역엔 5%를 지원한다. 상대적으로 재정 상태가 건전한 곳에 대한 국비 지원 규모를 줄이고, 지역 인구가 적어 세수입이 적은 곳엔 좀 더 많은 지원을 해 온 것이다. 재정자립도가 낮아도 국비지원을 받아 지역사랑상품권을 발행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활용할 수 있다는 형평을 갖춘 지원체계가 이미 적용되고 있다. 지역화폐는 지자체 고유권한이라 정부 지원을 할 수 없다? 이 주장은 지역화폐 정부 지원 불가 논리의 핵심이었다. 역시 JTBC가 팩트체크를 했다. 결론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였다. 역시 그대로 인용해 본다. 그동안 정부는 지역화폐의 정부 지원이 지자체의 지역사랑상품권 발행을 강제하고, 스스로 결정해서 추진해야 할 자치사무를 통제하는 것으로 봤다. 그 근거로 지방재정법 제20조에서 '지자체의 관할구역 자치사무에 필요한 경비는 그 지방자치단체가 전액 부담한다'는 내용을 들고 있다. 지방자치권에 관한 헌법 조문을 살펴보자. 헌법 제117조 제1항 '지방자치단체는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같은 조 제2항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는 법률로 정한다'고 정하고 있다. JTBC가 헌법을 가르치고 있는 법률가에게 문의한 결과, 지방자치단체의 자치권은 고유한 권한이 아니라 헌법 영역 내에서 국가로부터 나오는 권력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학계에서도 대부분 인정된 학설이며 지역적 사무에 대해 자치입법권이 우선한다는 주장은 소수라고 덧붙였다. 즉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규정은 헌법에 의한 것이며 조직화된 국가의 한 부분으로서 법률에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결국 자치사무의 범위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고, 이는 입법자인 국회의 권한이란 취지이다.(헌법 제40조) 정부의 설명대로면 지역사랑상품권을 발행하는 일이 지자체의 고유한 자치사무라는 취지로 이를 법률로 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지만 헌법이 정한 자치권의 본질상 이런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정부가 지역사랑상품권 발행에 대한 의무를 부과하고 있지만 지자체의 예산 신청 범위에 따른 것이고 최종적으로 국회의 심의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상품권 발행을 강제하는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지자체의 자치권을 침해했다는 것도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모든 지자체가 지역화폐를 발행하면 지자체가 경제 교류가 줄어들어 국가 경제에 해가 될 것이다? 실제로 강원 양양을 제외하고 사실상 모든 지자체에서 지역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문제라는 지적이다. 해당 지자체에서만 사용하고 다른 지자체에서 못 쓴다면 인근 지자체로 유출되는 소비가 줄어들고, 이렇게 되면 인접 지자체는 손해라는 논리이다. 심지어 지자체 간 경제 교류가 줄어들면서 국가 경제에 해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역시 지역화폐 무용론의 핵심 논리였다. 몇 해 전 한 국책기관에서 이 같은 내용의 리포트를 발표한 후 지역화폐 반대론의 대표적인 근거가 되어왔다. 그런데 지역화폐를 왜 도입하였는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저해 요인 중에 부의 중앙집중이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00만원을 소비하면 내가 속한 지역 외로 절반 가까이 빠져나가는 역외유출을 조금이라도 줄여 지역의 소비는 지역에서, 지역의 부는 지역에 남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지역화폐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역외 유출로 빠져나간 부는 어디에 쌓이고 있었는가. 옆 지자체인가, 서울·수도권 집중인가. 이같은 현실에서 지역화폐가 지역에서만 사용되니 이를 반대한다는 것은 결국 서울·수도권과 지방의 경제 균형발전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소비의 부가 집중되는 것과 지역에서 순환되는 것, 과연 과연 어떤 것이 경제에 더 해가 될까. 영세 소상공인 지원은 지역화폐보다 온누리상품권이 더 낫다? 지역화폐는 연 매출 30억원 이상 업체는 가맹점이 될 수 없다. 경기도는 연 매출 12억원 이상 제한이다. 시흥시는 여기에 대기업 프랜차이즈도 가맹점이 될 수 없다. 온누리상품권은 전국 모든 전통시장과 등록된 상점가에서 사용 가능하다. 매출이나 대기업 프랜차이즈 등의 업종기준이 특정 업종을 제외하고 사실상 없다. 그러다 보니 최근 국감에서 올해 급격히 늘어난 온누리상품권 가맹점 중 66.3%가 고소득 업종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형 부정유통 적발 소식도 끊이지 않는다. 지역화폐와 온누리상품권은 영세 소상공인 지원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두 정책이 시너지를 낼 충분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상생할 궁리는 안 하고 대결 구도로 몰고 가는 최근의 상황은 우려스럽기만 하다. 지역화폐는 특정 정치인의 작품이다? 지역사랑상품권은 지난 1996년 충북 괴산에서 시작되었다. 2010년대부터 시작된 온누리상품권보다도 먼저이다. 최근 특정 정치인이 만든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지역화폐 정부지원과 효과에 대한 논란에 대해 살펴봤다. 알려진 많은 부분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의 무대에서 지역화폐는 그저 정쟁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지역화폐는 민생 경제 분야에서 가장 효과 높은 재정정책임이 증명되고 있다. 정치색을 막론하고 민생 현장에 밀착된 대부분 지자체에서 지역화폐 정부 지원 필요성과 효과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최근 헤럴드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인허가 데이터개방 일반·휴게음식점 통계를 분석한 결과, 17개 시도 중 12개 곳에서 폐업 건수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영업자 비율 역시 역대 최저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8월 기준 자영업자 수는 563만6000명으로 전체 취업자(2854만4000명)의 19.7%를 차지했다. 자영업자 비중 20%선이 깨진 건 1963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이다. 소상공 자영업자의 쇠퇴가 이제 체감을 넘어 수치로 확인되고 있다. 적절한 재정 정책이 신속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여파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민생을 생각한다면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역화폐에 대해 제대로 살펴봐야 할 때가 왔다.
2024-11-27 | hrights | 조회: 244 | 추천: 8
이동우/변호사 2023년의 56조 원에 이어 올해인 2024년에도 정부 예측에 비해 30조 원 이상의 세금이 덜 걷힐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세금이 덜 걷히는 이유는 현 정부가 무분별한 감세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엉뚱하게도 세금이 부족하다며 지방에 줄 돈을 주지 않으려 한다. 대기업과 자산가들의 세금을 깎아주고 돈이 부족해지니 지방에 줘야 할 돈을 주지 않는 정부의 행태에 말문이 막힌다. 정부가 멋대로 지방교부세를 줄이는 것은 위헌이다. 정부가 지급하지 않은 지방교부세란 법에 따르면 ‘국가가 재정적 결함이 있는 지방자치단체에 교부하는 금액’이다. 쉽게 말해 국가가 형편이 어려운 지방에 주는 돈이다. 앞서 얘기한 대로 작년에 약 56조 원의 세금이 적게 들어오자 정부는 지방에 줘야 할 이 교부세 중에서 대략 18조 6,000억 원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도 10조 원 이상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부의 행위가 헌법과 국가재정법을 위반한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한 나라의 정부가 헌법과 관련 법률을 대놓고 어기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아래와 같이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정부가 정부 마음대로 지방에 줘야 할 돈을 주지 않는 행위는 헌법이 규정한 국회의 예산안 심의권을 침해한 행위다(이하에서는 예산과 예산안을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예산안은 국회를 통과하기 전의 상태를, 예산은 국회를 통과해서 확정된 상태를 뜻한다고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근대국가는 국회에서 통과된 ‘예산’, 즉 얼마에 어디에 쓸지에 대한 국가의 자금계획에 근거해서 돈을 쓴다.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행정부 마음대로 돈을 쓰지 못하고 국회가 어디에 얼마를 쓰라고 승인한 내용에 따라 돈을 쓰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삼권분립이 헌법에 명시된 근대국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회의 동의를 받은 예산이 존재하고 2023년에도 2024년에도 국회를 통과한 예산안에는 각 지방에 얼마를 지급해야 할지 정해져 있다. 만약 정부가 이 예산과 다르게 돈을 더 쓰고 싶거나 혹은 덜 쓰고 싶으면 국회에 추가경정예산안을 제출해 다시금 승인받아야 한다. 우리가 뉴스에서 흔히 ‘정부가 추경을 편성했다’라고 듣던 그 추경이 바로 추가경정예산의 줄임말이다. 애초 계획과 다르게 돈을 더 쓰거나 덜 쓸 일이 생겼으니 국회에 새로 만든 예산안을 승인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세금이 부족해지자 국회의 동의도 없이 지방에 줄 돈을 주지 않았다. 대놓고 근대국가의 기본인 삼권분립을 무시한 것이다. 예산안의 심의·확정은 국회의 고유 권한 정부의 변명도 궁색하다. 정부는 지방에 줘야 할 금액은 법률(지방교부세법)에 따라 기계적으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국회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잘못된 주장이다. 법률에 따라 지방에 줘야 할 금액이 계산되는 건 맞다. 예를 들면 ‘올해 걷힌 세금의 10%를 지방교부세로 줘야 한다’라는 식이다(물론 이 내용은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일 뿐이고 실제 법률의 내용은 좀 더 복잡하다. 하지만 들어온 세금의 몇 %를 주라는 기본구조는 다르지 않다). 이에 따라 만약 올해 걷힌 세금이 100조 원이라면 10조 원을 지방에 줘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정부의 주장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인 금액을 산출하는 방식일 뿐이다. 즉, 이렇게 계산된 금액을 ‘예산’, 국가의 자금계획에 구체적으로 적은 뒤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정부가 실제로 지방에 돈을 줄 수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정부는 국회의 승인을 받은 ‘예산’에 적힌 대로만 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국회를 통과한 예산에 ‘지방에 10조 원을 줘라.’라고 적혀있으면 정부는 10조 원을 지방에 줘야 한다. 그런데 세금이 적게 걷혀 90조 원만 걷히면 어떻게 될까? 90조 원의 10%는 9조 원이니까 9조 원만 주면 될까? 아니다. 정부는 원칙적으로 10조 원을 줘야 한다. 아까도 말했듯이 행정부는 입법부인 국회에서 승인된 예산에 따라서 나라의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모자란 1조 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 보통의 경우에는 국채를 발행한다. 즉, 세금이 모자라니 국가가 빚을 내서 돈을 마련하는 것이다. 애초의 자금계획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세금이 없는데 빚을 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당초에 국가의 수입, 즉 세금을 100조 원 계산해서 만든 예산에서 국가의 수입을 90조 원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 세금이 부족할 때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빚을 내서 애초 계획대로 돈을 쓰거나 아니면 애초의 계획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국회에 새로운 예산안을 제출해서 승인받아야 한다. 헌법에 그렇게 적혀있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과 같이 말이다. 『제54조 ①국회는 국가의 예산안을 심의ㆍ확정한다』 사라진 헌법과 법률에 따른 국가 운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헌법을 위반하고 국회의 동의 없이 지방에 줘야 할 돈을 주지 않았다. 더 황당한 일은 정부가 스스로 헌법을 위반해 지방에 돈을 주지 않았다가 뒤늦게 약간의 돈을 주면서 생색을 냈다는 사실이다. 작년인 2023년에 정부는 앞서 얘기한 대로 세금이 부족하다며 지방에 줄 돈 중 약 23조 원 가까운 돈을 주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실제로 돈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연말이 되자 예상보다 세금이 조금 더 걷혔다. 따라서 돈에 조금 여유가 생기자 정부는 마치 대단한 시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약 3조 원 정도를 지방에 주었다. 이 내용을 정부나 언론은 지방을 위한 대단한 지원이라고 한 것처럼 포장했다. 애초에 줘야 할 돈이라는 사실은 애써 감추면서 말이다. 현 정부 들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가 너무 자주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잘못들이 제대로 시정되지 않고 있어 우려스럽다. 헌법과 법률에 근거한 국가 운영이 사라지면 무질서와 혼란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자꾸만 뒷걸음치는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고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다.
2024-11-19 | hrights | 조회: 104 | 추천: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