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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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최우식/ 회원 칼럼니스트  어릴 적 어머니는 자장가로 ‘섬 집 아기’라는 동요를 불러주셨다. 내게 이 노래는 즉효 약이었는데 노래가 감미로워서는 아니었다. 사실 그 반대였다. 공포였다. 책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이상교 글, 김재홍 그림. 사진 출처 - 알라딘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 달려옵니다.  어떻게 이 노래가 자장가가 될 수 있나. 노래는 어머니의 부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가사로 어머니의 부재를 느꼈고 가사로 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제서야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고 잠을 청했다.  며칠 전, 온 가족이 함께 잠을 잤다. 열대야가 원인이었다. 도저히 에어컨이 없이는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같은 천장을 바라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이 생각났다. 나는 어머니에게 대뜸 물었다. 어떻게 그런 노래를 자장가로 불러 줄 수 있느냐고.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크게 웃으셨다. 그러고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추억의 자장가를 다시 부르셨다.  우리에게 타임머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건 아니다. 어머니가 자장가를 불러 주시는 순간 나는 과거로 돌아갔다. 노래는 여전히 나를 외롭게 했고 또 안도하게 했는데 그때와 달라진 건 어머니의 주름살뿐이었다. 그것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나는 애써 눈물을 감췄고 너무 늦지 않게 다시 이 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폭염이 준 선물이었다.  추석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추석의 유래에는 이런 설이 있다고 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밤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보름달이 뜰 때면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8월 15일(음력)은 일 년 중 가장 큰 만월을 이루는 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날을 큰 명절로 여기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시대가 많이 흘렀다. 추석이라고 집밖으로 나가 축제를 즐기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고 공포마저 사라졌을까. 어머니의 노래를 이십 년 만에 들으면서 나는 어머니의 부재가 무서웠다. 이제 어머니의 부재는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피할 수 없는 확실함으로 내게 다가온다.  우리나라는 가구 가운데 ‘1인 가구’의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한다. 2045년이 되면 3명 중 1명은 1인 가구로 살아갈 것이라는 통계도 나왔다. 이제는 누군가와 같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잠들 기회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우리의 공포가 사라질까.  이번 추석에 모두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한 번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이유도 없이 무서워 부모님을 찾아가 같이 자자고 말했던 경험 말이다. 꼭 부모님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같이 잠을 자지 않은 누구라도 좋을 테다. 나이가 들어 남사스런 일일지는 모르나, 혹시 아는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설명되지 않는 안도감에 단잠에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우식 : 사람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피디 지망생
2018-09-19 | hrights | 조회: 930 | 추천: 10
김현진/ 회원 칼럼니스트  가족의 이야기는 참 많다. 그 내용은 따뜻하며 결말은 코끝을 찡하게 한다. 그런데 나는 가족에 대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가족 구성원 어느 한 명의 희생이 아름답게 그려지거나, 말썽만 피우다가 집 나간 자식이 돌아와 가족이 다시 행복하게 살게 됐다는 이야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족은 ‘정상 가족’이어야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비정상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족의 이야기 외에도 복지 사각지대, 가정 폭력 문제, 노령화 문제 등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것들을 비정상 가족을 통해 보여준다. 감독은 비정상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관객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가족이 ‘혈연’에 의한 관계로 구성됐을 경우에만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혈연에 의해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는 ‘친권’이라는 희한한 권리가 있고, 그 친권은 자녀를 가난과 폭력 속에 가두기도 한다. 알코올 중독에, 가족을 늘 두들겨 패는 아버지라도 그가 친권자라면 미성년 자녀는 친권자와 살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성년 자녀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다. 이런 현상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어떠한 ‘개인’인지와 상관없이 ‘그래도 아버지인데 참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로 합리화되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가족은 항상 즐거운 일을 함께해야 하고, 여행도 함께 다녀야 하며, 맛있는 음식도 함께 먹어야 한다. 가끔 가족에게 불편한 마음이 있어도 가족이니까, 그냥 참는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최소한의 사회? 혈연관계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혈연’이라는 말만큼 추상적인 말이 있을까? 피가 섞인 구성원으로만 가족은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미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 가족이 구분되고 차별이 시작되지 않는가?  비정상 가족인 어느 가족도, 가족으로 산다. 하지만 [어느 가족]에는 누구 하나 온전한 개인이 없다. 할머니를 비롯해 할머니의 연금에 빌붙어 사는 성인 남녀, 두 손을 딱딱 맞대다가 슬그머니 물건을 훔치는 아이. 4번 손님에게 유사 성행위를 하며 돈을 버는 소녀. 겉으로는 더 없이 행복해 보이는 가족에게, 추운 겨울에 쫓겨나 있다가 비정상 가족의 가족이 된 쥬리.  유사 성행위를 정기적으로 하러 오는, 누군가의 가족일지 모르는 4번 손님은 어느 날 소녀에게 옵션으로 무릎베개를 해달라고 요청한다. 소녀는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4번 손님은 가만히 누워 소리 없이, 운.다. 가족과 터놓고 하면 좋을 일들을 돈을 내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에게 가족은 ‘괜한 기대를 하게 되’는 대상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비정상 가족에게 괜한 기대는 처음부터 접고, 그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온기로 사는지 모른다.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온기는 느낄 수 있는 비정상 가족.  혈연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마음의 복지가 아닐까 한다.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복지가 너무나 당연한 것인 만큼, 의식주를 해결한 개인들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복지도 중요하다. 이는 어디에서 올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가장 원활하고 따뜻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가족이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이건 아마도 가족을 한 덩어리로만 보는 우리 사회의 습관 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이루는 개인들이 자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가족에 묻히니 가족이 건강할 리 있겠는가? 아무리 혈연관계라도 말이다. [어느 가족]은 위태로운 개인들이 모여 만든 비정상 가족을 보여주며, ‘도대체 가족이 뭐야?’라고 묻고 있다. 부모에게 늘 매를 맞으며 추운 겨울에 복도에 쫓겨 나있던 쥬리가 왜 그 움막 같은 집과 가족, 늘 물건을 훔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빠를 그리워했는지. 다섯 살 여자아이의 최소한의 존엄성도 지켜주지 못한 정상가족은 그저 덧없다.  영화는 가족은 모든 것을 함께해야 해, 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한다. 가족은 따로 또 같이 있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구성원이어야 한다. 그 누구도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여할 수 없다. 나의 삶이지, 내 딸, 내 아들의 삶이 아니다. ‘나’ 없이 무슨 엄마, 아빠, 딸, 아들이 될 수 있을까? 엄마, 아빠, 딸, 아들은 역할일 뿐인데.  우리 가족은 이번 여름에 모두 흩어져 있었다. 이제 그 시간이 끝났다. 솔직히 아쉽다. 엄마가 아닌 나로서 자유롭게 지내는 시간들이 늘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 시간은 내게 재충전의 시간이었고, 또 영화 [어느 가족]을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즐겁게 지낸 이번 여름, 다시 모인 우리 가족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자기만의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을 함께 하지 않았어도,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지 못했어도 다시 모인 우리는 가족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나’로 살다가 가족으로 결합하고 또 자기 자리로 돌아가 ‘나’로 살기를 반복하는 가족이다. 그렇게 가족으로 산다. 김현진 : 18년 간 국어교사로 살다가 더 많은 사람들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직업을 바꾼 철들기 싫은 어른
2018-09-11 | hrights | 조회: 888 | 추천: 2
조소연/ 회원 칼럼니스트  몸은 언어다.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심리 상태에 대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달갑지 않은 사람이나 사건이 있을 때, 아무리 감정을 숨기려 해도 행동을 통해 그 심리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눈을 비비거나, 몸을 기울여 약간 거리를 두는 것, 무릎에 지갑 같은 물건을 올려놓는 것, 출입구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다리를 돌리는 것, 모두 상대방을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된 몸의 언어다.  그렇다면 악수는 어떨까? 악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인사의 제스처이다. 직장에서, 스포츠 경기에서, 여러 만남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악수로 예의를 표한다. 서로 손을 마주잡는 이 동작은, 먼 과거로 올라가 보면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서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우호적인 표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악수는 더 이상 평화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방의 손을 세게 잡거나 팔꿈치를 툭툭 치는 등 악수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느낌을 주며 우월감을 과시한다. 이렇게 악수를 그 본래 의미와 달리 상대와의 ‘힘겨루기’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수를 통해 겸손함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악수할 때 본인을 최대한 낮춘다. 한 손도 모자라 두 손으로 상대방의 손을 감싸고, 때로는 허리를 숙이며 최대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뜻을 전한다.    반면에 본인을 낮추는 자세를 취하지 않고도 예의를 갖추며 당당하게 악수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최고 운영책임자(COO)인 셰릴 샌드버그가 각종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당당하게 악수를 하는 장면은 정말 인상 깊다. 보디랭귀지에서 본인에 대한 자신감과 상대에 대한 배려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런데 미디어를 통해 셰릴 샌드버그와 같은 미국 여성들의 악수하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멋지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국인들에겐 조금은 낯선 모습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악수’  한국에선 여성들이 악수를 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은 물론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다. 예를 들어 얼마 전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떠올려보면, 조문객들은 백이면 백, 내 옆에 서있던 오빠에게는 악수를 건네고 나에게는 간단한 목례만 했다. 오빠의 결혼식장, 교수님과의 식사자리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중년의 남성들이 젊은 여성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히려 또 반대로 여성에게 당당히 악수를 건넸다가 그 쪽에서 더 당황해해서 곤란했던 경험을 했다는 남성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려온다.  여성과, 또는 여성이 악수하기를 꺼려하는 이 현상에는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특수한 역사의 영향이 크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내내 여성들은 버선코도 내보이면 안되고 발목을 드러내서도 안됐다. 양반가 여성은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는 장옷을 입고 다녔다. 부르카를 쓰는 이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여성들이 억압받는 문화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전쟁통에서도, 그리고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여성과의 신체접촉은 물론이고 몸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던 역사와 문화의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젊은 여성의 손을 잡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있다.  물론 과거 서양 문화권에서도 남성과 여성 간의 인사법의 차이가 존재했다. 20세기까지는 여성에겐 악수를 청하기보다 손가락에 입을 맞추거나 가벼운 포옹 등 다른 가벼운 인사를 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다양한 여성 인권 운동의 영향으로 그런 인사법은 현재 거의 사라졌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모르더라도, 적어도 직장과 학교와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악수를 한다. 가볍고도 경쾌하게.  한국에서도 최근 들어 여성인권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힘입어 이제는 여성도 당당하게 악수를 했으면 좋겠다. 남성도 더 이상 눈치보지 않고 여성에게 당당하게 악수를 건네면 좋겠다. 남녀가 유별하던 때로부터 긴 시간이 흘러 이제 한국여성은 더 이상 긴치마를 입지 않고 장옷을 입지도 않는데, 인사예절이라고 바뀌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악수는 단순한 인사를 넘어서 ‘관계의 시작’이다. 관계의 시작점인 악수에서부터 벌써 성별에 따른 차이가 있다면, 그 후 지속될 관계에서 이미 성평등은 기대하기 어렵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진급에서의 유리천장, 연봉격차, 직장성희롱 등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끝도 없지만,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여권신장. 당당한 악수로 남성과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받는데서 시작해보자. 조소연: 프로불편러 대학원생.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나누다 보면 불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2018-09-04 | hrights | 조회: 1208 | 추천: 2
주윤아/ 회원 칼럼니스트 # 프롤로그  얼마 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일정 중간에 우리 팀의 현지 가이드가 다른 한국팀을 인솔하는 가이드 친구를 만나 한참 수다를 떨고 돌아왔다. 무슨 재미난 얘기를 나눴는지 물으니 그들의 표정은 희극으로 보였으나 실제 대화 내용은 비극이었다. 한국 남성이 그 가이드의 결혼 여부를 집요하게 묻고 결국 싱글이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추근대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속담이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성희롱이 문제시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여기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국남성이 현지인 가이드에게 결혼 여부를 질문하는 대목이다. 대개의 한국인들은 안면만 트면 상대에게 궁금해서 죽을 것 같은 몇 가지 질문들이 있다. 나이가 몇 살인지, 결혼했는지 혹은 왜 안하고 있는지, 했다면 아이가 몇 명이며 몇 살인지, 둘째는 왜 안 낳는지…. 글을 쓰다 보니 외둥이는 외로우니 동생이 필요하다며 민간 출산장려홍보대사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던 나의 흑역사가 떠올라 지금에서야 외둥이 부모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다.  우리는 왜 개인정보와 사생활이 궁금한 것일까? 한국인이 유독 궁금증이 많은 DNA를 보유한 것이 아니라면 타인의 사생활 정보에 집착하는 데에는 단순 호기심이나 사실 확인 이면에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일단 나이를 궁금해 하는 것은 연령(차별)주의 때문이다. 관계를 형성하는 초기 단계에 상대가 나의 위인지 아래인지를 파악하여 우선 나이 서열부터 정립하려는 것이다. 연장자에게는 조용히 입 다물고 순응할 예의를 갖출 준비를 할 것이고, 나보다 어린 상대에겐 하대할 위엄을 장착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동갑을 만나게 되면 근거 없는 친밀감과 추상적인 동질감이 자동으로 형성되며, 동시에 얼굴 나이(동안)를 비교하거나 사회적 성취를 가늠하는 경쟁심리가 작동하기도 한다. 신분제가 폐지된 지 100여년이 지난 대한민국 사회에 아직도 무수한 서열과 위계가 존재하지만 연령주의는 성별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차별의 요소다.  두 번째로 결혼 여부이다. 대개는 단지 사실 확인에 그치지 않고, 비혼은 비혼인대로, 기혼은 기혼인대로 그 다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치 정해진 대본이라도 사전에 공유한 것처럼 누구나 똑같은 질문들을 한다. 훨씬 더 이상한 것은 결혼을 왜 했는지, 아이는 왜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혼과 출산의 삶이 ‘정상’이라는 고정관념과 비혼의 삶을 개인의 선택으로 보지 않고 수동적 삶의 결과로 바라보는 비합리적이고 차별적인 통념 때문일 것이다. 특히 비혼 여성에게는 남모를 비운의 사연을 가공하거나 혼자 살 수밖에 없는 독립적 투사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여자라면 결혼과 출산은 경험해 봐야 한다는 설교를 하며, 지금은 몰라도 늙어서 외로움에 후회할거라며 남의 노후까지 저주해주는 그야말로 대책 없는 사람들이다. 난해한 것은, 이들은 기혼자에게도 자동으로 기혼의 삶에 대한 절망과 넋두리를 공유할 정반대의 대사들도 차고 넘치게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혼의 삶은 정상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2018년의 현행 교과서나 성교육 보급 교재들에는 결혼과 출산이 인간의 발달과업처럼 표현되어 있음), 반면 기혼의 삶을 선택한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성적 매력은 제거되고, 출산하면 공동체 사회에 피해를 주는 기괴한 존재(아줌마, 맘충, 김 여사 등)가 된다. 직장에서도 가사와 돌봄 노동에 치우쳐 공적 업무를 게을리하는 걸림돌로 전락한다. 또한 비혼의 취업준비 여성들에게도 ‘취집’이라도 성공하라며 다양한 언어폭력(김치녀, 된장녀 등)을 무시로 퍼부으며 이들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자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민주적이고 성평등한 공간으로 추측하는 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다. 비혼 또는 비출산 여성에게 동료교사나 학생들의 보호자들이 ‘자녀를 낳고 길러보지 않았으니 부모 심정을 알기나 하겠어?’, ‘결혼을 안 해봤으니 가정생활의 희로애락도 모를 것이고 자녀가 없으니 학생들 마음 헤아리는 것도 부족할 거야’라는 언어폭력(그들은 이를 ‘조언’이라고 한다)을 앞뒤에서 하고 있다. 이 또한 자녀에 대한 가사와 돌봄 노동을 여성이 전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사고다. 흔히 출산여성이 취업을 준비하거나 직장의 저녁 회식에 참석하면 석연찮은 표정으로 “애는 어쩌고?”라고 물으며, 이 상황에서 그녀의 돌봄 노동을 대체할 대상 역시 남편보다는 친정엄마나 시어머니를 자동으로 연상하는 것 또한 성역할고정관념을 보여주는 일상들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학생에 대한 상담이 필요할 때 으레 어머니에게 요청을 하지 아버지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ㅠ.ㅠ).  결국 우리가 타인에게 미치도록 궁금해 하는 사적 질문들은 2018년 대한민국이 연령과 성차별이 만연한 차별공화국임을 입증하는 것이니, 앞으로 ‘결혼하셨어요?’라는 말은 제발 묻지도 듣지도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족을 만드는 것이 핏줄인지, 함께 보낸 시간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진솔하게 응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에필로그  여행 말미에 우리 팀의 현지 가이드는 여행사 대표에게 사진을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의 남성여행객 팀이 현지 가이드 사진을 보고 가이드를 결정하겠다고 했단다. 우리 일행은 동시에 외쳤다. “Oh My God~!” 주윤아: 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2018-08-28 | hrights | 조회: 1856 | 추천: 20
주만/ 회원 칼럼니스트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 월드컵이 막을 올렸던 지난 6월의 이야기다.  우리가 독일과 경기중이던 시각, 멕시코와 스웨덴의 경기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멕시코는 우리와는 달리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는데, 대한민국이 독일에 승리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멕시코인들은 한국 대사관 앞에서 “멕시코와 한국은 하나다!”를 외치며 환호했다. 축구가 거의 대국민 종교와 같은 멕시코이기에 가능한 퍼포먼스였다. 비록 몇몇 멕시코인들이 고마움의 표현이라며 SNS에서 눈을 찢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지만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고, 동양인 차별이 공공연한 남미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감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실 멕시코는, 6회 연속 16강에 진출하고도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16강 징크스’에 빠져 있었다. 그런 멕시코가 이번에는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 축구 팬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하지만 16강전 상대는 브라질, 결국 멕시코는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우리에게 보내줬던 호의 때문에 멕시코를 응원했던 나는, 마치 우리나라가 떨어진 것처럼 아쉬워했다. 그리고 징크스를 깨기 위한 멕시코 선수들의 투혼에 존경과 위로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출처 - 뉴스앤미디어   그때, 텔레비전에서 노래가 나왔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김광진의 ‘편지’였다.  그리고 경기에 대한 한 줄 평이 나왔다. ‘축구는 실력이 징크스다.’  이긴 팀에게는 찬사를, 패배한 팀에게는 위로를 보내는 것이 스포츠맨십이다. 그런데 그 지상파 방송사는 오히려 패배한 멕시코를 비아냥거리며 조롱했다. 지금 내가 월드컵을 공식적으로 중계하는 방송을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었다.  더군다나 ‘징크스’는 불길함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어떻게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 팀에게 ‘너네 실력이 곧 징크스야’라는 잔인한 말을 던질 수 있는 것일까. 심지어 해설자는 멕시코 선수들이 단체로 염색한 것에 대해 “염색이 너무 일렀다.”며 비수를 꽂았다. 그 염색의 의미는 투지였다.  방송을 본 사람들은 재치 있는 표현으로 멕시코를 ‘팩트 폭행’ 했다며 즐거워했다. 반응들 중, 우리가 16강에 올려줘 봐야 어차피 떨어질 팀이었다는 댓글은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월드컵은 국가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전쟁터가 아니다. 오히려 평화를 도모하는 스포츠 축제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 적어도 그 지상파 방송국 작가는 경쟁에 눈이 멀어 평화를 도모해야 하는 순간을 분별하지 못했다. 경쟁에 너무나 익숙해 다른 이를 인정하고 응원하는 것에 인색한 우리 사회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듯 했다. 멕시코 때문에 우리나라가 떨어졌다며 멕시코를 아니꼽게 생각했던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는 역설적이다. 매 순간 경쟁을 요구하지만, 상대를 대놓고 누르거나 마음껏 밟아 버릴 수 없게 한다. 그 덕에 발전한 ‘비꼬기식 언어유희’가 마냥 재미있게 들리지는 않는 이 순간. 어떻게든 상대를 끌어내려야 하는 무한경쟁보다, 서로 인정하고 응원하는 생태계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비록 짧은 인생 경험이지만, 그것이 사람을 조금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고 믿기에.  멕시코가 매번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가 ‘실력 그 자체가 징크스’ 이기 때문이라는 매몰찬 말을 던진 그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여전히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인정과 배려가 실종된 ‘인성 그 자체가 징크스’이기 때문이라고. 주만: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작가 지망생
2018-08-21 | hrights | 조회: 900 | 추천: 11
박선영/ 회원 칼럼니스트  <감기 걸린 물고기>라는 동화책에는 배고픈 아귀와 알록달록하고 조그마한 물고기 떼가 등장한다. 아귀는 물고기 떼를 잡아먹고 싶어 하지만, 물고기 떼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똘똘 뭉쳐서 아귀보다도 훨씬 커다란 무리로 헤엄쳐 다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들을 잡아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던 아귀는 물풀 사이에 숨어 조그만 목소리로 소문을 낸다. “얘들아, 빨간 물고기가 감기에 걸렸대!” 물고기 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들은 척도 하지 않지만 아귀는 포기하지 않는다. 빨간 물고기는 열이 나서 빨개진 거라고 그럴듯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소문은 조심스럽게 무리 속을 파고든다. 그 뒤로는 물고기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부풀려지고, 확신을 불러오는 단계까지 이른다. 결국 무리에서 쫓겨난 빨간 물고기들은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던 아귀에 잡아먹힌다. 빨간 물고기를 먹어치운 아귀는 또 다시 소문을 흘린다. “얘들아, 노란 물고기도 감기에 걸렸대. 그새 옮았다는 구나!” 이제 물고기 떼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의심한다. 다른 색깔의 물고기들도 차례로 쫓겨난다.  성소수자는 아프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빨간 물고기’다. 반동성애 진영은 동성애가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전염’되기도 하고, ‘치료’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편견과 배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팀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성소수자 자살예방프로젝트 마음연결’과 함께 진행한 연구(만 19세 이상 한국의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2,341명 대상)에서 성소수자가 비성소수자에 비해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한 비율이 10배에 가까운 것으로 집계됐다. 성소수자의 우울증상 역시, 비성소수자에 비해 약 다섯 배나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주류 문화 구성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란 두려움도 성소수자의 자살 충동 증가로 이어졌다. ‘고용주는 성소수자를 뽑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소수자들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등 일반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을 배제할 것이라고 예상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자살 생각을 두 배 가까이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승섭 교수는 “결국 동성애자여서 아픈 게 아니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에도 아귀가 있다. 성소수자 청소년의 자살률은 비성소수자 청소년의 자살률보다 5배나 높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를 보면 학교 내 성소수자 응답자의 80%가 교사로부터 혐오표현을 들었고, 54.4%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경험은 스트레스, 학업의욕 저하,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이런 현실에서 학교와 교사는 무엇을 했을까?  ‘동성애반대 교사연합’이라는 이름의 교사들은 세계 에이즈의 날(12월 1일)에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는 내용의 계기교육(공식적인 교육과정과 상관없이 사회적인 이슈나 사건을 가르치는 수업)을 했다. 동성끼리의 성관계는 불결한 성관계이기 때문에 동성애로부터 학생들을 지켜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남성 동성애자의 감염률이 높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HIV 감염 역학은 국가마다 다르다. 바이러스가 성별이나 정체성을 가려서 감염시키지는 않기 때문에 남성 동성애자가 감염의 원인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 UNAIDS(유엔에이즈)는 ‘누구도 빠짐없이 인권과 성평등이 보장되는 사회적 조건이 되어야 에이즈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에이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진 세계 에이즈의 날, 어느 학교의 학생들은 ‘감기 걸린 물고기’에 대한 소문이 진실이라고 배웠다. 사진 출처 - 필자  지난 7월 14일 서울광장에서 19번째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내가 활동하는 전교조 여성위원회에서 처음으로 부스를 운영했다. 뜨거웠던 그 날, 참가자들은 뙤약볕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학교, 페미니스트 교사를 응원하는 글귀를 멋진 그림을 곁들여 써주었다.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에 오히려 우리가 더 감동을 받았다. 동시에 부끄럽기도 했다. 1년에 한 번, 성소수자들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 존재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그들이 차별에 맞서는 방식이다. 축제 참가자들은 매년 늘어나 올해는 10만에 육박했다. 이 축제 시기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과 인권교육을 위한 교사모임 샘은 청소년 성소수자를 만나는 교사들을 위한 가이드북 <학교에서 무지개길 찾기>를 발간했다. 가이드북 소개를 하는 인터뷰에 교사들이 익명으로 참여했다. 기사에는 천 건이 넘는 악플이 달렸다. 몇몇 교사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이들의 노력은 그저 ‘용기’있는 행동정도로 치부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어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다. 사진 출처 - 필자  성소수자여서 아픈 게 아니다. 사회의 낙인과 차별이 그들을 아프게 만든다. <감기 걸린 물고기>의 아귀는 물고기 떼들의 연대를 깨뜨리기 위해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두려움은 진실을 가렸고, 물고기 사회는 산산조각이 났다. 앞서 소개한 가이드북 <학교에서 무지개길 찾기>에서는 청소년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당장 혐오를 멈춰 달라’고 했다. 이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학교는 누구를 위한 곳인가? 우리 사회가 아무리 아귀의 소문에 휘둘려 특정 집단을 배제시키고 있어도 학교는 모두에게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 학교의 존재 이유는 어느 누군가가 아니라 ‘모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소수자가 ‘안전한’, ‘차별받지 않는’ 학교는 너무 소극적인 목표이다. 학교는 배움의 권리를 가진 모두에게 즐거운 배움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색깔은 병이 아니고, 죄가 아니다. 일부 교사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교는 이제 아프지 않은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혐오에 휘둘리지 않는 곳으로. 아무도 아프지 않은 곳으로.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
2018-08-06 | hrights | 조회: 1243 | 추천: 17
최우식/ 회원 칼럼니스트  자원재활용법이 시행되었다. 법에 따르면 카페 매장은 물론 테라스에서도 플라스틱 일회용 컵 사용이 불가능하다. 오직 카페 밖으로 음료를 들고 나갈 때만 플라스틱 컵을 이용할 수 있다. 이를 위반하면 사업장에 5만 원에서 200만 원 상당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아직 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자주 찾는 카페는 여전히 내게 묻지도 않고 플라스틱 컵에 음료를 준다. 이러면 안 된다고 따져 묻자니 괜한 참견인 것 같아서 얼마 전부터는 텀블러에 담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이 문제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내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환경부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입이 아프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다. 음료가 따뜻한 음료인지 시원한 음료인지, 휘핑크림을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 할인 카드가 있는지, 적립이나 쿠폰을 찍어 갈 것인지도 확인해야 한다. 현금으로 계산하면 현금영수증도 잊으면 안 된다. 성질 급한 손님들은 이쯤 되면 슬슬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고지할 것이 하나가 더 늘어난 것이다.  ‘매장 안에서 드시면 머그잔이나 유리컵에 드셔야 해요. 법이 바뀌었거든요. 얼마 전에 재활용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렇게 됐어요.’ 여기까지 말하면 열에 아홉은 넘어간다. 문제는 열에 하나다. ‘아니 얼마 전에 내가 다른 카페에서 마실 때는 일회용 컵에 마셨는데? 그런 법 있는 거 맞아요?’ 불신하는 눈초리로 바로 옆집 카페 이름을 대며 말한다. 이런 경우는 내가 설명을 해줘도 별 효과가 없다. 그렇다고 손님에게 법을 찾아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 한 손님은 주문을 멈추고 일행에게 가서 성토를 하더니 다시 돌아와서 주문을 했다.  그렇다고 손님의 무지를 탓할 수는 없다. 사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모든 카페가 동시에 법을 따랐으면 손님들의 혼선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어떤 카페는 법을 지키고 어떤 카페는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다. 환경부는 정책 홍보에 실패했고 언론은 이를 충분히 보도하지 않았다.  플라스틱은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미세 먼지처럼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위협한다. 시중에 유통되는 국내 생수 10개 제품을 분석한 결과 4개 제품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되었다. 바다에서는 미국, 중국, 일본에 비해 10배나 많은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일반 시장에서 유통되는 조개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나노 크기의 미세먼지는 몸에서 제대로 걸러지지 않는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이미 미세 플라스틱이 침투해 있고 식탁 위에 매일같이 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플라스틱이 성장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어 지적 장애나 자폐증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의 1인당 플라스틱 사용량은 세계 1위이다. 세계는 플라스틱 사용량 감축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모든 매장에서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플라스틱 빨대는 종이 빨대로 대체된다. 또한 영국 스타벅스는 26일부터 일회용컵에 ‘5펜스’(74원) 정도의 부과금을 매기고 머그잔이나 텀블러를 사용하는 손님에게는 ‘25펜스’(370원)를 할인해주는 ‘라떼 부과금’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매장에서 일회용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법은 효과적이다. 나는 마감 시간에 일을 하기 때문에 매일 배출되는 쓰레기양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매장에서 플라스틱 사용량은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사진 출처 - 필자 사실 카페 아르바이트생들은 이 법을 싫어할 것이다. 플라스틱 컵은 계량도 쉽고 처리도 간단하다. 하지만 머그잔이나 유리컵은 일일이 설거지를 해야 하고 말려야 한다. 또한 부피도 크고 깨질까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바쁠 때는 법도 해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니 이중으로 일이 쌓인다. 그래도 괜찮다. 홀쭉해진 재활용봉투를 들 때는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제 곧 8월이 다가온다. 환경부는 계도기간을 끝내고 과태료를 물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카페 사업자가 이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언론과 환경부의 홍보가 절실한 시점이다. 일반 시민에게도 나쁠 것 없다. 사실 유리컵이나 머그잔이 사진도 더 예쁘게 찍힌다. 문제는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법을 설명하는 일도 설거지도 모두 그들의 몫이니까. 하지만 법을 설명하는 일이라도 줄어든다면 그것도 큰 도움이 될 테다. 최우식 : 사람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피디 지망생
2018-07-31 | hrights | 조회: 1188 | 추천: 20
김현진/ 회원 칼럼니스트  2015년 9월, 세계인을 부끄럽게, 놀라게, 아니 어떠한 단어로도 적절한 표현이 없어서 ‘쓸쓸함’이란 단어가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만 3세였던 시리아의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 사진이었다.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몸은 역설적이게도 위험천만한 고무 보트에, 막연하게 살 수만 있다면 이라는 절박함으로 몸을 아니, 목숨을 싣는 난민들의 실상을 우리 사회가 알게 했다는 면에선 긍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아일란 쿠르디가 숨진 채 발견된 터키 보드룸 해안가에 조화가 놓여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한국 사회에 과연 난민이 있을까? 있다면 유럽의 여러 나라처럼 난민으로 인정 받는 것이 가능할까? 에 대한 놀라운 현실을 보여주는 책이 바로 ‘우리 곁의 난민 – 한국의 난민 여성 이야기’ 이다. 저자 문경란은 난민으로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라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 난민 7인의 삶을 책으로 풀어냈다. 여성 난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고, 한국의 난민 관련 제도에 대하여 쉽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게 잔상이 남도록 이야기를 풀어간다.  보통 어느 사회나 국가에서든 여성은 ‘상대적’ 약자이다(이 부분에 대한 이견은 차치하고) 게다가 여성이면서 난민이라면 가장 약한 자들일 것이다. 7인의 여성 난민은 누구도 자신이 난민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모두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에 의해 난민이 되었고 난민으로 인정 받기 가장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나름의 삶을 힘겹고 위태롭게 버텨가고 있다.  난민으로 살아가는 데에 가장 어려운 점은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김현경, 2015, <사람,장소,환대>)’인데 난민은 타국에서 특히 한국에서 자기 자리를 얻는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자기 자리가 없기에 삶 자체가 삶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곧 삶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난민 심사 결과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 삶은 더욱 힘겹다. 영원히 떠도는 부평초처럼 살아야 한다. 휩쓸리는 존재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사회 안에 자기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난민은 사회 바깥의 존재요 추방된 존재다.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할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박탈된 존재다. 패터 비에리는 ‘권리란 전횡에 의한 종속에 맞서는 성벽과 같다’(비에리, 2014,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고 했다”  난민 혹은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모멸감에 빠지고, 자기 삶이 파괴되는 경험을 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필요한 건 ‘자기 자리를 인정 받는 것’이 아닐까 하며 책을 덮는다.    자기 자리라는 것은 무엇일까? 법적인 문제로 들어온다면 ‘시민권’일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국제 난민 협약] 등 법적인 장치들은 이미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자기 자리는,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이전에 이미 여기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우리가 내어줄  마음의 자리가 아닐까 싶다. 그가 흑인이건 이슬람이건 이주여성이건 소수자이건 간에 최소한의 삶을 이어가게끔 하는 데에는 시민권 이전에 우리가 내어줄 마음의 자리일 것이다. 그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서는 시민권을 부여한다 해도 그들이 투명인간 취급당할 위험이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한창 예맨 난민 문제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접해본 그리고 겪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범, 스마트폰을 쓰는데 난민 신청한 이상한 사람, 예비 강간범 등의 이미지를 덮어 씌우며 투명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겪어 보지 못한 타인의 자기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혐오가 아닐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삶을 파괴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언제쯤이면 예맨 난민에게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타자에게 마음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내어주는 환대를 우리는 베풀 수 있을까? 김현진 : 18년 간 국어교사로 살다가 더 많은 사람들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직업을 바꾼 철들기 싫은 어른
2018-07-16 | hrights | 조회: 1010 | 추천: 4
조소연/ 회원 칼럼니스트  “제주도 불법 난민 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신청허가 폐지/개헌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와대 청원이 약 60만 3천 명의 동의를 얻어 몇 주째 진행 중 청원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난민 수용 이슈에 관해 첨예한 대립이 있는 것은 단순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도 난민 수용 입장과 자국민보호 입장의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 스크린샷  이번 제주도 사태에서 예멘 출신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거는 경제적 부담과 치안 우려이다.  먼저 난민을 수용 할 경우 우리나라 정부에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부담이 더해지는지 통계자료를 통해 살펴보자. 유엔난민기구가 19일 발표한 ‘글로벌 동향보고서’를 보면, 1994년 4월 이후 한국의 난민 인정률이 4.1%이다. 난민신청자 전원에게 생계비가 지원되는 것은 아니고 여러 심사를 거쳐야 한다, 지원금 액수는 1인당 최대 매월 43만 원으로 최대 6개월간만 지원금이 지급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난민신청자의 규모와 난민 인정률로 보아.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난민수용을 반대하기에는 지원금 액수가 적은 상황이다.    다음으로 치안과 관련하여 테러범죄와 각종 성범죄 위험에 관한 우려가 크다. 난민 수용 이후 유럽의 사례를 살펴보자. 독일은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난민에게 관대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제시한 독일 연방 범죄수사국(BKA) 통계자료를 보면 난민을 포함한 이민자 범죄율이 독일인 범죄율보다 낮다. 물론 유럽 내 쾰른 집단 성범죄 사건 등 이민자 들이 주도한 범죄가 여러 번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사건들만을 근거로 북아프리카와 아랍 출신의 난민이나 이민이 특별히 더 위험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만일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근거로 미국 정부가 한국 출신이민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분류하고 한국인 이민신청을 금지한다면,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까? 반대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개별 사건을 이유로 특정 국적, 인종, 종교를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수인지 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낯선 것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경계하게 된다. 이러한 두려움과 경계는 잘못된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동물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본능적 반응이다. 그러나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달한 본능이 지금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태원 지역은 과거에 ‘양키’들이 많다는 이유로 위험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요즘의 이태원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인기지역으로 변했다. 외국인들과 직접 교류할 기회가 전보다 많아지고 미디어를 통해 그들의 생활이나 생각을 자주 접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가 되어 우리 사회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중동 출신 난민들도 사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도 불과 50년 전 6.25전쟁을 전후로 미국, 중국으로 전쟁난민과 정치난민을 배출하던 국가였다. 중동 출신 난민들과 처음 대면할 때는 당연히 그들의 인종과 종교부터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본능적인 두려움을 잠시 제쳐두고 그들의 어린 시절, 가족, 일상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보면,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제주도 난민 기사를 읽을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피부가 검은 낯선 이들이 제주도를 위협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그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겪은 6.25전쟁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정치난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 새로운 삶을 꾸려나간 재미교포들을, 해외에서 인종차별을 받았던 억울한 순간들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조소연: 프로불편러 대학원생.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나누다 보면 불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2018-07-05 | hrights | 조회: 1140 | 추천: 8
주윤아/ 회원 칼럼니스트  기간제 교사를 십 여 년 넘게 한 끝에, 올해 신규 임용되어 기적을 보여준 친구가 몹시 분개한 목소리로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첫 발령 학교에 처음 출근한 그녀가 받은 업무희망원에는 출신대학과 전공 등의 기본 정보 외에 혼인여부, 임신과 자녀계획 등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정보를 기재하게 되어 있더란다. 그뿐 아니라 교무실 한 가운데서 개인정보를 공개적으로 묻고 심지어 부동산까지 연결해 주며 학교 근처로 이사 오라고 종용하는 등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침해하는 언사를 했다는 것이다. 친구의 난색을 눈치 챈 교무부장 교사는 학교에 기숙사가 있어 시간 외 혹은 야간 근무 등의 업무 배정에 필요하다고 얼버무리더란다. 늦깎이 신규이기에 심호흡 한번으로 인내심을 발휘하던 친구는 교무부장 교사의 그 다음 지시(?) 사항을 듣고는 더는 할 말을 잃었다. 3월에 있을 전입 신규교사 환영행사에서 신규교사 장기자랑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학생들 표현대로 ‘헐 대박~’이다! 비슷한 사례는 올해 학교를 옮긴 또 다른 친구에게서도 확인되었다. 그곳도 혼인이나 자녀계획 등에 대한 정보를 공개적으로 수집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보충수업이나 야간 자율학습감독 등의 업무 배정 때문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학교가 교사들의 사적 정보를 수집하여 이를 업무 배정에 공정하게 참고한 경우를 별로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학교조차 가장 사적인 정보를 집요하게 수집하며 개입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친구의 학기 초 이야기를 듣고, 분노와 황당함에 국가인권위원회에 민원을 접수해야 하나 의논을 하다가 이내 이미 우리들의 개인정보가 교육청과 학교에 집적되어 관리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되었다. 교육기관 등에서 업무편의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NEIS(나이스,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의 교사 인적사항에 이미 방대한 내용들이 수집되어 있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 항목을 열어보지 않아 잊고 있었을 뿐, 교사로 임용되던 첫해에 키, 몸무게 등 체격사항(도대체 이것을 왜 수집하는가?)을 비롯하여 가족관계(부모, 배우자, 자녀 등)라는 가장 사적인 정보를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제출하여 지금까지 관리되어 왔다. 과연 교육청과 학교가 교직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여 관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2003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구었던 NEIS 철폐투쟁은 학생의 개인정보를 정부가 전자적으로 집적해 관리하는 방식을 반대하고 개인정보의 불법유통을 막아내려는 노력이었다. NEIS는 모든 교직원들이 입력에 대한 개별 권한을 인증 받고, 자신의 노동실적은 물론 학생들과 보호자들의 인적사항을 기본으로 성적, 행동과 신체발달상황, 처벌기록까지 수백여 가지의 정보를 입력하는 시스템이다. 초등부터 고교까지 축적된 자료는 수년간 보관되며, 교육부는 이들의 자료를 열람하고 통계를 낼 권한을 갖고 있다. 이것이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대면도 소통도 하지 않고 일제히 컴퓨터 앞에 앉아 매일의 노동과정을 입력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업무희망원  2018년의 ‘빅 브라더(Big Brother)’는 국민들의 초· 중· 고 시절의 개인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교사들의 노동과정을 전자통제할 수 있다. NEIS 철폐투쟁을 통해 정보인권의 중요성을 알고 개인의 자기정보통제권을 강화하는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사들은 교육공무원이라는 신분을 구실로 정치기본권 등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정보인권의 주체의 범주에서도 배제되었다.  다시 학교 안으로 시야를 좁혀 보자. 학기 초 업무희망원을 통해 교사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관리자들이 사전정보를 파악하여 이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 잡무를 줄여주려는 목적일까? 오히려 평교사들을 공적 업무의 영역이 아니라 사생활의 정보를 악용하여 유사시 비난하고 견제하며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미 비혼이나 자녀가 없는 교사에게 각종 잡무나 기피 업무를 배정하는 경우도 많지만, 기혼이며 자녀가 있는 교사(특히 여교사)들 역시 별 근거도 없이 가사나 자녀양육 때문에 업무를 소홀히 한다고 앞뒤에서 비난하거나 주요 보직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여초집단인 교직사회에서 여교사들의 관리자 진출의 수가 현저하게 적은 것도 일반 기업의 ‘유리천장’과 상황이 다르지 않다. 정보인권 문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직장에서 나의 개인정보를 약점으로 이용하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교육 당국에게 이미 수집한 나의 정보를 폐기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공무원의 연가 사유 항목이 삭제되었음에도 학교는 올해도 교사들에게 ‘감사시 지적 사항’이라며 외출과 조퇴 사유를 구체적으로 기재할 것을 강요하며 근태상황을 전자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교사들의 개인 연락처가 공개되고, 교사들의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이미 신뢰와 소통의 기능을 벗어나 ‘24시간 상담소’가 된 지 오래다. 이는 단순히 학생과 그 보호자들의 사이버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돌봄 책무를 학교에 전가하고 있는 사회구조에서 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학생들 역시 입시라는 블랙홀 때문에 불명확한 예단과 평가를 받으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있고, NEIS 철폐투쟁의 기억은 어느덧 사라지고 학생생활기록부에 집적되는 개인정보의 양은 해마다 알게 모르게 늘고 있다. 학생들의 정보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안의 심각성이 오래전부터 중차대하게 논의되고 있으므로 여기서 거론하지는 않겠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지만, 학생인권과 교권이 대립 관계가 아니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이해할 때만이 비로소 소통과 존중의 교육공동체가 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는 교사이면서 동시에 개인으로서 시민이다.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정부와 관리자에게 통제받는 교사가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실질적 평등과 민주시민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교육청은 집적한 개인들의 사적 정보를 폐기해야 한다. 동시에 교사들은 학교에서 ‘내 마음에 걸리는’ 바로 그 순간을 외면하지 말고 그 불편의 이유를 자문해 보고, 나아가 교직원협의회에서 용감하게 일어나 이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주윤아: 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2018-06-26 | hrights | 조회: 1094 | 추천: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