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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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권지은/ 청년 칼럼니스트 그때는 무얼 꿈꾸는지도 모르고 꿈을 꿨었다. 혹여나 우리가 가진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땐 서로를 향하고 있었던 듯하다. 순식간이었는지, 치밀한 움직임 속이었는지 돌이켜 세어 볼 새도 없이 거센 바람이 바닥부터 불었고, ‘우리’라 불리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까지 와있다. 꿈들이라 말할 만한 감정들은 망가져버렸고, 애정과 관심이라 할 감정들은 우리 안에서 버텨내지 못했다. ‘우리’라 불리는 사람들은 ‘미래’라는 것을 들먹이는 데에 유치하다는, 또 사치스럽다는 양가감정, 폄하와 동경을 몰래 혹은 공공연히 품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자살충동과 우울증을 겪는 사람에게 더 아파보라고 말하는 것과 이미 요동치는 땅 위에 선 사람에게 더 흔들려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그 속내를 헤아리기에는 우리가 너무 바쁜 것이다. 우리는 그때엔 어려서 전혀 몰랐다지만 부모님이 IMF 경제위기를 겪으시고, 역사적인 첫 정권교체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란 것이, 태풍의 시작이라면 시작이었다. 뒤늦게 알았다. 투기자본유치, 은행매각, 공기업민영화는 자연히 불안정한 노동환경(정리해고, 비정규직 양산)이 필요한 일들이었다. 이때에 조급하고 불안해진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재테크(주식, 부동산)였다. 우리가 조금 철들기 시작할 즈음의 노무현이란 대통령은 예전의 무서운 할아버지 대통령들과는 달리 왠지 친근하고 유머러스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첫 좋은 대통령’으로 각인이 돼있다. 그의 소탈했던 미소를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온다. 허나 그의 노란색 바람도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으로 태풍을 독촉하다시피 한 게 사실이었다. 한미FTA처럼 젊은 사람들의 먼 미래까지도 담보해야 하는 대기업수출위주의 큰 정책을 시작했다. 비정규직법안을 통과시켜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 힘든 상황이 되고, 큰돈을 가진 사람들은 더 쉽게 돈 벌기 좋은 환경이 굳어져갔다. 우리는 큰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일하고 돈을 받아 사는 사람이 될 것이었는데, 어려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우리나라가 왠지 화려해지고 세련되고 ‘글로벌’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명품도 유행했다. 사람들은 양극화라 떠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때가 왔다. 부모님이 불안한 마음에 재테크에 몰입해 우리를 키워냈던 것처럼 우리는 밥벌이를 위한 스펙을 쌓는 데에 전심을 다하고 있다. 부모님들의 부동산 재테크에 부풀린 집값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슬픈 역사다. 부모님은 우리 걱정에 밤을 지새우시고, 우리는 그 부담을 홀로 감내하려 노력하면서 내면으로 빠져들 뿐이다. 이런 우리가 비록 더 이상 ‘미래’를 믿기 어려운 사람들이라 해도, 말했듯이 그것에 대한 동경까지 오롯이 지워버린 사람들은 아니다.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가 선 땅의 요동침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데면데면 굴 때에, 우리한테 손 내밀어 준 사람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청춘콘서트. 멘토. 안철수. ‘안철수 현상’은 우리들의 피곤함과 좌절의 결과였던 ‘정치적 무기력증’을 오히려 흡수해 피어난 돌연변이 꽃이었다. 그가 결국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배경에는 우리들의 아픈 씨가 곳곳에 비치는 것이다. 안철수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이 ‘우리의 대통령’이 되어야만 한다는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철수’와 ‘경제민주화’라는 두 새로운 바람이 서로를 잘 안아낸다면, 혹시 망가진 우리의 꿈이나, 마음이나, 애정 같은, ‘삶’을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 오지 않을까? 우리도 스치듯 생각해 보았다. ‘경제민주화’라는 말도 말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어색한 단어였지만 지금은 정치인이라면 모두 “그것은 내 것”이라고 말하듯이 유행을 타고 있지 않은가. 좋은 것이 유행이라면 무엇이 나쁠까. 타라, 잘 타, 유행이든 바람이든. 정말 ‘다른 것’이 오게 될 거라면. 그런데 ‘나는’ 얼마 전 좀 나쁜 소식을 들었다. 우리의 안철수 대통령 후보와 두 손 맞잡은 ‘경제민주화 담당자’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라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소식이 나쁜 소식이 돼버린 건 그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맡아 했던 핵심관료라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경제민주화’가 ‘핫’한 새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거로 남길 바라는 지난 정부의 경제 관료가 다시 온다면, 경제민주화는 정말 ‘새로운 것’일 수 있을까?   안철수 후보가 지난 9월 19일 오후 서울 충정로 구세군아트홀에서 대선출마를 선언하기 앞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우리의 꿈이 망가져버린 이유는, 밥벌이 할 곳을 찾기가 어려워서, 어렵게 찾으면 비정규직이거나 월급이 너무 적어서, 회사가 날 함부로 대하고 일을 너무 많이 시켜 자존심 상하고 몸이 너무 피곤해서였는데. 그래서 우리의 고민을 직접 들어주던 안철수 교수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와 우리의 밥벌이 생활을 제일 우선으로 고려해줄 것이라고 당연히 믿었던 것인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안철수의 경제민주화’는 이런 우리의 것들과 맞닿아 있었던 걸까? 우리에게 안철수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안철수 캠프는 청년들이 벤처사업을 했을 때, 능력껏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시장 환경’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중엔 창업할 사람보다 일한 대가를 받고 출근할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 환경’보다는 ‘노동 환경’에 대한 깊이 있는 정책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최저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래서 정규직 일자리를 나눌 수 있고. 모두가 기본적인 삶은 유지할 수 있는 ‘달라질’ 사회. 이런 것들에 대한 ‘완벽한 대안’은 아니라도 ‘뚜렷한 의지’ 말이다. 안철수 대통령 후보는 계속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책을 만들어가겠단 말을 몇 번씩 했다. 그도 금세 우리의 ‘과거’가 돼버리면 어쩌지? 이 ‘걱정’이 크게 번져서 이번엔 직접 우리가 시대정신이 흐르는 바람을 또렷이 지켜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아직 비어있는 정책이 많다. 복지도 모르겠다. 정말 이야기를 들어줄까? 그렇다면 우리도 말을 해볼까? 우리의 애정이 식지 않기를!
2017-06-27 | hrights | 조회: 358 | 추천: 0
최수범/ 청년 칼럼니스트 치열하고, 힘들고, 기다리고, 노력해야 한다. 바로 청춘 콘서트에 참가하기 위한 마음가짐이다. 수많은 청년들이 멘토의 말을 듣기 위해서 다양한 청춘 콘서트에 몰려간다. 청춘 콘서트는 문전성시고, 청춘을 말하는 책은 끊임없이 출간되고 있다. 멘토의 트위터 글 한줄에 수많은 청년들이 열광한다. 청춘을 향한 치유와 멘토링이 시대적 사명이 된 듯하다. 그들이 하는 조언은 대부분 비슷하다. 조금 지난 유행어로 말하자면 “내 안에, 너 있다” 정도 되겠다. 나는 너의 고통을 다 이해한다는, 너와 나는 별로 다르지 않다는 위로의 말이다. 대표적인 멘토인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는 저자 스스로 핵심을 짚어준다. “어찌 보면 이 책의 내용들은 모두 큰 지식을 얻고, 큰 책임을 느끼고, 큰 꿈을 꾸라는 뻔한 이야기의 반복이다.” 저자는 청춘에게 가난은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이 가난이 미래를 위한 아름다움이라고 포장한다. 그러나 가난은 사회구조적이고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 저자는 순진함을 넘어서 황당하게 느껴질 만큼 이 현실을 모른다. 그는 일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소득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고, 직업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선택할 것을 조언한다. 지금 불합리함을 참고 기회를 노리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현실에서 ‘열정노동’(너희들은 원하는 일을 하니까 저임금을 받아도 참으라는 논리)을 착취하는데 공모자로 작동할 뿐이다. 꿈을 위한 열정 앞에 돈은 불경스러운 것이 된다. 그는 ‘학창시절에 과외로 너무 많은 돈을 벌어서 오히려 나약해졌다’는, 지금 청년 세대들에게는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책 속에서 상담한 학생들은 학벌 사회에서 혜택을 받은 축에 속한다. 등록금에 허덕이며, 학벌의 낙인 때문에 줄줄이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는 지방대생은 빠져 있다. 저자가 위로하는 '대학생'은 ‘실제의 대학생’을 대의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청년들은 자신을 위한 이야기인 듯 감동한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8월 말 기준으로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법륜 스님의 청춘 콘서트 ‘즉문즉설’에 수많은 청년들이 몰린다. 스님 멘토가 말하는 치유와 소통은 듣는 이를 기분 좋게 한다. 스님은 불교의 성직자로,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에서 빗겨나 있다. 그들은 청년들에게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에 매몰되지 말라고 조언한다. 마음을 비우고,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불화와 화합하길 권한다. 사회구조적 개혁 대신 자신의 성찰로 고난을 극복하고, 사태에 초연한 초인이 되길 주문한다. 이때 문제는 구조가 아니라 개인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스님 멘토의 조언은 현실의 살인적인 경쟁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의 청춘들은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강요당하고, 경쟁에 승리하길 요구받는다. 패자부활이 매우 힘든 사회에서 낙오는 곧 나락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등록금 고지서와, 수많은 서류전형 탈락 통보 페이지와, 학자금 대출 상환 통지서 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는 절대로 멈추면 안된다. 그래서, 스님 멘토는 역설적으로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보수주의와 결탁하고 있다. 그들의 조언을 가장 반길 사람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사진 출처 - 헤럴드경제   또 한편으로는 청년세대의 등을 토닥거려주며, 너희들이 잘못이 아닌 사회의 문제라고 말하는 응원형 멘토가 있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는 “<88만원 세대>를 통해 청년세대가 변화하길 바랐지만, 오히려 청년들이 움직이지 않을 명분을 주었다”며 얼마 전 절판을 선언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청년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필자는 88만원 세대를 읽고서 진보정당에 가입했고, 청년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책이 출간된 후 청년유니온이 설립되었다. 청년유니온은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주휴수당 문제를 제기했고, 문제를 해결했다. 그 스스로 창당 발기인으로 참석한 청년당 창당식에서 “이런 날이 올지 몰랐다”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석훈의 심정변화(?)에는 ‘20대 개새끼론’적 사고가 엿보인다. 20대 개새끼론은 20대의 반성을 촉구하는 기성세대의 논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보수 입장에서는 열심히 일하지도 않으면서 사회에 불만만 많은 젊은이를, 진보 입장에서는 사회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으면서 취업과 학점 등 개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는 젊은이를 비난한다. 이들은 20대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계몽을 요구한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총선에 패배하자 낮은 20대 투표율을 두고 욕을 한 것도 비슷하다. 총선 전에는 청년들에게 반값 등록금을 약속하며 사랑고백을 해놓곤! 가혹하기도 하셔라! 그들은 자신의 이념을 위해 청년세대를 이용할 뿐이다. 응원은 응원이 아니다. 멘토가 위로하는 20대의 서사와 환경은 각자 다르고, 가치관과 세계관도 모두 다르다. 질문시간에 잠깐 자신의 상황과 고민을 설명하고, 멘토가 자신의 서사와 가치관을 다 이해해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사실 멘토는 멘티의 서사와 가치관에 관심이 없다. 자신의 경험과 윤리가 진리인 양 조언한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도전하라고 말한다. 도전했다가 망하면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실패가 경험이 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도 않았으면서 무책임하다. 청년 세대도 반성해야 한다. 스스로 만들어온 기나긴 서사를 쉽게 폐기하고, 멘토의 즉흥적인 대답에 깨달음은 얻었다는 것은 스스로 성찰이 부족했다는 방증이다. 이 땅의 20대는 아이돌이라는 멘토 앞에 팬심을 불태우며, 시대를 고민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척 코스프레를 한다. 아니, 자신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 이 절망의 코스튬을 단호히 찢어버려야 한다. 이제는 멘토가 만든 이 기만적인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야 한다. 비닐하우스에서 살며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이야기는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열악한 상황 속에 체조 유망주를 방치한 사회가 껴안아야 할 부끄러움이다. 1등이 되지 못하면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한데도 도전을 강요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멘토는 청춘이라는 단어 안에 온갖 낭만을 집어넣고, 진통제가 치료제인양 약을 팔고 있다. 이제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 싸워야 한다. 청년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멘토가 아니라 꿈이라는 둥지를 지을 수 있는 생태계다. 하지만 멘토들은 생태계에 관심이 없다. 멘토는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우쭐해하고, 멘티의 존경은 아이돌 가수를 향한 팬심처럼 가볍게 남발된다. 멘토라는 신기루는 생태계를 사막화하고 있다. 이제는 허황된 신기루에 눈길을 주기보다 생태계를 키우고 지켜나가는데 나서야 한다. 이 생태계가 꿈을 따듯하게 품어 줄 수 있을 때, 멘토는 자연스럽게 필요 없어지게 될 것이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17 | 추천: 0
이상욱/ 청년 칼럼니스트 ‘너는 종북이니?’와 두 개의 풍경 큰 선거가 둘이나 있는 2012년, 소용돌이치는 정세 속에서 ‘종북’ 논란이 거세게 달아올랐다. 논란의 내용은 한국 사회에 북한 당국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주장에 경도되어 그들의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의미다. 소위 ‘종북’ 세력을 규탄하는 입장에서는, 이들이 대한민국의 적대세력이며 현행법상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추종함으로써 사회의 안전을 교란한다고 보는 듯하다. 나아가 이들이 국회의원이나 다른 중요한 영역에 진출함으로써 북의 ‘지령’을 수행하려고 한다는 주장까지 편다. ‘종북’ 논란은 다시금 역사인식의 문제, 그리고 소위 ‘국가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제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두 개의 서로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그 하나는 보수정당의 독선과 비민주적인 행태를 한목소리로 비판해온 진보세력 안에서의 ‘종북’ 비판이다. ‘종북’ 논란이 점점 높은 파고(波高)로 몰아닥치면서, 진보세력 안에서는 ‘진보 내부의 종북’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진보진영 안에 북한 체제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그런 낡은 사고를 벗어던져야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진보세력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는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북한의 권력승계, 인권 문제, 핵개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보수진영뿐만 아니라 진보세력 안에서도 서로에게 던지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사회의 좁디좁은 이념적 지형을 가로지르는 사상검증의 심문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쟁점이 떠올랐다. 한 정당의 유력 대선주자가 ‘5.16은 최선의 선택’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두고 올바른 역사인식이 무엇이냐는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부터 같은 당에 속한 사람들까지 민주화의 땀과 눈물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며 국가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에게 부적합한 역사인식이라고 비판한다. 그러자 발언의 당사자는 ‘내 주장에 동의하는 국민이 전국민의 절반’이라고 맞서고 있다. 19대 국회 개원일인 5월 30일 국회 앞에서 열린 반값 등록금 집회에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 뒤로 군복을 입은 한 시민이 1인시위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김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당권파는 ‘종북좌파 세력’으로 지목됐다. 사진 출처 - 뉴스1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권리 핍박과 질곡을 대가로 민주주의의 디딤돌을 놓던 시절, 어두운 감옥에서 그 많은 양심수들이 싸워야 했던 것은 야수와도 같은 독재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문과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외로운 공간에서, 전향서나 ‘준법서약서’ 한 장만 쓰면 나갈 수 있다는 유혹은 그 자체로 투쟁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매순간 느껴지는 가석방의 충동과, 투항을 종용하는 폭력 앞에서 그 분들이 끝까지 저항했던 것은 왜였을까. 어떤 생각이라도 행동으로 표현되어 다른 사회구성원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누구도 사람의 머릿속을 검열하고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 사상의 자유가 선언하는 천부의 인권이 아닌가. 고민하고 사유하는 머릿속까지 권력이 들어가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주물러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것이다. 부족함 없이 먹고 잘 권리, 자유로운 정치적 행위의 권리, 그 모든 인권이 박탈된 지엄한 고난 앞에서,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권리는 바로 ‘내면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아니었을까. 양심수들은 ‘종이 한 장’ 쓰고 나와서 다시 열심히 사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수탈하려는 폭력에 맞서는 것이 정의임을 증거했던 것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풍경을 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군사독재가 우리나라의 헌정질서와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세력 내부에 있는 ‘종북’ 세력 또한 헌정과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다시 말한다. 북한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느냐. 수십만 명이 수용소에 갇혀 있고, 3대에 걸쳐 한 집안이 권력을 독점하는 나라를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 있느냐고. 북한의 인권문제 등을 지적하지 않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묻게 된다. 무엇이 ‘인권’이고 무엇이 ‘진보’인 것일까? 북한인권법에 찬동하면 ‘인권’을 걱정하는 민주시민이 되고, 그들의 인권문제는 그들 스스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민주주의인 걸까? 나는 착종하는 두 개의 풍경과 그것을 둘러싼 몇몇 진보적인 사람들의 주장에서 ‘내면의 주권’을 도둑질하는 기이한 폭력을 본다. 진보 내부의 ‘종북’ 성향을 높은 목소리로 지적하는 그들의 물음은 실상 북한에 대한 입장 따위를 묻고 있지 않다. 북한에 대한 각자의 입장이 정치적으로 얼마만큼의 올바름을 담보하고 있는지를 논쟁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북한의 인권문제 등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유보적인 모든 입장을 취급할 수도 없는 의견으로 대우한다.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유일한 ‘진보’의 기준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면서, 그것에 어긋나는 다른 생각으로부터 ‘진보’의 영예로움을 박탈하는 그 지점에서 그들의 날선 질문은 더 이상 물음이 아니라 추방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친북’이라는 말밖에 모르던 기득권 세력들에게, ‘종북’이라는 더욱 ‘쌈빡한’ 무기를 선물한 것이 바로 몇 해 전 진보정당 안에서 있었던 일임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진보 스스로 반납한 사상의 자유 사회경제적 생존권, 정치적 자유권, 그리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향해 걸어온 이른바 진보인사들의 붓끝에서 ‘너는 북을 추종하는 낡은 진보다’라는 문장이 거침없이 쓰이는 모습은 그래서 슬픈 역설이다. 북한을 추종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열하는 자의적인 질문지를 작성해놓고, 그에 따라 집요하게 물음을 던지며 자신들의 기준에 어긋나는 관점을 거침없이 ‘낡은 진보’, ‘낡은 시대의 사고’로 깎아내린다. 오랜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의 앞길을 힘겹게 밝혀오며 겨우겨우 조금씩 얻어온 자유가, 스스로의 손으로 반납되는 장면은 서글픈 광경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북’ 논란과 ‘5.16은 최선의 선택’이라는 발언은 동일한 사태의 양면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끌벅적한 ‘종북’ 스캔들은, 인간이 응당 누려야 할 생각의 자유, 마음의 주권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훼손하는 기득권 세력과, 그것을 스스로 반납하면서 자신의 투명성을 시위하려는 일부 진보세력의 위험한 모습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군사반란의 ‘정당성’은 하나의 신기루와 같지만, 한편으로 그 고집스러움은 군사반란이 초래한 민주주의에 대한 모멸과 인간에 대한 무시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최후의 자유로서의 생각의 자유마저 박탈하려고 했던 어두운 폭력의 세기를 자의적인 기준으로 설명해내려고 한다. 두 사태의 똑같은 폭력성을 겨누지 않고, ‘인권’과 ‘진보’를 내세우며 ‘낡은 진보’와 ‘새로운 진보’를 수다스럽게 구별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지가 궁금해진다. 적어도 그 지점에서, 분단을 부당이익의 지렛대로 이용해온 사람들과 그 진보인사들의 입과 손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굽이진 골목에서 길어 올리는 인간다움과 진보 오히려 참된 인간다움과 진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현장 속에 있지 않을까. 대통령이나 유력 대선주자가 시장에 가서 떡볶이를 먹으면 곧장 방송에 나오지만, ‘민주’의 이름으로 당선된 구청장이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를 쓰레기차에 실어 철거한 것은 주목받지 못한다.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는 부모가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한 아이가 참변을 당할 때에야 비로소 국가는 아이의 빈소로 찾아간다. 지켜야 할 삶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 응시해야 할 광경을 응시하지 못하는 사회의 벽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느낀다. 북한의 인권실태를 대놓고 욕해야만 인권을 소중히 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정당과 똑같은 대북인식, 똑같은 역사인식을 가져야만 우리 사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자유는, 진짜 인권은 삶의 땅바닥을 한 걸음 씩 조용히 걷는 평범한 사람들의 힘겨움과 아픔에서부터 길어 올리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너는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얼마나 공허하고, 또 쓸모없는 물음인가. 그리고 그 물음이 품고 있는 매서운 폭력의 얼굴은 평범한 이들의 힘겨움을 덜어주는 데 얼마만한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견디기 힘든 폭염이다. 기록적인 열기 속에서 나와 친구들은 ‘대학생 통일행진단’에 참가하여 전국의 아스팔트를 누비고 있다. 무분별한 ‘종북’ 낙인찍기와 민족대결 정책을 반대하고, 남북화해를 외치며 8월의 폭염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용역들에 의해 습격당한 노동자들, 4년째 끝나지 않은 싸움을 이어나가는 쌍용차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참된 인권을 배워가고 있다. 희망은 ‘누구누구는 낡은 진보다’, ‘우리는 새로운 진보다’를 써내려가는 붓끝에서 나오지 않는다. 높은 목소리와 유려한 글솜씨가 다루어주지 않는 사각지대의 사연을 만나는 굽이진 골목에서,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쑥스럽게 겨우 나온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00 | 추천: 0
정지혜/ 청년 칼럼니스트 계절 학기를 끝마칠 무렵, 학교 앞 사거리에는 눈에 띄는 노란색 현수막 하나가 걸렸다. ‘반값등록금 민주당은 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었다. 이 현수막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대학생 표를 얻기 위해 참 애쓰고 있다는 일말의 안도와 민주통합당이 갖고 있는 청년에 관한 문제의식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동시에 밀려왔다. 이는 비단 민주통합당만의 문제가 아니며 공허한 ‘청년 프레임’에 갇힌 모든 이들의 딜레마일 것이다. 현수막의 문구는 최근에 읽은 어느 신문 기사와 오버랩 됐다. 그 기사는 ‘길거리에 폐지 줍는 노인들이 많다. 우리 모두 노인이 된다. 평균연령이 늘어나고 있으니 반값등록금 보다도 노인복지가 더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노인문제를 끌어들여 등록금 문제를 비판하는, 세대갈등을 조장하는 전형적인 기사였다. 이런 식으로 세대갈등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세대를 막론하고 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질문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반값등록금을 비판하는 주된 관점 중에 하나이다. 민주통합당의 반값등록금 공약과 이 기사에는 공통점 있다. 청년에 대한 시혜적인 인식과 태도이다. 민주통합당의 현수막은 ‘청년 여러분, 많이 힘들죠? 저희가 원하는 거 해드릴게요.’라고 말하고 있고, 문제의 기사는 ‘대학생 너희들은 그렇게까지 힘들어 보이지 않으니 네 힘으로 살아라.’라고 말한다. 두 주장 모두 ‘청년’의 목소리를 싣는 데 실패했다. 그들이 말하는 ‘청년’이 청년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청년’이란 단어가 소비되는 방식을 비판한 주장들은 전부터 있었다. 『88만원 세대』를 쓴 우석훈은 짱돌을 던지라고 말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짱돌은 돌고 돌아서 결국 실체가 없는 ‘청년’들에게로 쏟아지고 있다. 따라서 ‘청년’들은 되돌아온 짱돌을 맞아도 맞았는지 모르고, 그래서 아프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청년들은 시혜적인 정책 정도로 만족해야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와 한명숙 전 대표, 우상호 반값등록금특위 위원장 등 의원들이 지난 7월 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당사 앞에서 '반값 포차 전국투어 발대식'을 갖고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당신들의 청년은 누구인가 ‘청년’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에는 ‘청년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같은 성인인데도 왜 누구는 청년이라 호명되고, 누구는 청년이라 호명되지 못하는가? 반값등록금 문제는 모든 청년들을 담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다. 반값등록금 운동은 대학교 중에서도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 ‘학생’들의 참여로 주목받을 수 있었다. 물론 반값등록금 운동은 전국적이었지만 서울 유명 대학생들의 움직임이 없었더라면 유명 언론에서 몇 차례씩 보도를 하는 등의 관심을 과연 주었을까. 그러므로 반값등록금 운동의 내용과 주체들을 청년이라는 범주에 넣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청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포함될 수 있다. 반값등록금을 찬성하는 학생도 있고, 반대하는 학생도 있다. 대학생 중심의 청년 실업 대책을 비판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학생이 아닌 청년이 있을 수 있다. 당연히 정반대의 사람도 있다. 또한 백혈병으로 죽은 청년노동자도 있고, 반값등록금과는 상관없이 자유로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돈 많은 청년도 있다. 청년이라고 불리는 대상들의 이념과 계급과 직업들은 이렇게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이 누구인지 파고들수록 세대론의 힘은 약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이라는 이름표보다, 이념과 계급이 정체성 형성에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청년담론을 위해서 그럼에도 우리가 청년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청년들은 그 꼬리표를 뗀 성인들과는 종종 다른 위치에 놓인다. 청년의 시기를 지난 성인들에게 청년은 젊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미화되는 존재이다. 그 시기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말 청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 속에 앞으로 청년담론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있다. 청년과 청년이 아닌 성인의 차이는 단순히 젊음과 늙음만이 아니다. 그 둘의 차이는 마치 미성년자와 성년의 차이와 같다. 권리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같은 성인임에도 나이를 기준으로 다양한 제한들이 가해진다. 가령 전세자금대출의 경우 35세 이상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대학생의 경우 성인임에도 자퇴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청년이라면, 청년에 속한다는 이유로,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년은 힘들다’라는 문장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또한 ‘청년이기 때문에’ 힘든 것인가, 아니면 ‘어떠한 청년이기 때문에 혹은 청년이 아니더라도’ 힘든 것인지를 따져야 한다. 만약 전자의 대답이 나온다면 이전과는 다른, 제대로 된 청년담론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대답이 나온다면 우리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서의 청년은 모든 청년들을 아우르지 못하는, 대표성을 잃은 ‘청년’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반값등록금이 남긴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반값등록금이 모든 청년들을 대변하지 못했듯이, 우리가 사용하는 ‘청년’ 속에는 특정한 청년만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반값등록금이 시혜적인 정책으로 환원되었듯이, 청년을 위한 정책은 청년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는 방향이 아니라 시혜적인 차원에 갇혀있다. 위의 단계가 선행될 때 제대로 된 청년담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청년들이 있을 것이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31 | 추천: 0
박용석/ 청년 칼럼니스트 올림픽이 끝났다. “런던이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찰 것”이란 예언은 적중했다. 십여 일간 치러진 ‘인류의 축제’엔 이번에도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자국 선수의 경기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기본에 판정 번복과 오심, 정치적 표현에 의한 메달 박탈 등. 언론은 연일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다른 소리들은 잘 들리지 않을 만큼. 하지만 올림픽이 진정 인류의 축제인가, 아니면 국가주의를 확대하는 환상일 뿐인가 하는 논쟁도 여전히 뜨겁다. 내 의견은 이 중 후자다. 물론 올림픽엔 긍정할만한 가치들이 있다. 누구나 공정한 규칙으로 경쟁하고 노력한 만큼 결실을 거둔다는 가치,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가치들이다. 하지만 순위를 가리기 위해 0.01초의 시간까지 따지며, 오로지 이기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권리와 평화를 대변할 수 있는지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스포츠 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스포츠 경기들이 시장자본주의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폐해를 총합한 ‘제국주의’의 장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는 과도한 확대해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권과 평화, 친선이란 가치들이 올림픽에 부여되는 것만큼 과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 폐막식에서 수많은 폭죽이 올림픽 주경기장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사진 출처 - 중앙일보   애초에 프랑스의 남작 피에르 쿠베르탱이 올림픽을 고안한 목적은 인권과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영국의 ‘근대 스포츠 교육’방식을 프랑스에도 수입하는 것이 쿠베르탱의 첫 발상이었다. 쿠베르탱이 고안한 근대 올림픽은 오늘날 수많은 미사어구로 수식되었지만 그 근본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한 육체를 가진 프랑스인을 양성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개최된 이유가 제전(祭奠) 기간 동안 전쟁을 멈췄던 고대 올림픽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란 것도 미심쩍다. 당시 그리스는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 함대가 나라비노 해전을 통해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시킨 나라였다. 독립 이후 그리스엔 바이에른 공국의 왕자 오튼 1세가 즉위했고 영국으로부터 내정 간섭을 받았다. ‘독립’이란 말은 무색했다. 오스만-트루크에서 영국으로 지배국만 바뀌었다. 이후에도 그리스는 크림전쟁을 비롯해 수많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얽혀 평화와 친선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인과관계를 증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그리스에서 첫 근대 올림픽이 개최된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1차세계대전의 배경엔 몰락하는 동방의 두 제국(중국과 오스만-트루크)의 영토를 식민지화 하려는 서방제국 공통의 목적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올림픽은 서방 제국과 그들의 지배를 받는 식민 국가들이 함께 모여 치른 체전에 불과했다.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이런 실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후, 냉전시기의 올림픽은 또 하나의 전쟁터에 불과했다. 올림픽에선 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도 이어졌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올림픽까지 유색인종의 참가가 금지됐고 1968년, 멕시코 올림픽까지 겨우 6종목에만 여성의 참가가 허용됐다. 올림픽은 이렇게 인권과 평화, 친선이란 가치와 완전히 반대편에 있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끝났고 냉전도 이제 끝났다고들 한다. 세상이 바뀐 만큼 올림픽도 바뀌었다고 한다. 맞다. 오늘날 올림픽에서 인종과 여성을 차별한다면 세계적인 문제로 비화될 것이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올림픽이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가 어디인지를 평가하는 장이란 사실이다. 올림픽은 공식적으론 국가별 순위를 집계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철저하게 매겨진 종목별 순위와 메달은 국가별 순위로 자연스럽게 치환된다. 군사력, 혹은 경제력으로 대표되는 국력의 순위와 올림픽 메달 순위는 늘 거의 비슷하다. 누구나 공정한 규칙으로 경쟁하고 노력한 만큼 결실을 거둔다는 가치조차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증거는 없지만. 메달 집계로 보면 미국 16번, 러시아 7번, 영국, 독일, 중국 등이 각 한번씩 1위를 했다. 이 나라들은 어떤 의미로든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들이다. 지난 일요일엔 2012년판 국력순위가 결정됐다. 한국이 5위를 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순위가 누구나 공정한 규칙으로 경쟁하고 노력한 만큼 결실을 거두는 나라,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평화를 위하는 나라의 순위가 아니란 점이다. 대체로 그 정반대의 나라들이다. 누가 제일 힘이 센지 정하는 것도 그 나름으로 의미는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경쟁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론 지금처럼 전 세계가 열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더 이상 누구나 공정한 규칙으로 경쟁하고 노력한 만큼 결실을 거둔다는 거짓말,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거짓말이 올림픽을 수식하지 않기를 바란다. 올림픽은 어느 나라가 제일 힘이 센지 가르는 대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올림픽 개최를 위해 수십조 원을, 참가하는 데 수천 억 원을 쏟아 붇는 게 합당한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 그 돈이 올림픽에 쓰이지 않았다면, 인류는 더 많은 평화와 인권을 누리고 있을 것 같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67 | 추천: 0
정다운/ 청년 칼럼니스트 덥고, 습하다. 푹푹 지친다. 여기는 아주 이상한 공간이다. 빌딩 숲 사이의 옛 궁궐도 묘한데, 나는 그 앞에 쳐 놓은 직사각형 텐트 안에 들어앉아 있다. 바로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이다. 텐트 내부는 더 희한하다. 난데없이 스물 둘이나 되는 고인들을 위한 향이 피워져 있다. 그 영전 앞에는 곰보빵이 쌓여있다. 한달 전쯤, 광장에서 그곳을 바라보다가 묵념을 한 적이 있다. 스물 둘이나 되는 목숨이 허공으로 사라졌다니…… 트위터에 140자짜리 글을 몇 개 올렸다. 오늘 여기에 왔는데, 어떻더라 하는 짧은 감상. 그리고 빨리 누군가가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한탄. 곧 몇 개의 답장을 받았다. “안타깝지만 애초에 사태를 그렇게까지 키운 건 폭력적인 시위대 아닌가?”, “억울한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건물 점거하거나 화염병 만드는 건 좀 아닌 듯” 나는 곧장 답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랬을까?” “폭력적인 공권력이 더 문제다” 용산 참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도 나는 이런 식으로 밖엔 설명하지 못했다. 게다가 마음 한 구석엔 같은 안타까움이 있었다. ‘시위가 조금 더 이성적인 방법이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촛불집회처럼 평화시위를 했다면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진 않았을까?’ 한달 전과 달리 오늘은 이 공간 안에서 광장을 바라보며 한참 머무른다. 나는 이 분향소가 평화롭고 효과적인 농성방법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진 않은 듯 하다. 이 희한한 광경에 여러 사람이 눈살을 찌푸린다. 외국인도 많이 오는데 창피하게 뭐 하는 짓이냐고 성내는 사람도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자랑스런 역사적 유물 앞에 ‘분향소’라는 암울한 광경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몇 달 전 레이디 가가의 내한콘서트가 떠올랐다. 콘서트장 주변으로 몇몇 보수•종교단체들이 동성애자 반대 시위를 했다. 그들은 무력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 시위가 폭력적이라고 느꼈다. 평화시위란 무엇일까? 폭력시위란 또 무엇일까? 촛불을 들고 조용히 걸으면 평화시위이고, 화염병을 던지고 죽창을 휘두르면 폭력시위인 것일까?   ▲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앞에 놓여진 미술작품과 꽃.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언제부터인가 잘못 학습되었다. 애초에 시위의 방법을 가지고 평화롭네, 폭력적이네 논하는 것은 분쟁을 바라보는 핵심이 아니다. 비폭력 평화시위는 옳고, 폭력시위는 나쁘다는 이분법은 시위의 본질을 가린다. 폭력의 기준도 애매하거니와, 그것이 합법인지 불법인지 정하는 것 또한 권력이다. 질서를 해치거나, 소란스러운 시위가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다면, 4.19와 6.10항쟁부터 다시 심판해야 할 것이다. 힘없는 세력이 결정권을 쥔 세력에게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시위이다. 합법인지 불법인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상식과 정의의 잣대로 맞춰보아야 한다. 그러면 SKY(쌍용, 강정, 용산)의 농성자들은 한낱 이기적인 시위꾼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경쟁구도와 강대국의 패권다툼에서 탁!하면 억!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희생자들이다. 그 속에서 울분을 억누르고 평화롭게, 모두 간디 같은 시위자가 되라는 요구는 권력층의 욕심일 뿐이다. 맞은편에 재능교육이 보인다. 옆에 국가인권위도 보인다. 괜히 야속하고 서운한 마음이 솟구친다. 오늘따라 분향소에 눈길을 두는 사람이 많이 없다. 벌써 100일이 넘었다 보니, 올 사람은 거의 다 왔다고 봐야 한단다. 대한문 앞에서 수문장교대식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사람들이 그쪽으로만 몰려가니까 괜히 더 심통이 난다. 곰보빵이 새로 도착했다. 전태삼 선생이었다. 형인 고 전태일 열사가 생전에 노동자는 늘 배고프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매일같이 곰보빵을 사다 스물둘 아까운 목숨들의 영전 앞에 놓아주고 계셨다. 전날 가져온 빵을 나누어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폭력의 역사를 몸소 겪어온 그분은 나의 성토에 오히려 미소만 지으셨다. “옛날처럼 자는 사람 머리에 검은 봉지 씌워서 납치하진 않지만, 그래도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야” “그냥 니가 왜 이런 곳에 이끌려 왔는지 생각해 봐라. 그리움이다. 그거면 된 거 아니니? 마음이 시키는 곳으로 가서 힘을 보태면 되는 거야” 그래! 오늘도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는다. 눈앞에 보이는 촛불이나 화염병을 잠시 잊고, 왜 여기에 서있는가를 생각한다. 사람의 귀중함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는 자리인지. 소수의 안정이 아니라 다수의 평화를 위한 투쟁이 깃든 곳인지를 느껴본다. 평화시위인지 폭력시위인지 가리기 보단, 평화를 위한 싸움인지, 싸움을 위한 싸움인지를 가려낸다. 덥고 습하고 푹푹 지치는 날씨지만 미소가 지어진다. 나의 그리움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더듬어 본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00 | 추천: 0
김은성/ 청년 칼럼니스트 우리는 그 전갈을 동시에 들었습니다. “용산에서 여섯 명이 죽었답니다.” 이 신새벽부터 누가 누구를 죽인 것일까. 우리는 동시에 궁금해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열어 이리저리 뒤져 보았지만 세상은 말끔하고 고요했습니다. 물을 곳 없어 황망한 나와 달리, 당신은 물을 곳이 많았나 봅니다. 이내, 여러 사람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지지직, 특공대 여섯.” “지지직, 시위대 여섯.” “지지직, 유언비어랍니다.” 그 시각 용산 주변을 달리고 있던 택시기사들은 특종을 놓치지 않으려는 기자처럼 흥분해 있었습니다. 농성자와 특공대의 죽음이 한 데 뒤섞여 ‘어쨌든 여섯 명’이 되었고요. 누군가의 점잖은 목소리도 들려왔습니다. “거, 아직 자세히 모른다네요. 우리 기사님들, 함부로 욕 좀 하지 맙시다.” 한참을 조용하던 당신은 전달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호기롭게 심판을 내려 주었습니다. “개새끼들, 쌩난리를 치더니 기어코 경찰을 죽였구만!” 침묵 속에서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거스름돈을 건네던 당신은 혼잣말인 듯 당부인 듯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위꾼을 조심해야 해.” 영화 <두 개의 문>을 보고 나오는 길, 황폐해진 마음을 추스리며 그 새벽을 떠올렸습니다. 캄캄한 극장에서 그보다 더욱 캄캄한 화면을 당신과 나란히 앉아 볼 수 있었다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문을 나오며 당신은 뭐라고 말했을런지요. 여전히 툭, 내뱉을까요. “개새끼들.” 하고. 당신 대신 내 친구가 말했습니다. “개새끼들.” 감상이 고작 그거냐는 내 물음에 그가 답했습니다. “할 말이 있겠냐. 개새끼들. 아, 진짜 나쁜 새끼들.” 그 말들만 저도 열심히 따라했습니다. 슬프다, 화가 난다, 증오한다, 억울하다, 황망하다, 분하다. 어쩐지 그 어떤 동사도 형용사도 가져다 붙일 수가 없어서요. ‘사람이 저토록 아파도 되는 것일까’ 두 시간 내내 그 문장만 떠올랐어요. 사실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마치 ‘건조한 보고서’ 같은 영화 앞에서, 울 것이 두려워 가져간 티슈는 부끄러워졌고 우리는 말을 잃었습니다. 눈물을 쏟지 못해 온몸이 아프니 욕을 할 수 밖에요. 당신과 셋이서 욕을 뱉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잠시 또 생각했어요.   ▲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내 아버지 이야기 당신에게도 당연히 아버지가 있을 테지요. 제게도 물론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2주 전 불에 탄 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엔 없었어요. 놀라지 마세요. 화장 이야기니까. 매장 후 십여 년이 지나면 화장해 나무에 뿌린다네요? 가족이 모두 모여 그 일을 했습니다. 아무리 묘 자리가 나빠도 상식적으로 그럴 수는 없다는데, 어른들 말씀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시신은 땅 속에서 고스란히 유지돼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온몸이 떨렸지만 할 일을 바쁘게 해야 했습니다. 뼈를 추슬러 담으려던 작은 차는 돌려보낸 뒤 시신을 실을 큰 차를 찾느라 동분서주했고, 서울에는 마땅한 화장터가 없어 지방까지 내려가야 했습니다. 마침내 시신이 화장터에 들어간 2시간 동안 우리는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었습니다. ‘어서 타라, 어서 타, 완벽하게 사라져 버려라’ 이승을 떠나지 못한 아버지의 사정을 알 수 없어, 그의 아내와 아들과 딸은 열심히 빌기만 했습니다. 그의 근심과 염려와 아쉬움과 억울함이 모두 타 버리기를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아버지의 몸은 사망 후 12년이 지나고서야 완전히 소멸됐습니다. 차가운 분노, 지속적인 저항 제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어 아버지 이야기를 빌려 왔습니다. 어서 보내고 싶지만 한편으론 영영 보내기도 싫어서 고통과 불안으로 떨고 있던 화장터에서의 2시간을 고스란히 되새기는 듯했습니다. 도망쳐 버리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제 고통이 모래알처럼 느껴지더군요. 2009년 1월 20일, 우리가 차에 있던 그 새벽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무리의 철거민이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다음날 망루도 사람도 검게 타 버렸습니다.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가족과 친구를 망루에 올려보낸 사람들은 그날 저녁 무렵 덜컥 시신 다섯 구의 부검 소식을 듣게 됩니다. 통상적으로 시신 한 구의 부검은 2시간이 걸린다는데, 용산의 다섯 시신은 총 2시간 안에 부검되었습니다. 시신에는 ‘테러리스트’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부검에는 가족들의 동의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땠을 것 같나요? 저라면 누구의 말도 믿지 않고 아버지를 찾아 헤맸을 것 같습니다. ‘기어코 살아 나왔을 것이다. 내가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집념에 사로잡혀 도시를 구석구석 뒤졌을 것 같습니다. 유영숙 유족도 처음엔 남편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신 확인소에서 그녀는 그을린 남편의 얼굴을 알아보게 됩니다. 불에 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남편 고(故) 윤용현씨는 ‘맞아서 죽었’습니다. “남편의 몸에는 그을음만 묻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가슴뼈는 쪼개어졌고 배에 감긴 붕대에는 혈흔이 선명했습니다. 고통으로 이는 앙다물어져 있었습니다.” 윤용현 씨 뿐 아니라 시신들의 상태는 참혹했습니다. 갈라진 두개골, 파열된 장, 도구에 의해 잘린 손. 경찰은 이들의 사망원인을 ‘화재에 의한 질식사. 구타 흔적은 없음’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믿을 수 있었을까요. 유족들은 진상 규명을 강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다만, 영화는 참사 현장을 다루는 방송뉴스보다도 절제돼 있었습니다. 유족들의 울부짖음이라던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현장은 관객의 상상에 맡길 뿐입니다. ‘필요한 것은 순간적인 분노와 어쩔 수 없는 망각이 아니라 차가운 분노와 지속적인 저항’이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 증오와 분노, 억울함, 당혹감, 그 모든 감정의 결말에는 슬픔이 자리잡는다지요. 끝의 끝의 끝에 가 닿으면 기어코 사람은 슬퍼진다고요. 하지만 용산 사람들은 슬퍼할 권리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목 놓아 울 만한 곳 한 평도 그 국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에게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드리고 싶다는 것, 하루 빨리 고통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용산 참사에 대해 정확한 통계도 주장도 보탤 수 없는 저의 초라한 감상문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버지, 남편, 친구의 시신을 ‘제대로’ 태우지 못했기 때문에. 화도 아쉬움도 다시 태워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아직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보내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이 이렇게 아파도 되는 것일까요. 그 분들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날을 위해 이제 좀 차가워져야겠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친구 한 명과 동행해 한 번 더 보려고요. 은폐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이 차가운 분노를 멈추지 않으면, 우리의 “개새끼들”하는 소리가 당신 귀에 가 닿을까요. 그 날처럼 당신과 나란히 앉아 이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24 | 추천: 0
김종현/ 청년 칼럼니스트 비싼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 휴학을 선택한지 5년 만에 친구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동기들은 이미 졸업했거나 학교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때, 그는 겨우 2학년으로 새 학기를 시작했다. 그가 학교로 돌아온 이유는 딱 하나다. 휴학 중에 일하던 직장에서 대학 졸업장의 유무가 차별로 이어지는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시 학교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친구는 늦은 복학과 취업 문제로 불안해했다. 그래서였을까. 학기 말이 다가올 때, 그는 불현듯 편입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친구의 전공은 정치학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라 했다. 소수의 직업 정치인이 좌지우지하는 사회에서 정치를 공부한다는 건 시간낭비라는 말이었다. 졸업 후 취업도 문제라 했다. 이를테면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더러 서열화 된 대학사회에서 지방대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즐거움도 미래의 보장도 없는 학교를 자퇴하고 다른 학교에 편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얘기였다. 맞는 말이었다. 투자할 가치가 적다면 선택지에서 지워지는 게 오늘날의 상식 아니던가. 친구의 선택은 효율성을 따지는 경쟁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친구의 결정을 듣는 내내 침울했다. 그건 정치에 대한 청년의 무관심 때문도 아니었고, 교육을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하는 상업화된 대학 문화 때문도 아니었다. 편입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그의 세속적 욕망 때문도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우울했던 것은 사회구조 앞에서 한 인간의 ‘무력한’모습이었다. 친구의 휴학과 복학, 자퇴와 편입을 결정하는 주요한 열쇠는 아마도 ‘생존’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일 것이다. 이에 실용적인 방법을 제공해주는 자기계발서의 ‘인기’는 그래서 이해가 간다. 최근 몇 년 새 서점가를 점령한 자기계발서의 인기는 친구의 무력함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나에게도 먹고 사는 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적이 있다. 전역을 앞두고는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였다. 그때 인생의 매뉴얼처럼 집어든 게 자기계발서였다. 자기계발서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마법처럼 보였다. 내가 못 살고 있는 것은 잘 살 수 있는 비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조금 더 성실하지 못했거나. 수십 권의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나도 경쟁에서 우위에 서고, 남들과 차별성을 가질 수 있길 기대했다. 자기계발서만 읽는 청년 세대를 비판하는 언론 보도에 울컥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법의 매뉴얼을 아무리 읽어도 그 놈의 ‘불안’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마법을 의심하게 됐다.   ▲ 200만부 가까이 팔린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자기계발서의 특징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생존에 대한 불안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이는 나의 문제를 나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이 점이 바로 자기계발서 열풍의 핵심 요인이다. 그런데 이 희망에서 역설이 일어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능동적 욕망이 사회 구조에 대한 수동적 적응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려면 휴학을 하고 돈을 벌면 되고, 학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편입을 선택하고, 취업난을 뚫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찾게 되는 일들 말이다. 자기계발서는 겉으로는 개인의 힘과 능력을 키워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가진 정치적 능력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모든 문제는 내 탓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인이 정치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사회 제도의 개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무너진다. 불안이 권리가 돼버린 사회에서 자기계발서의 인기가 달갑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진정한 자기계발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자기계발이 성찰이라는 의미를 조금이라도 담고 있다면, 개인을 성찰하는 동시에 요구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성찰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기계발이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이뤄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응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이해하고, 사회구조를 냉정하게 인식할 때 가능해진다. 개인의 ‘책임’이라는 말로 그동안 교묘히 가려져 있던 우리의 불안정한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을 건네는 장면을 보며 우리의 현실을 떠올린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파란 약을 선택하면 진실을 잊을 수 있고, 빨간 약을 선택하면 진실을 볼 수 있다는 섬뜩한 제안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사회는 청년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며 파란 약만을 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청년 세대가 파란 약과 빨간 약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는 ‘의심’에 한 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68 | 추천: 0
권지은/ 청년 칼럼니스트   신문을 들여다본다. 때 아닌 종북논쟁이다. 때가 잘 맞았다. 예상외의 총선 승리로 한숨 크게 돌린 정부와 집권여당에겐 ‘종북’이라는 달콤한 선물이 안겨졌다. 그 덕에 이명박정부의 실책평가와 새 국회에 빨리 요구되는 민생문제들은 보기 좋게 슥 밀렸다. 언론들은 지면과 방송에서 이 칙칙한 이야기에 넓고 긴 시간을 할애하는 중이다. 종북세력이 국회에 들어가는 걸 국민들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면서.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 하나의 불안이 보인다. 아니, 여러 개가 뒤엉켜 있다. 정적이 찾아오는 시간,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내 마음 속에도 불안이 휘젓고 간 흔적들이 보인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어설프게나마 명상을 한다. 그러면 운 좋게도 가끔은 맑은 정신의 시간이 찾아온다. ‘지금, 이곳’을 느끼면서 천천히 호흡을 하면 불안과 함께 있을 때엔 느끼지 못했던 편안한 기분이 든다. 길을 나선다. 사람들을 만나 세상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다시 불안의 냄새가 베인 채로 집으로 돌아온다. 불안한 마음은 전염 속도가 은근하면서도 쏜살같다. 우리의 불안은 ‘종북’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다. 가짜 불안 장사 불안을 부추기는 것들을 들여다본다. 먼 곳 말고. 굳이 휴전선을 넘어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TV 속, 지하철과 버스, 인터넷 사이트 곳곳, 시선을 가로채가는 광고들을 본다. 영어를 잘해야 한다, 더 예뻐지고 날씬해져야만 사랑 받을 수 있어, 더 좋은 재테크를 하지 않으면 바보 같이 살 거야, 보험을 들어, 100살까지 살게 해줄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네 삶은 볼품없어질 걸, 믿어봐, 잘해 줄게. 나이가 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동안이 아니라면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고, 큰일이 난다 속삭인다. “잘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다” “여자의 피부는 권력이다” 같은 카피도 자주 본다. 상품의 품질이나 기능이 아니라, ‘(남 부럽지 않게) 잘 지낸다’, ‘(남을 휘두를 수 있는)권력’ 같은 말로 사람의 감각을 집중시킨다. 짜릿하다. 저게 내가 원하던 거였어!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위의 언어들은 삶 구석구석까지를 이미 이기고 지는 승부의 장으로 설정해버렸다. 멋지게 이기거나, 적어도 뒤처지지 않게 따라나서야 한다. 그래야 ‘불안’이 사라질 것만 같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해소하려던 불안한 감정은 더욱 예민하게 발달한다. 다이어트와 성형으로 충분히 예뻐진 친구는 다이어트와 성형에 ‘점점 더’ 집착했고, 숨 쉴 틈 없이 취업준비를 해 어렵게 손꼽히는 안정적 직장에 취업한 친구는 삶 자체를 불안해하면서 ‘다시’ 자기계발을 시작해야겠다고 말했다. 이것만 끝내고 저것만 성공하면 괜찮을 거라고 배웠는데, 끝없다. ▲ 영화 <개청춘>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공공의 감정 이렇게 불안이 일상의 풍경이 된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가져온 극한의 생존 경쟁에 따른 결과가, 오롯이 ‘개인의 몫’이 돼버린 후부터였다. 노동환경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공공의 가치’가 무너졌다. 정리해고를 당하는 것도, 비정규직이나 파견노동자가 되는 것도, 88만원세대로 살아야 하는 것도,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한다. 혼자다. 대안이 있다면 ‘자기계발’을 하는 것. ‘쿨한’ 정서를 가면으로 쓰고 주위에 징징대지 않고 꿀리지도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한테 ‘더, 더, 더’를 주문한다. 하지만 불안한 사람이 어떻게 쿨하다는 것인가? 어쩌면 언제나 불안한 그 감정을 감추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시대가 좇는 쿨하고 시크한 태도, 그 자체가 아닌가? 제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공기를 피할 수 없다. 내가 가지는 불안한 마음은 곧 앞에 앉아 있는 친구에게 전이 되고 날아다닌다. 그러면서 불안이 ‘구조화’된다. 이렇게 불안은 이제 우리가 가진 ‘공공의 것’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나타난 불안한 감정 자체가 공적인 것이 된 것이다. 공적인 기운, ‘공기’가 되었다. 생존은 개인의 것으로, 불안은 공공의 것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늘 개인을 강조한다. 그런데 도대체 ‘개인적인 것’이라는 게 무엇일까? 개인을 강조했더니, 그래서 생긴 감정이 공적인 것이 되어 우리에게 들이닥쳤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딱 잘라 나누려는 시도는 해묵은 속임수인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오직 필요한 질문은 “우리의 것으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지 않을까? 취업을 하느냐, 못하느냐. 비정규직이냐, 정규직이냐. 결혼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 그 다음엔 내 아이와 너의 아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타인과 맺는 관계가 ‘비교 대상’이 된 삶의 패러다임. 이것이 지금 ‘우리의 것’이다. 경쟁하고 비교하는 데에 익숙해지다 보니,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 좋아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사치스러워서 드물게 됐다.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을 때에 가장 자연스러운 기쁨을 느끼는 존재인데, 그 본성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이 망가져버렸다. 이기고, 부러움을 사고 싶다는 마음은 ‘사랑 받고 싶다’는 욕구가 변질된 상태다(기본적인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변질되었다). 본성이 억압당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정지된 개인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불안을 마주하기 사람들은 ‘가짜 불안’들의 해소로 실질적인 불안한 상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반대가 오히려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될 것 같다. ‘순서’가 뒤바뀌고 꼬여 있으니 이유 없는 불안(실체를 모른다는 느낌이 드는 불안은 그 얼마나 불안한 불안일까)이 끊임이 없다. 부추겨진 불안으로, 실존하는 불안과 고립을 감추고 못 본 척 하는 삶에서, 실존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대안을 요리조리 짜 맞춰 보는 것이 빠른 방법일 것이다. ‘마음의 공동체(관계)’를 회복하는 것. 몇몇 좋은 이미지의 정치인들에게 삶의 문제를 의탁해버리기 보다, 불안하지 않기 위해 달라져야 하는 삶의 부분을 ’직접‘ 생각해내는 것. 그것을 위해 마음을 기울여야 할 내용과 대상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는 것. 삶 자체가 아슬아슬 불안해 죽겠다. ‘종북’이 불안하다고? 재테크를 하라고? 너무 오래묵은 장사가 아닌가. 그들을 믿느니 차라리 우리의 이 ‘오래된’ 불안을 믿자. 그리고 못 본 척 말고 그 불안의 끝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파고 들추어 보자. 우리 삶이 불안 그 자체라면, 그래서 밥과 잠과 ‘지금’을 즐길 수 없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 사정을 헤아려 보는 것이 결국 살아내는 것일 테다. 그 심연에서는 사회와 타인과 내가 부대끼며 내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425 | 추천: 0
최수범/ 청년 칼럼니스트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하는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영호라는 이름을 익히 들어 봤을 것이다. 그는 현란한 컨트롤과 뛰어난 운영으로 보는 이의 넋을 잃게 한다. 그는 팀이 위기에 빠졌을 때 연전연승으로 팀을 구해내곤 해 ‘최종 병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동 비서관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그리고 또 하나의 최종병기 이영호가 있다. 바로 전 청와대 고용노동 비서관 이영호다. 이영호 전 비서관은 장진수 전 총리실 주무관의 폭로로 청와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기자회견을 열어 청와대를 구했다. 그는 자신이 총리실 컴퓨터 자료를 삭제하도록 지시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몸통이라고 주장했다. “자료를 삭제했을 뿐 증거인멸이 아니다”, “민간인 사찰을 불법사찰로 왜곡하는 것은 현 정부를 음해하기 위한 민주통합당의 정치공작”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장 전 주무관에게 건넨 2000만원은 ‘절대’ 입막음 용도가 아니라 선의였다고 했다.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이영호 전 비서관은 검찰 수사를 받을 때도 큰 목소리를 내며 오히려 수사하는 검사와 수사관에게 호통을 쳤다 한다. 반면 윗선을 추궁하는 검찰의 질문엔 꿀먹은 벙어리였다. 거대한 불법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모든 일을 주도했다고 큰 목소리를 치고, 윗선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무는 것을 보면 가히 청와대의 최종병기라 할 만 하다. 이에 부응하듯 ‘사즉생의 각오로 수사에 임하겠다’던 검찰은 이영호의 바람대로 그 윗선을 밝히지 못한 채, 이영호를 몸통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민간인 불법 사찰은 전방위적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인 피해자인 KB한마음 대표 김종익씨를 비롯하여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공권력을 이용하여 사찰이 이루어졌다. 정식 보고라인도 거쳐지지 않았으니 이것을 공권력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종익씨는 불법적인 사찰로 인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정부로부터 한마디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장기간의 수사에 시달린 끝에 기소까지 당했다. 그러나 공소사실의 대부분이 특정조차 되지 않아 법원으로부터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참 정말 마법 같은 일이다. 나도 사찰을 당했다고 !? 그 뿐만 아니라 현 정부에 비판적인 새누리당 소장파 의원들에게도 사찰이 이루어졌다. 그 중 한 명이 필자의 고향에 지역구를 둔 남경필 의원이다. 필자는 작년에 남경필 의원과 수원에 있는 절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그 때 남경필 의원과 악수를 나누었다. 게다가 사찰 밥도 바로 옆 테이블에서 같이 먹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때 그 ‘사찰’에서 함께 ‘사찰’ 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론에 공개된 일부 사찰 보고서에는 굉장히 가까이서 관찰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세부적인 부분까지 묘사돼 있다. 필자도 남 의원에 대한 사찰 보고서에 ‘머리카락이 길고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이상한 대학생’으로 등장 했을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얼마전 진경락 전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이 작성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추진 지휘체계’ 문건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 문건은 지원관실을 ‘이 대통령의 친위대’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 문건에는 ‘VIP께 일심(一心)으로 충성하는 비선 친위조직으로 특명사항을 총괄지휘’라고 적혀 있다. 또한 ‘사찰 사건으로 기소된 공무원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청와대 최고위층에 전달된 정황도 드러났다. 이 문건에 등장하는 VIP가 설마 같은 이름의 아이돌 가수 빅뱅 팬클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공개된 중학교 일진회스러운 청와대의 충성서약 문건을 읽어보면 정말 화가 나서 M(멘탈이) B(붕괴될 지경이다) 검찰은 진경락 전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이 불법사찰에 대한 입막음의 대가로 청와대 측에 비례대표 공천을 요구했다는 정황이 담긴 녹취록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장본인이 국민의 대표가 되려고 했다니 충격적이다. 마치 그의 이름처럼 머리에 강한 경락 마사지를 받은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머리가 시원하기는 커녕 불쾌하기만 하다. 이렇듯 불법 사찰에 대해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은 모두 청와대를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괴물을 제거하기 위해 매서운 원기옥을! 지난 11일엔 김미화가 지난해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동향을 조사해 보고한 지원관실 문서가 있음이 알려졌다. 김미화는 김제동, 윤도현과 함께 현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찰의 대상에 오르고 자신이 진행하던 지상파 방송에서 하차해야 했다. 총선은 끝났다. 검찰의 불법사찰 재수사도 끝났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남았다. 이 추악한 일을 지시한 머리를 찾는 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연예인들을 다시 TV에서 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민간인 사찰에 분노해야 한다. 민간인 사찰이라는 괴물에게는 최종병기 이영호를 조정한 머리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징그러운 머리를 보는 것을 망설이면 안 된다. 일본만화 드래곤볼에서는 후반부에 최강의 적 마인부우를 제거하기 위해 손오공이 원기옥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 원기옥은 지구를 지키고 하고 싶어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보태줄수록 강해진다. 결국 손오공은 지구인들의 힘을 합친 원기옥으로 마인부우를 제거 하는데 성공한다. 우리도 이 민간인사찰이라는 괴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원기옥을 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민간인 사찰이라는 괴물이 다시는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이 괴물이 한줌의 조각도 남지 않도록 ‘매서운 눈빛’이라는 원기옥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일수록 강한 존재다. 다시 한 번이라도 이런 괴물을 만든다면 그 대가는 무서울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거대한 원기옥을 통해 보여줘야 한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5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