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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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김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최창식 중구청장은 꽃을 참 좋아하나보다. 꽃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각별한지 4월 4일, 덕수궁 대한문 앞 도로 한복판에 경찰 180여 명과 중구청 직원들을 동원하여 화단을 만들었을 정도다. 40톤 흙을 부어 만든 커다란 화단 안에는 나팔꽃, 민들레, 팬지꽃 등 형형색색의 꽃들로 가득하다. 중구청은 이 화단이 도로 위 장애인용 보도블록도 덮어버리고 시민들의 통행도 방해하지만 아무래도 좋은가보다. 중구청이 격하게 아끼는 이 화단 곁에는 언제나 경찰 수십 명이 꽃들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졸지에 꽃도 심고 화단지킴이 역할도 맡게 된 경찰들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반면 화단 한 켠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이 24개의 영정피켓을 화단에 꽂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분들 등에는 '공장으로 돌아가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아마도 해고된 노동자들인가 보다. 이들이 한 발짝이라도 화단에 발을 내딛으면 수십 명의 경찰들과 '살고싶은 안전특별구 중구'라는 파란조끼를 입은 중구청 직원들이 달려와 득달같이 끌어낸다. 대학생이나 회사원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도울라치면 그들도 같이 밀쳐댄다. 중구청은 소중한 꽃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한 편의 코미디 영화같은 일들은 4월 4일 새벽 6시에 중구청이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를 기습철거하면서 시작됐다. 경찰과 중구청 직원까지 대략 280여 명이 분향소 철거에 투입됐고,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쌍용차 노동자들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끌려나왔다. 노동자들은 그렇게 분향소 집기류와 시민과 예술가들이 마음을 모아 만든 집회용품들이 철거되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다. 뒤늦게 노동자들과 시민들은 중구청의 강경진압에 항의하며 화단에 세워진 펜스들를 뜯어내려고 했지만 경찰들은 불법이라고 외치며 노동자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40여 명을 연행했다. 분향소를 재설치하기 위해 화단 안에 들어간 대학생들도 전경방패로 마구 밀쳐댔다. 덕분에 나도 전경방패에 맞아 발목을 삐끗하고 멍이 들었다. 수백 명이나 되는 경찰들과 중구청 직원들이 밤을 새워가며 화단을 열심히 지키는 걸 보고 간밤의 중구 치안행정이 걱정될 정도였다. 쌍용차 농성장 철거. 서울 중구청이 지난 4월 4일 새벽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농성 중이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천막을 기습 철거한 가운데 대한문 앞에 농성장에서 나온 집기류 등이 쌓여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쌍용차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항의하는 집회를 열자 남대문 경찰서 최성영 경비과장은 확성기에 대고 계속해서 소리쳤다. 정당한 사유없이 도로 또는 국유재산에 시설물이나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은 불법행위라고. 이렇게 모여 집회를 여는 것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 위반으로 법적제재를 가하겠다고. 그렇지만 작년 11월 8일, 서울행정대법원은 ‘쌍용차 분향소’가 직접적 위협이 명백하게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을 내렸다. 게다가 분향소는 세울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2009년 5월 22일 사측의 일방적인 해고와 공권력의 강경진압을 필두로 많은 고통을 당해왔다. 이러한 부당한 처사에 항거하기 위해 세운 분향소는 헌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보장하는 적법한 권리이다. 또한 중구청이 대한문 앞 한복판에 세운 화단은 과연 합법일까? 문화재청에 따르면 중구청이 화단을 조성하기 전에 문화재청의 사전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화단이야말로 문화재보호법과 집시법을 위반한 불법 장애물인 것이다. 하지만 화초사랑에 눈이 먼 중구청은 이러한 사실들을 몰랐나 보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런 식의 불법을 저질러가며 화초로 노동자들을 진압하고 몰아냈기 때문이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 중구청장은 청개구리인가 보다. 다행히도 꽃보다 사람이 더 귀한 줄 아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중구청을 향해 항의하고 쌍용차 노동자들을 돕고 있다. 매일 밤 대한문 앞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진행하는 미사가 열리거나 시민들의 릴레이 1인시위가 이어진다. 골든브릿지 증권 노동자나 진주의료원 폐업으로 인한 피해자분들도 함께 와서 힘을 보태기도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쌍용차 분향소’가 단순히 쌍용차 노동자들만의 공간이 아니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향소는 그동안 해고된 노동자들이나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계속해서 연대했던 곳이고 평범한 시민들도 헌화하거나 분향하며 같이 마음을 나눈 특별한 장소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부디 이러한 사실들을 깨달았으면 한다. 화단이 정 만들고 싶으면 본인 집 앞에 만들면 된다. 그리고 대신 분향소에 한번이라도 찾아와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건지 배우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면 한다. 그러면 이 단순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김지영씨는 위안부, 쌍용차 노동자 등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0
김원진/ 청년 칼럼니스트 ‘자기’야 안녕? 어느덧 캠퍼스엔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 왔어. 신문에선 봄이라며 춘화(春花) 전시회를 소개해주더라고. 언제부턴가 부쩍 늘어난 교환학생들은 잔디밭에서 서로 진한 애정표현하기 바쁘네. 어떤 씩씩한 친구는, 동기들과 대화를 나누던 여성에게 다가가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데 번호 좀 주실 수 있으세요?”라는 되도 않는 멘트를 날리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시험 끝나고 우리도 봄놀이나 즐겨볼까? 아, 아니다. 실은 그전에 나 할 말이 있어. 이 말 하려고 오늘 펜을 든 거야. 오늘은 꼭 해야겠어. ‘자기’야, 우리 헤어져. 헤어지잔 말을 왜 뜬금 맞게 꺼내는 거냐고? 아냐. 실은 나 오랜 전부터 고민해왔어. 우리 ‘자기’에 대해서 얼마나 곰곰이 생각했는데. 이렇게도 살펴보고 저렇게도 살펴보고. 나름 입체적으로 고민해왔어. 과연 ‘자기’와 ‘나’ 사이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자기’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아왔는지. 우리 둘 사이 관계에서 과연 ‘난’ 행복한지. 혹은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지. ‘나’는 과연 ‘자기’에게 어떤 의미이고 존재인지. ‘자기’는 늘상 바빴어. 항상 뭔가 했지. 특히 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선 초조함과 조급함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어. 말은 자율적이고 계획적으로 뭔가를 한다고 하지만, 옆에서 볼 땐 그와는 정반대였어. 강제된 자율성에 의해 무언가에 속박돼 보였지. ‘자기’의 인생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소개서만 수 십 장씩 썼어. ‘자기’는 조금 느슨해진다 싶으면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같은 책도 들여다봤지.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했던 거겠지. 옆에서 그런 ‘자기’를 보면 ‘나’도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어. 우리가 마주하고 대화할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었고. 그렇게 ‘자기’와 조금씩 멀어지고, ‘나’는 외로워질 때면 추억을 곱씹었지. ‘자기’가 자기의 영어 이름을 알려줬을 때, 기억나? 나는 ‘픽’하고 웃었지. ‘자기’는 자신을 ‘셀프’(Self)라고 소개했어. 우리말로 번역하면 ‘스스로’ 정도가 되겠지? ‘자기’는 ‘자기’의 부지런함이 이름 때문이라며 오래전 학습지 광고에서 나왔던 노래를 불러댔지.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근데 좀 이상했어. 그 학습지 광고에서 들었던 ‘스스로’의 의미는 자발적 의지를 뜻하는 것 같은데, ‘자기’가 스스로 하는 것들은 분명 의미가 달랐어. 무책임한 선생님들이 건네는 말투처럼 말이야. “네가 스스로 알아서 해.” 타인이 부여하는 자유, 자율성은 오히려 누군가를 옥죌 수 있는 거지. 왜 ‘셀프’서비스도 그렇잖아. 반찬이 푸짐해 셀프서비스를 하는 식당도 있지만 대개는 ‘알아서’ 갖다 먹으라는 거지. 말이 좋아 ‘셀프’일 뿐, 강제 받은 자유인 셈이지. 우리가 함께한 많은 시간동안 ‘자기’는, 셀프서비스라는 푯말 때문에 마지못해 정수기에서 물 떠오는 손님 같았어. 답답한 마음으로 책을 폈어. ‘자기’가 보는 계발서 말고, ‘자기’를 심도 있게 분석한 책들 말이야. 혹시나 답을 구할까 싶어서, 아니면 혜안이라도 얻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어. 역시 똑똑한 사람들은 다르더라. 역사를 살펴보면서 맥을 짚고 명확한 개념을 제시해주더라고. 문제는 ‘자기’에 대한 분석은 하나하나 공감이 가는데 해결책이나 대안이라고 제시한 것들은 도무지 공감이 안 간다는 거야. 허망했지 나는. 하나 예를 들어볼까? 울리히 벡이라고 독일에서 잘 나가는 사회학자가 있어. 현대사회를 ‘위험 사회’(Risk Society)라고 규정하면서 원자력 문제나 각종 환경 문제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설명했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지. 그는 또 현대사회의 개인화 현상에 대해서도 진단을 내려. 아마 ‘자기’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짚어내는 게 아닌가 싶어.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젠 개인화 시대라는 거야. 여기서 개인화는 두 가지 상반되는 의미를 가져. 기회이기도 하지만 위기이기도 하다는 거지. 전통적인 개인에 대한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해방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자유와 기회를 얻었다는 게 울리히 벡의 설명이야. 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얻은 만큼 삶의 안정성을 상실하고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삶을 기획하고 방향을 정해야만 하는 일종의 강제된 삶을 부여받는다는 거야. 개인은 자율성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위험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진 셈이지. 나는 벡이 말하는 현대사회의 개인이 바로 전형적인 ‘자기’라는 생각이 들어. 큰 사탕을 손에 든 여학생이 남학생과 함께 한 대학교 캠퍼스를 걷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다만 나름 해결책이라고 제시한 게 너무 안일하다고만 느껴졌어. 우리 ‘자기’한테 별로 도움이 안 될 거 같았어. 각 개인이 나서라는 거야. 그래서 이러저러한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행동을 하래. 한마디로 시민의식을 갖고 행동하라는 거지. 너무 뻔하지? 썰이 좀 길었어. 미안. 이제 나름의 해결책을 얘기해 주려고. 새겨듣진 마. 선택은 ‘자기’에게 달려있는 거니까. ‘나’는 ‘자기’에게 ‘나’(I)가 되길 바라. ‘자기’말고 ‘나’ 말이야 ‘나’. 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도 있었잖아. 어떤 학자는 이 프로그램을 가수라는 ‘나’의 정체성을 되찾는 프로그램이라고 해석하더라고. 이후에 생긴 수많은 <나는 ~다> 패러디 역시 주체적인 ‘나’를 되찾는 일환이라고 보는 거지. ‘자기’야, 무엇보다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질 필요 없어.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지 마. 슈퍼맨이 아니잖아 ‘자기’는. ‘자기’가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진하게 그은 밑줄을 떠올려봐. 우린 타인과 같이 살아가는 존재잖아. 때때로 타인에게 기대거나 ‘나’의 어깨를 내어주는 게 더 자율적인 ‘나’일지도 모르지. ‘자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자기’(Self)야, 우리 헤어지고 ‘나’와 다시 만나자.   김원진씨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언론인권센터 모니터링팀에서 활동 중인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57 | 추천: 0
최수범/ 청년 칼럼니스트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평단의 호평을 받고 흥행을 이어가고 있지만, 네이버 영화 페이지에서는 평점 테러를 당하고 있다. 일간베스트(일베) 이용자들이 <지슬>에 최하점인 평점 1점을 매기고, ‘제주 4.3 사건이 폭동’이라는 댓글을 지속적으로 달고 있다. 일베는 보수성향의 젊은 남성들이 주 이용자인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다. <지슬>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베충 (일베 이용자를 벌레에 비유하여 욕하는 단어)과 성전을 선포하고, 평점 10점을 주면서 맞서고 있다. 탱크를 조종하며 대결하는 게임, <월드 오브 탱크>에서는 일베 이용자들이 단체로 소동을 일으켰다. ‘전두환만세’ 같은 아이디를 사용하며 5.18민주화 운동이 폭동이라고 채팅창을 도배했다. 필자는 소싯적 프로게이머를 지망하던 실력을 발휘하여, 그들을 게임 속에서 농업화(일베인을 혼내주는 은어)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분란을 일으켰다. 5.18 관련 시민단체는 악성 댓글을 단 일베인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한 포털사이트 <지슬> 영화 평점란에 쏟아진 1점 폭탄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5.18 민주화 운동과 제주 4.3 사건이 국가폭력으로 생긴 우리의 어두운 역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일베 이용자들로부터 ‘변땅크’라 불리는 <미디어 워치> 변희재 대표와 조갑제 옹으로 칭송받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도 5.18 민주화 운동은 북한의 공작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일베인들은 5.18 민주화 운동이 폭동이라는 ‘팩트’가 있다며, 끊임없이 관련 자료를 퍼다 나른다. <한국일보>는 지난 1월 15일 ‘철없는 역사 인식’이라는 부제를 달고, 일베인의 역사인식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일베인의 역사인식은 근ㆍ현대사 교육이 대폭 축소된 부작용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인터넷 기사 아래에는 일베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반응이 베스트 댓글로 올라와 있다. “<한국일보>야 말로 철없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5.18 사태를 재심을 청구해 정의를 되찾아야 한다.” 역사 교육을 강화하면 일베인의 그릇된 역사인식이 사라질까? 이는 교육 만능주의적 사고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범죄를 줄이기 위해 도덕 교육을 늘려야 한다. 창의적 재량활동 과목 시수를 늘리면, 현 정부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창조인재’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필자의 학창시절 12년 경험으로 비춰보면, 창의적 재량활동시간에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액션영화보기’다. 창의적인 학교폭력이 나올 수는 있겠다. 필자는 얼마 전 보수 성향을 지닌 유명 20대 논객의 블로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5.18 민주화 운동은 민주화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유럽의 68혁명은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해, 5.18은 그렇지 않다. 이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5.18과 68혁명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5.18은 시민들이 군부독재와 국가폭력에 저항한 사건이다. 반면 68혁명은 이념과 정치적 지향성을 품은 운동이다. 둘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지만 필자는 이 지점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프랑스의 68혁명은 프랑스 사회를 바꿨다. 대학은 평준화 됐고, 혁명 이후 최저임금은 35% 상승했으며, 근로시간이 단축되었다. 68혁명의 최전선에는 대학생이 있었다. 반면 한국의 6월 항쟁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대학은 서열화 되어있고, 최저임금은 5천원이 채 되지 않으며, OECD 국가 중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6월 항쟁의 최전선에도 대학생이 있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민주당 우상호 의원은 얼마 전 486 모임인 ‘진보행동’의 해체를 선언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6월 민주화항쟁이 정권교체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대통령 전두환’을 ‘대통령 노태우’로 바꿔 놓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고 30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자성적 언사다. 그는 이를 반성한다고 말했다. 필자는 민주화 운동을 ‘물신화’하는 행태가 젊은 세대의 반감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486 세대들은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 덕분에 너희가 혜택을 보고 산다.”라고 말한다. 민주화 세력은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지형에 선 사람들을 증오의 언어로 조롱하며, 정치적 이익을 챙겼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에 공감하지 못한다. 대학만 나오면 취업할 수 있었던 486 세대와 달리 비정규직 1000만 시대에 안정적인 일자리는 줄어들었고, 사회 안전망이 부실해 살기는 더 팍팍해졌다. 486 세대는 민주화를 사유화하면서, 자신들과 기성세대를 분리시켰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생활에 밀착되지 않았고, 기성세대는 민주화에 의구심을 품는다. 이러한 현실 속에 ‘젊음=진보’의 등식은 깨진다. 몇몇 젊은이들은 바뀔 기미가 없는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스스로 보수주의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독기를 내뿜는다. 힘든 현실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사회에 불평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그들 앞에서 사회에 불만을 표시하고, 보수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좌익좀비로 규정된다. 민주화의 찬사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일베에서 민주화라는 단어가 반대 혹은 조롱의 의미로 쓰이는 이유다. 일베인이 탈윤리적으로 보수화 되는 것에 대해 성찰 할 필요가 있다. 일베인의 행태는 진보세력이 사회적 부조리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 ‘일베인’을 ‘일베충’이라 부르며 ‘우리’와 다른 일부 ‘철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다. 쉬운 해석을 거부할 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77 | 추천: 0
이상욱/ 청년 칼럼니스트 얼마 전, 졸업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영어시험을 보러 갔다.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와 씨름하다 나오는 길에 마주친 것은, 한숨을 푹푹 쉬며 시험장을 빠져나가는 수많은 동년배들이었다. 처음 보는 풍경에 무슨 이유에선지, 학생회를 하면서 ‘책임’지겠다고 한 ‘학우’들의 진짜 모습은 바로 이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4년 동안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반값등록금’이니 ‘청년실업 해결’이니 하면서 20대 청년들의 고충을 함께 풀어가고자 했다. 거국적인 반값등록금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청년들을 고립시키는 사회를 바꾸자고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나는 매달 영어시험장을 묵직하게 채우는 한숨소리를 알지는 못했던 것이었다. 청년 문제와 맞섰던 나의 진정성이란 한발짝 떨어진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결국은 스스로를 ‘일반 대학생’과는 다른 ‘학생회 활동가’로 규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애정어린’ 비판? 사회적으로 청년들의 권리를 실현하려는 청년학생운동의 ‘위기’도 내가 반성한 것과 비슷한 ‘거리감’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실제로 청년학생운동이 구사하는 이념적 언어, 표방하는 지향성 등이 대다수의 20대들이 안고 있는 삶의 문제와 일정한 거리가 있다는 인식이 꽤 넓게 퍼져 있다. 그래서 ‘애정어린 비판’을 자임하는 사람들은 청년운동이 청년 일반의 사회경제적 권리 문제에 보다 밀착되어야 한다는 지적을 하곤 한다. 그러한 비판이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젊은이들이 떠안고 있는 삶의 무게는, ‘경쟁력을 키워라’, ‘눈높이를 낮춰라’ 등등 한국사회의 훈수를 감당하기엔 이미 너무 육중해져 있다. 지극히 구체적인 일상의 스트레스와 소망을 운동의 이념으로 용해시키지 못한다면, 권리의 주체인 여러 젊은이들의 마음이 동할 리 만무하다. ‘인권’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이념적 지향성을 희석시키고, 정치적 구호를 생활적 권리에 맞닿은 ‘썰’로 대체하기만 하면 수백만 청년들은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힘차게 일어설까? 나는 청년학생운동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이 말하는 그러한 논리가, 실제로 청년들을 빵밖에 모르는 존재로 소외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을 발견한다. 청년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인간은 누구도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에만 몰입할 때, 역설적이게도 먹고 사는 권리마저 찾기 힘들다는 것은 인간의 지난 역사가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사람의 권리’는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주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인권, 그것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 신체를 구속당하거나 고통받지 않을 권리, 최소한의 생존권은 보장받을 권리, 마음의 주권을 지켜낼 수 있는 권리,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 등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인권을 무슨무슨 권리로 쪼갤 것이 아니라, ‘어떤 권리를 주장하는 건 급진적이야’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다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적 감수성으로 ‘인간의 조건’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청년실업해결, 반값등록금 실현’을 주장하며 기습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이 청와대로 행진을 시도하다 경찰에 연행당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문제는 빵이 아니라 세계관이다 청년의 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의 진로를 결정하는 정치활동에서, 다른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권리쟁취의 현장에서, 나라의 운명을 고민하는 공론의 장에서 청년들의 역할이 배제되거나 왜소해졌을 때, 누가 그 허약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는가. 누가 그들의 외침을 듣고, 등록금을 깎고 알바 조건을 개선하며 청년실업 대책을 세우겠는가. 20대도 돈 걱정 안하고 공부하고 싶다고, 청년백수가 되기 싫다고, 그리고 사회적 문제를 직접 결정하고 싶다고, ‘총체적으로’ 청년의 권리를 주장할 때에만, 사회는 그 외침에 밀려 한뼘씩 움직이지 않겠는가. 더욱이 청년은 어떤 마음가짐, 어떤 세계관을 배우느냐에 따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존재다. 이들에게 단지 빵의 문제만 이야기하라는 건 사실 빵도 주기 싫다는 이야기다. 생활적 권리라도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권리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세계관의 얼굴을 하고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깨처진 청년의 부활을 기대하는 분들이, 고투를 거듭하고 있는 청년학생운동을 조금만 더 응원해주면 좋겠다. 머지않아 ‘빵’뿐만 아니라 ‘권리’에 대해서까지 거대한 공감을 이룩해낼 창조적 소수자들을 따뜻하게 지켜봐주면 좋겠다.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문제는 세계관이고, 권리를 깨닫는 감수성이며,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0
정다운/ 청년 칼럼니스트   자기소개 = 안녕하세요+(이름+나이+대학∙전공)+기타 등등 면접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20대의 자기소개는 대개 위와 같이 이루어진다. 학벌은 이름이나 나이와 같은 ‘신원’정보로 인식되고 있다. 오히려 나이와 이름만으로 부족한 정보가 출신대학으로 더 이상 부족하지 않게 된다. 물론 ‘소속’은 인간의 사회적 특성상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를 설명해줄 수 있는 수많은 소속집단들 중에서 출신 대학이나 사는 동네, 집 평수나 연봉수준 등 수치화하여 줄 세울 수 있는 것만이 나에 대한 쓸만한 정보가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조기축구회 소속이거나, 라틴댄스 학원을 다닌다는 정보는 “서울대 나왔대” 라는 말에 비하면 아주 영양가가 없다. 그것이 그저 산재해 있는 다른 정보들을 고려하기 귀찮은 데 비해 학벌이 효율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라면, 그리고 실제 대우에 있어서도 수직선상 위치에 따른 차이 없이 평등할 수 있다면, 학벌이 ‘나’를 설명하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걸까?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한 입시전문학원에서 열린 ‘국제중·특목고 입시설명회’에서 학부모들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냥 궁금하기만 한 건데 뭐가 문제야? 몇 달 전 토익학원에서 스터디에 가입했던 적이 있다. 네댓 명과 함께 스터디를 하게 됐는데, 처음 자기소개에선 다들 출신 대학을 말하지 않았다. 한 달간 매일같이 만나면서 내가 그들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감명 깊었던 영화가 무엇인지 따위가 아니었다. 그 네댓 명이 다들 어느 학교 학생들인지가 궁금했다. 후에 누가 어느 대학을 다니는지 알게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속물’이 아니라고 자부했다. “대학 어디 나왔을까?” 궁금한 것은 비교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이미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물들어 있었다. ‘학벌’이라는 소속을 조기축구나 라틴댄스 동호회 같은 소속보다 우위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취업에서 면접관이 학벌로 나의 상당 부분을 읽어낼 것이란 생각을 하면, 아주 불안하다. 학교는 나의 잠재력과 그 직업에 대한 열정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스터디 팀원의 학교를 다른 요소보다 궁금하게 여기는 것과, 면접관이 내 학벌을 눈여겨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셈이다. 대학 간판이 한 인간을 설명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모두가 자처해서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유명인들의 학력위조 문제가 또 불거지고 있다. 이 경우 학력을 위조한 그 유명인의 도덕성과 자질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 학벌에 의혹이 생기면, 어제까지 내가 감동했던 그 청년 멘토의 충고는 공중화장실 벽에 붙은 손바닥만한 광고만큼이나 하찮고 우스워진다. 그를 신뢰한 것에 억울한 마음까지 든다. 하지만 사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프로필의 학력란에서 ‘00대학교 석사∙박사’라는 몇 글자만이 위태로워졌을 뿐이다. 학력 위조자의 도덕성, 자질 혹은 부실한 논문 검증 절차가 비판의 1순위가 되는 것은 다시 한번 학벌 앞에 무릎 꿇는 일과 다를 바 없다. 학벌을 위조하게 만드는 사회상과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정책을 없애는 일이 우선되어야 이런 일의 반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학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포털사이트에 ‘학벌’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학벌의 중요성, 무시무시함, 학벌을 극복한 사람, 실력으로 승부하는 법 등 비장한 결의와 한숨 섞인 토로가 동시에 넘쳐난다. 대형 서점의 중앙 가판대와 TV토크쇼에서는 각종 멘토들이 총출동 해 위로와 충고를 건낸다.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마라, 학벌은 실력으로 극복해라.” 애써 취득한 학위가 왜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걸까? 애초에 진정한 ‘나’의 가치가 학벌로 대체되지 않는 사회라면 생각해보지 않아도 될 질문이다. 학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한숨이나 비아냥거림, 혹은 극복이 아니라 내가 얻어낸 학벌에 대처하게 만드는 사회와 그런 사회에 무방비상태로 잠식당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학벌이 아니라 학벌사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필요하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62 | 추천: 0
김종현/ 청년 칼럼니스트   우리의 고백 80.14%. 지난 대선 때, 내가 사는 대구에서 박근혜 당선인이 얻은 득표율이다. 제1야당을 지지한 ‘깨어있는 시민’들은 기득권의 손을 들어준 대구시민을 노예근성에 젖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어쩔 수 없는 보수의 도시라는 조롱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만나본 경험으로는 보수 진영의 후보를 지지한 대구 청년들과 진보를 말하는 이들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쪽 모두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말했고, 공정한 사회로의 변화를 원했다. 말하자면, 그들 모두 ‘착한’ 사회를 진정으로 갈망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이들이 공통으로 희망하는 것은 도덕적인 사회였다. 박근혜 당선인의 유일한 대항마로 부상했던 안철수의 대중적 인기는 이 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착한 후보’ 안철수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선량하고 도덕적인 지도자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각자 지지한 정당과 후보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은 가진 자에게만 유리한 ‘나쁜’ 시스템을 ‘착하게’ 만들어 줄 도덕적인 지도자를 바랐던 셈이다. 나는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지만, 이들이 바라는 도덕적 ‘힐링’은 믿지 않는다. 아니 내가 의심하는 것은 1대 99로 양극화된 잔인한 시스템은 외면하면서 착한 세상을 바라는 도덕적 감수성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 3명 중 그 누구도 탐욕과 생존경쟁을 조장하는 체제의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에서 정의를, 경제에서 공정을 말했지만, 근본적인 변화에는 침묵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성을 믿어달라며 착한 마음을 호소하기 바빴다. 마치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그토록 바라던 민중의 새날이 올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도덕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시대를 기억한다. 착한 지도자도 세상을 바꾸지 못하자 사람들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뒤 지금은 다시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라는 말로 되풀이되고 있다. 도덕성으로 보자면 극과 극에 서 있을 법한 두 대통령이지만, 보통사람들에겐 이들이 만들어 낸 세상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등록금에 저당 잡힌 대학생들은 여전히 알바인생이고, 소수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들은 비정규직의 불안한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노동자는 여전히 살기 위해 ‘높은 곳’에 있다. 망루와 크레인, 송전탑에 오르고 올라야만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진정으로 되물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변하지 않는 현실이 돼버린 ‘시장의 법칙’ 그 자체이다. 막연히 ‘착한 정치’만을 바라면서 사회 구조의 문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준엄한 비판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이를 외면 한다면 아마 5년 뒤 우리는 또 “이게 다 박근혜 때문이다.”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육·해·공 3군 의장대와 군악대의 사열을 받으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나의 고백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사람이 먼저인 나라’에 살고 싶어 한다.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상식이 통하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착한 세상을 바라는 꿈은 나도 예외일 수 없다. 이런 다짐을 했었다. 먹고 사는 것조차 녹록지 않은 이 땅에서 청년들이 어떤 모습으로 발 딛고 서 있는지 진솔하게 이야기하자고. 인권연대의 <청춘시대> 청년 칼럼니스트에 응모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문제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좌절했을 때, 고민은 멈췄다. 그때부터 나는 어떤 도덕적 의무감으로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착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걸린 청년이 돼버렸다. 착한 개인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나 자신도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던 거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이 땅이 얼마나 청년들에게 가혹한지를 말하고 싶었던 나의 다짐 말이다. 비정규직의 아픔이 왜 생겨나는지, 지방대의 서러움은 무엇 때문인지, 꿈보다 연봉이 왜 더 중요한지, 과연 무엇 때문에 청년이 이토록 불안한 것인지를 풀어내고 싶었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과 마주하고 있다. 그 앞에서 나는 더는 ‘착한 척’ 않기로 고백해본다. 곧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매스컴을 통해 새 정부의 인사청문회가 ‘도덕적 무덤’이 된 것을 보면서, 다음 5년 동안에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결코 줄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때 다시 진정성 있는 새로운 ‘착한 지도자’를 찾아 헤매거나, 착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당위적인 비판을 반복한다면 우리 사회는 이미 겪은 실패를 반복하게 될 거다. 그러니 착한 세상을 바라는 당신, 제발 ‘착한 척’ 좀 하지 말자!
2017-06-28 | hrights | 조회: 377 | 추천: 0
최수범/ 청년 칼럼니스트 2011년 12월 기아 자동차 광주 공장에서 실습을 하던 김민재 군이 과로로 쓰러졌다. 김 군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15~18세의 청소년은 노동시간이 하루 8시간, 주당 46시간을 넘어선 안 된다고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김 군은 하루 평균 10시간, 격주로 특근 8시간, 주·야간 2교대제로 일을 해야 했다. 경찰은 이외에도 84건의 관련법 위반 사실을 적발했다. 고교생 현장실습의 인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추가적인 사고를 막기 위한 대책들이 마련됐다. 고용노동부는 사건 후 기아차 실습생 128명의 근로실태를 점검했다.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법을 위반했다며, 기아차에 과태료 3억 원을 물렸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교육청, 학교와 함께 현장실습을 적극 지도하겠다”고 밝혔다. 그 후로 상황은 나아졌을까.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251개 기업 현장실습생 198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38.3%의 학생이 하루 8시간 이상 초과 실습을 경험했다고 했다. 46.2%의 학생은 1주 40시간 초과실습을 했다고 응답했다. 31.9%의 학생이 야간 실습을, 29.2%의 학생이 휴일 실습을 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모두 법규 위반이다. 적극 지도하겠다는 정부의 약속과 달리 현장실습 합동 점검은 지난해 11월 단 한 차례에 그쳤다. 전교조 실업위원회가 실습학생 10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45.2%의 학생은 교사가 사업장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현장실습 업무와 전공이 관련이 없다’고 답한 학생도 38.5%나 됐다. 그 사이 고교생들은 계속 위험한 현장에서 실습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지난해 6월 김 모 군은 부산항 허치슨 터미널에서 현장실습 도중 검수 일을 하다가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김 군의 학교 선생님은 "올해는 3학년 재학생의 60%를 취업시키도록 지시를 받았다. 서둘러 취업 현장으로 내보내다 보니 의뢰가 들어온 회사의 근로 조건을 일일이 챙기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학교나 교육청에서는 아직도 관련 규정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 사고가 나면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지난해 11월, 경기 군포의 실습생 박 모 군은 금형공장에서 현장실습 도중 기계에 손가락이 뭉개졌다. 30여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대형사고였다. 한 달 뒤인 12월에는 저녁 울산항 북방파제 부근에서 석정36호가 전복되면서 현장 실습 중이었던 특성화고 3학년 홍성대 군이 사망했다. 박 군과 홍 군은 모두 초과·야간노동을 했다. 두 학생이 일한 업체는 모두 산재신청을 기피했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특성화고 현장실습 실태 점검을 위해 서울 구로구 한 사업체를 방문해 현장실습 학생들 및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현장실습은 취업을 앞둔 특성화 고교 3학년 학생이 산업현장에서 일을 하며 전공공부를 하는 제도다. 학교의 교육기자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1963년부터 실시되었다. 시작부터 교육적인 고려보다는 예산 부족이 동기가 된 것이다. 지금도 현장실습제도는 기업에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필자가 특성화 고교 3학년 때, 참여정부는 노예노동, 인권유린, 학교교육 파행 등을 이유로 현장실습을 전면 폐지했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규정을 어기고, 현장실습 자리를 구했다. 현장실습을 하는 친구들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정직원이 되더라도 일할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도, 현장실습을 하지 않으면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실습에 나섰다. 교과부는 2008년 학교장 책임 하에 자율적으로 시기를 정할 수 있도록 현장실습의 새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현재 현장실습은 특성화 고교 취업률 향상 정책과 맞물려 대부분의 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다. 특성화 고교 선생님들도 현장 실습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 지원금과 주요 평가를 취업률이 결정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관리 감독과 정보 없이 학생들을 실습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 취업률이 학생들의 인권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진보진영도 반성해야 한다. 특성화 고교 무상교육과 마이스터 고교 설립 같은 실질적인 개선 정책은 이명박 정부에서 이뤄졌다. 고졸취업이 화두가 된 것도 최근이다. 김상곤 교육감은 무상급식 예산 편성을 위해, 특성화 고교 실습 기자재 예산을 75% 삭감했다. 인문계 고교생들로 따지면 연필을 꺾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기도 지역 특성화 고교 선생님들은 김상곤 교육감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작년에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진영의 문용린 교육감 후보는 특성화 교육과 신설을 약속했다. 반면, 진보 진영의 이수호 교육감 후보는 ‘취업 질 강화’ 같은 원론적인 안만 내놓았다.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은 특성화 고교 학생들을 위한 방과 후 노동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했다가 기업과 보수단체의 반발로 무산됐다. 학생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제대로 된 현장실습이 되려면, 일본처럼 방학기간에만 4주 이내로, 직접 생산라인 투입이 아닌 보조로 현장을 체험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전교조가 제안하는 협회 연계형 현장체험학습 제도도 고려할만하다. 우선 업체들이 만든 협회에서 해당 산업에 필요한 능력을 기르는 교육과정을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제도 개선을 통해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현장실습을 폐지하는 강수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취업률로 특성화 고교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취업의 질, 실습 만족도, 노동법 준수, 같은 질적 평가 도입이 절실하다. 김민재 군은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다. 김 군의 꿈은 자동차 디자이너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나중에 자동차 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고교 시절 내 부전공이 자동차 공학이었다. 김 군이 깨어나면, 같이 자동차 모터쇼를 관람하고 싶다. 그땐 “우리 공고 나온 남자잖아!” 라고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46 | 추천: 0
최수범/ 청년 칼럼니스트 2011년 12월 기아 자동차 광주 공장에서 실습을 하던 김민재 군이 과로로 쓰러졌다. 김 군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15~18세의 청소년은 노동시간이 하루 8시간, 주당 46시간을 넘어선 안 된다고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김 군은 하루 평균 10시간, 격주로 특근 8시간, 주·야간 2교대제로 일을 해야 했다. 경찰은 이외에도 84건의 관련법 위반 사실을 적발했다. 고교생 현장실습의 인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추가적인 사고를 막기 위한 대책들이 마련됐다. 고용노동부는 사건 후 기아차 실습생 128명의 근로실태를 점검했다.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법을 위반했다며, 기아차에 과태료 3억 원을 물렸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교육청, 학교와 함께 현장실습을 적극 지도하겠다”고 밝혔다. 그 후로 상황은 나아졌을까.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251개 기업 현장실습생 198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38.3%의 학생이 하루 8시간 이상 초과 실습을 경험했다고 했다. 46.2%의 학생은 1주 40시간 초과실습을 했다고 응답했다. 31.9%의 학생이 야간 실습을, 29.2%의 학생이 휴일 실습을 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모두 법규 위반이다. 적극 지도하겠다는 정부의 약속과 달리 현장실습 합동 점검은 지난해 11월 단 한 차례에 그쳤다. 전교조 실업위원회가 실습학생 10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45.2%의 학생은 교사가 사업장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현장실습 업무와 전공이 관련이 없다’고 답한 학생도 38.5%나 됐다. 그 사이 고교생들은 계속 위험한 현장에서 실습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지난해 6월 김 모 군은 부산항 허치슨 터미널에서 현장실습 도중 검수 일을 하다가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김 군의 학교 선생님은 "올해는 3학년 재학생의 60%를 취업시키도록 지시를 받았다. 서둘러 취업 현장으로 내보내다 보니 의뢰가 들어온 회사의 근로 조건을 일일이 챙기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학교나 교육청에서는 아직도 관련 규정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 사고가 나면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지난해 11월, 경기 군포의 실습생 박 모 군은 금형공장에서 현장실습 도중 기계에 손가락이 뭉개졌다. 30여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대형사고였다. 한 달 뒤인 12월에는 저녁 울산항 북방파제 부근에서 석정36호가 전복되면서 현장 실습 중이었던 특성화고 3학년 홍성대 군이 사망했다. 박 군과 홍 군은 모두 초과·야간노동을 했다. 두 학생이 일한 업체는 모두 산재신청을 기피했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특성화고 현장실습 실태 점검을 위해 서울 구로구 한 사업체를 방문해 현장실습 학생들 및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현장실습은 취업을 앞둔 특성화 고교 3학년 학생이 산업현장에서 일을 하며 전공공부를 하는 제도다. 학교의 교육기자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1963년부터 실시되었다. 시작부터 교육적인 고려보다는 예산 부족이 동기가 된 것이다. 지금도 현장실습제도는 기업에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필자가 특성화 고교 3학년 때, 참여정부는 노예노동, 인권유린, 학교교육 파행 등을 이유로 현장실습을 전면 폐지했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규정을 어기고, 현장실습 자리를 구했다. 현장실습을 하는 친구들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정직원이 되더라도 일할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도, 현장실습을 하지 않으면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실습에 나섰다. 교과부는 2008년 학교장 책임 하에 자율적으로 시기를 정할 수 있도록 현장실습의 새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현재 현장실습은 특성화 고교 취업률 향상 정책과 맞물려 대부분의 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다. 특성화 고교 선생님들도 현장 실습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 지원금과 주요 평가를 취업률이 결정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관리 감독과 정보 없이 학생들을 실습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 취업률이 학생들의 인권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진보진영도 반성해야 한다. 특성화 고교 무상교육과 마이스터 고교 설립 같은 실질적인 개선 정책은 이명박 정부에서 이뤄졌다. 고졸취업이 화두가 된 것도 최근이다. 김상곤 교육감은 무상급식 예산 편성을 위해, 특성화 고교 실습 기자재 예산을 75% 삭감했다. 인문계 고교생들로 따지면 연필을 꺾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기도 지역 특성화 고교 선생님들은 김상곤 교육감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작년에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진영의 문용린 교육감 후보는 특성화 교육과 신설을 약속했다. 반면, 진보 진영의 이수호 교육감 후보는 ‘취업 질 강화’ 같은 원론적인 안만 내놓았다.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은 특성화 고교 학생들을 위한 방과 후 노동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했다가 기업과 보수단체의 반발로 무산됐다. 학생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제대로 된 현장실습이 되려면, 일본처럼 방학기간에만 4주 이내로, 직접 생산라인 투입이 아닌 보조로 현장을 체험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전교조가 제안하는 협회 연계형 현장체험학습 제도도 고려할만하다. 우선 업체들이 만든 협회에서 해당 산업에 필요한 능력을 기르는 교육과정을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제도 개선을 통해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현장실습을 폐지하는 강수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취업률로 특성화 고교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취업의 질, 실습 만족도, 노동법 준수, 같은 질적 평가 도입이 절실하다. 김민재 군은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다. 김 군의 꿈은 자동차 디자이너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나중에 자동차 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고교 시절 내 부전공이 자동차 공학이었다. 김 군이 깨어나면, 같이 자동차 모터쇼를 관람하고 싶다. 그땐 “우리 공고 나온 남자잖아!” 라고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32 | 추천: 1
정지혜/ 청년 칼럼니스트 두 가지 이야기로부터 시작할까 한다. 하나는 학교 성적이 떴는데, 정말 기대를 많이 했던 과목에서 예상치도 못한 점수를 받았다. 조별 과제도 열심히 참여하고 수업시간에도 의견을 많이 발표하고 시험도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납득하지 못한 점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의 신청과 시험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혹은 능력을 쌓지 못한 내 부족함을 탓하는 일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그렇게 가슴 아픈 성적표를 받고나서의 일이다. 어느 날 수영장에서 60대로 보이는 한 여성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수영을 배운지 얼마쯤 되었냐는 그 분의 질문에 나는 이제 겨우 두 달째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 분은 멋쩍게 웃으며 “나는 일 년 째에요. 그런데 수영이 잘 안 늘어요.”라고 말했다. 그 분은 수영 보조판을 겨우 떼고 혼자 힘으로 자유형을 연습하는 단계에 있었다. 두 달 째 배우고 있는 나와 격차가 많이 안 났다. 나이 때문에 느리게 배우는 게 아닐까 하겠지만, 그 분보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도 나보다 빨리 수영을 배우고 잘하신다. 꾸준히 연습하는데도 수영이 쉽지 않다면서 멋쩍게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목과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온몸이 얼음이 될 정도로 놀랐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수중운동교실 사진 출처 - 뉴스1   ‘만약 내가 수영 연습을 꾸준히 해도 한 달 동안 제자리 상태라면, 과연 일 년을 버틸 수 있을까? 매 번 수영장 물을 먹으면서 연습할 수 있을까?’ 수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생각했다. 그 분에게 수영은 취미였지만 만약 수영이 취미가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어땠을까.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수영을 관두고, 한동안 돈 없이 힘든 생활을 감수하고 다른 일을 찾아 헤매든지, 아니면 온 종일 수영만 연습하며 답답함 속에 지치다 결국엔 실적이 없다며 해고를 통보받든지 말이다. 굳이 학교 성적과 수영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노력을 배반하는 일은 종종 일어나곤 한다. 취업, 직장생활, 심지어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는 일조차 ‘노력=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거야, 요령이 없고 노력도 더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그 말이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일 수도 있다. 노력이란 단어는 희망고문을 준다.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다짐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력이 결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 과제와 시험공부를 위해서 시간을 쪼개고 자정을 넘겨도 기대를 저버린 성적을 받는 사람이 있고, 수영을 일 년 째 배워도 자유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자기소개서를 100개쯤 넣어도 합격통보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같은 사무실에서 비슷한 업무를 하는데 비정규직인 사람이 있고 “같이 노력하자!”고 외쳤으나 끝끝내 거리와 철탑까지 내몰린 노동자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노력을 한 만큼 대가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취업준비를 하고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그러나 현실은 희망고문보다 더 냉혹하고 편파적이다. 개인의 노력은 장려하나 연대의 노력은 꺼린다. 경쟁과 권력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며 ‘그건 온전히 너의 책임이니 노력하여 알아서 일어나’라고 말한다. 그 상황에서 누군가는 노력을 통해 빠져나오겠지만, 누군가는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또다시 제자리에 남겨질 테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도 될 수 있고 모두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과가 성공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야한다. 내가 수영장에서 만난 여성처럼, 누구든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사회, 능력과 결과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연대를 위해 더 노력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 말이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50 | 추천: 1
정다운/ 청년 칼럼니스트 “쉿” 1984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의 동독. 극작가 드라이만의 집. 드라이만이 동독의 자살률과 같은 사회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친구 하우저는 드라이만의 입을 막는다. “그들이 다 듣고 있어.” 2006년에 개봉한 영화 ‘타인의 삶’ 중 한 장면이다. 당시 동독 국민들은 10만이 넘는 비밀경찰(슈타지)로부터 삶의 전반을 철저하게 감시당했다. 그리고 그 두 배인 20만의 국민은 밀고자가 되어 서로를 감시하고 검열했다. “쉿” 2012년, 18대 대통령이 선출되던 밤, 대한민국. 서울의 한 가정집. 진보성향의 대학생 딸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대선 결과를 한탄하는 내용을 쓰자,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입을 막는다. “공개적인 곳에 그런 글 쓰지 마라. 누가 보면 어쩌려 그래? 이제 취업도 해야 하는데……” ‘그날’ 저녁, 우리 집의 한 장면이다. 엄마는 늘 그렇듯이 무심결에 딸 걱정을 하셨다. 나도 무심결에 듣고 넘겼다. “밥 잘 챙겨먹어라.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어라” 늘 듣는 이 말들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몇 달 전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984년의 동독과 2012년 한국이 묘하게 겹쳐보였다.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적잖은 충격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왔다. ‘누가’ 보면 나를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엄마도 참, 요즘 세상에 인터넷에 글 좀 썼기로서니 취업에 불이익 되는 그런게 어디 있냐고 말대꾸를 하려 했다. 하지만 배짱이 생기지 않았다. ‘글을 지워야 하나?’‘어쩌면 그런 일을 겪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용기 없음이 당황스러웠고, 또 부끄러웠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걱정을 한 엄마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이 걱정이 자연스러워진 2012년의 한국이 정말 걱정되었다. 대놓고 감시하던 ‘그런 시절들’과는 달리, 2012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는 슈타지도 없고 밀고자도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검열하는 ‘착한 국민’이 있었다. 지난 5년간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우리를 이토록 착하게 만들었다. 누구는 포스터에 쥐그림을 그려서 잡혀가고, 누구는 ‘심판하겠다.’ 문자 한 통에 직장에서 좌천됐다. 트위터에서 북한가요의 가사를 리트윗 했다는 이유로 기소 당하고, 선거 날 V자를 그리며 찍은 사진이 특정후보를 응원한다는 이유로 벌금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가 처참히 무너진 5년이었다. 영화 '타인의 삶' 사진 출처 - 씨네21   그 덕분에 엄마도, 나도 너무 착해졌다. 몇몇 유치한 장난처럼 보이는 규제와 억압들이 만들어낸 결과는 실로 거대했다. 착하게도 우리는 누가 어쩌기도 전에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 것이다. 얼마 전 배우 김여진씨가 모 프로그램에서 정치활동을 이유로 퇴출 된 일이 있었다. 온라인상에서 그 처분의 정당성에 대해 설전이 오갔다.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역정을 내는 사람들만큼, 그냥 정치발언도 아니고 캠프에까지 몸담았던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건전한 사회 가치관과 공익의 수호를 위해 그런 격한 활동, 발언은 좀 참거나 조심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검열’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흔든다. 2012년 4월에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가 발표한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제안 보고서’에 따르면, 이 ‘착한 심성’은 ‘위축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위축효과란 합법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적 통제에 순응하여 그러한 행위를 회피하게 되는 현상이다. 위축된 시민은 자기검열을 일상화하게 된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규제되어야 할 표현을 자주 하는 시민은 어느 샌가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의심받게 되고, 이는 일반 시민들을 특정 이념이나 가치 중심으로 편가르기 하게 된다.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이 차단된 편협한 시민성은 당연히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절제되지 않은 표현이 사회 혼란을 가져온다는 우려도 결국은 위축효과와 자기 검열의 산물이다. 정부의 잘못된 규제로부터 잘못 학습된 일반국민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1984년, 동독. 10만의 슈타지와 20만의 밀고자. 표현의 자유가 자의적이고 모호하게, 광범위하게 규제될수록 슈타지는 한가해진다. 시민들이 알아서 서로를 밀고하고 스스로를 검열하기 때문이다. 2013년, 한국. 지난 5년간 우리는 계속 착해졌고 그래서 바빠졌다. 슈타지가 해야 할 일을 알아서 대신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새 정부는 이런 일에 관해서라면 손 안대고도 코 풀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국민이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31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