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김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밀양 할매 할배들은 아프다.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과 경찰들이 매일같이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령의 밀양 주민들은 그들이 평화롭게 살아온 터전을 지키고 후대에 물려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한다. ‘전력난 해소’를 명목으로 신고리 원전 1,2호기에서 생산한 원력을 경상남도 창녕 북경남변전소에 전달하기 위해 계획된 765KV 송전탑 건설 사업이다. 문제는, 이 초고압 송전선이 밀양 지역민들의 민가를 지나가도록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거리를 최대한 짧게 하여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주민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공사이다. 밀양 주민들은 차라리 산에만 송전탑을 세우면 다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압 송전선로의 극저주파 전자파가 발암 가능성 물질일 뿐만 아니라 주 생업이 농사인 밀양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재산권과 조망권을 침해받게 된다. 한전의 무리한 공사 진행이 밀양 주민들의 생존 터전을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다.   밀양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의 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진 출처 - 필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용역을 투입해 ‘막무가내식’ 공사를 진행하려고 하는 한전을 보면, 타협할 생각도 합의점을 도출할 생각도 없는 듯하다. 또한 경찰도 어느덧 한전의 ‘용역’이 되어 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데 커다란 몫을 하고 있다. 송전탑 반대 농성을 벌이는 고령의 주민들에게 잦은 폭행과 폭언은 물론 강제연행, 벌금폭탄 등 정신적 피해를 가하고 있다. 7,80대 노인들의 반대 시위를 막기 위해 매일 2,3천여 명의 한전 직원들과 경찰들이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밀양 주민들의 아픈 세월이 올해로 9년이 돼간다. 그동안 주민 이치우(74) 씨는 “오늘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라며 분신자살을 했고 주민 1백 여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상동면에 거주하는 70대 주민 이순춘 씨는 말했다. “우리는 커다란 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예전처럼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길 원할 뿐”이라고. 그의 말에서 밀양 주민들의 모습은 단순히 몇몇 언론에서 떠드는 것과 같은 ‘님비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밀양 주민들은 밭에 잡초가 무성하도록 생업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송전탑 저지를 위해 온몸을 던져 한전과 싸우고 있다. 이러한 밀양 주민들을 위해 일반 시민들의 지속적인 도움과 관심이 필요하다. 평밭마을에서 열린 지난 송전탑 저지 124번 째 촛불문화제에서 어떤 주민이 말했다. “TV에서 사람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볼 때, 저 사람들은 왜 저럴까. 그냥 양보 좀 하지. 그만 좀 시끄럽게 하지.” 그러나 막상 겪어보니 알겠더라고 했다. 왜 TV속 농성자들이 그토록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이에 덧붙여 밀양 주민들은 평화롭게 살아 왔던 우리들이 TV 속 농성자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밝혔다. 그렇다. 사실상 이 사회에서 ‘그들의 문제’는 사실상 ‘나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밀양 송전탑 문제도 언제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고, 더 나아가 나, 가족, 친구가 겪을 수 있는 고충을 밀양 주민들이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밀양주민들과 함께 할 필요가 있다. 김지영씨는 위안부, 쌍용차 노동자 등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81 | 추천: 0
이현정/ 청년 칼럼니스트 <당신은 노동자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이 질문에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난색을 표하거나 상당히 불쾌하다고 여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노동자가 건설 노동을 비롯해 여러 가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勞動은 ‘몸을 움직여 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첫 번째 뜻으로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가 나온다. 그렇다. 노동에는 정신적 노동도 들어가는 것이다.(주격조사 은과 이의 차이점 구분하시길.) 그럼 노동자라는 낱말에는 어떤 뜻이 들어 있을까? 국어사전의 첫 번째 뜻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임금을 받고 생활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노동자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이른바 ‘월급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노동자라는 말을 매우 꺼려하는 것 같다. 오히려 ‘근로자’에 더 익숙한 편이다. 우리 사회는 왜 노동자라는 단어에 이렇게 민감한 것일까? <노동자는 □다?> 얼마 전 매우 충격적인 기사를 하나 접했다. 평택비정규노동센터에서 중고생 57명을 대상으로 한 노동자는 □다? 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청소년들의 답변을 보고서는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못 배운 자들, 거지, 중국인, 외국인, 돈 버는 기계, 득이 없다…. 약 90%의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노동자는 차별 받는 사회적 약자였던 것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노동자들도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노동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기를 바랐던 것은 너무 큰 기대였을까. 생각해 보면 교과 과정에서 노동을 제대로 배울 기회도 없고, 더더군다나 매일같이 접하는 언론과 여러 매체에서는 노동자들의 부정적인 모습만 담고 있다. 사측의 횡포에 맞서 투쟁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노동자들의 모습만 간접적으로 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언론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슬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의 슬픈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20년대에도 노동 쟁의는 있었고, 광복 후에도,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절에도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 왔다.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일어났던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처우가 많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찾아온 신자유주의는 다시금 노동자들을 옥죄었다. 전체 노동자 중 비정규직이 40%나 차지하는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이 노동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도 섬뜩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들도 노동자다> 전교조가 법외 노조가 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은 법외 노조가 되는 최악의 상황도 감수하겠다고 한다.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상황이다. 표면적으로는 해직 교사의 조합원 자격을 놓고 일어난 일이지만, 속내는 정부가 교사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닐까? 여기서 다시 물어본다. 교사는 노동자인가, 아닌가? 교사는 교육자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특별한 직업으로 여겨진다. 교육하는 행위가 과연 노동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교사는 교육이라는 특수한 행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임금을 받는다. 처음에 알아보았던 노동자의 뜻과 비교해 보면, 교사는 교육, 수업이라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다른 비교를 하자면, 교사는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고, 학생은 그 서비스를 받는 고객인 것이다. 교사들이 수업을 하는 행위가 노동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교사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임금을 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미래를 보게 하고, 꿈을 갖게 하는 선생님들의 노동이, 그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한다면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미래에 하게 될 노동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시 한 번 이렇게 학생들의 머릿속에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쐐기를 박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우리 아버지도, 옆 집 아주머니도, 노동자다> 노동자라는 단어에 민감한 사회. 노동자라는 단어 보다는 근로자라는 단어가 좀 더 적당한 사회. 노동자는 차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청소년들의 꿈이 노동자가 아닌 사회(실제로 그들 대다수의 꿈은 결국 노동자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주변을 둘러보면 노동자는 참 많다. 우리 아버지도 노동자이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 친구들도, 새벽을 열며 거리를 청소해 주시는 환경미화원 분들도, 회사에 앉아 컴퓨터와 씨름 하고 있는 회사원들도, 추운 날씨에도 밖에서 도로를 보수 중이신 분들도, 모두 노동자다.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 않는 것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노동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낸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옭아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꽃이다. 우리는 꽃이다. 노동자는 꽃이다.’라고 했던 희망버스가 떠오른다. 그래도 학생들의 대답 중에 노동자는 우리 아빠다, 노동자는 나의 미래라는 것이 있었다. 아직은 노동이라는 꽃의 씨앗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나보다. 노동의 꽃, 노동자를 지켜내는 것은 어떤 적에 맞서기 위함이 아니다. 노동자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금 묻고 싶다. 자, 당신은 노동자입니까? 이현정씨는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86 | 추천: 0
한은석/ 청년 칼럼니스트 건강한 시민사회를 생각할 때, 폭력의 피해자에게 폭력의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정치집단이 대중들에게 가져야 하는 책임과 의무라는 관점에서라면 다르다. 정치집단은 신성한 진리의 권위가 아니라 대중들의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정치를 한다. 대중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정치집단만큼 취약하고 무능한 집단이 있을 수 있을까? 공안당국과 정부에 의해서 주도된 이번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은 통합진보당의 이런 과오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국정원의 공작 뒤에는 정부여당과 공안당국에 비판적인 진보 언론도 통합진보당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국정원은 이런 점을 영리하게 파고들었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야권이 국정원 개혁에 칼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안은 쉽게 통과되었고, 여론에서는 국정원이 할 일을 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심지어 통합진보당이 국정원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반응까지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통합진보당이 국정원을 구원한 셈이다. 작년 총선에서는 제3당으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여권에게는 만만한 호구가, 야권에는 짐짝이 된 처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통합진보당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매카시즘과 기득권 세력과 미 CIA의 공작 때문이지만, 이는 무책임한 변명에 가깝다. 문제는 어떠한 오류도 없으며, 반성도 필요 없다는 태도에 있다. 통합진보당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권력을 통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대신 당면한 거대한 악과의 싸움에서 단결을 우선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가치와 목표에 대한 비판적 토론과 합의는 적전분열을 일으키는 이적행위로 비난받았다. 대신 도덕적 우월함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투쟁과 단결만이 허락되었다. 물론 투쟁과 단결은 지도자들의 지휘통제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진보정당에 으레 기대하는 비판적 사고와 풍부한 인권적 감수성은 사라졌다. 보수정당 못지않은 일사불란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당명이 민주노동당이었지만 당직자노조를 탄압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고, 성소수자는 자본주의가 만든 해악이라는 황당한 말이 당직자의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또한 진보신당 분당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당 중앙위원회의 의사소통 과정은 보수 기득권 정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민주노동당 시기의 일들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당원들 사이에서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총선 이후 부정경선 논란이 일면서 벌어진 일산 킨텍스몰 폭력사태는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오마이뉴스로 생중계된 폭력사태는 총선 당시 정당 비례로 지지를 보냈던 220여만 명의 지지자들을 경악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이 장면을 정당비례표를 찍어준 220만 명이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물론 이게 끝이 아니었다. 통합진보당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떠한 과오도 없으며, 따라서 책임질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련의 사건은 미 CIA와 기득권 세력, 권력에 눈이 먼 심상정, 유시민 공동대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정해야 할 과오는 없었다. 오직 단결과 투쟁만이, 이석기, 김재연이 의원직을 유지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당은 언제나 옳았고 적은 언제나 틀렸다. 총선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파국 때문에 가려지긴 했지만, 총선까지의 과정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당론으로 FTA 추진을 반대하며, 당원이 FTA 반대를 외치며 분신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총선과 당직 선거에 유리한 구도를 차지하기 위해서 착한 FTA를 말하는 국민 참여당과 합당이 추진되었다. 역시 당내 반대가 있었지만 당면한 거악과의 싸움이 먼저라는 이유로 결국 묵살되었다. 총선 당시 제시된 복지 공약들은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과도 큰 차이가 없다는 평을 들었다. 가장 압권은 17대 대선 당시 기록적인 참패를 당했던 캐치프레이즈와 정책인 코리아 연방 공화국을 18대 대선에서도 그대로 들고 나온 것이었다. 보수정당들도 당명을 바꾸고, 새로운 정책을 쏟아내면서 지지를 얻으려 노력한 것과 비교해서 통합진보당의 이런 모습은 안일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통합진보당의 정치 지도자들이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은 정치집단이 대중들에게 신뢰와 지지를 받기 위해서 보여줘야 하는 가치와 기준, 정책과 계획이 아니라 정치적 경쟁자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악한지, 그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우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중들에게 더 나은 대안의 선택이 아니라, 더 선한 우리 편이 되기를 요구했다. 그 결과는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지막지함과 어떠한 비판도 거부하는 폐쇄성, 그리고 마치 종교전쟁에 참전하는 것 같은 광신에 가까운 열정이었다. 그러나 더 많은 당직과 선출직, 더 많은 국고보조금을 향한 섬세함을 포기하지는 않은 열정이었다. 이름만 진보정당일 뿐, 그 행동에 있어서는 보수정당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잠재적인 지지자가 될 수 있는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공안당국과 정부는 믿을 수 없지만, 통합진보당은 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논평이 나올 때마다 오락가락하던 통합진보당의 허술한 해명은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종북 척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마녀사냥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은 시민단체가 아니라 선출직 의원을 보유한 엄연한 정치집단이다. 정치집단으로서 무능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민사회의 보호 안에 안주한다면, 아무리 시민사회가 건강해지고 매카시즘을 극복한다고 해도 통합진보당이 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은석씨는 사회 내 불평등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94 | 추천: 0
조아라/ 청년 칼럼니스트 10월 7일 인천의 한 고용센터. 이곳에서는 하루에 100명 정도가 실업급여 교육을 받는다. 고용센터를 찾은 사연은 제각각이다. 김정문(56)씨는 전직 은행원이다. 정년퇴직 후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고용센터를 찾았다. 두 남매를 키우는 홍성애(40)씨는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했지만 회사 사정이 악화됐다는 이유로 계약을 해지 당했다. 은행원과 중소기업 직원. 지금까지의 삶은 달랐으나 다가올 삶을 걱정하는 모습은 똑 같아 보였다. 월요일 낮 11시였지만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부분은 우리 아버지뻘로 보이는 50대 남성이었다. 20대로 보이는 사람은 나 말고 한두 명 뿐이었다. 11개 창구는 실업급여 신청자로 꽉 찼다. 150번대 대기표를 받고 20분 정도 기다렸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의자가 모자라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을 굳이 찾으라면 아무 표정이 없다는 것이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대가로 사회로부터 받는 돈이 실업급여라면 당당해도 될 텐데, 어깨는 지쳐 있었고, 얼굴엔 희망이 없어 보였다.   사진 출처 - 파이낸셜뉴스   “신청 끝내신 분, 1시에 강의실로 모여주세요.” 줄을 서서 들어갔다. 교육이 시작됐다. 몇 사람이 컴퓨터 사용법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연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모르셔도 반드시 컴퓨터로만 신청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저런 사연과 질문을 듣다보면 진행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유였다. 다들 말이 없어졌다. 기계적으로 이어지는 강의에 모두 기계처럼 고개를 숙이고서 유인물을 읽었다. 1시간 정도 교육을 받고 밖에 나왔다. 고용센터를 나서던 김승희(53)씨는 “신청하고 기다리는 게 까다롭다”고 했다. 그는 “돈을 받을 수 있어서 좋지만 내 처지가 왜 이렇게 됐나 자괴감이 든다”고도 말했다. 무미건조한 고용센터는 실업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품는 곳이라기보다는 불안감을 깊게 확인하는 곳이었다. 이 고용센터를 찾는 사람은 하루에 100명 정도다. 매일 낮 1시에 신청절차 교육이 있다. 일주일이면 500명, 한 달이면 2000명이다. 전국의 고용센터가 83개다. 이곳을 평균으로 잡으면 전국적으로 한 달에 12만 5000명 정도가 실업급여를 받으러 온다는 얘기다. 수급 요건이 안 되는 사람까지 따져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업 상태일까? “65살이 돼 기초연금을 받게 된다면 인생을 잘못 사신 겁니다.” 얼마 전 김용하 전 국민연금재정추계위원장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낙오한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사실은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에게도 사회에 공헌할 책임이 있다. 그가 천재성을 발현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뛸 만한 무대를 마련해 준 사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부모님 세대의 지친 어깨, 그것은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조아라씨는 교육과 언론에 관심을 갖고 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어 교실 강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21 | 추천: 0
김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었다. 난데없이 엄마가 재미있는 ‘캠프’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캠프파이어를 하고 레크리에이션도 하는 재미있는 곳이라 했다. 그 말에 속아 멋모르고 간 캠프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곳은 바로 ‘해병대 캠프’였던 것이다. 12살의 나이에 언니, 오빠들과 함께 했던 PT체조나 기합 등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교관들은 힘들어하는 캠프 체험자들한테 언제나 이렇게 외쳤다. “정신력으로 버텨!” 교관들은 언제나 몸의 컨디션 여부와 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신력으로 버티라고 종용했다. 퇴소식 때가 되자 캠프체험자들은 울면서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하겠다며 온 몸에 군기가 바짝 든 채 집으로 돌아갔다. 훗날 필자의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온 필자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네가 너무 어리숙하고 부모님 말도 잘 안 듣고 공부도 열심히 안하니까 거기에 보내봤지. 거기에 다녀오니까 집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지?” 그 때 참가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이유로 해병대 캠프에 보내졌을 것이다. 그 날 이후로도 필자는 ‘정신력 싸움’이란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고 3 수험생 때 담임선생님이나 입시학원 선생님한테 “정신력으로 무장한 채 공부하라”는 말도 들었고 심지어 운동회 계주 때도 들었다. 22살이 된 지금, 정신력을 강요하는 이러한 기성세대의 모습을 보면 문득 근현대사 책에서 읽었던 유신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하면 된다”로 유명한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유신시절은 뭐든지 정신력 문제로 결부시키곤 하는 작금의 상황과 상당부분이 연결된다. 박 전 대통령은 국방정신교육원을 설립해 국군 장병들을 훈련시키고 새마을 운동이나 국기강하식, 교련 등을 통하여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을 정신교육 시키고자 하였다. 마치 일제의 파시즘 교육처럼 말이다. 때문에 군인 정신교육을 받은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은 각자의 개성과 의견은 무시된 채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에 매몰되기 쉬운 존재가 됐다. 유신시절의 폐해는 아직까지도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다. 사실상 군대식 정신 교육을 받은 이 시절의 시민들은 오늘날 기성세대가 돼 청소년들에게 나약한 정신력을 운운하며 자신감, 리더십 등을 얻을 것을 요구한다. 마치 필자가 겪었던 병영 캠프 체험처럼 말이다. 그래서 청소년 개개인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학교나 가족들은 입시에 지친 청소년들에게 정신력으로 버티라며 하루 종일 공부하길 강요하고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라며 극기 훈련 체험장이나 병영캠프 같은 곳을 보낸다. 그러고는 청소년들에게 이건 모두 너희들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주입시킨다. 태안 해병대캠프 희생자에게 같은 반 친구들이 보내는 추모 메시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과연 진정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다. 왜 청소년들은 굳이 정신력 싸움을 해가며 매 순간을 버텨야만 하는가? 왜 청소년들에게 이에 대해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고 기성세대에 의해 강요당하는가? 잠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싶어 하고 즐거운 것, 재밌는 것, 흥미로운 것을 해보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에게 왜 나약한 정신력을 운운하며 강인한 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하는지 의문이다. 지난 7월 19일에 문화기획자 탁현민씨가 SNS에 올렸던 글이 생각난다. “시를 가르치고 음악을 들려주고 그림을 그리게 해도 모자란 시기에 해병대 캠프가 대체 뭐랍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갑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군대 안가거나 몸에 지병이 있어야만 하는데 왜 아이들에게는 해병대 캠프니 군인정신을 가르치려 합니까?” 그렇다. 재밌는 경험도 많이 해보고 음악도 많이 듣고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기에도 모자란 시기에 왜 이렇게 청소년들에게 ‘버티는 것’을 강요하는지. 이러한 현상은 사실상 청소년들을 위한게 아니라 가족, 학교, 더 나아가 사회라는 조직에 청소년들을 묶어두고 쉽게 다루려는 기성세대들의 속편한 마음과 다를 바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민들을 쉽게 국가에 종속시키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성세대들은 더 이상 청소년들을 두고 정신력 무장을 운운해선 안 된다. 대신 청소년들을 더욱 즐겁고 개성을 살려줄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지난 7월 18일 충남 태안에서 벌어졌던 공주 사대부고 해병대 캠프 사고와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다. 김지영씨는 위안부, 쌍용차 노동자 등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92 | 추천: 0
박정훈/ 청년 칼럼니스트 지난 9월7일, 서울 청계천에서는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와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의 동성 결혼식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건만 역시나 그날도 보수 기독교인들의 행태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결혼식 시작 전부터 한 기독교단체 소속 교인 몇몇이 예배를 드린다며 무대 설치를 방해했다. 앞서 이들은 경찰에 이 결혼식의 금지를 촉구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는 따로 있었다. 한 기독교인이 결혼식장에 난입해 인분과 된장을 섞은 오물을 투척한 것이다. 자신을 교회 장로라고 소개한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내 인분과 된장을 섞어 직접 먹어보고 가져왔다. 인분과 된장을 섞은 게 바로 동성애의 현실이다. 성경을 봐라. 내 말이 거짓말인가"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한 일”이라며, 자신의 행동에 후회가 없다고도 했다. 진보든 보수든,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면 맹신과 맹종으로 비치고, 타자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 기독교 내에서도 성경에 대한 해석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나뉜다. 보수 기독교인들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에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에게 혐오감을 드러낸다. 동성애와 관련된 이슈가 있을 때면 여지없이 위의 결혼식에서처럼 동성애를 반대하는 직접 행동에 나선다.   결혼식장의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와 결혼식장에 난입해 오물을 투척한 기독교인 사진 출처 - 뉴시스   사실 이런 행동에는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공리’를 사회 일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내재돼 있다. 그러나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해서는 상대를 자신의 생각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보수 기독교인에게서 받았던 것과 유사한 느낌을 최근 김조광수 감독에게서도 받는다. 얼마 전 김조광수 감독이 SNS에 올린 글에서도 그렇다.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성경을 근거로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성애, 이혼, 낙태한 사람에게 자비(mercy)를 촉구한 것은 가톨릭 교황으로는 진일보한 발언임에 틀림없지만 여전히 '동성애, 이혼, 낙태'를 죄로 규정한다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교황청이 갈릴레이 갈릴레오를 사면한 게 1992년이다. 가톨릭 교회가 가장 늦게 변한다. 가톨릭이 '동성애, 이혼, 낙태'를 언제쯤 '죄로부터 사면'을 할지 궁금하다. 내가 죽기 전이길 바란다.” SNS에 올렸으니 불특정 다수가 봤겠으나, 메시지가 겨냥하는 주요 독자는 개신교인 내지 가톨릭 교인이다. 김조광수 감독을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권리를 주장하듯이, 보수적인 기독교회들이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는 것도 그들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교리가 곧 신앙의 요체인 그들에게 교리가 잘못되었으니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동성애자들에게 동성애가 잘못이니 회개하라는 것과 질적으로 다른 행위라고는 해석되지 않는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광신도의 신앙주의를 분석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히 이른바 좌파공동체 ‘안’에서 증명 없이 참으로 통하는 것이 ‘밖’에서는 증명해야 할 명제가 된다. 공리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게 자기들 공동체 내에서나 통하는 얘기를 믿으라고 강권할 때, 사실상 그들은 광신적인 전도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셈이다.” 사회의 소수자들이 하는 말이라고 해서 광신도의 말과 다르다는 보장은 없다. ‘안’에서는 타당하고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밖’에서는 터무니없는 소리일 수 있다. 기독교인들과의 ‘단절’이 아니라 ‘소통’을 원한다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정해줘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발전적인 논의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입장이 다른, 더군다나 상대하기가 버거운 누군가와 대립하고 있을 때에는, 무엇보다도 상대방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항상 살피고 견책할 필요가 있다. 박정훈씨는 노동과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있는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29 | 추천: 0
이윤소/ 청년 칼럼니스트 지난 9월 7일 김승환, 김조광수 커플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공개적인 동성 결혼식을 올려 큰 화제가 됐다. 이 결혼식의 제목은 ‘김조광수 김승환의 당연한 결혼식, 어느 멋진 날’이다. 이성 간의 결합에 있어서 결혼은 어찌 보면 진부하리만치 당연한 개념이다. 그러나 동성 간의 결혼이 ‘그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데에는 아직 사회적 인식이 도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류 권력이 그들을 ‘당연하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조건은 각자가 지닌 권력의 크기에 달려있다. 권력을 지닌 주류는 스스로를 사회적 인식의 주체로 여기며, 비주류를 대상화된 객체 즉 ‘타(他)자’로 여긴다. 예를 들어 한국에 사는 ‘성인, 남성, 부유한 사람, 서울 사람, 이성애자, 비장애인’은 나라는 존재를 힘들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스스로를 권력을 지닌 주류로 생각하며, 사회에서도 이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소년, 여성, 가난한 사람, 중소도시 사람, 동성애자, 장애인’의 삶은 그렇지가 않다. ‘당연하지 않은’ 이들의 삶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증명하고 설명하기를 요구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은 사회적으로 ‘당연한’ 존재가 아닌 사람들을 주류 사회에 ‘편입해 주면서’ 특정한 이미지를 덧씌운다. 왜냐하면 주류는 비주류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만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류가 낯선 존재에게 ‘익숙한 개념’을 부여해 종전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권력을 지닌 주류는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개념을 말할 때 명칭에서부터 차이를 둔다. 예를 들어 ‘여검사, 여의사, 여성 국회의원’처럼 ‘사회적인 권력’을 지닌 여성을 묘사하면서 앞에 ‘여’라는 글자를 붙인다. 어느 누구도 ‘남검사, 남의사, 남성 국회의원’이라고 ‘남성’임을 강조하면서 전문직 남성들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또한 권력적 지위를 차지한 여성에게는 그 지위에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역할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한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는 기업의 CEO에게 강인함, 카리스마, 추진력 등을 기대한다. 그러나 여성 CEO의 경우 ‘어머니 같은 포용력, 섬세함, 부드러운 리더십’등의 수사를 붙여 포장하며 일반적인 역할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주류 권력의 입장에서 ‘권력을 지닌 여성’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낯설기 때문에 그 개념을 본인들에게 익숙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여성의 모성성’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해 해석하는 것이다. 소수자가 사회적으로 타자화 되는 문제는 장애인 이슈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빈번히 나타난다. 언론에서는 ‘우리도 잘 할 수 있어요.’, ‘장애인 ㅇㅇ씨의 함박웃음’ 등의 제목을 통해 ‘선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장애인 이슈를 다룬다. 또한 ‘장애인의 성’, ‘장애인의 범죄’ 등 보편적 인간 군상이 모두 지닌 모습(그러나 사회적으로 부정하게 여기는 것)과 관련된 내용은 이야기에서 철저히 배제한다. 따라서 대중의 인식 속에서 장애인은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아니라 ‘미담’ 속에서만 존재하는 ‘박제화 된 존재’로 고착된다. 몇 년 전 ‘장애인을 장애우로 바꿔 부르자’고 말했던 캠페인이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장애인’과 ‘장애우’의 차이는 그들의 주체성을 존중하느냐, 아니면 그들을 타자화, 대상화 하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즉, 사회적으로 타자화 되는 과정에서 장애인은 ‘제 권리를 주장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나약한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 출처 - 레인보우팩토리   동성 결혼 이슈를 다루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성 결혼을 찬성하는 진영의 일부는 동성 간의 결혼을 말할 때 종종 ‘성스러운 사랑, 진정한 사랑, 아름다운 것’등의 수식어를 사용하곤 한다. 동성 간의 결합을 주류 사회로 ‘편입해 주기 위해서’ ‘아름다움, 진정성, 선한 것’이라는 가공된 이미지로 그들을 포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오히려 동성 간의 결혼을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 아니라 특이하고 특별한 일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어 그 결혼의 당위성을 흐려버리기도 한다. 보부아르는 저서 ‘제 2의 성’에서 타자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과 인식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주체인 남성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타자가 되었다. 타자란 "내가 내 스스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모든 부정적인 자질을 갖는다.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남성이나 남성다움은 규범으로 세워지고 여성이나 여성다움은 부정적인 것, 비규범적인 것, 즉 타자로 간주된다. 남성은 여성을 사회적 타자로 만들기 위해 여성다움, 즉 여자가 아내, 어머니, 연인, 첩, 매춘부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들었다.’1) 보부아르는 ‘타자화’를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설명했지만 ‘타자화’라는 개념은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모든 사회적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사회는 권력적 소수자를 절대적인 존재인 주체에 기대서만 성립하는 상대적인 존재로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는 이른바 ‘타자’들에게 ‘모성, 선함, 진정성, 아름다움’ 등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이미지를 덧씌워 그들의 존재를 포장한다. 즉 주류 권력은 사회에 편입해 준다는 명분으로 소수자의 사회적 역할을 극히 일부분으로 한정해 소수자의 당연한 권리 행사를 방해한다. 무엇이 당연한 존재인지, 무엇이 당연하지 않은 존재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미 주류 권력에게 넘어가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권력으로부터 권력적 소수자와 다수자를 가르는 기준을 판단할 권리를 쟁취해야만 한다. 당연성 기준을 쟁취하는 투쟁은 단지 정치적, 사상적인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을 규정하는 사회 시스템과의 다툼 또한 동반해야 이뤄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연성 기준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불균등은 정치적, 문화적, 사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이미 시스템으로 고착화된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서도 기인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언제까지나 다수이며 주류일 수 없다. 현실 속에서 겪는 부침과 사회적 기준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모두 소수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소수자를 배려한다’는 시혜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소수자성을 발견해야 한다. 이어 타인의 존립을 비본질적인 것, 부수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는 사회 권력에 저항해야 마땅하다. 1) 고정갑희,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5.22, 휴머니스트 이윤소씨는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5 | 추천: 0
- 불안과 우울은 누구의 것인가? 김원진/ 청년 칼럼니스트 단언컨대, <렛미인 3>은 문제적인 프로그램이다.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는 <렛미인 3>는 사연을 받아 직접 성형수술을 해준다. 제작진의 표현에 따르면 ‘억’소리가 날 정도로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이 지속되는 건 그만큼 광고가 붙고 화제가 되기 때문이다. 성형수술하기 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끔찍한 표정을 짓는 현재 ‘나’의 모습은 어떤 극단을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의 외모 때문에 느끼는 불안과 우울의 끝, 여기가 끝이면 좋으련만 미(美)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오늘도 전진한다. 성형에 관한 우리 주변의 일화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고등학교 한 학급에 절반 이상이 성형수술을 한다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성형을 심각하게 고민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다. 성형은 곧 기술발전이 인간에게 선사해준 축복처럼 여겨진다.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은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이 오히려 힘을 얻는다. <렛미인 3>처럼 미디어는 자존감 회복을 앞세워 성형수술의 순기능을 널리 알린다. 광고는 보다 적나라하고 솔직하다. 병원광고 규제가 풀린 이후 성형외과 광고가 도시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도시의 시민들은 분 단위로 성형외과 광고를 접할 수 있다. 학교로 향하는 마을버스엔 메일같이 이런 광고 멘트가 나온다. “성형인 될래? 성형미인 될래?” 우울과 불안이 ‘병’으로 불리게 된 건 근대 이후다. 경쟁의 파고 속에서 24시간을 보내야 하는 도시의 삶, 도시인에게 희소가치를 쟁취하라고 속삭이는 자본주의의 구축은 한 개인의 불안을 극대화한다. 예전엔 주로 자연재해나 외세의 침략 따위가 불안의 원인이었다면 이젠 나의 구직, 외모, 건강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그래서 의학의 정신과와 사회과학의 심리학은 개인의 불안과 우울을 치료한다고 앞장선다. 사람이니까 당연히 불안한데 현대사회에선 불안의 정도가 조금 심하니 치유 해주겠다는 식의 담론이다. ‘외모’엔 물리적 치유도 따라붙었다. 성형을 필두로 한 각종 뷰티산업이 대표적이다. 이제 이들의 불안을 치유해주겠다는 속삭임은 더 낯간지러워졌다. 이를테면 이런 방식이다. 성형외과 의사는 잠재적 고객을 겁박한다. “성형인 되기 싫지? 우리 병원 오면 성형미인으로 만들어줄게.” 한국 사회에선 성형괴물이라고 호명되는 대상이 있다. 큰돈을 들여 성형수술을 했는데 티가 많이 나고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을 흔히 성괴(성형괴물)이라고 부른다. 성형미인을 만들어 주겠다는 이 병원은 개인이 느끼는 불안을 군데군데 어루만져준다. 일단 못난 얼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우리가 해결해주겠다는 것이 하나. 성형을 했는데 오히려 예뻐지지 않을 불안까지 제거해주겠다는 것이 두 번째다. 이렇게 고도화된 방식의 세일즈는 인간의 불안은 제거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화폐와 불안은 교환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전제로 한다. 보통의 외과수술과는 달리 사람들은 성형수술 결과가 만족스러울수록 수술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성형수술의 오묘한 지점이다. 성형인/성형미인을 구분하는 성형외과의 전략은 그래서 탁월하다. 불안을 치유해주는 척 하면서 하지만 또 다른 불안을 끄집어내서 극대화하는 것이다. 비싼 값을 받으려면 불안의 종류는 다양할수록, 강도는 셀수록 좋다. 그래야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까. 불안과 우울은 과연 온전히 내 감정인가, 라는 질문을 할 틈조차 없다. 쉴 새 없이 미디어와 뷰티산업이 도처에서 아름다워지라고 종용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안의 정체에 대한 상상력이 불가능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STORY ON <Let 美人 시즌3> 한 장면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이것은 혁신이다” 기업이나 사회조직에나 어울릴법한 ‘혁신’이라는 용어가 이제 인간의 용모에도 적용된다. 외모의 혁신적 변화는 곧 뼈를 깎고 살을 잘라내는 고통을 감수한 변화이기도 하다. 혁신의 주체는 개인이고 아픔을 감내한 주체 역시 개인이다. 어느 때보다 ‘아름다움’으로 중무장한 상품들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빽빽이 메우고 있는 시대에, 개인 역시 시대를 좇아야 한다. 정확히는 좇아야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몸에 갇힌 사람들>의 저자 수지 오바크가 지적하듯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몸은 안전하거나 정상적이지” 않다. 이제 외모는 먹고 사는 문제와도 연관되기 시작했다. 어떤 기준에 미달하는 외모는 노력부족으로 간주된다. 성형외과는 “이것은 혁신이다” 따위의 광고로 외모도 노력만 한다면 혁신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귀엣말을 설파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이다. 자신의 노력부족, 관리부족을 자책한다. 취업이 안 된 것은 ‘내’가 나를 잘 꾸미지 못한 부분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레 불안과 우울의 감정의 부피는 커진다. 이제 ‘개인의 책임’은 하나의 규율이 되었다. 안 그래도 불안한데 책임소재까지 나에게 있으니 더 불안한 것이다. 아름답지 않음은 곧 개인의 나태함이 병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형외과에서 얼굴을 ‘고친다’라는 표현은 아름답지 않은 외모가 ‘병’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성형외과 수술과 시술에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스스로 열심히 벌어 고쳐야 한다. 전적으로 사적영역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인 셈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기 계발 담론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자기계발 혹은 자기혁신의 범주에 외모 역시 포섭된다. 외모마저 개인이 전적으로 책임지는 세상에선 오히려 불안과 우울감 없이 살아가는 게 더 이상한 것이 아닌가. “닮지 마라. 예뻐져라.” 닮음/유사함/공산품은 현대사회의 미덕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형수술을 하더라도 닮으면 안 된다. 아름다워지더라도 남과 달라야 한다. “닮지 마라, 예뻐져라.”라는 광고 카피는 기계에서 찍어낸 곰돌이 모양의 젤리처럼 비슷비슷해지는 ‘성형인’이 아닌, 개성 있는 ‘성형미인’을 만들어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사한 아름다움’에 대한 불안을 제거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는 명백히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감언이설에 가깝다. 약장수의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미의 기준은 무엇이었던가. 오뚝한 코? 쌍꺼풀 진 눈? 움푹 파인 두 눈 사이? 갸름한 브이라인? 살짝 튀어나온 이마? 풍만한 가슴? 글쎄, “닮지 마라. 예뻐져라.”고 광고한 성형외과는 의술이 매우 뛰어나, 위의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따르면서도 개성적인 얼굴을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코를 조금 높이느냐 더 높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전체적인 느낌은 비슷하다. 어딘가 얼굴이 부자연스러운 연예인을 보면 ‘이상하다’는 반응만큼 ‘다 똑같다’는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의심과 회의의 대가 데카르트는 “아름다움의 근거란 사실상 규정 불가능한 것이어서 아름다움은 판단하는 인간에 의해서 변주된다.”라고 했지만 현실은 데카르트의 생각과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획일화되어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 즉 서구적 얼굴형만이 각광받는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 규범처럼 여기는 미적 기준에 충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성공적인 삶의 기준이라는 것이 ‘부자 되세요!’ 혹은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으로 좁혀지는 것과 유사하다. <외모 꾸미기 미학과 페미니즘>의 저자 김주현이 주장하듯 이제 우리의 질문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왜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 되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이름 모를 타자에 의해 세워진 미적 기준을 따라가려다 보니 삶은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오늘날 인간의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을 오롯이 ‘개인의 본능’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다. 수지 오바크의 말마따나 자신감과 선택의 여지를 얻는 것이 언제나 좋은 일이라는 논리 역시 공허해진다. 즉 ‘신체의 불안정화’ 시대에 우리가 살게 된 건 단지 미적 욕망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 의료산업은, 미디어는 불안을 치유해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불안을 조장하려 든다. 사회는 무방비다. 사회는 ‘인생은 스스로 돌보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 하나의 기준으로 미를 평가하면서 강요하는 문화적 규범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이 시대의 삶의 지침과 상충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똑같아지지 못하는 사람들, 기준으로 수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안감 속에서 살아간다. 사회는 이들을 자기관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배제하거나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불안과 우울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 인용구로 들어간 굵은 글씨의 중간제목은 실제 성형외과 광고 카피입니다. 김원진씨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언론인권센터 모니터링팀에서 활동 중인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07 | 추천: 0
한은석/ 청년 칼럼니스트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정보기관이 정권을 위해서 정치 현안에 개입했다.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 심각한 범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방법이 겨우 인터넷에서 악플이나 다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황당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꽤 그럴 듯한 일을 하던 곳이 아니었던가? 굵직한 여론조작부터 북한에 돈을 주고 안보위협을 조장한다거나, 주요 인사들을 도청한다든가 말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기관 조직원들이 골방에 틀어박혀 악플이나 달고 있다니, 도대체 왜 이런 찌질한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사실 댓글을 여론조작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국정원이 처음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당연해서 신경 쓰지 않았던 사실은, 새누리당이 한나라당 시절부터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서 조직적으로 여론 조성을 위한 댓글 작업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2003년 당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인터넷 여론전에 활용하기 위해 사이버 전사 천여 명을 양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의 반응은 조롱과 냉소였다. 꼰대들이라 인터넷 문화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2007년 대선 때는 주요 인터넷 사이트마다 전담팀을 두어서 여론조성 작업을 했고, 110여 개 팀 명단이 유출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작년 대선에서는 십자군 알바단처럼 아예 댓글 작업을 ‘아웃소싱’했다. 이런 여권의 끈질긴 노력이 정말로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자극적인 말은 열성 지지자들을 결집시킬지 몰라도, 부동층에겐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국정원 요원들이 다는 악플에 환호하던 사람들은 ‘일베’로 대표되는 극우파들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혐오감만 느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여권은 이런 삽질을 10년 넘게 해오고 있는 걸까? 인터넷에서의 열광적인 지지를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 때문에? 인터넷 문화에 대해서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중장년층의 한계 때문에?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권이 지난 10년간의 공작을 통해서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는 분명하다. 여권이 큰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론 자신들 스스로도 말이다. 자신들이 지지를 받고 있다는 만족감이 필요했기 때문에 더 많은 말이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했고, 결국에는 국정원까지 끌어다가 댓글 작업을 벌였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에티엔느 발리바르는 고전 철학자 스피노자를 통해, 이런 현상을 대중에 대한 정치인의 공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중은 정치인에게 강력한 힘과 정당성을 줄 수 있지만, 반대로 빼앗을 수도 있다. 정치인은 대중을 통해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대중이 일순간 돌아선다면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없던 일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과거에는 신분제 질서와 종교적 절차가 강했고 대중이 아니라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권을 가진 시민들이 등장한 근대 사회에서는 이런 통제가 약화됐다. 대중이 탄생한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중의 속성 때문에 정치인들은 대중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언제 대중이 돌아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공포에 휩싸인 정치인들은 지지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게 된다. 이런 무리수로 인해서 체제의 안정성이 흔들리거나, 적나라한 폭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공동체는 내적으로 붕괴된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 정치학논고에서 공동체들은 대부분 체제 내적인 이유 때문에 붕괴한다고 본다. 이런 해석처럼 현재 한국 사회가 내파될 위험에 처해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북방한계선 관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유출하고, 또 악의적으로 조작한 것이 여권이 가지고 있는 대중들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지지자들을 모으기 위해서, 대중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그럴 확률이 높다. 진짜 문제는 이들 이슈가 어떤 식으로든 종결된 다음이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에 국민들은 이미 크게 실망했다. 국면 전환을 위한 정상회담 대화록 유출은 무능한 민주당을 상대로는 성공했는지는 모르지만, 국민들을 상대로는 실패했다. 지지자들이 모이기는커녕, 더 많은 대중들이 반대 입장에 들어서고 있다. 분노한 대중들을 상대로 또 어떤 무리수를 둘지 큰 우려가 되는 상황이다. 스피노자는 대중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는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대중들을 모두 지지자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시즘과 전체주의 시대조차도 대중의 지지를 완벽하게 끌어내진 못했고, 그나마 대부분 오래 가지 못했다. 더 강한 정치적 도박의 효과는 잠깐뿐이다. 가능한 것은 대중들을 지지자로 완전히 묶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공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어느 야구감독의 말이다. 정치에서도 모든 것은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 동안의 댓글 공작에도 불구하고 일베는 여전히 조롱의 대상이며, 촛불은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무리수를 두지 말고 키보드 앞에서 내려가야 할 때다. 내려가야만 다시 올라올 수 있다. 국가 전체가 더 내려가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국정원 개혁에 관한 토론회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한은석씨는 사회 내 불평등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58 | 추천: 0
조아라/ 청년 칼럼니스트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글자 창제 이유에 대해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편안하게 할 따름” 이라고 밝혔다. 2013년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0.2%이다. 이제 글을 몰라 자기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엔 언제부턴가 ‘진학’과 ‘출세’의 필요조건으로 자리 잡은 언어가 있다. 바로 ‘영어’다. 부모가 그랬듯이 자식들도 혀를 굴려 ‘엘(L)’과 ‘알(R)’을 정확히 발음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 돈을 쏟아 부으면서 말이다. 어떤 이들은 자녀의 영어발음을 좋게 하려고 자녀의 혀를 수술대에 올리기도 한다. 7월 말 서울의 한 대학 강의실. 초등학생 15명이 앉아 있다. 주니어 영어캠프다. 8시 10분에 출석을 확인한다. 수업은 오후 4시 50분까지 계속된다. 오전에는 ‘패스트푸드’ 등 하나의 주제를 두고 영어로 이야기한다. 오후엔 산책을 하고, 영어뮤지컬을 배우고 부른다. 2주 간 참가하는 데 드는 수강료는 접수비와 활동비 등을 포함해 70만 원이다. 하루 7시간 씩 10일 간 수업을 들으니 하루 수강료가 7만원인 셈이다. 규칙은 영어로만 말하기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영어로 대화한다. 이렇게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방학 동안 영어캠프를 운영하는 대학이 많다. 고려대학교는 ‘기숙형 영어캠프’를 연다. 3주 간 ‘원어민 강사+명문대 멘토+특목고 멘토’에게 수업을 받으려면 298만원을 내야 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기숙 영어캠프를 열어 1주 과정(89만 원), 2주 과정(184만 원), 3주 과정(294만 원)을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도 300만 원 남짓 하는 캠프를 운영한다. 사설학원과 똑같다. 일부 학부모들은 “외국에 나가는 것보다 저렴하고 가까이에 있어 안심이 된다”며 긍정적이다. 이 캠프에 참여하는 학생에겐 원어민 강사와 대화를 나누고, 명문대에 다니는 선배를 만날 기회가 늘어날 터이다. 입시 과정에선 유명 대학 캠프에 참가했다는 경력을 더할 수 있으니, 진학 경쟁에서도 한 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주요 대학 등이 여름 방학을 맞아 초중학교 학생을 겨냥한 영어 프로그램을 내놓고 있다. 사진 출처 - 전자신문   하지만 이런 현상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의 영어 실력을 좌우할 것이란 생각이다. 일산에 사는 주부 김희경(40)씨는 “국영수 과목을 비롯해 태권도, 피아노 등을 가르치려면 한 아이에게 월 80만 원에서 100만 원이 든다.”고 말했다. 지난해 통계청이 새로 발표한 우리나라 지니계수는 0.357로 경제개발계획기구(OECD) 34개국 중 29위,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1에 가까울수록 빈부 격차가 심하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인종이나 성별․사회적 신분․재산 유무와 관계없이 균등하게 교육 받을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한다. 단지 차별대우를 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의 기회를 실질적으로 고르게 받도록 국가가 적극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의 소득에 따라 자녀가 받을 수 있는 교육 혜택이 크게 달라진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교육이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다. 10~13살은 밖에서 한창 뛰어놀 성장기다. 그들은 방학을 맞이했지만 영어캠프에 와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막힌 교실에서 답답한 영어로 기계적인 회화를 이어간다. 이들의 머릿속엔 그동안 배웠던 영어 단어와 숙어만 맴돌 뿐이다. 부지런함과 성실성을 기특하다고 칭찬해야 할까?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오롯이 아이들의 선택이었냐는 것이다. 명문 대학에 보내고 싶은 부모의 욕심일 가능성이 더 크다. 초등학생에게 방학 때만이라도 맨발로 숲을 거닐고, 별을 보며, 춤추는 나비를 쫓을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 아일랜드 같은 나라에선 ‘전환학년’을 시행하고 있다. 중3을 마친 학생에게 시험 없이 실습이나 직업을 체험할 1년의 시간을 준다. 아무런 꿈도 없이 방황하는 걸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생에게도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자유롭게 설계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니 /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 쉰 예순에도 그러지 못하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노래처럼 ‘무지개’를 보고 설렜던 유년을 보낸 사람이라면, 어른이 돼서도 아름다운 시절을 그리워할 수 있어야 한다. 영어캠프에서 유년기를 보낸 우리 아이들은 유년기의 ‘무지개’를 어떻게 기억할까? 조아라씨는 교육과 언론에 관심을 갖고 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어 교실 강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4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