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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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가수 이승철이 독도에서 노래를 했다는 이유로 일본 입국을 거부당했다고 알려졌다. 일본 공항 측은 이 씨의 과거 대마초 끽연 사실을 언급하며 독도와의 연관성을 부인하려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 역시 점차 커지고 있다. 이 사건은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가 되었고, 일본에 대한 욕설이 인터넷 사이트를 가득 채웠음은 물론이며, 외교부까지 움직였다. 외교부가 주한일본대사관 관계자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불러 이승철 입국거부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 들끓는 비난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달래보려는 의도일까? 한겨레신문에서는 한국 역시도 지금껏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여러 ‘외국인’에 대해 입국을 거부해왔다는 기사를 냈다. 그러나, 지금은 이승철의 입국을 거부한 일본의 태도에 분노하기보다도, ‘우리 역시도 지금껏 그래왔다’고 이야기하기보다도, 실은 지금이야말로 일본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일코리안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이들은 ‘국경’이라는 것 때문에 늘상 고통을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재일코리안은 일본에 살고 있는 한인을 의미한다. 주로 남한 출신이 많으며, 크게 대한민국 국적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그리고 조선적으로 나뉘어 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으로 바뀌었다. 이후 많은 한인들이 취업 혹은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200만 명의 한인이 일본에 있었지만 이들은 자동적으로 일본 국적을 잃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한반도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생계나 정치적 문제, 또 불안한 한반도의 상황 때문에 일본에 남기를 택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후에 제주 4.3 항쟁이 발발하면서 피바람을 피해 일본으로 밀입국한 이들도 생겨났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식민 지배와 냉전의 유산인 셈이다.   지난 8월 14일 이승철이 독도를 방문해 탈북청년합창단 위드유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세계일보   물론 요즘은 일본 국적을 가진 재일코리안들도 꽤 있다. 그러나 국적과 상관없이 이들의 상당수는 일본 사회에 퍼진 혐한 발언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도쿄 신문은 지난 8월 19일자 보도에서 “재일코리안의 78.2%가 자신들에 대한 혐오 발언을 듣게 된 뒤 분노와 슬픔, 공포를 느낀 적이 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는 교제 중인 상대가 재일코리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헤어짐을 통보하거나 귀화를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이승철의 입국을 거부한 이유가 정말 독도에서 노래를 했다는 이유 때문이라면, 이 양국 정서의 ‘온도차’를 견디며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재일코리안의 삶의 무게는 과연 어떠할까. 이런 화두를 카메라에 담은 영화가 몇 편 있다. 최근 개봉한 <60만 번의 트라이>를 비롯하여 <우리 학교>, <그라운드의 이방인> 등이 대표적이다. 사실 재일코리안을 담은 작품 중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는 양영희 감독의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이다. 양영희 감독은 제주 4.3 항쟁을 피해 오사카로 밀항한 한인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성적인 재일조선인총연합회 간부였으며, 오빠들은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통해 평양으로 갔다. 그리고 그 자신은 일본에서 자라 나중에는 아버지가 그토록 반대하던 미국 유학을 하고, 남한 국적을 취득한, 그야말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시선으로 어루만진 재일코리안 가족의 이야기는 가슴 뭉클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굵직한 주제를 따뜻하게 만져주는 다큐멘터리. 마치 부드러운 직선 같은 영화였고, 우리 역사의 굳은살을 슬슬 문질러 풀어주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 유학, 남한 국적 취득을 원하는 딸과 그걸 반대하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그린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도 그렇지만, 평양에 살고 있는 오빠의 딸 선화를 담은 다큐멘터리 <굿바이 평양>은 왠지 모르지만 내게 더욱 각별했다.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을 통해 평양으로 간 오빠, 그리고 그 딸 선화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하며 느끼는 고모의 정이 스크린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스크린은 언제나 ‘세계를 확장하는 관문’이 되어준다. 나는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재일 디아스포라에 대해 한국어와 일본어로 출간된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그 모임에서 나는 한국 역시도 재일코리안에 대해 ‘가해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재일코리안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영화 <우리 학교>를 보더라도, 민족학교에 전화를 걸어 재일코리안을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일본인이 등장한다. 반면, ‘우리’는 재일코리안에 대해 책임이 없을까? 재일코리안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일본에 돌을 던지기만 하는 ‘우리’는 정말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인지 질문해봄직 하다.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동포’라는 이 로 면죄부를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교교육 무상화에서 민족학교를 배제한 일본 정부는 재일코리안 문제에 대해 수십 년을 침묵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사회가 좀 더 관심을 갖고 재일코리안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면, 상황은 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압박을 가해 즉각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더라도, 최소한 그들을 ‘덜 외롭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50만 명의 재일코리안 중 약 40만 명은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일본에 남게 된 이들의 자손이다. 물론 재일코리안의 발생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는 일본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재일코리안들이 ‘알아서 맞서 싸우도록’ 혹은 일본 정부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수수방관하고 있을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사실, 현재 일본 자민당의 보수적인 성향을 고려하면 상황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소수자로서의 삶을 버텨내는 이들에게 응원과 지지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한국에 ‘몽당연필’, ‘지구촌동포연대’ 등 재일코리안을 위해 일하는 단체가 있어서, 연령대별로 소모임을 조직하거나 영화 상영과 같은 문화행사를 여는 등 각종 활동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세상에 고통만큼 보편적인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고통을 통해 ‘연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가능성은 빛난다고 믿는다. 굳이 ‘민족’이나 ‘동포’ 같은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힘이 되어줄 수 있다. 그것은 민족주의라는 정서에 기대지 않고서도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바라기는, (사실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주문이기도 하다) 재일코리안에 대한 관심이 점차 확장되어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소수자에까지 시선이 가 닿기를 기원한다. 멀리 일본까지 갈 것도 없이, 사실은 한국 역시도 타자를 향한 혐오 발언으로 인터넷이 들끓고 있지 않은가? 보다 열린 마음으로 ‘타자를 환대하는’ 사회가 되어가기를 소망한다. 우리 안의 폭력과 불안을 약자를 통해 풀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사회를 향해가는 첫걸음으로, 멀고도 가까운 재일코리안에 대한 관심을 가져보시기를 권한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 또 국경을 넘어 인간 대 인간의 ‘연대’를 만들어가는 기쁨을 누려보시기를 권한다.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59 | 추천: 0
정재호/ 청년 칼럼니스트 최근 상영되고 있는 영화 ‘카트’는 7년 전 이랜드의 계열사인 홈에버에서 일하던 2000명가량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부당해고를 당한 사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랜드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해고시킨 이유는 2007년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 때문이었다. 법의 내용은 비정규직으로 2년 이상 근무한 직원을 정직원으로 전환시켜 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비정규직 보호법의 시행으로 정규직이 많아지면 해고시키기도 어렵고 돈도 많이 들기 때문에 한순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해고시켜버린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당장 수입원이 없어 자신과 부양가족의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며 저항했다. 그럼에도 경찰을 등에 업은 기업의 갑질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막무가내였다. 홈에버의 사례가 보여주듯 현재의 비정규직 보호법은 지난 2007년 도입될 때부터 이미 대량 해고와 대량 실업의 위험성을 노출했다. 실제로 7년이 지난 2014년 현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 앞 20m 높이의 옥외전광판 위에는 2명의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C&M이 하청업체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하청업체에 소속돼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 109명이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해고이유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과 기업이 제시한 선별적 고용승계를 노조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기업이 처음 계약 당시에 있었던 내용인 업체 변경 시 고용승계에 대한 내용을 지키라고 말한 노조가 왜 해고를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직도 비정규직에 대한 기업의 횡포는 달라진 것이 없다.   고공농성중인 전광판 뒤로 보이는 코리아나호텔에 비친 서울파이낸스센터.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인 그곳 20층에 씨앤앰의 대주주인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의 사무실이 있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지난 7일 강남구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에서 비정규직 경비노동자로 일하던 이만수 씨는 입주민들의 언어폭력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분신을 하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경비 용역업체를 교체함으로써 경비 노동자 106명을 한순간에 실업자로 만들어버렸다. 위에서 예로 들은 각각의 사례들은 비정규직 보호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홈에버의 사례에서는 기업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기 위해서는 기업 인센티브 정책이나 대량해고 방지 대책이 우선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년이 지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라는 비정규직 보호법의 기업에 대한 강제성은 결국 을의 입장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실업자 신세가 되게 만들었다. C&M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해고의 사례에서는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간의 계약 과정에서 기존의 비정규직 보호 규정이나 협약이 기업의 변심으로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비노동자의 사례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시키지 않더라도 하청업체 교체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해고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외환위기 이후 늘어난 비정규직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와 사회양극화 현상을 줄이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과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그리고 노동위원회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법들은 실질은 없고 허울뿐이었다. 기업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용 후 2년이 되기 전에 파견이나 도급 등의 간접고용으로 바꾸거나 계약을 해지했다. 아니면 아예 비정규직 일자리를 감축시켰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 기업에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차별시정제도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해고되지는 않을까 상사의 말 한마디에 두말없이 야근에, 특근까지 하는 마당에 나 좀 제대로 대우해 달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수 있겠는가. 또한 비정규직 보호법은 기업에게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고용의 시간제한을 만들었다. 기업은 경영 조건 상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변경시켜 줄 수 없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법은 기업에게 2년이 지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어쩔 수 없이 해고시킬 것을 강제했고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기업과 2년 이상 근로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없앴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수단을 잃는 것과 같다. 한 개인에게 생존권이 달린 만큼 기업도 노동자를 해고하는데 있어 심사숙고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하여야 한다. 헌데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쉽게 직장에서 해고되고 차별받는다. 그러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고자 만든 비정규직 보호법도 불완전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비정규직 보호법 내에서 각종 편법이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없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쉽게 해고당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고 현장에서도 기업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차별하지 못하도록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지위를 향상시켜야 한다. 이 사회에서 차별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다.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유로 헌신짝 버리듯이 버림받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정재호씨는 법과 제도로 인권 보호를 실현하는 데 관심이 있는 법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42 | 추천: 0
박보경/ 청년 칼럼니스트 “동성애? 그거 정신병 아냐?” 이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동화 속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사랑은 당연히 남녀가 하는 것. 내가 이해하는 동성애란 방황하는 청소년이 잠시 맛보는 일탈, 혹은 이성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겪는 정신증 정도였다. 그 정도의 관심밖에 없던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주간지 표지에 시선을 빼앗겼다. 옥상 난간 위에 교복을 입고 걸터앉은 여학생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내 또래나 될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저런 심각한 고민을 할까? 그렇게 펼쳐든 잡지에서 혼란은 시작됐다. 한국의 청소년 동성애자들 중 70% 이상이 자살에 대해 생각해본 경험이 있고, 18.1%가 ‘매우 자주 해봤다’고 응답했다. 또한 동성애자의 절반 이상(52.9%)이 욕설 등 언어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괴롭다고 말한 학생도 있었다. 그들이 겪는 아픔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아무리 비정상이라도 이런 괴로움까지 겪어야 할까? 아니, 애초에 동성애가 비정상이기나 한 걸까? 나는 왜 동성애가 나쁘다고 생각했을까. 찾아보니 과거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규정한 의학적, 윤리학적,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잘못됐다는 게 오늘날의 연구 결과였다. 20세기에 이르러서 미국 정신 의학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다. 나 역시 동성애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근거 없는 편견이었던 게다. 애초에 사랑은 오롯한 나만의 감정 아닌가? 철학박사 강신주 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추울 때 자기가 입고 있는 겉옷을 기꺼이 벗어 주는 것이라고. 그 감정을 사랑이라 느낀다면 사랑이 맞다. 내 사랑을 어느 누가, 무슨 권리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종교가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바로 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고. 실제로 동성애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는 기독교에서 시작됐다. 한없이 넓고 따뜻한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이, 왜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그토록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사진 출처 - 한겨레21/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그런데 그 종교마저 변하고 있다. 지난달, 가톨릭 교회는 동성애자와 이혼자, 결혼하지 않은 커플과 그들의 자녀를 환대해야 한다는 내용의 예비 보고서를 공개했다. 세계 주교 대의원대회에서 참석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해 이 문항은 결국 삭제됐지만, 찬성이 반대보다 월등히 많았던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심지어 문항이 너무 ‘보수적’이어서 진보 성향 주교들이 반대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우리나라는 정반대다. 올봄 국립국어원은 ‘사랑’이라는 단어 때문에 난데없이 곤욕을 치렀다.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뜻풀이가 문제였다. 사랑은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항의가 잇따랐던 것이다. 항의를 주도한 건 보수 기독교 단체였다. 결국 뜻풀이는 그들의 뜻대로 바뀌었다. 심지어 이런 차별과 공격에 맞서야 할 국가인권위원회에마저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목사가 인권위원으로 임명됐다.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차별에 앞장서는 인권위원이라니! 세계는 모두 변해 가는데, 우리나라만 거꾸로 가고 있다. 대체 어디까지 시대를 거슬러 가려는 것일까. 박보경씨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03 | 추천: 1
신혜연/ 청년 칼럼니스트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 한 학생입니다. 교수님께서 학내 미디어센터에 게재하신 칼럼인 ‘이 거지같은 청춘’의 독자층인 ‘청춘’이기도 하지요.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것도 그 칼럼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최근 글인 9월 25일자 ‘5포 청춘’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5포 청춘’이라는 낯선 제목 밑에는 “연애를 포기한 연포, 결혼을 포기한 결포, 출산을 포기한 출포, 주택을 포기한 주포, 인간관계를 포기한 인포 등을 일컫는 말”이라고 친절하게 각주도 달아놓으셨더군요. 교수님은 “(청년들은) 도대체 포기할 걸 포기해야지, 이런 걸 다 포기한다는 말인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개탄하셨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내집 마련, 인간관계, 이 다섯 가지는 인생살이에서 절대 포기돼서는 안 될 중요한 삶의 과정”이라며 “동물들의 일반적인 삶의 패턴조차 포기한다면 동물만도 못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일갈하셨죠.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청춘 스스로 치고 나가야 한다”는 교수님의 호통이 귀에 생생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마음을 독하게만 먹으면 돈 벌 곳도, 자기 짝도, 집도 있으니 결혼도 집 구매도 저지르라”는 충고도요. 글 밑에 달린 학생들의 댓글은 살벌합니다. 한 학생은 “꿈을 쫒다가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는 사회에서 ‘마음 독하게 먹고 저지르라’는 건가. 본인 자제들은 과연 그렇게 독하게 키웠는지 궁금하다”고 물었습니다. 다른 학생은 더 과감합니다. “꿈 많고, 열정이 넘치는 청년들을 낙오시킬 수밖에 없는 사회적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은 빼 놓으신 것 같다”며 교수님의 글을 “‘꼰대의 잔소리’일 뿐”이라고 평가했네요.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요즘 청년 세대의 삶은 삶이 아닙니다. 청년들은 감히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소득이 중간쯤 되는 소득 5분위(전체 10분위)가 서울의 평균 수준 주택을 사는 데 75.8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직장에 취직하면, 딱 100살에 집을 살 수 있네요. 흔히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가난해도 주거 약자로 생각하지 않죠. 하지만 그냥 참고 지내기에 청년들의 상황은 너무 열악합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에 둥지를 틀죠. 목돈이 없으니, 옥탑방, 반지하, 고시원에 삽니다.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 20~35세 청년의 주거빈곤율은 23.6%로, 전체 주거빈곤율(13.6%)의 두 배에 가깝습니다. 약 28만 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최저 생계 기준인 3.6평도 안되는 공간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상을 서울 1인 청년가구로 좁히면 주거빈곤율은 36.3%까지 치솟습니다. 혹시 알고 계신가요? 서울 고시원의 평당 임대료는 타워팰리스보다 비쌉니다. 기가 막히죠. ‘방값 역전 현상’이라고 한답니다. 단지 수요가 높다는 이유로, 청년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매년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뜁니다. 청년들은 옥탑방, 반지하, 고시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청년들의 집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근 연합기숙사 설립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런 세대갈등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한쪽에서는 청년들이 20%도 안 되는 기숙사 수용률에 반발하며 연합기숙사 설립을 촉구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부모세대들이 연일 피켓을 들고 나와 집값 하락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인근에 대학생 기숙사가 생기면 술과 연애를 즐기는 청춘들로 인해 동네가 소란스러워 진다는 겁니다. 우리 부모세대들은 갈 곳 없는 청년들에게 “너희도 고향에 땅 가진 부모 입장을 생각해보라”고 을러대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장년세대에게 집값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은퇴자가 가진 자산의 80%가 부동산이라죠. 집이 거의 유일한 노후 대책인데, 집값이 폭락하면 안되겠죠. 하지만 장년 세대의 노후 대책은 복지 제도 확충으로 해결할 일이지 청년 세대의 살 권리를 박탈한 채 집값부양 정책으로 해결할 일은 아닙니다. 지난 6일은 유엔이 지정한 ‘세계주거의 날’이었습니다. 주거권이 인간의 기본권임을 알리고자 1986년부터 매년 10월 첫째 주 월요일마다 기념해온 날입니다.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헌법 35조)”는 법전 속 문구를 들여다봅니다. 주거권은 인간으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교수님의 충고대로 집을 ‘사버리려고’ 합니다. 청년단체 ‘민달팽이 유니온’은 ‘민달팽이 협동조합’을 설립해 직접 청년들에게 주택을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돈 없는 청년들이 한푼 두푼 뜻을 모은 우호 자금으로 몇몇 청년들은 안정적이고 깨끗한 집을 저렴하게 공급받게 됐습니다. 집값에 저당 잡힌 삶을 사는 청년들에게 ‘살아가는 곳’으로서의 집을 보여주고자 하는 ‘민달팽이’ 청년들의 실험이 이제 막 발걸음을 뗀 것입니다. 집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자 하는 이 미약한 시도가 바로 주거 인권을 되찾는 첫걸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집 한 두 채로 많은 게 변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권지웅 대표의 말처럼 “더 큰 변화를 위한 마중물”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혜연씨는 노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24 | 추천: 0
송현주/ 청년 칼럼니스트 취업을 준비하는 24세 A양, 그녀의 하루는 단조롭지만 분주하다. 아침 7시쯤 일어나서 편도 1시간 거리의 학교에 간다. ‘취업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학교 도서관에 도착, 매번 앉는 자리를 차지하고 두꺼운 토익 책을 꺼내 기계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 외에도 그녀가 해야 하는 ‘공부’는 두어 개가 더 있고, 요즘같이 공채시즌에는 쉴 틈 없이 자기소개서도 작성해야한다. 그렇게 도서관에서만 9시간을 버틴다. 저녁 6시가 되면 월·수·금요일은 토익학원에, 화·목·토요일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 피로에 찌들어 집에 돌아와도 그녀는 쉬지 못한다. 미완의 자기소개서를 다시 붙들고 한밤의 사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행여나 서류 전형 탈락의 고배를 마신 날이면 근심에 잠도 오지 않는다. 취업준비생 A양이 어쩔 수 없이 이런 생활을 버티는 이유는 뭘까? 한국의 대다수 취업준비생들이 당면한 답답한 현실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취업문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요구되는 스펙은 화수분처럼 불어난다. 과열된 스펙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취업 준비생들은 열 손가락을 벗어나는 ‘필수 스펙’을 쌓는 동시에 남들과 구별될 수 있는 ‘색다른 경쟁력’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다. 만약 학자금 대출과 같이 경제적으로 이중 부담을 떠안고 있는 취업 준비생이라면, 일단 출발선부터가 다른 레이스를 감행해야 한다. 힘이 들어 눈을 조금 낮추고 싶지만 중소기업은 대체로 조건이 열악해 쉽게 그럴 수도 없다. 한국의 청년실업률은 올해 6월 기준 9.5%이다. 그중 대졸 학사졸업자의 실업률은 40.4%, 다시 말해 갓 대학 졸업한 10명 중 4명은 실업자가 되는 셈이다. ‘청년 실업 100만 명 시대’는 언젠가부터 흔한 말이 됐다. 그러나 청년실업과 취업난 자체가 지닌 사회적 함의는 결코 흔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그것은 누군가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먼 훗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사람들의 문제, 즉 가족 문제이자 세대 문제이며 사회문제다. 단순히 젊은이 몇 명이 백수 생활을 하는데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구조적 성격이 다분한 청년 실업의 난맥상, 과연 대기업 일자리 몇 개 늘려서 해결될 수 있을까? 청년 실업과 대대적인 취업난, 어쩌면 표면적인 논리는 단순하다. ‘취업문은 좁아지는데 취업준비생들은 넘쳐난다.’ 피 튀기는 스펙경쟁이 시작된다. 학점과 영어점수는 기본이요, 각종 자격증, 공모전 입상경력, 대외활동, 자원봉사, 어학연수, 인턴 경험에 심지어 요즘엔 ‘취업 성형’까지 감행한단다. 문제는 연이은 경쟁으로 스펙이 상향평준화 되고 나면,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남들과 구별되는 또 다른 스펙과 또 다른 요구사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취업 3종 세트’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근래에 들어 ‘취업 9종 세트’까지 불어났다. 곧 취업 11종, 13종, 15종 세트가 나타날 것은 당연하다. 어느샌가 청년들에게 취업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되어버렸다. 숨 가쁜 레이스에서 그들은 낙오되지 않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청년들의 취업경쟁이 잔인함 수준에 이르렀다는 문제의식은, 청년층의 양극화현상을 통해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스펙과 자격요건이 하도 많으니, 하나하나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실로 어마어마하다. 따라서 취업준비생의 경제력이 곧 경쟁력으로 직결되는데, 갓 대학 나온 20대가 무슨 돈이 있겠는가? 결국 집안의 지원을 받거나, 돈을 벌면서 주경야독하거나, 고육지책으로 빚을 내거나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스펙 경쟁 하나에 몰두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돈을 벌면서 혹은 빚을 내면서 취업준비에 임한다는 것, 상당한 핸디캡이 될 수밖에 없다. 청년들의 취업전쟁, 그마저도 출발선이 다른 레이스로 진행되고 있었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기회, 화수분 같은 스펙리스트, 끝이 없는 경쟁 그리고 출발선이 다른 레이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여력이 되지 않는 다수의 취업준비생들은 ‘상대적으로 요구사항이 덜한’ 공무원 시험이나 국가고시에 눈을 돌리거나 급기야 취업을 포기하기도 한다. 사진 출처 - 디지털타임스 청년 실업의 난맥상에 대해 대다수 기성세대들의 반응은 다소 냉담하다. “눈을 좀 낮춰라.”, “아직도 중소기업이나 소자본 회사들은 인력난을 겪고 있다더라.”, “그렇게 회사에만 연연하면 어떡하나.” 등등.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취업준비생들이 취업의 눈을 쉽게 낮추지 못하는 이유는 결코 가볍지 않다. 값비싼 등록금과 길어지는 취업 준비기간으로 빚으로 시작하는 사회초년생들이 많고, 이들에게 안정적이고 적당한 임금은 일자리를 볼 때 필수적인 요건이다. 그러나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횡행하는 것처럼, 조금만 눈을 내려도 복리후생이나 노동조건들이 열악하고 심지어 고용 안정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청년 창업의 전망이 좋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공률 보다 실패율이 월등히 높을뿐더러, 그 불확실성을 감당할 여유와 여력을 지닌 청년들은 한국에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전후 상황을 알고도 창조적이지도 않고 야망을 거세당한 청년들에게 무작정 질타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풀리지 않는 청년 실업의 늪, 결국에는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고용률 70% 달성’이나 ‘창조경제론’같은 공허한 구호는 과감히 폐기하고, 대기업의 규제를 풀어 청년 고용을 충당하겠다는 기존의 정책 방침 역시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청년 실업의 본질적인 문제를 수술해야 한다. 고용안정과 실질 임금 보장과 더불어 무엇보다 필수적인 것은 기업 간 서열화와 양극화 해소다. 정책적으로 중소기업을 보호․부양하고 경영의 활로를 보장하여 중소기업의 경영 자립과 재정 건전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덧붙여 정부 산하에 청년 실업과 취업 문제를 전담하는 컨트롤타워를 구축해, 전문적인 인력들로 하여금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이상에야 한국의 고용정책은 계속 언 발에 오줌 누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2030 세대의 별칭은 ‘3포 세대’다. 청년층들이 취업난과 고용 불안정, 집값 상승, 물가 상승 등의 사회적 압박 때문에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삶의 기반을 다지고 가정을 꾸려서 사회의 물적, 인적 자원의 선순환 구조를 이어나가야 할 주체들이 그 첫 발걸음조차 저지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에도 청년들은 젊음을 만끽할 여유조차 박탈당한 채, 취업준비생이라는 이름으로 메말라간다. 누군가는 몇 푼 안 되는 알바비에 의지하여 출발선이 다른 경쟁에 뛰어들고, 누군가는 직무와는 무관할 법한 스펙 리스트에 자신을 재단하고 맞춰가며 무력해진다. 또 다른 누군가는 비좁은 자취방에서 학원을 오가며 3,000원의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자신을 우울해하고, 어떤 누군가는 수천 장의 서류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소설처럼 써가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청년의 눈으로 바라본 이 나라 청년 실업의 실태,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송현주씨는 정치와 경제, 복지에 관심이 있는 정치외교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49 | 추천: 0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어떤 연애. 최근, 아주 아름다운 남녀관계의 한 사례를 보았다. 다이애나 사퀘브와 말렉 사피라는 두 아프가니스탄 영화인의 이야기다. 우연찮은 계기로 모 영화제에서 일하면서 작품을 수급하는 동안 여러 가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어느 두 감독의 친절은, 내게 그 기억을 글로 풀어내고 싶다는 욕망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우리 셋은 이메일을 통해 처음 만났다. 두 감독의 공동 프로젝트의 결과인 <모타라마>를 수급해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접촉 초기, 두 분은 어쩐 일인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영화제는 다가오고, 다급한 마음에 아프가니스탄으로 국제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받은 다이애나 사퀘브 감독님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환대를 베풀어주셨다. 나는 두 분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심히, 두 감독의 행적을 좇기 시작했다. 말렉 사피는 아프가니스탄과 해외 각지에서 13년 동안 다큐멘터리스트로 활동하며 30여 편의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는 이란과 네덜란드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며, 20년 간의 망명 생활 이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정착했다. 말렉 사피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영화인들의 모임인 ‘바자 필름’의 대표로 있으며, 인권영화제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그의 작업 동반자 다이애나 사퀘브는 페미니스트 영화 제작자로, 여성운동에도 깊이 가담하고 있다. 이 두 감독의 공동 프로젝트, <모타라마>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 의회가 새로운 가족법을 통과시키는 것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여성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이 법은 여성이 남편의 동의 없이 집 밖에 나가거나 남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 법에 반대하는 여성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큰 이슬람 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이슬람 학교의 학생들은 시위 여성들을 모욕하기도 하며 침을 뱉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한다. 이런 갈등 속에서 시위는 점차 격렬해진다. 영화에서 말렉 사피의 카메라는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해 주력하는 다이애나 사퀘브의 행적을 충실히 따라간다. 영화 <모타라마> 사진 출처 - 네이버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두 분이 과연 어떤 사이일지가 궁금해진다. 그간 이메일도 여러 번 주고받았고 전화통화도 몇 번 했지만 어떤 사이냐고 여쭤보지는 않았다. 이런 노골적인 질문은 실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그저 홀로 삼켰을 뿐, 여전한 궁금증이 일어오는 것은 사실이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느 순간 어리석어 보이며 퍼뜩 한 가지 깨달음이 왔다. 왜 나는 굳이 그들의 관계를 ‘규정’하려 하는가? 친구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부부일 수도 있고 창작의 동반자일 수도 있는 것을. 혹은 그 넷 다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애초에 이성애에 기반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내가 알 수 없고 또 내가 알아야 할 바도 아니지만, 두 분은 사랑하는 사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라고. 영화를 보면, 자신의 지적 소통과 창작, 또 운동의 동반자인 다이애나 사퀘브와 그녀의 동료들의 자취를 기록하는 감독 말렉 사피의 시선에서 다이애나를 향한 ‘존경’과 ‘신뢰’가 느껴진다. 어쩌면 이 작품은 감독인 말렉 사피가 그의 동반자인 페미니스트 운동가, 다이애나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이 아닐까? 헌정이 아니라면 애정표현? 꼭 ‘연인’이어야만 애정표현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애정표현의 방식이 꼭 포옹이나 입맞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아끼는 것 같다. 사랑의 대상은 꼭 연인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 주위 친구, 가족, 사회적 약자, 내가 하는 일 등 사랑해야 할 대상이 매우 많다. 어쩌면 이성은 그 중 하나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팍팍한 사회는 우리에게 언제나 ‘쓸모 있는 인간’이 될 것을 요구한다. 사랑받을 만큼 매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이나 승인을 받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생산해내는 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보다 더 깊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선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고도 느낀다. 이 점에서 사랑은 집착과 구별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원한다. 그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인간이라는 단독 개체로 존재하는 외로움, 그리고 마음 하나 제대로 기댈 곳 없이 굴러가는 세상이 우리를 연애 강박으로 밀어 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연애 권하는 사회. “연애는 하느냐”가 “잘 지내고 있느냐” 같은 안부 인사로 변해버린 사회. 우리는 한 번쯤 과감히 이 사유 방식을 뒤집어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나는 “연애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연애’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해보고 싶다. 나를 사랑하고 내 친구들을 사랑하고 내 지적 소통의 상대를 사랑하고 예술적 동료들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고. 또, 내게 늘 휴식과 영감을 제공하는 이 우주 자연을 사랑하고 있다고. 겉으로는 고요해보여도 속으로는 세상을 향한 강렬한 연애의 감정으로 불타고 있다고. 그리고 이런 ‘연대’가 가끔은 그 어떤 ‘연애’보다도 짜릿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이렇게 솔직하게 소리 내고 싶다.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99 | 추천: 0
박보경/ 청년 칼럼니스트 -괜찮지 않아 희망이 안 보여 우울한 밤, 늦은 저녁을 먹으며 드라마를 시청한다. 어두운 밤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 당한 아내와 그녀를 발견한 남편. 그 후로 그들은 현실에 없는 바퀴벌레를 보기 시작한다. 정신병에 고통 받는 부부와 그들을 치료하는 정신과 여의사. 텔러비젼 속 남자는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았어요. 아내만 괜찮다면 난 정말 괜찮았어요.” 화면 가득 여의사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안 괜찮은 일이에요…. 이건요 아버님, 화낼 일이고 울 일이에요.” 밥을 떠 올리던 숟가락이 멈춘다. 눈이 뜨겁다. 씹고 있던 밥알이 축축해진다. 아! 괜찮지 않다. 나는 괜찮지 않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괜찮아’를 말한다. ‘괜찮지 않다’는 희망을 무너뜨리는 금기어다. 각자의 괜찮음을 토해낼 힘도 받아줄 상대도 없다. 타인의 안부를 걱정하는 건 사치다. 입을 닫고 표정관리를 한다. ‘괜찮다. 이 정도는 괜찮다.’ 스스로 주문을 건다. ‘안녕하십니까.’라고 예쁜 말로 안부를 묻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한 번 상처 입은 사람들은 더 단단히 문을 닫았다. 가정을 넘어 학교, 사회에서 문 닫는 소리가 들린다. 문 닫은 방 안에서 우리는 홀로 시들어간다. 닫은 방문 안, 억눌린 사람들은 욕망을 분출한다. 홀로 여행을 떠나는 친구, 글로써 하고 싶은 말을 담아내는 친구, 운동에 중독되거나 퍼즐 맞추기에 열중하는 친구. 다른 방식으로 분출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괴롭힌다. 미소를 잃어버린 친구, 술에 중독된 남자, 말문을 닫아 버린 어린 아이, 수시로 자해하는 친구. 때론 거대한 분출이 일어나기도 한다. 괴물이 된다. 대구에 사는 장모(25) 씨는 여자 친구의 부모를 살해했다. 김해에 사는 여중생은 친구를 숨지게 하고 시신을 불에 태운 뒤 시멘트를 부어 유기했다. 서울에 사는 이모(39) 씨는 지하철 안에서 8명의 승객에게 커터 칼을 휘둘렀다. 화산 같은 사람들은 범죄자라고 불렸다. 거대한 분출은 사람을 죽이고, 아프게 한다. 분노한 사람들은 괴물의 방문에 나무를 대고 못을 박는다. ‘다시는 나오지 마! 똑같이 죽어버려’ 범죄 기사의 댓글은 피 묻은 못으로 가득하다. 힘차게 못을 박는 사람, 갇혀버린 괴물. 모두의 방문은 굳게 닫혀있다. 확실히 우리는 괜찮지 않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사랑이야 드라마 속 어두운 라디오 부스. 주인공인 라디오 DJ가 얘기한다. “주인공 맥머핀은 처음 정신 병동으로 와서 그들과 자신이 절대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무시하고 비웃죠.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저들은 미쳤고 나는 멀쩡하다 여깁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고 극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혼란스러워집니다. 이상하고 음울하고 기괴하고 미쳤다고 생각했던 등장인물들이 귀엽고 아프고 안쓰럽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정신과 의사들은 말합니다. 우리 모두 환자다. 감기를 앓듯 마음의 병은 수시로 온다. 그걸 인정하고 서로가 아프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못 박혀있는 괴물의 방문을 본다. 닫혀있는 내 방문을 본다. 똑같이 죽으라는 피 묻은 못을 뽑는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괜찮지 않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괜찮다고 속이지 않는다. 희망은 무너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따뜻한 밤하늘,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이 마루에 앉아있다. 여자가 말한다. “정말로 사랑이 저들을 구할까? 그럼 너도 사랑지상주의니? 사랑은 언제나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을 줄 거라고?” 남자가 대답한다. “고통과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주겠지. 그 정도는 돼야 사랑이지.” 박보경씨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81 | 추천: 1
이재영/ 청년 칼럼니스트 “난 정말 행복한 걸까?” ‘행복’을 쉽게 정의내릴 수는 없다. 행복을 측정하는 나름의 척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걸 수량화 할 수는 없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엔가 쫓겨 끊임없이 좋은 직업,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지내고 있다. 필자 역시 경쟁 속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삶에는 크게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바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고, 또 다른 답은 늦지만 천천히 가는 고생길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고생길을 가더라도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좋은 것을 넘어선 행복한 삶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 나는 확실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와 같이 고생길을 살아가는 것에 만족할 수 있을까? 필자는 공립학교 교사의 길을 과감히 포기하였다. 대신 교육의 변화를 위해서 대안학교 교사로서의 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목표는 바로 학교 밖의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적 교육을 어떻게 구성하고 만들어 가느냐이다. 이를 위해서 구체적인 노력을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노력을 위해서 나는 NGO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가치의 교육을 강의하고 있다. 내가 행복한 교육이란 경쟁이 아닌 서로의 협력을 위해 노력하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갈 길은 멀고도 험해 보인다. 행복은 어떤 하나의 잣대로만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대학 교양수업에서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에 대한 마음을 나눌 때 더욱 빛이 납니다.” 지금 현실에서 오로지 자신의 성공만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인 것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interest)을 갖는다는 것이며, 존중(respect)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감(responsibility)을 갖는 것이며, 이해하는 것(understand)이고, 마지막으로 주는 것(giving)이다.” 이것은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의 말이다. 행복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다. 진정으로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분들의 모습이다. 묵묵히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일을 하는 분들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길거리를 깨끗이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대학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아주머니, 뜨거운 화마와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 소외된 이웃과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복지사, 중증장애인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요양보호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동선을 실현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배려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헌신과 의무를 다하는 그들의 노력은 정말 박수 받을 만하다. 사회의 소외된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일해 가는 모습은 존경심까지 든다. 그들의 모습에서 다시금 행복의 의미를 일깨우게 된다. 상황이 녹록치 않음에도 우리는 더욱 경쟁에 몰입되지 않고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이들에게서 더욱 발견하게 된다. 대학 청소·시설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고용불안, 열악한 근무환경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시사위크 그러나 이분들이 처한 어려움은 안녕하지 못한 상태이다. 화재의 현장에서 1개의 조명용 랜턴을 가지고 돌려쓰는 소방관의 모습, 작은 휴게실 공간에서 비좁은 채로 식사를 하는 청소 노동자, 장시간의 근로에 지친 사회복지사, 열악한 조건 속에서 치매 노인을 위해 종사하는 요양보호사 등 각자의 역할들에서 점점 지쳐가고만 있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는 이들은 점점 사회의 다른 모습에서 점점 지쳐가기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주변을 둘러보아야 하는 이유는 역시 동등한 의미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은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이것을 정말 응원을 해야 하고, 비난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을 행복을 위한 과정의 당연한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느낀다면 말이다. 함께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들은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물리적 투쟁이 아닌 생각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이것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를 이룩하는 데 필요로 하는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 당장 해결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공공선을 실현하는 분들의 상황을 이렇게 넋 놓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파열음처럼 터져 나오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는 자꾸만 무뎌지고 있다. 행복을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국가의 역할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막중하고 책임감 있게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공선을 실현해 나가는 이들이 있기에 사회가 지탱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이들을 위해 시민들이 스스로 적극적인 연대를 연결하여 이루는 과정이 필요하고 주체적인 행동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1차적인 행복을 마련하는 기틀이 될 것이다. 또한 사회의 공공선을 위한 사회적 행동을 마련하는 데 개인적인 의미로서 중요한 함의를 갖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두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회의 공공선을 실현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재영씨는 월드비전에서 세계시민강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5 | 추천: 0
박보경/ 청년 칼럼니스트 작년 여름, 동남아 배낭여행을 갔다. 혼자, 계획도 없이 떠난 첫 배낭여행. 예상처럼 많이 서툴렀다. 그중 최악의 사건은 베트남으로 넘어가는 국경 통과였다. 시세보다 싼 값에 라오스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침대버스를 예약했다. 예약이 마감될 무렵 운 좋게 예약해서 기쁜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는데, 세상에나! 그 큰 버스 안에 외국인이라고는 나 혼자였다. 게다가 늦게 예약하는 바람에 맨 뒷자리를 5명이서 함께 누워가야 했다. 상상해보라. 20대 초반 여자 혼자 낯선 외국인 아저씨들 사이에 끼어 24시간을 누워가는 모습을! 베트남 사람들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낯선 외국인 여자를 대놓고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짓궂은 장난을 치고, 버스기사 아저씨의 은근한 성희롱은 나를 더 당황스럽게 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여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첫 번째 사건, 장거리 이동이라 식사를 휴게소에서 해결해야 했다. 버스비에 식비가 포함돼있었기 때문에 다들 맛있게 공짜 점심을 먹는데, 나는 돈을 내라는 것 아닌가! 외국인이니까 그렇단다. 더러워서 굶었다. 두 번째 사건, 라오스 국경을 나가는데 3달러를 달라고 했다. 국경을 나가는데 왜 돈을 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 나는 안 내겠다고 버텼다. 국경에서 뒷거래를 주선하는 베트남 아저씨는 나에게 “넌 라오스에서 못 나갈 거야!” 라고 욕을 하며 소리를 뻑뻑 질렀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3달러를 냈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 라오스 국경을 나와 베트남 국경을 통과하는 길. 또 1달러를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안 주고 버텨봤자 손해라는 걸 한 번 경험한 나는 순순히 1달러를 냈다. 라오스에서 베트남으로 오는 24시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어이없는 외국인 차별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당장 베트남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베트남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천사였다. 국경을 통과하고 더러운 인상으로 앉아있던 나에게 웃으며 다가온 27살 베트남 청년. 그는 2012년 1년 동안 부산에서 일을 하고 왔다.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나 너무 반갑다며 투박한 손으로 내게 음료수를 건넸다. 지금은 한국에서 번 돈으로 가족들과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그 후로도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국 연예인 이름을 줄줄 말하며 나에게 “사랑해요”를 계속 외친 귀여운 고등학생들. 길거리를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나를 위해 관광 가이드를 자처해준 여대생들. 이들의 배려로 베트남에 대한 악감정이 다소 줄어들었다. 그날 저녁, 숙소에 누워 SNS를 구경하던 내게 보이는 한 장의 사진. 김해시에 걸린 플래카드 사진이었다. ‘범죄형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알린다. 법이 솜방망이이라면, 쇠방망이를 직접 보여줄게. 앞으로 너희도 밤길 조심해라. 진심이다. 방글라데시. 문맹률 세계1위 세계최고 빈민국이라서 따로 번역은 안한다. 한글 아는 놈이 읽고 전파해라. 범죄자 외노자들아. 다른 나라 동료까지 떨게 하고 싶지 않으면, 김해시민 건들지 마라. 너희도 이제 표적이다.’ 15년 동안 내가 살고 있는 곳, 경남 김해시에 걸린 플래카드다. 김해에 사는 외국인은 2013년 말 기준 1만 9,800여 명. 전국에서 두 번째다. 김해의 번화가로 불렸던 동상동에서 지금은 한국 사람을 만나기가 더 힘들다. 이주노동자 차별철폐와 인권-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 회원들이 "이주노동자 퇴직금 출국 후 수령제도 철회!-2014 이주노동자 메이데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스1 멋모르던 어릴 적, 아직 외국인 노동자가 지금만큼 많지는 않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그들을 ‘알라깔라’라고 부르며 시시덕거리면서도,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 적에는 놀라서 도망가기도 했다. 같이 버스라도 타는 날엔 낯선 이국의 냄새 때문에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외국인을 대하는 모습은 15년 전 초등학생이던 나와 다를 게 없다. 시간이 흘러도 개선되지 않는 의식은 물론이거니와 외국인 노동자의 근로문제, 주거문제, 그리고 최근엔 이주노동자들의 퇴직금 문제로 시끄러웠다. 한국에서도 제때 받지 못하는 퇴직금을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야 받을 수 있게 법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사건들을 접할 때면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다른 계급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행 도중 만났던 베트남 사람들이 주르륵 스쳐 지나간다. 나를 화나게 한 사람들, 또 나를 행복하게 해준 사람들. 내가 외국인이니까 당해야 했던 일들, 또 외국인이라서 받았던 배려들. 그렇게 억울했던 횡포는 어릴 적 외국인 노동자를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라고 놀리고 차별했던 벌을 이제 와서 받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 음료수를 건네준 그 청년은 한국인에게서 받은 따뜻한 배려가 있었을까? 한국이 좋다 말했던 풋풋한 학생들이 훗날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온다면 행복을 느끼고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다. 박보경씨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27 | 추천: 0
정재호/ 청년 칼럼니스트 지난 학기동안 나는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 특수학교에서 매주 봉사를 하였다. 내가 봉사를 하였던 학급은 4명의 학생이 있는 학급이었다. 같은 지적장애라고는 하여도 각 학생마다 폭력적 행동을 하는 유형, 특정 이상행동을 하는 유형 등 학생별로 교육시에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주교사와 보조교사에 나까지 어른 세 명이 거의 일대일로 아이들을 지도하여야 했다. 어른 세 명이 아이 네 명을 지도하는데도 봉사가 끝나고 나면 나는 집에 가서 빠진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낮잠을 청해야 했다. 어른 한 명이 학생 한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려운 특수교육,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장애학생이 가진 장애와 장애수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장애학생을 교육할 시에는 그에 따른 학생 개별화 교육이 필수적이다. 일반학급보다 학급당 학생 수가 현저히 적은 이유도 장애학생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따른 교육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개별화 교육이 잘 이루어진다면 더디기는 하겠지만 장애학생도 일반학생처럼 제대로 익히고 배울 수 있다. 허나 정부가 법정기준에 따른 특수교사를 충분히 뽑지 않기 때문에 개별화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특수교사 1명 당 담당하고 있는 장애학생 수는 6.8명으로 유치원, 초등, 중등, 고등, 특수학교, 특수학급에서는 각각 법정기준에 따른 학생 수보다 2 내지 3명 많게 학급을 편성하고 있다. 인천서부교육지원청 특수교육지원센터가 학기 중에 실시했던 순회 언어치료 활동 모습 사진 출처 - 아시아뉴스통신   2011년을 기준으로 특수교육교원 정원 확보율은 61.6%였다. 수로 말하자면 특수교사 6,930명이 부족한 것이다. 그나마 그 이후의 특수교육교원 충원율은 2012년에는 55.9%, 2013년에는 58.6%로 50%대로 떨어졌다. 일반교사의 정원 확보율이 거의 100% 가까이 채워지는 것에 비해 그 비율이 너무나도 초라하다. 일반학생이 아닌 장애학생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올해 11월에 실시되는 2015학년도 특수교사 임용시험에서도 정부에서 뽑는 특수교사의 수는 고작 유치원 36명, 초등 86명, 중등 98명으로 총 220명에 불과하다. 부족한 특수교사를 보충하기 위해 특수교육기관에서는 제대로 된 특수교육교원 자격이 없는 교사 및 기간제 특수교사를 고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고 있다. 특수학교 및 특수학급 담임교사 4,023명을 표본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 중 276명, 약 7%가 특수교사 자격증을 소지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장애학생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인권운동과 사회주의운동으로 유명한 헬렌 켈러, 뛰어난 음악성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스티비 원더 모두 장애를 가진 사람이다. 활동했던 분야는 달랐지만 헬렌 켈러와 스티비 원더에게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해주고 그에 맞는 교육을 시켜주었던 훌륭한 선생님이 있었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교육을 할 수 있는 실력 있는 교사가 있다면 그들의 장애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를 위한 첫 번째는 장애학생들을 위한 제대로 된 선생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정재호씨는 법과 제도로 인권 보호를 실현하는 데 관심이 있는 법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6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