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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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지혜, 김태민, 이대옥, 이서하, 전예원, 조혜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박록삼(서울신문),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오승훈(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서하/ 회원칼럼니스트  언젠가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만날 장소를 정하던 중, 상대로부터 파리바게뜨에서 만나자는 말을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시그니처 지점이었다.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의 단식 투쟁이 한창 화제였던 시기라 SPC 산하 가게들은 불매 중이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서로 차선책이 없었다. 초면의 상대를 만나는 자리에서 마땅한 대안 없이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결국 파리바게뜨에서의 만남을 수락했다. 나는 “그곳도 괜찮다”라고 답한 순간부터 만남이 파하는 순간까지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단식 투쟁이 한창 진행되는 현장과는 달리, 그날의 파리바게뜨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수많은 정보가 각종 매체를 통하여 송출되는 요즈음, 정보를 접하기 쉬워진 만큼 잊어버리는 속도 역시 빨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알려야 할 소식이 너무나도 많기에 한 번 지면에 오른 이야기는 어지간한 화제성을 가지지 않고서야 쉽게 묻힌다. 그렇게 우리로부터 먼 이야기를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 잊어버린다.  이러한 망각의 시대에서 시민운동의 숙명이라면 기억됨에 있지 않은가 싶다. 불매운동이 특히 그렇다. 매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어 기업의 반성을 촉구하는 운동인 만큼 소비자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매운동이 유의미한 지표를 보이지 못했다면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려 온 사측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노동자 앞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만이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요즈음 또 하나의 불매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올해 3월 28일부터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은 SPC의 노조 탄압 및 부당노동행위 중단, 2018년 1월 합의한 사회적 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53일간의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SPC는 파리바게뜨,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 등의 산하 기업을 두고 있으며 국내 제빵업계에서는 선두로 꼽히는 그룹이다. SPC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승진 차별 및 노조 탈퇴 종용, 연차휴가 및 여성 노동자의 월경·출산·육아휴직을 보장하지 않은 등의 사유로 불매운동의 대열에 올랐다.  SPC는 노조원에 대한 차별이 없었으며, 사회적 합의 내용의 충분한 이행을 통해 당사와 가맹점주가 제빵기사들에게 동종업계에서 최고 수준인 임금 및 복리후생을 제공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난 6월 16일 파리바게뜨 사회적 합의 이행 검증위원회는 2018년 1월 사회적 합의 주체들이 합의한 11개 항 중 실제로 이행된 것은 2가지, 일부 이행된 것으로 확인된 항목은 3가지라고 밝혔다.  이처럼 노사 간의 갈등이 길어지자 임 지회장의 단식은 건강을 위하여 끝을 맺었으며 현재 시민과 노동자가 합심하여 릴레이 단식 및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 단식이 시작될 때 SNS에서는 이를 지지하기 위하여 SPC 산하 기업 목록을 정리해 불매 리스트를 만들거나 파리바게뜨를 대체할 동네 빵집을 소개하는 챌린지를 진행했다. 그러나 임 지회장의 단식이 끝난 지금, 언론 보도 및 관심을 기울이는 시민의 수는 한 폭 줄어들었다. 이는 특정한 원인이 있다기보다도 한번 언급한 정보가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보도 순위에서 밀리게 되는 현상일 것이다.  가끔 이렇게 한 시기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들이 얼마나 기억되고 있을까를 생각한다. 누군가 여전히 기억하며 불매를 이어가는가 하면 희미한 기억을 붙잡기 위해 검색을 하는 이도, 아주 잊어버린 이도 존재할 것이다. 사실 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은 흘러가고 우리는 연일 보도되는 새로운 사건들에 귀를 기울이게 될 테니까.  하지만 삶의 편린이 스쳐 지나간다는 주마등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것을 믿는다. 유수 같은 세상 밑에 조약돌처럼 가라앉아 있는 기억의 잔해를, 잠시 밀려나 있었을 뿐 수면 위로 떠 오를 듯 말 듯 어른거리는 기억의 끈질김을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하는 우리의 인간됨 역시도 믿는다.  그러니 모든 것을 매일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소란을 동반했던 어떤 이름들이 보인다면 퍼뜩 떠올릴 수는 있지 않을까. 오래 바라보고 검색창 위에 손가락을 올려 그 이름이 누군가의 삶을 잡아먹고 성장했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는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망각의 강 앞에 서서, 동료 시민의 고통에 기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잊어버린 것이 있지 않을까?
2022-06-28 | hrights | 조회: 16 | 추천: 0
김태민/ 회원 칼럼니스트  전망과 비전을 폐기하고 취향과 감정으로 뭉친 정치 공동체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역대급으로 낮은 투표율 속에서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는 이미 현실로서 도래했으나 한사코 부인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개혁의 염원을 오로지 부패한 권력을 규탄하는 도덕적 호소로 채우는 감정의 정치 공동체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사실은 그렇다. 지난 몇 달간 탄핵된 보수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준 실패를 만회하고자 괴물 같은 권력을 “모피아”, “검피아” 같은 용어로 명명하려는 시도들을 목격했다. 이 같은 권력의 수사학이 겨냥하는 정치적 효과는 비교적 명백하다. 일반 시민과 거대 권력 사이의 대립을 서사화하며 기득권과 대립각을 세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추문으로 가득 찬 내각 인사들의 오물을 들춰내며 권력의 서사를 직조해내는 방편은 분명 현실 정치의 문법을 반영한 저항의 언어로써 정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권력의 표면을 소묘하는 그 이상의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 무엇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냉소적인 이데올로기와 정권 발목잡기 프레임에 밀려 정치적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다. 게다가 정권 인사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을 넘어 권력의 분배 방식을 어떻게 시정할지에 대한 명징한 대안적 기획이 제시되지 않아 투표에 참여해야 할 명확한 정치적 유인을 제공하지 못했다. 대선에서 최고 투표율을 보인 호남이 지방선거 참여에는 저조했던 건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탄생한 감정의 공동체가 전망과 비전을 만나지 못한 채 맥없이 실패한 셈이다.   정권 인사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고 검찰권력과 모피아의 연대를 비판하는 윤리적 호소에 매몰되어있을 동안 ‘반기득권 서사’의 성긴 손가락 사이로 구조적 모순은 잘도 빠져나갔다. 검찰권력의 선택적인 수사와 모피아와의 부패한 연합이 ‘특권계급’의 부와 권력의 분배 문제로 축소된 이유는 민주주의 자체의 환영과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모순을 우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모호하게 정의된 ‘특권계급’이라던가 ‘기득권’이라는 관념이 민주주의의 위기로 제시될 때 체제의 부패한 규율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동형적으로 분포한 현실은 감쪽같이 은폐된다. 규제와 기소를 담당하던 공직자들이 기업을 거쳐 다시 공직으로 돌아오는 행태는 집단 세력화된 엘리트 계급의 부도덕과 파렴치함의 문제를 넘어 이윤 축적을 위해 거대한 공장처럼 운영되는 체제 자체의 문제인데도 말이다.  출처 - 경향신문  모피아나 검피아마저 설계해내는 지배적인 구조의 힘을 캐묻지 않은 탓에 이제 저들은 정치 권력을 배당 받은 본분에 따라 노동법 개악을 입 냄새 나도록 떠들며 경제 질서의 재조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때마침 지난 25일 한덕수 총리는 중처법 개정을 본격적으로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기자간담회에서 “산업계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일종의 규제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며 “산업 안전 재해를 줄여야 한다는 것에 다 동의하고 목적에 아무런 논쟁이 있을 수 없지만 그 방법론이 적절한지 들여다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덕수 총리의 위 대목은 범죄와 형벌의 영역이 어떻게 경제적 격자를 통해 규정되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기업살인과 형사법적 처벌을 다룬 중처법은 ‘규제완화와 투자활성화’의 문제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기업살인법과 규제정책의 존재론적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는 논리적 비약은 전혀 어색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형사적 처벌의 영역을 행정적 규제와 관리의 영역으로 오인하는 인식상의 혼동 또는 프로이트적 말실수(Freudian slip)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검찰 권력과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가 동거하기 위해 벌어지는 현실 정치의 기묘한 복화술, 즉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산업재해를 둘러싼 형사법적 권한을 조정하는 양상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공정과 정의의 신화가 전하는 바와 달리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예속된 검찰권력은 경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어떤 범죄를 용인하고 처벌할지를 결정한다. 결국 온갖 기소와 수사의 스펙터클을 뽐내던 검찰은 기업살인에 대한 형사법적 접근을 철회하고 검찰통치를 자랑하는 이번 정권은 기업의 강력한 요구에 발맞추어 기업살인 문제를 ‘규제’와 ‘행정적 관리’의 영역으로 배치시킬 것이다. 지금 당장은 법 개정을 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경영자의 안전보건의무 범위를 축소시키는 가이드라인을 내리는 행정 전술을 통해 중처법을 저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 마디로 검찰권력은 산업재해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자의 대립 속에서 무엇을 물고 무엇을 놓아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의 범죄와 처벌에 관한 문제가 경제 활성화 방안으로 번역되는 과정은 검찰권력에 기초한 이번 정권이 신자유주의 통치성 또는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와 어떤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연히 알게 한다.   현실 정치 속의 수많은 권력의 쟁투와 정치적 대결의 양상은 경제라는 강력한 심급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 이유에서 지금의 정세를 단순히 검찰권력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주도권 다툼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 중처법 개정 문제뿐만 아니라 각종 정치 경제 분야에서 기득권 세력의 계보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목록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개혁주의 진영의 내로남불로 ‘반기득권 서사’가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잃고 유권자들에게 투쟁의 정당성도, 대안적 기획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문제의식을 찾아 나서야 할 때다. 자본주의 사회 배후의 은밀한 소수의 조종자들을 규탄하는 윤리적인 호소를 넘어, 반기득권 연대라는 손쉬운 도식들을 대체하고도 남을 총체적인 방향성을 향해서 말이다.
2022-06-15 | hrights | 조회: 72 | 추천: 4
김지혜/ 회원 칼럼니스트 만약 일반 기업에서 업무 중 화장실 이용 시간을 근무평가에 반영해 경쟁에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배달업체인 요기요의 AI는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라이더의 휴게시간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요기요의 AI는 잠깐의 휴게시간도 데이터로 산정하여 라이더에게 등급을 부여하고 일감을 줄인다. 등급 하락으로 인한 수입 감소를 막기 위해 라이더들은 화장실 참는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배달업체 라이더는 특수 고용직 플랫폼 노동자이다. 그들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의 형태로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출처 - 중앙일보  코로나 사태 이후 비대면‧비접촉의 형태로 생활양식이 변화하면서 플랫폼 노동은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소비자에게는 편리함이, 일하는 이들에게는 과외 시간을 이용해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이점이 강조됐다. 그러나 이 플랫폼 산업은 출혈적 경쟁과 알고리즘에 의한 비인간적 통제에 의해 굴러가는 시스템이었다.  진입장벽이 낮고 시간관리가 자유롭다는 이점으로 배달라이더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그런 이점을 비웃는다. 계속해서 콜을 받지 않으면 점차 콜이 줄어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수입(콜)을 유지하려면 그들은 계속해서 도로 위를 질주할 수밖에 없다. 즉, 이들은 무한노동을 전제로 24시간 대기상태에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륜차사고가 지난 1월부터 지난 5월 20일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 동안에 비해 47.1%포인트 증가했다. 횡단보도 주행, 신호위반 등이 그 원인이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보다 빠른 배달을 원하는 소비자, 콜을 잡기 위한 라이더끼리의 지나친 경쟁, ‘단순중개’라는 명목 하에 방관하는 플랫폼 기업, 이륜차의 교통법규 위반에 대한 부실 단속 등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다.  지난 5월 29일, 배달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을 막아왔던 전속성 조항(두 군데 이상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라이더의 경우 한 사업장에서 월 소득 115만원 이상을 벌거나 93시간 이상을 일해야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폐지하는 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동안 전속성 조항의 미충족으로 산재보험의 적용대상이 되지 못했던 노동자들에게 산재 적용 대상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건 사고에 대한 예방이 중요하기에 의무는 있으나 권리는 없는 그들에게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먼저다. 국내에서 거대 플랫폼 기업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계속 심화하고 있는데 정작 이들은 국경을 넘어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 이상 이들은 인간적으로 노동할 수 없다. 알고리즘, 콜, 평점 등으로 노동자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플랫폼 기업은 관리자로서 책임을 져야하며 동시에 플랫폼 노동자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영국의 노동법학자인 제레미아스 아담스-프라슬은 이를 “혁신의 역설”로 표현하며 플랫폼 기술은 혁신적일지 몰라도 플랫폼 노동자가 일하는 방식은 오히려 퇴행적임을 지적한다. 플랫폼 산업 시대,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와 사업주의 책임에 대해 다시 돌아봐야 한다.
2022-06-08 | hrights | 조회: 50 | 추천: 4
조혜원/ 회원칼럼니스트  지난 5월 2일 걸그룹 에스파가 경복고 축제에 참석했다가 현장에 참석한 학생들의 도를 넘은 행동들로 인한 피해 사실이 전해졌다. 학생들은 무대에 난입해 과도한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등 위협적 행위를 이어갔다. 사건 이후에도 자신들의 SNS에 해당 사진과 함께 성희롱적 발언을 올리기까지 했다. 학교 측은 두 차례에 걸쳐 사과문을 내놓았지만, 그 어디에도 문제의 본질은 찾아볼 수 없는, 표면적인 사과일 뿐이었다. 이번 경복고 사건의 문제점은 가해 학생들 개개인의 일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해당 행사 자체에 문제가 있다. 에스파의 소속사는 SM 엔터테인먼트다. 이수만 총괄프로듀서가 실질적 오너인 회사다. 그리고 경복고는 이수만 총괄프로듀서의 모교다.  동문에 SM 오너 등과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가수 공연이 선물 혹은 특혜처럼 제공될 때, 그 공연을 관람하는 남학생들은 이를 특권으로 인식하게 되며 해당 가수들을 하나의 개인으로 보지 않게 된다. 즉 공연의 주체는 사라지고 그저 권력을 가진 동문이 하사해주는 하나의 상품으로 대상화되며, 이 과정에서 왜곡된 성 관념과 여성의 성적 대상화, 그리고 여성 혐오적 시각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현장이 공교육으로서 아이들에게 어떠한 교육적 효과를 가져다주며, 무슨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사진출처 - 세계일보  이는 올해 초 ‘진명여고 위문편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여성들이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대상화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가. 반복되는 사건들에서 여성은 그저 남성에게 기쁨과 즐거움, 응원을 주는 보조적인 존재로서 추락해 버림과 동시에 전통적인 성 역할을 재생산하는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남성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여성들, 그리고 쉽게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남성 카르텔, 기분이 나쁜 남성과 실질적인 공포를 느끼는 여성. 경복고 사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계속해서 반복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의 집약체이다. 이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직시하여야 한다.  ‘명문’ 경복고가 동창회 주최의 기념식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7년 전 동문 체육대회 협찬 품목 현수막에 품목명으로 ‘레드벨벳’이라고 기재한 전적과 이번 사건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만의 카르텔을 통해 경복고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인 가치관 확산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발뺌할 수 있을 것인가. 학연과 특권의식으로 얼룩진 남성 카르텔에서 피해를 보는 자는 오롯이 여성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명문고등학교’라면, 그 명문은 틀렸다.  경복고는 본교의 공고한 권력 카르텔로부터 발생한 가부장적인 가치관 생산과 왜곡된 성 인지 감수성 확산 사실에 대하여 제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가해자 개인의 일탈로 꼬리 자를 생각 말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묻어두고 회피할수록 우리 사회의 곪아터진 현실은 계속해서 이렇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무엇이 올바른 교육의 방향성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2022-05-31 | hrights | 조회: 255 | 추천: 4
전예원/ 회원칼럼니스트  지난해 수강한 한 교양수업에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법학 관련 과목이었던 만큼 “살면서 한 번쯤 작성하게 될 법률문서를 제 손으로 작성해보라”는 것이 취지였건만, 종이를 앞에 두고 한참 들여다봤던 기억이 있다. 가상의 상대를 지정하여 작성해도 좋다기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본관이며 주소를 꾸며 적었다. 많은 것이 낯설었다. 결혼이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혼인신고서를 ‘살면서 한 번쯤 작성할 문서’로 일컫는 가정 자체에 의문이 들었던 탓이다.  혼인율이 감소함에 따라 결혼도 ‘선택’이라는 인식이 커진 것도 사실이나, 여전히 결혼을 ‘의무’로 규정짓는 무의식을 경험한다. 혼인신고서의 작성이 별다른 이의 없이 과제가 되는 모습이 그러하다. 제도로서의 결혼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결혼제도의 사회유지 기능에 있다. 법률혼은 가족과 가계를 일치시켜 관리를 쉽게 하고, 출산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결혼은 개인 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것을 넘어 국가 성원(국민)을 확충하기 위한 의미 또한 갖는 것이다. 출처-pixabay  그러나 법률혼주의를 중심으로 국민을 ‘관리’하고 ‘재생산’하는 데에 초점한 이 제도는 어떤 지점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의 결혼과 가족제도는 많은 부분 부부와 그 자녀를 단위로 하는 정상가족을 상정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당사자들만이 가족으로 인정받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받는 것이다.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이들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온전한 권리행사가 불가능하다. 가령 재생산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퀴어 커플들은 법률상 부부를 이룰 수 없으며 가족 정책의 적용을 받기 어렵다. 결혼이주여성의 경우 국제결혼을 통해 가족법상의 부부를 이룰 수는 있으나, ‘자녀 없음’을 사유로 하여 국적 인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한국 사회에서의 개인의 지위가 가족과 자녀 유무에 종속되어 성립하는 것이다. 한 사회가 개인을 대우하는 방식이 ‘재생산 기능’을 요건으로 한 조건부 인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상가족을 기준삼은 결혼제도가 사회유지에 긍정적인 기능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부터 정상기능을 해온 것들에도 오기능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결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늘어난 현실은 제도의 점검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결혼은 선택’이라는 인식과 무관하게 행해지는 ‘결혼제도’에 대한 고민은 변화하는 현실과 얼마만큼 조응하며 나아갈 수 있을까.  가정의 달 5월을 통과하며, 새삼스레 가족의 의미를 질문하게 되는 요즘이다. 결혼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과, 결혼이 선택 아닌 의무가 되는 사람들에 대한 폭넓은 고려가 필요하다. 최근의 정부가 인구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밝혔다는 사실로부터 한 가지 기대를 건다. 양적증가에 지향을 두었던 저출산정책에, 인구감소에 적응하는 방식 역시 고려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환에 기존의 혼인·가족정책에 내재한 재생산의 요구에 대한 질문과 성찰이 동반되었으면 한다. 가족성원을 한단위의 국가성원으로 치환하지 않는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상호인정에 기반 한, 그야말로 애정으로 충만한 ‘가정의 달’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2022-05-25 | hrights | 조회: 185 | 추천: 9
이창우/ 회원 칼럼니스트  영화 <플레전트빌>(1998)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영화에서 TV 시트콤 <플레전트빌>의 애청자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인기프로그램은 ‘즐거운 마을’이라는 이름처럼 행복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얘길 담은 드라마다. 데이비드를 비롯해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이른 저녁,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여보, 나 왔어!” 라고 말하면, 앞치마를 두룬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반갑게 맞는 식이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들로 채워진 저녁 식탁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트콤을 시청하는 데이비드의 현실은 드라마와 너무 딴 판이다. 부모님은 이혼한 이후에도 전화로 서로 싸우고, 하나뿐인 쌍둥이 여동생은 학교에서 인기가 많다. 집에 와도 차가운 냉동식품을 데워 홀로 끼니를 떼우는 일상이다. 데이비드가 ‘플레전트빌’ 시트콤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어찌보면 현실에 없는 드라마 속 세계에 대리만족하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 제니퍼와 데이비드는 리모컨을 서로 가지려다 박살이 난다.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수리공 할아버지로부터 리모컨을 받아든 두 사람이 그것을 작동시키면서 TV속 흑백세상 <플레전트빌>로 빨려 들어가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시트콤 플레전트빌은 현실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들이 교묘하게 비껴가는 곳이다. ‘기쁨이 있는 동네’이기에 불도 날 수 없고, 비도 내리지 않고, 농구부 선수들이 넣은 슛은 무조건 들어간다. 소방관들은 출동하여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고양이를 구조하는 것이 가장 큰 업무이다. 한마디로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웃음과 교훈을 주는 시트콤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곳의 사람들은 실제의 인간이 아닌, 허구로 꾸며진 반쪽짜리 존재들이니까. 이 이상적인 세상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방송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는 출연 배우들이야말로, 시트콤 플레젠트빌에 걸맞는 등장인물이다.  플레전트빌에서 아이스크림집의 존슨은 데이비드가 오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무의미하게 카운터 위나 닦으면서 데이비드가 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려야 한다. 그는 시트콤에 자주 등장하는 ‘카페 주인’의 역할, 조연이다. 언제나 카운터를 닦으면서 주인공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선량한 캐릭터이다. 식당 문을 열고 카운터를 닦고 메인 주인공이 등장할 때마다 가끔 비치는 조연에게 현실에서 등장인물이 된 데이비드가 말한다.  “존슨, 스스로 그 무엇도 할 수 있어요. 다음부턴 제가 오지 않아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는 거죠.”  그 후, 작은 자유를 맛본 존슨은 더 큰 자유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고 이렇게 플레전트빌은 변화를 맞게 된다.  누군가의 한걸음으로 세상은 조금씩 나은 쪽으로 변화해왔고 그 가능성을 플레전트빌은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색깔’은 ‘인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주민들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서 색깔을 찾는다. 여전히 마을의 배경은 흑백이지만 생생한 색깔을 찾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색깔을 찾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들을 유색인종으로 취급하며 단호하게 뭉친다. 흑백의 플레전트빌에 색을 찾아 대비되는 영화는 민주주의 작동 원리인 다수결의 오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다수가 선택했다고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소수의 선택은 쉽게 배제당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마치 영화 같은 일들이 재현된다는 사실. 어쩌면 우리도 영화나 드라마 속 세계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플레전트빌은 그동안 지켜온 언제나 즐거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나선다. 제니퍼의 극 중 아버지도 포함된다. 마치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시대의 변화에 호들갑을 떨며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내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변화를 거부한다.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무조건 희생이 미덕처럼 치장된 가부장제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출처 - daumcdn  저녁에 집에 들어 왔을 때 당연히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 있어야 하는데, 자기 색깔을 찾은 부인들이 그것을 거부한다. 도서관에는 책들이 글자를 채워 컬러로 빛을 내고 연인들의 호수에는 컬러의 세상이, 그들만의 자유로움이 자연스럽게 채색된다. 중년을 넘긴 그들은 플레전트빌의 기득권자이자 권력자, 그리고 지배자였다. 그들은 변화가 두렵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힘과 관련된 편리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이들의 연애를 방종이라 하고 개인의 감정 표현을 막으려고 한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책들을 강제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자유롭게 음악을 듣지 못하게 금지곡을 만든다.  플레전트빌 시장은 흑색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선동하며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곳 주민들이 지켜야 할 법규들을 새로 만든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람들을 억누르는 기득권층의 횡포와 권력남용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의 야만과 자신의 색을 찾은 이들을 향해 ‘유색인종’이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장면들도 역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끄러운 일들이 현재 이 사회에서 뻔뻔함의 극단으로 달리며 자행되고 있다. 그 모습을 20세기 후반 영화를 통해 되새김질 하다 보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서글픔과 모욕감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찾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직 흑백인 마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존슨의 가게에 모여 투표로 결정된 새로운 강령을 읽고 저항을 시작한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뮤직 박스에서 그들이 원하는 이미 금지된 자유로운 음악을 틀고, 데이비드와 존슨은 밤을 새워 저들만의 색깔로 빛을 내는 벽화를 그린다. 나는 잘못된 일들을 파렴치하게 휘두르는 권력에 저항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 한 걸음 내딛어 행동하고 나서 만날 내일이 덜 두렵다. 결정적인 해결책은 없지만 늘 새로운 시도는 가능하다. 세상은 조금 더 나은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성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 문제는 사회가 자기에게 부과한 역할에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할 때 생긴다. 때로는 강요 때문에 격렬한 충돌이 생긴다. 드라마에서 위안을 받는 일이 더 자연스러운 세상 같지만, 그렇다 해도 미리부터 포기할 일은 아니다. 알고리즘이 나를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든다 해도 거부할 수 있는 내가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시트콤에서 벌어지는 삶은 보이는 게 전부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그럴듯한 세트 안의 인생은 조명이 꺼지면 더는 그곳에 없다. 드라마나 영화는 영상으로 고정해 놓은 이미지로 있을 뿐이다. 보여주기 위해 만든 삶이기에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걸까. 지금도 무언가에 도피하기 위해 텔레비전이나 넷플릭스 드라마에 빠져 세상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 속의 시트콤에서는 사람들이 자각과 경이를 느끼면서 그동안 내릴 수 없었던 비가 내린다. 그 비를 보고 두려움에 떨며 색을 찾지 못한 그들의 표정은 한 개인이 옳지 않은 일에 저항하려 할 때 만나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데 정작 실행하면 나만 다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이 사회도 제 색깔을 찾으려는 개인들이 많아지면 저 나름 행복감을 만날 수 있다. 행복한 풍경보다는 내가 행복할 수 있어야 이 세계는 다양한 색으로 제 빛을 낼 수 있다.
2022-05-18 | hrights | 조회: 147 | 추천: 5
이서하/ 회원 칼럼니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이라는 웹 소설이 온라인 플랫폼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주인공 김정진은 사학과를 졸업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영세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불의의 사고로 물에 빠져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계의 마법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주문을 외워야만 그 힘이 더욱 강하게 발현된다. 주인공은 편집자로 일하던 경험을 살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거센 바람이 5월의 여린 꽃봉오리를 뒤흔드니1)”, 슈테판 게오르게의 “불꽃의 궤도를 선회해본 이 그 누구든, 불꽃의 위성으로 머무를지니2)” 등 거장들의 멋들어진 문장을 사용하며 제일의 마법사로 발돋움한다.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던 역사적 지식 역시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난관을 타파해 나가는 일에 큰 도움을 준다.  모든 작가는 어떻게 해야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의 글을 읽어 줄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이 고민을 해소하기 위하여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욕망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이라는 소설이 나오게 된 배경 역시 명확하다. 우리 사회가 문과라서 죄송한 사회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기술 발전의 세상이다. 아날로그는 뒤로 밀려났다. 키오스크를 통하여 대면 없이도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QR코드를 통하여 백신 접종 여부를 인증하고 방문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스마트폰 안에는 범인이라면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할 첨단 기능이 가득하다. 이런 사회에서 당장 필요한 인재는 이공계 출신이다.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기계, 더 나은 전자제품을 발명할 수 있는 인재의 보유가 곧 국력이고 세계의 발전이라 인식된다. 고도로 산업화한 시대에 기술은 곧 생활이므로 이에 발맞춰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앞으로 달려 나가기에 바빠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발전한 세상, 부강한 세상이 곧 옳은 세상과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Caspar David Friedrich,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인문학은 한자로 사람 인(人), 글월 문(文), 배울 학(學)이다. 즉 사람을 읽는 문자이며, 사람을 탐구하는 학문이며, 사람의 근간이 되는 초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거창하지 않다. 사람뿐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와 인간 본질의 정수를 탐구하고 이해하여 어떻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 모두 인문학적 소양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술이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라면, 인문학은 꿋꿋이 기술의 반대편에서 또 하나의 축이 되어 우리 사회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해왔다. 단지 지나치게 기술 중심적이 된 현대 사회가 인문학으로 “먹고 사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사람을 읽고 이해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타인과의 소통 및 공감 능력의 부재를 불러오기 쉽다. 요즘 사회의 과도한 경쟁, 난무하는 혐오와 분쟁 역시 이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언제나 살아가기에 바쁜 세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한 인간의 기본적 소양을 외면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즉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답게’라는 말에 인문학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경쟁 위주로 흘러가는 교육,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부터 차차 바뀌어야 할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소통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나 자신을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아직 인문학이 가야 할 길은 너무나도 멀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다는 말은 곧 끝이 멀었다는 말이 아닐까.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속에도 여러 문제가 존재한다. 왕정을 철폐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하는 혁명 세력, 권력을 지켜내려는 왕세자, 형을 밀어내고 성군이 되고자 하는 셋째 왕자의 대립 속에서 시대는 격동한다. 주인공은 역사의 풍랑 속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옳을지에 대하여 고뇌한다. 강한 능력을 갖췄음에도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피할 수 없던 것이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라도, 어떤 기술 속에서도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적은 없다. 인문학이 매번 존폐 위기에 시달리면서도 명맥을 이어 온 이유일 것이다.  인문학을 살리기 위하여 갑자기 철학책을 펼 필요는 없다. 자신의 삶에 이미 존재하는 자그마한 인문학적 소양, 즉 인간성에 잠시의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성에 대한 관심과 고민 속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죄송한” 학문 역시도 아니다. 1) Sonnets 18 2) The Star of The Covenant
2022-05-10 | hrights | 조회: 213 | 추천: 7
김태민/ 회원 칼럼니스트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조어(造語)가 "좌파 신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는 우스운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이 농담 같은 말을 건네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에 시달린다. 요즘 들어 우익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가 결합하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익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의 결합이 그저 일시적인 착시에 불과하다면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를 백치들이 지껄이는 의미 없는 소음으로 취급해도 상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의 말도 안 되는 동거는 분명한 정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한때는 정권교체기에 맞추어 획기적인 정치적 언어들이 발명되어 포퓰리즘 광풍을 만들어내던 때도 있었다. 그 이름이 경제민주화던 소득주도성장이던 포퓰리즘은 엘리트층을 배제하고 민중을 호명해내는 매력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포퓰리즘도 그 유효기간이 지나 부끄러움도 없이 엘리트주의와 함께 배치된다. 실로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을 더 이상 10년 주기의 정권교체 시기마다 교차하는 진자 운동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엘리트 기술관료주의가 실패하고 민주주의가 마비될 때에서야 포퓰리즘이 분출하게 된다는 오랜 상식은 무효화되었다. 오히려 둘은 동시에 그리고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인다. 예컨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캠프가 적극 활용한 정치적 지형 역시 그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윤 후보는 문 정부로 대변되는 엘리트 기술관료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에 편승해 포퓰리스트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 포퓰리즘 전략은 법치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를 내세운 엘리트주의와 접합되었다. 윤 당선인의 인수위에서 예고한 정책들과 인선 역시 동일한 배치를 보여준다. 여가부 폐지 어젠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술관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제지한다는 측면에서 포퓰리즘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한편 형식적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법률가 출신 인사를 대거 등용하고 경제적 엘리트층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정책들을 제시하는 모습은 엘리트주의적 통치의 성격을 강화한다. 사진출처 - phelis  이 같은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대선 후보 한 명을 선택하면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 모두 소비할 수 있는 정치 소비의 시대가 도래한 게 아닌지 싶다. 홍콩 민주화 운동도 여행 패키지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걸 팔아 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커피를 마시면 캄보디아 소녀들을 살릴 수 있어요”, “우리 회사는 판매 수익의 1%를 기부합니다” 등등 상품은 더 이상 사물의 유용성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와 윤리적 가치, 경험도 함께 판매한다. 덕분에 소비자들은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윤리적 부담을 상품에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내가 하루도 빠짐 없이 전세계적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한 탓에 국제 노동 분업이 한층 더 불평등해지더라도 윤리적 자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상품이 나를 대신해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를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대선기간부터 판매된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는 시민 소비자들이 정권교체를 위해 5~10년을 기다리지 않고도 즉각 모든 정치적 격동을 미리 경험하도록 해준다. 윤석열 당선인 덕분에 누군가는 엘리트 법피아들이 실현하는 “법치주의”와 “공정성”을 한껏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형식 민주주의라는 상품은 소비자 본인이 엘리트가 되지 못할지라도 정치인과 전문가들이 대신 권위주의적 감각을 만끽하게 해준다. 물론 엘리트주의를 즐겁게 소비할 사정이 못 되는 소비자를 위해서는 반페미, 반장애인, 반 진보시민단체 혐오 정치도 판매하고 있다. 덕분에 누군가는 “우리”의 유토피아를 방해하는 “저들”의 “비문명적인” 갈등조장 행위를 윤리적 부담 없이 마음껏 비난할 자격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시장의 과열된 분위기가 지나가고 나서는 후유증의 시간이 오기 마련이다. 상품은 경제화된 삶 이외의 공간, 즉 착취적인 사회관계를 절단하면서 등장하게 된 숭고한 사물임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후유증은 점차 누적되고 있을 법도 하다. 동일하게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 역시 사회적 위계로부터 비롯된 적대와 모순을 애써 억압하기 위한 정치적 언어임을 고려해본다면 이 역시 어떤 후유증을 남기고 있지 않을까? 핵심은 포퓰리즘와 엘리트주의의 결합은 정치의 실패를 가리키는 지점이지 정치의 완결된 전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의 정치가 모든 것의 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게 바로 포퓰리즘 대 엘리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의 언어를 찾아나서는 작업이 필연적인 다음 과제일 수 있는 이유다.
2022-05-04 | hrights | 조회: 389 | 추천: 13
김지혜/ 회원 칼럼니스트  나는 과거에 휠체어와 목발로 생활한 경험이 있다. 덤벙거리는 성격 탓에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종종 삐던 왼쪽 발목이 19살 무렵 부러졌기 때문이다.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으나 석 달의 기간 동안 19년 인생에서 몰랐던 불편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멀리 떨어진 휠체어를 두 팔로 뻗어 내게로 당겨 앉아 그것을 화장실까지 밀어줄 사람을 필요로 했으며, 그것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다시 침실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사람의 손길을 요구했다. 처음 겪어 보던 그 과정은 나에게 있어 매우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렇기에 장애인들이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겪을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다. 장애인들은 대중교통에서만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순간부터 다시 들어가는 순간까지 크고 작은 불편함을 겪는다. 그렇기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를 이기적인 집단의 모습으로만 받아들이는 시선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의 절규는 평범한 삶에 대한 외침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바라는 간절함이다.  전장연은 지난해 말부터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인파가 가장 집중되는 곳에서의 투쟁은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시민들의 의견은 갈린다. ‘권리도 좋지만,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해서야 되겠냐’‘어차피 일반 시민으로서 도울 방법이 없다’라며 외면하는 이들. 반면에 ‘장애인도 기본권인 이동권을 당연히 누려야 한다.’‘얼마나 절박했으면…’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대다수 시민들은 지하철 시위에 불편함을 토로한다. 본래 ‘지옥철’이라 불릴 만큼 인구가 밀집된 공간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의 시위는 어쩔 수 없이 열차 지연 등 불편함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그동안 장애인들이 싸워서 생겨난 편의시설이 전체 시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지하철 승강장의 엘리베이터의 주 이용자는 노약자와 일반 승객들이다. 경사로 역시 리어카와 캐리어를 끄는 승객들이 이용한다, 저상버스의 도입은 승하차 시 사고율을 감소시켰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노란점자블록은 신호등을 기다릴 때 서야 할 위치를 알려주는 등 비장애인의 안전망 역할을 수행한다. 즉 장애인의 편의를 위한 시설이 우리 모두의 편의를 위한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에이블뉴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요구는 최근 몇 년 사이 일이 아니다. 어느덧 20년째 이어지는 문제다. 그럼에도 전국 모든 지하철 역사에 대한 엘리베이터 설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점차 늘어나고는 있어도 저상버스 도입률도 전국 평균 27.8%에 그친다. 장애인 콜택시의 운행 대수는 초기보다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상버스, 장애인 콜택시가 그들의 불편함을 모두 해소할 수 있을까. 사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장애인의 이동권과 그것을 위한 시설의 도입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그들로 인해 본인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불편할 뿐이다. 현재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관심이 들끓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장애인들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방해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장애인이 다수라는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은 단순히 불완전한 시설의 확보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 내린 ‘빨리빨리 문화’에 기인한 사회의 시선을 변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길 찾기 어플에 제시된 시간 안에 도착해야만 하는 사회의 시간에 장애인의 시간은 고려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발언으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마침내 수면 위로 올랐다.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하기 위해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방식의 시위는 서울 시민을 볼모 잡는 행위”이며“비문명적인 시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금 불편한 것을 그들은 평생 겪었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게 시위”라는 말에 좀 더 힘을 싣고 싶다.  그 누구도 장애를 갖고 싶어 갖게 된 것이 아니다. 더불어 스스로를 배려의 대상으로만 낙인 받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모든 권리 중 기본이다. 이동을 하지 못하면 교육을 받는 것도, 일하는 것도, 문화를 누리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장애인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숨 쉴 권리이다. 장애인의 사회참여가 온전히 보장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2022-04-27 | hrights | 조회: 240 | 추천: 10
황은성/ 회원 칼럼니스트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또렷이 생각난다. 피 끓는 애송이들이 한 방에 삼삼오오 모여 음란물을 감상하던 순간이었다. 방 안에 모인 모두가 침을 꿀덕, 꿀덕 삼키면서 여성의 나체를 탐닉했다. 이름도, 나이도, 삶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의 나체였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기사 하나를 읽었다. ‘n번방 사건’이라는 이름의 기사였다. 사건을 정독해보았다. 개요에 따르면 2018년 9월경 어느 경찰서로 ‘경찰 사칭 성폭행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신고 하나가 접수됐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담당 수사관은 사건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건은 그대로 묻힌다. 후에 시간이 흐르고 그 사건은 n번방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다. 소나기가 쏟아진다.  ‘반문명적 범죄’, ‘한국의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인성교육 대실패’, ‘추정 가해자 30만’, ‘엄중한 법의 처벌’,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심판’ 등의 이름을 가진 수백 개의 기사들이 쏟아진다. 유명인사나 저명한 이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정치하는 누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행동해야 하는 때’라는 말을 힘있게 외치고 사람들은 그를 지지한다. 정부의 청원도 올라온다. n번방 가해자들의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그 청원은 수많은 독려를 받고, 눈을 감고 일어나면 몇천 개의 서명 혹은 몇만 개의 서명이 늘어나 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입을 모은다.  가해자들을 욕한다. “그들은 욕먹을만한 짓을 했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할만한 몰염치하고도 천인공노할 짓이었다. 윤리성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 비난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은 호기심에 그랬고, 시청만 했을 뿐이고,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는데 왜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그들은 괴물이 맞다. 그렇다. 그들은 괴물이 맞다.  보안이 철저한 가상화폐를 이용해 경찰의 추적망을 피했고, 미성년자와 여성들의 성을 착취했고, 협박했고, 인생을 망쳐 놓았고, 돈을 벌었다. 겉으로는 사회의 일원이라며 한 행동들이다. 2018년도 당시에는 학생으로, 오늘의 평범한 38살의 회사원으로, 사회의 공익을 위한 공익근무요원으로 활동하며 뒤에서는 살인까지 교사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n번방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한 클럽에서 성폭행이 이루어졌다. 그때도 지금처럼 똑같이 목소리를 내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여성의 인권과 존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입에 오르내리고, 남자들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되고, 반증하듯 역시나 새로운 성범죄의 가해자가 되었는데 바뀐 것은 없었다. 반성을 논하는 칼럼들이 쏟아져 내렸는데, 안이한 처벌과 뒷배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들이 많았는데, 청원 역시 이루어졌는데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성을 착취하는 괴물들과 그것을 소비하는 괴물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건네고 싶다. 도대체 우리는 왜 바뀌지 않았을까?  답은 간단했다. 멀리 찾을 것도 없었다. 남자들은 불쾌해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자신들이 어째서 소수의 괴물 때문에 잠재적 가해자가 되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거기엔 진정한 반성도 없고 진정한 고민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래서이다. 거기엔 진정한 반성도 없고 진정한 고민도 없었기에 사회와 우리는 바뀌지 못했다. 남자들은 여성들이 주장하는 “2020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깔린 저변의 강간 문화”라는 말에 매우 민감하게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강간 문화까지는 아니다.” “비약이다”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남성들은 알게 모르게 여자들을 수없이 강간해왔다. 모니터 속에서 그랬으며 현실에서 그랬다. 그러자 누군가 말한다. “나는 한 번도 여성의 성을 학대하지 않았으며 음란물을 시청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왜 잠재적인 가해자로 몰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대한 대답 또한 매우 간단하다. 침묵은 때로 부정이 될 수 있지만, 긍정도 될 수 있다. 나는 한 가지를 고해하고자 한다.  나는 n번방 사건을 처음 접하고 피 끓는 애송이들이 한 방에 삼삼오오 모여 음란물을 감상하고 난 이후의 일을 생각했다. 감상을 끝내고 난 다음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비밀로 하자는 말도 감상평도 없었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삶도 모르는 여성의 나체를 탐닉한 채 그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리가 그날 본 것을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묻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나는 침묵을 택하고 괴물이 되었다.  그렇게 괴물이 된 나는 이제 말하고자 한다. 진정한 반성과 고민이 있어야만 변화가 생겨난다. 관망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잠재적인 성폭력 가해자가 되어 분노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해야 할 때다. 이 사건 앞에서 결코 결백이란 있을 수 없다.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지 괴물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지 괴물이 아니다. 사진 출처 -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을 목도했을 여성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죽음과 착취로 이어지는 폭력적인 소비를 근절해야 한다. 이유는 필요 없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을 구태여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누군가는 나는 결백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그저 음란물을 시청했을 뿐인데 왜 이런 처우를 받아야 하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괴물로 살고 싶지 않다. 이미 현실에서 한 줌의 재가 된 후에도 모니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여성의 나체를 탐닉하고, 또 누군가를 죽이고 소비해가며 추악하게 살아가고 싶지 않다. 이것은 나의 고해이자 결심이고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나는 괴물로 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괴물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인간으로 살고 싶은가? 황은성: 황은성입니다.
2020-05-13 | hrights | 조회: 715 | 추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