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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무심한 국민들’이 ‘희망 가득한 시민들’로 거듭나는 상상 (김 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4:28
조회
308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집 마당은 쓸지언정 동네 골목길은 쓸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골목길의 쓰레기가 금방 자기 집 대문 앞도 더럽힐 게 자명한데도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 이 근시안과 이기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상징한다. 자기 딸의 안전을 위해 정거장까지 마중을 나가는 부모가 성폭력의 방지와 예방을 위해 운동하는 단체에는 냉담하다. 자신의 딸과 아내, 여동생을 위해 평생 그렇게 따라다니며 보호해 줄 작정인가.”

시민운동은 어떤가? “회원이 없고 회비가 없는데 시민단체가 제대로 움직일 리 만무하다. 그러다가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목소리를 높여 비판한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이슬을 먹고 살란 말인가.”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성금을 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국민들에게 성명을 내고 문을 닫는 이런 상상은 어떤가. “국민여러분, 저희들은 최선을 다해 이 땅에 부패를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힘들었습니다. 국민들의 침묵과 무관심에 저희들은 절망했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문을 닫습니다. 국민여러분,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기 바라며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할 뿐이다.”(박원순,『한국의 시민운동--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중에서).

위의 글에 깊이 공감하면서 필자는 수많은 무심한 국민들, 수많은 무임 승차자들, 인권운동을 자기의 이상한 잣대로 재단하는 많은 이들, 그리고 인권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고,  ‘그만 문 닫는 일’이 현실이 되면 어쩔 것인가라는 걱정도 해 보았다.

우선, 우리 사회엔 공동체에 대해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이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서울 지역 초등학생의 절반 가까이가 시력이 나쁘고 또 요즘은 책걸상의 높이가 안 맞아 자세가 나빠지면서 걸리게 되는 척추측만증이 많다고 한다. 자기 아이의 시력이상, 척추 이상엔 관심을 가져도 전교생 대상의 척추검사를 교장선생님께 건의하거나 교실의 조명도가 적절한지 테스트를 의뢰하는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권이 무엇이며, 인권운동이 왜 필요한지라도 제대로 이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인권운동에 대해 그들이 갖다 대는 잣대는 어떤 것일까? 옛날 그리스의 악당 프로크루스테스는 밤길을 지나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하여 잠자리를 제공했는데, 그 딱딱하고 얼음같이 차가운 쇠 침대에 나그네를 강제로 묶어놓고는 몸길이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길이를 늘여서 죽였고, 몸길이가 침대보다 길면 그 긴만큼을 잘라 죽였다한다. 그 침대와 몸길이가 똑같은 사람만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다.

인권운동의 경우, 그것은 ‘좌파’들이나 하는 것, 반정부 세력들이나 하던 것, 또는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그리고, 매년 장애인주일 미사 때에 성당에 특별헌금 내는 것은 신자들이 할 몫이고 장애인이동권연대에 후원금을 내는 것은 신자 아닌 일반 시민들의 몫이라는 생각 등은 어떤 잣대에서 나올까? 과거 독재시대에 비해 현재 인권상황이 훨씬 나아지게 된 이유조차 인권운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혹은 “으쌰! 으쌰! 좀 그만들 하라!”면서, 인권운동이 지금도 꼭 필요한 것이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권운동가들은 고군분투하고 있다. 뜨거운 열정과 헌신으로 일하면서도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면 민생고 문제 때문에 일을 그만 두는 경우가 허다하게 생긴다. 인권운동가는 어쩔 수 없이 혹은 기쁘게 ‘이슬’을 먹고 살더라도, 그 가족까지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무심이 절망적인 수준이라면, 이제, 그만 문을 닫아버리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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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돋친 줄기 위로 피어나는 장미


 1987년 6월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 내의 인권의식에 대한 실망이 ‘장미꽃을 보고 감격하다가 줄기의 가시를 보면서 갖는 실망’이라면, ‘가시 돋친 줄기 위에도 장미가 핀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는 이들은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이 ‘희망가득 참여하는 시민들’로 거듭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장미 줄기의 가시를 세는 것보다 장미 봉오리를 꿈꾸며 움트고 있는 싹을 센다.


 필자의 경우, 인권연대 운영위원회에 나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매달 회계보고를 접하면 몇 달 밀렸다가 내곤 하는 사무실 임대료 까지 감안하면 늘 적자, 인권강좌 열어서 보람 많이 느꼈지만 또 적자, 민생고 문제로 활동가 결원이 생기는 안타까운 상황과 이어지는 새로운 충원도 쉽지 않은 상황, 그리고 숱하게 터지는 인권침해 사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원에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 이 모든 것은 장미 줄기의 가시들에 해당된다.

허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줄기 위로 장미가 피고 있다는 사실이며, 믿음이다. 이렇듯, 줄기에 싹들이 움트고 있다는 소식도 많이 접한다. 인권강좌를 수료한 이들이 새로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매번 소식지의 활동일지를 꽉 메울 만큼 인권연대는 활동하는 것이 많고 의욕도 아직 충만하다는 사실, 순수하게 인권운동을 해오고 있다는 평판, ‘인권교육’을 꾸준히 정규적으로 하고 있고 늘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인권단체로서 인권연대가 거의 유일하다는 사실, 동시에 인권운동의 영역도 넓혀가고 있으며 매년 초엔 하고자 하는 사업계획이 너무 많아 한참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 작은 단체인 인권연대를 시민사회 곳곳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고 늘 순수하게 인권운동만을 해왔고 늘 그럴 거라는 믿음과 약속, 이런 것들을 열거해 보면, 우리는 장미 줄기에 난 가시의 수를 세는 것이 아니라 봉오리를 꿈꾸며 움트고 있는 싹들을 세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많지는 않아도, 매번 인권강좌에 참석하는 시민들을 보며, 그들의 진지한 표정과 인권에 대한 호기심과 목마름을 보며, 우리는 ‘절망적으로 무심한 국민들’이 ‘희망 가득한 시민들’로 거듭나는 상상을 하자.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