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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자 이야기 (서상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4:18
조회
375
오부자 이야기- 대한민국에서 아버지로 살아가기

돈 많은 부자(富者)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네 아들을 키우고 있어 나까지 합쳐 오부자(父子)이니 곧 내 얘기, 우리 가족 얘기를 하려는 참이다. (이런 나를 두고 富者라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긴 하다)

부끄럽지만 모든 아이들은 천사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을 몸으로 느끼고 체득하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네 녀석들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이런 부끄러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때때로, 아니 자주 아이들이 축복이라기보다는 짐으로만 다가오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로서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던 때였다) 이 시기에는 ‘버릇 고쳐준다’는 명분으로 혼도 많이 내고 ‘엄한 아버지’가 당연한 내 몫인 양 생각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그러지 않으셨는데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품을 때도 없지 않았다.

아마 환경적 요인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조그만 일이 커져,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적인 일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기도 했던 집안의 내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아버지나 나는 대인관계에 있어 무척이나 조심하는 편이다. 나로 인해 어떠한 피해도 상대에게 끼쳐선 안 된다는 의식이 오랜 동안 내면에 자리 잡아 왔다. 이런 의식은 깨닫지 못한 사이 종종 결벽증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삶을 스스로가 만든 족쇄로 받아들이고 ‘강박’을 조금씩 허물어내기 시작한 것 또한 네 아이들 덕이니 나는 아이들에게 감사해야 될 게 우선 하나다.

한번은 아내가 “어쩌면 아무개가 당신을 꼭 빼닮았냐?”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아내가 말하는 이유를 들어보니 그 까닭이 내가 평소 그 녀석에게서 답답해하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바로 그 점이었다.

‘허허 참, 어이없어.’

겉으론 웃고 말았지만 아내의 조그만 관찰(아니, 이것도 돌이켜보면 나와 아들에 대한 애정 어린 눈길과 오랜 관찰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이 가져온 변화는 적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녀석이 하는 태를 유심히 지켜보니 아니나 다를까 나의 어떤 부분과 많이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조그만 단점마저 내가 물려준, 나의 한 부분이며 그 녀석은 아직 그것을 제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간 녀석에게 품었던 생각에 미안해지기도 했다. 이 일이 전기가 돼 나는 가끔씩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녀석들의 어떤 점이 내가 물려준 것인지 찾는 재미도 적지 않다.

 
필화(筆禍) 또는 설화(舌禍) 기억의 내면화

한번은 우리 집에 놀러온 동서가 “녀석들 아빠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네”하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내가 거실에 있으면 안방에 가서 놀고 안방에 들어가면 거실이나 작은방으로 쪼르륵 달려가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잔소리꾼’ ‘폭군’이었던 셈이다.

우리 역사에는 몇 줄의 글이나 몇 마디 말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례가 적지 않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표현의 자유가 권력을 지닌 이들에 의해 멋대로 재단됨으로써 일어났던 피비린내 풍기는 역사는 그리 멀지 않은 우리 현대사에도 아픔을 새겨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이들과 놀면서 가끔씩 이런 역사를 떠올린다면 조금은 우습기도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나 행동거지에서 거슬리는 것이 있을 때 나는 대놓고 야단을 치는 편이다. 가끔씩 내 성에 못 이겨 화를 내기도 한다. 엄한 심판자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

아내는 “애들이 다 그렇지”하는 말로 눙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런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아빠였다. 아마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필화와 설화로 공권력에 적잖이 시달려야 했던 우리 역사나 가깝게는 집안의 내력이 부지불식간에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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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 - 동아일보



우리 아이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의식은 아이들에게 아이들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셈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이 어떻게 놀든 간섭을 하지 않는 편이다. 순간순간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찰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아이들이 고마울 뿐이다.

 
아이들에게서 ‘나’ 찾기

우리 집에서 네 아이의 교육은 거의 아내의 손에 맡겨져 있다. 별난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는 아내의 교육철학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래서 지금껏 어른들의 필요에 따라 아이들을 이러저런 학원으로 내몬 적이 없다. (물론 네 녀석 학원 보내려면 등골 빠질지 모를 일이다) 자기들이 꼭 배워보고 싶다는 수영이나 바둑, 미술 학원에 얼마간 보내본 적이 있지만 그것도 식상해 하면 억지로 보내지 않는다. 전에는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하는 식으로 밀어붙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교육적 효과가 별로여서 이내 생각을 접었다.

한 녀석 한 녀석 재능이 다 달라서 누구는 바둑에 재미를 들여 자기가 다니는 학원에서 1등을 하는가 하면 어떤 녀석은 창작만화 그리기로 생각지 않은 상을 타오기도 한다. 손재주가 좋은 둘째는 종이접기 카페를 운영하며 손수 만든 종이 작품을 올리기도 한다. 누가 시키거나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부모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해내는 모습들을 볼 때면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란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적지 않다.

수많은 피해의식과 자격지심들이 뒤섞인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남자로, 아버지로 아이들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을 살며 그 속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나 또한 행복해진다. 부족하기만 한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여기는 아이들, 나는 그래서 아이들과 더 친해져야 하고 그들에게서 더 배워야 한다. 이것이 신이 아이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는 축복의 메시지가 아닐까.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