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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학창시절, 나로선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직업이 2개 있었다. 판사와 목사다. 둘 다 다른 사람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일을 한다. 누군가의 죄를 묻고 단죄하고 교화시키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뭐라고 사람을 치유하고 생명의 길로 인도한단 말인가. 더구나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고? 엄청난 사명감과 소명의식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두 직업의 분들을 경외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그들이 정치를 하겠다 나선다면 좀 생각이 달라진다.  최재형 감사원장이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지 숙고하겠다”며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사표를 냈다. 엄격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사정기관의 수장이 본분을 저버렸다는 비난이 일었고 대통령도 ‘바람직하지 않은 선례를 만들었다’며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사퇴 전부터 대선후보로 거론됐고 그 자체로서 중립성이 무너진 거나 다름없으니 ‘감사원장 수행이 부적절하다’는 그의 말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다만 궁금한 건, 어떤 지점에서 최 전 원장이 직접 정치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감사원장으로 지명되었을 때, 사법연수원 시절 몸이 불편한 동료를 업어 등원시켰다거나 두 아들을 입양하는 등의 인간적 면모로 대중에 알려졌지만, 그는 판사 출신으로 감사원장을 지낸 것 외에 다른 정치적 경력이랄 건 없었고 굳이 정치판에 나설 이유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최 전 원장의 존재감이 드러난 건 월성원전 1호기 감사 때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립각을 세웠을 때다. 감사원 내부의 반발도 있었고 정부 부처의 비협조도 강했다. 최 전 원장은 ‘감사원장이 되고 이렇게 저항이 심한 것은 처음 봤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소신이 벽에 부딪히면 보통 끝까지 버티거나 미련 없이 물러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판을 갈아엎겠다는 결심까지 한 것 같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의 집권 연장을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대선에 도전하겠다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문제의식과도 닿아 보인다. 여하튼 검찰총장에 이어 감사원장까지 임명권자에게 등을 돌리고 야권의 대선후보로 출마하는 어색한, 정권으로선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헌법기관과 권력기관의 독립성 정치적 중립이란 단어는 그 의미를 갖지 못한 지 오래다. 사법부는 권위주의 군사정권 아래에선 권력의 시녀로 불렸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엔 정권과 거래하는 사법농단이 일어났다. 지금도 독립적인 헌법기관이란 단어는 심하게 말하면 조직 이기주의와 보신주의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최재형 원장더러 당신만은 끝까지 임기를 지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라 말하는 건 코미디에 가깝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선거에 나설 수 있다. 정치가 정치인의 전유물도 아니다. 판검사 출신도 당연히 할 수 있다. 부족한 정치 경험이야 과외도 받고 대권 수업을 하면 된다. 머리 좋은 분들이니 습득도 빠를 것이다. 주위에 돕겠다는 인재들도 줄을 설 것이다. 여기에 강력한 정치적 동기까지 있으니 윤석열 전 총장이나 최재형 전 원장이 대통령에 도전 못 할 이유는 없다. 야당 후보로 나서든 여당 후보로 나서든 따질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왜 대통령을 하겠다는 건지, 대통령이 되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법관, 법조인은 평생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 원칙과 질서, 공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이를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법치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소명의식도 있다. 윤석열 전 총장이나 최재형 전 원장도 이런 법과 양심의 발로에서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대단히 소중하고 값진 문제의식이지만 나는 그 출발점이 위태로워 보인다. 법과 양심, 원칙은 가치로선 소중하지만 그걸 적용할 때부터는 문제가 달라진다. 원칙과 법과 상식, 공정, 정의가 얼마나 공허하고 내용이 없는 단어인가. 이 단어들이 의미를 갖고 가치를 가지려면 얼마나 많은 토론과 숙고와 합의와 절충과 양보와 이해와 에너지가 필요한가. 그런 노력을 생략한 채 단기속성으로 정치를 하겠다고 한다면 말리고 싶다. 집권자가 이런 가치를 섣불리 들이대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순간 민주주의는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 법조인이 정치를 하려는 이유를 안티테제가 아닌 자신만의 비전과 생각을 좀 더 고민하고 다듬어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그랜토리노’가 생각난다. 한국전쟁 참전의 상처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고집불통의 노인 월트에게 새파랗게 젊은 신부가 찾아와 아내의 유언이라며 고해성사를 하라고 설득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주인공에게 애송이 신부의 설교는 가당치도 않았다. 이 옹고집 노인의 마음을 연 것은 사명감과 소명으로 충만한 신부의 설교가 아니라 평소에는 안중에도 없던 아시아 소수 민족 타오 남매의 삶과 고통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었다. 어려움에 빠진 타오 남매를 돕고 그들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월트는 자신의 무시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과 타오 남매를 돕는 젊은 신부를 다시 보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이웃 남매를 위해 내놓는 월트의 용기와 희생으로 이 영화는 끝난다.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개입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행동의 이유가 된다. 말씀만으로는 이 세상을 구할 수도 없고 한 인간의 마음을 열 수도 없다. 정치나 권력은 타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니만큼 그 힘을 가지고 싶은 이들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개입의 책임 그리고 행동의 이유를 스스로 명백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21-06-30 | hrights | 조회: 2240 | 추천: 16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이를 먹는다는 건 뭔가 덜 행복해지고 더 기운 없어지는 것과 비슷한말처럼 느껴진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이가 들수록 더 고집스러워지고 바뀐 현실에 덜 귀 기울이는 이를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늙은이는 곧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도 옛날 논농사 짓던 시절에나 통하던 얘기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자주 든다. 오늘 만난 한 지인한테서 “아버지와 사이가 꽤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이유는 “원래부터 가부장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나라에는 ‘어른’이라고 할만한 분들이 많지 않은 건 분명해 보인다. 문익환, 리영희, 김대중 같은 이들은 더이상 없다. 종족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영훈은 말할 것도 없고 김종인 같은 이들도 능력 있는 건 알겠는데 존경심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한편에선 사회원로라는 말 자체도 인플레이션이다. ‘이코노미조선’이 올해 신년기획으로 사회원로 7명의 조언을 들었다는데 등장인물들이 총리나 장관 등 한 자리씩 차지하며 잘나갔던 분들인 건 알겠는데 나이 많은 것 말고 원로라고 할 수 있는지는 도대체 모르겠다. 물론 김도연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처럼 특별교부세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물건인지 장관 자리를 걸고 국민들에게 알려주신 게 업적이라면 업적인 분도 있겠다.  “나 때는 말이야”는 말은 농담이나 단순한 경험담으로는 들어줄 수 있을지 몰라도 조금만 궁서체 느낌이 나는 순간 듣는 것 자체가 곤욕이다. 50~60년대생은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려고 해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고, 게다가 극장 구경도 제대로 못 해본 사람이 태반이었던 후진국에서 자랐다. 반대로 80~90년대생은 성장기에도 선진국 문턱이었고 지금은 말 그대로 선진국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이들이 서로 만나 얘기를 나누는 건 평생 벼를 키운 중국인 농부와 평생 말을 키운 몽골인 유목민만큼이나 아득하게 먼 느낌일 것이다. 하긴 1970년대에는 공무원들이 필리핀으로 해외 우수사례 견학을 갔고 2021년에는 해외 각지에 있는 공무원들이 한국으로 견학을 오는 마당이니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대화를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신기한 해외여행 얘기도 아닌 바에야 ‘라떼’ 시리즈를 교훈으로 쓰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일 테니까.  그렇다고 나이 든 사람은 그냥 조용히 입 닥치고 지낼 일도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가 될 수도 있겠다. 연륜은 언제나 힘이 있다. 통찰력과 선견지명으로 오래 잘 묵힌 김치로 끓인 김치찌개만큼이나 사람을 잡아끄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분들과 얘기하다 보면 ‘나 때는 말이야’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보여주는 방대한 데이터 저장소 같다. 그리고 이런 데이터가 내 부실한 뇌세포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는 건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영화 ‘인턴’은 그런 모습을 꽤나 실감 나게 묘사했던 걸로 기억한다. 전화번호부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다 정년퇴직한 70세 노인이 하필이면 그 전화번호부 회사가 있던 사무실에 입주한 온라인 여성 의류 판매 기업에 인턴으로 입사한다. 남들이 노트북을 켜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일할 때 007가방에서 전자계산기 같은 오래된 물건을 꺼낸다. 주인공 벤이 ‘나때는 말이야’라면서 정장과 가방 얘길 했다면 회사 직원들은 그저 70년을 살았고 이제 자기들 눈앞에서 빨리 사라져주면 좋은 사람으로 여겼을 것 같다. 하지만 벤이 풍부한 경험과 연륜으로 동료들과 어울리고 헌신적이고도 사려깊은 자세로 경영자의 신뢰를 얻자 그의 오래된 물건들은 ‘클래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그의 정장 복장은 믿음직한 사람의 표식처럼 비친다. ‘경험이란 결코 늙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요새 젊은것들’ 소리가 조선시대와 고대 그리스, 심지어 이집트 파피루스에도 적혀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사실 세상 모든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느끼고, 윗세대와는 다른 좀 더 진화한 생명체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특히나 ‘저런 꼰대와 우린 다르다’는, 구별을 짓고 싶은 마음은 이러저러한 세대론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게다가 나이가 곧 계급이고 신분인 한국 문화에선 나이로 사람들을 구별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기도 하겠다.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이광수도 공자왈 맹자왈 하던 윗세대와 신학문을 배운 자기 세대는 질적으로 다른 ‘세대’라고 강조했다고 하고, 해방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심지어 지금 40대도 한때는 ‘새 세대’라며 언론의 주목을 한껏 받았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자신들이야말로 ‘낀 세대’이고 그 때문에 윗세대보다 손해를 더 본다고 인식하는 것도 오랜 역사가 있다. 1993년 한겨레, 1995년 동아일보, 1997년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면 30대를 ‘감각적인 신세대와 옛 세대 사이에 낀, 활자와 비디오 사이에 낀 세대’로 묘사하는데 당시 “샌드위치 세대”라는 30대가 바로 지금은 꼰대의 대표주자처럼 놀림받는 86세대다. 1997년 동아일보에는 “이기적이고 타인과 현실정치에는 무관심한 신세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 신세대가 지금 가장 정치참여에 적극적이라는 40대다. 2005년 경향신문과 노컷뉴스,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면 ‘효를 하는 마지막 세대’라며 당시 50대를 낀 세대로 표현하는데 이들이 지금은 60대다. 2005년 동아일보에는 58년 개띠를 낀 세대로 분석한 기사도 있다. 이쯤 되면 ‘끼여서 손해 보는 세대’가 아닌 세대가 고대 이집트 이래로 한 번이라도 있었나 싶어진다.  요즘 MZ세대 얘기가 한참이다. 세대론이란 언제나 뭔가 새로운, 그래서 이러니저러니 갖다 붙이기 좋은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세대론을 확산시키고 이러저러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건 언제나 세대론을 통해 ‘옛 세대’로 규정되는 세대라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386세대”도 그랬고 “X세대”도 그랬다. ‘모래시계 세대’니 ‘신세대’니 ‘Z세대’니 각종 세대론이 쉴 틈 없이 이어지며 약을 파는 모양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정체불명인 “새정치”가 울고 갈 정도다. 과연 요즘 한참 잘나가는 ‘MZ세대 담론’은 과거와 얼마나 다를까.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1-06-23 | hrights | 조회: 1447 | 추천: 4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21대 국회를 향한 국가보안법 폐지의 목소리가 갈수록 드높아지고 있다.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한 여당이 마음먹기에 달리지 않았냐는 낙관론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지난해 15인의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국가보안법 제7조를 삭제하는 내용의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었고 지난 5월 19일에는 단 열흘 만에 국가보안법 완전폐지 10만 국민동의 입법청원이 성사되었으며, 국민들의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를 염원하는 뜻을 반영한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 법률안도 추진 중에 있다.  이러한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열망과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분단 냉전의 장막은 한 치의 파열구도 허용치 않고 있다. 북 지도자의 자서전 출간에 대해 국가보안법 탄압이 횡행하는 단 하나의 사실만 보더라도 총체적 파시즘 체제에서 탈주하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한국 민중의 힘이 파시즘 악법 국가보안법을 능가할 정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안이하고 섣부른, 요행수를 바라는 듯한 주관적 국가보안법 폐지 낙관론에서 벗어나 국가보안법에 의해 거세당한 민중의 저항력을 회복하기 위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 계기로써 21대 국회를 향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이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래야, 2004년 ‘하마터면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뻔했다’는 식의 추억 바라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북에 대한 미군 주둔과 북에 대한 적대감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도구다. 반제국주의 평화운동, 북과의 평화공존, 자주적 평화통일을 가로막아 한국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차단한다. 친북 성향이라는 이유로, 동족인 북과 화해하고 연대해 내정간섭을 자행하는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통합진보당은 해산되었다. 지금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주한미군의 철수와 관련된 문제다. 국가보안법의 파시스트적 영향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반미 반제국주의 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고,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진보 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경쟁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 과정에서 남북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다.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 과정은 제국주의의 동북아 정치 군사개입을 영구 배제함으로써 미군기지가 없는 동북아 평화를 만드는 길과 연계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치안유지법>이 해방과 함께 폐지되었으나, 국가보안법은 치안유지법을 답습하여 형법이 만들어진 1953년보다 훨씬 앞선 1948년 12월 1일 친미반공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제정되었고 국가보안법의 유년기는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그에 이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던 통일애국세력을 고문·학살하는 반공, 반통일, 반민중적 성격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시기였다.  국가보안법은 반공법 제정 후에는 반공법과 함께, 나중에는 반공법을 흡수한 비대해진 몸으로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성장하며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군사독재정권이 민중의 불만과 저항을 억압하고 군사정권을 연장, 강화하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어 반외세 민중민주 운동과 자주통일운동을 좌경용공세력으로 몰아 고문·학살하는 법적 근간이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중장년기, 노년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한국 민중을 위한 선진 사상과 선진 정책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절대무기로 작동하고 있으며 특히 이웃하는 동족의 사상과 체제와 정책은 금기시되고 비방과 폄훼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북맹과 허위의 우월의식으로 우리 민중들을 세뇌시키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극우보수세력의 절대무기로 진보정당을 해산시키고 극우보수세력의 집권과 정권유지에 악용되었고, 지금도 극우보수세력의 재집권을 위한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스1  국가보안법은 사문화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렇게 느끼도록 세뇌당하며 국가보안법에 대한 민중의 저항력을 상실시켜 왔을 뿐이다. 국가보안법이 완전히 폐지되기 전에는 어디에서도 사문화된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민중의 투쟁에 의해 국가보안법의 악폐성에 대한 저항력과 견제력이 커질 때 파시스트적 독성이 조금은 누그러질 수는 있으나 그도 잠시일 뿐 호시탐탐 자주적 평화통일운동과 진보적 민중운동을 겨냥하고 한국 민중을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분단냉전체제에 길들이며 반민중적 파시즘 체제에 안주하게 하려고 분주히 작동해 왔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곳에 탄압이 있듯 만약 국가보안법이 사문화된 듯이 보인다면 민중의 저항력이 거세되었기 때문이기에 이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에 불과하다.  오늘날 국가보안법의 파시스트적 악폐성은 차고 넘친다.  국가보안법은 평화통일의 대등한 동반자로 신뢰증진의 대상으로 존중하여야 할 동족인 북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북의 사상과 이념, 체제와 제도 일체를 붕괴시키거나 소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고 비방하고 적대시한다.  국가보안법은 1991년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을 무색하게 만들며 유엔의 정식 가입국인 북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전 세계 사회주의 국가 중 유독 동족인 북의 국가성을 부인하며 반국가단체(내란단체)로 규정하여 북의 지도자, 간부, 북의 민중들 모두를 반국가단체(내란단체)의 구성죄로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반국가단체인 북과 같은 주장과 정견을 개진하거나 한국 정부의 허가 없이 북 주민을 만나거나 연락하는 것을 처벌 통제하며 심지어 북의 인터넷 사이트조차 자유롭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며 형사처벌을 한다.  특히 미군철수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물론 남북이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적 대단결로 평화적 통일을 이루는 방안인 연방제 통일방안을 주장하는 것까지 형사처벌한다. 평화적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안한 북에 대하여 적화통일방안이라고 비방하는 적반하장의 논리가 득세하는 비정상의 극치다. 외세와 야합하여 북 사회주의 붕괴를 노리며 자본주의로 흡수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셈은 휴전 후 정전협정에 근거하여 일관되게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한 북에 대하여 한사코 대화와 협상을 회피하고 거부하며 북에 대한 핵 선제공격을 노리고 온갖 핵 전략자산을 동원한 가공할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북의 무력통일로부터 한국을 방어해준다는 구실로 방어적 훈련이라며 위장하여 북 지도자 참수, 북 정권 격멸 및 평양점령 훈련을 자행하는 것과 똑같다.  국가보안법은 한국 민중을 분단 냉전체제의 어두운 장막 안에 가두어두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매카시즘보다 더 악랄한 암흑의 장막을 뒤집어씌운 채 북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로지 북에 대해 비방하고 적대감을 고취할 자유만을 우리 민중에게 강요하며 동족 대결을 부추기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동족과 민족단결을 추구하며 반미자주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한국 민중의 요구를 철저하게 짓밟는 파쇼악법으로 작동하고 있다.  북에 우호적이거나 미국을 반대하는 일체의 활동이 불온시 되고 형사 처벌당하는 국가보안법의 위협과 억압 앞에 우리는 모두 침묵과 굴종을 강요당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무고한 형사처벌을 받았던 양심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양심수는 국가보안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에 맞서 저항하였으므로 오히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로 볼 수 없다. 한국 민중 모두가 누구나 기나긴 국가보안법의 악행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본능적으로 외세와 극우 보수세력의 야만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한국 사회는 진실과 정의가 뒤바뀌고 정상과 비정상이 뒤바뀐 사회가 되었다. 한국민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공포는 북이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외세와 극우 보수세력의 광기의 폭력에 가위눌린 것이다. 한국민은 국가보안법의 위력 앞에 공포감을 느끼며 사는 트라우마의 피해자이다. 한국민은 누구나 외세와 극우 보수세력의 광기의 폭력 앞에 공포와 불안감을 느끼는 트라우마에 익숙해진 나머지,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다 국가폭력에 희생당하는 길보다는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미국은 동맹, 북은 적이란 허위의 틀로 스스로를 검열하고 재단하기 십상이다.  동족만을 적대시하고 동족을 붕괴시킬 목적의 국가보안법은 반통일, 반민중 악법으로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등 남북 정상의 합의를 이행하는 데 걸림돌이다. 한반도 종전선언 및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적대관계를 끝내야 하므로 북을 처벌하고 붕괴시킬 대상으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은 선결적으로 폐지되어야 하는 한국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해결하는 최우선의 최고의 과제다.  일본 제국의 통치질서의 핵심 도구였던 치안유지법이 일제의 패망과 함께 비로소 폐지되었던 것처럼 국가보안법 폐지도 어쩌면 제2의 해방을 이뤄야 가능할 최후의 과제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1-06-16 | hrights | 조회: 1869 | 추천: 7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진시황(秦始皇). 중국 천하를 처음 통일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람들은 흔히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처음 통일했으나 아방궁을 짓는 등 방만한 재정 낭비로 반란을 초래했으며 그 결과 진나라는 30년도 안 되어 멸망했다고 한다. 나는 진시황의 ‘낭비’에 대한 도덕적 힐난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다른 가설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이 광대한 땅과 숱한 인민들에게서 얼마를 거두어야 할지 그는 아직 몰랐을 거라고. 같은 시기의 자료를 보다 갖게 된 감이 있어서이다.  당시 못 살겠다고 봉기한 군중 중에 항우와 유방이 있었다. 둘은 나란히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점령했다. 항우의 군대가 점령군답게 금은보화를 차지하고 방화와 파괴에 몰두했을 때, 유방의 제1참모로 나중에 재상이 되었던 소하(蕭何)는 지도와 문서를 챙겼다. 그는 항우에게 핍박당해 파촉으로 쫓겨가 있을 때 이 문서를 연구했다. 지도는 경지를 포함한 천하의 땅에 대한 정보였고, 문서는 인민에 대한 정보였다. 얼마를 거두고 누구를 동원할지 따져보았을 것이다. 인민과 생산물에 대한 파악, 국가가 맨 먼저 하는 일이다. 그것을 실패하면 국가가 될 수 없거나, 망한다.  국가만 공무원 조직을 동원해 인민을 관찰하는 게 아니다. 인민들도 정책과 관리를 통해 국가를 들여다본다. 조선 시대처럼 강력한 지식인 집단이 국가가 하는 일에 참여하고 국정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요즘처럼 시민들이 정보공개를 통해 국정을 들여다보고 드러내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정보에 접근하는 기술이 달라 그 방식은 차이가 있다. 민주, 민본의 역량은 인민들이 국가가 하는 일을 얼마나 들여다보고 드러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산림청의 벌목사업을 조사한 환경운동가 최병성은 이렇게 물었다. “최근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흉물스러운 싹쓸이 벌목 현장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왜 이렇게 참혹한 벌목이 전국에서 행해지는 것일까?”(오마이뉴스, 최병성 리포트, 2021년 6월 2일.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6월호도 참고) 사진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의 “과도한 벌목의 진실이 무엇이냐? 국유림이냐?”는 질문에, 최병암 산림청장은 “사유림이다. 개인 재산이다. 산림청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산주인은 채산성 때문에 벌목을 할 이유가 없고, 심지어 산주인의 동의 없이 벌목이 이뤄지기도 하며 그 비율은 무려 51%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 산림청이 5월 25일 낸 해명자료에서 “어린나무를 베지 않으며, 이산화탄소 순흡수량과 저장량을 함께 관리한다”라고 한 말도 말장난이라고 지적했다. 산림청은 침엽수의 경우 30세, 활엽수의 경우 20세의 나무를 베고 있으며, 이는 수백 년에 달하는 나무의 수명을 감안할 때, 아주 어린 나무라는 것이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서 싹쓸이 벌목이 벌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산림조합! 산림조합이 산주인들을 찾아다니며 산지의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위임장을 요청한다. 거기에는 ‘나무 벌목과 조림과 조림지 풀베기’(조림 완료일로부터 3년), ‘어린나무 가꾸기 사업’(조림 완료일로부터 10년 이내) 및 관련 사업비 집행, 보조금 수령 등 일체 행위를 위임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산림조합의 이익률은 15%에서 23.1%로 늘어났다.  감사원에 따르면, 2008년~2012년까지 5년 동안 숲 가꾸기와 묘목을 심는 조림비용이 총 3조 1,301억 원이라고 한다. 산림청의 2020년 조림비용 고시문에는 이윤이 ‘노무비+경비+일반경비의 15%’라고 했으니, 3조 1,301억 원의 15%, 약 4700억 원이 산림조합에 돌아갔다는 말이다. 산림사업 시장이 모두 정부 예산에서 이루어지면서 각종 예산 부풀리기를 통한 비자금 조성, 공무원 뇌물 등의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보면 산림조합은 막대한 이득을 보고, 산림청은 숲을 가꾼다는 미명 아래 국가 예산을 퍼부은 셈이다.  헌데 사태가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일단 드러나면 해결방안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여기에 붙어서 부당이득을 취하던 자들의 발버둥일 뿐이다. 20~30년생을 대상으로 나무 베는 나이를 최소 60~70년으로 늘려 쓸모 있는 큰 나무를 생산해야 하며, '벌목 중심'에서 '보전 중심'으로 산림 정책을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현 정부에서 계획하는 30억 그루 심기가 산림조합 돈벌이가 아닌 국민이 누리는 숲,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산림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산림 정책에서 고려할 두 가지 역사적 경험만 참고로 덧붙이고 싶다. 왕정 시대부터 국가가 보는 산림은 곧 목재와 같은 말이었다. 전함이나 궁궐 짓는 데 쓰는 목재의 생산지였다. 가축 사료로 쓰거나 지붕 이는 데 쓸 나뭇잎, 사람이나 가축의 식량이 되는 칡이나 열매, 노끈으로 쓰는 칡 줄기, 약재나 식용으로 쓰는 나무껍질이나 약초, 송진 같은 수액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근대 국가의 ‘과학적 조림’은 산림에 대한 단순화, 조작을 가속화했다. 산림의 상업적 착취를 목표로 한 다양성의 최소화였다. 그러나 ‘상업적으로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한 산림은 생물학적으로는 물론, 상업적으로도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영양 사이클이 망가진 숲의 침엽수는 20~30%의 생산 손실로 이어졌다. 그 결과를 확인하는 데는 100년이 걸렸다.(제임스 C. 스콧 저, 전상인 옮김, 《국가처럼 보기》, 에코, 2010)  다음으로 사유림 대신 공유지를 확대하는 과제이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으로 동양척식회사가 차지한 국유 농경지 면적이 13만 7천 정보였다. 동척 소유가 된 ‘미개간지’의 면적은 120만 정보였다. 농경지의 10배였다. 즉 ‘공유지로 볼 수 있는 토지’가 불과 10여 년 사이에 ‘총독부에 의해 처분 가능한 국유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당연히 이 중 대부분이 임야였다. 총독부는 공유지를 개인이 개발하여 사유하도록 조장했다. 제어할 정치세력이 없는 총독부가 주도한 공유지의 사유화였다. 이 과정은 더 연구가 필요한데,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국유림 비율이 70% 이상인 데 비해, 거꾸로 한국은 사유림이 70%인 역사적 이유이다. 방치된 사유지를 공유지로 바꾸는 것, 장기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부조리, 부패, 부정이 가려져 있으면 그런 게 자행되는 줄도 모르고, 따라서 해결할 길이 없다. 근래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민낯을 보여준다. 정치인들은 그나마 쓰던 수사학도 내 던진 지 오래되었고, 검찰과 언론은 이미 어그러진 모습을 뻔뻔하게 드러낼 대로 드러내어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한 행태를 식상하게 바라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분들은 타락이라면서 걱정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타락이 아니라 실상이 노출되는 것뿐이다.  가깝게는 LH 직원들의 투기 사건이 그렇다. 공공기관이 토지와 주택의 매매라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순간 이미 예상되었고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며칠 전 공군과 해병대에서 벌어진 성추행 사건은 어떤가. 그동안 없었던 일이겠는가. 아니다.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못했던 것이다. 최병성 목사가 제기하는 산림청과 산림조합의 짬짜미 의혹도 그 연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뭘 하는지 시민들이 나서서 들여다보고 드러내는 힘,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민본주의라고 믿는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1-06-09 | hrights | 조회: 1843 | 추천: 16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코로나 19가 퍼진 이후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안전에 대한 확신이 없어진 것이다. 어울려 살면서 안전하다고 생각해온 오랜 우리들의 습관들을 버리고 거리를 두고 있어도 쉽게 안심이 되지 않고, 잘 알던 사람도 믿기 어려워지는 등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졌다. 매일 만나는 아이들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는지조차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거리를 두고 접촉을 줄이는 것 만이 유일한 코로나19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었다.  실용음악과(고3)를 다니는 홍이(가명)가 코로나 확진자가 되었다. 대학진학을 위해 다니던 음악학원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검사를 한 결과 무증상 확진자로 확인되었고, 홍이의 확진 소식에 실용음악과 학생 모두와 실용음악과 교사들이 밀접 접촉자로 판별되어서 모두 선별진료소에서 검사를 받고 집에서 2주간의 자가격리를 했다. 또 같은 교무실을 사용한 교사들과 점심을 식당에서 같이 먹는 학생들이 선별검사를 받고서야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격리 기간이 끝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격리 기간이 끝난 학생들과 교사들은 또다시 코로나(PCR) 검사로 음성 판정을 받고서야 등교를 할 수 있었지만, 확진 학생은 검사 대신에 “격리해제자는 감염전파 우려가 없으며 PCR 음성확인서는 불필요함, 코로나19 감염 이력을 이유로 차별대우하는 경우 근로기준법상 차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위반 시 엄정대응할 것”이라는 보건소 공문만으로 등교를 했다.  의료계는 코로나가 사람 몸에 들어와 10~14일이면 전파력이 없어져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코로나19는 아직도 치료법이 연구 중인 감염병이므로 전파력이 없어진다는 것도 확신할 수 없었던 탓에 학생들과 같이 코로나(PCR) 검사로 음성 판정을 받고 등교하리라고 생각했던 담임교사는 감염의 공포, 학급 학생의 건강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보이면서 학교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교사들의 이런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홍이에게 건강하게 학교생활을 하도록 공감하고 격려해 주며 다가가고 있었다. 교사들은 코로나19의 불안한 환경에서도 아이들이 공감 능력을 배우며 발달시키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 freepik  아이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고 싸우기도 하지만 이 어려운 코로나 환경을 이겨가면서 남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고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면서 공감 능력이 더욱 발달하고 있었다.  『공감은 상대의 마음을 느끼고 그려보는 것입니다. 상대의 정서적 반응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이랬어야 해”“라고 하는 충고나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현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학원에서 배울 수 없고 데이터를 넣는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라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다음에는 따라잡기도 어렵습니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어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면서 얻게 되는 마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경험하는 기회를 더욱 가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포스트코로나, 아이들 마음부터 챙깁니다- 하지현 김영미 위원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1-06-02 | hrights | 조회: 1293 | 추천: 3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검찰개혁은 물 건너갔고 공수처는 거꾸로 칼을 들었다. 소득불평등을 해결하겠다는 약속은 사상 최대로 벌어진 자산불평등의 격차로 돌아왔다. 전 국민의 마음이 욕망과 불안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누더기인 채로, 오늘도 일하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간다. 민생과 개혁, 모두에서 실패했다. 몇 가지 공이 없지 않으나 과가 그것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 (성과를 굳이 언급하지 않는 이유다) 민주당과 진보는 샤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처지가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위기”의 “공백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고 있다. 민주당의 실패 공식  리버럴 정권의 개혁 실패 방정식에는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공식이 있다. (쁘띠부르주아 정당이라는) 계급적 한계가 철학의 빈곤과 디테일의 결핍, 그리고 자신감 부족을 낳고, 작은 비판에도 주춤거리는 원인이 된다. 부동산, 최저임금,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이 같은 경로를 밟았다. 수사-기소 분리라는 지름길을 두고 공수처 설립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검찰개혁도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는 임기 후반기가 되면 청와대와 내각을 관료로 채운다. 세 번이나 집권한 지배블록의 일부로서 기득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소심함이 과감한 개혁을 어렵게 한다. 조선일보와 국민의힘으로 대변되는 보수세력의 맹렬한 저항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일 테지만, 이는 상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히 2016 촛불 이후 이들이 역사상 가장 취약한 상태였던 점을 고려하면 주된 원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리버럴 집권 세 번째의 실패이고, 한국의 리버럴이 관료들을 장악하고 부릴 수 있을 만한 의지와 실력이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반민주당전선의 좌우연합적 성격  끼인 존재로서 리버럴은 좌우 모두로부터 욕을 먹게 돼 있다. 비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다수가 원하는 정책을 다수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수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람들이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초기에 잠깐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실패했고, 지금은 반민주당전선이 상당히 두텁게 형성돼 있다. 몇 가지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마치 노무현 정부 말기 증상을 보는 듯하다.  민주당이 여당이 되면 반민주당전선은 광범위한 좌우연합전선이 된다. 정당으로 보면 국민의힘과 정의당, 원외까지 확장하면, 정통 좌파라고 할 수 있는 노동당까지 포괄한다. 보수가 집권하면 보수 내에서 비판이 나오지 않지만, 리버럴 비판 대열에는 보수와 진보가 늘 함께한다. 이것이 민주당 지지자들이 느끼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비밀이자,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현상의 뿌리다. 특히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일부 보수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이어진다.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비롯한 진보언론에 대한 공격은 주로 이들에 의해 이뤄진다. ‘켄타우로스’ 민주당  민주당은 지배블록의 일부이지만, 지배블록의 일부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1987년 대선 때부터 지난하게 이어져 온 진보진영의 숙명 같은 난제다.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민주당은 켄타우로스(반인반마)적이다. 지배블록의 일부이면서도 서민정당을 표방하며 실제로 그런 경향을 일부 갖고 있다. 조중동과 국민의힘은 진보정당을 일부러 무시하며 민주당이 진보의 전부인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고, 민주당을 비난하여 진보를 악마화한다. 샤이 민주당과 샤이 진보가 혼용되는 현실은 이 프레임이 대중적으로 안착했다는 걸 말해준다. 민주당이 욕을 먹으면 진보가 욕을 먹는 구조다. 진보가 민주당을 비판하면 진보가 커지는 게 아니라 보수가 커진다.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 그 결과인 양당 정치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그래서 여전히 제도개선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건 비판의 내용과 방향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로남불 프레임은 악당에 유리한 게임  그런 의미에서 류호정 정의당 의원과 문정복 민주당 의원의 ‘당신 논란’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누가 먼저 반말을 했는지, 말의 맥락을 못 알아들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도자기를 들여오면서 외교행낭을 이용했다는 잘못된 팩트를 거론했다거나 개인적으로 자리에 찾아가 항의한 것도 부적절한 행위였지만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정의당이 거대 양당의 도덕성 경쟁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덕성 경쟁은 야당일 때 민주당이 쓰던 방식이다. 상대적으로 덜 기득권이어서 더 깨끗하다고 마케팅하는 방식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내로남불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노무현과 노회찬도 이 프레임의 희생양이었다. 정의당도 남의 얘기가 아니다. 류호정 의원도 수행비서 해고 논란으로 홍역을 치르지 않았나. 지난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문정복 의원(왼쪽)이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의 의사진행발언에 대해 항의하자 정의당 류호정 의원(오른쪽)이 문 의원에게 맞대응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내로남불 프레임은 도덕 기준이 높은 진보가 필패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내로남불 프레임이 특히 문제인 것은 뻔뻔한 악당들이 면죄부를 받게 돼 있기 때문이다. 악당들은 나쁜 짓을 해도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악당을 비난하며 자신은 악당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던 사람들이 조그만 잘못에도 대역죄인처럼 비난받는다. 이 과정에서 민생은 사라지고 무의미한 정쟁만 무한 생산된다. 도덕성 경쟁이 정책 경쟁의 지우개 노릇을 하는 셈이다. 도덕성 경쟁을 하지 말라는 게 도덕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도덕성을 정치적 상품으로 팔지 말라는 것이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 이후 정치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도덕성 경쟁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진보가 내놓아야 할 상품은 따로 있다. 기득권에 기반한 정당들이 낼 수 없는 진보적 정책이다. 우리가 덜 타락했다고 주장하지 말고 우리가 더 유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탈이념 시대의 진보  4·7 재보선에서 적지 않은 2030이 국민의힘을 선택했다고 해서 이들이 보수가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기존의 이념지형에서 벗어나 있다. 보수든 진보든 그건 기성세대의 잣대일 뿐이다. 젊은 세대가 진보를 기피한다면 젊은 세대가 잘못된 게 아니라 진보가 잘못된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훈장이 진보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과거에 연연하는 진보는 더이상 진보가 아니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차별받지 않고 공정한 게임의 룰에서 경쟁하며 쾌적하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인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젊은 세대만의 요구는 아니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국가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돈을 추구하는 경향은 어쩌면 당연한 생존본능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진보는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역사 경험치가 낮다고 탓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이고 스스로 미라가 되는 길이다. 지난 재보선에서 청년들에게 돈 몇 푼 더 주겠다는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의 공약은 청년들을 동냥이나 바라는 거지 취급하는 최악의 접근법이었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진보  정의당은 어떤가. 민주노동당 시절 각종 진보적 의제로 정치판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책만으로 보면 정의당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더 진보적으로 보인다. 민주당 의원들의 말에 토를 달듯 ‘빨간펜’ 선생 노릇을 한다거나 앞의 사례처럼 언쟁을 하는 경우만 눈에 띈다. 장애인, 소수자 인권 등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C)’ 투쟁은 중요한 진보적 과제이지만, 대중정당의 대표상품이 되어선 곤란하다. 피시의 전면화는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피시는 교육현장과 언론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바꿔나가야 할 문제지 대중정당이 일상적으로 수행할 정치적 과제는 아니다. 정의당이든 노동당이든 사회경제적 문제에서 민주당과 차별화하는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유능할 것 같다는 인정을 받아야 수권정당이 될 수 있다.  노회찬은 이렇게 말했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진보 자신이다. 지금 진보정당에게 부족한 것은, ‘진보’다. 부족한 진보를 훈장과 족보로 가릴 수는 없다. 세상을 진보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진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노회찬, 작심하고 말하다>) 2014년에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옳은 말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1-05-26 | hrights | 조회: 1689 | 추천: 21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가유공자  「국가보훈기본법」에서는 “일제로부터의 조국의 자주독립, 국가의 수호 또는 안전보장,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국민의 생명 또는 재산의 보호 등 공무수행”(제3조)에 공헌하고 그 과정에 희생한 이를 ‘국가유공자’로 규정해 기리고 있다. 알려진 국가유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이다.  그런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김구 못지않은 - 보기에 따라 그 이상 가는 - 역할을 하고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김원봉은 왜 여전히 유공자가 아닐까. 김원봉이라는 사람  김원봉은 이회영 형제와 이동녕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11월에 윤세주 등과 함께 급진 민족주의적 무장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에서는 일제라는 거대한 폭력 조직에 맞서 무장 항일운동을 벌였고, 1928년 10월 이후로는 일본의 축출(驅逐倭奴), 조국의 광복(光復祖國), 계급의 타파(打破階級), 토지의 균등(平均地權)를 핵심으로 하는, 급진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그 과정에 중국의 공산당은 물론 국민당 정부와도 협력했다. 의열단 지도부의 상당수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품인 황포군관학교(1924.1~1931.10) 출신이었던 바람에, 그가 국민당 정부와도 함께 했던 것은 자연스러웠다. 1932년 10월 김원봉은 의열단의 항일정신과 연계시키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중국인 민족해방 혁명가 및 조선독립을 위한 운동가를 양성했다. 이 학교가 국민당 장제스의 최종 결재를 거쳐 설립되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원봉은 국민당 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김원봉의 눈에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 비해 항일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그런 태도에 실망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더 급진적 민족해방운동을 했다.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연결시키면서, 조선공산당 운동을 지원했다. 공산당 운동이 항일 투쟁에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항일’과 ‘독립’을 지향했다.  이를 위해 상대적으로 우파민족주의자였던 김구와도 가까웠다. 1939년 5월에는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확대하기 위해 김구와의 연명으로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원봉의 공산주의적 태도는 항일운동과 조선 광복의 수단에 가까웠고, 항일과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적절히 타협할 수 있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1)  무엇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한 광복군의 부사령(1942.12.5~),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군무부장(1944.4.22~)을 지냈다. 임시정부 군사방면의 최고 책임자였다. 항일운동에 그만큼 한결같이 열렬한 태도를 견지했던 이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일관되게 무장 투쟁을 해온 그의 눈에 임시정부는 다소 뜨뜻미지근해 보이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항일을 위한 구체적 실천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우파에 가까웠던 김구와 항일운동 방법론상의 차이로 갈등하기도 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 및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더 친밀했던 우파민족주의 세력(가령 한국독립당 계열)들과 마찰을 빚었다. 조국의 광복,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열망이 너무 명확하고 실천이 늘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kbs 인물현대사 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이  해방 이후 김원봉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미 군정의 요구 때문에, 김구가 그랬듯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여운형, 박현영 등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공동의장 자격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이후 임정을 매개로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좌·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연대도 깨져 갔다.  친미적 이승만이 정권을 잡은 해방 정국에서 그는 갖가지 수난을 당했다. 1947년 미 군정 당시 수도경찰청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뺨을 맞기도 하고 장택상 청장에게 끌려가 수모를 겪었다. 중국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조국에서 겪으면서 김원봉은 서러움에 3일 밤낮을 울었다고 한다.  미 군정이 민전 시민대회를 금지시키고 민전을 포함한 좌파 단체를 폐쇄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낀 김원봉은 민전 산하단체 대표 80여 명과 함께 1948년 4월 초순 월북했다. 1948년 4월 14일 개최되는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조선의용대 동지였던 연안파 인물들이 건재하고 있는 북한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김원봉은 초기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결국 북에서도 밀려났다. 남쪽 출신이라는 것이 그의 최대 약점이었다. 통일을 명분으로 제국주의 수정주의자들과 손잡고 한국의 중립화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국제간첩으로 몰려 1958년 무렵 김일성 정권으로부터 숙청당했다. 평생 죽음을 무릅쓰고 민족의 이름으로 조국의 광복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그렇게 제발로 찾아온 남과 북 모두에서 배반자 낙인이 찍혔고, 잊혀졌다. 서로 다른 공산주의  국가유공자의 근간인 “일제로부터의 조국의 자주독립”에 김원봉 이상으로 공헌한 이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초기 북한의 국가 건설 과정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때 한 가지 구분해야 할 것은 김원봉이 활동하던 당시의 공산주의는 6.25 전쟁과 전후 냉전기 등을 거치며 이념 갈등이 체화된 이후의 공산주의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김원봉의 공산주의적 사고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수단에 가까웠지, 그 자체가 지상 목적은 아니었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의 양대 지도자인 김구와 공생했던 것이나, 중국 공산당에 대립했던 국민당과도 함께 했던 것도 그 증거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 책임자를 지낸 것도 그 결정적 증거이다.  김구가 우파민족주의자라면, 김원봉은 좌파민족주의자였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이때의 좌·우에는 독립을 위한 방법론적 차이는 있지만, 독립을 위한 헌신의 정도에서 차이나 차별을 두기 곤란하다. 김구가 대표적인 독립유공자이듯이, 김원봉이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21세기의 눈으로 보는 공산주의와 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의 눈으로 보는 공산주의는 다르다. 20세기 전반은 중국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합작하며 항일운동을 같이하던 시절 아니었던가. 심지어 중국인 쑨원(손문)과 장제스(장개석)조차 대한민국 1급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있지 않던가. ‘자유중국’을 버리고 ‘중공’과 수교한 나라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임시정부 군조직의 수장이었던 김원봉을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남측 출신이라는 이유로 북에서도 버림받았던 김원봉을 품지 못하면서 어찌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말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와 지금의 공산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설령 지금의 공산주의라고 해도,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어디 있기나 하던가. 더욱이 한국 정부가 ‘자유민주국’ 대만과 단교하고 ‘공산국’ 중국과 수교한 뒤 비할 데 없을 경제 교류를 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부 연구자들의 책상 위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그의 뜨겁고 지도적인 독립투쟁사를, 그의 공과를 포함하여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1)  이정식·한홍구 엮음, 『항전별곡: 조선독립동맹자료1』(거름, 1986), 135쪽; 한상도,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역정과 삶』(역사공간, 2006), 70-84쪽 참조.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1-05-21 | hrights | 조회: 1687 | 추천: 1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랫동안-거의 35년 가까이- 잊고 지냈던 ⌈나와 너⌋를 떠올리게 된 것은 15개월 이상 지속된 ‘코로나19’ 사태 때문이었다. 철부지였던 시절 연애편지 쓰려면 이만한 책이 없다는 선배의 꼬임으로 산 그 책은 물리적 수명을 다하고 버려졌지만, 책이 전해준 실존적 메시지는 아직도 기억의 인화지에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종교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나와 너⌋에서 ‘나’ 그 자체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나와 너(Ich und Du)’ 사이의 나> 아니면 <‘나와 그것(Ich und Es)’ 사이의 ‘나’>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가 참다운 삶을 살려면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언제든지 대상이 대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도구적인 관계인 반면에, 나와 너의 관계는 무엇과도 바꿔질 수 없는 유일한 '나'와 대체 불가능한 ‘너’가 깊은 신뢰 속에서 서로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민낯으로 사람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았던 시절의 나는, 1)인간은 나 홀로 존재하거나 자족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이며, 2)그 관계가 <나와 ‘그것=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대=사람’의 관계>가 될 때, ‘나-너’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로 된다는 부버의 두 전언 가운데 후자에 더 매료되었던 것 같다. 사랑할 때, 나는 너로 인해서 나가 되고, 너 안에서만 나가 된다. 삶이란 너와 나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그 만남이 사랑의 만남일 때 자신이 사람답다고 실감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마스크 없이 사람을 만나던 시절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지금의 나는 관계 속에서만 참된 자아와 가치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앞의 전언에 더 끌린다.  만남 자체가 제한되면서 관계 지향적인 인간의 존재 조건이 위축되면, 인간은 이런저런 잡념에 빠지기 쉽다. 신독(愼獨)이란 나에게는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래서 객관적 현실에서 관계 맺음이 어렵다면 관념적 현실에서라도 ‘사람 관계’를 떠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나는 그 욕망에 졌고, 아래의 사념은 그 패배의 흔적이다. 부모와의 만남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이치(理致)라는 게 있는 것만 같다. 향유하고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잃어버린 후에 절감하는 경우가 잦아진다. 부모 중 한 분이 최근에 식사량이 줄면서 몸무게가 부쩍 줄었다. 몸에서 근육이 빠져나가면서 디스크와 관절염이 심해져 걸음걸이조차 힘들어졌다. 매주 찾아뵐 때마다 기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만큼 그분의 은혜가, 아니 존재 자체가 얼마나 중(重)한지를 절감한다. 나는 인간이 벌이는 모든 일은 헛되고 세상은 결국 망할 것이라는 냉소적 주장을 믿지 않는다. 순진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근거는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헌신하며,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타이르고, 자신의 고통보다 자식의 편안을 늘 앞세우는 부모의 존재다. 그분들은 사람이 학교에서 자연의 물리나 역사의 이치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해서 인생에서 세월의 속절이나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인들이다. 부모라는 존재, 그들과의 만남은 낙관적 역사의식의 근원이지 싶다. 스승과의 만남  6개월 만에 죽마고우 둘과 스승을 모시고 막국수와 감자부침으로 점심을 했다. 중학생 때부터 뵌, 은사(恩師)라는 말에 실감을 불어 넣어준 스승과의 그 자리에서 나는 마음 놓고 편안할 수 있었다. 모든 사회적 타이틀을 떼어내고, 개인적으로 방심(放心)해도 무방한 사람들과 함께할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는 힘이다. 경제적 타산성이나 공리주의적 유용성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의미의 무용한 관계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청춘과의 만남  ‘코로나19’ 사태에도 어쨌든 학교 강의는 진행되고 있다. 온라인으로든 오프라인으로든 청춘들을 만나는 일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친구는 이런 감각이야말로 늙었다는 증거라며 나를 타박했지만, 선생-학생이라는 일종의 위계관계를 전제로 한 만남일지라도 나에게 청춘을 만나는 일은 늘 흥미진진한 일대 사건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민태원, 「청춘예찬」)이기에 청춘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밝고 환한 빛이 난다. 그들을 보기만 해도, 시절은 엄혹했고 마음은 싸움에서 빗겨 있다는 부채 의식에 사로잡혀 한없이 어둡고 무거웠던 나의 이십 대가 뒤늦게나마 구원을 받은 느낌이 든다. 사진 출처 - freepik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이상과 희망을 추구하는 ‘속성’이라는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전언에 마음이 혹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의 나이 때에는 몰랐고, 그들의 처지였을 때는 깨우치지 못했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려는 이상과 희망>을 견지하는 늠름한 후속세대들을 만나는 일은 늘 설렘을 자아낸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절에도 마음이 따뜻하면 몸은 견딜 수 있다는 세속적 트임 혹은 자기-주술적 주문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서둘러 약삭빠르게 사는 일에 서투른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 깨우침이라는 게 생기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일상적 만남은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바로 거기서 나온다는 걸 이제야 절감한다. ‘바이러스와의 관계’ 말고 ‘사람과의 관계’가 일상인 때가 지금 더욱 그리운 이유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21-05-12 | hrights | 조회: 1493 | 추천: 6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리나라 5000만 인구 가운데 2600만이 서울과 인천, 그리고 경기도에 산다. 우리나라 전체 면적 중 고작 11.8%에 인구 절반이 모여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전, 대구, 울산, 부산, 광주 등 수도권 외 지역의 대도시(광역시) 인구까지 고려하면 흔히 도시 사람들이 ‘시골’이라고 부르는 지역 소도시의 인구는 매우 적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그리고 세종시와 제주도의 인구를 합쳐도 16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토의 대부분인 85% 면적에, 수도권과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한 30%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인구 10만 명이 넘지 않는 지자체가 87곳에 달했다.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 따르면 105곳이 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됐다. 228개 지자체 중 절반 수준이 앞으로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수도권 인구 밀집과 지역의 인구감소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진부한 이야기가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부청사 및 공공기관·공기업 등이 지방 이전을 추진했지만 그 효과는 거의 미미하다. 2019년과 2020년 사이 단 한 해 동안 소멸위험 지역은 8곳이나 늘었다. 2019년 전국 읍면동 소멸위험지수 지도 사진 출처- 통계청  인구가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발생하는 여러 사회문제만큼이나 인구가 크게 줄면서 나타나는 지역의 문제도 심각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지역의 인구가 줄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재정자립도가 낮아지는 등 경제적 측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우려하지만, 그것만이 문제라면 인근 지역과 통폐합을 통해 해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지역의 인구가 줄고 소멸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지역이 소멸된다는 것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역사와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고유한 문화 공동체가 없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70년대부터 이촌향도 현상이 가속화되고 사회의 문제로 깊어지기까지 국가는 정책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문제를 방임해왔다. 몇몇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며 아파트를 건립하고, 일자리를 만들고, 학교와 병원을 유치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각종 기관과 시설이 도시에 모였다.  반면 지역은 빈집이 늘고, 아이들은 줄면서 학교가 폐교됐다. 병원조차 수익성이 없다며 입주를 거부했다. 소방인력과 경찰인력도 줄어 여러 개의 읍·면을 하나의 119안전센터나 파출소가 감당하게 됐다. 지역주민들은 서울과 대도시에 살지 않고 지역에 남아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의료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도시민들에 비해 신속하게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역주민들은 대도시로부터 밀려난 열패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소외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결코 지을 수 없는 대형 석탄화력발전소나 산업폐기물처리장 등 환경저해 시설이 밀려 들어와 환경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한다.  심지어 당진화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송전하는 과정에서 당진지역 노선은 대부분 고압송전탑을 건설해 가공선로로 지나지만, 바다를 건너 경기도 평택부터는 땅속으로 연결하는 지중화를 한다고 하니 지역적 차별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서울로 대학을 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지역은 떠나야 할 곳으로 인식시키면서 어떻게 지역의 인구감소를 막고 지방소멸을 해결하겠다는 것인가. 정치권과 언론, 학계 등에서 지역의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대해 수도 없이 거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지역을 떠나는 이유다. 지역을 소외시키고 지역주민들을 외면하면서 어떻게 지방소멸을 막을 수 있겠는가.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1-04-28 | hrights | 조회: 1867 | 추천: 7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버지는 황해도 사람, 어머니는 경기도 사람이지만 저는 서울 사람입니다. 비록 변두리를 전전하면서 생활해왔다고 해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행정구역상 서울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문득 ‘서울 놈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라고 한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1. 등신 같은 서울 놈  거의 30년 전, 제가 따르던 선생님이 늦은 나이에 수중 잠수의 매력에 빠져 저를 바다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해 여름, 경북의 수중 잠수 포인트인 ㅇㅇ군 바닷가에서 일주일 가까이 지낼 때였습니다. 선생님이 가자고 해서 따라는 갔지만 물을 무서워하는 저는 항상 물 밖에만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일행들이 바다 속에서 잠수를 하는 동안 저는 박찬호 선수의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그 지역 수중 잠수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수와 일행이라는 이유만으로 저 역시 따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일정이 마무리되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석별의 술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20명 가까운 사내들의 술잔을 부딪는 소리가 잦아질수록 분위기는 고조되었습니다.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서로의 무용담을 과시하느라 왁자지껄했습니다. 지역 잠수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는지, 서울과 비교해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하는 자랑에 열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다소 위험할 정도의 격한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다음에 서울에서 한번 뭉쳐 보자”는 말로 자리가 정리되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술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누군가 제 팔을 잡았습니다. 지역 잠수사들의 막내쯤 되는 20대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느닷없이 제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서울에 계신 각하가 합천에 내려와 구속될 때까지 뭐 했십니까?”  당시 구속된 각하는 전두환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정색하며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서울 놈들은 다 등신들 아입니까?” 사진 출처 - freepik #2. 답답한 서울 놈  얼마 전에 친구 H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와 H는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저는 서울 시민이고, 그는 oo도민입니다. 그와 30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왔습니다. 각자 결혼을 하고 생활 반경이 달라지면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짬짬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주변에 경조사가 있으면 만나곤 했습니다.  겉으로만 요란하고 속은 물렁물렁한 저와는 반대로, H는 원만한 성격에 말수는 적지만 속은 아주 단단한 사람입니다. 두어 달 만에, 서울시장 보궐선거 바로 전날 전화를 걸어온 그의 첫마디는 아주 일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어때?”  “그렇지, 뭐...”  이후에 그는 주변 친구들의 안부나 돌아가신 은사님들과의 추억담 같은 이야기들을 한참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잘랐습니다.  “안 하려고 했는데, 아내한테 이끌려 사전투표했어.”  열렬한 문재인 정부 지지자인 그는 그제서야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서울은 어떨 것 같아?”  “나야 잘 모르지...”  무덤덤한 제 대답에, 그는 답답하고 초조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 이 친구, 서울 사람이...”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1-04-21 | hrights | 조회: 1250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