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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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랫동안 인문학 분야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다가 십여 년 전부터 사회과학 언저리에 기웃거려왔다. 관련 공부도 좀 하고 강의도 해왔다. 특히 평화학에 관심을 가진 이후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이른바 주류 사회과학의 맛을 살짝 보았다. 그중에서 좀 더 끌리던 학문은 사회학이었다. 정치학, 경제학, 법학 같은 학문은 이름만 들어도 무엇을 다루는지 대강 와 닿았는데, 사회학은 이름만으로는 알 듯 말 듯 했다. 정치의 작동방식이나 행위 주체는 비교적 분명했고, 경제 같은 분야도 그런 편이었다. 그런데 사회학은 행위 주체를 딱히 규정하기 모호했고, 작동의 동력도 잘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궁금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좀 더 알고 싶던 부분이 나름대로는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원천적 욕망이 복잡하게 표출되는 장소가 사회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부터였다.  국어사전에서는 사회를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이라고 간단히 규정하지만, 그런 사회라면 애당초 고민의 대상조차 못되었을 것이다.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등 넓은 의미에서 공동생활의 형태로 드러나는 인간 집단’이라고 좀 더 풀기도 하지만, 이런 정도의 규정은 ‘사회’라기보다는 소박한 의미의 ‘공동체’, 그것도 건조한 형식적 정리에 가깝다.  사회는 겉으로는 알 수 없다. 소박하거나 간단하지도 않다. 칸트는 사회(Gesellschaft)를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자들이 외부적 자유의 원리에 기초해 인격적 영향을 주고받는 공동체(Gemeinschaft)라고 해설한 바 있다. 사회에는 그 구성원들이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상위의 장치인 ‘법’도 있다고 했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적절히 통제하는 법이 작동하고 있기에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무덤덤한 형식적 정리이다. 현실에서의 사회는 법적 정신이나 원칙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자유로운 인격들이 서로 인격적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인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은 훨씬 복잡하고 불편하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그 영향이나 효력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긍정적이었다면 굳이 사회의 본질을 살펴보려 애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현실은 교묘하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집단적 질서 안에 인격을 속박시킨다. 자유로운 주고받기는커녕 욕망이라는 발톱을 감춘 공격 행위일 때가 많다. 서로가 서로에게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그러다 보니,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 긴장과 갈등은 계속된다. 몸과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현실에서의 사회는 철학자의 사전적 정의와는 달리 자유조차 상위의 통제장치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데 교묘하게 사용한다. 사회에는 법적 견제 장치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더 심층적 동력이 작동하고 있다.  제일 강력한 동력은 아무래도 자기 생존과 확장을 위한 욕망일 것이다. 자유로운 경쟁적 행위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성과 지향의 신자유주의 체제일수록 욕망은 더 노골화한다. 이런 자기 확대를 위한 욕망들이 얽히고설켜 집단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신자유주의가 성과의 축적을 찬양하는 경제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성과를 산출하기 위한 욕망은 물건이든 돈이든 일종의 ‘자본’을 확장시키는 근본 동력이 된다. 이렇게 사회의 속살을 찾다 보다 보면 경제의 문제와 연결된다. 경제란 무엇이던가.  경제에 해당하는 영어 ‘에코노미(economy)’의 원뜻은 ‘집(eco)의 규칙(nom)’이다. 서로 교류하며 물건이나 화폐가 오가는 집안의 질서가 시원적 의미의 경제다. 그러다 개인이나 집안끼리 재화가 오가는 과정에 국가가 개입하면서 그 영역이 대폭 확장되었다. 그 확장된 영역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경제의 토대이자 영역이다. 이 경제의 덩치가 급속히 커지면서, 정치는 경제를 선도하기보다는 경제가 더 확장되도록 뒷받침하는 수단이 되었다. 사적 혹은 가정적 영역이었던 ‘에코노미들’이 중층적으로 뒤섞여 다차원적으로 뻗어가고 있는 유기체적 집단이 오늘의 ‘사회’인 것이다. 그 어떤 권력도 관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는 자기 생명력을 갖기 시작했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활용하며 사회에게 더 강하고 복잡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사회는 그렇게 끝없는 자기 변화와 확장을 계속한다. 그 근간은 경제이며, 전례 없던 새로운 농도의 경제 현상이 오늘날 사회라는 난제로 등장한 것이다. 사회는 구성원들의 욕망들이 얽히고설켜 자기 확장 중이고, 그 사회가 다시 욕망을 추동해 최후의 힘마저 내놓으라 닦달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자기 생명력을 강화해가고, 그만큼 인간은 탈진되어간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이때 인간이 100조 개 세포들의 집합체이면서도 그 세포들을 다시 관찰할 수 있는 자기 초월과 자기 대상화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의 근거다. 이것은 사회도 개인 욕망들의 합집합에 머물지 않고 거대한 욕망 덩어리를 돌파할 수 있는 심층의 영역이 있다는 뜻이다. 개인이 개인을 대상화하고 개인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스스로를 개조하듯이, 사회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이런 가능성을 보지 못하면 아픔과 상처는 더 커지기만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희망을 놓치지 않아야 절망을 극복하게 되듯이, 사회적 자기 치유의 가능성을 견지해야 사회도 구성원의 통제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고서 어찌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하고, 사회를 개조하겠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사회의 아픔에는 반드시 치유의 길이 있다. 어쩌면 한계에 도달한 사회가 파열음을 내며 스스로 길을 내보여줄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학이 무엇인지 모호한 채 있다가 사회학도 결국 인간을 치유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나로서도 다행이었다. 최근에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라는 졸저를 낸 것도 이런 가능성을 일부나마 드러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나마 사회를 더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여전히 희망의 영역이지만, 인간이 사회에 종속되지 않고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것도 인간이 인간을 살리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면 좋겠다. 그런 희망으로 졸저의 서문에 있는 내용을 일부 고쳐 써보았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0-12-09 | hrights | 조회: 1170 | 추천: 8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해 달라는 카페 주인의 요구에 난동을 피운 고객이 당진시 간부공무원으로 알려지면서 크게 이슈가 됐다. 전국적으로 비난이 쏟아지자 당진시는 해당 공무원에 대한 직위를 해제했고, 행정안전부의 감찰이 시작됐다.  이른바 ‘턱스크’ 논란을 처음으로 보도한 <YTN>을 비롯해 대부분의 언론이 이 사안을 다루며 해당 공무원의 신원을 익명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당진시대>는 편집국 논의 끝에 실명으로 보도했다. 지역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부서장급 간부공무원은 지역사회에서 그만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도가 나간 뒤 공무원노조에서 신문사를 찾아와 이번 사안에 대해 항의했다. 실과명까지만 나가도 될 텐데 굳이 이름을 거론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당진시대의 실명보도 때문에(?) 가족들까지 고통 받고 있다고 호소하며 실명보도를 철회해 달라고 요구했다. 더불어 이번 사태 뿐만 아니라 그동안 당진시대에서 여러 지역 현안에 대해 보도하면서 공무원들의 이름이 기사에 들어가 불편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사진 출처 - freepik  익명으로 보도할 것인지, 실명으로 보도할 것인지는 각 언론사에서 판단할 문제이지만, 공익제보자나 취재원의 신분이 드러나 불이익이 예상될 때를 제외하고는 익명보도는 최소화돼야 한다. 뉴스에 대한 신뢰를 좌우하기 때문에 취재원과 정보 출처를 뉴스에서 정확하게 제공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원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에서 익명보도가 많은 건 사실이다. 지난해 4월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신문과 방송>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KBS 9시 뉴스와 영국 BBC 10시 뉴스를 비교한 결과 KBS의 익명처리 비중은 28%였던 반면, BBC는 6%에 불과했다고 한다. 익명 인터뷰는 미성년자 또는 범죄 관련 보도에서 인용되는 일반시민과 범죄관계자만 해당됐고, 특히 정치인, 기업인, 공무원 등 유력자는 모두 실명으로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좇으면서도 그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짊어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이번 사태를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 공무원이 되고자 하면서 공무원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사회적 책임을 모르고 있고, 연말연시만 되면 승진을 두고 인사에 촉각을 기울이면서 자신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관심이 없어보였다.  신문사를 찾아온 공무원노조가 “지자체 간부공무원(5급 사무관)이라고 해봐야 정부 부처에서는 주무관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공무원의 책임을 이야기 하는 기자에게 “일개 직장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실망감을 넘어 좌절감을 느꼈다. 특정한 상황과 말 한마디로 일반화할 수는 없으므로 이 또한 모든 공무원의 생각이라고 보기 어렵겠지만 이번 ‘턱스크’ 논란도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 책임에 대해 간과하고 있던 공무원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코로나19 사태와 공무원의 난동이라는 단순한 소재를 넘어 이번 사태가 내포하는 여러 사회적 의미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익명보도와 실명보도를 두고 언론이 추구해야 하는 저널리즘의 원칙과 가치에 대해서도 말이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0-12-02 | hrights | 조회: 1016 | 추천: 1
임아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떤 기억들은 몸에 새겨진 것처럼 생생하다.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으로 온 뒤 맞은 첫 평일이었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기는 신생아실에 가 있고 혼자 방에 우두커니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울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산후우울증이었다.  아기를 낳은 직후의 내 상태는 두려움과 외로움의 교차 상태였다. 아기를 낳은 이전의 나와 너무 멀어지면 어떡하느냐는 두려움과 아기를 옆에 두고서도 자꾸 외로워졌던 마음. <산후조리원>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그래서 보고 싶지가 않았다. 우울하고 두렵고 외로웠던 그때의 감정을 되새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기묘해서 관련 영상을 추천 영상으로 띄워주고 말았다. 귀여운 신생아의 얼굴을 썸네일로 만든 영상을 지나치지 못했다.  그러나 십여 분의 영상을 끝까지 보게 된 것은 아마 산모의 표정 때문이었을 거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과 묘한 두려움이 섞인 표정. 그녀는 말했다.  “우리만 낯설고도 이상한 세계에 남겨져버렸다.”  자주 그렇게 생각했다. 이 이상한 세계는 어디인가. 아기가 내 품에 들려져 낯선 섬에 놓여진 기분. 너무나도 예쁘게 생긴 작은 아기가 내 인생을 집어삼킬 것 같은 두려움. 그 두려움의 정체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었다.  “원래 엄마는 그러는 거예요.”  처음 모유수유를 하면 피가 난다. 갓 태어난 아기가 빠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아기는 살기 위해서 빨고 엄마는 아기를 먹이지 않으면 큰일날까봐 고통을 참는다. 그때의 내게 간호사 선생님은 말했다. 원래 엄마는 그런 것이라고. 평소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반문했겠지만 하지 못했다. 엄마라면 그래야 하는 거라고 나도 배웠으니까. 사진 출처 - tvn  엄마가 된 이후로 “엄마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라는 말들과 싸워왔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잘 키우는 것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별다른 대꾸를 찾지 못할 때 깨달았다. 내가 태어난 80년대 이후의 여성들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배웠지만 아기를 안고 어디든 가라는 뜻이었다는 것을. 아기를 안고는 뛸 수도 없는데.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몸에 대해서 국가가 처벌할 수 있다 말하는 2020년대, 조금쯤 진보한 줄 알았는데 믿을 수가 없다.  신생아를 키우던 시절, 너무 많이 우는 아이 앞에서 같이 울고 싶어질 때 친정엄마는 말씀하셨다. “너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정말 잠 좀 자고 싶었는데...” 이 사적인 이야기들은 너무 사적이어서 사적인 관계들 안에서만 공유된다. 엄마를 사적 존재로 규정하고 엄마의 인내와 희생을 추앙하는 세상의 모순.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엄마가 된 이후의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취감을 느낄 때는 언제냐고. 생뚱맞게도 ‘시민’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제가 일해서 제가 번 돈으로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게 소중한 것 같아요.” 모성의 신화로 거짓 추앙받지 않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싶었다. 사적 존재가 되느라 공적 역할을 빼앗기지 않는 평범한 시민. 어쩌면 여전히 우리는 엄마를 시민으로 대하지 않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그 사적 이야기들은 공적으로 유통되어야 한다. 이전의 논리를 깨는 방식으로. 그러다 모유수유를 하지 못해 쩔쩔매는 드라마 주인공 산모의 생생한 묘사에서 웃어버렸다. 아이를 낳고 모유수유를 시도해본 여성들은 알 것이다. 그동안 매체를 통해 묘사해온 수유 장면이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햇빛이 내리쬐는 방에서 아름다운 산모가 평화로이 젖을 물린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수유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하면 너무 서툴고 어렵다는 것을, 다른 여느 일처럼 고통을 먹잇감삼아 훈련된다는 것을 말이다. 드라마 제목부터 신박하다. ‘산후조리원’이라니. 이 드라마를 통해 대중매체에서 출산과 모유수유의 신화가 얼마나 허구인지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 한 발 나아간 점일 것이다.  여성 기자들이 늘어나면서 여성 기자의 관점으로 쓰는 기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현장에서는 왜 여성들은 페미니즘 기사를 주로 쓰느냐는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런 질문을 하고 싶다면 돌아보라. 여성의 관점에서 세상의 일이 얼마나 발화되는지를.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 기존의 신화를 깨는 방식으로. 임아영 위원은 현재 경향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0-11-25 | hrights | 조회: 911 | 추천: 5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4월 치러질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공천하기 위해 귀책사유가 있는 보궐선거에는 후보를 내지 않기로 한 당헌 조항을 개정하기로 했다. (중략)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2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당헌에 따르면 두 곳의 보궐선거에 민주당은 후보를 내기 어렵지만, 후보를 내지 않는 것만이 책임 있는 선택이 아니며, 공천을 통해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게 책임 있는 도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후략) - <당헌 고쳐 박원순·오거돈 후임 낸다는 민주당>, 한겨레, 2020. 10. 29. 사진 출처 - 한겨레  20대 중반에 잠깐 건설현장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건축목수의 일을 보조하는 잡부로 일을 시작했지만 이곳저곳 현장을 오가다가 나중에는 미장 조공으로 일했습니다. 조공이라고 해봤자 미장일에 필요한 사모래를 물에 개어 작업장에 나르는 일, 일을 마치고 장비들을 정리하는 일 정도였습니다.  어차피 몸에 익힌 기술이 없으니 제가 어떤 분야의 현장 일을 하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미장 일 쪽으로 기운 것은 당시 현장에 있던 미장공의 묘한 매력 때문이었습니다.  미장공(다음부터는 영학이 형이라고 하겠습니다)은 한마디로 깔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소 내성적인 성격에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현장에서 오직 그날 자신이 할 일만 마치면 간단한 저녁자리를 끝으로 조용히 귀가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경험해온 건설 현장에서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늘 무덤덤한 표정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 그가 일하는 모습은 한결같았습니다.  제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도 그는 그저 피식 웃기만 했습니다. 동료들이 가끔 짓궂은 농담을 던질 때도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만 지을 뿐 크게 웃거나, 대거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저 무심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와 나이 차가 네 살 정도였으니 저는 어렵지 않게 그를 형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연립주택 공사현장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날 작업이 끝나고 타일 쪽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술을 한잔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끝난 현장 구석에서 타일공들이 사온 김치전과 막걸리로 조촐한 술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으나 역시 그는 별로 말이 없고 수다스러운 저와 타일 쪽 사람들이 주로 웃고 떠들기만 했습니다. 간단히 한잔하자던 술자리였지만 ‘한 잔만 더’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타일공이 영학이 형에게 물었습니다.  “그쪽 일하는 거 보니까 돈 좀 모았을 것 같은데 얼마나 모았습니까?”  누가 보아도 그저 친해져 보려는 타일공의 별 의미 없는 상투적인 말에 그때까지 그저 조용히 술잔을 비우며 슬쩍 웃기만 하던 영학이 형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타일공에게 삿대질을 하고 온갖 욕설을 퍼붓고서는 술판을 발로 걷어차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말에 갑자기 돌변한 영학이 형에게 제가 정말 놀란 것은 그날이 아니었습니다.  다음날, 영학이 형은 평소와 같았습니다. 그저 예의 그 무덤덤한 표정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일만 했습니다. 그가 아무 일 없다는 듯 할 일만 계속하고 있으니 답답해진 제가 물었습니다.  “형, 어제 일 기억해?”  “응.”  그는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을 계속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기대한 것은 술을 많이 마셔서 실수했다거나, 그때 왜 화가 났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학이 형은 ‘응’이라는 한마디 외에는 아무 말 없이 하던 일만 계속했습니다. 답답해진 저는 조금 화가 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제 그렇게 하고 간 거 쪽팔리지 않아?”  그 말에 영학이 형은 하던 일을 멈추고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역시 무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랬냐? 술이 그랬지.”  그러고는 별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잠시 멈췄던 일을 계속 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 흐트러짐 없는 그 자세였습니다.  내년 보궐선거 기사를 보다가 왜 영학이 형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국에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그때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저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 제 탓입니까? 제가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건 수도권 코로나-19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 다 그렇지요. 부끄러움이라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0-11-18 | hrights | 조회: 912 | 추천: 3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51초에 인구 1명씩, 1년에 60만명이 태어나는 대한민국은 어떤 느낌일까. 연간 신생아가 30만명 밑으로 떨어진 요즘에는 ‘60만명이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반응도 예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1983년 대한민국 위정자들은 ‘큰일이다. 둘도 많으니 하나만 낳자고 하자’는 반응을 보였다. 30여년전 대한민국은 그만큼이나 2020년과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흔히 1970~80년대 가족계획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정책 가운데 하나로 기억한다. 사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와 함께 국가 차원에서 추진한 저출산 시책은 너무 큰 성공을 거두긴 했다. 하지만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진게 오로지 가족계획 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 출산율 추이를 보면 사실 가족계획을 시작하기 전부터 출산율이 줄어들고 있었다. 의무교육 확대와 맞물린 교육열,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출산율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1970년대는 괜찮다. 진짜 문제는 1980년대였다. 이미 1980년대가 되면 출산율 하락은 너무나 명백하게 급격해지고 있었다. 사실 이 즈음해선 가족계획을 폐기하고 적절한 출산율 유도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어야 했다. 하지만 ‘경로의존성’이란 언제나 무섭기만 하다. 당시 정부는 ‘둘도 많다, 하나만 낳자’며 가족계획 고삐를 더 죄었다. 정부가 저출산 대책을 세우는 2005년이면 이미 한국은 학자들이 인구감소를 걱정하는 수준이 돼 버렸다.  옛 고사에 이런 게 있다. 신통하다고 소문난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의사는 자신이, 모두 의사인 세 형제 가운데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말인즉슨, 큰 형은 사람이 아프기도 전에 미리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처방을 해주고, 둘째 형은 초기에 완치시키는 반면 막내인 자신은 병이 한참 진행된 뒤에나 겨우 치료한다는 것.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큰 형과 둘째 형이 훌륭한 의사라는 것을 깨닫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의사 형제들 얘기를 정부 정책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서둘러서 하면 졸속행정이요, 신중하게 하면 늦장행정이라고 욕먹는 게 일상다반사이긴 하지만 외국 가본 사람이라면 한국 정부가 얼마나 일을 잘하고 한국 공무원들이 얼마나 친절한지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곤 한다. 확실히 한국 정부는 일은 잘한다. 하지만 상황에 대응하고 선두주자를 추격하고 앞선 제도를 도입하는 건 잘하는 반면, 미래를 대비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면은 확실히 약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초기에 소득주도성장을 외치고 나중엔 혁신성장을 외치더니 요즘은 한국판 뉴딜을 강조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이후 모든 정부가 외치는 뉴(NEW)딜이라 새로운 느낌은 하나도 없고, 어차피 하던 갖가지 개발사업에 이름표만 거창하게 붙여서 정이 안 간다. 김영삼 정부 ‘세계화’, 김대중 정부 ‘벤처기업’, 노무현 정부 ‘일자리’, 이명박 정부 ‘녹색’, 박근혜 정부 ‘정부3.0’ 등 정부가 내세우는 시책에 따라 호박에 줄 긋는 행태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그런 와중에도 봐줄만한 건 지역균형뉴딜을 활용해 광역경제권 구상이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으로 몇해 전부터 주창하면서 조금씩 소문이 난 이 구상은 지역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절박함을 반영할 뿐 아니라 지자체 차원에서 제기하는 의제가 국가의제로 확산된다는 점에서도 기존의 지역개발구상과는 결을 달리한다. 물론 아직까지 국가전략 차원으로 확산된 건 아니지만 2022년 대선-지방선거를 앞두고 상당한 파급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논의의 밑바탕에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마당에 인구감소로 지역소멸까지 걱정할 정도로 위기에 몰려 있다는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권역별로 ‘규모의 경제’를 만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행정구역과 경제권을 통합하자는 논의로 분출하는 셈이다. 전국에서 수도권 면적은 11.8%에 불과하지만 지난해 말 기준 수도권 인구 비중이 50%를 넘어섰다. 청년취업자와 사업체 모두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있다. 100억원 이상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161개 가운데 149개(92.5%)가 수도권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 출처 - KBS  권역별 메가시티 구상은 작은 단위로 쪼개진 행정구역을 뛰어넘어 규모를 키우자는 데 초점을 맞춘다. 가령 부산·울산·경남 800만 인구를 뭉쳐 주민센터 등 행정체계는 물론 대중교통망과 교육시스템 등도 인구감소에 맞게 효율화하고, 산업정책도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다. 한 광역지자체 기획조정실장은 “어떤 면에선 구조조정 대상이 먼저 구조조정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로 이해해 달라”면서 “중앙정부 지원만 바라보며 시․도간에 싸워서는 우리의 미래가 없지 않겠느냐”고 표현하기도 했다.  행정구역 통․폐합은 사실 오랫동안 정부 차원에서 논의했던 주제다. 하지만 실제로는 1995년 지방자치선거 직전 도농통합을 했던 것을 빼고는 지지부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시도했지만 2010년 경남 창원시, 2014년 충북 청주시 등을 빼고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명박은 미워도, 행정구역 통합 구상 자체는 올바른 방향이었다(물론 구체적인 추진과정은 엉망진창이었다).  메가시티와 행정구역 개편 논의는 사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부 교수가 ‘지방도시 살생부’라는 책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구상이다. 그는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인한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초광역권을 중심으로 한 균형발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수도권으로 기울어진 국토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수도권과 ‘맞짱’을 뜰 만한 지방 대도시들을 키워야 한다”면서 “17개 광역지자체를 7개 초광역 지자체로 통합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 중심에 인구를 모으는 ‘압축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0-11-11 | hrights | 조회: 907 | 추천: 5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언론보도에 대해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는 방안이 논란이다. 그동안 주가조작이나 허위공시 같은 증권관련 소송에 적용되던 집단소송제를 모든 산업 분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법무부가 입법예고했는데 언론보도도 그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면 잘못된 보도로 인해 손해를 가한 경우 손해의 5배까지 배상할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나 경유차 배기가스 조작 사건을 통해 집단소송제 확대 필요성은 제기돼 왔으나 언론보도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언론계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법무부의 설명은 이렇다. ‘언론사도 상법상의 회사이니만큼 당연히 징벌적 손해배상의 적용대상’이다. 이 제도가 주목하는 것은 악의적인 보도로 피해자에게 손해를 끼칠 경우 언론사에 책임을 묻겠다는 점이다. 즉 가짜뉴스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도하거나 사실 확인을 소홀히 한 채 보도할 경우 중대과실이 발생한다면 법적인 책임을 언론사에 지울 수 있다.  이에 대한 찬반입장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언론보도에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될 경우 ‘권력 감시와 기업에 대한 정당한 비판에 재갈을 물릴 수 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도도 위축될 우려가 있다’는 주장과 ‘현행 법체계만으론 언론보도 피해에 대한 구제나 예방이 충분치 않으니 언론의 책임성을 강화할 장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명확한 가짜뉴스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자’는 주장의 대립이다.  진영과는 무관하게 언론계에선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에 대해 대부분 반대하고 우려한다. 기자협회 등을 중심으로 대응TF를 구성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하지만 언론계의 이런 우려는 사회의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여론은 대체적으로 도입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미디어오늘과 리서치뷰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언론 보도 민사소송 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에 대해 52%가 ‘찬성’, 23%는 ‘보완 입법 필요’, 18%는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언론계의 우려가 여론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짐작하겠지만 우리나라 언론의 신뢰도와 관련이 있다. OECD 국가 중 대한민국 언론 신뢰도는 20%대로 꼴찌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조사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19’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뉴스 신뢰도는 22%로 38개국 가운데 맨 뒷자리를 기록했다. 한국 언론은 2016년 해당 조사에 처음 포함된 뒤부터 4년 연속 신뢰도 최하위라는 불명예를 얻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전 세계 180여개 나라 가운데 올해 42위를 기록했다(국경없는 기자회 발표 2020 세계언론자유지수). 한국은 2006년 31위까지 올라갔다가 한때 70위권까지 떨어진 적이 있었지만 완만하게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아시아에선 1위이고 언론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미국(45위)보다도 세 단계 높다.  한국 언론은 언론자유에 비해 거기에 걸맞은 신뢰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언론이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논의대상이 된다는 것은 현재 우리 언론이 갖고 있는 폐해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굳이 이런 수치를 들지 않더라도 사실을 왜곡하는 가짜기사와 선동하는 기사가 넘쳐나는 우리 언론의 민망한 현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2004년 언론단체에서 처음 제기됐던 언론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은 서초동 촛불집회를 계기로 다시 화두로 떠올랐고, 한편에선 언론개혁의 상징처럼 주장되고 있다. 조국 사태 당시 언론보도를 상기해 보면, 검찰의 권력은 수사권과 기소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지원사격과 엄호 위에서 더 활개쳐왔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언론보도의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만능열쇠가 아님은 분명하다. '언론의 자유, 언론활동의 위축가능성‘ 같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이를 도입한다고 해서 가짜뉴스를 완전히 근절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논의가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인 언론의 책임, 신뢰도와 공정성을 어떻게 담보할 지에 대한 답은 아니다. 언론은 권력에 대한 감시를 주요한 사명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언론자체도 이미 하나의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언론이 권력 감시와 언론자유를 내세워 자신들에 대한 견제장치를 거부한다면 언론도 또 하나의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바닥을 보이는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그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언론에 대해 요구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 책임의식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한 입장도 나와야 할 것이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20-11-04 | hrights | 조회: 878 | 추천: 7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얼마 전 민주유공자예우법의 발의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발의자들은 ‘보상을 받으려고 민주화운동을 하였는가’라는 막말까지 들어야 했으니 보기에 안쓰럽다. 군인이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해서 전쟁에 나가지 않듯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도 부와 보상을 바라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법안을 특권적 발상으로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민주화운동에 동참한 사람들 중 일부는 정치와 공직영역에서 정치사회적 보상을 받은 상황에서, 무명으로 활동하다가 피해를 입고 허명뿐인 민주화유공자로서 여전히 고생하는 옛 동지를 배려하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공적인 희생을 한 사람에게 정당한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법의 원칙이기 때문에 이 원칙에 입각해서 생각해보자.  필자 개인적으로는 고인이 된 장인어른이 남녘의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전두환 정권의 등장 이후 시국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다가 50대 초반 한창 나이에 해직되었고 돌아가실 때까지 울분의 세월을 보내셨다. 다행히 김대중 정부가 2000년 도입한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약소하게나마 보상금을 받았지만 이후에도 그 분은 해직사정을 빼곡하게 적어와 구제가능성이 있는지 물어오셨다. 당시 법적으로는 더 이상 방도가 없다고 해도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최근에 트라우마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강제해직자로서 그 분이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겪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현재 민주당 의원들이 제안한 민주유공자예우법은 민주화보상법을 전제로 한다. 민주화보상법상 민주화운동 관련자로서 명예가 인정된 사람은 민주화유공자예우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 그런데 민주화보상법은 외형적으로는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인 피해와 고통을 구제하는 데에는 상당히 미흡하였다. 이 법이 보상대상으로 고려한 사항은 제한적이었고 보상금은 기대수준에 미달하였다. 동시에 이 법은 보상금을 수령한 사람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회를 아예 봉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은 이 법이 위헌적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마침내 2018년 헌법재판소는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정신적 피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헌으로 결정하였다(헌재 2018. 8. 30. 2014헌바180 등). 국가나 국회는 피해자와 가족들이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받을 수 있도록 민주화보상법을 개정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민주당의원들은 민주유공자예우법을 대안으로 제안하였다.  이 법안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 최근의 논의양상을 참조하지 못했다. 필자는 2018년부터 1년 남짓 국가보훈처(당시 피우진 처장) 산하의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에서 보훈제도의 정책방향에 대한 논의에 관여하였다. 실제로 당시 위원들의 제안 가운데 일부는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제안의 상당부분은 아직 서랍 속에 있고 언젠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대강의 골자는, 전몰상이군경 위주에서 벗어나 독립유공자, 민주유공자, 사회공헌자도 국가유공자로서 동등한 예우를 시행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경제적 보상수준은 국민의 정의감정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두 번째 원칙과 관련해서는 보상금이 전적으로 국민의 세금에 기초하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겼다.  보훈법제들은 대체로 절박한 사정에 처한 사람들에게 부응할 만큼의 충분한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출현한다. 그러한 사정으로 인해 기본적인 경제적 보상은 미흡하다. 그런 까닭에 별도의 보완수단들이 얼기설기 덧대어진다. 이러한 방식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지는 현재의 상황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현재 보통 사람들은 길어져만 가는 노후의 시간을 국민연금법에 기대어 염려한다.  사실 전국민이 국민연금법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으며 이러한 방향은 지극히 타당하다. 국민연금을 통합적 기반으로 삼는다면 유공자들에 대해서는 그 공적과 희생을 감안한 보상을 일정률로 연금에 가산하거나 일회적인 또는 한시적인 보상금을 제공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통합적인 제도가 실현되기 전이라도 세금에 기초한 보훈제도는 좀 더 합리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보훈혁신위원회는 보훈법상의 보상제도에 과소나 과잉이 없어야 하고, 경직된 보상수단을 지양할 것을 제안하였다. 희생과 공헌에 부합하는 적절한 보상을 시행하고, 여전히 품위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유공자들에게는 생활조정수당을 신설하거나 인상하는 유연한 방식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월남참전군인들과 5.18민주화유공자들의 예우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취업가산점제도와 관련해서는 국가가 유공자 본인의 취업을 적극적으로 알선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유공자 자녀의 취업에 가산점을 주는 경직된 방식은 지양하라고 권고하였다. 사진출처-MBC  실제로 오늘날 20-30대의 젊은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계급격차는 운명으로 수용하지만 기회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개혁을 표방하는 세력들이 결과의 불평등은 말할 것도 없고 조건의 불평등도 제대로 시정하지 못한다는 사정을 인식한다. 젊은이들은 지난 인천국제공항공단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과정에서 보듯이 기회의 평등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냉소와 불신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젊은이들이 보수화되었거나 옹졸하게 군다고 매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상의 적확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기성세대의 안이함을 탓해야 할 것이다. 희생에 대해 보상을 시행하는 것은 옳다. 그럼에도 그 부담을,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젊은이들의 등에 올려놓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국가유공자법의 취업가산점제도는 배가 지나가도 표가 안 나는 고도성장기(완전고용)에서나 어울릴법한 수단이다. 그 당시 국가의 재정적 여력이 지금보다 제대로 확충되지 않았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당시의 취업 가산점 제도는 비난할 사항도 아니다.  지금의 사정은 어떤가? 폭발적인 기술혁신 아래 노동의 종말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고용의 기회를 찾아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보상수단으로 삼는 계획을 불평할 수밖에 없다. 관건은 경제적 보상이 불충분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유공자 본인에 대한 추가적인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민주유공자예우법은 새로운 시대의 감각을 반영해야 한다. 물정이 바뀌면 수단도 바뀌어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0-10-28 | hrights | 조회: 835 | 추천: 8
- 국가의 공유재 강탈 현장에 서서 -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며칠 전 학회에서 ‘맹자의 여민동지(與民同之)의 역사적 성격’이라는 글을 발표 했다. 마침 인권연대에서 한재훈 선생님의 《맹자》 강의가 열린다고 한다. 내친 김에 나는 그날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맹자》의 다음 구절을 암송했다.  천하의 넓은 거처에서 살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길을 간다. 뜻을 펼칠 수 있을 때는 인민들과 함께 실천하고, 뜻을 펼치지 못할 때는 자신의 길을 홀로 간다. 부귀가 마음을 흔들지 못하고, 빈천이 지조를 바꾸지 못하며, 위력이 굴복시키지 못하나니,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 하느니라[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맹자는 왕도정치, 위민, 역성혁명의 사상가로서 대장부, 호연지기, 연목구어, 오십보백보, 측은지심처럼 귀에 익은 표현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다. 맹자의 행적과 사상을 담은 《맹자》는 일찍이 경전으로 자리 잡은 《논어》와 사뭇 다른 대우를 받았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정이(程頤)가 사서(四書)에 포함시킨 뒤 주자(朱子)가 주석을 단 이후에야 경(經)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과 명나라가 《맹자》를 받아들인 태도도 각기 달랐다.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 80여 군데를 도려내 간행한 《맹자》를 과거의 교재로 삼았던 명나라와 달리, 조선에서는 삭제 없이 읽고 널리 인용하였다. 이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겠으나, 조선의 지식인들은 사림으로서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였고, 중국 지식인들은 환관들에게 짓눌려 생존에 급급했다. 여민락  조선 세종대 〈여민락(與民樂)〉이라는 곡명은 맹자의 ‘인민들과 함께 하는 삶[與民同之]’ 사상에서 유래하였다. 맹자에게 제나라 선왕(宣王)은 ‘무용(武勇)을 좋아한다’, ‘재물을 좋아한다[好貨]’, ‘여자를 좋아한다[好色]’ 하며, 자신의 인격적 약점을 상담하였다. 제 선왕은 그래도 반성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맹자는 ‘인민들과 함께 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대답했다.  제 선왕은 ‘내게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취향의 편향성을 부덕함의 원인인 듯 말하였다. 허나 맹자의 눈은 달랐다. 제 선왕이 무용을 선호한 것은 전쟁을 수행하여 나타난 결과일 뿐이고, 재물을 좋아하는 것도 전쟁 비용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이때는 전쟁으로 남자들이 죽어나가 ‘짝을 잃고 원망하는 여자’들이 많아진 시대, 이른바 ‘맨날 싸우는 나라들[戰國]의 시대’였다. 더 중요한 쟁점이 있었다.  문왕의 동산은 사방 70리였지만, 풀 베고 나무 하는 사람들이나 꿩이나 토끼를 잡는 사람들이 갈 수 있어서, 백성들과 공동으로 이용하였으니, 백성들이 작다고 여긴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신이 처음 제나라 국경에 도착하여 제나라에서 가장 금지하는 것을 물어본 뒤에 조심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신이 듣건대 국경 관문 안에 동산이 사방 40리인데, 그곳에 있는 사슴들을 죽이는 자는 사람을 죽인 죄와 같이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방 40리 되는 함정을 나라 한가운데에 만들어놓은 것이니, 백성들이 너무 크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공유(共有)  대다수 백성이 농민이었던 시대의 대부분의 생업수단은 토지였다. 앞서 언급한 여민동지 가운데 경제 부문의 정원, 동산, 산림이 토지에 해당한다. 숲, 연못, 늪지, 강, 산림은 원래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었다. 누구나 그 땅을 사용하고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이제는 국가의 군주들이 이 공유지를 독점하려는 것이다. 인민들에게는 소나무, 참나무 같은 목재, 꿩, 토끼, 멧돼지 같은 동물, 머루, 딸기, 버섯 같은 식물……오랫동안 단백질, 땔감 같은 생계자원의 공급처이자 나들이와 놀이의 공간이었다. 로빈훗의 셔우드 숲을 상기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제 공유지의 사용, 수익, 처분을 놓고 긴 투쟁이 벌어질 터였다. 국가가 산림 곳곳을 파악하는 강제의 능력이 낮으면 공유지는 안전하게 ‘방치’, 즉 원주(原住) 농민의 입장에서는 현상유지라는 평화로운 길을 갈 것이다. 국가의 강제력이 발달하면 농민은 세금과 부역, 나아가 형벌이라는 함정에 대항하여 저항과 탈주로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포악한 국가는 망했다는 사실 뿐이고, 맹자는 그 포악한 국가의 주권자에 대해 다소 시크하게 ‘왕이 아니라 한 사내[一夫]일 뿐’이라고 치부하였다. 인천공항의 사유화  바다나 갯벌, 숲과 하천에 철도나 공항을 놓고 이를 정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얼핏 ‘효율화’, ‘경영합리화’라는 미명 아래 가려진다. 인천공항, 한국철도, 한국전력의 민영화(=사유화) 논의가 바로 이런 사례들이다.  충남 서산엔 광대한 간척지가 있다. 1978년 이른바 ‘유조선 공법’이라고 알려진 폐유조선을 이용한 물막이 공사를 통해 여의도의 33배에 달하는 농지가 만들어졌다. 이보다 앞서 서산의 공유지였던 갯벌을 농지로 바꾼 주인공들은 1961년 11월,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사회 명랑화 사업'을 내걸고 강제로 수용했던 '대한청소년개척단'이었다. 1966년 서산개척단이 해체된 뒤 운영권은 서산 군수에게 넘어갔고, 1975년에 정부는 가분배했던 땅을 모두 국유지로 몰수했다. 공유지가 국유지로 변하고 다시 현대그룹의 서산농장이 되었다.  갯벌, 산림, 강, 바다 같은 공유지를 법인이나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권리를 정부가 갖는 조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이 질문에 대해 아직까지 법률적인 차원은 물론 철학적 경제적 성찰은 아직 제기되지 않는 듯하다.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제16568호)에 따르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매립을 할 경우 해당 관청의 승인만 얻으면 매립이 가능하다. 매립 뒤 준공검사 확인증을 받으면 국가, 지방자치단체 또는 매립면허취득자가 매립지의 소유권을 가진다. 매각이나 양여 등 처분이 불가능했던 공유지가 처분 가능한 소유권의 대상이 된다. 국가(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처분 가능한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갯벌 등 간석지는 물론 전기, 철도(도로), 공항, 의료, 수도 같은 경우도 정부의 결정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민영화(=사유화)할 수 있는 길이 법적으로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제적 이해를 가진 정권이 현행법 안에서 공공재를 침탈할 의도를 가질 경우 시민적 저항 방법이 부재하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희망도 있다. 이런 심각성을 자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장차 전기, 철도, 공항, 수도, 의료 등 처분 가능한 사유화 추진을 저지할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먼저 국가의 자의적 공유지 침탈에 대한 헌법적, 법률적, 철학적, 경제학 논의가 필요하다. 이제, 정부(국가)가 어떤 권한과 근거로 감히 공유지를 ‘소유’, 처분할 수 있는지, 처음으로 돌아가 물어야 한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0-10-28 | hrights | 조회: 1042 | 추천: 9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분단 참사는 한반도의 분단으로 인한 적대와 전쟁구조가 낳은 비극적 사건들을 일컫는다. 분단냉전체제가 빚은 재난이다. 분단 적대로 인해 발생한 인도주의적 문제도 분단 참사에 해당된다.  분단 참사로 인하여 교전 쌍방은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하였다. 전쟁을 정지시키고 항구적 평화가 달성될 때까지 적대 쌍방의 일체의 적대행위와 무력행위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기 위한 조건과 규정에 상호 동의한 것이 정전협정(휴전협정)이다. 정전협정에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후 정전협상 과정에서 생겨나 국제법 용어가 되었다. 지금도 국제사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용어의 실현은 요원한 일이다.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희생과 재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분단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고뇌에 가득찬 국제법 용어는 그 실현을 위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용어를 떠올린 것은 평화협정의 필요성과 분단 참사에 해당하는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다.  정전협정에서 적대 쌍방의 군 사령관들은 각 국 정부들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정전협정 효력 발생 후 3개월 내에 고위급 정치회담을 소집하여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까지도 이해 당사국들 사이의 북미 간 2자, 남북미 간 3자, 남북미중 간 4자, 남북미중, 러시아, 일본 간 6자회담이 열렸으나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법은 도출되기도 힘들거니와 도출된 합의조차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  적대 쌍방 사이의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위기와 갈등의 연속과정은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의 발생원인이 되었고 그 해결과정에서 적대 쌍방 사이의 정치적 대화와 협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대화와 협상을 통한 모색은 교착 국면을 거쳐 일정한 합의를 도출하였으나 이후 합의 이행을 둘러싼 불신은 새로운 정치군사적 위기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분담 참사가 발생하는 무한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악순환의 반복 과정에서 적대 쌍방 사이의 의견불일치 해소를 통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상호주의, 타협주의보다는 적대관계를 강화하는 일방주의와 군사적 대결주의가 심화되었다. 상호 군비증강에 대한 불신은 군비증강을 제약하는 정전협정 규정의 무효화로 이어졌다. 소련제 항공기를 몰래 반입하였다며 북측을 비난한 유엔군(미군)은 핵무기를 배치하였다. 적대 쌍방 사이의 극도의 불신이 작용하는 분단냉전체제에서 정전체제의 항구적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목표로 한 정전협정의 준수와 이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간이 갈수록 정전협정의 각 조항들의 상호 위반과 체계적 파기만이 남았다.  그나마 전쟁을 멈추고 일체의 적대행위를 금지하고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의 정전협정 덕분에 포로송환이라는 인도주의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인 포로송환의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전쟁은 2년이나 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정전협상에서 포로교환의 방법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상호 양보를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기나긴 과정 동안 무수한 희생을 낳은, 밀고 밀리는 육박전을 벌인 고지전이 계속되었다.  적대 교전 쌍방 사이의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참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적대 교전 쌍방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길은 정전협정과 같은 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상호 수용 가능한 합의와 상호 동의에 의한 평화적 문제해결 방법 밖에 없다. 그것이 전쟁을 막고 분담 참사를 예방하는 길이다. 정전협정은 정치회담을 통한 평화협정으로의 대체를 예정한 잠정협정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정치회담을 통한 평화협정의 체결은 이 땅에서 이적시되고 있다. 북 지도자의 참수와 북 정권의 격멸 및 평양 점령을 위한 군사작전 계획이 영구히 취소되기는커녕 은폐된 채로 훈련되는 상황이다.  끊임없이 분단 참사를 발생시키는 분단냉전체제에서 오로지 적대와 대결을 추구하며 상호 이해와 타협 없이 일방적 주장만을 강요하는 일방주의가 이 땅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진리로 둔갑했다.  북 주민과 북 사회주의 정권 일체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 사회주의의 일체의 산물 그 자체를 적대하며 부인하는 국가보안법이 분단 참사의 예방과 분단 참사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  서해 북측 인근 해상에서 북측 군인에 의해 피격 사망한 실종 공무원 사건에서 분단 참사를 미연에 방지할 상호 이해와 타협의 정신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은 일부에 불과하다. 오로지 상대에 대한 비방과 대결만이 난무한다. 서해 분쟁 수역에서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을 정하기로 남북 간 상호 합의가 수차 이뤄졌음에도 의견불일치로 구역과 수역 설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근본원인이 되어 서해분쟁수역에서 발생한 이번 분단 참사를 교훈으로 남북 간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와 분단 참사를 예방할 공동의 노력이 재개되어야 한다.  분단 참사를 빙자하여 상대방을 비방하며 적대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정전협상에서 군사경계선 확정을 둘러싸고 적대 쌍방이 지리한 교전을 이어간 것과 같다. 상호 일방적 해상경계선을 설정하고 이를 군사력으로 수호하고자 군사적 대결을 지속하는 한 제3의 연평해전과 제2의 연평도 포격전과 제2의 피격 사건과 같은 참사는 필연적으로 발생될 수밖에 없다.  정전협정에는 실향민들이 군사분계선을 통한 안전한 귀향을 군사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규정들이 있지만 단 한 번도 남북 실향민들의 귀향 문제를 군사정전위원회나 그 밖의 남북 간 협상에서 합의하고 이행한 적이 없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성과로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측으로 송환되었지만, 이는 일시적, 정치적 합의에서 비롯된 혜택일 뿐, 정전협정의 규정과 같이 실향민들의 안전한 귀향을 보장하는 남북 간 합의는 현재 없다. 정전협정 67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7월 26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 전망대에서 시민들이 북녘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최근 조성길 전 대리대사 부인의 북한 송환 의사가 이슈가 되고 있다. 한국행을 원치 않았고 북에는 현재 딸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북송을 위한 국내법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단언컨대 국내법적으로는 근거가 없다.  국가보안법이 헌법과 국제법 위에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지옥의 땅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국가보안법 탈출죄로 처단되고, 이를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자들 또한 국가보안법에 한데 엮어 처벌받는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남녘땅에서 감히 누가 북송을 거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욱이 남쪽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이 국가기밀이 되는 국가보안법 아닌가. 남측에 정착한 탈북자의 이름 등 신상정보가 국가기밀이 되고 신변보호 보안경찰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화통일에 도움을 주는 국가기밀이 되는 데 북으로 송환되면 남측 탈북민의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가서 처형될 수 있고 신변보호 보안경찰의 생명마저 위태롭게 될 수 있다. 이처럼 국가안전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데 누가 감히 북송 주장을 한다는 말인가.  북으로 돌아갔다가 재탈북한 이들이 전부 국가보안법 간첩죄로 3년 6월의 징역을 살고 나오는 파시즘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대법관들마저 국가보안법 앞에서 이성을 잃고 북맹으로 전락하여 공안의 일방적 주장에 사로잡혀 북 악마화와 적대의 논리를 확인해 주고 있는 마당에 북측으로 귀향을 공개적으로 추진할 사람은 거의 없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국 정부에 북한이탈주민보호법에 따른 보호신청을 한 경우 보호신청 무효를 주장하며 북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평양시민 김련희씨 사례와 북 해외식당 종업원들의 유인납치 사건에서 익히 경험하였다.  국가보안법으로 세뇌된 인식들에서 나오는 반응들을 보자. 북으로 돌아가면 이러나저러나 죽을 것이고, 남측의 자유로운 세상을 맛보고서 지옥의 땅에 돌아가겠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 아니냐는 조건반사적 반응은 북송 절대 불가의 세뇌된 여론으로 나타난다,  한국에서 북측으로 가겠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 사람의 동기를 불문하고 이적으로 취급받는다. 브로커에 속아서 한국으로 입국하였다가 그리운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언론에 보도된 김련희씨는 현재 국가보안법 수사 중이다. 온갖 종북몰이 딱지가 붙었다. 김련희씨가 브로커에 속아서 한국에 입국하였다고 하며 단식투쟁까지 하였지만 국정원 조사관들은 돌아갈 방법이 없다며 오히려 남쪽에 온 것이 북에 알려지면 북의 가족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어쩔 수 없이 한국 땅에 정착 후 여권이 만들어지면 제3국을 경유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북송 요구를 하며 단식을 한 경력으로 인하여 신원이상자로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2018년 집단유인납치된 북 해외식당 종업원들의 여권 미발급이 사회문제가 되어 한국을 동경하여 입국한 종업원들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한국 정부가 여권을 발급하여주지 않은 자체가 앞뒤가 모순된 것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자 국정원은 입장을 바꿔 집단유인 납치 피해자인 종업원들과 함께 김련희씨에게도 슬쩍 여권을 발급하여 주었다. 그러나 김련희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출국금지가 연장되고 있다.  적대 쌍방 사이에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만이 남은 분단냉전의 적대관계에서 쌓인 불신과 증오는 상호 우발적 무력 충돌과 분단 참사를 만드는 도그마가 되었다. 북에 대해 오로지 모든 것을 부인하기만 하다 보니 북측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진리 아닌 진리가 되었다. 북측에는 외세의 제국주의에 맞서 자존심을 지키는 우리 겨레가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해가고 있다고 하면 아마도 다들 죽일 듯 행패질할 반인권적 사회가 되고 말았다.  진실을 말할 권리는 없고, 공갈칠 자유는 넘치는 사회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는 박상학 같은 자들이 반북 망동을 부리기에 안성 맞춤한 세상이다. 진실을 호도하는 일방주의가 초래한 극도의 불신과 대결의 냉전 한가운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언제나 평화가 목마르고 분단 참사가 숱하게 벌어지고 있다.  불신을 해소하고 신뢰증진하며 상호이해와 타협을 통해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길로 나아가는 인식과 감성과 해법 마련은 평화를 위해, 분단 참사를 예방하기 위해 시급히 준비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이 여전히 요원하다. 정전협상과 정전협정의 정신을 살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은 언제 한번 제대로 열린 적이 없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달성하고 분단 참사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쟁취할 그 길에서, 국가보안법과 그에 길들여지고 세뇌된 북맹을 타파하고 맹목적 불신과 오해, 비방과 대결의 난장판을 갈아엎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넘어, 정전협정의 긴 터널을 넘어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이루는 그날을 앞당기고 싶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0-10-20 | hrights | 조회: 1061 | 추천: 5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그동안 종교학과 평화학을 공부하다가 올 초부터 보훈교육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보훈교육연구원 밖에서 보았던 한국 보훈제도의 의미와 과제가 안에 들어오니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결국 보훈이란 무엇이고 보훈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전적으로 보훈(報勳)은 “국가 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어 나라에서 유공자나 그 유족에게 훈공에 대한 보답을 하는 일”이다. ‘국가보훈기본법’ 제1조(목적)의 핵심을 추리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고 그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의 영예로운 삶과 복지향상을 도모하며 나아가 국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행위’다. 얼핏 지당하고 분명한 규정 같다.  하지만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공을 세운다는 것’[有功]이 무엇인지 하나씩 따지다 보면, 실제로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전쟁 참전 용사가 국가유공자일 수 있고,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노력하는 이들도 국가유공자일 수 있으며, 나아가 양심적으로 선량하게 사는 소시민도 국가유공자일 수 있다. 이들 없이 국가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디까지가 국가에 공을 세우는 행위인지 규정하고자 할 때 늘 긴장과 갈등이 뒤따른다. 어떤 태도로 얼마나 헌신하고 희생적이어야 유공자라고 할 수 있는지는 결국 사회적 의미와 영향력에 따른 법률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 공식적으로 국가유공자라는 말은 헌신과 희생의 객관적 증거에 입각해 법과 규정대로 판단한 이후에나 쓸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의 법과 규정은 좁은 의미에서 엄정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가 전체를 염두에 두면, 나아가 국경이 사라져가다시피 하는 급격한 지구화 현상까지 염두에 두면, 국가유공의 본질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가 국가유공의 행위인지 그 경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행 법률과 제도상 보상과 선양의 대상이 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애를 실천하다 희생당한 이들이 보훈의 가치와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훈은 국가공동체로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정책이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의 희생을 낳은 폭력적 현실을 전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 폭력적 전제 자체를 없애가는 행위가 정말 근본적인 보훈의 행위라는 뜻이다. 역설적이게도 국가유공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되는, 바꾸어 말하면 국가보훈기본법의 국가유공자의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장기적 과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가 급격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가고 있는 때일수록, 어느 국가에 공을 세우는 행위가 다른 국가에 피해가 아니라 도리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보훈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는 행위라 해도, 그 희생이 특정 국가만이 아닌 다른 국가에게도 유익이 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독립 운동을 하고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지배와 정복의 세상이 아니라, 식민, 전쟁 등과 같은 폭력이 사라져, 국가를 위한 희생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아도 되는 지구촌 사회를 만드는 일, 그 궁극적 비전을 한시라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눈앞의 희생자를 우선 돌보고, 국가를 위한 희생의 정신을 선양하되,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희생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다각도로 만들어가는 일, 이러한 행위를 ‘선제적 보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희생에 보답하는 ‘사후적 보훈’이 당면한 단기적 과제라면, ‘선제적 보훈’은 사후적 보훈을 포함하며 이루어야 할 장기적 과제이다. 기존 보훈이 국경 중심의 근대 민족국가 범주에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면, ‘선제적 보훈’은 국경 중심의 민족국가의 범위를 넘어, 탈경계적 세계시민사회에 걸맞게 재규정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한반도의 경우는 통일과 평화 지향의 실천과도 연결된다. 사진 출처 - 구글  가령 6.25 전쟁에 참여했다가 희생당한 이들과 유족을 돌보는 일은 보훈의 핵심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여기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북한 보훈정책의 북한 사회적 의미를 연구하고, 그 의미를 적절히 반영하며 결국은 북한을 품는 더 큰 보훈의 개념과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남한의 보훈이 북한에게도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보훈의 시각을 확대해야 한다. 이것이 선제적 보훈의 한 가지 길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는 적까지 품을 수 있는 보훈이어야 한다. 그런 가능성을 간과하면 보훈 정책이 그 희생을 낳은 적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고, 그로 인한 다른 갈등을 야기하는 진원지가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보훈의 의미와 범주를 선제적으로 확대해가야 한다.  이러한 선제적 보훈은 사후적 보훈을 포함하며 거기에 심층적 의미와 방향성을 알려준다. “사후적 보훈≤선제적 보훈”으로 그 범위를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후적 보훈과 같으면서도 언제나 더 큰 선제적 보훈’의 핵심은 한 마디로 ‘평화와 인권’이라고 할 수 있다. 보훈은 결국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일이고, 희생을 낳은 폭력이 없어질 때까지,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보훈교육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20-10-07 | hrights | 조회: 1295 | 추천: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