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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제 반정(反正) 밖에 없다 - 대파 이후의 새 세상 짜기 -(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4-09 10:08
조회
362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이 글이 실리는 건 10일(수요일) 이후, 선거가 끝난 뒤일 것이다. 칼럼 게재 날짜를 받고 난 뒤 뭔 일이 이렇게 많이 터지는지, 이미 2년 동안 적립한 포인트도 차고 넘치는데, 날씨 1, 대파, 쪽파, 김활란, 삼겹살, 또 선관위 대파, 이제는 복면가왕 9주년까지……. 정말 한국의 개그맨들은 먹고 살기 힘든 지경이다. 하지만 그건 표면의 찰랑거림이다. 우리는 안다. 한국 사회라는 거함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1.
 그래도 천하다. 참으로 천하다. 이 말은 신분제 사회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쓰기가 꺼려지지만 달리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고상하길 기대하지 않거늘, 고상하면 좋지만 평범해도 그만이거늘…….
 복습 하나. 『동호문답(東湖問答)』에 나오는 율곡의 말을 들어보자. 폭군, 혼군, 용군, 즉 폭압적 군주, 어리석은 군주, 있으나마나한 군주에 대한 율곡의 정의이다.


① 많은 욕심이 마음을 흔들고 온갖 유혹이 밖에서 쳐들어온 결과, 백성의 힘을 다 쥐어짜 자신만 살고자 하고, 충언(忠言)을 물리치고 자신만 성스러운 체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가 폭군(暴君)이다.
② 정치를 잘하려는 뜻은 있으나 간사한 자를 분별하는 총명함이 없고, 믿는 자는 어질지 못하고 관료들은 실력이 없어서 패망하게 되는 자는 혼군(昏君)이다.
③ 마음이 나약하여 뜻이 확립되지 못하고 과단성이 없어서 어름적거리다가, 정책은 혼선을 빚거나 구태만 되풀이하면서 날로 쇠약해져 가는 자가 용군(庸君)이다.


1.
 기억 하나 소환. 2008년 8월 어느 날 MBC뉴스, 퇴임을 몇 달 앞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방한했다.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공식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에 관해 논의를 했느냐고 기자가 질문했다. 이명박은 즉각 대답했다.


“아프가니스탄 뭐, 파견 문제, 이것은 부시 대통령이 답변해야 하잖아요, 내가 할 것이 아니고. 그러나 그런 논의는 없었다는 걸 우선 말씀드립니다. 네, 허허.”
(이때 부시는 이명박을 쳐다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면서 이어폰을 빼고 즉각 반박했다.)
“우리는 논의했습니다.[We discussed it!] 한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기여한 것에 대해 대통령께 감사드렸습니다.”
“We discussed it!” 내가 알아들을 정도였으니 부시가 얼마나 정확히 발음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이명박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때 실실 웃으며 책임감을 피해갈 수 있는 인성을 가진 분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것을 안 순간, 나는 많은 것을 접었다. 그런데…….


[부시와 기자회견하는 이명박. 오른쪽은 질의응답 없는 51분 담화.]


1.
 난 요즘 ‘어색하게 실실 웃었던’ 이명박씨는 그래도 나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에겐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이게 중요하다. 이런 마음을 단서로 개과천선, 잘못을 고치고 나은 길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1.
 역사를 보면 국왕의 마음가짐에 대한 경계가 많이 나온다. 고려시대 스님들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가르쳤고, 조선시대 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다[人心唯危]’고 일렀다. 최고권력자의 마음은 ‘속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힘이다. 정책과 행정을 통해 고스란히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힘이다.
 그에게 측은지심이 남아 있으면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줄 알 것이다. 수오지심이 남아 있으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힐 수 있고 미안해할 줄 알 것이다. 외롭고 막막한 사람들을 위해 눈물까지는 흘리지 않더라도 정책의 이름으로 돌보려고 할 것이고, 자신이나 주변의 탐욕이나 과오로 벌어진 사태에 자존심 상할 것이다. 2024년 4월을 사는 나는 그런 기대가 없다.


1.
 반정(反正)이 필요하다. 언제나 일이 되려면 가닥을 잘 타야 하는데, 반정 역시 털컥 판만 벌인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반정은 망가진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의 정권교체보다 복합적이기 마련이다. 반정은 세 방향의 과제를 풀어야 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폭정(暴政) 또는 혼정(昏政)의 즉각적 중단 : 이는 사회의 자기보존이며 시민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② 폭군 또는 혼군 이전의 시대 상태 회복 : 국민의 삶이 일상을 회복하고, 나라의 재정과 관료제 운영 등이 정해진 제도에 따라 작동해야 한다.
③ 폭정이나 혼정으로 미루어진 사회의 재편, 개혁 수행 : 이는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비전과 정책이므로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반정의 세 과제 : 왕조시대라면 이런 모델이었을 것이다.]


1.
 말할 것도 없이 ①, ②, ③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섞여서는 안 된다. 또한 논리적으로는 폭정을 멈추고, 회복하고, 개혁하는 순서를 밟을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반정의 순간 ①, ②, ③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③이 특히 중요하다. ①, ②는 반정의 소극적 국면이다. 지금 국면을 멈추고, 이전 상태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반면 ③은 반정의 적극적 국면이다. 누구도 안 해본 국정이 여기서 펼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정녕 국정철학이 필요하다. 지독한 학습과 살떨리는 고뇌가 버무려진 헌신적 실천적 철학 말이다.
 여기에도 내가 알기에 검찰개혁, 언론개혁 등 대안도 방법이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주저하지 말고 추진하자. 동시에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2023년 내놓은 제6차 종합보고서를 보자. 2040년 이전에 지구의 표면 온도는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아들딸들이 전면적인 종족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는 말이다. 지금은 북극곰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4차산업혁명이나 AI 운운하며 당황하지 말고, 산업구조의 변화를 살피고 그 변동의 잦은 주기에 주목하자. 21세기 산업구조는 자주 또는 예상치 못하게 변할 것이다. 이런 변동에서 사회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각자도생이 아니다. 공공성 확대라고 하든, 기본소득이라 하든, 공유제라고 하든, 변동의 사이사이에 우리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1.
 천지(天地)가 어질지 않듯, 역사 또한 그럴 수 있다. 허나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길은 하나이다. 더 나빠지지 않는 것! 그건 반정 밖에 없다. 대파(大破) 이후 새 세상을 짜는 일이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