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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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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보수와 진보, 그리고 선거(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4-03 14:32
조회
195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공식적 폐지 수거 시간은 매주 수요일 오전 7시부터 목요일 오전 11시까지다. 주민들이 그 시간에 내놓은 폐지를 관리원들이 정리해놓으면 목요일 정오경에 외부 업체가 와서 수거해간다. 수거 장소에는 종이류 배출시간을 알리는 현수막이 큼직하게 걸려있다. 아무 때나 버리면 관리가 힘드니, 반드시 시간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담은... 입주민들은 여러 해 동안 종이류 배출시간을 잘 지켜왔다.


그런데 일 년 몇 개월 전부터인가, 공식 배출시간이 아닌데도 종이를 내놓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로 이사 온 사람이 규정을 몰라서 그랬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수막에 배출시간도 적혀있으니 곧 이전 질서를 찾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 때나 폐지를 내놓는 이들이 도리어 더 많아졌다. 목요일 점심에 폐지를 수거해갔는데 바로 그날 저녁부터 폐지가 다시 쌓였다. 저마다 사정이 있는 게 현실인데 왜 폐지 배출시간을 획일적으로 규정하느냐며 못마땅해하던 이들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표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관리사무소에서는 관리상의 어려움이 있고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으니 종이류 배출시간을 지켜달라는 방송을 여러 차례 더 했다.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고 폐지를 아무 때나 내놓는 이들이 더 늘어났다. 관례를 조금 어기니 자기가 더 편리해지더라는 것을 경험해 본 탓일지도 모른다. 종이류 배출일 안내 방송을 못 들었다거나 집안 사정상 폐지 배출일에 맞추기 힘들다는 변명을 스스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식적인 종이류 수거일 같은 공동체적 약속에는 아예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자신의 편리함이 우선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바탕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수막 아래로 배출시간이 아닌데도 보란듯이 폐지가 쌓여갔다. 현수막은 완전히 무색해졌다. 아무 때든 종이를 내놓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다시피 했다. 이제는 관리사무실에서 방송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관리원들도 종이를 매일 정돈하는 등 전에 없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종이류를 ‘자유’롭게 배출하는 것이 ‘현실’이니 관리원들이 더 깨끗이 청소해달라는 입주민들의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롭게’ 폐지를 내놓은 이들이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실제로 그런 목소리를 더 높일 공산이 커졌다.


일부 입주민들로 시작된 파행을 정당화하면 안 된다는 반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도 하나의 공동체이자 작은 사회이니 개인의 작은 불편함을 잠시 감수하면 관리원의 노동도 덜고, 공동의 환경도 다시 쾌적해질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무 때든 자유롭게 폐지를 내놓아도 된다는 편리함이 승리해가고 있는 중이다.


정치 행위는 여의도나 용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파트 단지에서도 자기의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언행들이 혼재되어 있다. 어차피 코로나 팬데믹 이후 배달문화가 확대되면서 종이박스 등 폐지가 많이 생기는 것이 현실이니 매일 폐지를 버릴 수 있도록 공식화하자는 ‘개인 자유 중심의 현실 관리파’, 주변 환경이나 공동의 질서를 위해 개인의 일시적인 불편은 조금씩 감수해 공동의 원리를 세워가자는 ‘공동체 균형 중심의 변화 지향파’ 간 견해 차이가 있다. 이것을 이른바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보수가 대체로 현실주의적이라면 진보는 대체로 변화지향적인 경향이 있다. 이들이 무 자르듯이 분리되는 것도 아니고 이들 간에는 상호 침투적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그런 경향이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이냐, 무엇으로의 지향이냐이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된 주요 원인이나 이유를 제대로 인식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이다. 아파트 단지에서도 누군가 기존 질서나 흐름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언젠가부터 폐지를 수시로 내놓기 시작하고, 배달 문화로 인해 종이박스가 급격히 많아지는 것이 현실이라며 그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이 폐지 더미를 아무 대나 배출해서 단지 환경을 훼손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그런데도 이런 원인은 보지 않은 채 관리사무소에서 더 잘 관리하면 입주민들이 편리해지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승리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좀 멀리 떨어진 원인을 잘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전체를 위한 누군가의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인정하곤 한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으니 국가안보(국방력 강화)가 중요하다고 외치는 이들은 왜 북한과 대치하게 되었는지, 그 대치상황이 왜 더 강고해지는지, 어떻게 하면 서로 대립하지 않고 살 수 있을지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일본에 의한 피식민 경험, 외세에 의한 분단, 그 과정에 증폭된 이념 갈등과 전쟁 등 주요 원인은 성찰하지 않은 채, 서로 대치 중인 당장의 현실만 중시하고, 당장 북한을 압도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최선이라고만 생각한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가 내내 골칫거리이니 이 기회에 그들을 몰아내자는 이스라엘의 근시안적 현실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정작 자국이 팔레스타인에 힘으로 정착해온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테러를 일삼는 이들은 멸절시켜야 한다며 당장의 위험 요소에만 집중한다.


집권하자마자 느닷없이 자유를 강조하고, 개인의 현재 능력을 자극하면서, 불평등한 구조에서 이미 역량이 커진 이들을 더 편드는 현 정권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좀 더 희생하면 국가가 더 강해지지 않겠느냐며 특정 부류의 희생, 그것도 힘없는 이들의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한다. 한반도의 분열과 불평등의 주요 원인을 생각하지 않은 채, 미래로 나아가자며 현실의 권력을 긍정하려는 데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폐지가 매일 쌓이면 관리원이 매일 치우면 된다는 당장의 현실 관리파와 비슷한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 이르게 된 주요 원인과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서 무엇을 긍정만 할 수 있겠는가. 불평등한 구조를 해소하지 않고서 어찌 미래를 내다볼 것인가. 우리는 왜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 그 주요한 역사적, 사회적 원인들에 대해 성찰하는 일은 개인의 일상적 삶에서도 중요한데, 정치를 하겠노라 나서는 이들에게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그러자고 역사도 공부하고 모두를 위한 윤리도 요구하는 것 아닌가. 과거를 기억하고 모두의 균형적 미래를 위해 현실의 부조리를 개혁하는, 그런 원리에 충실한 이들만 정치 현장으로 내보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