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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차 수요대화모임(08.2.27) 정리 - 안건모 발행인(월간 '작은책')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10:32
조회
338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안건모/ 월간 <작은책> 발행인



거짓이 없고 감동이 있는 글, 비판의식이 있는 글,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글. 나는 이러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1996년 월간 <작은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이게 계기가 되어 ‘안건모의 일터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작은 책>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당시 주목을 받게 되고, 전태일 문학상에 응모해보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고 ‘시내버스로 정년까지’라는 제목의 생활수기를 냈는데 우수상에 당선되었다. 그 때 쓴 글을 보면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도 않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인데도 새벽 4시까지 신명나게 글을 썼다. 그 글을 쓰면서 눈물이 많이 났다. 살아온 지난 시절이 그만큼 고달팠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노동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들어간 곳은 의자공장이었다. 공장에서 6개월 정도 일하고 다시 공부하려는 마음에 검정고시를 봐서 한양공고에 들어갔지만, 이것도 2년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보안사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82년 제대하여 나와 보니 기술이 없는 터라 먹고 살 게 전혀 없었다. ‘인간시장’이라고 불리는 직업소개소에 5만원만 내면 사람들이 와서 사간다. 팔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얻게 된 일자리가 비정규직은 아니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버텨내지 못하기 일쑤다.

어느 날 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기가 차가운 방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며 ‘이렇게는 못 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대형면허를 따고, 버스회사를 찾아가 일을 했다. 대형면허를 딴 지 5개월도 안 되는 때에 버스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우이동에서 신림동을 가는 333번 버스였다. 잔뜩 긴장한 채로 처음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매우 떨렸지만, 신기하게도 승객들은 내가 초보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세 정거장 정도를 지나니까 ‘내 직업이 이거구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겨우 2, 3일 만에 버스가 내 몸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시작하면서 버스운전사가 내 평생 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이동에서 세 정거장이 지나면 버스가 도통 움직이지 못한다. 사람이 너무 많은 탓이다. 서울역을 지나고 나면 버스는 총알이 된다. 이 모두가 시간을 맞추기 위함이다. 앞 버스와의 배차간격을 유지시키지 못하면 버스운전업계에서 살아남을 재간이 없다. 또 막노동에 비하면 월급은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문짝수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안내양이 없어지면서 버스기사가 출입문을 조종한다고 ‘문짝수당’이라는 것을 따로 주었는데 나중엔 그것도 없어졌다. 사업주들이 얼마나 기사들의 임금을 떼어먹는지 그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당시 버스기사의 배차실은 달랑 컨테이너 한 칸이었다. 사업주들이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주눅 들게 만들게끔 그러한 환경을 자연스럽게 조성하는 것이다. 노동의 정도도 고되다. 하루 2, 3시간 자며 3일 연속 내내 운전만 하면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다.

또 80년대 종로에는 데모가 많이 일어났다. 버스의 왼쪽은 전경, 오른쪽은 시민. 짱돌과 최루탄이 버스 위로 날아다녔다. 그런데 신기하게 차 안으로 짱돌이나 최루탄이 날라들지는 않았다. 주변 동료들이 부당해고를 당해도, 그게 부당한 일인지조차 모르는 시절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쿠바와 카스트로>라는 만화책을 보게 되었다.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인디언 집단학살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고 내가 그동안 알았던 것은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나는 참으로 순진하게 살았다. 버스 운전을 하면서 버스 요금을 잘 모르는 승객을 간첩이라고 신고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책 한권을 만나면서, 나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몸담고 사는 세상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소설 <태백산맥>은 버스운전을 하면서 짬짬이 읽었다. 10권을 운전석에 앉아 20일 만에 다 읽었다.

내가 변하게 된 데에는 아마 우연과 필연이 겹쳤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싶어서 파고든 것은 누군가 억지로 내게 가르치려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내가 받는 임금의 항목이 어떤 것들인지 궁금했고 이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틀 치 임금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엔 근로기준법을 알고 싶어서 근로기준법 책을 샀다. 그런데 이 책을 들고 다니고부터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나보고 빨갱이라고 불렀다. ‘아, 내가 얼마나 빨갱이를 무서워하는데... 반공사상에 익숙한 내게 빨갱이라니...’ 오기가 생겼다. 근로기준법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내게 반말하던 관리자들이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가장 구식버스(똥차)를 배정했다. 이후에도 나는 회사 측에 쉬는 시간, 일한 시간 등을 계산하여 연장수당을 지급하라고 요청했고, 이는 금방 받아들여졌다. 요구하고 싸우면,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배차도 새 차로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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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을 알게 되면서 동료기사들에게 A4 한 장 분량의 소식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이 소식지를 통해 서로 동질감을 느꼈다. 이 종이 한 장이 우리의 모임을 변하게 했다. 만나서 얼굴 맞대고 노동권, 근로기준법 등을 아무리 설명해줘도 예전에 그들은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소식지 끝에 한 줄씩 적은 근로기준법 조항에 반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술자리에 가면 나보다 그들이 먼저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이 이런 힘을 갖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더 크게 만들어보자고 마음을 먹고, 고양시에 ‘버스일터’라는 좀 더 큰 모임을 만들었다. 500부씩 소식지를 매달 발행했다. 그 때부터는 기사들의 글을 싣기 시작했다. 글에는 사투리도 그대로 쓴다. 버스기사들이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모른다. 그 중에 한 명 역시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다. 이전에는 글을 어렵게 생각하고, 지식인만 쓰는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기사들은 소식지 ‘버스일터’가 언제 나오는지 묻고, 기다렸다. 몰래 후원금을 쥐어줬던 기사들도 있었다.

오늘 수요대화모임 제목이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인데, 글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내 버스연재 글을 본 사람들은 버스기사들이 왜 파업을 하고 왜 난폭운전을 하는지 이해한다.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알기 때문이다. <작은 책>은 ‘일하는 사람이 보는 책이 없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맨 처음 ‘작은 책’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 받았을 때, 한 달에 250만원 받던 버스회사를 그만두고 100만원 받으며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사실 내가 버스 회사를 나갈 때 사업주들이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하니 얄미웠고, 나와 함께 일한 동지들은 얼마나 또 탄압을 받을지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3개월의 고민 끝에 사업주가 그렇게 고대하던 사표를 냈다.

지금은 <작은 책>에서 편집, 교정, 교열, 영업까지 하고 있다. <작은 책>에 실리는 글은 대부분 생활 글 위주였다. 그러다가 ‘생활 글을 넘어서 알아야할 지식도 분명히 있다.’ 라는 생각에 진보적 지식인들의 글도 싣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렇게... 지금까지 ‘작은 책’이 잘 굴러오고 있다.

예전에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혼자 싸우냐고, 힘들지도 않냐고. 나는 대답했다. “나 편하자고 하는 게 아니여. 내 아들이 커서 버스운전기사가 되겠대. 내 아들이 일하기 편한 직장을 만들려고 하는 거여.”


정리: 임혜민/ 인권연대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