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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석미화(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런 아저씨가 돌아가셨다(석미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1-06 15:45
조회
247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응우옌떤런(Nguyễn Tấn Lân). 빈안학살 생존자. 1951년생.
 1966년 당시 15살이던 아저씨는 베트남 떠이빈사(구 빈안사) 15개 지점에서 일어난 학살 중에서도 2월 15일 일어난 까인브엄 들판 학살 생존자다. 아저씨는 그날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이 터지며 파편이 온 몸에 박혀 평생 고통 받았다. 하지만 평생 아저씨를 괴롭힌 건 몸에 난 상처보다는 참혹하게 죽어간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기억이었다.


 언제나 부고는 갑작스럽다. 가족들이 장례를 준비하는 사이 한국 친구들이 장례비와 무덤 조성을 위해 급히 조의금을 모았다. 런 아저씨는 학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 묘 인근에 묻혔다. 살았을 때 국화와 향을 들고 늘 찾았던 어머니 곁으로... 아저씨의 가족들이 “GIA ĐÌNH VÀ NHỮNG NGƯỜI BẠN HÀN QUỐC ĐỒNG LẬP MỘ” ‘가족과 한국의 친구들이 함께 묘를 세우다’는 문구를 묘비에 새겨주었다. 한국 친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다.



사진 출처 - 한베평화재단


 2015년 4월. 런 아저씨는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꽝남성 퐁니퐁넛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과 함께였다. 당시만 해도 베트남 사업을 했던 평화박물관이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전시를 개최하며 전시 오프닝에 피해자를 초청했다. 나는 이 사업의 책임자로 아저씨를 만났다. 그때 한국으로 초대하는 과정이나 6박 7일간의 방문 일정 중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지금은 다 기억도 못하겠다. 서울, 대구, 부산을 다니며 학살피해를 증언하고, 국회에서 피해자로서 한국정부에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등 아저씨는 지치지 않고 자신이 겪은 학살의 경험을 증언했다.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에 한국 언론들도 떠들썩하게 응수했다. 학살 생존자들은 존재 자체가 곧 증언이었다. 6박 7일은 아저씨 인생에 잊지 못 할 사건이었을 것이다.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등장은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참전군인 집회가 열렸다. “응우옌떤런은 부친과 형제 모두 베트콩이었다! 베트콩도 양민이냐! 민간인 피해자 행세를 즉각 중단하라!” 군복 입은 참전군인들이 런 아저씨의 얼굴 사진과 함께 큰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했다. 전시 개막행사는 고엽제전우회의 항의로 하루 미뤄 열렸다. 개막행사를 마치고 참석한 수요 집회에서 몰려드는 언론의 취재와 인파로 런 아저씨는 현기증이 나 결국 한 쪽에 앉아 쉬어야 했다.


 아저씨와 함께한 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건강검진을 위해 병원으로 오고 가는 차 안에서의 기억이다. 두 분 모두 몸에 큰 상처를 안고 있어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컸다. 다행히 녹색병원의 도움으로 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 차 안에서 아저씨가 갑자기 한쪽다리 바지를 걷어 올렸다. 앙상한 다리 군데군데 패인 흔적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누르며 수류탄 파편자국을 보여줬다. “당신도 보여줘 봐” 탄 아주머니를 향해 아저씨가 말했다.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탄 아주머니도 옷을 들어 올렸다. 사진으로만 봤던 복부의 큰 흉이 그대로 배에 선을 그으며 나타났다. 피가 흐르고 상처가 났던 자리를 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듯 했다. 두 사람은 한국 친구들이 마련해 준 기회에 기분이 좋았다. 런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탄 아주머니는 그때를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행사가 열리는 호텔을 둘러싸고 참전군인이 시위를 하고 있다는 긴급한 연락을 받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어차피 부딪힐 상황이라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50여 년이 지나 또다시 군복을 입은 한국 군인을 만나야하는 두 분의 기막힌 심정을 생각하니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런 아저씨는 담담했다. 오히려 옆에 앉은 탄 아주머니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내게 남은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당시의 상황은 아리랑TV에서 동행하며 모두 영상에 담았다. 아리랑TV는 한국과 베트남 수교 25주년 기념으로 지난 2017년 베트남 VTV와 공동으로 다큐멘터리 <센드 앤 리시브: 더 비디오>를 제작했다. 2015년 방한 당시의 장면과 함께 런 아저씨를 다시 찾아 그를 인터뷰했다. 베트남전 한국군에 의한 피해자의 영상 메시지를 한국의 참전군인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영상에서 런 아저씨는 참전군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한국 군대가 베트남에서 한 일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길 바란다.” 이 영상에서 런 아저씨는 2015년 한국 방문의 소회를 밝힌다. “나는 한국 국회에서 연설하기 전에 많이 긴장을 했다. 탄과 나는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 주둔지 근처에 살았다. 나는 학살을 목격했고 온 몸에 상처를 입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의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기 전에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필요하면 언제든 할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든 상관없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로서 나의 의무이다. 나는 진실을 말 할 의무가 있다.”



 국회 정론관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며 흔들림 없이 성명서를 읽어 내리던 런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아남은 자로서의 결연한 마음과 평화를 향한 외침이 빛나던 순간이었다. 빈안학살은 1966년 2월 맹호부대에 의해 1004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나의 외삼촌은 1965년 10월 월남으로 갔다. 나는 매년 돌아가신 삼촌의 이름으로 빈안 위령제에 꽃을 보낸다. 올해는 런 아저씨를 기억하며 빈안 55주기를 맞아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