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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속 ‘작은 동아시아’, 공존과 갈등의 교차로 (이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8-01 14:53
조회
189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지난 6월 14일부터 19일까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러시아 극동 연구팀>의 일원으로 현지답사를 다녀왔다. 연구팀은 러시아극동역사연구소와 “Small East Asia in Russian Far East"란 주제 아래 인문사회분야로는 최초로 한·러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의 문이 활짝 열린 후, 극동은 가능성과 기회의 땅으로 주목받았다. 세계 육지 면적의 1/20, 러시아 면적의 1/3, 한반도 면적의 28배에 해당하는 이 거대한 땅은 중국과는 4300km, 북한과는 19km에 걸쳐 국경을 접하고, 일본과는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동아시아 국가 간 교차로에 해당한다.



극동 러시아 지역
사진 출처 - 뉴시스


 러시아 극동은 1980년대 말 한국 정부의 북방정책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이래, 한반도-아시아-유럽 루트의 핵심매개로, 통일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미래거점으로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푸틴이 ‘신동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는 석유, 가스, 석탄 등 막대한 에너지 자원의 동아시아 보급기지, 농업개발협력을 통한 동아시아 식량 보급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확대한 철도망, 전력망, 송유관, 가스관이 교차하는 새로운 교통물류의 전진기지로 주목받았다. 남·북·러 삼각경협, 중국 동북3성-극동 연계개발, 러·일 에너지 브릿지 프로젝트 들이 잘 보여주듯이, 러시아 극동이 가진 가능성의 핵심은 이곳이 남·북·중·일·러 간 양자/다자적 접촉을 필연화, 전면화한다는데 있다.


 이런 의미는 현재에 국한되지 않는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중·일·러가 마주한 러시아 극동은 인접국들이 전면적으로 조우하며 그 속에서 국경, 민족, 국민국가와 같은 근대적 개념이 실험된 역동적 공간이었다. 러시아 극동을 구성하는 문명의 핵심은 하나의 국가성 속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국가들이 충돌하는 ‘초국가적’ 접촉과 충돌 속에 형성되었다. 연해주, 하바롭스크, 사할린의 주권 교체, 사라진 극동공화국의 운명, 북방 원주민의 식민화 과정 등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이곳은 국경, 민족, 국민국가와 같은 근대적 패러다임의 유효성이 실험된 공간이면서, 동시에 근대성의 폭력과 한계가 목도된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러·일, 한·중, 북·러 역사영토논쟁이 역설적으로 대변하듯이, 러시아 극동은 조선이면서, 러시아면서, 중국이면서, 일본이었고, 따라서 그 어느 것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그 이상이었다. 그 공간은 근대적 팽창의 무한공간이자, 그 위반의 주목할 만한 사례로, 공간적으로 서양과 동양 사이, 시간적으로 근대와 비(非)근대, 가치적으로 문명과 야만 사이에 존재했다. 따라서 러시아 극동은 동아시아의 초국가적 공존 구상에 생생한 사례가 되어줄 수 있다. 그러한 역사를 몸으로 재현하는 존재가 바로 러시아 극동 내 남·북·중·일 이주자들이다.


 현재 러시아 극동에는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중국 노동자와 조선족, 북한 노동자가 함께 공존한다. 극동 거주 고려인(한인)의 총수는 연해주 3만 명, 사할린 3만명, 하바롭스크 1.5만명, 캄차트카 2천명을 포함해 약 8만 명이다. 중국 노동자의 경우, 불법이주가 많아 정확한 수치 파악이 힘들지만, 수십만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 3만 5천 명으로 추산되는 러시아 전체 북한 노동자 중 약 1/3, 즉 1만 명가량이 극동의 건설, 어업, 농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주요 탈북 루트 중 하나인 극동의 특성으로 인해, 물론 정확한 수치 파악은 불가능하지만, 탈북 난민의 존재도 여기 더해질 수 있다.


 이처럼 이곳 에스닉 코리안 공동체의 경우 다원화와 내부 분화가 활발하다. 즉, 고려인, 사할린 한인, 조선족, 북한노동자, 탈북난민, 한국인처럼, 민족으로는 동일하나, 다른 국적의, 따라서 다른 역사, 다른 문화를 가진 다양한 갈래의 한민족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고려인은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 시 중앙아시아로 떠났다가 소련 시기 귀환한 고려인과 소련 붕괴 후 귀환한 고려인으로 또 나뉜다.) 이 공동체 속에서 같은 민족정체성과 남·북·중·일·러가 교차된 다국적, 다문화 정체성 사이의 경합을 보다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국적국의 위상에 따라 현재 이 공동체 내부에 어떤 위계와 서열, 그로 인한 갈등과 반목이 가시화될 조짐이 포착되기도 한다. 한민족 공동체의 이 다양한 일원들은 중국인이나, 다양한 CIS 출신 이민자들과 목하 경쟁 중이다. 한민족 공동체, 나아가 러시아 극동의 이 ‘작은 동아시아’의 현재를 따져보고 미래를 가늠하는 일이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각종 구상의 현실성을 따져볼 시금석이 되어줄 수 있을까.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