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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파병 53주년 돌아보며 (윤영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2-21 19:03
조회
584

윤영전/ 평통서문예원장


 한국이 정부수립이후 최초로 해외에 군대를 파견했다. 당시 월남인 베트남에 파병한지 올해 2월9일로 53주년이다. 한국이 해외에 최초로 파병한 경우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기념하고 있다. 53년 전, 필자는 해외 최초 파병의 대열에 일원으로 베트남에 참전하였다.


 1965년 1월 초순, 요란한 전언통신문 벨이 울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해외파병요원 지원자 모집”이었다. 처음에는 어느 나라일까? 알 수 없었다. 잠시 후에 파병지는 월남이고 지원자 신청마감은 1월10일까지였다.


 나는 당시 원주 부대에 서무계로 제대 4개월을 앞둔 제대말년 육군병장이었다. 2년여 전에 입대하여 오직 제대할 날짜만을 달력에서 하루씩 지워가고 있던 때였다. 파견지역이 전쟁터라니 어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에 멈칫거렸다.  제대하면 복학해 공부를 할 것이었다. 9살에 6.25 전쟁을 직접 바라보았다. 그 후 톨스토이의 ‘전쟁과 사랑’이란 영화를 보면서 호기심도 작용했다. 해방정국에서 내 맏형이 건준에 가입해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형 때문에 둘째형과 아버지도 부역을 하였기에 신원조회에서 통과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해외파견은 철저한 신원조회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원한 것은 신원조회를 뛰어넘자는 것이었다. 전쟁 참전에 죽고 사는 것은 다 하느님의 뜻이라며 결단하였다. 1차로 지원을 했는데 과연 신원조회에 통과할 지가 의문이었다.
일단 전언통신문을 정리하여 결재를 올리고 부대원에 공람을 돌렸다. 130여 명 중에 단 2명이 지원을 했다. 그런데 부대장과 군종신부는 나의 지원을 철회하란다. 이유는 지금 월남 사이공 수도가 구정공세로 함락될지도 모를 위험한 전쟁지역이고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허나 나는 가겠다고 주장했다.


 일단 지원자를 중심으로 부대편성을 하면서 나는 서무사병계 직무를 맡았다. 파견부대는 양평의 광탄으로 이동하여 참전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부대에 1군사령부 인사참모가 찾아와 나의 지원을 취소하라고 했다. 내 신원조회로 부모님과 할머님이 나의 파병지원 사실에 놀라서 수소문해 철회를 종용한 것이었다.


 집에서 22살 맏형이 죽고 둘째형이 군에서 부상당했기에 나까지 죽음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한번 결심한 파병은 철회하지 않는다” 고 단호히 말해 인사참모도 “가면 죽은 다는데 어찌 꼭 가려하나? 고집을 어쩔 수 없네”하며 돌아갔다.


 걱정하던 신원조회는 합격이었다. 이제는 현리에서 2천명이 결단식을 갖고 2월7일 서울운동장에서 박 대통령도 참가한 ‘한국군최초해외파견’ 평화의 사도 “비둘기부대” 국민환송식이 파병가족과 국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전선 없는 월남에 목숨 걸고 참전하는 지원자에게 성대한 환송식을 해준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나는 2월11일 부산 제3부두에서 해군 엘에스티 3대에 선발 600명이 공해를 항해하여 14일 만에 붕타우에 도착했다. 끝없는 2주간의 항해는 참으로 지루했다. 그러나 붕타우의 등대를 발견하고 이미 파견된 붕타우 이동외과병원 간호장교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4시간 사이공 강변을 항해하여 항구에 도착했다.


 당시 월남의 정부수반 판칵수, 국방장관 티우 중장과 키 공군사령관과 실세 권력자 칸 소장도 함께 우리 다이한 비둘기대원을 환영했다. 다음날 사이공에서 26킬로 떨어진 벵아 지안옛 베트콩기지를 2천명 비둘기대원들의 숙영지가 되었다. 비둘기부대원들은 첫날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달 후에 본대 1,400명이 US메이카 호에 본대와 합류해 2천명이 집합한 단 본부 앞에서 조문환 단장은 훈시를 했다. 경례하고 “경계철저” 그리고 “살아서 돌아가자”였다. 설명은 “이곳은 한국이 아닌 우방국이다. 내나라 지키다가 죽어간 것도 서러운데 이국에 와서 죽어갈 필요가 없다”는 진실의 훈시였다.


 난 조문환 장군의 훈시에 감명이었다. 흔히들 전시에 죽어간다. 전선도 없는 전쟁월남전은 제네바협정 17도선에 북은 월맹, 남은 월남이었다. 당초 프랑스 80년 전쟁 베트콩이 17도 이하 월남에서 3분의 1을 점령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러기에 비둘기부대는 월남에 자유와 평화를 위한 부대라고 대외적으로 명명했지만 결국 전투병 파견위한 사전부대였다. 64년 10월 붕타우 이동외과병원 의료진은 순수한 병원치료지원으로, 30여명의 태권도 교관요원이 함께 파견되었다.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공격을 당하는 전선 없는 전쟁터가 실상이었다.


 월남에 파견된 후 첫 교전은 4월2일이었다. 단 본부를 향해 박격포탄 80여발을 선제공격하였다. 그날이 비둘기대원을 위문하는 “또순이” 한국의 영화 2편을 상영해 이국의 향수를 달래준 영화였었다. 밤 10시30분 취침, 나는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다.


 단 본부를 겨냥한 박격 포탄이 떨어져 나는 바로 비상벨을 눌렀다. 처음 겪는 실제상황 전쟁이었다. 미처 외곽진지를 구축하지 못했지만 허나 그들이 부대에 접근하면 총을 쏠 준비를 했다. 격전을 벌이면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1시간여 교전은 아군 8명 중경상 차량 파손 등이었고 그들은 베트콩 1명 사살, 수십 명 중상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날이 한국군 해외파견 최초 작전을 벌여 승리했다는 전사를 기록했다. 전투부대 파병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작전의 하나였다. 그해 8월 9월에 맹호와 청룡, 백마가 퀴논 나트랑 캄란에 파병되었다.


 10월 전투에서는 슬픈 소식이 연이었다. 주로 월남군과 미군이 담당하던 베트콩 소탕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소탕작전에서 아군이 수백 명씩 전사했다. 무리한 작전을 폈다. 나는 천주교신자로 군종신부와 교우 함께 탄산누트공항 영안실에서 전사한 맹호 청룡전우 유골함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 연혼이 저 세상에서 영면하기를 기도해 주었다. 조 장군의 훈시가 떠올랐다.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자는 그 말이었는데 늘어난 전사자 영혼미사는 귀신 잡는다는 해병 청룡전우들이 많았다. 일부 죽음은 지휘관의 무모한 작전의 소탕전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한국의 조 장군과 채 사령관이 미주월사령관 웨스트모렌드 장군보다 더 멋있었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분명 월남의 장병들보다 월등한 체격과 담력이었다. 그들은 태권도와 인삼에 관심을 가졌다. 헌데 다이한 장병들 특히 해병 청룡 백마까지 베트콩소탕작전에서 민간인을 첩자로 몰아 우리 사망자와 같은 숫자 6천여 명을 학살한 사실이었다. 수교 후에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해 특별 사과한 사실도 있다.


 이는 지난 한국전쟁에서 미군 등 외국 군인들의 우리 민간인 학살한 사실과 같다. 이는 전과에 전전 긍긍하여 마치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또는 첩자로 과잉 분류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국군도 9년 동안 33만 명이 파병되고 6천 여 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2만 여 명이고 고엽제 유사환자 까지 2만 여명 등이 있어 안타까웠다.


 나는 베트남에 파견되어 남루한 후회를 했다. 내나라 남북으로 분단되어 통일도 못하면서 월남의 민족통일을 방해하는 미국의 용병으로 파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와 80년 전쟁을 이겨내고 민족통일로 가는 길에 17도선 남북으로 나뉘어 다시 외세 미국을 비롯한 한국 필리핀 등과 전쟁을 치렀다. 진정 월남인들은 말한다. 제발 우리는 “공산 사회주의도 싫고 자본 민주주의도 아닌 전쟁 없는 우리의 민족주의로 통일되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옳았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군사정변은 사월혁명 후 민주정부를 뒤엎은 군사정권이었다. 박 정권은 경제적으로 난관이었다. 서독 광부와 간호원 파견에 이어 한국전쟁에서 미군 5만4천여 명의 전사자에 낸데 보은이란다. 미군의 월남전 희생에 동참할 것을 제의하여 파병이 결정된 용병이었다.


 미군은 한국군 10년간 파병 33만 명에 대한 전투수당 기타 파병에 따른 모든 경비를 지급하는 협정을 맺었다. 허나 고엽제에 관한 보상은 빠져 있었다. 그간 미국에 고엽제 보상을 법적 제기했으나 64년 한미 월남파견 각서에 들어있지 않다며 패소했다. 내 주변에도 참전한 전우들 중에 고엽제 환자들이 있다.


 미국은 한국전에서 무승부였다면 월남 전쟁에서는 완전 패배였다. 한편 한국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한때는 적국이었다. 허나 그들은 드디어 1973년 세계 막강 미국을 이겨내고 민족주의 정신으로 통일을 이루어낸 강국이 되었다.


 다행이도 한국과도 수교를 하여 많은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상호 우호국이 되었다. 필자도 베트남 참전 전우들과 수교 후에 3차례나 하노이 호치민시 붕타우 지안 나트란 캄란을 관광하면서 전쟁 아닌 평화의 삶을 보면서 한없이 부러웠다.


 자주 국립묘지 찾아, 함께 참전했다 숨진 전우들 묘소 앞에서 명복을 빌었다. 또한 조문환 장군묘 앞에서는 그때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자”는 그날의 훈시를 기억하면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몇 년 전, 운명한 채명신 주월사령관이 잠든 사병묘 앞에서 장군 묘를 사양하고 사병과 함께 한 정신에 대해 감사하며 명복을 빌었다.


 베트남 찬전 53년을 되돌아보면서 베트남은 호치민 같은 민족지도자가 존재했기에 세계 강국인 미국을 이겨내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언제 한반도 주변 열강들에 패권이 아닌 진정한 평화에 다가가는 그날이 언제나 올까. 수치스러운 분단 73년, 우리의 8천만 소원인 남북평화통일이 오는 그날을 염원해 본다.


  * 윤영전(尹永典) : 한국작가회의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수필가. (사)평화연대 이사장. 서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