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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가 되기를!(홍미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9-21 10:10
조회
491

: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및 모든 주민들이 평등한 나라


홍미정(단국대학교 아시아 중동학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이 모두 역사적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개종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의 역사학 교수 슬로모 샌드는 서기 70년에 로마제국 통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는 것은 신화이며, 유럽 유대인들은 개종을 통해서 창출되었다고 주장한다.


2022년 8월 30일,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 지리학 교수이며 인구통계 전문가인 아르논 소퍼의 이스라엘군 라디오 인터뷰에 따르면, 계속된 외국 유대인 이주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점령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은 전체인구의 47% 미만을 차지한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계와 유대인


6세기 후반에 출생한 예언자 무함마드는 꾸라이시 부족의 하심가문 출신이다. 5세기 초에 홍해 연안 메카 지역과 히자즈 산악지역에 기반을 둔 키나나 부족에 속해 있던 쿠사이 빈 킬랍이 이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목 친족들을 모아 메카와 카바를 지배하는 상업 중심의 꾸라이시 부족 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쿠사이를 모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꾸라이시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꾸라이시 부족의 1대 수장이 되었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5대 선조다. 그 이전에 꾸라이시라고 불린 사람은 없었다고 알려졌다.


이때 메카는 나무라곤 거의 없는 황량한 산에 둘러싸인 골짜기에 발달한 상업 도시였지만,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 인도 등과의 교역이 성행했고, 다신교도, 유대교도,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 하니프, 마즈닥교도, 마니교도 등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상업 중심지로 국제 무역의 통상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메카의 번영은 꾸라이시 부족의 상업 활동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오늘날 예멘 지역에 존재하던 힘야르 왕국(BC. 110–AD. 570)은 유대교로 개종하고, 기독교 국가인 악숨 왕국(AD. 1세기-960) 및 동로마 제국에 맞서 중앙 아라비아 정복을 추진하였다. 이 정복 전쟁 과정에서 힘야르 왕국은 메카의 다신교도 꾸라이시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꾸라이시 부족장 쿠사이는 힘야르 왕국의 투바 아부 카립아사드 카밀왕의 명령으로 무너진 카바 신전을 재건하였다. 쿠사이는 카바 주변에 우물을 파고, 가옥을 건축하고, 유목민들을 정착시켰으며, 카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카바 신전의 제사를 장악하였다. 당시 카바 신전에는 다양한 부족들이 신봉하는 수백 개의 신상들이 있었다.


쿠사이의 뒤를 이어 꾸라이시 부족의 2대 수장이 된 쿠사이의 아들, 압드 마나프 빈 쿠사이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고조할아버지다. 메카에서 압드 마나프의 샴쌍둥이 아들인, 하심과 압드 샴스는 하심의 다리와 압드 샴스의 머리가 붙은 채로 태어났다. 아버지 압드 마나프가 이들을 칼로 분리했다고 알려져 있다. 압드 샴스는 우마이야 빈 압드 샴스의 아버지로 7세기 중반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세운 우마이야 가문의 선조가 되었고, 하심은 예언자 무함마드를 배출한 하심가문의 시조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증조할아버지다.


하심은 메카에서 꾸라이시 캐러반을 시작한 유능한 상인이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통치하의 예멘으로, 동로마 제국 통치하의 시리아로, 앙카라로 국제 무역을 하였으며, 일신교인 아브라함의 종교를 가졌다는 뜻으로 하니프라고 알려졌다. 하심은 매년 메카로부터 북방으로 약 340㎞에 위치한 야스립(메디나)을 지나갔고, 그곳에서 시장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야스립에 거주하는 카즈라즈 부족의 분파 낫자르 씨족의 살마 빈트 암르와 결혼하였다. 살마 역시 캐러반들과 거래를 하는 낫자르 씨족 내에서 명망이 있는 상인이었다. 하심은 야스립을 지나갈 때마다 그녀의 집에 머물렀고, 살마가 임신했을 때, 시리아로 떠났다. 살마는 야스립에서 상업을 계속하면서 가족들과 가정을 지켰고, 하심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이바 빈 하심(예언자 무함마드의 할아버지)을 키웠다.


사이바가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었을 때, 하심은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무역 활동을 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야스립에서 태어나서 성장하던 사이바는 삼촌 무딸립 빈 압드 마나프의 제안으로 야스립보다 부유한 상업 도시 메카로 이주하였다. 사이바가 삼촌 무딸립을 따라 메카로 들어가자, 메카 사람들이 사이바를 무딸립의 노예로 알고, 그의 이름을 압둘 무딸립으로 불렀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사이바보다 압둘 무딸립으로 더 흔하게 불렸다.


어느 날 압둘 무딸립은 카바 신전 주변 약 20m 떨어진 곳에서 잠잠 우물을 발견하였다. 이후, 압둘 무딸립은 잠잠 우물을 관리하며 메카를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권리를 획득하였고, 그의 아들 알 압바스가 이 권리를 이어받았다. 8세기 중반 알 압바스 가문의 후손들이 압바스 칼리파조를 개창하였다.


메카에서 압둘 무딸립은 유복자로 태어난 손자이며 훗날 예언자가 된 무함마드를 키웠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압둘 무딸립이 사망하였다. 이후에는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달라와 동복형제인 삼촌 아부 딸립이 자신의 아들 알리와 무함마드를 함께 키웠다. 캐러반을 이끌었던 아부 딸립은 하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 무함마드와 알리는 형제처럼 자랐고, 훗날 알리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남편이 되었으며, 시아파의 1대 이맘이 되었다.


622년 예언자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야스립(메디나)으로 이주하면서 증조할머니 살마 가문인 낫자르 씨족과 함께 거주하였고, 이후 같은 장소에 예언자의 모스크가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623년 작성된 메디나 헌장은 사실상 낫자르 씨족의 유대인을 포함하는 메디나 거주 유대인들과 무슬림들과의 동맹을 명시한 문서다. 따라서 이주한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거주지를 제공한 낫자르 씨족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메디나에 거주하던 낫자르 씨족과 누세이바 씨족을 포함하는 더 큰 규모의 카즈라즈 부족 대부분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였으며,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636년 시작된 예루살렘 정복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현재 낫자르 씨족과 누세이바 씨족은 예루살렘의 무슬림 명문 가문들이다. 특히 누세이바 가문은 예수 무덤 교회의 관리인으로 성묘 교회 정문 열쇠를 관리하고 있다.



성묘교회 관리인 와지흐 누세이바


개종을 통해 형성된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2008년 9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의 인터뷰에서 슬로모 샌드는 “기원전 6세기에 일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벨론으로 추방당하지 않았고, 정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만이 바벨론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받았다. AD 70년에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동부 지중해에 어떤 지역으로부터 어떤 민족도 추방하지 않았다. 노예가 된 죄수들을 제외하고, 일반 유대 주민들은 두 번째 성전 파괴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땅에서 살았다. 4세기에 일부 예루살렘 주민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7세기 아랍 정복 이후 다수 예루살렘 주민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일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조상은 유대인이다. 예를 들면, 헤브론에는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가문들이 있다. 헤브론에 거주하는 드웩 가문 중 일부가 14세기 이집트 맘룩 통치하에서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스라엘 유대인 드웩과 팔레스타인 무슬림 드웩은 조상이 같은 유대인 가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515년 오스만제국이 정복한 시리아 알레포 지역의 세파르디 유대인 야콥 사울 드웩 하코헨은 오스만제국 술탄이 임명한 시리아 알레포의 하캄바시(유대교 최고 랍비, 재임:1904~1908년)였다. 드웩은 세파르디 유대인 공동체 하캄바시 가문이다. 알레포의 하캄바시는 야콥 사울 드웩 하코헨 이전에도 사울 드웩 하코헨(1869–1874), 모세 하코헨(1880–1882), 아브라함 에즈라 드웩 하코헨(1883–1894) 등의 드웩 가문이 장악하였다.


그런데 1942~1947년 사이에 약 4,500명 정도의 시리아 및 레바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948년에는 시리아에 40,000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였다. 이들 중 1948~1961년에 약 5,000명의 시리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이때 알레포의 드웩 가문도 이스라엘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동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에도 드웩 가문 출신 무슬림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필자가 2016년 『21세기 중동 바르게 읽기: 재설정되는 국경』을 출판할 때, 그림 4 작품을 제공한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명한 팔레스타인 무슬림 화가 탈렙 드웩,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 고위급 지도자 아지즈 드웩 등 드웩 가문 출신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2년 12월 8일, 미국 언론인 필립 웨이스와의 인터뷰에서 슬로모 샌드는 “유대인과 예루살렘 성지 사이의 유대관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땅에 대한 종교적 유대관계가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지지한다. 그 이유는 성지에 대한 유대인의 역사적 권리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오늘날 존재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파괴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새로운 비극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시온주의는 존재할 권리를 갖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슬로모 샌드는 2010년 출판된 『유대민족의 발명』을 저술하였다.


슬로모 샌드의 희망처럼, 이스라엘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을 포함하는 주민들이 모두 법 앞에 평등한 권리를 누리며,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