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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의 이름에 대한 애가(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11-30 09:44
조회
334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누가 누구의 이름을 지운단 말인가? 누가 그들의 이름을 지우고자 하는가? 누가 그들의 안타까운 이름을 목놓아 부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위법의 딱지도 모자라 패륜의 딱지를 붙이는가? 희생자들의 이름을 깡그리 지운 채 위선의 분향 나들이에 나선 대통령이란 자의 잔인무도함이야말로 위법한 패륜임을 과연 모른단 말인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황당한 정치술을 믿고 따르는 정치집단과 언론 권력의 패거리야말로 위법에 패륜을 더하는 자들임을 과연 모른단 말인가?


<출처 : 시사주간>


정치적인 권력을 움켜쥐는 짓에 온통 사로잡힌 자들, 그 흉악무도한 손으로 선량한 그들의 안타까운 이름을 지운다. 증거인멸, 위선적인 분향, 모든 국민이 추도하는 장소에 황망하게 희생당한 그들 아름답고 꽃다운 청춘들의 이름들을 지웠다. 아울러 분향 추모의 검은 리본에서 추모를 지웠다. 그리하여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잘못을 숨기고자 하는 자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이 기어코 범죄임을 드러낸다.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은 아름다운 청춘의 이름에는 그/녀의 두 눈빛이 형형하게 새겨져 있다. 익명에는 눈빛이 지워지고 없다. 살아있을 때의 생기발랄한 눈빛이 지워지고 만다. 잊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음으로써 죽은 자의 삶은 산 자가 책임진다. 죽은 자들의 이름에는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 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 한 사람 한 사람 그 이름을 애써 밝히는 일은 살아남은 자들이 희생자들의 삶을 대신 살고자 하는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다. 이를 짐짓 거부하고 무시하면서 재빠른 망각을 획책하는 자들은 공동체의 세상을 함께 살아갈 권리가 없는 자들이다.


참사를 예방해야 할 자들, 참사에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무지와 무능, 나태함과 무책임함, 무엇보다 유일무이한 생명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그 권력의 잔인함에 의한 아집과 독선으로 아직 너무나도 생생한 저 목숨의 흔적을 하나라도 더 지우기에 동분서주, 무작정 바쁠 뿐이다. 가장 강인한 흔적, 결단코 지워질 수 없기에 심지어 흔적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눈을 부릅뜬 흔적인 이름들을 맨 먼저 지웠다. 이는 참사에 참사를 뒤덮는 이중 살인이다.


누군가의 이름은 그의 존재가 그 무엇, 그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음을 밝힌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엄마 몸속의 태아에게 일찍이 태명을 붙여 부르는 까닭은 아무 탈 없이 태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거니와, 그 존재의 유일무이함의 신비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이름에는 부모의 마치 못다 해 안타까운 양 무한한 사랑이 한껏 쟁여져 빛나고 있음이다.


그런데도, 대통령 윤석열, 그의 은덕을 입은 행정안전부 장관 이상민, 이상민이 자리를 만들어 굳이 앉혀놓은 프락치 의혹의 경찰국장 노순호, 경찰청장 윤희근, 서울경찰청장 김광호 등은 자신들의 이름들만이 빛을 잃고 더럽혀지는 일을 극구 막고자 저 희생자들의 고귀한 이름들을 아예 지우고자 노심초사 안절부절이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신 속에 간직한 서로의 존재를 불러올리는 것이다. 비명의 외마디가 울려 퍼졌을 그때, 이태원 그 잔인한 골목은 자신의 이름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들로 가득 차 있었고, 하지만, 그 절박한 마지막 음성으로 ‘엄마!’, ‘어머니!’라는 영원한 이름을 불렀다. 그랬으리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어머니, 어머니는 혼절의 비명으로 딸의 이름,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른다. 그 부르는 이름이 허공으로 날리고 마는 처절함에도 부르고 또 부른다. 그리하여 기어이 더는 직접 부를 수 없는 그들의 이름이 애써 살아남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가족들의 마음 깊숙이 뚜렷이 새겨져, 매 순간 에밀레종 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저 잔혹한 자들은 일면식도 없는 자들의 이름은 아예 이름이 아니라고, 불러주는 순간 귀신으로 되살아나 자신들의 잔인함을 폭로하여 불면에 시달리게 할 뿐이라고, 대통령실이니 행정안전부 장관실이니, 법무부 장관실이니, 경찰청장실이니 하는 밀실에서, 맨 먼저 그 이름들을 지워버려야 해, 국민의 입에서 그 이름들이 발설되도록 해서는 안 돼, 국민의 귀에 그 이름들이 들리도록 해서는 안 돼, 국민의 눈에 그 이름들이 새겨지도록 해서는 안 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재빠르게 속닥거렸을 것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출처 : 윈도우포럼>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라고 읊었다.


살아남은 우리는 황망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이름을 뚜렷이 불러줌으로써 그들의 존재의 빛깔과 그들 삶의 향기를 끝내 기억하고 추념할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자들의 이름을 지워버리려는 자들의 이름, 빛깔이나 향기는커녕 칙칙한 악취를 풍기는 그자들의 이름은 아예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버려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름다운 꽃으로 살아있어야 할 희생자들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려면 그자들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름을 지우고자 하는 저자들의 잔인함을 비롯한 무지와 무능, 아집과 독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잊지 않고 책임지게 하고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만, 저자들이 지우고자 한 희생자들의 이름들이 오롯이 빛날 것이고, 그 이름들을 죽어라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의 이름이 살아 오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10.29 이태원 참사 넋들과 유가족들의 참혹한 심정을 대신해 불세출의 민족 시인인 김소월의 시 <초혼>을 삼가 올린다.



<출처 : 경북매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