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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으세요? (송기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5:04
조회
396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아이를 데리고 놀이동산에 간 어느 날,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늘어선 줄의 앞에 선 어느 젊은 여인이 내게 묻는다. “예수 믿으세요?” 그저 빙긋이 웃을 뿐 답이 없으니 그 다음 이어지는 말, “구원의 확신이 있으세요?” 참으로 난처한 질문이다. 초면에, 그것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사이에 단도직입적으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그런 방식의 전도행위를 권하는 종교단체가 존재하는 우리 사회는, 참으로 종교적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종교적 심성이 깊은 시민들로 가득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며칠 전 서울외국어고등학교에서는 어느 목사를 초청하여 학생들에게 종교예배 참석을 강요하고 또 그것이 앞으로 그 학교가 미션스쿨로 향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항의하는 글이 홈페이지에 올라오자 학교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삭제하였다. 이 문제에 관한 것은 졸업생들이 쓴 짧은 글 두어 편이 보일 뿐이다. 교장이나 이사장이 계획하였을 이런 일이 종교적 열정에 불타는 순수한 신앙심이나 학생들을 바로 기르기 위한 교육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오늘도 죄악에 허덕이는 불쌍한 불신자를 향한 전도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어느 종교인이나 자신이 믿는 신앙을 나누기를 원하고, 참으로 옳고 영원한 진리를 전파하고자 애쓴다.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몇 가지의 사례에서 앞으로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갈등의 요인이 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징조를 읽는다. 매우 공격적인 종교적 태도와 선교의 방법이 일상화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기독교의 특정 종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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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네이버


그렇다고 기독교만을 비판하자는 것도 기독교가 모두 그렇다고 말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른 종교가 더 낫다고 말하려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다만 잘못된 종교전파의 행태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고 바람직한 선교의 모습을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나 다른 어느 종교도 같은 행태를 보인다면 마찬가지의 비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앞에서 든 예에 나타난 종교 전파의 방식은 우선 상대방을 존엄과 가치를 가진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종교적으로 죄인이라고 보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의 생각이 올바르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람은 한 인간으로서 고귀한 존재이며 또 그렇게 대우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이 지나치면 자신이 깊이 믿어마지 않는 신앙을 가지지 않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저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모양이다. 성찰적 자세로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그러한 연민과 구원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결과가 불신지옥이라는 식의 공격적 선교행위로까지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런 방식은 상대방의 궁박한 처지를 이용하여 종교적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다. 100여 년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는 국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으로 종교적 진리를 널리 펼쳐왔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인은 전 국민의 4분의 1에 달하고 종교단체 또는 종교인들이 수많은 학교를 ‘가지고’ 있고 사회적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학교교육에서 종교학교의 비중은 낮지 않으며, 취학전 교육 단계에서의 종교학교의 비중은 더욱 높아진다. 이와 같은 종교단체의 학교교육과정에서는 학교교육에 종교교육이 덧붙여져 학생의 의사에 반하는 종교교육과 선교가 이뤄지는 예가 많다. 교회 등 종교단체 안에서는 ‘감히’ 가하지 않고 또 가하지도 못할 강제를 학교에서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성적평가에 반영한다. 학생회 활동에 종교에 관한 조건을 붙이기도 한다. 교회와 같은 종교단체보다도 학교는 더욱 강력한 종교교육과 선교의 도구가 된다. 종교단체에서는 생각지도 않는 강제가 학교에서는 오히려 당연히 강제되는 기이한 현상이 교육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학교교육은 법률에 의하여 인정된 교육제도라는 점에서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제도종교가 학교를 통해 종교교육을 강제하는 것은 사실상 국가에 의한 종교교육 방임이라는 점에서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규정한 헌법에 반한다고 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종교적 행태의 뿌리는 멀리 이승만 정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된다.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는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이윤영 의원(목사)에게 개회기도를 부탁하여 국회에서 “하늘에 계신”으로 시작하여 “아멘”으로 끝맺는 전형적인 기독교식의 기도가 행해진다. 이 무렵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 국민의 5% 정도에 불과했음에도 이승만의 종교적 성향에 의하여 특정 종교의 기념일인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지정되고 군대와 교도소에 근무하는 종교성직자가 기독교에 한정된다. 기독교 편향적인 정책에 발맞춰 선거에서 기독교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세속국가에 당연시되는 정교분리에 관한 의식이 극히 미약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은 종교전파의 행태가 오늘날의 공격적 선교행태를 낳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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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네이버


종교인이 종교를 믿고 신앙을 전파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모든 사람이 종교적 차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면 이 사회는 훨씬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의 전파는 종교적 삶의 거룩함과 감동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이어야지 권력을 이용한 강제적 방법으로 이뤄져서는 안된다. 인간의 깊은 심연에서 우러나는 고백이야말로 종교의 기초이며 그러한 고백은 결코 강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은 단순히 특정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기에 진지한 삶에 대한 고민과 인간의 깊이를 탐구함으로써 실시되어야 하는 것이며, 학생의 진지한 의사에 반하여 강제를 하는 것은 입으로만 종교적 진리를 고백하게 하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는 결국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교육적이지 않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의 자유라는 인권을 침해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올바른 종교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종교의 신자를 만드는 종교교육보다는 종교적 삶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특히 자신의 신앙 이외에 다른 종교를 이해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개종하여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신앙인의 징표라고 믿는 사람이 다수가 될수록 이 시회에서 종교가 촉발하는 갈등은 깊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원종교사회에서 올바른 종교교육이야말로 단지 필요한 것만 아니라 절박하기까지 한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