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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추억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7:00
조회
225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지난 7월 하순에 한국에서 방문한 동료교수들과 합류하여 프랑스혁명기행을 열흘 동안 다녀왔다. 천리 길(4천 킬로미터)을 넘게 달리는 강행군이었지만 세계를 흔들었던 대사건의 주요현장과 기억의 터를 돌아보며 그 역사적 유산과 그 현재적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혁명'이라는 용어가 동반하는 너무 심각하고 거창한 무게와 찬란함을 싫어하지만, 기행을 통해 얻은 몇 가지 개인적인 단상들을 '프랑스혁명과 인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프랑스혁명은 과연〈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천명했던 압제에 대한 저항권,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 부당하게 공권력에 의해 구금·체포되지 않은 권리 등을 현재까지 얼 만큼 실현했을까? 프랑스혁명의 의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혁명은 출생에 의한 특권을 재산에 의한 특권으로 대체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야유한다. 성직자-귀족-평민이라는 신분제도가 법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사유재산의 신성불가침을 보장함으로써 (많이) 가진 자와 (적게) 못 가진 자 사이의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는 주장이다. 혁명기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 직전까지 갇혀 있던 센 강 옆의 콩시에르쥬리에 재현된 당시 감옥이 수감자의 빈부차이에 따라 크기와 내부시설이 달랐다는 것을 관찰해 보면 일리 있는 불평이었다.

우리가 프랑스혁명이 잉태한 폭력과 공포의 상징처럼 흔히 알고 있는 기요틴은 사실은 '죽음의 평등'을 위해 특별고안된 것이다. 루이 16세를 포함한 지배계층, 혁명의 과격파와 온건파, 일반시민과 노동자가 동등하게 기요틴 앞에 목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혁명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누구였을까? 지난 200년 동안 축적된 연구결과를 다소 거칠게 요약하면, '재산을 가진 백인남자'가 정답에 가장 가깝다. 권리선언이 보장한 각종 시민권들은 남자에게만 한정되었다는 깨달음이 올랭프 드 구즈라는 여성이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을 별도로 발표하게 된 배경이다. "기요틴에 올라갈 동등한 권리가 있듯이 여성에게도 연설할 권리(=시민으로서의 공민권)를 보장하라"고 외쳤던 구즈 역시 기요틴에 목숨을 빼앗겼다. 무려 150여년 뒤인 1940년대가 되어서야 프랑스여성에게 처음으로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여성들에게는 프랑스혁명이 없었다"라는 한탄이 근거 없는 억지는 아닌 셈이다.

프랑스혁명이 백인 중심적이었다는 해석은 논쟁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에서 크게 비켜나지 않는다. 비록 혁명정부가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도의 철폐를 선언했지만 유색인종을 조건 없이 자유, 평등, 우애의 품으로 포옹하지는 않았다. 프랑스혁명에서 용기를 얻은 아이티 흑인들이 식민지배에 반발하여 최초의 흑인공화국을 수립하려고 투쟁할 때, 나폴레옹은 그들의 영웅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를 체포하여 머나 먼 프랑스 산골짜기 감옥(Fort-de-Joux)에서 사망하도록 방치했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유색인도 혁명의 괄호 바깥에서 부당하게 신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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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영웅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가 사망한 프랑스 산골짜기 감옥(Fort-de-Joux)
사진 출처 - 필자


주지하듯이, 이데올로기적 좌표의 기준으로 통용되는 사용되는 '좌파(Left)'와 '우파(Right)'라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의회의 우연한 좌석배치에서 연유했다. 공화정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왼쪽 편을 차지했고 입헌군주정을 선호하던 보수온건파들은 오른쪽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퀼로트(노동자계층)의 전폭적인 정치적 후원을 받으며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좌파의 우두머리격인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후대 프랑스인들의 기억과 선호는 어떤 빛깔일까? 답사단의 한 사람이 "프랑스에서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혁명좌파가 너무 심한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푸념할 정도로 이들은 냉담한 대접을 받았다. 혁명의 진원지이며 핵심무대였던 파리에는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거리는 물론이고 그 흔한 기념동상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우리가 찾은 그의 고향(아라스, Arras)에서조차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일행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프랑스판 혁명기행안내책자에도 기록되지 않은) 그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를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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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
사진 출처 - 필자


한가롭게 '남의 나라' 혁명의 흔적과 발자취를 찾아 헤맸던 필자가 느낀 전반적인 인상은 혁명의 주변인 혹은 이단자에 대한 역사기억 만들기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억압되었다는 점이다. 선구적 페미니스트 구즈가 거주했던 파리소재 집은 조그만 명패로만 남아있었고, 혁명발발 전 신분의회의원에 선출되어 베르사유에 머물었던 로베스피에르의 숙소는 찾을 길이 없었으며, 진보정당의 전신이었던 자코뱅 클럽이 있던 장소는 현대식 쇼핑센터가 삼켜 버렸다. '베허 버려야 할 왕의 모가지'가 사라진 오늘 날, 혁명의 날카로운 추억은 체 게바라의 캐리커처를 그린 티셔츠로만 전 세계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나에게 물었다. 내가 젊은 그대에게 다시 묻노니, 지금 당신은 무슨 냄새를 더듬으며 쓸쓸히 거리를 헤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