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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7:23
조회
584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1944년 ILO 26차 총회가 열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프랭크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각국의 노동, 기업, 정부 대표가 모여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모든 관행, 예를 들어 사내하도급이나 근로자공급과 같은 시장거래나 경제적 계약관계를 근로 계약관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 선언은 근대적 노동법의 기초이자 자본주의적 근대노동의 기본원리이다.

근대적 노동은 노동자를 고용한 자(고용주)와 노동을 사용하여 이익을 얻는 자(사용주)가 같다는 점에서 ‘직접고용’이며, 사용주(=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근로계약관계’에 기반 한다. 사용자는 근로자를 함부로 해고해서는 안 되며 적절한 임금 및 근로조건을 보장해야 하고 단체교섭의 당사자로서 성실교섭의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인간의 노동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전근대적 관행, 즉 사내하도급이 주요 대기업의 핵심 경쟁력이다. 부르는 명칭도 사내하청, 용역, 위탁, 외주화로 다양하다.

사내하도급이 왜 근대적 노동원리에 반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노동자를 고용한 자(고용주)와 그 노동을 사용하여 이익을 얻는 자(사용주)가 같지 않다. 예컨대 2010년 11월 15일부터 파업을 했던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고용주는 사내하청 업체이다. 하지만 그 노동을 사용하여 이익을 얻은 사용주는 현대자동차이다. 때문에 적절한 임금 및 근로조건을 보장하고 단체교섭의 당사자로 나서야할 사용자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숨바꼭질이 벌어진다. 2010년 10월 6일부터 11월 5일까지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정규직화 이행을 위한 단체교섭을 현대자동차에 요구하였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듯이,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실질적인 사용자를 사용자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항변한다. 반면 현대자동차 사용자는 교섭당사자가 아니라며 단체교섭을 거부했다. 길동의 아버지가 길동을 부정하였듯이 나는 너의 사용자가 아니라고 응답한 것이다. 그런데 해년을 거듭하여 진짜 사용자찾기를 하다 해고되거나 분신하는 것은 언제나 노동자들이다. 홍길동처럼 다른 세상을 꿈꾸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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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2010년11월 30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다음으로 근로계약관계가 아닌 시장거래관계이다. 원하도급 업체 간의 도급계약을 해지하면 근로계약도 자연스럽게 없어진다는 점에서 항상 해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급계약이 3개월, 6개월 수준으로 이루어져 경기가 나빠지면 언제나 인원을 줄일 수 있다. 사용자측은 이것을 시장수요 혹은 경기변동에 따른 고용 유연화의 필요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선언의 핵심은 인간의 노동은 상품인 자동차와 달라서 시장수요나 경기변동에 따라 줄이고 늘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고무줄도 아닌데 어떻게 줄였다 늘였다를 마음대로 하겠는가. 근로계약관계가 어떤 형태로든 고용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경제적 계약관계는 고용을 자동차와 같은 상품으로 바라보아도 좋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내하도급이 한국에서는 너무 많다. 2008년 300인 이상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노동부 전수 조사에 따르면 총 1,764개 사업체 중 사내하도급 활용 업체는 963개로 전체 기업의 54.6%이며, 사내하도급 근로자는 368,590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18.8%에 해당한다. 또한 활용 사업체의 사내하도급 근로자 비중은 28%이다. 대기업일수록 사내하도급 활용 비중이 높고 민간부문보다는 공공부문에서의 활용 비중이 더 높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1970, 80년대에는 정부가 중공업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사내하도급을 권장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대기업이 경쟁 및 효율성을 내걸고 사내하도급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 지구적 경쟁격화를 근거로 1997년 이후 대기업의 사내하도급 활용 비중은 2배 이상 늘었다. 업종별로 사내하도급 활용의 표준모델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대기업이고 대기업 따라 하기는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간혹은 따라 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강요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기업의 단가인하 압력은 사내하도급과 비정규직 활용을 협력업체의 선택지로 만들기 때문이다. 사내하도급은 근대적 노동형태도 아닐 뿐만 아니라 시장 논리도 아닌 것이다.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1990년대 이후 민간기업보다 공기업에서 사내하도급을 더 많이 사용할까. 공기업은 지구적 경쟁은커녕 국내 시장 경쟁도 하지 않으며 효율성이 반드시 사내하도급 활용일 이유도 없다. 공기업 선진화에 관심을 가진 어떤 학자는 필자에게 공기업 전체의 인건비가 비용의 5%에도 못 미친다고 토로한다. 그런데 공기업 경영평가 결과 1, 2위를 다투었던 모 기업은 2003년 3,500여명이던 사내하도급(정규직은 700여명)이 2010년 5,300여명(정규직 800여명)으로 바뀌었다. 사업의 확장이 곧바로 사내하도급 활용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경영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요인이다. 시장 논리가 아닌 정책논리가 사내하도급을 키우고 있다는 단적인 사례이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혹자는 사내하도급을 소작제로 비유한다. 지주의 자리에 원청을, 하청의 자리에 마름을 놓아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고용 문제에 관한 한 근대적인 것이 낫다. 한국의 대기업이 지주가 아니라면 사내하도급을 직접고용으로 바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