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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의 “정의(justice)”(은수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8:11
조회
168

은수미/ 사회학



우리가 세계화 시대의 위력을 깨달은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가 1997년 IMF 위기 일 것이다. 난생 처음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하여 국민들은 너도 나도 금모으기에 동참하였고 막대한 공적 자금을 쏟아 대기업을 살리는데 동의했다. 온갖 희생도 감내했다. 정리해고제나 파견법이 도입된 것도 바로 그 때이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가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되로 받으면 말로 주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으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소박한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디면 좋은 시기도 “함께” 나눌 것이라는.

물론 그런 믿음은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며 공공연한 약속도 아니다. 따라서 긴박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근거로 일상적으로 정리해고(그것을 명예퇴직이든 희망퇴직이든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하지 않겠다)를 하거나 이윤이 남아 주주에게 막대한 배당을 하면서도 정리해고를 서두르는 대기업에게 사회적으로 그럴 법한 일인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국민세금이, 공적 자금이 투여되었는가를 되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지 모른다. 또한 그때 기업에 투자된 돈은 단지 돈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믿음과 신뢰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겠다.

사실 사회도 바뀌었다. “자기, 나 사랑해?”라고 물으면 “일일이 말해야 아느냐” 거나 “남부끄럽게 ‘자기’가 뭐냐”면서 퉁명스럽게 입을 닫아버리는 것은 이제 과거의 사랑이나 믿음의 방식이다. 지금은 하루에 수십 번 메시지를 보내고 리플을 달며 모닝콜을 하고 시시 때때로 꽃을 안겨야 사랑하는가 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시대에 확인해본 적도 없는 믿음이나 신뢰에 기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사랑이나 믿음도 끝이 난다. 새봄은 오지만 그 봄날은 간다.

때문에 우리가 십여 년 전 나라를 살리고 기업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했는데, “너 나에게 이럴 수 있어”라고 소리칠 필요는 없겠다. 또한 기업은 이윤만 내면 그만이라지 않는가. 한진중공업이 영도 조선소를 그대로 두고 수빅 조선소로 옮기는 것이나 모 공기업 근로자의 87.5%가 비정규직인 것이,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를 불법 파견 받는 것이나 월 100만원 받는 청소 노동자를 비싸다고 80만 원짜리로 갈아 치우는 것이, 다 이윤 때문이라는데 그것 모르고 기업 살리기를 했다면 그런 행위를 한 사람만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필자는 당시 금이 없어서 금모으기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나라 살리고 기업 살리기 위한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때문에 앞으로 똑바로 살아가려면 스스로에게 좀 따지고 생각해볼 것이 있다. 게다가 “혹시 좌우명이 있어요?”라고 누가 물을 때 마다 고민 고민하며 내놓는 답이 “‘두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거요” 이다. 그래서 두 번 실수 하지 않으려고 최근의 고민을 하나 던진다.

기업이 해외에 나가거나 정리해고를 하거나 비정규직을 쓰는 것은 모두 경영상의 자유이며 시장 경쟁의 원리라고 한다. 사회의 한 구성 부문인 기업과 시장이 자신의 규칙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기업과 시장만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금모으기에 동참한 대한민국 일반 국민이 사실 사회의 지배적 다수이다. 때문에 이들로 구성된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경쟁과 자유를 넘어서는 가치와 규칙이 있기 마련이며 그것이 정의와 연대일 것이다. 금모으기를 한 것이나 태안반도의 기름유출 사고 당시 60만이 넘는 인간띠가 이어진 것은 정의와 연대의 가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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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7월 31일 새벽 부산 영도구 청학성당 인근 도로에서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하늘로 풍등을 띄우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래서 헌법이나 노동법에서는 사회적 정의와 연대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며, 사회의 한 구성 부문으로서 기업이나 시장도 경쟁과 자유 이상으로 정의와 연대를 고려해야 한다. 경영상의 자유는 무제한이 아니며 그것이 사회적 정의 혹은 사회권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진 중공업의 정리해고는 정리해고의 정당성에서부터 사내하청의 활용이나 고용불안정에 따른 비용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정의 측면에서 상당한 문제가 있다. 또한 세계화 시대에는 경영상의 자유가 전 지구적인 것 만큼이나 사회적 정의 역시 전 지구적이다. 따라서 정당성 없는 정리해고나 값싼 노동력 착취는 사회적 정의를 전 지구적으로 망가뜨리는 것이다. 기업과 시장, 즉 자유와 경쟁이라는 좁은 눈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 공동체, 즉 정의와 연대라는 넓은 눈에서 보면 한진 중공업 사례는 세계화 시대의 가치와 규칙을 되묻게 한다.

하지만 한 국가에서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세계적인 시야에서 정의와 연대를 세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업에게 경영의 자유가 있다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당한 노동과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 그리고 세계 인권선언이나 한국의 헌법에서 강조하는 것은 후자이며 그것이 기업이나 시장을 넘어선 사회의 구성 원리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전에 세계화 시대에 맞게 사회적 정의를 재조직하고, 사회권을 망가뜨리는 괴물에게 백신을 투여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제 수다를 떨어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