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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을 넘어서 (권보드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1 09:46
조회
174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근심 마오. 인민의 조국 소비에트 앞에 나는 아무 죄진 일이 없소.”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가 1937년 비밀경찰에 끌려갈 때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개척자로 활약했던 조명희가 소련으로 망명한 것은 1928년, 그러니까 「낙동강」을 발표하고 일 년여 후다. 어렸을 적 해방된 북녘의 교과서에서 처음 「낙동강」을 배웠다는 소설가 최인훈은 장편소설 『화두』에서 조명희와 「낙동강」을 계속 씨줄 삼아 쓴다. 중학 시절 독후감 과제였던 「낙동강」, 문학에의 첫 걸음이었던 조명희, 스탈린문학상 수상자였던 그를 둘러싸고 북녘에서 떠돌던 소문 등― 그러나 러시아로까지 최인훈을 끌고 간 것은 1990년대 초에야 전해졌던 조명희의 최후에 대한 기록이다. 1940년대 초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던 조명희가 실은 1938년 5월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알려졌기 때문이다.

조명희가 남긴 “근심 마오.”를 전하면서 최인훈은 익숙한 기시감 또한 전달한다. 조명희는 망명 후 “인민이 자유롭게 호흡하는 소련에 들어온 감개무량한 기쁨으로”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소련작가동맹의 맹원으로 원동작가동맹위원회 조선문학부를 책임지고 있었고, 체포될 당시 조선인 학교인 육성농민청년학교 조선어문학 담당 교사로 있었다. 식민지 조국을 벗어나 자유와 보람의 나날을 살던 조명희에게 소련은 굳건한 신뢰의 대상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일반적인 정조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명희가 진심으로 “근심 마오.”라며 아내를 위로했듯 처형당하는 그 순간까지 소비에트의 이상을 믿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터이다. 최인훈은 조명희가 처형당할 무렵 있었던 ‘모스크바 재판’을 떠올리면서 소리 높여 유죄를 인정했던 피고들과 재판을 지지했던 지식인들을 상기한다. 전(前) 혁명 전사들이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제 죄를 고백했고, 고리끼와 솔로호프, 로맹 롤랑과 루이 아라공 같은 국내외 작가들이 고발과 단죄에 앞장섰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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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낙동강>의 작가 조명희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는 모스크바 재판이 조작된 것이었다고 폭로한다. 스탈린을 암살하고 소련 체제를 전복하려 기도했다고 고발당했던 피고들 대부분은 고문을 이겨내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피고들이 마치 사형을 청원하는 듯했던 장면은 조작만으론 해명되지 않는다. 그들, 재판의 연루자들은 자기 자신의 희생을 목도하면서도 소비에트의 정당성을 믿었다. 그것이 최인훈의 해석이다. 국외자들로선 말할 나위도 없다. “설사 피고들에게 억울한 점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억울함을 밝히는 것은, 더 큰 대의, 역사 자신의 큰 줄기의 이익에 대해 해가 될 염려가 있었다.” 소비에트는 악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는 나라였으므로. 악이 너무나 명백하고 위력적이어서, 그에 맞서는 축을 정당화하고도 남았으므로.

조명희의 죽음이나 모스크바 재판은 멀리는 제 1차 대전 이후, 가까이는 제 2차 대전 이후 20세기 후반을 지배했던 ‘진영 논리’의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적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이편의 도덕성이 절로 보장되던 시절을. 옳은 편을 지켜야 한다는 동기가 다급하여 ‘정의’나 ‘정당성’ 같은 말을 무지나 한가의 소산으로 치부케 했던 시대를. 소련과 미국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스탈린주의와 매카시즘으로 경쟁했던 체제의 중심으로 보는 건, 너무 많은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이겠지만, 차라리 그런 단순화가 필요하다고 생각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

‘인권’을 앞세운 제국의 개입은 뿌리부터 의심스럽다. 같은 제국이 남미의 독재 정권을 후원하고 민중 봉기를 짓밟았으므로. ‘인권’을 내세워 북조선 체제를 문제 삼는 목소리도 미심쩍긴 마찬가지다. 그 목소리가 과연 동등하게 내부의 인권을 향하는지. 보편적 주제를 다룰 때조차 속내를 헤아려야 하는 것은 요즘도 마찬가지다. 보편 자체를, 그 용법을 의심했던 습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절은 바뀌고 있고,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자주 떠오르곤 한다. 타도해야 할 적이 있고, 상대의 불의가 내 정당성을 보장하며, 그 밖의 문제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론 ‘숙청’의 고리를 끊을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조명희는 끌려가는 그 순간까지 소비에트를 신뢰했고, 어쩌면 처형장에서조차 제 목숨보다 소비에트의 빛나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더 큰 대의, 역사 자신의 큰 줄기의 이익”이 어쩔 수 없이 억울한 희생도 수반하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그런 숭고가 다시 빛나기 위해서라도 ‘인류의’, ‘보편적인’ 정의를 쌓아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