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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철근 좀 쓴다고 한강 다리가 무너지랴(이광조 CBS PD)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4:58
조회
255

이광조/ CBS PD



“서유럽과 미국에서 만들어져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근대사회는 미래에 대한 낙관을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삼아 왔다. 그러나 경험과 이성을 두 축으로 문명의 발전을 의심하지 않았던 인류는 지난 수십 년간 환경 문제 등 예기치 않은 도전에 부딪히고 있다. ‘위험사회’와 ‘성찰적 근대화’란 개념을 통해 근대문명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독일 뮌헨대 울리히 벡 교수를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장훈 교수가 만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실체와 돌파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편집자)...

장훈 : 당신이 발표한 ‘위험 사회’의 개념은 환경 위기, 복지국가의 실패와 같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위험사회’란 어떤 것이며 그런 개념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울리히 벡 :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서 정치, 경제, 사회 체제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런 합리성의 부수적 결과들이 예측 불가능해 짐에 따라 일상생활 속에서 커다란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체르노빌에서의 원자력 유출 사건이라든가 광우병, 여러 가지 환경 재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계급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사람들은 점차 더 많은 불확실성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사회적 변동들이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있었지만, 사회과학은 이러한 새로운 현상들을 포착할만한 개념의 빈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계급이라는 오래된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저나 학생들 모두 이러한 개념적 범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대안적 개념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위험사회’는 그 결과입니다.

장훈 : 당신은 현대의 복지국가가 이런 ‘위험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위험사회’의 극복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울리히 벡 : 여전히 기술 관료제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 국가로서는 위험사회를 불러온 근본적 요인인 기술적, 경제적 합리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국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대규모의 생태 재난과 같은 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공적 안전을 제공해야 할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했습니다. 저는 위험사회의 극복은 대의 정치제도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책임지고자 하는 시민운동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민주주의는 국가를 비롯한 제도권 영역으로부터 일상적인 생활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위험사회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2000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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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 저자인 사회학자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수 백 만년에 걸쳐 형성되고 굳어진 자연의 생리(소는 풀을 먹는다)를 이윤을 위해(기술합리성의 추구) 파괴한 결과(동물성 사료를 먹임으로써 소를 육식동물로 만들어 버린) 빚어진 광우병. 위험에 무기력한 국가와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책임지려고 하는 시민과 시민운동. 인용이 좀 길었지만 지난 5월부터 두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위험 논란과 촛불시위를 이 보다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위에서 인용한 인터뷰 기사는 경향신문도 아니고 한겨레신문도 아닌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다.

‘그 때는 이런 인터뷰 기사를 실어 놓고 지금은 왜 그러냐’고 비아냥거리거나 따지려는 게 아니다. 길지 않은 칼럼에 저렇게 긴 인터뷰 기사를 인용한 건 순전히 안타까움 때문이다.

위험사회. 독일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개념화한 이 ‘위험사회’는 사회학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없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너무도 쉽게 다가오는 개념이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화재, 아현동 가스폭발사고... 물론 이런 사고들이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울리히 벡이 말하는 위험사회란 기술 관료제에 기반하고 있는 현대 국가 모두에 적용되는 것이고 그 위험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가 세계적인 사회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들이 몇 백 년 동안 이룩한 근대화를 불과 수 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룬 대한민국에서 위험사회라는 말이 지닌 울림은 남다를 수밖에 없을 터. 지난 4월 1일 조선일보는 “한국은 아주 특별하게 위험한 사회다, 첫 내한한 ‘위험사회’ 저자 울리히 벡 교수 인터뷰”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가 울리히 벡 교수의 ‘위험사회론’에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고 적지 않은 지면을 통해 그의 이론과 생각을 소개한 건 그가 세계적인 학자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위험사회’에 대한 경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반성 또는 성찰이 바로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인식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치면이든 경제면이든 사회면이든 기사 형태가 스트레이트든 분석이든 인터뷰든 언론은 끊임없이 문제를 지적하고 경고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다. 우리가 조선일보뿐만이 아니라 숱한 신문지면과 방송 뉴스에서 접하는 각종 고발 기사들, 이것이 위험사회에 대한 성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 논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명박 출범 이후 불거진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는 ‘성찰’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마치 ‘불량 철근 좀 들어갔다고 한강 다리가 무너지랴’라는 식이다. 물론 불량철근 좀 쓴다고 꼭 다리가 무너지고 빌딩이 무너진다는 법은 없다. 쓰레기 시멘트로 아파트 짓는다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에서 석면에 노출된다고 해서 모두가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 매순간 이런 저런 위험에 노출된 채 살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먹고 광우병 걸릴 확률이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얘기도 이런 슬픈 현실을 지적한 것 아니겠는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교통사고 사망률이나 산재 사망률에 비하면 그깟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쯤은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쇠고기 수입업자나 협상 책임자가 할 말이지 언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는가. 더구나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미국산 소를 다 도살하라는 것도 아니고 미국산 소는 아예 안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예방할 수 있는 위험은 예방하자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불합리한 요구인가. 우리정부가 우리가 구매하는 쇠고기에 대해서 만이라도 광우병 전수검사를 하자고 제안하고 동물성 사료강화조치를 요구했더라면, 설사 정부의 그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도 국민이 이렇게 화가 났겠는가.

비유하자면 이렇다. 지금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건 불량 건축자재와 쓰레기 시멘트가 들어간 아파트와 학교, 다리를 다 부수고 새로 짓자는 게 아니다. 그것이 성수대교 붕괴, 상품백화점 붕괴와 같은 대형 사고를 일으킬지 아토피를 포함한 피부병을 일으킬지, 언제 누구에게 암을 일으킬지는 모르지만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앞으로는 불량자재를 쓰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어진 구조물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서 사고가 나지 않게 예방하자는 것이다. 이게 무리한 요구인가? 이게 친북좌파 운운할 사안인가? 정치인과 기업가들이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이런 위험, 그 결과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위험, 당장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해도 사회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경고와 참견, 이게 바로 언론 본연의 임무 아닌가.

우리들 대부분은 내가 사는 집이 불량 자재로 지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적응하며 살고 세상의 자잘한 부조리도 그러려니 하면서 참고 지낸다. 하지만 가려움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긁어서 피가 나는 자식들을 본 부모라면 ‘안 죽으면 되지’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돈 좀 아끼자고 불량자재를 계속 쓰자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철근이든 시멘트든 쇠고기든, 공짜도 아닌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