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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원 폭행 사건과 산재 노동자 (이광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21
조회
186

이광조/ CBS PD



항공기 기내에서 승무원에게 트집을 잡고 욕설에 폭행까지 저지른 국내 한 대기업 임원이 보직에서 해임됐다. 문제의 임원이 재직하던 포스코 에너지는 이와 관련해 회사 공식 블로그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진상 조사 후 결과에 따라 엄중 조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언론들도 대부분 이번 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하며 이른바 ‘진상 승객’들의 행태를 유형별로 적시하고 재발방치 대책을 촉구했다.

사건의 진상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분을 느꼈을 거다. 파문이 커지면서 문제의 임원이 소속돼 있는 기업이 신속하게 사과하고 인사 조처를 단행하자 승무원들은 물론 사건을 지켜보던 이들도 통쾌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며칠 전 보도됐던 구미의 한 반도체 사업장 얘기가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사건의 얼개는 이렇다. 그 사업장에서는 오래전부터 작업 중에 부상을 당한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신청하면 징계를 받는 게 관행이었다고 한다. 지난 1월에도 사업장에서 한 노동자가 기계에 손가락을 끼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노동자가 회사에 산재 신청을 문의했을 때 회사에서는 “공상처리를 하면 치료비를 지급하고 치료기간 결근을 인정해주지만, 산재처리를 하면 징계위원회에 올라간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이 노동자는 산재 신청을 했고 회사는 ‘오랜 관례’에 따라 이 노동자를 징계했다. 징계 사유는 사고의 원인이 노동자의 부주의에 있고 무재해 목표 달성을 무산시켰으며 회사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징계의 수위는 높지 않았지만 노동조합에서는 일하다가 다친 것도 억울한데 징계는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사고의 원인에 대해서는 노사의 주장이 엇갈린다. 여기서는 일단 사고원인을 둘러싼 논란은 제쳐두자. 핵심은 안전사고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작업장에서 작업도중 다쳤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징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쳐도 산재 신청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고 산재 신청을 하면 징계를 받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점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작업 도중 부상을 당했을 때 산재를 신청해서 인정받지 못 하면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후유증에 따른 부담을 개인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당연히 산재 신청을 하는 것이 좋다. 산업재해보상보험이 왜 있는가? 그런데 다친 것도 속상한데, 산재 신청을 할 경우 징계는 물론 회사에 밉보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래서 이 업체에서는 다치고도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해당 사업장에서는 수많은 위험 화학물질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안전교육 외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는 것이 노동조합의 주장이다.

항공사 승무원 폭행 사건을 보며 산재를 당한 노동자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강자의 횡포에 분노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우리사회가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에 관해서는 너무 둔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나와 너의 문제이기도 한 노동자의 권리에 관해서는 너무나도 둔감한 우리의 모습은 때로 무섭기까지 하다. 권리침해가 너무 만연해서 감수성이 무뎌진 걸까, 아니면 문제의식은 있지만 법과 제도가 제대로 기능을 못해서 자포자기한 걸까. 아니면 내가 당하지 않는 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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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노컷뉴스


 

지난 2012년 한 해 동안 우리사회에서는 산업재해로 인해 약 9만여 명이 다쳤고 1864명이 목숨을 잃었다. 5분에 한명 꼴로 부상을 입고 3시간에 한명 꼴로 목숨을 잃었다. OECD 국가 중 산재사망율 1위다. 노동자로서 너와 나의 권리에 대해 우리사회가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다치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이번 항공사 승무원 폭행사건은 기업 안의 노사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노사관계에서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권리 침해 문제와 바로 연관 짓는 건 무리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관해 한 전직 승무원이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던진 얘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만약 항공기의 목적지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었으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적지가 우리나라였으면 좋게, 좋게, 좀 높으신 분이니까 그냥 좋게, 좋게 하자면서 일이 커지는 것을 어느 쪽에서든 다 원하지 않지 않았을까”(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4월 23일 인터뷰 중에서). 도착지가 미국이어서 피해자의 신고에 미국 경찰의 신속한 조치가 이뤄졌지 도착지가 한국이었으면 사건이 흐지부지 되지 않았겠냐는 얘기다. 너무 자조적인 얘기로 들리는가. 그렇다면 노조탄압, 직장 내 성희롱 등 노사관계는 물론 직장 내 위계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인권침해 사건들이 신속하고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걸 본 적이 있는지 되돌아보라. 우리에게 여전히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깝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