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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한 쪽만을 허락하지 않는다(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30
조회
164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한가롭게 떠 있다. 지난 해 가을에는 서울 거리의 가로수를 보며 가을을 느꼈는데, 올해는 들판에 나가 누워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다행이다.

어제 신문에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DJ의 묘를 파헤치겠다고 국립현충원으로 달려간 상황이 보도되었다. 최소한 죽음 앞에서 허허로운 관용이나 최소한 혼란스러워 할 줄 아는 인간의 심성마저 똑부러진 살기(殺氣)아래 파묻고 있다. 어쭙잖은 이념이 인간의 예의를 추월했다.

기실,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고통스럽게 견뎌왔던 학살과 증오가 오늘 날에 재생되는 느낌이다. “노무현의 시신을 북으로 보내라”했던 경악스러운 망언의 기억과 다를 것 없는 맥락이다. 그런가 하면, 국가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 얘기가 터져 나오고, 경찰은 ‘과업’으로 ‘촛불’, ‘2MB'따위 키워드가 들어간 글이 자동으로 수집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그 편린들 건너,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습관처럼 이어 온 ‘투표’가 부정당했다. 도지사 소환투표 날, 투표장에 갔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완장’에 감시당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특히, 아무리 새벽 밭일이 분주해도, 투표는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 왔던 행위자체를 부정당한 촌로들은 인생의 끝물에서 알 수 없는 자기분열을 겪어야 했다.

제주시 어느 동에 사는 한 여성은 몇 번이고 투표하러 갈려고 했는데, 그 때마다 직면하는 눈초리와 무언의 억눌림으로 결국 포기해야 했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심정을 모멸감이라 표현했다. 올 여름, 8월 26일 제주도 전역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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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제주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투표가 실시된 8월26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 시민이 투표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


투표장은 발길이 뜸했고, 그나마 있던 발길은 제지당했으며, 그래도 투표에 나선 4만 6천의 제주 주민들마저 싸늘함과 불안한 두려움으로 긴장했다. 투표가 폭력으로 대체될 수 있다니. DJ 서거 후 읽은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1967년 국회의원 선거와 71년 대선 등의 분위기가 이와 같았다. 학살과 증오를 배경으로 한, 검열과 분류의 암울한 과거 시스템이 재생된다면 철저히 이렇구나 하는 느낌, 참혹했다.

DJ서거를 애도하는 신문광고를 전면에 싣고는 그의 생전 얼굴 밑에 “투표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버젓이 적어놓은 그들은, DJ의 묘를 파헤치겠다는 광기어린 반항만큼, 사실은 과거의 암울한 질서를 파헤쳐 재생시켜놓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 모른다.

최근 읽은 두 편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 세상은 결코 한 쪽만을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현기영이 10년 만에 발표한 ‘누란’ 속의 허무성은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늘 현실 속에 재생되는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한 달간의 노숙생활을 거쳐 지리산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좀 더 오래 전, 죽음의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보다 오래된, 다름 아닌 한국 근대 학살의 기억에 대응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통해 재생되는 가까운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는 것이다. 근본부터 다시 파헤치러 떠난 것이다.

멸망과정이 아닌, 멸망 이후 폐허의 세상 위를 표류하는 부자(父子)의 행보를 그린 ‘더 로드(THE ROAD)'는 철저히 세상은 한 쪽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은, 그 폐허란 ‘다시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그린 지도’를 폐하고,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된’ 새로운 지도를 비로소 생성(재생)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의 현실이 그와 같다고 하면, 세상은 틀림없이 다른 한 쪽을 숨겨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