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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와 실직자(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01
조회
199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2009년 5월 현재 공식적인 실업자는 938천명이지만 실망실업자나 취직준비까지를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3~4배 정도 커진다. 정부가 1년 내내 강조했던 비정규입법에 따른 해고대란은 확인되지 않지만 경제위기로 인해 직장을 잃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또한 2009년 4월 현재 공식실업자 중 실업급여를 받는 비중은 17.7%이며 실망실업자나 취업준비자 등 취업애로층의 경우 10.4% 만이 실업급여를 받고 있다. 실업급여를 받아도 그것으로 생계가 유지되기 어려운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대다수 취업자들이 실직 이후 아무런 대책 없이 길거리에 내몰리는 것이다. 하지만 숫자를 통해서는 이들 실업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이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 가족 생계부양자일 경우 그 심각함은 더 커지며 실직한 부모를 가진 어린아이는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부분 이들의 삶을 알지 못한다.

생택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돌연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이렇게 말할 듯싶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해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새로 사귄 친구의 목소리나 눈빛, 취미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 친구가 몇 살인지 아버지의 수입이 얼마인지, 몇 평 아파트에서 사는지 만을 묻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알았다고 믿지요. 그래서 인생의 정말 중요한 일을 알지 못해요”

그래도 어린왕자는 작고 여린 목소리로 어른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1년 내내 70만 고용대란 혹은 100만 고용대란을 운운하며 2년 기간 연장 등 숫자에 매달린 탓에, 경제위기의 충격에 신음하는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지도 근본적인 지원 대책을 마련하지도 못한 것은 너그럽게 대하기 어렵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왜 숫자에만 미친 듯이 매달려 정작 삶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일까. 몇 가지 답이 있을 수 있다. 어린왕자가 방문한 다섯 번째 별에는 가로등을 켜는 사람이 있다. 가로등을 켜고 끄라는 명령을 받은 이 사람은 별의 회전이 점점 빨라져서 일분에 한 번씩 회전하자, 명령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 잠도 자지 않고 일분에 한 번씩 가로등을 켜고 끈다. 어린 왕자는 그래도 그동안 만난 어른 중 가장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명령에 따르고 직무에 헌신하는 행위를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부른다. 고문기술자도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고 전쟁에서 민간인을 쏜 군인도 발포 명령을 충실히 따른 다는 점에서, 악은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만약 숫자에만 매달린 것이 자신의 직무에 헌신한 결과라면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은 괴물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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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가 다섯 번째 별에서 만난 가로등지기
사진 출처 - 네이버


숫자에 매달리는 어른 중의 하나인 필자는 더 이상 어린왕자의 여행길에 동반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으로 책을 덮는다. 다만 어른들이 마음을 바꾼다면 숫자세기 외에도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면피를 해보고자 한다. 실직과 비정규의 덫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원책을 제안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첫째,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실직자 권리 찾기’ 이다. 고용보험법 13조에 따르면 고용보험을 내지 않은 사람이라도 180일 이상을 주 15시간 이상 근로하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실직한 것이 아니라면 고용보험을 청구할 수 있다.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 사람의 54%가 고용보험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한 것을 고려하면 실업급여 수급율을 대폭 올리고 실직에 따른 위험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정부는 물론이고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모두가 실직자 권리 찾기를 위해 대대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사회보험료 감면이다. 실직자 권리를 찾으려면 의무도 감당해야 한다. 그동안 내지 않은 보험료를 회사와 근로자들이 납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만원 미만의 저임금을 받는 근로자는 사회 보험료를 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한시적으로라도 사회보험료 납부를 면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고용보험 대상도 아니고 기초생활보장의 대상도 아닌, 그야말로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이 800만 정도 된다. 이들을 위해 제2의 사회적 안정망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실업부조일 수도 있고 일본과 같이 취업 및 생활지원 기금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든 시급하게 강구되어야 한다.

넷째, 임금 및 근로조건, 복리후생에서의 차별을 원천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천명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한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민 세금을 실직한 사람과 비정규직을 위해 사용해도 좋다는 합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내가 낸 돈을 남을 위해 쓴다는 결정이 어디 쉬운가. 어린왕자는 자신이 떠나온 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전 꽃을 제대로 사랑하기에는 아직 어렸지요”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충분할 만큼 나이를 먹었다. 내가 사는 한국이 숫자놀음만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이해로 충만한 나라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