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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의 절박함 - 권력의 부드러운 억압 앞에서(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20
조회
26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가끔 서울에 가게 되는데, 늘 서울 거리의 가로수가 인상에 남는다. 특히 정동길이나 세종로 주변 거리의 큰 나무들은 제주에서 볼 수 없는 거리의 여백을 선사한다. 더욱이 가을 길의 그것은 굳이 여느 산의 정취가 아니더라도 서울 도심의 복잡함과 소란스러움을 충분히 걸러낼 만큼의 여유와 고단한 일상의 어떤 전향(轉向) 같은 것을 촉진한다.

그런데 올 가을, 서울 그 거리, 큰 나무들의 정서는 지금까지와 다르다. 어떤 절박함이다. 분명히 절박함의 색은 진홍빛이 아닐까한다. 단풍(丹楓)의 색이 빚어내는 정서는 화려함보다는 내면으로부터 발산된 분노의 축적, 절망, 좌절감을 총합한 절박함의 표상으로 와 닿고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국회의사당과 광화문 정부 청사를 오가며 제주 해군기지건설사업이 보여주는 문제에 대해 국회의원, 그들 보좌관들, 정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득하려 무던히도 애 좀 썼다. 벌써 몇 년째, 이즈음에 행하는 연례의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제주 해군기지 논란 과정에서 하나의 의문을 품게 되었다. 국책사업은 정당한 주민의 의사 위에 군림해도 되는 걸까? 국가논리가 주민의사와 부딪혔을 때 국가의 태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일까? 비록 그것이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업일지라도 주민들은 반대하면 안 되는 것일까?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국가안보사업이 정말 국가안보에 제대로 기여할 수 있을까? 전가의 보도와 같은 국가안보의 논리는 주민 삶의 논리보다 우선하는 것이 여전한 현실임을 인정하고 말아야 하는가? 국민은 오늘날에도 자발적 개인의 집합체가 아닌 국가체제의 동원대상일 뿐이었나? 국민이 아닌 주민, 혹은 개인은 여전히 존재할 토양조차 없는 것인가? 한 마디로 국가와 국민, 혹은 주민의 관계와 관련한 이런 저런 의문과 생각들이 끝내 올 가을의 절박함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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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회, 천주교제주교구평화특위, 군사기지범대위 등 해군기지반대단체들은 4일 합동기자회견을 열고 법절차를 무시한 정부.해군.제주도정의 해군기지 사업추진 강행을 맹렬히 성토했다.
사진 출처 - 제주의소리


정부는 지난 9월 11일 제주 해군기지 사업을 확정 발표하였다. 이후 정부나 군 당국은 물론, 심지어 정치권조차 이제 이 문제는 “끝난 문제”로 여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어느 날 해군기지 후보지가 돼 버린 강정마을 사람들의 끝없는 고통은 찬반 양측의 의사수렴이라는 이른바 균형논리에 의해 깊어지기만 하고 있다. 이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바다 밑의 연산호군락 등의 문화재에 대한 조사와 평가 문제도 그저 사업추진을 위한 ‘보완’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런데 다 제쳐놓더라도, 이것 하나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환경부는 이 곳 자연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부합동으로, 그것도 객관성을 이유로 민관 공동방식에 의해 4개월의 정밀조사를 요청하였다. 문화재청은 최소 내년 6월까지 조사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더욱이 문화재청의 조사과정은 이 사업의 허가여부를 판가름할 매우 중요한 법적 절차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이 조사가 끝나기 전에 해군기지 사업은 일단 중단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내년 기지건설 예산도 430여억 원이나 국회에 넘어가 있고, 해군은 벌써부터 부지매입과 어업피해 보상에 착수하려는 움직임이다. 공사시행을 위한 입찰공고까지 해놓은 상태이다. 우리가 찾아간 총리실 관계자도 예정된 문화재, 환경조사등에 대해 “사업을 거스를 사안이 아니다”로 딱 잘라 말했다. 부드럽고 정중하게. 심지어 정치권의 모든 관련자들도 환경문제나 주민갈등 문제는 그저 개선해야 할 일이 되고 말 것임을 명백히도 예견해 주었다. 국가가 하는 사업은 결국 '간다(Go)'는 말이다.

주민들의 요구는 매우 단순하다.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물어보고 결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 요구를 1년 6개월째 해오고 있다. 심지어는 찬성이 51%만 나와도 그날로 반대 대책위 해산하고 승복하겠다고 까지 여러 번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작년 8월에는 3개월여의 우여곡절 끝에 마을 주민투표를 통해 기지건설 반대 입장을 결정했다. 그러나 국가는 단지 제주도지사를 시켜, 그것도 그저 정책결정 ‘참고용’으로 그 문제점이 결국 확인되고 말았던 여론조사로 강정마을을 불과 며칠 새에 후보지로 결정했을 뿐이다. 국가의 결정과정은 강정이라는 작은 마을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국가가 결정한 사업이니 따르라고 해왔고, 이제 “끝난 문제”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국무총리실에 갔을 때 강정마을의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 곳 까지 찾아오는 동안 연락드리고, 약속시간 잡고, 이 곳 건물에 와서는 신분확인 거치고, 그렇게 절차를 밟아 비로소 여기에 온 겁니다. 하물며, 국가가 사업을 추진하며, 주민들에게 어떤 사전 연락이나 대화를 했습니까? 만일 그렇게 절차상 할 거 다하고 그래도 우리가 반대했다고 우리를 때린다면, 싸대기 한 대 맞아도 덜 기분 나쁠 거 아닙니까?”

눈물겹다. 그리고는,

“탱크 다섯 대만 몰고 들어오면 우리를 물리치고 기지건설 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 이 부드럽고 점잖은 정부 사람들한테. 그런 격한 말이라니! 우리도 저렇게 부드러워야 하는데!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다. 지금 나의 절박함은 이 문제 하나에 대한 천착이 빚어낸 그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권력은 부드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일들을 관장하고 통제하고 조율하는 훨씬 크고 중요한 일을 하니까. “여러분 서 있는 발밑이 다 잠수함 밭이에요” 하는 말처럼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훨씬 깊숙하고도 안보상 말 못할 어떤 사연이 있을 수도 있고, 최근 금융위기 문제니 종부세 문제니, 이재오 의원 입국설 등이니 참 대단한 문제들 앞에서 오로지 이 문제만을 얘기해야 하는 우리가 되려 옹졸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원래 옹졸함 앞에서는 그 옹졸함을 탓하기 보다는 어루만져주고 넘기려 하는 법. 그런데 그것이 부드러운 모습의 권력의 억압방식이다. 부드러움이 그 옹졸함과 앞서 탱크 어쩌고 하는 것처럼 결국 터지고 마는 격함을 불러내고 마니까. 그 부드러움은 어디로부터 나올까? 이제 제주 해군기지 문제의 해법은 그 부드러움의 힘으로 우리의 옹졸함과 과격함을 자꾸 불러들여, 점잖게 해결해주는 방식이다. 그 부드러움의 억압을 받치는 진정한 힘. 바로 물량과 물리적 공권력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국민이 아닌(국민으로 쳐주지 않으니까), 한 개인의, 한 주민의 생각으로는 아무리해도 이해할 수 없는 저 국가의 논리, 국책사업의 부드럽지 못한 과격한 행보는 또 다른 절박함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부드러운 권력자들이 미리 헤아려 보는 여백도 있었으면 좋겠다. 서울 그 거리의 단풍에 든 가로수를 마주하고 단 5분만 말이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굽은 듯 한 것이 실은 가장 곧은 것이고, 서툴고 모자란 것이 실은 가장 뛰어난 것이다. 고요함이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가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이 말은 우리의 옹졸함과 격함을 보여주는 옛 성어인데, 분명 부드러운 권력의 모습은 아닐 거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