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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경찰의 역할(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8-16 10:16
조회
400

이윤 / 경찰관



범죄신고는 112, 화재신고는 119, 간첩신고는 111, 학교폭력신고는 117, 기타 등등...


출처 - 전자신문


112는 범죄피해자 또는 범죄를 인지한 사람이 신속한 경찰력 발동을 요청할 때 사용하는 범죄신고 전화번호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은 범죄를 중단시키고, 가해자를 검거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목격자 진술을 듣고, CCTV 영상을 확보하는 등 초동조치를 한다.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언제부턴가 범죄와 관련 없는 불편이나 위험을 겪는 사람도 주로 112로 신고한다. 일단 신고받은 경찰은 우리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못 본 척할 수가 없다. 혹시 그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면 못 본 척한 이유로 비난받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 민원 중 상당수가 경찰과 소방에 집중되며, 24시간 근무체계와 빠른 출동이 목표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가장 말단의 민원처리 부서가 된다. 이제는 어디까지가 경찰의 역할이고 임무인지 명확히 알기 어렵다.



경찰 역할은 역사적으로 점점 축소되어왔다. 대학 시절 ‘경찰학개론’을 수강하면서 경찰 역사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까지 올라간다고 들었다. 동음이의어를 너무 막 갖다 붙이는 억지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도시국가가 주민을 위해 담당하던 국방, 외교, 재정, 치안, 사법 등 모든 사무를 폴리스라고 했단다. 그 후 중세와 근대로 넘어오며 전문성이 요구되는 국방, 독립성이 필요한 사법과 입법이 분리되었다. 절대군주 시대 행정, 재정, 외교, 왕실 수입 관리를 하는 관방이 치안까지 담당하였으니 관방도 경찰조직의 변화과정 중 하나란다. 점점 전문화・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외교, 재정 등이 별도의 조직으로 분리되고, 마지막으로 1980년대의 한국은 국민 안전을 담당하는 내무부가 치안사무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하였다.


 

출처 - 서울경제


 

36년 전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흐름이었던 것 같다. 즉 경찰은 원래 굉장히 많은 국가 사무를 담당하였는데, 점점 국가 조직이 전문화, 분업화하면서 80년대 경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역할이 축소되었다는 결론이다. 그때부터 36년이 더 지난 지금은 세상 변화의 가속화와 다양화를 고려할 때 역할이 훨씬 축소되고 집중되었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역할 아니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아마도 역사가 정반합 과정을 거치기 때문인 듯하다. 내무부 치안본부 시절 경찰은 부패하고, 무능하고, 폭력적이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조직이었다. 1991년 경찰청으로 독립하고 나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음을 보여주려다 보니 친절과 봉사를 강조했다. 파출소 앞에 우산을 비치하여 빌려주거나, 대학생 등교버스를 제공해 주거나, 소포 심부름을 하거나, 전의경들이 관내 불우한 학생 과외를 해 주는 것이 우수한 특수시책이 되었고, 승진 사유가 되었다. 정작 국민이 원하는 것은 경찰이 필요한 곳에서 공정하고 성의있게 제대로 일해 주는 것이었을 텐데, 그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이벤트가 더 우선하였고, 그 방면에 집중한 경찰관이 승진도 잘했다. 경찰에 대한 인식은 지금까지 30년간 이런 정→반 방향으로 흘러왔다.



게다가 경찰관직무집행법상 경찰의 직무 1호는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 보호’라고 되어 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지는 규정에 없다. 경찰이 지금의 인력과 장비, 권한만으로 ‘모든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특히 기후변화로 자연재해가 증가하는 요즘, 112신고를 받고 가장 먼저 위험한 현장에 출동하고는 있으나 자치단체만큼의 인력과 예산이 없어서 모든 곳을 조치할 수 없고, 소방이 가진 구조장비도 없으며, 경고, 억류, 피난 외에 다른 강제할 수 있는 권한도 없어서 교통 통제 및 주민 대피마저 쉽지 않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거나, 물건이 없어졌다거나, 술 취한 사람이 난동을 부린다거나, 친구가 자살하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연락이 안 되어 경찰이 필요하다는 112신고는 계속된다.


 


출처 - 연합뉴스


 

이제는 반→합으로 흐름이 변화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경찰의 과학화, 전문화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정할 때가 되기도 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은 1953년 제정된 이후 큰 틀의 변화 없이 약간씩만 보완적으로 개정되었다. 이제는 경찰의 직무 범위에 대해 다시 고민할 때다. 112가 범죄신고이니 경찰의 제1호 임무를 「‘범죄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재산 보호」로 구체화하여 법을 개정하면 좋겠다.(예: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1조에 ‘각종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한다고 구체화) 경찰의 직무를 ‘범죄로부터’라고 한정해야 경찰력을 정치적으로 사용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한다. 특히 국민 안전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책임을 규정해야 책임 기관이 집중적으로 성의를 다하여 위험 예방과 대응조치를 하게 된다.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한 후에야 책임질 누군가를 찾아 처벌하는 것으로만 마무리되면 앞으로도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2023년에도 안전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에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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