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지역화폐 공동체 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1:22
조회
36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일본을 대표하는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이 쓴 『트랜스크리틱』(송태욱 옮김, 한길사, 2006)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나에게 흥미롭게 생각되는 것은 1982년에 린턴(Michael Linton)이 고안한 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지역 교환 거래 제도)이다. LETS는 참가자가 자기 계좌를 갖고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목록에 올려 자발적으로 교환하며, 그 결과가 계좌에 기록되는 다각 결제 시스템이다. LETS의 통화는 중앙은행에서 발권하는 현금과 달리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 그때마다 새롭게 발행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참가자의 흑자와 적자를 합하면 0이 된다. 그러나 지극히 간단한 이 시스템에는 화폐의 이율배반을 해결할 열쇠가 포함되어 있다.(57쪽)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던 고진은 마르크스의 사회사상을 높이 평가하는 반(反)자본주의 사상가다. 국가자본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스탈린주의에 기초한 소련의 해체 이후,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오늘날 자본주의를 일거에 뒤엎는 대대적인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관적이다. 그 대신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뼈대를 곳곳에서 허물 수 있는 합법적인 운동의 길을 모색한다. 고진은 노동자가 주체성을 발휘하는 “소비의 장소”를 강조하면서 전일적인 시장에서의 대대적인 소비 보이콧 운동을 하자고 제안하고, 그 대안으로서 1982년 캐나다의 린턴이 고안한 LETS 경제 체계를 활성화하자고 제안하고, 지역마다의 LETS 공동체를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공동체’로 번역될 수 있음)이라 칭하면서, “어소시에이션들의 어소시에이션”을 통해 새로운 정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를 자본과 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고진의 대안적인 어소시에이션 이론은 한국의 이진경 선생이『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 2006)라는 저작을 통해 제안하는 “코뮨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이진경 선생의 코뮨주의는 종전의 공산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반(反)자본주의적인 시민운동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벗어난 ‘외부’들을 창안하는 법을, 자본주의의 곳곳에 구멍을 뚫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고 촉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 그 오지 않은 시간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부재하는 이상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조차 우리 자신이 창안하고 ‘살아갈 수 있는’ 현재성의 시제를 갖는 ‘현실적인 이행운동’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이런 종류의 활동을 명명하기 위해 우리는 ‘코뮨주의’라는 개념을 선택했다. (…) 여기서 우리는 ‘공동으로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공산’(共産)주의라는 번역어 대신에, 가치법칙에 따른 교환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선물(munis)을 통해 하나로 결합(com)되는 관계로서 ‘코뮨’(commune)을 직접 음역(音譯)하여 ‘코뮨주의’라고 재개념화했다.(305-6쪽)

고진의 어소시에이션 이론과 마찬가지로 이진경 선생의 코뮨주의 이론 역시 대단히 시론적(試論的)이어서 이론적으로도 많이 보강이 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실천적으로 그 현실적합성을 입증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진경 선생은 <수유·공간 너머>라는 학문공동체를 통해 일정하게 그 실효성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진이 말한 LETS 경제 체계를 도입한 일종의 어소시에이션 공동체가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이미 그 가능성의 물꼬를 시험적으로나마 제법 힘차게 터고 있었다. 어찌 반가운 소식이 아니겠는가.

다름 아니라 2014년 7월 21일 월요일 <한겨레신문> 13면 전체에서 다룬 기획 기사가 실렸던 것이다. “ ‘인간의 얼굴’ 지역화폐 … 지역경제 · 공동체 부활 ‘일석이조’ ”라는 큰 글씨의 제하에 국내의 주요 지역화폐 운동에 관한 내용이 전면을 할애해서 소개되었다. 대전, 과천, 구미, 광명, 대구, 의정부, 성남, 부산, 수원, 그리고 서울의 17개 자치구 등에서 지역화폐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은평이품앗이>의 경우처럼 많게는 2100여 명의 회원과 58개의 가맹점이 가입한 경우도 있고, 적게는 <수원시민화폐 추진모임>처럼 시민 100여 명과 몇몇 매장들이 10만 원씩을 내 9월부터 3개월간 시범 운영될 예정인 곳도 있었다. 아마 가장 오래된 경우로는 대전의 <한밭레츠>인 것 같은데 2000년 회원 70여 명으로 시작해서 현재 680여 명의 회원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활동을 하는 곳곳의 지역에서는 각기 나름의 지역화폐 이름을 가지고 있다. ‘두루’, ‘아리’, ‘고리’, ‘그루’, ‘문’, ‘늘품’, ‘누리’, ‘넘실’, ‘송이’, ‘별’ 등 다들 예쁜 이름들을 잘도 정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00509394401_20140721.JPG
사진은 ‘서울이(e)품앗이’의 홍보 영상에 등장하는 재능 품앗이 사례들.
맨 아래 오른쪽 끝에 있는 사진은 지역화폐를 매개로 한 가상의 도서관인 경기도 수원
‘구름위의 도서관’에서 발행한 지역화폐 ‘별’. 서울이품앗이 홍보 영상 갈무리, 구름위의 도서관 제공
사진 출처 - 한겨레


 

신문에서는 지역화폐 전문가로서 가톨릭대학교 교수인 천경희 선생을 소개하기도 하는데, 최근 지역화폐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에 대해 박수혁 취재기자가 전하는 그녀의 말은 이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이 돈으로 환산되는 통로를 갖지 않으면 무능력자나 실업자로 전락한다. 그래서 국가화폐인 돈이 없으면 빵을 먹을 수도 없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노동력도 쓸모없게 된다. 이에 반해 지역화폐를 사용하면 돈이 없더라도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노동과 물품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 지역화폐 운동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 대표적인 공동체라 할 수 있는 대전의 <한밭레츠>의 사무국장 박현숙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이 눈길을 끈다.
지역화폐 운동을 ‘하나의 사업’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남는 게 없게 된다. 지역화폐는 천천히 사람 간의 신뢰를 쌓고, 관계를 형성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천경희 선생과 박현숙 선생의 말에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뿐만 아니라 지역화폐 운동이 나름의 반(反)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이를 활성화해서 자본주의적인 폐해를 극복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돈의 활용인 자본에 종속된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뭔가 심중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을 은근히 표현하고 있다. 그 심중한 호기심을 풀어내고 싶어 다시 고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자본제 시장경제와 달리 LETS에서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되지 않는다. 그저 이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제로섬 원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환이 활발하게 행해지는데도, 결과적으로 화폐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화폐는 존재한다’와 동시에 ‘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율배반이 해결된다. 마르크스의 가치형태론에서 말하자면, LETS 통화는 일반적 등가물이지만,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관계지을 뿐 자신이 자립적이지 않다. 즉 화폐의 페티시즘이 생기지 않는다. ‘교환 가능성’으로서의 화폐를 비축하는 것에 의미가 없고, 적자가 늘어나는 일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 국가에 의한 단일 통화와 달리 LETS는 복수적이고 다종다양체로 존재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지역 통화와 달리 LETS에서는 각자가(다지 계좌에 기록할 뿐이지만) 통화를 발행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이다. 국가 주권의 하나가 화폐 발행권에 있다고 한다면, LETS는 말뿐인 인민 주권이 아니라 각자를 진정한 주권자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LETS가 단순히 지역 경제를 보호하고 진흥케 하는 통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위 같은 책, 58-9쪽)

인용이 다소 길었다. 학자가 하는 이야기는 신문기사와는 달리 역시 ‘현학적’이다. 하지만 그 핵심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그 내용을 필자 나름으로 보충해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지역화폐는 각자가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일정한 척도에 따라 목록(예컨대 누리집)에 올림으로써 각자가 발행하는 것이다.
(2) 지역화폐는 그 자체로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이다.
(3) 지역화폐는 쌓아둔다고 해서 이득이 되지 않고 그것으로써 다른 사람으로부터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받아 향유함으로써만 이득을 본다.
(4) 따라서 지역화폐는 돈을 벌기 위한 돈으로 쓰일 수 없다.
(5) 만약 누군가가 이득을 본다면 남들의 재화와 서비스를 통한 향유에서 이득을 보는 것이지 소유에서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다.
(6) 지역화폐를 통해서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횡행하는 바 돈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감이 생길 수 없다. (7) 지역화폐는 사용하는 인민 각자가 발행권을 갖기 때문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주권재민주의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하나의 방책이다.

지역화폐 공동체 운동은 이진경 선생의 말처럼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벗어난 ‘외부’들을 창안하는 법, 자본주의의 곳곳에 구멍을 뚫고 살아가는 방법”의 창안이며 실현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자신의 노동력과 그 노동력에 의한 생산물을 자본주의 활성화를 기하는 국가의 단일 화폐로 환산하는 것에 ‘뼛속 깊이’ 길들여진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 및 행동 곳곳에 구멍을 내어 우리의 현존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외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와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경제생활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인간 현존을 창조해 냄으로써 “인간의 얼굴을 한 인간”의 삶을 살면서 서로를 통해 각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도록 해 보자는 운동이 바로 지역화폐 운동인 것이다.

내친 김에 ‘Wikipedia’에서 ‘LETS’ 항목을 쳐서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길지만 핵심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LETS 네트워크는 이자 없는 지역 신용을 활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물물교환을 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한 회원이 다른 사람을 위해 아기 돌봄을 함으로써 신용을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신용을 나중에 같은 네트워크에 속한 다른 사람에게서 목수 일을 제공받는 데 쓸 수 있다. 다른 지역 통화와는 달리, LETS에서는 임시 화폐가 발행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모든 회원들이 언제든지 알 수 있는 중앙의 장소에 거래 내역이 기록된다. 네트워크의 회원들에 의해 그리고 회원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신용이 발행되기 때문에, LETS는 상호 신용체계로 간주된다.
많은 사람들이 LETS 체계를 운용하고 활용하는 다각적인 방법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전통적인 국가 통화는 대체로 벌기는 어려운 반면 쓰기는 쉽다. 현재로서는 LETS는 상대적으로 벌기는 쉽고 쓰기는 어렵다. LETS 체계는 대체로, 자발적이고 비영리적이고 비정부적인 조직에 근거한 공동체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 LETS를 조직하는 사람들은 종종 업무가 과중하다고 불평하고 소모성에 시달리기도 한다. 결국 많은 기획들이 무산되기도 했다. 그 많은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동체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용해서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고, 소프트웨어를 효과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여러 가지 어려움은 당연히 예상된다. 이미 온몸으로 습관화된, 인간을 존중하는 대신에 화폐를 숭배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강력하게 저항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신문 기사에는 “ ‘송파머니’를 많이 보유한 회원들로부터 ‘쓸 곳이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반면 지역화폐 계좌가 마이너스가 돼도 서비스를 이용하는 회원도 있어 논란이 됐다.”라는 <장미화 송파품앗이>의 회장의 말을 전하고 있다. 화폐의 소유량을 삶의 척도로 부추기는 자본주의적 삶으로부터 향유의 다양성과 질적인 정도를 삶의 척도로 부추기는 새로운 공동체적인 삶으로 이행해 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능력에 따른 기여와 필요에 의한 향유의 결합으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기왕의 지역화폐 공동체들이 서로 공동체들의 공동체적인 소통을 통해 지혜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이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지역화폐 공동체들이 수도 없이 많이 생겨나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이에 저 앞에서 인용한 박현숙 선생의 말을 상기할 것을 권하고, 역시 신문에서 전하고 있는 <원주협동사회네트워크>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는 김선기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매출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여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니 지역통화를 합시다.’는 식으로 이익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사용하다 이익이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지역통화는 동력을 잃게 된다. 제도화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들다.

1) http://en.wikipedia.org/wiki/Local_exchange_trading_system(201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