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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를 ‘꾸미는’ 것이 위험한 이유(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1-20 15:57
조회
1077

이윤/ 경찰관


 1990년대 중반, 수사업무를 시작한 지 3년쯤 지났을 때 나에겐 수사관으로서의 엉뚱한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죄가 없는 사람도 죄가 있는 것처럼, 죄가 있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증거를 조작하거나 고문을 하지 않고 단지 글쓰기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생각만 했다. 진짜)


 조서는 그런 힘을 지녔다. 다음 질문에 대한 답들을 비교해보자.


문: 당신이 그 자전거를 훔쳤나요.
답1: 아니요, 저는 그 자전거를 훔치지 않았습니다.
답2: (주위를 둘러보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아... 아니요. 저는... 그걸 안... 가져갔는데요.
답3: (화난 듯 눈을 크게 뜨고 큰 목소리로) 왜 저에게 그런 걸 물어봐요? 네? 제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경찰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참! 이거 생사람 잡으시네.


 답들은 모두 범행을 부인하는 내용이다. 다만 답1은 단순한 범행 부인일 뿐 답을 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의 여지가 없는 중립적 답변인데 비하여, 답2는 범인이 범행을 들키자 불안해하는 모습이라고 평가될 수 있고, 답3에 대해서는 뻔뻔한 범인이 딱 잡아떼며 오히려 화를 내는 모습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아마 답2나 답3을 조서에서 읽으면 피의자가 부인한다는 사실보다는 진술한 사람의 인성과 성격, 심리상태에 대한 평가가 개입되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답1과 같이 말했는데 조서에 답2나 답3처럼 쓰는 것은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피의자가 이 정도의 변형에 대해 내가 말한 것과 다르다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또 확실하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답2나 답3으로 말한 것을 답1처럼 쓰는 것은 왜곡이라고 할 수 없다. 정리해서 취지만 기록한 것이니까. 수사관은 왜곡의 경계에 이르지 않는 작은 변형으로 얼마든지 피의자에 대한 인상을 바꿀 수 있다.


 조서(調書)란 녹취록과 달리 ‘조사한 사실을 기록한 문서’다. 따라서 말한 그대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수사관이 관찰한 진술자의 행동이나 태도를 쓰는 것도 가능하다. 수사기관이 쓰는 조서에는 진술조서나 피의자신문조서 뿐만 아니라 압수조서나 검증조서도 있는데 기재되는 내용이 진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조서는 수사관이 경험한 내용을 작성하는 일종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기에 피의자가 말한 모든 것을 그대로 기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보니 말한 사람의 기억과 진술이 조서를 작성하는 수사관을 거쳐 문자화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조서는 수사관의 개인적 관점과 판단, 의견에 의해 오염될 수 있기 때문에 증거로 사용하기에는 위험하다. 조서 작성 후 진술자에게 읽어보게 하고, 매 장마다 간인하고, 서명날인하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일부 유명하신 분들 외에는 그렇게 꼼꼼하게 늦은 시간까지 읽어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분들도 조서의 트릭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조서에 나의 의도 및 기억이 원래의 그것과 다르게 기재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진술거부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이므로 누구라도 수사기관에서 이를 행사할 수 있다.


 수사기관이 글로 쓴 보고서일 뿐인 조서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조서의 증거능력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피고인에 의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대로 기재되어 있음이 인정되면(실질적 성립진정) 내용을 부인해도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피고인이 법정에서 ‘말한 대로 기재되어 있지만 그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할 경우(내용 부인)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경찰에서 자백한 누군가를 기소하기 전에 검찰에서는 경찰 작성 조서와 같은 내용으로 다시 조서를 작성한다고 한다. 그래야 그 자백을 유죄판결의 증거로 사용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KBS


 이런 증거능력의 차이 때문에 자백을 받으려는 검사의 욕구가 경찰보다는 클 것이다. 자백을 받으려는 욕구가 크면 부인하는 상대방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히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가족들의 계좌나 행적을 표창장까지 모두 조사하고, 사업장의 모든 자료들을 압수수색하고, 친구와 거래 상대방을 뒤져 위법한 무엇 하나라도 건지려 한다. 자신의 괴로움은 물론이고 자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까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진 피의자는 없는 죄도 인정하게 된다. 이 때 어쩔 수 없이 했던 소극적 인정이 조서에는 적극적 인정으로 기재될 수 있다.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경향신문, 19. 5. 21). 15년 전 읽은 논문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4개국(한국, 일본, 중동과 북유럽에서 1개씩)만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거나 1등을 해도 별로 자랑스럽지 않다.


 다행히 패스트트랙으로 12월 3일 국회 본회의에 부의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에는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경찰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정도로 약화시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개정되면 수사기관이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 조서에 기재하려고 하는 동기가 사라질 것이고, 결백한 사람이 억울하게 유죄판결 받을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 2020년에는 꼭 개정된 형사소송법이 시행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