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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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날인 거부투쟁 패배기 (한겨레 06.01.22)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5:39
조회
276

지문날인 거부투쟁 패배기


결국 나를 증명할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기한이 끝나긴 했지만 얼굴 사진이 버젓이 들어 있는 여권, 1999년까지 쓰였던 옛 주민등록증, 주민등록등본, 하다못해 명함까지 다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여권을 새로 만들기 위해 찾은 구청의 여권과 직원 앞에서 나는 나를 증명할 수 없었다.


1999년 주민등록증 갱신 시기에 나는 전국민에게 받은 지문정보를 오로지 범죄수사용으로만 쓰면서 국민 모두를 예비 범죄자로 모는 부당한 대접에 저항하겠다는 뜻에서 지문날인을 거부했다. 당시 나와 동료들의 저항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몸부림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문날인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지문 찍을 때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벌레 지나는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도 내게는 중요한 이유였다.


새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은 내게 유일한 신분증명은 여권이었다. 운전면허도 없었다. 7년 동안 여권만으로 버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교도소에 면회를 가면 현주소가 없는 여권으로는 신분증명이 안 된다는 직원들과 입씨름을 하고, 꼭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이어야 한다는 은행 직원들에게 사정사정해서 겨우 은행계좌를 틀 수 있었다. 신분 확인이 필요한 곳을 드나들 때는 아예 그곳 직원에게 나를 데려가 달라고 하기도 했다. 사는 것이 불편했다. 불편했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했으니까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


모처럼 외국에 나가 교정시설과 형사사법 절차를 살필 기회가 오니 문제가 생겼다. 유효한 신분증이 없는 탓에 여권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체제가 나를 부자유스럽게 한다면야 외국에 나가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호기를 부리는 것은 쉬웠지만, 더 큰 문제는 온통 내 이름으로 된 단체의 은행계좌였다. 인터넷뱅킹을 신청하지 않으면 3월1일부터 인터넷으로 단순한 은행잔고 검색도 못 하게 된 것이다. 바쁘디 바쁜 동료들과 내가 오로지 나의 지문날인 거부 투쟁 때문에 잔고나 입출금 내역을 확인하려고 날마다 은행 창구에 줄을 서는 것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앞으로 살아갈 일도 막막해졌다. 지금까지는 옛 여권이라도 있었지만, 여권도 주민등록증처럼 모두 바뀌게 되면, 나를 증명할 모든 방도를 잃게 되는 것이다.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지금껏 지문날인 거부 투쟁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과 의논을 해봐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동사무소에 가서 지문을 찍기로 했다. 지문만 찍으면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이 간단한 해법을 두고 머리를 싸매 쥔 것이 갑자기 우습게 느껴진다.


1968년 일련의 안보 이슈에 기댄 박정희 정권은 주민등록증, 주민등록번호라는 강력한 주민통제 기제를 만들어냈다. 따라가야 할 선진국이라는 미국, 일본에는 아예 국가신분증도 지문날인도 없었지만, 간첩 색출이라는 명분은 너무도 쉽게 먹혔다. 이 주민통제 기제는 이 땅에서 화교도 견디지 못하고 쫓겨날 만큼 강력한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그 힘은 막강했다. 결국 나는 그동안의 지문날인 거부를 중단하기로 했다. 나의 운동은 패배했다. 그렇지만 단지 지문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강요하는 체제가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다. 누구나 17살이 되면 경찰의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 지문을 찍어야 하고, 동시에 예비범죄자 취급이나 받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 이상한 통제 기제가 너무나 싫다. 그래서 더욱 오기가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