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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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힘내라!(경향잡지 2002년 11월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0 18:05
조회
360

국가인권위원회, 힘내라!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일부 종단의 신도들이 종교적 양심을 지키려고 집총을 거부하고, 대신 감옥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지만, ‘인권문제’로 부각된 것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장애인들이 길거리를 다니기도 쉽지 않고, 장애의 정도에 따라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인권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2, 3년 동안의 일이다.
이름하여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나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그 동안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데도 정작 ‘인권문제’로 다뤄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권운동가들을 비롯한 우리의 인권수준이 겨우 그 정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많은 인권문제를 만나고 있다. 임금생활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일상적인 해고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안정된 주거공간에서 생활할 권리를 뜻하는 주거권도 보호받기는커녕, 부동산은 가장 확실한 투자수단으로 취급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교육문제도 엄청난 사교육비라는 돈의 문제에 달려있다.
인권상황은 심각하지만, 우리는 이제 겨우 인권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정도이다. 제도교육에서도 도덕이나 윤리, 특히 국민의 윤리는 가르치지만 인권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권리 등 거의 모든 인권문제에서 우리는 여전히 OECD 국가들 가운데 바닥을 기고 있다.
상황은 좋지 않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우리는 국민과 함께 기뻐할 만한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되었다.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출범이다. ‘국가 = 인권탄압기구’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어두운 상황을 겪었던 우리이기에 인권보호를 전담하는 국가기구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은 낯설게 여겨진다. 그래도 1년 예산이 189억 원이나 되고, 직원도 200명이 넘는 상당한 규모의 조직이 인권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의 법적 권한이 인권단체들이 바랐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서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릴 정도의 힘은 없지만, 그래도 부지런만 떨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틀은 만들어졌다.
설립 첫날 하루 동안에만 직접 찾아와서 자신의 인권문제를 진정한 건수는 122건이었다. 업무수행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장애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 구금시설에서 이유도 모른 채 숨져간 사람의 가족, 외국인 노동자 등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왔다.
국가인권위는 이렇게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요즘 국가인권위에 자신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하루 평균 2, 3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사이 우리의 인권현실이 갑자기 개선된 때문은 물론 아니고, 진짜 이유는 초기의 기대와 달리 별다른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왜 사람들이 기대를 접고 찾아오지 않는지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인권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도 갖추지 못한 위원들이며, 연고와 정실에 따라 임용된 직원들, 조사와 인권피해 구조보다는 그럴듯한 표나는 사업(영화제작, 만화제작, 인권 콘서트, 월간지 창간 등)에만 열중한다든지 이유는 여럿이고, 또한 널려있다.
국가인권위가 제대로 일을 못하고 있다는 것은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국가로부터 단 한푼의 지원도 받지 않고, 광야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심정으로 버티고, 싸우고, 매달리는 인권단체의 입장에서는 분통터지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다. 변호사를 선임한다는 말보다는 ‘산다’는 표현에 더 익숙하고, 감옥의 재소자들은 한결같이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현실을 조롱하고, 감옥에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이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리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기존의 사법제도가 풀어주지 못한 숙제들,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많은 지식정보를 요구하기 때문에 풀리지 않았던 인권문제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국가인권위를 통하는 방법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가 인권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현직 대통령의 정치적 치장쯤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국민고충처리위원회나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다른 기구들처럼 누구도 관심 갖지 않고 별다른 일도 없는 기구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과 이웃들의 인권을 위해 실제로 일을 하고 구체적인 문제를 풀어가려면,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국가인권위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이다.
홈페이지(humanrights.go.kr)도 방문해 보고, 언론기사도 꼼꼼히 챙기고, 주권자요 납세자의 당연한 권리로 일도 시키고 비판도 하는 시민들이 늘어날 때, 국가인권위는 거듭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혜택은 고스란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오창익 루가 씨는 인권실천시민연대(www.hrights.or.kr)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