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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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범죄신고 체험기 (한겨레 06.06.23)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6:09
조회
249

주변 사람이 지갑을 도난당했다. 그날따라 수금한 목돈을 지갑에 넣어 둔 피해자들은 무척 불안해했다. 112 범죄신고를 했다. 도심의 늦은 밤인데도 지구대 소속 경찰관들은 10분이 훨씬 지나 도착했다.


경찰관들은 한마디로 구태의연했다. 피해자를 안심시키고 사건발생 경위를 묻거나 필요한 조처들을 일러주기는커녕 “카드 분실 신고했냐?”는 말이 전부다. 현장에 잠깐 머물다 아무 조처도 없이 돌아가려는 경찰관들에게 범죄신고를 하면 사건 처리가 어떻게 되냐고 물으니, 정식으로 범죄발생 보고를 하거나 아니면 그냥 기다려야 한단다. 훔쳐간 돈을 찾으리란 기대는 적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범죄발생 보고를 해달라니, 귀찮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렇다면 피해자가 직접 경찰서까지 가야 한단다. 경찰서에 가서 여러 가지 서류를 작성해야 범죄발생 보고가 된다는 게다. 한마디로 그래도 경찰서까지 가겠냐는 거다.


최근 경찰은 경찰관이 현장에서 피해자에게 간이조서를 받아 사건을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피해자 인권보호를 위한 이 진일보한 조처는 일선 4개 경찰서에서 시범 운영 중이다. 내가 목격한 절도사건은 바로 시범운영 중인 경찰서 관내에서 일어났다. 알고도 귀찮아서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지침을 모르고 있었는지 속내야 알 수 없지만, 기획부서와 일선이 따로 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경찰의 지침에 따르면 절도사건이 생기면 지구대 직원과 형사, 과학수사 요원이 동시에 현장에 출동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현장에서 수사가 진행되는 경우는 별로 없고, 사건 처리를 원하면 피해자가 직접 경찰서까지 가야 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경찰서에서 몇시간씩 피해자 진술조서를 비롯해 적게는 4가지에서 많게는 8가지나 되는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진이 빠지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범인을 꼭 검거해준다는 보장도 없다. 피의자가 특정되지 않은 형사사건의 경우, 살인 등 사회적 이목을 끄는 중요사건이 아니면 인력이 배치되지 않아 그냥 묻히기 일쑤다.


심지어 범죄가 생겨도 아예 접수를 받지 않으려는 경우도 많다. 지구대, 경찰서마다 범죄발생 건수가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방청은 경찰서별로 범죄발생 건수를 정리하고 범죄발생 건수가 많은 경찰서장을 불러다가 치안대책 보고를 받는다. 대책보고란 것도 순찰을 강화하여 범죄예방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식의 재탕 삼탕이 고작이다. 대책마련은 명분이고 실질은 꾸중을 듣고 벌을 받는 것이다. 꾸중 듣기 싫은 경찰서장은 지구대의 범죄발생 건수를 일일이 챙긴다. 상황이 이러니 명시적으로 범죄발생 신고를 받지 말라고는 안해도 범죄발생 신고 자체를 꺼리게 된 것이다. 숫자놀음에 불과한 통계치안과 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치안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된다.


성범죄 피해자가 경찰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공포에 사로잡힌 여성 피해자를 흉악범 앞에 앉혀 두고 대질신문을 하는 등의 몇몇 일탈이나 실수도 문제지만, 피해자를 위한 기본조차 없거나 사건발생 자체를 숨기려는 현실은 더 큰 문제이다.


실정이 이러니 범죄 피해를 당해도 신고를 하지 않는 시민이 적지 않다. 신고가 없으니 통계도 없지만 성범죄의 경우 열에 아홉은 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성단체의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이러한 현실의 책임은 전적으로 경찰에 있다. 진정으로 피해자의 인권을 챙길 뜻이 있다면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