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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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인권을 대신한 '대통령의 의지'(시민의신문, 060515)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6:06
조회
216

민변출신 대통령, 참여연대 출신 총리의 발언
[시민운동가 단상] 법과 인권을 대신한 ‘대통령의 의지’


2006/5/15
오창익 기자


5월 4일과 5일 이틀 동안 평택 대추리 도두리 일대에서의 군경 합동 작전으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624명이었다. 경찰이 체포된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들은 모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정당성 없는 공권력에 저항할 권리가 있지만, 백보 양보해 공무집행을 방해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은 그렇다 치자. 체포된 624명의 ‘현행범’ 중에는 단순히 대추리를 방문한 사람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현행범 아닌 죄없는 사람들을 수백명씩 체포할 만큼 당시 상황은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연행자가 너무 많아 경찰은 평택에서 연행된 사람들을 3시간 거리에 있는 파주경찰서까지 경기도 전역의 경찰서에 나눠 가뒀다. 5일 밤 체포된 사람들은 유치장이 좁아 앞서 잡혀간 사람들이 풀려날 때까지 유치장에 들어가 잠도 자지 못하고 9시간씩 버스에서 또는 경찰서 사무실 등에서 기다려야 했다. 역시 기본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찰이 이처럼 감당도 못할 대규모 인원을 체포한 것은 평택 현장에서 격리하기 위한 ‘작전’ 차원이었다. 어떻든 현행범이 아닌 사람들을 무더기로 체포한 것은 명백한 공권력 남용이고, 인권의 기본인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다.


수사과정에서도 기본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첫째 날 연행된 524명중 37명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옥석도 가리지 않은 무더기 영장 청구였다. 영장실질심사 결과 10명에게만 영장이 발부되었다. 둘째 날 연행된 98명중에는 23명에게 영장이 청구되었지만, 영장발부는 6명이었다. 검·경은 모두 60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중 44명의 영장이 기각되었으니, 기각율은 73%이다.


평소 형사사건의 경우 경찰이 영장청구를 신청하면 검사가 약 16%정도를 기각한다. 수사를 보완하라든지, 아니면 꼭 구속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평택 사건의 경우 검사가 영장을 기각한 건수는 하나도 없었다. 평균 16%가 0%가 될 정도로 검·경의 호흡은 완벽했다. 영장청구를 판사가 기각하는 것은 평균 11%정도지만 이번에는 73%였다. 앞뒤 재지 않은 무리한 수사 때문이다.


이런 충격적인 수치 앞에서도 검. 경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 아니,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검사들은 언론의 입을 빌어 “공안사건에 있어서는 법원이 행정부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며 오히려 화를 내고 있고, 정말 믿기지 않지만, 어떤 검사는 언론에 대고 “3권 분립의 정신이 이런 것은 아니다”라며 헌법을 유린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염치없는 자폐적 일탈이다.


입만 열면 인권을 강조하는 검찰과 경찰이 일하는 꼴이 이렇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조사했기에 수사가 부실해졌다면 더더욱 영장청구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10명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사람도 억울한 누명을 쓰면 안된다는 형사사법의 대원칙이 일선수사기관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검찰과 경찰이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고 망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해외 순방을 위해 출국하기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은 비서들에게 “평화적 시위는 보장하되 불법시위와 폭력행위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 말고 법과 원칙에 따라 엄격히 대처하라”고 주문했단다.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법과 원칙’을 실종시키고 ‘결코 용납하지 말고 엄격히 대처하라’는 명령으로만 여겨지게 된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평택 관련 회의를 주재하고 강경 대처를 주문하니, 검·경의 욕구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여러 겹의 감시장치를 두어도 안심하기 어려운 것이 검찰, 경찰 등의 권력기관인데, 대통령이 날개까지 달아주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것이 60명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였고, 높이 오른 만큼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처참한 결과가 영장기각율 73%였다.


민변 출신 대통령, 여성민우회, 여성단체연합, 참여연대 출신의 국무총리가 최근 평택사태와 관련해 쏟아낸 발언들은 군출신 대통령이나 장관들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강경했고, 격앙되었으며, 감정이 흠씬 배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이라곤 공권력이 대통령 1인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여러 겹의 통제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 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