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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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법원2 - 너무 문턱이 높다](cbs-r 시사자키, 04.05.03)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1:32
조회
356

인권과 법원 2 - 너무 문턱이 높다


법원에 보게 되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전근대적인 장면 하나.


보통 재판이 열리면 여러 사건을 한꺼번에 다루게 된다. 한 재판부가 여러 사건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데, 재판이 열리는 법정의 출입문 옆에는 그 시간에 열리는 재판이 사건변호와 함께 안내되어 있다.


그런데 막상 재판이 시작되면 재판의 순서는 미리 안내된 순서와는 상관없이 진행하게 된다. 형사재판의 경우 피고인이 구속되지 않은 사건부터 하고, 구속된 사건은 나중에 한다든지 아니면, 안내지에 적힌 순서대로 한다든지 하는 누구나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순서대로 재판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재판의 순서는 철저하게 변호사의 선임여부, 선임한 변호사의 출석 여부를 기준으로 진행한다. 변호사가 온 사건의 경우에는 변호사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먼저 사건을 다뤄주고, 변호사가 출석하지 않았거나 아예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경우에는 사건 관계자들이 변호사들이 참여한 재판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변호사들을 이처럼 배려하는 것은 아무런 법률적 근거도 없는 그저 “한 식구끼리 편의 봐주기”에 불과하다. 변호사만이 아니라 피고인이든, 증인, 참고인이든, 관계자의 가족들이든 누구에게는 시간은 공평하다. 변호사가 바쁜 만큼,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바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는 헌법 11조의 정신에 부합할 것이다. 그런데 법정에서는 엄연히 변호사란 특수계급이 특혜를 누리고 있다. 법정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법관 전용통로를 이용해서 물의를 빚은 대통령의 형


며칠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는 재판에 출석하는 과정에서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법관 전용 출구를 이용하여, 사회적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먼저 기사를 읽어보자.


노건평씨, 재판때 법관 전용문 이용 말썽


법원 "법정모독 가까워":


노무현 대통령의 친형 건평(62)씨가 재판에 출석하면서 취재진을 피하기 위해 법관출입문을 이용해 물의를 빚고 있다.


창원지법 형사3부는 30일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으로부터 3000 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건평씨에 대한 첫 재판을 열었다.


건평씨는 이날 오전 9시30분 창원지법 제315호 법정에서 열리는 첫 공판에 출석하면서 취재진을 따돌리기 위해 일반 불구속 피고인이 드나드는 출입문을 피해 판사들의 전용 통로를 거쳐 법관출입문으로 법정에 들어갔다. 건평씨는 재판이 끝난 뒤에도 이 출 입문을 이용했다.


창원지법 박성철 수석부장판사는 이와 관련, “이같은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며 법정 모독에 가깝다”며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 성립이 가능한지를 검토해 법관출입문사용을 안내한 박 모 법무사에 대해 징계를 하거나 직접 징계가 어려우면 법무사회 에 징계를 요청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건평씨의 법관출입문을 안내한 것으로 지목된 박 법무사는 “언론에 시달린 건평씨의 입장을 감안해 변호인이 배려한 것 같다”며 “본인이 주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문화일보 5.1)


이런 유의 기사와 함께 여러 신문들은 노건평씨의 특권의식을 꼬집는 사설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노건평씨가 남 전사장의 죽음에 대해 겸허해져야 하는 것도 맞고, 대통령의 형으로서 적절하지 못한 처신을 한 것도 맞고,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잔꾀를 낸 것도 맞다.


그런데 법정에 가기 위해서 왜 일반인들과 법관들은 다른 통로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는지, 법관들은 왜 법관전용 통로를 거쳐 법관 출입문으로 법정에 들어가야 하는지, 꼭 그렇게 해야만 법의 권위가 바로 서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아래 사진은 대법원 홈페이지에서 따온 일반적인 법정의 풍경이다.



사진을 보자. 법관이 앉은 자리를 흔히 법대(法臺)라고 하는데, 이 법대는 권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에 배치되어 법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올려다보도록 배치되었고, 법관은 자신이 아닌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모두들 올려다보고, 법관은 모두를 내려다보도록 배치한 것은 전형적인 권위주의 자체이다.


법관 앞(밑)에는 서기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변호사들이, 왼쪽에는 검사가 앉아 있다. 그 뒤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구속피고인들이고, 뒤에 제복입은 교도관들과 방청객들이 보인다. 피고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면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공판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재판에서의 최소한의 발언마저 제지당하는 상황에서 피고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대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며,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들 통로를 이용했다고 법정모독, 공무방해인가


법이 권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권위가 국민들은 그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가운을 입고, 법관 전용통로와 법관전용출입문을 통해 법정에 들어오고, 자신이 들어올 때 검사, 변호인, 피고인, 방청객이 모두 일어나서 경의를 표하는 기립을 하고, 높디높은 법대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하는 것으로 지켜지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겉모습의 권위 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오지 않고,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보장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배움이 많지 않다고 해서 특히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고 해서 차별을 받지 않고 재판을 받으면서 우러나는 권위, 원칙에 충실하며 봉사하는 권위가 진정한 권위가 아닐까.


법관들이 형식에만 얽매여 시대상황에 전혀 걸맞지 않은 우스꽝스런 권위에만 연연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노건평씨의 해프닝에 대해 “법정 모독에 가깝다.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성립이 가능한지 검토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법원의 태도보다는 정말 화내야 할 일에 화내는 법원의 모습이 보고 싶다.


국민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폐쇄적인 법원


법조인들 중에서도 가장 높고 귀한 분들이 바로 법관들이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때, 가장 성적이 좋았던 그룹답게 자존심도 강하고, 법의 지배를 관철하고, 법정의를 수호하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 대법원의 모토는 “국민을 위한 사법”이지만, 이것이 구호를 넘어서 실질이 되고 있다고 믿는 국민의 거의 없다. 대법원 홈페이지를 통해 만날 수 있는 대법원장은 사법부에 대해 “우리 사법부는 그동안 사법조직의 개편과 재판제도의 혁신, 그리고 사법운영의 현대화를 통하여 국민을 위한 사법으로 거듭나고자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사법제도의 참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힘입은 것으로 생각하며, 앞으로도 계속 우리 사법의 발전에 아낌없는 충고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의 사법현실이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지에 대해서 국민은 전혀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홈페이지 인사말이란 것이 대부분 덕담 수준의 이야기지만, 대법원장 스스로 세계적 수준이라고 평가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고치겠다고 “사법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 중인지 묻고 싶다. 또한 “앞으로도 아낌없는 충고와 협조를 부탁”한다면서 홈페이지에 민의를 수렴할 게시판조차 만들어놓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듣지 않겠다고 귀를 막아버린 것은 대법원만이 아니라, 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등 어느 곳을 가나 마찬가지였다. 민의를 수렴하는 곳은 대법원 사법개혁위원회 코너가 유일한데, 이마저 국민들의 의견을 자신들만 볼 수 있게 비공개로 운영하고 있었다.


주인과 아전과의 관계


국민과 법관의 관계는 간단하게 설명하면 주인과 아전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전이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법복 입은 귀족으로 행세하려는데 있다. 이들은 1948년 정부 수립이후, 헌정질서가 요동치는 가운데도 한번도 역사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들이 높고 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하루 16시간의 장시간 저임금의 처지에서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를 팔아 가족과 국가경제를 부양한 자랑스러운 노동자도 아니고, 역사가 질곡에 빠졌을 때 감옥에 갈 각오를 하면서 진리를 증언한 용감한 법률가들도 아니었다.


단지 열심히 공부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합격한 다음에도 게으르지 않아서 연수원 졸업할 때 성적이 좋았을 뿐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자격을 따기 위한 자기 공부에 불과한 것이지, 사회나 역사발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법관들은 높은 곳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런 식의 대접은 국민들이 “수고가 많다”고 해주는 대접도 아니고, 그저 자신들만의 카르텔과 법적 권능으로 무장한 법관들의, 법관들을 위한, 법관들에 의한 대접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법치, 그러나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법원


국민들이 법원에 의해 차별받지 않고, 법원에 의해 제대로 된 주인 대접을 받기 힘든 현실은 사실 법원 내부의 비민주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가장 큰 문제는 법관이 대법원장부터 일선 말단 판사까지 하나의 순번으로 매길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서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도 학급회장을 선거로 뽑는데, 법치주의 핵심인 법원에는 내부에서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는 최소한의 기능도 없다. 오로지 모든 인사는 인사 ‘명령’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이같은 구조는 법관들에게 획일화를 강요하는 측면으로 기능하고 있다.


재판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법관들은 내부적으로는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도 진행하지 못하면서, 법원 외부에 대해서는 집단 이기주의에 근거한 한없이 근엄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법원은 법의 안정성이 필요하다며 자신들의 결정에 아무런 결점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잘못된 증거가 제시되었어도, 자백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도, 피고인이 진범이라는 확신이 없어도 재판은 법원의 판단대로 결정되고, 한번 결정되면 그 누구라도 뒤집지 못한다.


재판이 인간사에서 아무리 중요한 활동이라고 해도, 따지고 보면 “그저 사람이 하는 일”에 불과하다. 법원의 ‘사법무결점주의’는 “사람이 하는 일”이란 전제를 무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법관이 하는 일은 잘못된 일도 없고, 결점도 없다. 따라서 번복할 수도 없다고 버티는 법원의 완고한 태도를 고치지 않고서는 사법개혁의 의미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국민이 바라는 사법개혁


국민들 입장에서는 법학전문대학원, 로스쿨 등 법조인력을 어떻게 양성할지가 궁금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원이 얼마나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지, 법원이 가난한 사람,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얼마나 안전한지이다.


누구도 아무 때나 자기들 편할 때 불러다가 재판하고, 재판기한도 몇 달이고 몇 년이고 할 것 없이 자기들 편의대로 하고, 일단 판결이 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뒤집을 수 없게 만든 완고함을 ‘서비스’라고 부르지 않는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대법원 스스로 모토로 내세우고 있는 바로 ‘국민을 위한 사법’이고, 사법에 의한 서비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