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오창익의 인권이야기

버마사람 뚜라씨 이야기(경향잡지, 06년 9월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6:27
조회
281

버마사람 뚜라씨 이야기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올해 서른 다섯의 총각 뚜라. 정권을 차지한 군인들이 나라이름까지 미얀마라 바꾼 버마에서 왔다. 버마의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에는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1994년에 들어왔다. 한국에 와서 선반, 금형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는 했지만, 돈을 벌었던 것은 초기 5년 남짓뿐이었다. 나머지 세월은 오로지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만 했다. 이를테면 직업적 민주화운동가라고나 할까. 버마행동(Burma Actoin Korea)의 대표가 그의 직함이다. 말이 그렇지 아무런 연줄도 없는 외국에서 돈벌이도 하지 않으면서 지내기는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


 


사실 한국에 올 때부터 돈벌이가 목적은 아니었다. 학생운동을 하다 군부의 탄압을 피해 1년 동안 숨어지내기도 했던 터라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집회와 시위는 물론, 학생들 사이의 작은 모임을 여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뚜라가 한국을 찾은 1994년 8월은 군부정권과 아웅산 수치 여사 사이에 정치협상이 진행될 때였다. 결과적으로 군부와 수치여사와의 평화협상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당시 뚜라는 2년 정도만 있으면 버마 민주화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 생각했다. 외국에 나가 경험도 쌓으면서 지내다보면 머지 않아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잠시 정치적 박해를 피하고 견문이나 넓혀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한 한국 생활은 꼬박 12년이 되었다. 20대 초반이 30대 중반이 될만큼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의 조국에는 아무런 긍정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산업연수생 신분은 불법 체류자로 변했다. 2004년 5월 법무부에 난민지위인정 신청을 했지만, 한국 정부는 아직 답조차 하지 않고 있다. 불안한 신분과 번역 아르바이트 따위에 기대야 하는 경제적 궁핍을 생각하면 현실은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처럼 보인다.



모두들 돈을 쫓거나 돈에 쫓기며 사람대신 돈이 주인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낯선 타국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십수년 동안 풍찬노숙을 마다않는 그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조국의 문제가 왜 다른 많은 행복을 포기할 정도로 중요하냐고 묻자 그는 어렸을 때부터 폭력이나 억압적인 분위기에 대한 반감같은 것을 갖고 있었단다. 단지 폭력에 대한 반감 정도를 갖고 있던 그는 다른 무엇보다 폭력적인 버마의 현실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투사가 되었다.


그를 망명 투사로 만든 조국의 현실은 참담하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잇단 군부 쿠데타로 지금까지 군부의 독재가 자행되고 있다. 군부 독재는 자원의 보고인 버마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반인륜 범죄를 자행하였다. 버마에서의 인권탄압은 마치 인권탄압의 백화점을 보는 것 같다. 미성년 아동의 강제 노동, 8살에서 11살밖에 안되는 어린이들에 대한 소년병 차출, 군에 의한 식량 약탈, 여행, 통신, 집회, 언론, 출판, 심지어 종교의 자유 금지, 거래와 계약의 금지로 인한 최소한의 식량 이동 등의 차단, 무차별적 강제노동, 초토화작전을 연상케하는 소수 민족에 대한 강제이주, 집단 강간, 인신 매매, 불법 감금, 고문...


 


5살 이하의 아동 사망률이 1천명당 109명에 이를 정도로 현실은 참혹하다. 길거리에서 정부가 금지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든지, 정부의 허가 없는 인터넷 접속을 했던 외국인이 형식적인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든지 하는 사례들은 적어도 버마에서는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군인들에 의해 길거리에서 즉결처분을 당하지 않고, 최소한 재판이라는 요식절차는 거쳤기 때문이다.


뚜라는 외국에서의 고단하고도 궁핍한 삶을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에서 오래 살았기에 한국을 그나마 이해할 수 있고, 한국말도 잘 하는 자신이 전업운동을 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한국사람들의 부지런한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게 구는 모습도 너무 많이 봤다는 쓴소리도 잊지 않는다.


 


뚜라가 보기에 한국사람들은 아시아에서도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산업발전이나 민주발전이나 다른 아시아 사람들에겐 놀라운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을 깔보고 인색하게 구는 모습만 극복한다면 참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장이라도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자신도 어려운 처지인데도 뚜라는 버마 국경 주변 난민촌의 어린이들이 최소한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마치 희생제물처럼 기꺼이 내어놓고도 또 내놓을 것이 없나를 고민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백범 김구 선생 등 식민지 시절 외국에서 간난고투를 마다하지 않았던, 몇푼의 임금은 커녕,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선인들의 얼굴을 본다. 국적과 민족은 달라도 아름다운 사람이 우리들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같은 시절에는 큰 기쁨과 위로가 된다.